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오후에 아버지는 아담한 피아노 앞에 앉아 노래를 부르거나, 멜로디를 살짝살짝 바꿔 가며 연주해 보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나는 곁에서 장난감을 갖고 놀았다. 그럴 때면 커다란 창문을 통해 들어온 햇살이 카펫에 선명한 사각형을 새겨 놓곤 했다. 내가 트럭과 자동차를 사각형 안으로 몰아넣으면 마치 그 차들이 빛의 도시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34쪽) 


화가가 글로 묘사하는 어린시절의 풍경들이 그림보다 훨씬 선명하게 떠오른다. 선교사 부부의 손자로서 중국에서 태어난 영국인 아기는 아들이 강인하게 자라기를 바라는 부모의 기대를 실망시키며 미국, 캐나다, 인도를 전전하면서 어린 시절을 보낸다. 전쟁의 광풍, 정착하지 못하는 생활 속에서 하루하루 꾸준히 혼자 자라는 어린이. 그의 외로움과 걱정, 가끔씩 빛나는 낙천성이 침착하게 그려진 책이다. 기억도 기억이지만 그것을 침착하고 끈질기게 글로 표현하는 힘이 결국 그림도 그리게 하는 것 같다. 어린 시절 노먼 록웰의 그림을 좋아했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반가웠다. 올해 첫 독서로 일과는 상관 없는 책을 골라 들었는데 결국은 쓰는 일과 그리는 일, 어린 마음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작가는 그림책 『냄새차가 나가신다!』로 유명한 제임스 맥밀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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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8-01-02 00: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꼬님 무술년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네꼬 2018-01-04 22:05   좋아요 0 | URL
카스피님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알베르토 망구엘의 <독서의 역사>를 좋아한다. 얼마 전에 나온 <은유가 된 독자>도 제목이 근사해서 기억해 두었다가 읽었다. 책과 독자의 관계를 저 먼 옛날 ‘기록’이 시작된 순간부터 훑어내려 온다. 나에게는 좀 난해한 대목도 있고 (그러므로 잘 모르겠지만) 산만한 부분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할 거리가 많았고 여러 군데 밑줄도 그었다. 역시나 좋은 책. 아마도 서양 문학을 잘 아는 분들은 이 책의 은유를 더 깊고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겠지. 


이건 다른 얘기인데, 본문에 종종 의아한 표현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무늬만 독자’ ‘살인미소’ ‘정신 줄’ 같은 것. 저자가 원래 이런 유행어(?) 속어(?) 뉘앙스로 썼을지도 궁금하고 설령 그렇다 해도 우리말로 바꿀 때 이런 식으로 해야 했을까 좀 아쉽다. 이런 표현의 유효기간을 생각해도 그렇고, 저자의 서정적이고 꼼꼼한 문장을 생각해도 그렇다. 혹시 저자가 속어로 썼다면 원래대로 옮기고 해설을 달아주었으면 좋았겠다고, ‘(은유가 된) 독자’로서 생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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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17-11-13 09: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꼬님 반가워요^^ 저도 <독서의 역사>를 좋아해서 밑줄 그어가며 몇 번이나 읽었지요. 그래서 아마도-_- <은유가 된 독자> 역시 당연히 샀지 싶은데-_- 어느 구석에 쌓여 있는지 모르겠네요ㅜㅜ 네꼬님 페이퍼 읽고서야 기억이 났어요ㅠㅠ
하여간-_- 저도 번역이 뭔가 미심쩍어 보일 땐 제발 원문 그대로 충실히 번역해주었으면 하고 바라게 돼요.;;

네꼬 2017-11-14 17:28   좋아요 0 | URL
문나잇님 안녕하세요! 제가 이렇게 띄엄띄엄 하네요;; 게으른 저.. ㅜㅜ <독서의 역사> 좋아하신다니 새삼 반갑고 *ㅅ* 기쁩니다. 저는 <독서의 역사>만큼 좋지는 않았지만 서양문학을 좋아하신다면 더 좋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어 그리고 어 번역은 (제가 몰라서) 이상하거나 하지 않았는데 그런 표현들은 자꾸 걸리더라고요. 문나잇님은 보시면 어떨지 궁금해요. 꼭 찾으시길,,! 헤헤.
 















진아는 폭행을 일삼는 남자친구를 신고했으나 그가 가벼운 벌금형을 받는 데 그치자, 스스로를 보호할 생각으로 인터넷 게시판에 이 사실을 알린다. 그러나 그녀를 응원하는 이들보다 ‘멍청한 여자’ ‘남자 신세 망친 여자’라는 비난하는 이들이 더 많다. 진아는 악성 댓글 중에서 그녀의 과거를 아는 사람이 쓴 것이 분명한 한 줄을 발견하고, 그것을 단서 삼아 혹은 핑계 삼아 고향으로 내려간다. 댓글을 쓴 사람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진아는 대학시절은 물론 시골에서 보낸 어린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뜻밖의 사실을 마주한다. 그것은 그녀의 친구들, 나아가 그녀 자신조차도 강간의 피해자였다는 것과 너무나 오랫동안 너무나 깊이 서로를 오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맥락을 들여다 봐.”(진아의 상사가 사건 이후 진아에게 한 말)

Vs 여러 화자 또는 주체의 엇갈린 진술, 순서가 뒤섞인 회고


이진섭이 왜 폭행을 저질렀는지, 즉 진아가 왜 맞았는지 ‘맥락’을 살피라는 종용은 결국 진아를 ‘맞을 만한 여자’로 만든다. 맥락은 가해자가 폭력성을 갖게 된 이유를 추적하고 의미를 부여한다. 명백히 발생하였고 여전히 있는 피해 사실을 지우고, 맥락에서 피해자의 잘못을 캐낸다. 그 반대편에서, 작가는 일관되지 않은 서사 방식을 채택한다. 이것은 ‘믿을 만한 사람, 일관된 사람’으로 보이는 가해자(진섭, 동희)와 달리 두서없이 말하고 감정적이며 믿기 어려운, 어리고 지위가 낮은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그대로 드러내는 전략으로 보인다. 가해자와 세상이 요구하는 방식이 아니라 피해자가 말할 수 있는 방식으로 말하게 하는 것. ‘소설’이 사건에 대응하는 방식.


그런데 이렇게 흩어진 시점, 여러 화자가 진술하는 방식은 피해자의 감정 분출을 위한 것만이 아니다. 진아는 진섭의 폭행과 수많은 2차 가해의 피해자로서 댓글 작성자를 찾아내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다른 이들의 시선에서 그녀 자신의 과거가 뜻밖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무심코 저지른 냉대와 사소한 거짓말, 간절했던 소망이 타인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오래 전 동희가 자신에게 저지른 것이 강간이었다는 사실 또한 깨닫는다.


그리고 두 사람.


● 유리 : 사랑과 관계를 갈구하는 불안정한 그녀를 남자들도 여자들도 무시하고 쉽게 경멸한다. 주인공 진아조차 유리를 거의 잊고 지내다가 ‘진공청소기’를 언급한 악성 댓글 때문에 떠올린다. 이어 유리는 다른 사람들의 험담에 가까운 증언으로 묘사된다. 진아가 떠올리는 유리의 마지막 모습도 여러 차례 번복된다. 회식 자리에서 아예 못 본 것으로(69쪽 ‘그것이 끝이었다’), ‘7-38’이라는 숫자가 성폭력 피해자 상담 번호임을 안 뒤에야 당시 유리가  ‘진아야, 나 좀 도와줄 수 있어?’라고 말한 것으로, 마침내 동희가 유리를 강간했음을 알고 나서야 자신이 그 마지막 순간에 유리를 확실하게 외면했던 것으로 기억이 구체화된다. (또는 인정하게 된다.)


● 동희 : 자신이 속한 조직의 일을 주도하고 싶은 자, 통제하고 있다고 확인하고 싶은 자, ‘페미니스트’라는 이름을 선점하고 싶은 자, 실리를 따져 교수가 되고자 하는 자, 기꺼이 조직의 정치에 몸을 굽히는 자, 강간하는 자. 피해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 사이에 뭐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 너 피해의식 있어.’ 교수 이강현 앞에서 늘 주눅이 들어 최선으로 충성한 뒤에 이런 말을 듣는다. ‘너도 원한 거잖아. 원해서 해놓고 왜 이래.’ 



단아는 편지를 쓰고, 유리는 일기를 쓴다. 수진은 책을 읽고, 미영은 대자보를 쓴다. 그리고 진아는 수사를 한다. 그들의 '자기만의 방식'은 잊고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고 말하고 쓰고 알리는 것들이다. 그런 뒤에야 우리는 '처음으로 제대로 된 시간을 넘어가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라고 말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이 되지 않아도, 그렇게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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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친구의 머나먼 길 시공주니어 문고 3단계 68
실라 번포드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 시공주니어 / 2011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첫째. 나는 '충직하다'는 말의 뜻을 잘못 알고 있었다. 충직하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복종하고 헌신한다는 것이 아니었다. 래브라도 리트리버 루아스가 주인을 찾아 길을 나서기로 했을 때 그것은 신념의 문제가 된다. 신념을 최우선으로 하기 때문에 험한 길을, 괴로움을, 희생을 감내할 수 있다. 그리고 믿음과 존중이 충직함의 원동력이 된다. 루아스는 고결한 개다. 책을 읽는 동안 루아스를 대하기가 '어렵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둘째. 나는 우정이 서로를 존중하는 것인 줄은 알았지만, '존중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한다는 건지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이 책을 읽고 정확한 설명을 하나 얻었다. 우정이란 가장 뒤처진 친구의 보폭으로 함께 걷는 것이다. 늙은 불테리어 보저가 지치고 다쳤을 때, 친구들은 그가 움직일 수 있는 만큼만 움직인다. 냉정한 샴 고양이 타오조차 사냥한 먹이를 보저 코앞에 갖다 준다. 생색도 없고, 인사도 없다. 밤이면 보저 곁으로 모여 체온을 나누고 잔다.


셋째. 어쩌면 이 점이 제일 중요한데, 나는 대사가 없는 동화책은 읽는 재미가 덜하다고 오해해왔다. 이 책의 동물들은 '대화'를 하지 않는다. 행동을 묘사하고 그 이유를 설명하는 것만으로도 극적인 서사를 진행한다. 그런데도 다음 장면이 궁금해서 읽기를 멈출 수가 없다. 대사가 없기 때문에 그 동물의 움직임에 집중해 머릿속에 그림을 그리게 된다. 책에 삽화가 없는 것도 그래서 더 좋다.


이렇게 좋은 책을 읽었다. 글솜씨가 부족해 매력을 더 잘 설명할 수 없지만, 직접 읽을 친구들 방해도 덜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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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여러분 안녕하세요? 보고 드릴 것이 있습니다.


제가 책을 썼어요. 『어린이책 읽는 법』(유유출판사)입니다. 어린이책 편집자로, 독자로, 어린이 독서 선생으로 일하면서 읽고 보고 생각한 것을 적었습니다. 설명하려니 쑥스럽네요. 혹시 어린이의 책 읽기, 또는 (어른의) 어린이책 읽기에 관심 있는 분들은 링크를 참고하셨으면 하고 말씀 드립니다.  


게을러서 꾸준히 하지는 못했지만, 알라딘 서재 덕분에 어린이책을 계속 좋아할 수 있었습니다. 같이 읽고 이야기 나누어준 친구들께 감사드립니다. 어쩌다 보니 트위터에는 일찍 썼지만, 다른 데 알리기 전에 여기에 먼저 말씀 드리고 싶었어요. 앞으로도 열심히 읽고 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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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7-05-17 21: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네꼬님 책 출간 하셨군요.
축하드려요.
많은 분들에게 사랑받는 책이 되면 좋겠어요. 남녀노소누구나 니까, 시간지나도 계속 읽는 스테디셀러가 되기 바래요.
좋은밤되세요.^^

네꼬 2017-05-18 08:56   좋아요 2 | URL
서니데이 님 안녕하셨어요? 감사합니다.
모쪼록 조금이나마 도움 되는 책이면 좋겠다는 욕심;;은 있는데 한편으로는 큰일 났다 하고 조마조마 합니다. 지금은 아침이니까, 좋은 하루 보내세요! (이건 왠지 서니데이님 전용 인사 같은데요..?)

hnine 2017-05-17 22: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네꼬님. 축하드립니다.
제 집의 어린이가 더 이상 어린이가 아니게 된 후부터 어린이책 읽기가 뜸해졌지만 한때 푹 빠져 있던 분야라서 아직도 관심이 가네요.

네꼬 2017-05-18 08:58   좋아요 1 | URL
hnine님 감사합니다 :)
어린이 다 큰 다음에 혼자 읽는(?) 어린이책도 매력 있을 것 같아요. 그래도 댁의 어린이가 더 이상 어린이가 아니라니 그것만은 축하 드립니다 하하하.

알콩달콩맘 2017-05-18 00: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

네꼬 2017-05-18 08:59   좋아요 1 | URL
알콩달콩맘님 감사합니다.
앞으로 여기서든 밖에서든 열심히 읽고 쓰겠습니다. (^^)

단발머리 2017-05-18 05: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네꼬님~~ 책 출간 축하드립니다.
네꼬님 책이라 반갑고, 유유출판사라서 반갑네요.
많은 분들에게 사랑받는 베스트셀러, 스테디셀러 되시길요~~~~

네꼬 2017-05-18 09:01   좋아요 1 | URL
단발머리님 감사합니다.
저도 유유출판사랑 일하게 돼서 좋아요.
베스트셀러, 스테디셀러라니 더블 축복의 말씀 감사합니다. ♡가 절로...

dys1211 2017-05-18 06: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 출간 축하 드립니다.^*

네꼬 2017-06-23 11:06   좋아요 1 | URL
dys1211 님 감사합니다.
내 놓고 보니 조마조마 한데, 응원들 주셔서 힘 나네요!

레와 2017-05-18 14: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꼬님 다시한번 축하드립니다~!!

네꼬 2017-05-18 23:50   좋아요 0 | URL
레와님 감사합니다. 축하는 또 받아도 또 좋네요. 헤헤. ♡

그리운 남쪽 2017-05-19 12: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네꼬님 글이 잘 안 올라오니 서재에도 발길이 뜸해지던데요.
5월 들어서는 괜히 기분좋은 일이 많았는데 거기다 네꼬님 책이라니!
두근두근 기대하는 시간도 좋고, 책을 손에 넣어 읽는 시간도 좋을 것 같아요.
그래서 축하와 더불어 미리 감사의 말씀도 전하는 바입니당

네꼬 2017-05-21 19:33   좋아요 0 | URL
그리운 남쪽님 안녕하세요. 이런 따뜻한 댓글 감사합니다. ♡
5월의 ‘괜히 기분 좋은 일‘ 무엇일까요? 저의 기분 좋은 일들과 비슷한 것면 좋겠네요. 저도 좋은 계절에, 좋은 때 책이 나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조그맣고 가벼운 책이에요. 모쪼록 기회 될 때 보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당 ♬

희망찬샘 2021-01-03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꼬님 안녕하세요. 좋은 책 써 주셔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책 읽다가 왠지 네꼬님이 쓰셨을 거 같은 생각이 들어 검색해 보았죠.
우왓!!! 2017년 글에 댓글을 달게 되어 쑥스럽지만 그래도 제가 네꼬님 책 열심히 읽고 있다고 말씀 드리고 싶어 들어와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