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체가 되고 싶어 - 유쾌하고 신랄한 여자 장의사의 시체 문화유산 탐방기 시체 시리즈
케이틀린 도티 지음, 임희근 옮김 / 반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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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스님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이렇게 정의한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내려놓음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비움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삶의 본질인 놀이를 회복하는 것.

아름다운 마무리는 지금이 바로 그때임을 안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나를 얽어매고 있는 구속과 생각들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것.

아름다운 마무리는 스스로 가난과 간소함을 선택한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또한 단순해지는 것.

아름다운 마무리는 살아온 날들에 대해 찬사를 보내는 것.

그리고 아름다운 마무리는 언제든 떠날 채비를 갖춘다.

처음이 있으면 끝이 있고 시작이 있으면 마무리가 있다. 사람은 태어나면 반드시 죽는다. 삶의 시작이 탄생이라면 마지막은 죽음이다.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고민만큼 어떻게 죽을 것인지에 대한 준비를 소홀히 할 수 없다. 마지막이 준비된 사람은 삶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다. 유언은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일 뿐이다. 유산 분배가 아름다운 마무리일 수도 없다. 육체적 존재로서 자신의 몸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깊이 고민해 본 적이 없다. 단순히 화장이나 수목장 정도를 생각해봤을 뿐이다.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했고 마무리에 대해서도 유언을 한 지 오래지만 ‘좋은 시체’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해보지 못했다.

비우고 내려놓고 단순해지고 자유롭고 간소하게 언제든 떠날 채비를 하라는 법정 스님의 말은 죽음이 임박한 사람에게는 필요 없는 충고다. 건강한 사람의 삶의 태도와 방법에 대한 조언에 가깝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병원 장례식장에 도착한 장례지도사는 젊은 여성이었다. 장례 절차와 방법에 빈틈이 없는 일처리 방식이 아니라 마음으로 느껴지는 고인에 대한 예와 진정성 있는 태도가 내게 감동을 주었다. 케이틀린 도티의 『좋은 시체가 되고 싶어』를 읽으면서 그분을 떠올렸다. 장의사로 일하면서 첫 책 『잘해봐야 시체가 되겠지만』만큼 당연한 좋은 시체가 되고 싶다는 말이 깊은 울림을 준다. 도대체 좋은 시체란 무엇인가.

미국 콜로라도주 크레스톤에서는 야외에서 장작더미로 시체를 태운다. 열린 하늘 아래 주변을 환하게 혹은 뜨겁게 달아오르게 하며 타오르는 상상을 했다. 얼마나 아름답고 숭고한 마무리인가. 좋은 시체가 되고 싶다는 바람은 전망 좋은 묘지 터, 후손들이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명당자리, 화려하고 커다란 조형물로 치장된 산소에 묻히는 일이 아니다. 저자는 인도네시아 남술라웨시 토라자, 멕시코 미초아칸, 노스캘로라이나주 컬로위, 스페인 바로셀로나, 일본 도쿄, 볼리비아 라파스, 캘리포이나주 조슈아트리의 장례식을 찾아간다. “죽음이여, 그대는 우리를 이긴 줄 알지만 우리는 장작을 불태우며 노래 부른다.”라는 인도 영가가 울려 퍼지는 장례식장에서 지면, 영혼은 자유로움을 느끼는 저자의 모습이 그려진다.

한 인간의 삶을 마무리하는 산 자들의 의식은 엄숙하고 숭고하지만 그것을 무엇을 위해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는지는 공동체의 전통과 문화 의식을 대변한다. 매장, 화장, 자연장 등 어떤 방식이든 시체는 자연으로 돌아간다. 육체는 분해되고 다시 우주의 순환고리 안에 편입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랄 만큼 짧은 시간 안에, 미국의 장의업은 지구상 다른 어떤 나라의 장의업보다 더 값비싸고 더 산업적이며 더 관료적으로 변했다. 우리가 가장 잘한다고 말할 수 있는 일이 하나 있다면, 그건 슬픔에 잠긴 유가족을 고인으로부터 떨어뜨려놓는 일일 것이다.” 한국의 장의업도 별반 다르지 않다. 애도와 작별의식보다는 장례 물품의 등급과 가격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고인의 마지막에 최선을 다하려는 유가족의 슬픔이 클수록 장의업은 번창한다. 미국 장의사가 비판하는 장례 문화를 인정하더라도 대한민국의 전통과 문화를 일시에 뒤바꿀 수 없다. 다만 좋은 시체가 되려는 준비와 노력은 황망한 죽음 앞에서 허둥대는 유가족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지 않을까.

“서양의 장의사는 ‘존엄성’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미국에서 제일 큰 장례업체는 심지어 그 단어로 특허까지 받았다. 존엄성이란 대개 입 다무는 것, 강요된 침착함, 엄격한 형식을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 지하에 마련된 장례식장에서 육개장을 대접하는 우리 장례 문화는 존엄한가. 망자에 대한 예의와 유가족의 슬픔이 조화를 이루는가. 자연장을 치르는 조슈아트리에서 저자는 “나는 인생의 30년을 짐승의 살을 먹으며 보냈다. 그런데 내가 죽고 나서 그 짐승들이 반대로 나를 먹는 것은 왜 안 된다는 말인가? 나도 하나의 짐승 아닌가?”라고 묻는다. 살아 있을 때 고민하고 준비하지 않으면 자신의 몸은 좋은 시체가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부담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죽음 그 자체와 별개의 문제가 아닌가. “죽음을 둘러싼 우리의 두려움, 수치심, 슬픔을 소독할 수 있도록 햇빛 속으로 끌고 나오는 어려운 작업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이제 우리 모두 어려운 작업을 시작할 때가 아닐까. 멀지 않은 일이다. 미리 준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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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폭력의 힘 - 윤리학-정치학 잇기
주디스 버틀러 지음, 김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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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는 『공화국의 위기』에서 권력power과 폭력violence이 확실히 구분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 둘은 일심동체다. 가정 내 부모, 자식 간의 위계질서, 군대와 직장 내 직급과 직책, 국가 기관에 의한 공권력 등 권력은 폭력을 내포한다. 이때 폭력은 물리적 힘뿐만 아니라 언어 폭력, 시선 폭력, 냉소와 무관심, 심리적 억압, 가스라이팅 등 종류를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형태를 포함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일상적 권력은 ‘노오력’에 의한 당연한 권리로 둔갑하기 십상이다. 견제받지 않으려는 검찰, 감시받지 않는 언론, 국민을 의식하지 않는 국회에 이르기까지 민주국가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형태의 갑질과 권력 남용은 일상이 되었으며 그것이 폭력인 줄도 모르고 매일 폭행당하며 사는 시민들의 무감각은 놀랄 만하다.

미국의 철학자이자 젠더 이론가인 주디스 버틀러에게 폭력은 불평등, 능력주의, 혐오와 닿아 있다. 오랫동안 동성애와 여성주의 운동 최전선에서 혁신적이고 전복적인 사유와 실천으로 신뢰를 쌓아온 저자의 ‘비폭력’은 일관성 유지하며 새로운 정치철학과 윤리학에 화두를 던진다. 주디스 버틀러는 “비폭력은 바로 폭력장 안에서 윤리적 사안이 된다.”라고 주장한다. 비폭력은 평화주의자의 개념적 선언도 아니고 일상에서 말하는 범법행위를 넘어 윤리적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는 문제다. 비폭력의 범위와 한계는 개인과 사회마다 기준이 달라 여전히 논쟁 중이다. 하지만 저자는 “폭력을 가하는 것이 극히 정당해 보이고 당연해 보이는 바로 그 순간에 (의무적 선택지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가능한 선택지로 주어지는 저항적 실천이 비폭력”이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비폭력은 수동적, 소극적 대응 방식이 아니라 매우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삶의 태도라는 의미다.

두 가지 측면에서 비폭력을 정의하면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전투적 평화주의”라고 불렀던 그것을 공격적 비폭력으로 재검토해볼 수 있으리라고 주장한다. 갈등과 논쟁을 외면하고 좋은 게 좋은 거니 덮고 넘어가자는 태도와는 전혀 다르다. 전투적 평화주의를 ‘공격적 비폭력’이라는 표현하는 지점에서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들리는 두 단어의 조합이야말로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그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그간 인류가 걸어온 야만의 세월은 특정 시대의 정치 형태와 전통과 문화 때문이 아니다. 지금, 오늘을 사는 나와 우리가 목도하는 현실은 인간의 내면에 숨은 이기적 욕망과 자본주의에 물든 탐욕적 태도가 그 자체로 폭력이다. 노력한 만큼 벌고, 능력이 닿는 한 많이 가질 수 있는 자유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논리에 동조하는 못 가진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요란하다. 평등의 가치는 침묵을 지키고 오로지 정의롭지 못한 자유, 그들만의 자유, 교묘하게 포장된 자유가 공정과 정의라는 이름으로 세상을 뒤덮고 있다.

주디스 버틀러는 평등에 참여하지 않는 비폭력은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다른 누군가의 생명을 지킨다는 고귀함, 전쟁을 반대한다는 평화주의에 머무는 추상적 비폭력은 현실 개선의 구체적 실천 방안을 내놓지 못한다. 비폭력의 힘은 저항과 실천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페미니즘 투쟁과 트랜스젠더 투쟁은 서로 이어져야 한다. 여성 살해를 성테러sexual terror의 일환으로 이해한다면, 이 두 투쟁은 서로 이어져 있을 뿐 아니라, 이 두 투쟁과 퀴어 투쟁, 동성애 혐오와 싸우는 모든 사람들의 투쟁, 지나치게 높은 비율로 폭력과 방치에 노출되어 있는 비非백인들의 투쟁도 모두 이어져 있다.” 폭력이 사회적 불평등의 악화 요인이라는 데 동의한다면 불평등한 위치에 놓인 노동자, 소수자의 권리 강화, 폭력에 대한 강력한 처벌 등 제도적 장치를 주저하는 이유가 뭘까. 주권자는 누구의 편에서 어떤 정책에 동의하며 누구의 말에 귀 기울이며 현실 개선 노력에 의지를 보이는가. 안타까운 일이지만 또,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위로하며 적응하며 사는 게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비폭력을 힘과 연결한다는 것, 비폭력 실천을 폭력이 아닌 힘(저항과 생존의 연대 협력에서 표면화되는 힘)과 연결한다는 것은, 비폭력이 약하고 무익한 수동성이라는 관점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거부하는 것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과는 다르다.” 실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공격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폭력이 정당화되는 순간은 언제일까. 왼뺨을 맞으면 오른뺨을 내줘야 할까. 일상의 폭력들, 어쩌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순응하며 살아가는 폭력적 현실 앞에서 그래도 ‘희망’은 있다는 말로 눙치면 그만일까. 누군가는 점진적인 변화와 노력을, 누군가는 근본적인 혁명과 개선을 이야기하지만 역사를 되돌리고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방법으로 자기주장에 힘을 실어 이익을 챙기는 사람들도 있다. 누군가 무슨 말을 하든 판단과 선택은 각자의 몫이지만 선거철에 철새들에게 현혹되지 말고 숨 쉬듯 비판적 관점을 유지해야 한다. 언제나 위험과 폭력은 내가 선이요, 진리라는 착각에서 비롯되는 법이다. 성찰하지 않고 겸손함을 모르는 위선은 그 자체로 타인을 향한 폭력이다.

비폭력의 힘을 주장하는 주디스 버틀러의 깊고 넓은 사유를 따라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아니 어쩌면 매번 내 삶의 태도와 우리가 사는 현실을 찬찬히 돌아보게 된다. 조금 더 멀리 내다보며 다양한 형태의 폭력에 대해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의식하지 못하는 무지의 폭력이야말로 가장 경계해야 할 태도라고 생각한다. 비폭력은 공격적으로 실천해야 하는 윤리적 삶의 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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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사케르 - 주권 권력과 벌거벗은 생명 What's Up 3
조르조 아감벤 지음, 박진우 옮김 / 새물결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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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사케르 Ⅰ: 주권 권력과 벌거벗은 생명』(1995)

『아우슈비츠의 유산: 기록과 증언. 호모 사케르 Ⅲ』(1998)

『예외 상태. 호모 사케르 Ⅱ-1』(2003)

『왕국과 영광: 경제와 통치의 신학적 계보학을 위하여. 호모 사케르 Ⅱ-2』(2007)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3부작 중 첫 번째에 해당하는 ‘주권 권력과 벌거벗은 생명’은 거대한 서평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했다. 배경 지식 없이 책 읽기가 불가능한 경우가 있다. 아래 적어 놓은 책들의 계보는 ‘생명 정치학’이라 명명할 만한 사상의 축대를 쌓기 충분하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미셸 푸코와 한나 아렌트와 칼 슈미트가 주축을 이룬 인간과 사회에 대한 고찰은 그대로 호모 사케르 탄생에 바탕을 이룬다. 조르조 아감벤은 이 책에서 “호모 사케르란 사람들이 범죄자로 판정한 자를 말한다. 그를 희생물로 바치는 것은 허용되지 않지만 그를 죽이더라도 살인죄로 처벌받지는 않는다.”(156쪽)라고 정의한다. 태어나는 순간 차별 없이 모두 시민이 되는 세상은 저절로 주어지지 않았다. 피부색, 성별, 재산 유무, 출신 성분, 사회적 계급이 다른데 어떻게 똑같은 인간일 수 있는가. 평등이라는 개념은 인류 역사에서 희한하고 기발한 최근의 발명품이다. 말하자면 왕은 거지에게 갑질할 수 없으며 둘의 목숨값이 같다는 주장이 상식이 된 세상에 살면서도 우리는 그 과정과 결과에 경의를 표하지도 않고 책임감을 느끼지도 않는다. 배려와 혜택이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아는 것처럼 자유와 평화도 자연스러운 환경으로 착각하기 쉽다. 고대 그리스의 호모 사케르도 정치 체제와 사회 제도에서 유래했다. 노예와 여성은 물론 외국인은 시민이 될 수 없던 시대에 시민은 특권층이었다. 신에게 바쳐질 희생 제의에 사용할 수는 있으나 죽여도 죄를 묻지 않는 자는 누구일까.

“사케르Sacer란 건드렸을 경우 자신이나 남을 오염시키는 그런 사람 혹은 사물을 가리킨다. 여기서 ‘신성한’ 또는 (대략 유사하게는) ‘저주받은’이라는 이중적 의미가 유래한다. 사람들이 지하 세계의 신들에게 바친 죄인은 성스럽”지만 저주받은 존재라는 뜻이다. 이 논의의 시작과 끝은 다시 수용소로 모인다. 깔때기처럼 아우슈비츠로 모여드는 현대 사상의 계보는 서구 유럽의 철학적 전통을 송두리째 뒤흔든다. 선과 악, 인간과 자연, 삶과 죽음, 이성과 감정, 관념과 유물 등에 대한 성찰과 반성은 끝없는 혼돈과 파괴로 치닫는다. “나치 치하의 유대인은 새로운 생명정치적 주권의 특권적인 부정적 준거였으며, 따라서 죽여도 처벌받지 않지만 희생물로 바칠 수는 없는 생명을 대표한다는 의미에서 호모 사케르의 명백한 사례였다.”는 단 하나의 문장을 다시 읽을 수밖에 없었다. 현대판 호모 사케르는 유대인으로 마감됐을까. 인간은 그리 지혜로운 동물이 아니다. 망각과 합리화의 능력을 갖춘 존재다. 주권이 가진 퓌시스와 노모스의 이중적 속성은 호모 사케르를 바라보는 양가성을 증명한다. 예외는 일종의 배제다. 생명 혹은 인간으로서 ‘예외’에 해당하는 존재가 가능한가. 인류사회에서 여성은 남성의 예외인가. 유색인종은 백인의 예외인가. 장애인은 정상의 예외인가. 성소수자는 이성애자의 예외인가. 비기독교인 기독교인의 예외인가. 시민은 권력자의 예외인가. 노동자는 자본가의 예외인가. 청소년은 어른의 예외인가. 노인은 젊음의 예외인가……

하나의 프레임에 갇힌 사람의 아집과 독선이 주체적이고 신념에 찬 태도로 칭송받기도 한다. 아감벤이 주장하는 호모 사케르는 어디에나 있었지만 아무 곳에도 없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면 없는 게 아닌가. 아감벤은 근대 생명정치의 패러다임으로 인권과 새로운 노모스를 정리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살 가치가 없는 생명이 존재할까. 얼마 전에 석방된 ‘조두순’은 어떤가. 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 존재가 아닐까. 어느 시대에도 호모 사케르는 존재하는 게 아닐까. 죄는 미워해도 인간은 미워하지 말아야 하는 걸까. 사형제 존폐 논란은 언제 끝날까. 범죄자를 옹호하는 말로 아감벤을 오독할 수는 없다. 하지만 “만일 오늘날에는 명백하게 규정된 하나의 호모 사케르의 형상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 모두가 잠재적인 호모 사케르들이기 때문일 것이다.”라는 말은 새겨 들을 필요가 있다. 언젠가, 누구든 우리는 모두 잠재적 호모 사케르가 될 수 있다는 경고 앞에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경계를 허무는 일, 아니 경계를 지우고 구별 짓기를 끝내는 날은 아마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자본주의의 욕망과 비인간적 속성조차 인간의 본성으로 치환하고 그 적응 노력을 자기계발로 선망하는 시대다. 좋은 삶, 내 삶의 가치는 숨은그림찾기처럼 점점 더 어렵고 난해해진다. 비슷비슷한 사람들 사이에서 윌리를 찾는 일만큼이나 쉽지 않은 일이 돼 버렸다.

* 『호모 사케르』에서 아감벤이 인용, 소개한 책들

아리스토 텔레스 『형이상학』 『정치학』『니코마코스 윤리학』『영혼론』

미셸 푸코 『앎에의 의지』『성의 역사』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혁명론』『전체주의의 기원』

플라톤 『필레보스』『프로타고라스』『법률』『국가』

칼 슈미트 『정치 신학』『노모스』

알랭 바디우 『존재와 사건』

가타리, 들뢰즈 『천개의 고원』

발터 벤야민 『운명과 성격』『폭력 비판론』『서한집』

홉스 『리바이어던』

허먼 멜빌 『필경사 바틀비』

카프카 『법 앞에서』『소송』『노트』

칸트 『도덕 형이상학』『실천 이성 비판』『공동 판결에 관해』

하이데거 『철학에의 기여』

장 뤽 낭시 『무위의 공동체』

바타이유 『에로스의 눈물』

페르슈어 『인종 위생학』

칼 빈딩 『살 가치가 없는 생명의 제거에 대한 승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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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지 않아도 되는 책의 독서안내 - 지식의 최전선을 5일 만에 탐색한다
다치바나 아키라 지음, 이진아 옮김 / 인디페이퍼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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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월드컵 전 경기 관람은 쉽지 않은 미션이다. 단단히 마음먹었으나 새벽 3시 경기는 놓칠 때가 있고, 관심이 없는 팀의 경기일 때도 있다. 예선부터 결승까지 40게임이다. 관심은 있으나 시간이 부족한 사람들은 하이라이트를 돌려본다. 3~5분 정도로 요약한 동영상은 감동도 재미도 없다. 그저 발로 공을 차고 헤딩을 해서 골대에 넣는 순간을 포착할 뿐. 전후맥락 골이 만들어지기까지의 빛나는 패스, 작은 실수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전체 경기의 흐름을 읽는 재미는 하이라이트로 즐길 수 없다.

 

책은 어떤가. 부분과 발췌만으로 한 권의 책에 대해 말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스무 살 청춘이 여든까지 한 주도 쉬지 않고 일주일에 한 권씩 책을 읽는 열혈 독서가로 산다고 해도 평생 52×60=3,120권 밖에 읽을 수 없다. 삼천 권은 생각보다 많지 않은 책이다. 대한민국에서만 잡지를 포함해서 일 년에 4~6만 종의 신간이 쏟아진다. 60년간 새 책만 삼백만권이 넘는다는 계산이다. 부지런히 읽어도 겨우 0.1%를 읽을 수 있다. 지금까지 나온 책을 어쩔텐가?

 

그래서 피에르 바야르는 읽지 않는 책에 대해 말하는 법에 대해 비밀을 털어놨고 다치바나 아키라는 읽지 않아도 되는 책의 독서 안내를 시도한다. 이 두 책은 묘하게 대비된다. 피에르 바야르가 실제 상황을 중심으로 책의 효용과 안 읽은 책에 대해 아는 척하는 꼼수를 전하고 있다면 다치바나 아키라는 세상의 모든 책을 읽을 수 없다면 어떤 책을 읽어야 하는가에 대한 반어법 버전이다. 물론 피에르 바야르도 진지한 독서의 중요성과 어차피 다 읽지 못하는 책에 대해 적절하게 대처하는 방법을 전하고 있기 때문에 큰 틀에서는 목적이 같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다치바나 아키라는 현생 인류에게 복잡계, 진화론, 게임이론, 뇌과학, 공리주의를 중심으로 지식의 계보학을 시도한다.

 

어차피 세상의 모든 책을 읽을 수 없다면(물론 이 전제 자체가 아이러니다. 책에 관심이 없고 읽을 생각도 없는 사람이나 욕심이 없는 사람에겐 이 책도 무의미하다.) 읽지 않아도 되는 책은 어떤 책인가 알아두는 편이 좋다. 다치바나 아키라의 의도는 인간과 자연 그리고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필독 분야를 선정하는 데 있다.

 

 

인류가 걸어온 길 위에서 지금-여기here and now’가 아니라면 책은 전혀 다른 역할을 한다. 내 삶에 투영되지 않는, 나를 위한 책이 아니라면 어디에 쓸 것인가. 타인과의 관계를 고민하고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해결하고 다가올 미래가 고민이라면 적어도 지식의 패러다임을 전환했던 순간을 기억해야 한다.

 

책을 빅뱅 이전빅뱅 이후로 나누고, 빅뱅 이전의 책은 독서 목록에서 (일단)제외한다 이것을 지식의 패러다임 전환이라 부른다면, 오래된 패러다임으로 쓴 책을 열심히 읽어도 가격 대비 효과는 떨어진다. 따라서 최신 지식의 겨냥도를 손에 넣고 나서, 고전을 포함하여 자신이 흥미가 있는 분야를 읽어나가면 된다. - 7

 

지식의 패러다임 전환을 이루지 못한, 생각의 변화를 이끌어내지 않는 책을 읽는 시간은 무의미하다는 저자의 생각은 지나치게 실용적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머리를 식히려고 손에 잡은 책은 올해 최고의 책 중 하나였다. 엉성해 보이는 표지와 일본인 특유의 실용적 태도를 담은 함량 미달의 재미를 원했던 오만함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책장을 넘기는 동안 왜 이런 책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지 않는지 의아할 뿐이었다. 세상의 지식과 정보를 소화하고 편집하는 능력보다 현대인에게 중요한 능력이 있을까. 이 책 말미에 붙어 있는 북 가이드는 필독서에 해당하는 게 아니라 각각의 분야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안내서들이다. 어려운 이론과 전공 지식이 필요한 분야도 있겠으나 최근에는 대부분 충분한 2차 저작물과 해설서가 넘치고 대중을 위한 지식의 체계와 설명을 충분히 찾아볼 수 있다. 한두 이상 따라 읽어보면 자연스럽게 하이퍼링크 책읽기를 시도할 수 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다음 영역, 인접 분야의 책에 손이 간다. 다치바나 아키라의 목적은 바로 거기에 있으리라.

 

 

예를 들어 공리주의를 둘러싼 논쟁과 정의의 문제를 고민하지 않는다면 문재인 정부의 정책과 자유한국당의 주장을 이해하기 어렵다. 경제 민주화, 재벌 정책, 사법제도 개혁, 공정거래위원장의 신념, 52시간 노동 시간의 의미 등도 마찬가지다. 직접 내 삶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의 생각, 행동, 태도가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그들의 자유의지는 과연 자율적 판단과 의지에 따라 이루어지는가. 가장 합리적인 성장과 분배 정책은 무엇인가. 인터넷 뉴스를 보며 울분을 토하고 근거 없는 비난과 비아냥으로 비평가 흉내를 내는 사람, 주관적 감정과 감성적 언어가 전하는 달콤함으로 현실도피를 시도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가장 적절한 치료제로 추천할 만하다. 폭넓은 지식의 향연과 분야를 넘나드는 안목을 중요하지 않은 사람에겐 물론 지루한 잔소리와 현실과 무관한 학문의 영역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람은 한번 쯤 지적 충격을 받을 때가 있다. 다치바나 아키라는 후기에서 자신의 경험을 토로한다. “권력은 네 안에 있다. 너 자신이 너를 얽매는 권력이다.”(327)는 말을 이해한 순간, 그는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었으리라. 미셸 푸코의 말 한마디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돈오頓悟의 순간을 그는 누가 뒤에서 찌르는 바람에 뒤를 돌아보았다고 술회한다. 물론 그곳엔 아무도 없었고 그 충격은 머릿속에서 온 것이라고 말한다. 40년 전 경험을 통해 그가 하고 싶은 말은 모두 요약되어 있다. “나는 선이고, =권력과 싸우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 판단 기준과 근거를 다시 살펴야 한다. 점점 의심스럽고 두려울 뿐 머리가 텅 비어가는 느낌이다.

 

왜 이런 차별이 여전히 남아 있는가 하면, 그것으로 이득을 보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본인’, ‘중장년’, ‘남성’, ‘일류대학 출신’, ‘정규직(종신고용)’이라는 다섯 개의 속성을 지닌 완고한 아저씨와 할아버지를 말하는데 정치나 행정, 사법부터 학교와 회사, 언론에 이르기까지 일본사회는 그들의 기득권으로 얽매어 있다. - 330

 

젊은 여러분이라면 자신들이 차별하면서 차별을 없애라고 주장하는 위선자의 논리에 휘둘리지 않고, ‘지식의 패러다임 전환을 가볍게 받아들여, 효율적이고 공평하며 합리적인 더욱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기에 이 책을 썼지만. - 331

 

월드컵 첫 예산 탈락인 모로코가 아쉽다. 이제 우루과이의 사우디 차례다. 한 시간이 금방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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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빅뱅 이전빅뱅 이후로 나누고, 빅뱅 이전의 책은 독서 목록에서 (일단)제외한다 이것을 지식의 패러다임 전환이라 부른다면, 오래된 패러다임으로 쓴 책을 열심히 읽어도 가격 대비 효과는 떨어진다. 따라서 최신 지식의 겨냥도를 손에 넣고 나서, 고전을 포함하여 자신이 흥미가 있는 분야를 읽어나가면 된다. - 7

 

지금까지 자기 유사성이나 복잡함을 연구한 과학자며 수학자는 존재했다. 그러나 망델브로만이 그것을 프랙털로 통합하여, 세계의 근본법칙임을 나타냈다. 이것이 거대한 지적 패러다임 전환이다. - 40

 

세계는 네트워크이고, 그것을 움직이는 것이 허브이다. - 47

 

세계는 프랙털이고, 사회도 프랙털이며, 우리 자신도 프랙털이다. - 47

 

망델브로야말로 지식의 노마드였다. 그것이 그의 인생이 매우 매력적인 이유이다.

D-G는 결국 리좀이 무엇인가 알지 못했다. 유랑하는 지성만이 리좀을 볼 수 있었다. - 57

 

자연은 인간의 지혜로는 따라갈 수 없는 신비로운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현대의 진화론은 유전의 과학과 융합하여, 생물의 생태를 수학적으로 기술할 수 있음을 드러냈다. 이렇게 진화론에 있어 지식의 빅뱅’, 사회생물학(진화생물학)이 탄생했다. - 77

 

인간의 몸이 진화로 만들어진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과 감정도 진화로 생겨났다. - 101

 

조직에 유전자는 업는데다 진화는 진보나 성장이 아니다. - 107

 

현대의 진화론이 자연과 사회, 마음의 비밀을 엄청난 기세로 해명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복잡하고 다양한 이 세계는 언제나 우리에게 놀라운 미지의 세상을 선사해준다. - 113

 

게임이론에서 신호보내기와 더불어 중요한 것이 맹약이다. - 125

 

신고전파 경제학의 효율적 시장에서는 모든 시장 참가자가 온갖 정보를 동시에 아는 완전 정보를 전제조건으로 삼아왔다. 그러나 현실의 시장에는 정보의 비대칭성이 가득하고, 이론대로 되지 않는 일이 얼마든지 일어난다. - 155

 

행동경제학에서는 이 착각을 휴리스틱(Heuristics)’라고 설명한다. 익숙하지 않은 말이지만 휴리스틱스는 복잡한 문제를 시간을 들여(슬로 사고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직감적으로(패스트 사고로) 순식간에 풀려는 단락(短絡) 경향을 말한다. - 162

 

리벳은 이 중대한 의문에 인간의 자유의지는 0.35초 사이에 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뇌가 활동을 시작하고 행위를 실행할 때까지의 경과 시간(0.35) 동안, 인간은 그 행위를 중지할 자유가 있으니까.

이것은 자유의지개념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다. 무언가를 할 (적극적)자유가 아니라,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은 무의식이 정한 것을 순간적으로 부정하는 (소극적)자유뿐인 것이다. - 235

 

지금 더욱 나은 미래더욱 나은 세상을 진지하게 말할 수 있는 곳은 실리콘밸리뿐이다. 그것 외에 갖가지 이상은 역사의 엄격한 허들을 넘지 못하고 사라졌다.

사이버 자유주의자가 그린 테크놀로지의 유토피아만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다. 설령 그것이 아무리 위태로운 미래라고 해도.

적어도 그것이 착각인지 아닌지는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다. - 323

 

권력은 네 안에 있다. 너 자신이 너를 얽매는 권력이다.” - 327

 

과학과 기술은 진보하지만, 인간은 진보하지 않았다. 전혀. - 327

 

왜 이런 차별이 여전히 남아 있는가 하면, 그것으로 이득을 보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본인’, ‘중장년’, ‘남성’, ‘일류대학 출신’, ‘정규직(종신고용)’이라는 다섯 개의 속성을 지닌 완고한 아저씨와 할아버지를 말하는데 정치나 행정, 사법부터 학교와 회사, 언론에 이르기까지 일본사회는 그들의 기득권으로 얽매어 있다. - 330

 

젊은 여러분이라면 자신들이 차별하면서 차별을 없애라고 주장하는 위선자의 논리에 휘둘리지 않고, ‘지식의 패러다임 전환을 가볍게 받아들여, 효율적이고 공평하며 합리적인 더욱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기에 이 책을 썼지만. - 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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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애주가의 고백 - 술 취하지 않는 행복에 대하여
다니엘 슈라이버 지음, 이덕임 옮김 / 스노우폭스북스 / 2018년 3월
평점 :
절판


지독한 사랑의 시작, 나 역시 술과 헤어지기로 결심한 날보다 술과 사랑을 시작했던 날들이 훨씬 근사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깊은 관계를 나눈 대상과의 이별은 오래 걸리게 마련이다. 오랜 시간 유지해 온 관계를 깨지 못해 붙잡고 있는 연인처럼. - 11

 

모든 중독은 치명적일수록 아름답다. 그 끝을 모르고 질주하는 맹목. 부딪쳐 깨질 때까지 달리는 속도감. 좌우를 돌아보지 않고, 이성적 판단이 마비된 채 점점 헤어 나올 수 없는, 아니 헤어 나오기 싫은 아득함.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소주 한 병 이상의 술을 1년쯤 마시고 나면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반주가 없으면 목이 메어 밥 한 술도 넘기기 힘들다. 다니엘 슈라이버는 어느 애주가의 고백에서 알콜중독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모든 중독이 그러하듯 알콜 중독은 가장 이성적인 인간의 가장 비이성적인 식습관 중 하나다. 세트메뉴로 엮인 담배도 마찬가지다. 작가는 어느 쪽이 더 건강에 해롭고 무엇이 더 현명한 선택인지 조언하는 도덕 교사가 아니다.

 

지독한 사랑, 온라인 게임, 러너스 하이, 선거와 권력... 우리 삶에서 중독 아닌 것이 있을까. 중독의 기준은 무엇일까. 몰입과 중독은 어떻게 다른가. 하루에 커피를 몇 잔 마시면 중독인가. 모든 사람이 건강에 좋은 음식을 먹고 종교의 교리를 따르고 도덕과 윤리에 어긋나지 않는 금욕적 삶을 통해 행복을 얻을 수 있을까.

 

다니엘 슈라이버는 모든 중독자의 증상대로 자신이 알코올 중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거의 매일 술을 마시며 필름이 끊겨 기억이 사라지고 다음 날 아침 두통과 무거운 몸을 지탱해야 하는 날들이 이어진다면 중독이다. 이 책은 술에 쩔어 인생이 위태로웠던 한 남자의 갱생기가 아니다. 1935년 시카고에서 시작된 A.A(alcoholics anonymous) 홍보 책자도 아니다. 술이 우리 삶을 어떻게 뒤흔들 수 있는지 살펴보면 충분한 책이다. 자기 고백적 에세이는 항상 변곡점에 초점이 맞춰진다. 어떤 계기로, 왜 그런 결심을 했으며 그 과정은 어땠을지에 대한 호기심이 책장을 넘기게 한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자기 경험에 기반한 주관적(?) 관점과 맥락을 드러낼 뿐이다. 술을 끊기 이전과 이후의 삶이 어떻게 달라졌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마치 신앙 간증처럼 간절하진 않지만 술 자체에 대한 깊은 고민은 없다. 모든 술은 위험한가. 술의 순기능은 없을까. 일반적으로 음주 문화의 역기능에 주목하면 세상은 거대한 수도원이 될지 모른다. 내가 마신다고 해서 마시지 않는 사람들을 불편해하거나 마시지 않는 사람이 마시는 사람을 비난하는 일은 올바른 태도일까. 사람마다 식성이 다르다. 좋아하는 음식도 다르다. 기호 식품도 각자 취향이 있다. 술은 타인과의 관계, 개인적인 기호 양면에서 따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어느 애주가의 고백은 술 마시는 모든 사람에게 죄책감을 주고 하루라도 빨리 금주를 실천하라는 자기계발서가 아니다. 내게 이 책은 중독에 관한 보고서로 읽혔다. 술 대신 쇼핑, 게임, 미드, 운동, 재테크, 부동산투기, 권력지향, 명예욕, 그루밍족, 각종 덕질 등 한 가지에 매몰된 사람, 신념이 강한 사람, 고집을 꺾지 않는 사람도 중독의 한 증상이 아닐까. 당신은 무엇에 중독되어 있는가? 어디에 중독되고 싶은가?

 

알코올과 술은 언제나 슬프거나 지루하거나 화난 사람들에게 출구가 되어 줬다. 가혹한 삶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고, 더 잘 견딜 수 있게 하며, 불안한 미래와 마주할 수 있는 힘을 줬다. 망각 속으로의 탈출은 인간 본능의 특징이다. - 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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