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으로부터 배우는 삶의 지혜 - 매일 읽는 린포체의 명상 일기
소걀 린포체 지음, 오진탁 옮김 / 판미동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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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늘 함께 공부를 이끌어주었던 선생님이 돌아가셨다. 그 때에는 경황이 없었지만 꼭 읽었어야 하는 책이 있다면 이 책이었다. 사실 망자의 입장에서야 이런 책의 내용을 삶으로 체화해서 가셨지만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이 책은 꼭 필요하다. 죽어가는 가까운 사람을 보살피는 일에서나 스스로 삶을 어떤 방향을 갖고 살아야 할까 고민하는 사람에게 이 책은 아주 귀중한 방향을 제시한다.

 

  흔히 우리가 공부하지 않고 주어진대로 산다면 불교에서 말하는 육도윤회를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런 종교적 가르침을 깨달음을 성취한 스승들의 지혜를 통해서 죽음 이후 우리들의 몸과 마음에 일어나는 바르도의 일들에 대해 상세하고 체계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자신의 죽음을 경험한 영적 스승들이 그 경험을 잊지 않고 다시 몸을 받아 이 세상으로 와서 그것을 글로 서술한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들의 죽음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할 수 있게 된다. 그 때 우리들은 삶의 보다 거칠고 드러난 마음을 가라앉히면 드러나는 잠재된 의식의 일들에 대해 알 수 있게 된다.

 

  죽은 이들을 위해서 또는 죽어가는 이들을 위해서 우리는 쉽게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 잘 모른다. 어떻게 처신해야 하고 또 어떻게 하면 망자의 입장에서 보다 이익이 되는 길을 모른다. 심지어 의료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조차 의료기구에 의존해서 죽음을 맞이하는 이의 몸에 대한 상태만 점검할 뿐이지 그가 가는 영적인 길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랜 티베트 불교의 전통에서 깨달은 자들이 어떻게 삶을 살아가고 죽음의 과정을 어떻게 살아가고 또 죽어가는 이들을 어떻게 이끌었는지에 대해 알아봄으로써 우리들의 삶과 죽음을 비추어보는 지혜를 가질 수 있다.

 

  나는 불교신자다. 절에 규칙적으로 다니고 있지는 않지만 부처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실천하면서 마음을 더욱 밝고 환하게 쓰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아침 저녁으로 금강경을 독송하고 시간이 날 때 마다 달라이 라마님의 법문이나 내 나름대로는 검증된 스님들의 법문을 들으며 내 공부를 일상 속에서 찾으려 한다. 비록 공부가 더디고 근기가 모자라지만 내 생명 앞에서 솔직한 삶을 살아가는게 나의 목표다.

 

  티베트의 지혜는 인류의 정신적 보고이다. 비록 중국에 의해 공산화의 과정을 거치며 민족적으로 큰 아픔을 겪었고 또 겪고 있지만 무수한 인류의 영적 스승을 갖고 있었고 또 그 분들이 티베트의 민족을 이끌고 있고 나아가 그 불교적 지혜가 전 세계에 널리 퍼져서 온 지구 위의 선량한 중생들의 마음에 불성의 씨앗과 지혜의 씨앗을 심어 놓게 되었다. 누구나 자신의 영적인 삶을 보다 성숙하게 이끌기를 원하는 사람은 이 책을 반복해서 읽어서 삶과 죽음의 구조를 파악하고 공부의 성취를 이루어서 성숙한 삶과 죽음을 맞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분은 성숙한 분이었기에 내가 걱정할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된다. 다만 나의 삶으로 돌아와서 그 분이 다시 영적인 인연을 가진 이들을 만나 더욱 성숙한 삶으로 이끄는 보살의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고 또한 그 가르침 속에 함께 공부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나의 마음도 성숙해져야 한다. 그러하기에 아직 인류에게 아직 드러났던 적 없던 티베트의 스승들의 지혜의 말씀이 책을 통해 우리에게까지 오게 되어 감사한다.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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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균의 종말 - 평균이라는 허상은 어떻게 교육을 속여왔나
토드 로즈 지음, 정미나 옮김, 이우일 감수 / 21세기북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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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흔히 산업화시대의 산물로서의 학교교육의 부정적인 측면을 이야기한다. 누구나가 대량생산공장에서 찍혀 나오는 빵과 같이 표준화되고 개성없는 산업현장에서 기계화된 인간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중요했던 시절의 산물이다. 그러나 세상은 변화하고 굴지의 세계기업들은 신입사원을 뽑을 때 학벌이나 스펙을 지워버리고 조직 내의 각 직원들과의 의사소통을 늘려나갔다. 그 결과 흙 속에 감추어진 진주같은 일꾼들을 뽑을 수 있었다.

 

  물론 평균주의를 비판한다고 해도 그것이 사회에 가지는 의미와 그것을 폐기해야 할 부분들에 대해 더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 재난에 대해 표준화된 매뉴얼이 필요하고 직무능력을 기를 때 표준화된 교육방법과 그것을 달성하고자 하는 능력에 대한 표준화된 단계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때로는 표준화된 지식과 능력에 대해 일정 단계까지 그것이 필요하다는 논리도 또한 의미는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이 조기교육으로 김연아나 박태환이 될 수도 없을 뿐더러 그렇게 모든 국민을 길러내는 것이 바람직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평균의 종말은 이 사회의 패러다임의 변화에 따른 구 잔재로서 남아있는 영역에 대한 메세지로는 분명하고 의미가 있다. 대표적으로 학교 교육은 그러한 평균적 인간을 길러내는 중요한 통로로 사용되어 왔다. 달라진 사회의 요구, 개개인의 들쭉날쭉성에 따른 개인성장의 불규칙성과 인생의 각각의 의미와 성장을 생각할 때는 평균적 강요가 폭력이 되고 인생의 학살이 될 수 있다. 이미 세상은 많은 학교 교육을 거부하고 있다. 피라미드식 학교교육과 컨베이어벨트식 학교 교육에서는 승자는 늘 소수의 한 명이 될 뿐이니까.

 

  우리의 교육 현실에서도 변화는 감지되고 있다. 전체순위와 석차를 만들지 마라고 한다든지 학생참여식 자기주도적 학습과 수업으로의 전환이라든지 진로와 연계한 학습동기부여와 그에 따른 적성에 맞춘 진학의 유도 등 교육계에서도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이런 변화는 세계의 변화에 따라 그저 겨우 바뀌고 있을 따름이다. 교육은 늘 속성 자체가 보수적이고 따라서 다른 모든 사회 변화의 끝에서 변화하지 않을 수 없어 꼬리를 자르는 식으로 늘 변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에서 말하는 학벌과 계층의 되물림이 사라진 사회에서는 자신의 직무능력과 열정에 따라 직업을 구하게 된다.  거기에 따라 교육적 비효율성의 상징인 종합대학에서 4년의 비싼 등록금과 세월을 낭비할 필요없이 자신에게 맞는 자격증을 취득하여 미래사회에 대비해야 하는 점은 우리 교육계에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하지만 미래 사회가 이러한 평균의 종말을 전 사회적으로 가져올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오히려 전 사회계층은 부의 되물림 교육의 되물림을 또 다른 형식으로 재생산해내게 될 것이고 또 그런 과정에서 평균주의의 이데올로기는 우리 사회를 다른 방식으로 지배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분명 보다 많은 부와 좋은 지위를 가진 사람은 이러한 미래 사회의 능력을 갖추는 데 있어 평균이상의 기회를 갖게 될 것이고 그것은 또 다른 평균주의를 낳게 될 가능성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 스스로가 깨인 자각으로 그런 것에 마음을 뺏기지 않고 스스로 당당하게 삶을 살아가게 될 때 비로소 허상없는 가치가 세상을 지배하지 않는 세상이 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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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우 다경 - 그림으로 쉽게 풀어쓴 다도茶道·다예茶藝·다사茶事의 안내서
육우 지음, 김진무.김대영 옮김 / 일빛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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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의 역사는 수천년이 넘는데 차의 역사는 대체로 기원전 1000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에서는 수천년동안 차를 음용하여 왔다는 이야기다. 보이차에 빠지면서 차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여러 권의 책을 구해 읽었지만 지금으로부터 1200여년 전에 씌여진 이 책만큼 차에 대해 체계있고 완성된 책을 보지 못했다고 말해야겠다. 이 한 권의 책으로 나는 차의 본고장을 중국이라 말하는데 주저함이 없을 것 같다. 왜 이 책이 '다경'이라고 불리우는지에 대해서도 이해할 것 같다.

 

  차의 역사와 차의 이름이 기원과 차와 정치와의 관계에 대해 처음부터 소개한다. 차의 기본적인 이해에 해당한다. '정행검덕' 차를 마시는 목적은 단순히 생리적인 목적이 아니라 인격 수양을 통한 인간의 완성에 있다. 유교식으로 말하자면 중용화해에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육우는 차를 단순히 생리적 욕구나 문화적 욕구의 도구로 본 것이 아니라 차를 통해 인격의 완성과 깨달음에 그 목적을 둔 듯하다. 아마 어려서부터 절간에서 자라며 스님들의 수행적 면모에 많은 영향을 받은 탓이기도 하리라.

 

  차가 몸에 좋다는 것을 나는 경험으로 깨닫고 있는 중이지만 이미 천년도 더 전에 이렇게 몸에 좋은 것을 24가지로서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에 놀랐다. 나는 혈액순환계통의 병에 효과가 있으므로 내 가족력에 있는 심근경색, 뇌졸중, 협착증 등에 효과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오래 음용하였는데 그 외에도 숙취해소, 기관지 계통의 질병, 치아를 건강하게 하고 신장을 건강하게 하고 해독효과가 뛰어난 등 통변을 잘하게 하고 거비니라 하여 지방을 태우고 정신을 맑고 편안하게 하는 등 아주 많은 효과들이 이미 이 때에도 검증되었다고 볼 수 있다,

 

  차를 제작하는 과정에서부터 음용하기까지의 과정에서의 '구난'이라고 하여 제조, 감별, 기구, 취화, 수선, 고적, 연말, 팽자, 음용의 어려움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으로 볼 때 차는 당시 문인들이 그저 문화적 욕구로만 마신 것은 아님이 분명하다. 이렇게 복잡하고 오랜 과정 동안의 노력을 거쳐야 비로소 차를 만들어내고 또 그 음용하기 위한 조건과 도구와 장치들이 아주 많았으며 또한 그 격식과 예절 또한 아주 복잡했다. 그러하니 당시에 내가 살았던들 보이차를 이렇게 상용할 수 있었을까 하고 생각해보게 된다.

 

  차는 천, 지, 인의 조화이다. 천은 하늘이 정해준 기후와 지형과 온도와 강수량 등의 조건들이 맞아야 한다. 지는 땅의 조건이다. 산비탈에 있어야 하고 햇볕이 잘 드는 산비탈의 음지여야 한다. 또한 땅의 수분이 잘 유지되어야 하고 이러한 지형적 조건이 차의 맛을 풍부하게 하고 품질을 만들어낸다. 마지막으로 인은 차의 생산과정 속에서 사람들이 서로 행하여 상호작용하는 면이 있고 또 하나는 차를 음용하면서 차인들이 나누는 인격수양과 교류 및 화합을 의미한다.

 

  수천년의 세월동안 인간의 문화생활에 사용되었던 중국보이차는 단순한 생활적 필요를 넘어서 인간적 정신을 고양시키는 도구로 사용되었고 또 그를 통해 인격의 완성이라는 고차원적인 목적 아래 차는 그 생명력을 더욱 넓혀 왔다. 다경을 접하고 나서 나는 보이차를 우려낼 때 또 음용할 때 좀 더 경건하고 예를 갖춘 과정을 갖게 되리라 생각한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지금은 보이차 산지로 가장 유명하고 많이 생산되는 운남지역의 차산지가 당시에는 기록에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또한 다경에 씌여진 제다법과 음용법이 지금은 그대로 적용하기 어려운 생산 및 발효 음용법의 변화가 다수 있어왔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경이 가진 차에 대한 의미는 결코 퇴색되지도 경감되지도 왜곡되지도 않고 그 중요한 위치를 이어가게 됨을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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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차 수첩
글을읽다 편집부 엮음 / 글을읽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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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이차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놓은 포켓북이다. 그런데 포켓북 치고는 내용이 알차다, 보이차의 역사에 대해 오래된 보이차의 생산시대별 구분에서 부터 지도를 통해 보이차 산지에 대해서도 간략하고 쉽게 설명하고 있다. 또한 보이차 표지를 통해 보이차의 생산지, 차창, 생산년도, 사용된 잎의 종류 등 보이차의 구분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즉 보이차를 구매할 때 보이차의 표지와 내비에 적혀 있는 보이차의 상태를 알 수 있는 정보를 어떻게 보고 어떻게 알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쉽고 간결하게 설명해 놓았다.

 

  보이차의 제조과정에 대한 설명으로부터 생차와 숙차의 구별에서부터 다양한 발효기법과 발효 후의 과정, 그리고 생차가 자연숙청과정을 거치며 맛이 변하는 과정에 대해서도 간략히 설명하고 있다 좋은 보이차를 품별하고 맛을 알아가는 과정은 결국 자신 스스로가 맛에 눈을 떠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보이차를 마시는 다양한 경험을 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는 보이차의 음용법에 대해 설명한다. 차도구에 대한 설명도 빠뜨리지 않고 있다, 정말 작은 책이지만 내용은 알차게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쉽게 보이차를 알고 마시기 위해서 이 정도 책 한 권은 읽어보면 좋을 듯하다, 시간도 얼마 안 걸리면서 대략적인 보이차에 대해 알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면서 맛을 익혀가면 스스로 입맛에 맞는 보이차를 구별해낼 수 있을 것이다.

 

  보이차의 일반적인 효능으로 요즘에는 많은 사람들이 보이차를 찾고 있다, 중국과 동남아시아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보이차를 다시 찾고 있다, 물론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간혹 보이차를 찾는 사람들 중에 중국의 식품안전성을 걱정하는 이들이 많은데 보이차에 들어간 농약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2007년부터는 QS표시가 우리나라 식약청 검사 같은 것으로 붙어 있어 안전하게 먹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있다, 또한 보이차는 생차가 자연발효과정을 거치면 20년이 지나면 농약성분도 거의 날아가버리기 때문에 30년 이상된 보이차는 그냥 먹어도 몸에 해가 없다. 그러면서 혈액순환을 좋게 하고 고지혈증, 비만, 동맥경화 등의 병에 좋으며 항암효과도 뛰어나 앞으로 더욱 많은 사람들이 찾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래서 미리 좋은 생차를 사서 20년 정도가 되도록 보관하여 음용하는 것도 권할 만하다.

 

  나는 보이차를 좋아한다. 특히 발효된 숙차는 몸을 따뜻하게 하고 많이 음용해도 그 해가 적어서 일상생활에서 늘 가까이 두고 마신지가 10년 가까이 되어 간다. 그래서 좀 더 보이차에 대해 알고 싶어 보이차관련 도서가 나오면 구매해서 읽는 편이다. 앞으로 더 좋은 책들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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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의 역사 - 세계 경제를 뒤흔드는 물질의 일대기, 완역본 역사를 바꾼 물질 이야기 4
하인리히 에두아르트 야콥 지음, 남덕현 옮김 / 자연과생태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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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세상에서 가장 지배적인 음료는 무엇일까? 알코올은 포도주, 맥주, 소주, 위스키 등이 있고 그 중 맥주가 소비량이 가장 많을 테지만 차로서는 무엇일까? 보스턴 차사건으로 미국의 독립혁명이 벌어질 당시 영국에게 막대한 자본을 벌어준 홍차였을까? 아니다. 현재 세계 자본을 가장 많이 움직이는 차는 커피다. 어느듯 우리 일상에서도 가장 손쉽게 구할 수 있고 또 아침마다 마시게 되는 것이 커피가 되어버렸다. 도대체 언제부터였을까? 그리고 무엇때문이었을까? 우리들의 일상 생활 속으로 깊이 침투된 이 커피가 가진 진실은 무엇일까?

 

  커피가 유럽을 지배하던 시기는 근대 이후이다. 적어도 중세까지는 이 열매가 보편적으로 음용하던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중세 이후에 와서 제국주의자들은 이 열매를 통해 유럽 사회의 생화패턴과 사람들의 문화와 일상의 향유를 변화시킨다. 이 커피 값이 너무나도 비싸고 귀족들이 향유하던 것이어서 이에 비해 값싼 홍차를 팔아 막대한 이윤을 남길 수 있었던 나라가 영국이었으니....이렇게 고급적인 차문화가 유럽의 일반 시민들의 생활을 점령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세월이 필요하지 않았다. 커피의 입장에서 보면 정말 빠른 세포분열로 아니 나폴레옹이나 그 어떤 정복자보다도 빠른 속도로 전 세계를 잠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스타벅스에 가면 여름에는 아주 시원하고 편안한 의자에 언제든 노트북을 올려 놓고 차 한 잔만 시켜놓으면 편안하게 쉴 수 있다. 또한 고급 거피브랜드를 지향하는 스타벅스가 등장하기 이전 세게의 커피 생산 지도는 아프리카에서 완전히 라틴아메리카 지역으로 넘어갔다. 지금 커피 생산국 1위는 브라질이다. 2위는 베트남, 그 뒤로 라틴아메리카의 많은 국가들이 커피콩을 생산하고 있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높은 커피가격을 유지하기 위해 1년에도 한반도의 면적의 아마존 밀림이 사라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아도는 커피콩이 얼마맘큼이나 태평양에 버려지고 불태워져 소각되고 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커피의 감미로운 향기와 씁쓸한 맛은 우리 아침의 잠깐의 휴식 시간을 포근하고 행복하게 만든다. 사람들은 그를 매개로 서로간의 관계를 확인하고 일상의 대화를 나눈다. 또한 계층 간의 문화를 공유하고 삶을 윤택하게 한다. 하지만 그 커피의 눈물이 지구공동체를 얼마나 파괴하고 있는지 또 커피 농가의 삶이 얼마나 바침한지에 대해 우리는 가려진 진실을 알지 못한다. 확실히 중국의 보이차와 홍차 그리고 실론티와 허브차를 다 합쳐도 커피의 위력을 당해낼 수가 없다. 이런 면에서 커피는 자본의 속성을 아주 닮았다. 물론 인간이 만들어낸 욕망을 가장 잘 투영할 수 있는 대상으로 커피가 낙점되었는지도 모른다.

 

  원래 우리는 커피의 맛을 몰랐다. 하지만 그 맛에 매료되고 나면 이젠 맛의 노예가 된다. 물질의 세계사는 이를 증명해왔다. 한계효용학파의 설명을 둘러싼 잉여 커피의 소각과 폐기는 이러한 물질적으로 일그러진 욕망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설명은 될 지 모르나 지구공동체에 인간들의 신뢰롭고 평화로운 삶에 해악이 됨은 자명한 일이다. 자연이 우리에게 준 선물은 그 용도에 맞게 소비될 때 그 의미를 다한다. 감미로운 커피의 맛을 누군가는 맛볼 때 그 아픔이 흘리는 눈물을 누군가는 쓰디쓰게 맛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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