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슴도치와 여우 - 톨스토이의 역사관에 대하여
이사야 벌린 지음, 강주헌 옮김 / 비전비엔피(비전코리아,애플북스)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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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이야기 본능은 강력해서 웬만해선 막을 수 없다. 상대방의 관심과 무관하게 쏟아내는 자기 고백은 감정의 배설에 가깝다. 뜨거워진 휴대폰을 귀에 대고 들어야 하는 친구의 연애사 혹은 친정 어머니의 하소연을 듣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기 어렵다. 내가 말하고 싶은 만큼 상대방이 듣고 싶지 않은 욕망이 비례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관계 양상과 성향에 따라 이야기는 폭력이 될 수도 있다. 주변에 잘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주변에 원하지 않아도 이야기를 들어줘야 하는 사람이 있다는 의미다. 이것은 인간의 본능과 욕망에 관한 이야기다. 아니, 일상에서 매일 벌어지는 개인차의 비극이다. 4가지 유형의 혈액형으로 80억 명을 분류하는 오류보다 조금 나은 방법이 16가지 유형으로 나눈 MBTI 테스트다. 조금씩 다른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상에서 관계의 기본은 타인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태도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신체 기관은 눈이 아니라 귀다. 듣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듣지 않는 사람과는 대화를 할 수도 없고 관계를 유지할 수도 없다.

놀랍게도 이사야 벌린은 인류를 단 2가지 유형으로 분류한 그리스 시인 아르킬로코스를 소환한다. “여우는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고슴도치는 하나의 큰 것을 알고 있다”라는 말은 흑백 논리의 전형이다. 당신은 여우인가, 고슴도치인가. 마치 이청준의 소설 「소문의 벽」에서 전짓불의 공포에 짓눌린 박준과 같은 질문이다. 질문자의 실체를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어느 편인지에 대한 말 한마디가 생사를 가르는 절체절명의 순간. 질문을 가장한 억압과 강제는 박준에게 트라우마로 남는다. 물론 이사야 벌린이 톨스토이를 둘 중 하나로 분류하고 이를 논증하기 위해 쓴 글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고슴도치 혹은 여우로 나눌 수 없다. 마치 붉게 물든 석양의 하늘처럼 모든 인간은 농도의 차이만 확인할 수 있는 그라데이션으로 물들어 있다.

일원론자인 고슴도치형은 지식인과 예술가 성향으로 도스토예프스키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모든 것을 하나의 핵심적인 비전, 즉 명료하고 일관된 하나의 시스템에 관련시키는 사람을 고슴도치형이라 한다. 여우형은 다원론자로 푸슈킨 같은 사람이 여기에 해당한다. 서로 모순되더라도 다양한 목표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대한 거대한 서평을 이렇게 다채로운 해석과 분석으로 채울 수 있을 정도로 이사야 벌린은 작가의 내면과 삶의 궤적을 꼼꼼하게 살핀다. 그래서 결론은? 톨스토이는 고슴도치인가, 여우인가. 그게 중요한가?

소설은 개연성 있는 허구로 삶의 진실을 드러내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고 해서 핍진성이 부족한 소설이 주는 재미와 장르 소설이 가진 허구와 상상의 즐거움을 포기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여전히 고전으로 남아 인간과 생의 이면을 성찰할 수 있는 작품에 대한 이해는 다양한 비평과 해석의 필요하기도 하다. 가벼운 분량이지만 결코 만만찮은 톨스토이의 무게를 생각한다면 톨스토이의 작품뿐만 아니라 우리가 읽는 모든 글에 대한 깊이와 넓이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읽고 쓰는 행위는 저마다 다른 의미다. 치유하는 글쓰기를 통해 자신을 위로하는 사람, 독서를 통해 새로운 세상에 눈뜬 사람 등 헤아릴 수 없는 다양한 경험을 통해 사람들은 독서와 글쓰기를 자기 삶을 위한 방편으로 활용한다. 모든 읽기는 쓰기를 위한 전제이고, 모든 쓰기는 읽기가 바탕이 된 자기표현이다. 그러나 자신을 향해 열려 있지 않다면, 타인과 세상의 소리를 경청할 수 없고 자신의 망막에 투영된 세계가 전부라고 믿을 수도 있다. 쉼 없는 의심과 질문이 자기 성찰과 내일의 변화를 위한 성장을 이끈다. 그때는 옳고 지금은 틀리거나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는 말의 무게는 때때로 감정에 휘둘린다. 논리적 근거보다 중요한 게 태도이며, 합리적 생각보다 감정이 앞서는 게 인간이 지닌 한계라는 사실 자체도 인정하지 않는다면, 나와 너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는 계속될 수 없지 않은가. 결국 톨스토이는 고슴도치 같은 여우가 여우 같은 고슴도치와 공존하는 방법을 모색했던 게 아닐까.

톨스토이의 현실 감각은 마지막 순간까지 너무나 통렬해서, 뛰어난 두뇌로 세상을 잘게 쪼개 얻어낸 단위들에서 재조립해낸 어떤 도덕적 이상과도 양립할 수 없었다. 따라서 그는 이런 사실을 부인하는 데 평생 동안 온 힘을 쏟아 부었다. 지독히 자존심이 강하면서도 자기 증오에 시달렸고, 박식하면서도 모든 것을 의심했으며, 냉정하면서도 넘치도록 열정적이었고, 남을 경멸하면서도 자기비하가 심했으며, 심한 고뇌에 시달리면서도 초연했고, 가족과 헌신적인 추종자들에서 사랑받고 온 문명 세계에서 찬사를 받았지만 거의 언제나 홀로였던 톨스토이는 위대한 작가 중에서 가장 애초로운 사람이었고, 콜로누스에서 눈을 가린 채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지만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못해 자포자기한 노인이었다. - 1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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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에 대하여 - 아무도 말하지 않은 인생의 다른 이름
베벌리 클락 지음, 서미나 옮김 / 현암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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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할 결심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누구도 좌절과 고통을 원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매일 매일 삶과 죽음, 건강과 질병, 행복과 불행, 기쁨과 슬픔, 성공과 실패가 뗄 수 없는 동반자라는 사실을 잊고 산다. 인생은 마치 제로섬 게임 같아서 어느 쪽에 몰입하면 다른 부분은 썰물처럼 빠져나가기 마련이다. 양손에 떡을 움켜쥐면 타인에게 손을 내밀기 어렵다. 잃어야 얻고 비워야 채울 수 있다. 이런 평범한 삶의 지혜를 몰라서 지옥을 경험하는 게 아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보고 싶은 것만 보는 능력이 있고, 경험하지 않으면 믿지 않는 습성이 있다. 이론과 실제가 달라 온몸과 마음으로 겪어보지 않는 감정은 혼란스럽다. 거울에 비치는 사물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고 남의 일같이 보이던 실패와 상실은 어느새 내 곁에 머물러 있다.

익숙함은 실패한 사랑의 주연이 되기 쉽다. 실패를 통해 시행착오의 교훈을 얻고 성찰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다. 하지만 대개 인간은 귀인이론의 원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인과관계가 없는 대상이나 원인을 지목하는 오류에 빠지기 쉽고 상황을 외면하거나 회피함으로써 정신승리를 택한다. 상처는 쉽게 아물고 같은 실수를 반복해도 우리에겐 리셋 버튼이 없다. 초기화 기능 없는 인간에게 실패와 상실은 익숙해지지 않는 삶의 굴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중요한 건 꺾이지 않은 마음이라는 데, 베벌리 클락은 “상실과 실패의 순간에 우리는 존재의 본질과 마주한다. 이 경험으로 진정 중요한 것에 다가갈 기회를 얻는다. 틸리히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고통스러운 경험이 없다면 삶의 표면만 건드린 채, 인간의 피상적 의미에서 더 나아가지 못한다고 강력하게 말한다. 그의 표현은 시적인 느낌마저 든다.”라고 어깨를 다독인다. 꺾이지 않는 마음만 있으면 고통스러운 경험을 통해 삶의 이면을 들여다볼 수 있을까.

철학적 위로는 달콤한 감정적 격려, 대책 없는 희망, 무기력한 긍정과 어떻게 다른가.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실패의 본질과 의미뿐만 아니라 실패의 속성과 과정을 살핀다. 근본적인 원인을 따져보지 않는다면 그 책임을 물을 수 없고 두 번째 기회를 얻어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기 쉽다. 흔히 말하는 회복 탄력성은 개인에게 책임을 돌리기 쉽다. 사회 안전망이 견고한 사회에서 넘어져도 일어날 수 있는 용기가 생기는 법이다. 실패해도 괜찮다는 입바른 소리가 아니라 정책과 제도적 뒷받침이 마련되야 하지 않겠는가. 좌절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주는 공동체의 울타리는 개인이 가진 의지 혹은 신념의 단단한 버팀목이다.

현실적인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이 대체 불가한 성별(여성혐오), 나이(노인 빈곤), 학력(임금 격차), 종교(대체 군복무), 출신(지역 차별) 등에 기인한 것이라면 문제가 심각하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빈부 격차(육아, 출산, 수월성 교육, 입시 제도, 사교육비, 대학 서열)는 개인의 노력이나 열정과 무관하지 않은가. 모든 게 다 노무현 탓이라던 한 시대의 비극적 유행어를 뒤집어보면 모든 게 다 정치 탓이라는 은유가 성립한다. 우리는 ‘기득권’을 재해석하는 놀라운 리더를 민주적 절차에 의해 선출했다. 여기에 동참하며 호응하는 사람들의 속내는 사다리를 걷어차고 밥그릇을 빼앗는 사람들의 의도와 무관하다. 무지는 참담한 현실을 초래하고 무의식적 분노와 감정적 혐오가 불러올 파장은 개인적 실패가 아니라 공동체의 실패로 귀결될 것이다.

베벌리 클락의 초점은 주로 개인에게 맞춰져 있으나 여성, 죽음, 불안의 문제는 철저하게 삶의 조건들, 즉 공동체의 태도와 환경에 기인한다. 성공에 대한 욕망, 실패에 대한 두려움보다 우선 ‘좋은 삶’에 대한 정의와 기준이 중요하지 않을까. 어떻게 좋을 삶을 실현할지에 대한 고민으로 논의를 시작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신자유주의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좋은 삶은 철저한 경쟁과 승자독식 자본주의다. 시장에게 자유를 허하라는 말에 동조하는 90퍼센트 가난한 국민들의 태도가 놀라운 건 무지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10퍼센트가 될 수 있다는 욕망 때문이다.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 그들이 되지 못한 자신을 탓하는 가학적 시장주의적 태도 때문이다. 이미 시장이 정치를 지배한 지 오래지만 자본이 인간을 지배하는 세상에 대한 고민이 없는 한 좋은 삶은 불가능하다는 철학자의 조언은 이념과 무관하지 않은가.

좋은 삶의 대척점에 놓인 경고는 ‘삶의 모든 영역에 시장원리가 퍼지도록 하는 것’이다. 삶의 불확실성이 오로지 경제적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는 언젠가 세상에서 사라진다. 저자는 좋은 삶을 위해 우리가 무엇을 점검해야 하는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묻는다. 타인과 세계와 연결된 삶을 위해 좋은 관계가 필요하다. 새로운 관계를 위해서는 불가피한 상실이 생긴다. 삶을 쉽게 통과할 방법은 없다고 단언하는 이 책의 미덕은 멈출 때 삶이 공간이 생기고, 지금-여기에서 열정을 다하며, 걷는 행위를 통해 다르게 사는 법을 익히라는 충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패와 상실이 회피의 대상이 아니라 수용과 동행이라는 조언이다. 명확한 해법을 제시하고 몇 가지 원칙을 제시하는 결론에 도달하지 않아 좋다. 이성적 분노와 논리적 증오가 새로운 관점의 출발이다. 실패에 대하여 이야기를 시작하려면 우선 나와 타인의 관계 그리고 세상을 보는 안목이 필요하다. 감정적 태도를 버려야 다른 삶, 보다 좋은 삶을 위한 고민이 시작되리라.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세상에서 아무도 실패와 상실을 피하지는 못한다. 우주는 우연과 변화, 성과 쇠, 성장과 부패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좋든 싫든 인간은 이것의 일부다. 삶은 필연적으로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불행, 오르막과 내리막, 성공과 실패를 모두 담고 있다. - 2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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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랭 머랭 - 우리시대 언어 이야기
최혜원 지음 / 의미와재미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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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언어의 한계가 세계의 한계다.’라는 비트겐슈타인의 문장을 읽었을 때 충격이 생각난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외부 세계를 인식하고 규정한다.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비로소 내게 꽃이 되듯, 사물과 타자가 의미를 가지는 건 호명을 통해 존재를 규정할 때다. 그래서 동시대인, 같은 세상을 살아도 각자의 세계는 차이가 크다. 생각하고 느끼는 범주의 크기가 세계의 크기다. 직업, 재산, 성별, 학벌, 종교, 인종, 나이와 무관하게 인간은 각자 다른 언어를 통해 저마다의 크기에 맞는 세계에 산다. 

그 세계가 타인의 세계와 다르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면 낭패다. 삶의 목적과 가치, 방법과 태도의 차이는 각자 구축한 세계 안에서 벌어지는 각개전투가 아닐까. 언어학자 최혜원의 『휴랭 머랭』은 각자 구축한 세계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공유하는 세계를 점검한다. 공동체의 언어는 시대를 조망하고 욕망을 가늠하며 그 사회가 나아가는 방향을 짐작할 수 있는 바로미터다. 

제목 ‘휴랭human language’은 인간의 언어 줄임말이다. ‘머랭machine language’은 기계의 언어를 줄였으나 우리말 ‘뭐라는 거야?’라는 의미의 ‘뭐래?(머랭?)’이라는 의미도 있고, 억지스럽지만 ‘머랭meringue’의 동음이철어로 읽을 수도 있다. 책 내용은 제목처럼 약간의 아재(?) 개그―아재의 정체성이 있는가. 언제부터, 몇 살부터, 남성만의 전유물로서 아재 집단의 기준이 명확하지 않으나 아재의 대척점에 있는 아지매 개그는 왜 불가능한가. 아니, 처녀총각, 애기어른 개그는 가능하지 않은가. 유감이 많지만 일단 논점일탈이니 접어두자―를 섞은 유머 코드가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는 비속어, 은어, 유행어가 난무하기 때문이다. 

대체로 책을 읽기 전에 저자 혹은 작가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은 내용의 전반을 지배하고 때때로 후광효과를 발휘한다. 유명 저자의 경우 특유의 아우라로 독자를 억압하고, 짓눌린 독자는 책의 내용이 아니라 독서 행위 자체에 감읍하기 일쑤다. 특정 직업, 학력, 성별, 인종, 종교, 나이도 같은 효과를 발휘할 수 있으니 각별히 유념해야 한다. 

아무튼 이 책은 ‘언어학자’라는 표피를 벗겨내면 언어학 일반 이론에 대한 대중적 재미와 우리시대 언어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라는 의미를 함유한다. ‘의미와재미’라는 출판사 이름은 그런 의미에서 충분히 의미심장하다. 언어는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트렌드를 포착한다. 언어는 말과 글을 포괄하지만 말과 글은 전혀 다른 층위다. 언어학자인 저자는 그 차이를 설명하느라 애쓴다. 아무리 텍스트의 종말을 알리는 종소리가 세상에 울려퍼지고 있으나 이 책을 읽는 독자만큼이라도 말과 글의 힘을, 언어가 인간에게 주는 재미와 의미를 다시 한번 새겨봤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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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
제니 오델 지음, 김하현 옮김 / 필로우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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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루 산텔라는 “일을 미루는 사람이 그러듯이 결코 직선으로 나아가지 않으며, 한 가지 일에서 등을 돌려 다른 일로 향했다가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한다. 일은 차츰차츰, 조금씩 진행될 뿐이다. 아무것도 구하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지식을 손에 넣고 욕망을 채울 수 있으리라.”(『미루기의 천재들』)는 말로 세상의 모든 미루기의 천재들을 빙자한 게으름뱅이에게 용기를 주었다. 일찍이 마르크스의 사위 폴 라파르그가 주장한 『게으를 수 있는 권리』는 자본주의형 인간의 탄생을 예고했음이 틀림없다. ‘개미와 베짱이’는 모든 게으른 자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베짱이처럼 굶어 죽을 처지라는 극단적 사례가 아니라면 우리는 얼마나 부지런하고 성실하며 피땀 흘려 일해야 하는가. 욕망의 크기를 줄이고 삶의 방법과 태도를 바꾸면 전혀 다른 세상이 열리지 않을까. 고대 철학자들이 말한 행복의 조건과 현대인의 행복은 그 결이 다를까. 관습적 사고를 깨뜨리는 제목을 달고 등장하는 수많은 도발적 책들을 가끔 집어 든다.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류의 책은 보지 않았으나 각종 배신 시리즈와 전복적 사고를 유도하는 책은 마다할 이유가 없다. 깊이와 넓이가 어느 정도 확보되어 주관적 편향에 흐르지 않는다면 저자의 경험과 생각의 조각들은 대체로 밴드왜건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줄 수도 있다. 생각 없이 살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오래된 금언이 ‘나’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믿는 수많은 헛똑똑이를 위해 이런 종류의 책은 멈추지 말고 정수리에 찬물을 들이붓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렇게 열심히 살 필요가 있나?”라는 깨달음은 촌각을 다퉈 ‘노오력’의 끝을 본 사람이 뱉을 수 있는 질문이다. 가보지 않은 길을 예측하고 추론만으로 진리를 확신할 수는 없다. 하루 3시간만 일하면 충분하다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나 인류의 역사는 노동 시간 단축의 역사라고 강력히 주장하는 리오 휴버먼에게 현대인의 삶은 자본으로부터 소외된 기계적 노동자, 중세의 농도의 삶과 크게 달라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자유와 평등이라는 가치를 내세우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자발적 노예로 살아가기 쉽다. 자본주의 욕망과 가상세계의 밈들이 현대인의 뇌를 점령한지 오래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은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 천정에 자기 망상을 투영하거나 방바닥에 엎드려 장판을 디자인하는 법과는 거리가 멀다. ‘열심히’ 안 해도 ‘잘’하면 되는 나이와 위치가 되는 일의 기쁨과 슬픔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지만 ‘무언가 계속하고 있는 것’이라는 착각에서 비롯된다. 제니 오델의 데뷔작은 사람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매력적이다. 누가 얼마나 열심히 사는지 그 치열함으로 부와 권력이 나눠진 시대를 나는 알지 못한다. 더구나 현대인의 하루, 평범한 사람들의 인생에 노력과 열정이 빠져 좌절하거나 실패하는 경우도 드물다. 도대체 우리는 어떤 삶을 원하는가.

손바닥 안에 네모난 화면을 들여다보면 그 어떤 환각제보다 강렬한 세상이 펼쳐진다. 욕망을 자극하고 쾌락을 주며 웃음과 눈물을 창조한다. 디지털 디톡스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의 생각에 동의하기 어렵지 않은가. 그게 좋으면 그만인 세상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이라는 말은 일시적으로 소비될지언정 변화를 일으킬만한 트렌드로 자리잡긴 어렵다. 잠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고 공원에 앉아 새들의 움직임을 관찰하며 꽃이 지고 바람이 부는 계절을 느끼는 일은 대개 일시적 휴식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하루하루 우리 삶을 돌아보면, 그 시간이 누적되어 자기 인생이 된다고 해도 괜찮은가. 왜 다르게 살 순 없을까. 정말 세상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고,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인가. 저자는 독자를 다그치지 않는다. 조용한 목소리로 쓸모없음의 쓸모에 생각해보라고 속삭인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그 자리에서의 저항”이며, 이는 곧 “스스로를 자본주의적 가치 체계에 쉽사리 이용당하지 않는 모습으로 만드는 것”이다. 자기만의 저항법은 매우 중요하다. 각자 선 자리가 다르다. 바틀비처럼 아무 힘도 없어 보이는 사람도 자신의 위치에서 자기 삶을 단단하게 지켜내려는 저항은 그 자체로 숭고하다. 저자는 상업적 소셜 네트워크, 즉 관심 경제에 관심을 집중한다. 지금, 현재 우리의 삶을 특징짓는 여러 가지 요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요소가 바로 관심 경제다. 디지털 디톡스가 필요한 시대를 살면서 그 위험성을 인지하지 못한다면 개인적 성공과 성취가 어떠하든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긴 매우 어렵다. 생산성이라는 신화에서 벗어나 저항, 유지, 회복, 돌봄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시점이다. “악당은 상업적 소셜미디어의 침략적 논리이며, 이득을 취하려고 우리를 불안과 질투, 산만한 상태에 머무르게 하는 소셜미디어의 금전적 동기다. 더 나아가 악당은 이러한 플랫폼에서 자라나 오프라인의 자기 모습과 실제로 살아가는 공간에 대한 사고방식에 악영향을 미치는 개인주의와 퍼스널브랜드 숭배다.”(20쪽)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은 없다.(15쪽) 바쁜 일상에서 잠시 맛보는 휴식은 달콤하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재충전하는 시간도 소중하다. 그러나 거꾸로 생각해보면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를 만들어 가는 건 자기 자신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사치도, 시간 낭비도 아니다. 오히려 의미 있는 생각과 발화의 필수 요소다. 자기 삶의 소중함을 자각하는 순간,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은 세상의 기준과 세속적 성공에서 벗어나 조금 다른 삶을 꿈꾸는 사람들의 태도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건 세상을 아름답게 한다. 획일적 욕망을 꿈꾸는 세상에서 무지개처럼 다양한 빛깔로 살아가는 건 멋진 일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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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얼굴들 - 빛을 조명하는 네 가지 인문적 시선
조수민 지음 / 을유문화사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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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빛이다. 우리가 눈으로 구별하는 모든 사물은 빛으로 윤곽을 드러낸다. 반사된 색으로 컬러를 구분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고유의 빛깔로 오해한다. 태양과 조명처럼 발광체를 제외하면 모두 반사체에 불과하다. 스스로 색을 만드는 게 아니라 흡수할 수 없는 색을 되비칠 뿐이다. 우리는 사과를 볼 수 없다는 선언부터 생각을 뒤집고 관습적 사고에 경종을 울린다. 사물에 대한 감각적 인지 기능이 얼마나 오해의 산물인지 알게 되면 모든 것이 낯설다. 본다는 행위는 가장 확실하고 분명한 진실이라 믿지만 눈과 빛을 이해한 후에는 모든 게 의심스럽다. 보는 것이 믿는 것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는 건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하물며 들은 이야기는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빛으로 세상을 읽는 조명디자이너 조수민의 『빛의 얼굴들』은 개인적인 취향을 저격한 책이다. 전복적 사고, 낯설고 신선한 관점, 새로운 지식과 정보, 대상에 대한 저자의 애정, 일정한 거리두기를 통해 객관적으로 대상을 바라보는 태도까지 읽고 싶은 책의 요소를 두루 갖췄다. 조수민은 빛과 조명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깊다. 오랜 ‘업력’ 뿐만 아니라 지속적인 공부와 관찰은 객관적 설명만으로도 읽은 이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며 깊은 관심을 유도한다. 빛은 직진한다는 단순한 사실에서부터 달이 반사체라는 사실까지 빛에 대한 오해를 풀어주며 저자는 빛의 세계로 우리를 초대한다.

특히, “이 시간 동안 이 각기 다른 두 가지 하늘빛은 하늘을 뒤덮으며 하루 중 그 어느 때보다 근사한 장면을 연출한다. 한 시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이 땅 위의 모든 존재를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도록 만들어 주는 이 아름다운 빛의 시간을 우리는 ‘골든아워Golden hour’라고 부른다.”는 설명에 공감하며 하루에 두 번 지구가 빚어내는 빛의 향연에 공감했다. 단순히 석양을 좋아한다는 시각적 현란함을 넘어 골든 아워가 주는 위로와 감동이 인간의 생체 리듬과 맞물려 어떤 의미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골든 아워 : 태양이 뜨고 지기 약 30분 전후, 일광이 금색으로 빛나는 황혼의 시간을 일컫는 말. 사진, 영상, 분야에서 주로 사용되는 용어로, 매직 아워Magic hour라고 불리기도 한다. ‘라디오나 텔레비전 방송에서 청취율이나 시청률이 가장 높은 시간’ 또는 ‘심장마비나 호흡 정지, 대량 출혈 등의 응급 상황에서 인명을 구조할 수 있는 금쪽같은 시간’이라는 의미로도 사용한다.

직사광과 천공광에 대한 설명은 집안 곳곳에 천편일률적으로 배치된 형광등과 간접 조명 효과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밝기에 따른 느낌과 분위기는 빛의 색감, 눈의 피로, 사물의 형태까지 영향을 준다. 맑은 하늘에 햇빛이 쨍한 날과 회색 구름으로 뒤덮여 흐린 날의 차이는 생각보다 단순하지만 그 의미와 활용은 인공 조명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사람들의 99퍼센트는 빛을 의식하지 못하지만, 100퍼센트는 빛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라는 조명 디자이너 제니퍼 딥턴이 새삼스럽다. 읽을수록 우리가 아는 빛과 내 삶에 영향을 주는 빛은 조금 다르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했다. 빛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 빛이 공간을 채우는 방법, 공동체 사회에 미치는 빛의 영향에 대해 차분하게 설명하는 저자의 목소리는 높지도 크지도 않다. 감성에 호소하지도 않고 개인적인 취향을 직접 드러내는 부분도 많지 않다. 오랫동안 조명을 디자인하며 생각하고 느낀 빛에 대한 철학과 좋은 조명에 대한 생각을 드러내고 있지만 주장과 설득이 아니라 설명과 조언에 가깝다.

수천만 원짜리 루이스 폴센의 조명이 아니어도 좋다. 수입산 명품 조명이 아니면 어떤가. “좋은 조명은 비싸지만, 좋은 빛은 비싸지 않다.”라는 저자의 말은 비싼 조명을 산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빛 환경을 얻는 것도 아니며, 좋은 빛을 얻기 위해 무조건 고가의 조명을 사야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다. 조명의 재료와 가격이 아니라 공간에 어울리는 조명의 위치와 배열이 좋은 빛을 만드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무와 동식물의 기름, 석탄과 석유의 시대를 지나 전기로 빛을 만드는 시대가 되었다. 인류의 밤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밝아졌으며, 어둠을 밝히는 일은 이제 더 이상 부유층만의 특권이 아니다.” 오히려 빛 공해가 인류의 밤을 괴롭힌다. 눈부시게 밝고 환한 빛은 문명발달을 상징한다. 그러나 불면과 각종 질병을 유발하기도 하고, 자연의 순환에 맞춰진 인간의 생체 리듬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기도 한다. 적절한 빛, 좋은 조명은 우리 삶에 매우 중요한 요소다. 알면 사랑하게 된다. 빛과 조명에 대한 앎이 사물과 세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고 더 나은 삶에 영향을 준다. 조수민이 말한 빛의 얼굴들은 생각보다 다양하고 아름답게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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