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리라이팅 클래식 15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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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의 주체이며 생존의 수단이기도 한 몸. 원시사회에서 몸과 현대 사회의 몸은 전혀 다르게 인식된다. 몸에 대한 미적 기준이 달라졌을 뿐만 아니라 신체적 능력에 대한 중요성도 달라졌다. 근대 이후 질병에 대한 관점은 그 이전과 확연히 달라진다. 병원이라는 분리 공간이 생기면서 감시와 관찰의 대상이 된 것이다. 미셀 푸코는 『광기의 역사』를 통해 정신 질환에 대한 서구 사회의 편견을 드러낸다. 이성 중심의 서구 사회가 포용하지 못하고 철저하게 격리, 배척했던 역사를 통해 질병에 대한 음험한 시선을 유추할 수 있다.

17세기는 진실의 상실에서 광기를 발견했다. 즉, 자연이 아니라 자유에 속하는 인간에게서 각성과 주의력의 역량만이 문제시되는 온통 부정적인 가능성을 발견했다. 18세기 말은 광기의 가능성을 환경의 구성과 동일시하기 시작한다. 즉, 광기는 잃어버린 자연이고 빗나간 감성, 욕망의 일탈, 척도를 박탈당한 시간이며 매개의 무한 속에서 상실된 직접성이다. - 미셀 푸코, 광기의 역사, 586

이성 중심의 서구 사회는 몸에 생긴 모든 질병을 분리와 치료의 대상으로 보았으며 서양의학은 세포단위로 환원하여 끝없이 세분화하여 처방한다. 해부학의 발달로 우리의 몸은 개인적인 특성과 분리되어 표준화 일반화된 과학적 분석의 대상이 되었고 매뉴얼에 따라 동일한 방식으로 처리된다. 다양한 의료기기의 발달과 의술의 발전은 새로운 질병을 끊임없이 발명해 내고 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어떤 사람도 병원에 가서 정밀 진단을 받아보면 ‘정상’의 범위에서 벗어난 부분이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 모두는 넓은 범위의 ‘환자’로 살아간다. 임신되는 순간부터 산부인과의 도움은 시작되며 의사의 사망선고로 공식적인 생을 마감한다. 우리는 몸의 주인인가, 아닌가. 어떻게 하면 내 몸의 주체적 주인이 될 수 있으며 어떤 관점으로 몸과 병의 관계를 살펴야 할 것인가.

전통적 직업개념으로 규정할 수 없으나 가장 자유롭고 진정한 의미의 공부를 실천하며 살아가는 고미숙이 이번에는 몸에 관심을 가지고 『동의보감』을 이야기한다. 그린비의 리라이팅 열 다섯 번째 시리즈로 나온 이 책은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라는 부제로 요약되어 있다. 의학에 대한 관심과 접근이 아니라 우리의 몸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식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 같다. 5편(篇) 106문(門)으로 구성된 허준의 역작을 활용하는 방법과 관점은 다양할 것이다. ‘고전’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방식과 다양한 관점을 갖춘 고미숙의 해설은 동의보감이 주는 새로운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고전은 언제나 현재적 유용성을 가질 때만 의미가 있다. 우리가 잊고 있는 몸의 중요성에 대해 각성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책이 아니라 몸을 둘러싼 모든 것들에 관심을 갖게 하는 책이다. 우리의 몸은 개별적 존재로 살아온 환경, 먹었던 음식 그리고 체질과 생활조건이 다르다. 그렇다면 병의 원인과 치료 방법도 조금씩 달라야 하지 않을까. 콧물이 흐르고 두통이 있고 몸살 기운이 생겨 병원에 가면 한 번에 한 숟가락쯤 되는 약을 지어준다. 감기는 약을 먹으면 일주일 안 먹으면 7일 이라는 말이 있다. 균형과 리듬이 깨진 몸을 돌보라는 신호라는 뜻이다. 심한 경우 합병증이 생기고 심각해 질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에 환절기만 되면 병원은 문전성시를 이룬다. 기계적인 방식으로 병을 치료하고 건강을 지켜나갈 수는 없다.

의학은 일반인이 접근할 수 없는 신성한 영역처럼 그들만의 암호가 오고가고 언제부터인가 의사는 가장 선호하는 직업이 되었으며 의료산업에서 책정되는 가격은 아무도 적정가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비싼 의료 장비와 수많은 검사와 검사료, 적절성을 상식적으로 판단하기 힘든 수많은 수술요법과 치료약들……. 예를 들어 고미숙은 자궁 적출 수술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자궁 근종 등 여성 질환의 경우 질병의 근원 자체를 없애버리는 수술을 시행하는 데 이것은 원천 봉쇄의 오류가 아닌가. 임신여부와 무관하더라도 자궁은 필요 없는 기관인가를 묻고 있다. 저자가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은 지나친 것은 모자란 것만 못하다는 한마디이다. 과잉진료, 과다복용은 자연치유보다 오히려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우리의 몸은 오늘도 안녕한가.

전체 8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동의보감』과 허준에 대해 상세히 알아 본 후에 『동의보감』의 구성과 내용을 전체적으로 조망한 후 여성의 몸을 살피는 것으로 끝난다. 책 뒤에 함께 읽으면 좋은 책들을 저자가 직접 소개하고 있다. 본문 내용에서 자주 인용했고 『동의보감』과 허준에 대해 보다 상세한 내용이나 다른 관점으로 접근하고 있는 책을 더 참고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방식의 소개는 독자에게 큰 도움이 된다. ‘정精•기氣•신 神’으로 구성된 우리 몸의 비밀과 음양오행으로 풀어낸 오장육부의 신비 그리고 병과 약의 관계를 순서대로 재미있게 풀어내는 솜씨는 고미숙의 가장 큰 장점인 즐겁고 유쾌한 글쓰기 방식에서 비롯된다.

한 권의 책에서 깊이와 넓이를 모두 담보하려는 욕심만 버린다면 우리는 한 권의 책을 자신의 관점과 비교하며 즐겁게 읽을 수 있다. 단순히 새로운 정보를 얻고 앎의 세계를 넓히거나 다양한 관점을 얻는다는 추상적인 목적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지금 내 삶의 방법과 관점을 조율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것이 바로 책이다. 고미숙의 책은 ‘근대’에 대한 관심을 넘어 열하일기를 주유하고 공부와 사랑과 공부를 넘어 이제 몸속으로 뛰어들었다. 제한된 틀과 제도권에서 벗어난 고미숙의 삶과 공부에 언제나 부러움을 느낄 뿐이지만 그 결과물인 책과 생각을 공유할 수 있어 다행이다. 최근 감이당을 개설하고 ‘수유+너머’와 결별을 선언한 이후에 활동도 주목된다. 고미숙의 책은 언제나 즐거운 여행과 같다. 늘 새로움과 자유로운 세계를 안내 받고 싶은 욕심이다. 『동의보감』에서 시작된 몸에 대한 관심과 공부를 조금 더 깊이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이 책은 제 역할을 다 한 것이다.

편작에서 융까지, 치유본능에 충실한 의사들의 전언은 한결같다. “병을 만든 것도, 그 병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것도, 그리고 그 병을 치유할 수 있는 것도 여러분 자신입니다. 그러니 자기 자신의 의사가 되십시오!” 그리고 그것은 이 기나긴 여정을 이끌어 준 우리들의 멘토인 허준의 전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곧 정기신의 발현이자 존재의 원초적 명령이기 때문이다. - 438쪽


2011112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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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연금, 보험, 저축을 능가하는 노후대비'책'
    from 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2012-10-24 17:50 
    '두통에는 진통제', '우울증엔 항우울제', '불면증엔 수면제'라는 것이 공식처럼 각인되고 있다. 그러나 시댁과 갈등을 겪는 전업주부의 두통과 학습우울증에 걸린 청소년의 두통이 과연 같은 질병일까. 또 시댁과 갈등을 겪는 주부에게 어깨 결림, 두통, 불면증, 소화불량, 생리통이 동시에 나타났다면, 이는 각각 정형외과, 신경과, 정신과, 내과, 산부인과에서 따로 해결해야 할 병일까. ─강용혁, 『닥터K의 마음문제 상담소』, 12쪽 예전에 손발이 너무..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 - 미천한 것, 별 볼일 없는 것, 인간도 아닌 것들의 가치와 의미
이진경 지음 / 휴머니스트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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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성이란 어떤 뜻밖의 만남에서 느끼는 ‘저들’의 기분이다. 위대함과 탁월함의 찬양자들, 자신의 고상함과 고매함을 자랑삼는 자들, 자신이 세상의 주인이며 세상을 지배한다고 믿는 자들, 바로 그런 자들이 어떤 당혹스런 만남 앞에서 느끼는 감정이다. - 21쪽

언어는 사유의 도구이다. 그것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도 사유의 범위와 한계가 다르다는 의미이다. 언어의 한계가 사유의 한계라는 말은 자신의 존재는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로 규정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 존재는 우리말 ‘있음’으로 해석될 수 있으나 영어의 ‘be’, 독일어의 ‘sein’과는 용법상 차이가 많다. 그래서 우리에게 ‘존재론’이 낯설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는 변명이 가능하다. be 동사가 없는 한국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읽으면서 ‘존재론’을 처음 만났지만 쉽게 그 개념이 잡히지 않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두려움은 원시시대부터 인간에게 유전되어온 오래된 기억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탐구와 사유의 대상이지만 좀처럼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 아득함이기도 하다. 이진경의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은 ‘이진경’과 ‘존재론’의 결합이 아니라 ‘불온한 것들’에 초점을 두어야 하는 책이다. ‘존재론’이라는 뜬구름에 도전하는 ‘이진경’은 철학자가 아니다. 다만 그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 펴낸 책과 사유의 폭을 수용한다면 이 책은 무엇보다 ‘재미(?)’ 있을 수 있다. 어떤 재미를 찾을 것인지는 물론 각자의 몫이다.

그래서 이 책의 시작은 ‘불온성’에 대한 저자의 정의로부터 시작된다. 뜻밖의 만남에서 느끼는 ‘저들’의 당혹스런 감정이라는 정의에는 많은 함의를 포함한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의문이 들기 시작한다. ‘저들’에게 불온한 것이 ‘우리’에게는 불온하지 않는가. 이것은 단순한 편가르기가 아니다. 저자의 대전제에 포함한 음험함을 간파하고 기꺼운 마음으로 동참할 생각이 있거나 얼떨결에 그의 이야기에 말려들거나!

내가 어느 쪽에 있든, 아니 어느 쪽에 속하는지도 몰라도 깊은 가을 진지한 질문과 사색을 즐기기를 원한다면 일독을 권할 만한 책이다. ‘이진경’에 대한 믿음과 ‘불온한 것들’에 대한 호기심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구성은 단순하다. 불온성에 대한 개념과 정의로 시작한 후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밝힌 다음 장애자, 박테리아, 사이보그, 온코마우스, 페티시스트, 프레카리아트에 대해 분석한다. 총론과 각론의 결합인 기본적인 구성을 통해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존재론에서 벗어나 불온한 것으로 관심의 초점을 이동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앞서 언급한 불온한 것들에 대한 호기심에서 ‘나’의 존재론으로 이동이며 나와 관계 맺은 ‘너’와 ‘세상’에 대한 관심에서 인식론과 가치론으로 이동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아니면 말고.

존재론은, 그 추상적인 말과는 반대로 가장 구체적이고 가장 정치적인 사유의 장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존재와 같은 추상적 단어로 많은 것을 대체하며 가리는 경우조차 만약 그 사유나 주장이 제대로 전개된 것이라면,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존재론은 자신의 사유를 걸 존재자들, 자신이 맨 처음 시선을 던진 출발점이 무엇인가에 따라 아주 다른 방향, 아주 다른 형태의 궤적을 그린다. - 352쪽

‘출구 혹은 입구’라는 부제의 에필로그에서 저자의 ‘존재론’이 비로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존재는 존재자에 의해 결정되며 자신의 사유를 걸 존재자에 따라 아주 다른 방향과 궤적을 그리게 된다. 즉, 존재론은 자신의 삶의 방향성과 궤적에 대한 성찰이며 인과론적 차원에서 맨 처음 시선을 던지게 되는 우연과 조우하게 되는 순간의 깨달음인 것이다. 저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그것은 허망한 성찰보다 뚜렷한 존재론적 접근 방식이라고 굳게 믿는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마주치는 마이너스 존재들: 장애자, 박테리아, 사이보그, 온코마스, 페티시스트, 프레카리아트에 대한 이해와 새로운 접근 방식은 각론의 재미이다. 도구를 사용하여 원하는 결과를 얻은 원시인이 최초의 사이보그라는 주장은 신선하지 않은가. 책표지에 한 사람의 그림자가 물구나무선 모습은 책을 읽는 동안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그것은 낯설음에 대한 요구이며 새로운 시각에 대한 지속적인 충고로 들린다.

한 권의 책에서 무엇을 읽어내든 독자의 몫이라는 무책임한 말이 아니다. 이해의 폭과 넓이를 어디까지로 설정할 것인가. 스키마의 정도와 주체적인 수용능력을 일일이 표시할 수도 없다. 때로는 부딪치고 깨지고 헤롱대며 수용할 뿐이다. 그렇게 책장을 덮으려던 순간에 저자가 친절하게도 한마디 던져줄 수도 있다. 아니 그의 내밀한 의도를 언뜻 엿보일 수도 있다. 불온한 것들과 친구가 되라고, 그것은 낯설고 불편한 것들과의 만남이며 새로운 인식의 출발이라는 것을.

불온한 것들과 친구가 된다는 것은 낯설고 불편했던 것들에 익숙해지고 편안해지는 것만은 아니다. 반대로 익숙해지는 것보다 빠르게 그것들과 다시 낯설어지고, 익숙했던 것들마저 다시 낯설고 불편하게 만나는 것이다. - 358쪽


111101-0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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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에 읽는 손자병법 - 내 인생의 전환점
강상구 지음 / 흐름출판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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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을 읽는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먼저 공시적 관점으로 당대의 정치, 사회, 문화를 한 눈에 조망해 볼 수 있고 다양한 관점으로 역사를 조망할 수 있다. 통시적 관점에서 현재적 유용성을 들 수 있다. 모든 책은 고전의 해석에 불과하다는 과장된 말처럼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면 인류의 사유방식과 인간의 근본적인 삶의 문제는 이미 먼지 묻은 책 속에 담겨 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삼갈 것은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과 기존 지식에 대한 믿음이다. 보편타당한 이론이나 절대불변의 진리,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상식이라고 믿었던 모든 일들이 일순간 무너지기도 하고 가치와 사유방식의 혼란이 오기도 하며 삶의 목표와 의지가 흔들리기도 한다. 고전은 우리에게 시간을 견뎌낸 힘을 보여준다. 그것이 고전이 된 이유이며 여전히 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

강상구의 『마흔에 읽는 손자병법』은 ‘손자병법’에 대한 저자의 생각과 해석을 보탠 책이다. 마흔이라는 나이는 별 의미가 없을 수도 있겠지만 저자가 경험한 세상에 나름의 해석일 수도 있다. 모은 사람이 책을 읽는다면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는 옛 성현의 말씀처럼 책은 한 사람의 주관적 견해에 불과할 수도 있고 그저 세련되게 정리된 지식의 창고일 수도 있다. 저자의 생각과 나의 경험 책의 내용에 대한 해석과 소통이 이루어질 때 그 책은 비로소 하나의 의미가 된다.

‘손자병법’은 3,000년의 세월을 견딘 책이다. 군인이 아닌 일반인들에게 이 책은 세상을 살아가는 사유의 틀을 제공한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세상을 통치하기 위한 ‘군주’를 위한 책이라면 ‘손자병법’은 싸움의 비술을 전하는 책이다. 가장 치졸하고 비열한 방법부터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세상을 살아가는 데 지혜를 빌릴만한 이야기까지 다양한 방법들이 소개되고 있다. 원전의 전체 내용이 전쟁을 위한 방법을 가르치는 군사학 교범과 다른 이유는 공시적 관점으로 풀어야 한다.

말 그대로 춘추전국시대를 떠올려 보자. 일대일로 맞짱 뜨고 다음 선수를 기다려 최후의 승자를 가리는 게임이 아니라 수많은 상대‘들’과 싸우며 살아야 하는 세상이다. 그것은 적과 싸워 이기면 되는 전쟁이 아니라 상대를 끌어안아야 하는 시대를 말한다. 죽여 없애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그런 후에는 또 다른 적과 싸워야 한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전쟁의 연속이다. 당대의 역사적 상황은 이 책의 의미를 새롭게 한다.

공존과 상생. 이 책이 전하는 지혜를 현재의 의미로 해석한다면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까. 병법서에서 공존과 상생을 읽어내는 것은 독자의 아둔함일 수도 있으나 싸움이 아니라 전쟁의 목적은 살인이 아니라 통치에 있기 때문이다. 없애는 것이 아니라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 전쟁이라면 싸우지 않고 이기는 방법이 최선이다.

1장 시계始計부터 13장 용간用間에 이르기까지 원전을 소개하고 저자가 해설하는 방식의 책이다. 해설은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듯이 저자는 ‘손자병법’을 설명하기 위해 ‘삼국사기’를 예화로 활용한다. 이순신의 ‘난중일기’가 ‘삼국사기’ 못지않게 많이 인용된다. 전쟁다운(?) 전쟁을 해보지 않은 우리의 역사에서 병법의 예화로 쓸 만한 내용을 찾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 같다. 그러다보니 삼국사기와 난중일기를 넘나들고 단편적인 전쟁 상황들이 나열되어 일목요연하거나 하나의 맥락을 잡으면서 읽기는 힘든 책이다. 앞에 언급했듯이 당대의 상황을 얼마나 이해하고, 현실의 접목 가능성이 어느 정도 될 것인가는 고스란히 독자의 몫으로 남는다. 거꾸로 생각하면 장별로 단편적으로 끊어 읽기 좋을 수도 있다. 책은 언제나 저자의 가르침이 아니라 독자와의 대화라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이 책을 읽는 방법 또한 다양할 수 있을 것이다.



111007-0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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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할 권리 - 욕망과 좌절사이에서 비틀거리는 21세기적 삶
마이클 폴리 지음, 김병화 옮김 / 어크로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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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은 고통이 없는 상태를 행복이라고 했다. 모든 것이 만족스러운 상태를 행복이라고 볼 수는 없다는 말이다. 행복의 최소 기준을 제시한 것처럼 보이지만 손에 잡히지 않는 모호한 말이다. 고통이 없는 상태라면 개인마다 느낌이 다르고 고통이라고 생각하는 감정의 기준을 제시할 수도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늘 인생의 목적을 ‘행복’에 두고 있다. 행복한 인생은 무엇이며 어떻게 가능할까. 수많은 철학자들이 인생의 목적과 삶의 지향점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판단과 기준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은 언제나 늘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행복은 스스로 만들어가는 거라는 뻔한 말이 아니라 목적과 지향점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가만히 서서 맞는 바람이 아니라 산을 오르고 땀이 배어날 무렵 등 뒤에서 부는 바람을 우리는 행복이라 부른다.

인간이 행복할 권리 따위는 없다는 말을 받아들이기 힘들다면 ‘행복할 권리’도 말할 수 없다. 없다. 마이클 폴리의 『행복할 권리』는 ‘행복’을 사기치지 않는다. 행복해지는 비법이나 행복해지기 위한 자기계발서가 아니다. 인생은 부조리하며 행복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고 비꼰다. 맞는 말이 아닌가. 헌법에 보호된 권리는 ‘행복할 권리’가 아니라 ‘행복을 추구할 권리’이다. 말장난인 듯 싶지만 그 의미는 깊이 새겨볼 만하다.

저자는 이 책에서 행복은 직접 추구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것에 대한 집착을 끊고 다른 일에 몰두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무엇이라는 것이다. 미하이칙센트 미하이는 『몰입의 즐거움』에서 하루 중 탈아(脫我)의 시간이 길수록, 몰입하는 만큼 행복한 사람이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마이클 폴리가 말한 것도 그 시간이 가져올 결과물이 아니라 과정에서 얻어지는 부산물이 바로 행복이라고 말하고 있다.

행복한 상태란 어쩐 지점이 아니라 하나의 범위, 맨 밑바닥에는 만족감이 있고 맨 위에는 고양감이 있는 범위이다. 달리 말하면, 행복은 하나의 상태가 아니라 과정이고, 계속 노력하는 것이다. - 13쪽

우리는 행복의 부조리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삶의 목적이 될 수 없는 행복. 그러나 끊임없이 행복을 추구하는 우리는 조금 다른 시각에서 행복을 바라보아야하지 않을까 싶다. 혼란스런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행복은 타인으로부터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자명한 논리부터 인정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저자는 이 책에서 ‘당신이 찾는 행복은 없다’는 말로 시작한다. 14개의 챕터에서 다양한 인문학적 교양서와 저자의 깊은 성찰을 통해 행복에 대해 설명하고 궁구하고 고민한다. 마찬가지로 독자들도 저자의 뛰어난 통찰을 통해 행복이란 무엇인가 결론을 얻어낼 수 없다. 책을 읽는 과정에서 각자 행복에 이르는 길을 따라 걸어볼 뿐이다. 누군가 무엇인가 주어지는 행복은 순간의 찰나에 불과하다. 지속한 가능한 행복은 스스로 찾아가는 먼 여행과도 같은 것이다.

한 평생을 살면서 분노와 좌절은 자주 경험하지만 허무와 무기력을 경험하기는 쉽지 않다. 우울과 자살에 이르는 지름길이다. 죽을 힘으로 살아보라는 무책임한 말을 하는 사람들은 그만한 고통을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할 수밖에 없는 답답함이나 견딜 수 없는 모멸감, 자신도 모르는 사실들이 목을 조여올 때 행복은커녕 죽음을 생각하게 된다.

'매시간은 마지막 시간일 수 있다면 그것은 최초의 시간만큼 아름다울 것이다.' - 349쪽

이제 매시간 마지막 삶이라고 생각하며 여유를 가질 시간인가 보다. 행복은 치열한 삶과 열정 그리고 삶의 성취와 결과물이 주는 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은 믿는 대로 보이고 인간은 경험한 만큼 성숙해진다. 우리는 매시간 성장하며 고통 받고 그 고통을 통해 실낱같은 생의 희망을 건져올리기도 한다. 그러나 때때로 그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닐 때도 있는 법이다. 마치 바로 곁에 놓여 있는 보이지 않는 공포처럼.


11060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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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십대의 탄생 - 소녀는 인문학을 읽는다 다른 탄생 시리즈 1
김해완 지음 / 그린비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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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공부가 다른 삶을 살게 한다는 말을, 앎이 곧 자유라는 말을 믿는다. 이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내가 발 딛고 있는 소박한 삶에서 나온 믿음이다. - 12쪽

2010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학생의 89%, 학부모의 93%는 “4년제 대학 이상의 학력은 갖춰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그 목적은 당연히 ‘좋은 직장’ 때문이다. 사회, 문화적 상황을 무시한 채 단순 비교는 무의하지만 고교졸업자의 83%가 대학에 진학하는 나라 대한민국의 학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공부’라는 말을 지겹게 듣고 산다. 대한민국은 언제나 ‘공부중’이다. 그런데 무슨 공부를 하고 있을까?

공부는 당연히 ‘국영수’ 중심이고 수능이 그 절정을 이룬다. 스무 살이 넘으면 각종 고시와 입사시험이 또 한 번 사람들의 운명을 결정한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는 대한민국의 저력은 ‘고급 인적자원’에서 나온다. 그러나 진짜 공부가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는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은 채 오로지 한줄 서기 경쟁과 객관식 찍기 시험에 목을 맨다. 최근 들어 수시와 입학사정관제로 입시가 다양화 추세를 보이고 서술형 평가의 도입으로 과거의 문제점들을 조금씩 해결하려는 노력이 보인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삶의 목적과 방법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방향성이 없는 교육으로는 먼 미래를 내다보기 어렵다.

다양한 대안 교육이 실험되고 교육에 대한 난상 토론이 이어지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교육은 당연히 사회의 일부가 될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의 지향점, 권력과 자본의 획득 과정과 사회의 구조적 모순들이 함께 논의되지 않으면 ‘좋은 직장’을 위해 오로지 ‘국영수’만 공부하는 교육과정도, 학교교육도 조금 달라지지 않을까?

중졸 백수 김해완의 『다른 십대의 탄생 : 소녀는 인문학을 읽는다』를 읽다가 여러 번 가슴이 미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단순한 감동이나 깨달음과 다른 무엇이다. 대안 학교를 거쳐 백수로 살아가는 93년생 해완이가 느끼는 교육과 사회, 사람과 세상은 그대로 우리를 비추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또한 또래 아이들과 비교할 수 없는 책읽기와 글쓰기를 통해 탄탄한 내공을 쌓아가는 모습이 너무 부럽기 때문이기도 하다. 가슴 한 구석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오는 느낌을 주는 이 책을 나는 누구에게 함부로 권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

대부분 대한민국의 공교육은 대학입시를 위해 존재한다. 그것이 공공연한 목적이며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것 같다. 우리는 진짜 대학을 가려고 16년을 공부해야 하는 것일까? 대학에 가면 또 어떤 현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가. 살인적인 등록금과 보이지 않은 스펙 경쟁, 높고도 험한 정규직을 향한 싸움 그리고 결혼과 내집 마련, 육아와 교육 문제의 순환 고리 속에 우리들의 삶은 철저하게 끼워 맞춰진다. 경쟁에 뒤질세라 남들보다 뒤처질세라 1분 1초를 아껴 오늘도 우리 아이들은 국영수 공부에 목을 매는 현실을 보자.

이런 현실에서 김해완의 책은 피아를 식별할 수 없는 전쟁터에서 0.5초간 온 세상의 움직임을 멈추게 하는 진공 효과를 가져온다. 도대체 이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연구공간 수유 너머’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는 김해완의 생활과 그곳에서 길어 올린 인문학적 깨달음이 곧 이 책을 만들었다. 책읽기와 글쓰기를 바탕으로 2011년 대한민국의 십대와 ‘다른 십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소녀가 인문학을 만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것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우리들의 삶이 이대로 지속가능할 것인지를 묻고 있는 듯하다. 어느 교실 뒤편에 학생들의 희망 학과를 적어 놓은 것을 보니 절반 이상이 경영학과였다. 다양한 삶을 꾸려가면서도 즐겁고 행복하고 살만한 세상을 만들 수는 없는 걸까. 현실과 이상의 충돌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조금씩 다른 모습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함께 나누며 걸어갈 수 있는 방법도 있지 않을까. 다만 우리가 그 상상력을 제한하고 현실의 발판을 마련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점수로 한 줄 세우는 학교, 모든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는 사회는 레밍쥐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다.

스승의 역할은 지식의 전달이 아니라 무지한 자의 배움에 대한 의지를 지속시키고, 그가 자기 힘으로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 111쪽

선생과 학생은 가르치고 학습하는 관계가 아니라 함께 길을 걷는 동지다. - 155쪽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에게 지식만 전달하는 것이 교사의 역할이라고 생각은 없다. 그렇다고 해서 교사가 전지전능한 인간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학교에 가고 선생을 만나야 무언가 배우고 가르치는 학습이 이루어진다고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의 말대로 선생과 학생은 함께 길을 걷는 동지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관계양상이 달라진다. 스승의 역할은 지식이 전달이 아니라 학생이 스스로 깨우치고 배움의 의지를 유지하는 것이다. 기막힌 정답 찍기 기술을 가르치고 쉽고 빠른 지식의 습득은 진짜 공부가 아닐 수도 있다.

해완이는 색다른 공간에서 생활하면서 맥도날드에서 알바를 하는 ‘44만원’ 세대다. 독립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실천하지만 현실의 벽은 만만치가 않다. 공동체 생활이 언제까지나 유지되기도 어려울 테고 어떤 방향과 목적으로 나아갈지 알 수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해완이의 미래를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언제나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과정을 통해 이미 속깊은 어른이 되가고 있기 때문이다. 고미숙의 『돈의 달인, 호모 코뮤니타스』를 통해 잠깐 김해완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면 그녀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스승들 중 하나인 고미숙을 다시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가 읽은 책과 그가 공부하는 공간과 그가 꿈꾸는 삶과 그가 걸어가야할 우리 사회가 중첩되면서 환하게 펼쳐치는 상상을 해본다. 그리고 우리는 해완이의 다음 발걸음을 기대할 필요가 있다. 세속적인 성공이 아니라 주체적인 삶의 주인으로 거듭나는 해완이의 모습을 지켜보고 싶다. 행복과 즐거움으로 가득한 희망은 학교 안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대학 간판으로 살 수도 없으며 좋은 직장만이 보장해 주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다. 그리고 그렇게 다양한 꿈과 희망과 행복과 사랑이 충만하기를 기다린다. 또 다른 십대의 탄생을 기대하며.

우리는 함께 사랑하기 위해서, 더 온몸으로 만나기 위해서 서로 독립을 한다. 사랑과 독립은 이렇게 절묘한 이중주를 노래한다. 나와 세상, 나와 너는 이 노래를 부르며 만난다. - 199쪽

110426-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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