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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란 무엇인가?

SF의 시조(始祖) -- 토마스 모어, 메리 셸리, 휴고 건즈백
그러면 SF는 과연 무엇일까요? 언뜻 생각하면 쉬운 것 같지만, 사실 따지고 들면 이 문제는 꽤나 어렵습니다. 그저 우주선이나 외계인이 나온다고 해서 다 SF라고 할 수는 없거든요.
과연 SF가 무엇인지를 알아보는 한 가지 방법으로, 먼저 'SF의 시조'들을 알아봅시다. SF문학의 시초를 누구의 어느 작품으로 보느냐에 따라 이 장르를 보는 관점이 각각 구체적인 차별성을 지니며 드러나게 되거든요. SF의 시조는 대략 다음의 세 가지로 꼽히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SF를 ‘합리적인 가상소설의 범주’로 생각할 경우, 1516년에 토마스 모어가 발표한 「유토피아」가 '최초의 과학소설'로 꼽힙니다. 이 작품은 집필 당시의 환경을 고려할 때 매우 과학적인 형식논리를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과학적으로도 괄목할 만한 진보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관점에서 말하는 '가상소설'이란 ‘시공간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던 배경과 이야기를 채택하는 작품’을 의미하지요. 이것은 대중적인 장르소설로서의 SF가 아닌 주류문학에서도 많이 볼 수 있는 기법입니다.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을 비롯하여 남미 작가인 마르케스나 보르헤스, 그리고 오웰이나 헉슬리 등이 이 계열의 주요 작가입니다.

두 번째로, 현대 SF소설의 형식을 완벽하게 배태하고 있는 작품으로, 1818년에 발표된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을 듭니다. 산업혁명 이후 발달한 과학기술 이론을 반영하여 내용 묘사에 사실성을 부여함과 동시에, 문학으로서의 가치를 지니는 은유나 풍자, 수사 역시 빼어나게 구사한 걸작입니다. 아이작 아시모프나 브라이언 올디스 등 많은 사람들이 이 관점을 지지하고 있지요.


세 번째는, 오늘날 추리소설 등과 함께 대중적인 장르로 자리 잡은 SF, 즉 '장르 SF'의 시조로 꼽히는 작품으로서, 1911년 미국의 휴고 건즈백이 자신의 잡지에 연재하기 시작한 「랄프 124C41+」라는 소설(사진오른쪽, 사진은 소설에 들어간 삽화)이 있습니다. 이 작품은 작가가 처음부터 발달하는 과학기술의 미래상을 일반 대중들에게 전달할 목적으로 집필하고 상업적으로 출간한 것이며, '사이언티픽션(scientifiction)'이란 말을 처음 만들어낸 것도 건즈백입니다.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SF문학상인 '휴고상(Hugo Award)'은 바로 이 사람의 이름을 딴 것이지요.



휴고 건즈백은 1926년에는 세계 최초의 SF 전문잡지인 <<어메이징 스토리(Amazing Stories)>>를 창간했는데, 이에 대해 독자들이 열렬한 반응을 보이자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는 여러 가지 SF잡지들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와 이른바 '펄프 매거진(잡지들의 종이 질이 나빠서 이런 별명이 붙었습니다)'의 시대를 열게 됩니다. 이 시기부터 크게 인기를 끈 것이 이른바 '스페이스 오페라'라고 불리는 우주 활극물로서, 이런 소설들의 기본 틀은 근육질의 미남 주인공이 우주를 누비고 다니며 미녀를 보호하고 모험과 로맨스를 펼치는 영웅담입니다. <스타워즈>야말로 바로 이런 스페이스 오페라의 전통을 충실하게 이어받은 작품이지요.

(사진 위는 펄프SF잡지들 )


뉴 웨이브 SF--‘innner space’에 대한 관심

현대 SF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또 한 가지 열쇠는 '뉴 웨이브 SF'라는 것입니다. 기존의 SF가 '바깥 우주(outer space)'를 탐색하는 것이었다면, 뉴 웨이브는 인간의 의식적인 내면세계를 탐구하는 '안쪽 우주(innner space)'로 눈을 돌린 것입니다. 뉴 웨이브SF는 사회의 구조적인 부조리나 인간의 내면세계, 심리 등을 SF적인 기법으로 새롭게 접근, 해석하려 시도했던 흐름으로서, 1960년대를 전후하여 영국과 미국 등지에서 활발하게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난해하고 실험적인 성격이 강해서 기존의 SF 독자들에겐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지요. 그래서 결국은 뉴 웨이브 SF의 대표작이라 할 만한 뚜렷한 작품도 없이 몇몇 작가들만이 주목을 받다가 흐지부지 SF의 주류에 편입되었지만, 결과적으로는 현대 SF문학이 질적으로 성숙된 면모를 갖추는 데 커다란 기여를 했습니다. SF를 'Speculative Fiction', 즉 사색(思索)소설, 추론(推論)소설, 또는 사고(思考)소설이라는 새로운 풀이로 보게 된 것도 바로 그 시기부터입니다. 좀 어렵지요?

그래도 SF는 단순히 과학기술의 계몽 수단이 아니라, 자체적으로 고유의 정서를 가진 하나의 예술 장르라는 사실만 새기면 됩니다. 다음에는 SF와 사회의 상호작용에 대해 재미있는 사례들을 들어가며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by casp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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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청소년을 위한 인터넷 사이트 글틴에 SF 평론가 박상준님이 쓰신글을 갈무리하여 올리는 글입니다.(이하 SF 문학의 세계는 모두 박상준님이 쓰신 글임을 밝혀두는 바입니다)

과학적 합리성으로 무장한 상상력, SF

정지용이 자신의 책 「문학독본」(1948) 맨 앞에 붙였던 짤막한 서시가 있습니다.
별똥 떨어진 곳
마음에 두었다
다음날 가보려
벼르다 벼르다
인젠 다 자랐소

저는 SF를 즐기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분기점은 바로 이 시를 통해서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이 시에 대한 일반적인 감상이라면 ‘삶에서 꿈꾸던 이상과 현실의 괴리’ 정도로 은유적인 의미를 이끌어낼 수 있겠지요.
그러나 SF독자들은 그에 더해서 ‘별똥별’이라는 구체적 물체에도 묘한 이끌림을 느낄 것입니다. 별똥별이 떨어진 곳을 정말로 찾아가 보고픈 생각도 들고, 혹시 그 별똥별에 무엇인가 담겨있지는 않을지 상상의 나래를 마구 펼치지요. 그러면서 어느새 별똥별이 떨어진 곳보다는 별똥별이 온 곳, 즉 우주로 시선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SF든 판타지든 공히 비슷한 정서를 공유하게 됩니다. 하지만 SF독자들은 ‘마법’ 대신 ‘과학’을 택합니다. 설령 마법처럼 보이는 것이라 하더라도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요. 어떤 일이든지 상상은 자유지만 실제 구현 과정에서는 과학적 합리성을 중시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 부분도 깊이 따지고 들어가면 경계가 모호해지지만(<스타워즈>는 SF가 아니라 판타지일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론적으론 불가능한 초광속비행이라든가 운동역학 법칙, 에너지 보존 법칙 등을 무시한 묘사들이 숱하게 등장하기 때문이지요), 아무튼 SF에 등장하는 모든 사건들은 최소한의 과학적 형식논리를 지니고 있습니다.


('경이감‘을 주는 우주의 광경들. 영화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의 장면)

그렇다면 SF팬들이 별똥별을 보고, 또는 우주를 보며 느끼는 그 특별한 정서는 과연 무엇일까요?
서양에서는 흔히 그것을 ‘경이감(sense of wonder)’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세상에서 현실적으로 접해보지 못한 뭔가 낯설고 놀라운 대상, 그리고 그 존재로 인해 연상되는 온갖 미지의 가능성들. 우리는 이런 느낌을 시각적인 이미지에서 얻을 수도 있고(예를 들어 토성의 달 표면에서 토성이 지평선으로 떠오르는 모습을 본다고 상상해 봅시다. 토성과 그 거대한 테두리가 하늘을 가득 채우며 서서히 올라오는 모습은 아마 태양계 최고의 장관 중 하나일 것입니다), 또 책에서는 활자매체 특유의 상상력 자극 작용에 의해 더더욱 증폭된 경이감을 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직은 뭔가 허전하지요? 경이감은 필요조건이기는 하지만 충분조건이 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SF팬들만의 독특한 정서를 명확하고도 핵심적으로 파악할 수는 없을까요?

시공간에 대한 인류적인 시야
<로마클럽>이라는 전 세계 여러 분야 학자들의 모임이 있습니다. 이들은 일찍이 1970년대 초반에 인류 문명의 미래를 암울하게 진단한 보고서 「성장의 한계」를 내놓았지요. 인류 미래에 대한 그 불길한 시나리오들, 즉 자원고갈, 인구폭발, 환경오염 등의 내용은 대단한 충격을 주었지만, 오늘날에는 그런 변화가 당시의 예상보다는 ‘천천히’ 진행되고 있다는 쪽으로 결론이 난 상태입니다.

어쨌거나 그 보고서의 도입부에는 흥미로운 도표가 하나 자리 잡고 있는데, 사람들이 시공간적으로 얼마나 멀리, 또 미래를 생각하며 살고 있는가를 인류통계학적으로 나타낸 ‘인간의 시야’라는 그림입니다. 그 그래프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공간적으로는 자기 마을, 자기 도시, 자기 나라 이상은 벗어나지 못합니다. 시간적으로도 1년 뒤, 10년 뒤가 제일 많고 백년 이후 후손들까지 고려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지요. 인류 대다수는 원점 근처에 옹기종기 모여 있으며, 이들은 그야말로 자기 입에 풀칠하느라 바쁜, 일터와 집만을 오가며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고단한 삶의 시야에 갇혀 지냅니다. (물론 그런 삶을 살면서도 넓은 시야를 가진 사람은 있지요.) 또는 기껏해야 자기 가족만 생각하며 1년 이상을 내다보지 못하는 삶의 시야를 가지고 있는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 보고서는 그래프 상에서 원점과 가장 멀리 떨어져있는 사람들, 즉 시간적으로는 몇 세대 이후의 후손들까지 생각하고 공간적으로는 지구를 벗어나 태양계와 그 밖의 우주까지 아울러 사유하는 사람이야말로 바람직한 미래의 인류상이라고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그야말로 ‘우주 속의 지구라는 천체’ 위에서 문명을 영위하고 있는, ‘인류의 시야’를 지니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바로 이런 시야야말로 정통적인 의미에서의 SF팬들에게 가장 보편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와 관련해서 한 가지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아서 클라크(사진 왼쪽)는 「2001년 우주의 오디세이」등을 쓴 세계적인 SF작가이자 미래학자인데, 1969년에 아폴로 우주선이 처음 달에 착륙하던 날 실황중계의 해설자 역할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나중에 말한 바에 따르면, 인류 최초로 달에 사람의 발자국이 찍히는 그 역사적인 순간에, 방송국 한 구석에서 어떤 직원이 스포츠 채널을 열심히 시청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인간의 달착륙 장면이 특별히 관심을 끄는 일이 아니었던 모양이지요.

물론 여기서 그 직원의 개인적 취향을 비난하거나 조롱하려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다만 인간은 이렇듯 다양한 개성과 정서의 소유자들이라는 사실을 너무나도 드라마틱하게 보여주는 사례라서 인용하는 것뿐이지요. 마찬가지로 SF를 즐기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SF 팬의 입장에서는 우리 인류가 어서 우주로 진출하기를 간절히 바라겠지만, 사실 현대사를 돌이켜 보면 인간은 19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까지의 특정한 한 시기에만 달로 몇 번 왕복여행을 했을 뿐, 그 이후에는 오히려 퇴보해 버렸습니다. SF팬들의 입장에서는 꽤나 안타까운 일이지요. 그렇지만 우리 인류 전체가 전부 다 SF적인 정서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는 점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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