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에 나온 첫 번째 <스타워즈> (사진 위쪽)영화를 보면, 주인공 루크가 살고 있는 타투인 행성에선 두 개의 태양이 떠오릅니다. 또 휴머니즘이 진하게 배어 있는 영화 <스타맨>에 등장하는 외계인의 고향 행성은 칠흑처럼 검은 빛에 가스구름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지요. 그런가 하면 밤하늘에 둘 이상의 달이 떠 있는 광경은 외계를 다룬 SF영화나 소설에서 흔히 묘사되는 광경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SF작가들이 외계의 세상을 상상할 때 가장 먼저 착안하는 점 중의 하나가 바로 지구와는 전혀 다른 천문물리적 환경을 설정하는 것입니다. 어떤 작가들은 푸른색 태양을 등장시키기도 하고, 좀 더 상상력을 발휘하여 블랙홀 주변을 불안하게 공전하는 위기의 별세계를 가정하기도 하지요.
이러한 ‘외계 환경’에 대한 상상력은 이미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케플러의 법칙’등의 천체역학 이론을 규명해내어 천문학사상 불후의 업적을 남긴 17세기 독일의 과학자 요하네스 케플러는 자신이 직접 SF소설을 집필하기도 했는데, 그는 1634년에 달과 그곳에 사는 생물을 묘사한 <솜니움>이란 작품을 발표한 바 있습니다. 그 작품에 나오는 달의 모습은 역시 동시대의 위대한 천문학자였던 갈릴레오가 달을 자세히 관측한 기록과 거의 일치하기는 하지만, 달에도 물과 대기가 있다고 묘사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기도 하지요.

또 조나단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는 원래 신랄한 사회 풍자로 유명한 작품이지만, 사실 은 SF문학의 입장에서도 상당히 높이 평가받는 걸작입니다. 왜냐면 이 소설에는 반중력 개념이 등장하는가 하면, 화성의 달이 두 개라는 사실을 예측하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태양도 하나, 달도 하나라는 것이 당연한 진리처럼 여겨지던 시대에는 이 정도의 상상력도 꽤 파격적인 것이었지요.

태양은 여섯개, 별은 천년에 한번 출현?
20세기에 접어들어 대중오락 소설로서 SF가 크게 각광을 받게 되자, 작가들은 상상력을 총동원하여 온갖 가능한 형태의 외계 풍경들을 창조해내기에 이르렀습니다.

세계 SF문학사에 거대한 발자국을 남긴 아이작 아시모프는 약관의 신인 시절에 이미 SF작가들만이 이루어낼 수 있는 놀라운 외계 세상을 창조해낸 바 있습니다. 1941년 당시 미국의 대표적인 SF잡지였던 <어스타운딩(Astounding)>지 9월호에는 <전설의 밤> (사진 아래 왼쪽)이라는 단편이 실렸는데, 스물한 살에 불과한 청년작가 아시모프는 이 한 편으로 순식간에 쟁쟁한 SF작가의 대열에 올라서게 됩니다.
아시모프는 그에 앞서 3월에 <어스타운딩>지의 편집장인 존 캠벨과 새로운 작품의 구상에 대해 토론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에머슨의 <자연론> 제1절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부분은 ‘만약 별이 1천 년에 하룻밤씩만 모습을 드러낸다면 사람들은 모두 별을 우러러 받들며 몇 세대에 걸쳐서 종교적 계시나 전설처럼 추앙할 것’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아시모프는 실제로 이러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는 천문학적인 조건들을 얘기했고, 이에 캠벨은 그것을 소설로 형상화해볼 것을 권합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탄생한 작품이 바로 <전설의 밤>입니다.
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세계는 밤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하늘에는 무려 여섯 개의 태양이 있어서 그 중에 최소한 하나 이상은 언제나 떠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 별의 주민들은 고도의 과학문명을 이루었지만 천문학만큼은 예외여서 온 우주가 별들로 충만해 있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한 채, 자기들의 세계와 하늘의 여섯 태양만이 우주의 전부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세계에는 불가사의한 전설이 하나 전해 내려오고 있었지요. 1천 년에 한 번 온 세상에 어둠에 묻히고 하늘에는 ‘별’이라는 것이 온통 가득차는데, 그 때가 오면 세상은 멸망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별의 문명은 주기적인 흥망성쇠를 거듭해오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전설에서 말하는 그 날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사람들은 공포와 불안에 휩싸입니다. 그러나 한 천문학자는 그 전설이야말로 여섯 개나 되는 태양 때문에 겨우 1천 년에 한 번씩 발생하는 개기일식이 아닐까 추측합니다.
천문학자의 생각은 옳았습니다. 1천년에 한 번 찾아오는 밤은 단순히 개기일식이라는 천문현상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밤’이라는 낯선 어둠에 휩싸인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마구 불을 지릅니다. 환하게 불을 지펴서 어둠을 몰아내려는 필사적인 노력이었지요. 결국 이 별의 문명이 1천년에 한 번씩 멸망과 재건을 거듭한 이유는, 이처럼 일식에 놀라 스스로 낸 불 때문에 모든 것이 불타 없어졌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하늘에 태양이 하나뿐이 아니다’라는 발상은 당시로서는 놀라운 착안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설정은 과학적으로도 충분히 가능한 상황일뿐더러, 나중에 천문학자들에 의해 우주에 그런 태양계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지요. 현재 알려지기로는 우리 태양계처럼 항성이 하나뿐인 경우보다는 오히려 2연성, 3연성 등 둘 이상의 항성들이 모여서 태양계를 형성하고 있는 경우가 더 많다고 합니다. 실제로 작년에 폴란드의 한 천문학자가 백조자리에서 태양이 세 개인 행성을 발견하여 ‘타투인’이라고 이름을 붙이기도 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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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사회에 대한 은유와 풍자 역할도
그러나 1930년대 이후 SF에서 묘사된 외계인들은 주로 지구를 침략하는 악역이 대부분이었고, 개중에는 ‘외계인’이 아니라 ‘외계 괴물’이라고 해야 어울릴 만한 모습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또 이러한 경향은 영화에도 반영되어 1950년대부터는 외계의 괴물을 등장시킨 공포영화들이 전성기를 구가하게 됩니다.
1950년대는 서구 영화계에서 SF라는 장르가 도약기를 맞은 시기였습니다. 지금까지도 걸작으로 손꼽히는 작품들 중 상당수가 이 시기에 만들어졌는데, 특히 미-소 양국 간의 긴장된 냉전 분위기가 지배했던 당시의 국제 정세를 반영한 작품들이 상당히 많았지요. 이러한 영화들에 등장하는 외계인들은 이전까지의 만만했던(?) 선배들과는 달리 관객들로 하여금 소름이 오싹 끼치도록 무시무시한 모습을 지니고 나타났는데, 대부분은 SF소설로 먼저 발표된 것을 영화로 각색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종류의 작품들 중 흔히 두 편을 대표적으로 꼽습니다.
1951년에 발표된 <괴물(The Thing)>(사진 왼쪽은 영화 괴물 포스터 그림)과 1956년에 처음 선을 보인 <신체강탈자들의 침입 (Invasion of the Body Snatcher)>이 그것입니다. 이 두 작품은 모두 원작 SF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는 것, 그리고 1970년대 및 80년대에 새롭게 다시 만들어졌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괴물>은 미국의 탁월한 SF편집자이자 작가였던 존 캠벨의 단편 <거기 누구냐!(1938)>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인데, 외계에서 온 정체불명의 생명체가 인간의 몸속에 잠입하여 겉모습은 인간 그대로지만 정신은 외계인의 것이라는 설정이 전개됩니다. 또 <신체강탈자들의 침입>은 미국의 잭 피니가 1955년에 발표한 같은 제목의 장편소설을 영화로 각색한 것으로, <괴물>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외형을 그대로 지니는 외계의 괴물이 등장합니다. 이 작품의 외계 생물은 인간의 육체를 똑같이 복제해내는 능력을 지녔지요.

위의 두 작품에 등장하는 외계인은 당시의 시대 상황을 예리하게 풍자했다는 점에서 흥미롭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SF의 외계인들이 단순히 지적 유희에 가까운 상상력 그 자체를 즐기는 것이었다면, 위 두 작품의 외계인들은 인간 사회를 은유하고 풍자하는 고도의 의미심장함을 지니게 된 것이죠. 그래서 겉모습은 인간과 전혀 구별이 안 되는 멀쩡한 사람의 모습이지만 그 속에 어떤 생각이나 의도를 숨기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외계인들은, 그 이전의 흉측한 외모를 지닌 외계의 괴물보다 훨씬 더 차원 높은 공포를 제공했습니다. 갖가지 이데올로기며 이념적인 대립과 갈등으로 혼란했던 당시의 시대상은 이처럼 대중문화 분야에도 예외 없이 반영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창조된 외계 괴물의 전통은 그 뒤 소설이나 영화 분야 모두에서 하나의 확고한 틀로 자리를 잡아 지금까지도 같은 구성의 작품들이 꾸준히 발표되고 있습니다. SF 영화사상 새로운 전기를 가져왔다고 일컬어지는 <에일리언(1979)>은 그 대표적인 예로서, 이 작품에 등장하는 외계인은 아마도 SF영화사상 가장 유명한 외계 괴물일 것입니다.. 또 1985년에 발표된 <우주의 뱀파이어> 역시 우주를 방랑하는 괴물 외계인들이 지구인들의 몸과 혼을 앗아가는 장면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영국의 저명한 평론가이자 작가인 콜린 윌슨의 원작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것이지요.

1960년대부터는 SF에 등장하는 외계인들의 모습이 지구인이나 지구상의 다른 생물과 비슷한 외형을 갖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이것은 외계인이라는 상황 설정을 통해 일반 문학과 마찬가지로 인간 사회의 희로애락을 풍자하고 은유해보려는 작가들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SF문학이 나름대로의 문학성을 쌓아나가는 데 적잖이 이바지하게 된 경향입니다.(사진 오른쪽-인간보다 착한 파충류 외계인이 나오는 <양심의 문제> 책표지) . 제임스 블리쉬가 1958년에 발표한 <양심의 문제)에서는 지구에서 파견된 성직자가 외계 행성에서 사악하게 생긴 파충류 모양의 외계인들을 만나는데, 그는 그 외계인들이 지구인보다 훨씬 더 착하고 고운 심성을 지닌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과연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가 고민에 빠집니다.

또 미국의 월터 테비스가 1963년에 발표한 <지구에 떨어진 사나이>에선 지구인과 거의 똑같은 모습을 지닌 화성인이 등장합니다. 그는 사멸해가는 자신의 고향별을 구할 방법을 찾고자 지구에 왔지만 인간 사회에서 부대끼고 시달린 끝에 결국은 폐인이 되고 말지요.

<사진 위는 영화 에일리언에 나오는 괴물외계인의 모습 >


외계인은 실제로 있지 않을까?
한편 우주의 어느 곳인가에 외계인이 실제로 존재할 가능성을 끈질기게 추구하는 노력 역시 끊이지 않고 맥을 이어왔는데, 지금은 하나의 용어로 굳어버린 ‘최초의 접촉(first contact)’, 즉 지성을 가진 외계인과 최초로 접촉한다는 주제는 모든 SF팬들의 변함없는 열망이었습니다. 이 주제에 관해서는 영화 쪽에서 거의 교과서적인 모델이 제시된 바 있지요. 헐리우드의 귀재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1977년에 발표한 영화 <미지와의 접촉(Close Encounters of the Third Kind)>이 바로 그것으로, 마치 다큐멘터리 같은 사실적 묘사와 빼어난 영상 등으로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올라섰습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외계인은 인간처럼 두 팔, 두 다리가 달린 휴머노이드 형의 몸체에 머리는 크고 키는 작은 모습입니다. 그리고 1985년에 나온 칼 세이건의 소설 <콘택트> 역시 과학적으로 탁월하게 묘사된 외계 문명과의 접촉 이야기입니다. 1997년에 영화로도 만들어진 이 작품은, 외계 문명이 수학에 바탕을 둔 우주 공통의 논리 언어로 지구 인류에게 메시지를 보내옵니다. 아쉽게도 외계인의 실체는 단 한 번도 속 시원하게 드러나지 않지만요.

1980년대 들어 국제 정세가 서서히 긴장 완화의 데탕트 시대로 바뀌면서 무시무시한 괴물 외계인 대신 우호적이고 친근감을 주는 외계인들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1982년에 발표된 영화 는 우스꽝스런 모습의 땅딸보 외계인이 홀로 지구에 낙오하면서 지구인 어린이와 감동적인 우정을 나누는 이야기로 너무나도 유명하지요. 영화 <에일리언>에 등장하는 끔찍한 외계인은 괴물로서는 가장 유명할지 모르지만, 에 등장하는 외계인은 아마도 모든 SF영화, 소설을 통틀어 가장 유명한 외계인 캐릭터일 것입니다. 또한 1984년에 발표된 <스타맨>이나 1985년에 발표된 <코쿤> 등의 영화는 모두 따듯한 심성을 지닌 외계인들이 지구를 방문했다가 떠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비교적 최근 영화인 <맨 인 블랙> 같은 경우는 온갖 외계인 캐릭터들이 총출동한 외계인 만물상 같은 코미디였지요.

지금까지의 외계인들은 어떻게 보면 독립된 생물 개체라는 관점에서 지구 인류와 크게 차이가 없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SF적 상상력을 확장해 보면 외계 생명체가 반드시 그런 식으로만 존재하라는 법은 없겠지요. 스타니스와프 렘의 소설 <솔라리스>에서는 한 외계 행성의 바다 전체가 하나의 의식을 지닌 생명체로 나오고, 영화 <스타 트랙> 극장판 1편에는 로봇 생명체의 개념이 등장합니다. 지구상의 생물들처럼 탄소에 기반을 둔 유기물이 아닌 무기물, 즉 쉽게 말해서 반도체가 생명체로 진화해 나간다는 설정이지요. 그런가 하면 영화 <에볼루션>에는 어떤 형태로도 순식간에 진화해나가는 무시무시한 환경적응력을 지닌 외계생명체도 등장합니다.

과연 미래에는 정말로 외계 문명인과 조우하는 날이 오게 될까요? 그건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우리들로서는 그때까지 하나뿐인 지구를 잘 보존해나가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과학기술이 일방적으로만 내달리다 보면 인류 자체의 생존에 치명적인 위협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죠. 이런 문명의 위기를 이미 슬기롭게 극복한 외계인들이 지금 우주 저 멀리서 자신들도 은하 문명의 일원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by casp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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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에서 가장 인기 있는 테마는 뭘까요?
타임머신을 타고 환상적인 시간여행을 할 수도 있고 사람보다 더 똑똑한 로봇을 만날 수도 있겠지만, 역시 가장 신나는 건 우주선을 타고 낯선 외계로 나가 기기묘묘한 외계인들을 만나보는 것 아닐까요?
우리는 이제껏 여러 SF영화나 소설들을 통해 수많은 외계인들을 접해왔지만, 엄밀히 따지고 보면 거의 대부분은 서양에서 수입된 것입니다. 즉, 다시 말해서 외계인이나 외계 사회를 묘사해보려는 시도는 서양문화권에서 주도적으로 이루어져 왔던 것이지요.
그래서 근대 이후의 서구문학사를 살펴보면 외계인이 등장하는 작품들이 심심찮게 눈에 뜨이는데, 이들의 묘사가 어떻게 변천해 왔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꽤 흥미로운 작업이 될 것입니다. 외계인관(觀)의 변천사는 우리 인류가 어떻게 ‘바깥 우주(outer space)’를 인식해왔는지 알아보는 데 적잖은 실마리를 제공해 줄 것이기 때문이지요.

우호적이거나 적대적이거나
지구를 방문한 외계인이 등장하는 이야기들은 서구 문학사에서 17,18세기경부터 활발하게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등장한 외계인들은 엄밀하게 말하면 외계인의 옷을 입은 지구인에 지나지 않았고, 그들의 행동이나 말도 역시 우리 인간들과 별 다를 바가 없었죠. 그러다가 지구상의 생물들과는 완전히 다른 생태적 특징, 지구인들의 사고방식이나 의식세계와는 전혀 다른 외계인이 등장하는 것은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입니다. 외계의 환경과 외계의 생물들을 과학적으로 추측하고 상상해보는 일은 당시 라마르크와 다윈 등에 의해 널리 퍼지게 된 진화론에 힘입은 바가 컸지요.

19세기 후반에 나타난 주목할 만한 외계인의 묘사는 먼저 프랑스 작품들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까밀 플라마리온의 논픽션 <현실 세계와 상상의 세계(1864)>는 외계인의 개념을 사실상 최초로 대중화시킨 저작으로 꼽히며, J. H. 로스니의 <무한의 항해자들(1925)>에서는 인간과 외계인의 사랑이 등장하기에 이릅니다. 이 작품에서 인간은 여섯 개의 눈이 달리고 다리가 셋인 화성인과 연애를 한답니다.

당시의 프랑스 작가들이 외계인을 묘사하는 태도는 적대적이고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우호와 호기심이 섞인 따뜻한 입장이었습니다. 그들은 라마르크나 베르그송 같은 프랑스의 진화론적 철학자들의 영향을 받아, 외계인의 개념을 통해 인간 자신을 인식하는 새로운 접근방법들을 개척하려 했던 것이죠.
한편 다윈의 진화론 중에서도 적자생존설(適者生存說)에 많은 관심을 가졌던 영국에서는 외계인들 역시 인간의 적으로 파악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대표적인 예로서 SF의 고전인 H. G. 웰즈의 <우주전쟁(1898)>은 무자비한 살상을 저지르는 화성인(사진 위 왼쪽)을 등장시켜 그 뒤 적대적인 외계인상을 굳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특히 이 작품은 나중에 미국에서 오손 웰즈가 라디오 드라마로 각색하여 방송하는 과정에서 청취자들이 실제 상황으로 착각, 한바탕 대소동을 일으켰던 기념비적인 에피소드로 더욱 더 유명해졌지요.

지구인 영웅을 위한 조연으로 나서다
20세기 초 미국에서는 이른바 ‘펄프 매거진(pulp magazine)’으로 불리는 싸구려 대중잡지들이 전성시대를 이루었습니다. 이 잡지들을 통해 수없이 많은 SF작품들이 발표되었는데, 외계인은 통속적인 ‘우주 활극(space opera)’의 조연으로 전락하여 지구인 영웅 만들기에 일조하는 역할이 대부분이었지요. 1910년대 후반부터 미국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던 에드가 라이스 버로우즈의 연작소설 <화성>시리즈가 그 대표적인 예로서, 지구인 주인공이 화성에 가서 화성인들을 거느리고 다른 화성인 악당들을 무찌르며 화성의 공주와 사랑을 나눈다는 내용(사진 오른쪽)입니다. 한편 비슷한 시기에 E. E. 스미스의 <렌즈맨> 시리즈는 천사와 악마의 고전적인 선-악 대비 구도를 대립되는 두 외계 종족으로 형상화시켜 역시 엄청난 인기를 끌었는데, 이 작품에서도 역시 지구인들이 주인공 영웅으로 등장하고 외계인들은 모두 조연에 지나지 않지요. 그러나 이러한 작품들이 ‘외계인’이란 개념 자체를 일반 대중에게 친숙하게 각인시킨 것만큼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20세기 초에 서양에서 대중적으로 정착된 외계인 개념은, 그 뒤로 전 세계의 SF작가들이 외계인이라는 존재를 더욱 더 깊은 차원으로 탐구해 들어가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영상 매체의 발달에 힘입어 외계인의 생생한 묘사는 책에서뿐만 아니라 영화에도 감상할 수 있게 되었지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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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는 미래를 창조한다
위의 사례는 SF작가의 과학적 상상력이 어떠한 것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남들과 똑같은 조건 하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들만을 가지고 SF작가는 가장 과학적이면서도 창조적인 상상력을 펼치는 셈입니다. 이렇게 되면 SF는 단순히 미래를 예측하는 차원이 아니라 미래 그 자체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미래를 예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미래를 직접 창조하는 것’이라는 말처럼, SF작가 자신이 예언가가 아닌 창조자가 되는 것입니다. 남은 일은 SF작가의 창조물을 누군가 현실 세계에서 보고 그대로 만들어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요.
좀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여기 또 다른 예를 하나 들지요.

세계 최초의 산업용 로봇 제조회사는 1962년에 미국 코네티컷 주에 설립된 ‘유니메이션’사입니다. 당시 제너럴 모터스 자동차 공장에 설치된 세계 최초의 산업용 로봇이 바로 이 회사 제품이었지요. 오늘날 전 세계의 산업용 로봇 시장을 형성하고 로봇공학의 물리적 토대를 제공하는 데 이 회사가 결정적인 공헌을 했음은 두말할나위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회사의 사장 조셉 엥겔버거는, 대학생 시절에 아이작 아시모프가 쓴 단편 「나는 로봇(I, Robot)」을 읽고 로봇의 가능성에 눈을 떴다고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1970년대 들어서 일본 회사들이 이 분야에 대거 진출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미국 산업용 로봇 시장에서 일본 제품의 점유율이 크게 높아졌는데, 당시의 일본 기술자들은 데즈카 오사무의 ‘아톰’ 로봇을 보고 자란 세대였습니다. 이를테면 일본의 ‘아톰’이 미국의 아시모프 로봇(사진 오른쪽)을 밀어낸 셈이라고나 할까요?

어쨌거나 SF는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한다는 점을 잘 유념하면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도 SF를 쓸 때 혹시 과학적으로 말이 안 되는 건 아닌지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요. SF의 과학적 상상력이 먼저 시대를 앞서가면, 나중에 현실에서 누군가가 그걸 보고 실제로 만들어낼 수도 있으니까요. 이러한 무제한의 과학적 상상력이야말로 SF의 가장 소중한 원천입니다.

SF의 공공의 적(?)
이제 SF작가들의 자유분방한 상상력은 때때로 과학자들이 미치지 못하는 창조적인 영역에까지 뻗어나간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겠지요? 게다가 그런 과감한 상상력이 과학자들에게도 새로운 영감을 제공하게 됩니다. 그런데 SF에 등장하는 이런저런 설정들을 두고 과학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단정지어 버리는 과학자들도 적지 않습니다.

<2001년 우주의 오디세이>를 쓴 아서 클라크는 세계적인 SF작가이자 미래학자이기도 한데, 그는 뛰어난 과학자들조차도 때로는 완고한 보수성을 고집하여 오히려 과학기술 발달에 장애가 될 때도 있음을 지적한 바 있지요.
예를 들어서 기관차나 자동차가 처음 만들어질 당시, 학자들은 ‘시속 30km만 넘어가면 사람은 숨을 쉴 수가 없어서 질식하고 말 것이다’라고 엄숙하게 선언했다고 합니다. 또 20세기 초반까지 거의 모든 과학자들은 ‘공기보다 무거운 물체는 결코 하늘을 날 수 없다’고 확신에 차서 얘기하고 있었습니다. ‘비행기’를 발명하려는 ‘바보 같은 사람들’을 비웃으며 하는 말들이었지요.
당시 미국의 저명한 천문학자였던 사이먼 뉴컴은 대표적인 비행기 불가론자였는데, 그의 생각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라이트 형제가 시험 비행에 성공했습니다. 그러자 뉴컴은 ‘비행사 한 명 정도의 무게 이상은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며 한 발 물러섰다고 하지요.
우주여행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꽉 막힌 과학자들이 있었습니다. 1950년대 중반에 영국 왕립 천문대장을 맡았던 리처드 울리 박사는 ‘우주여행이란 허튼소리’라고 코웃음을 쳤던 인물인데, 바로 그 다음 해에 소련에서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사진 아래 왼쪽-기념우표)를 발사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아서 클라크는 이상과 같은 예들을 들면서 ‘저명한, 그리고 나이가 지긋한 과학자가 어떤 것이 가능하다, 라고 말했다면 그건 거의 옳다. 그러나 그가 어떤 것이 불가능하다, 라고 말했다면 그것은 틀릴 가능성이 높다’라는 상당히 시니컬한 발언을 하기도 했답니다. 그러면서 ‘아주 발달된 과학기술은 마술과 구별이 안 된다’라는 유명한 말도 남겼지요.

우리는 SF영화 등을 보면서 거기에 나오는 장면들이 이러저러해서 과학적으로 엉터리다, 불가능하다, 라는 얘기를 접할 때가 많은데, 그건 어디까지나 SF적 설정을 이용해서 학습 효과를 얻으려는 교육적 수단의 한 방법일 뿐이지, 결코 SF 자체의 좋고 나쁨을 따지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SF는 SF대로 그 상상력을 마음껏 즐기고, 그와는 별도로 과학적으로 가능한지 아닌지는 또 그것대로 재미있게 따져보며 토론하면 되겠지요.

과학기술을 넘어서는 SF
SF가 창조하는 것은 사실 과학기술적 미래상뿐만이 아닙니다. SF에는 과학기술적 미래상이나 아이디어의 참신성 못지않게 문명 비판적 맥락도 작품 전반에 깔려 있거든요.
앞에서 예로 든, 원폭을 예언한 단편 「데드라인」의 경우에도 소설 속에서는 전쟁 당사국들이 결국 원폭을 사용하지 않기로 선언합니다. 원폭의 위력이 너무나도 대단해서 인류에 큰 위협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데드라인」 이전에도 이미 핵무기나 원자력을 상세하게 묘사한 SF소설은 여럿 있었습니다. 핵무기가 전 세계에 대량 확산되면서 딜레마에 빠지는 상황은 일찍이 1941년에 어떤 SF작가가 예언한 바 있고, 그보다 앞선 1940년에는 원자력 발전소의 노동자 문제를 다룬 작품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당시에 이런 SF들을 보면서 과학기술적으로 흥미를 느끼는 차원을 넘어 그로 인한 사회적 파장까지 일찍부터 주목했다면, 그 이후의 반핵 문제나 핵오염 등과 관련된 사회 문제도 일찍부터 조금은 더 나은 방향으로 흐르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SF는 위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과학 및 문화 양쪽 영역에서 모두 주류에 편입되지 못한 마이너 영역이었습니다. 그나마 인문학자들이 이런 쪽으로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1945년의 원폭 충격 이후의 일이며, 그것도 과학 그 자체를 새롭게 바라보려 한 것일 뿐 SF의 문명비판 기능에까지 적극적인 관심이 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SF가 과학적 상상력이라는 본령 못지않게 문명 반성의 실제적 매뉴얼일 수도 있다는 점은 1960년대를 지나면서 여러 작품에서 서서히 드러나게 되었지요. 그 결과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주저 <미래쇼크 Future Shock (1970)>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게 됩니다.
“...학생들에게 역사 과목은 가르치면서 왜 ‘미래학’ 과목은 없는가? 우리가 지금 로마의 사회 제도나 봉건시대 장원의 대두를 탐구하듯이 왜 미래의 가능성과 개연성을 체계적으로 탐구하는 과목은 없는가?
...SF를 문학작품이 아니라 일종의 미래 사회학이라고 본다면 그것은 예측의 습관을 길러내는 정신확장력으로서 엄청난 가치를 지닌다. 어린이들은 SF를 읽으면서 우주선과 타임머신에 관해 알게 될 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하게는 어른이 되어 부딪치게 될 정치적, 사회적, 심리적, 윤리적 문제의 정글 속을 상상력을 발휘해 탐험해 보도록 이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SF는 ‘미래의 나’를 위해 읽혀져야만 한다.”
어때요? 이제는 우리도 학교에서 SF를 정식 교과목으로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By casp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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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와 미래 예측
이전에 저는 ‘다가올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해야만 훌륭한 SF인 것은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실제로 사람들은 어떠어떠한 과학기술이 이미 어느 SF에 일찍이 등장한 적이 있다면서 그 선견지명에 감탄하는 경우가 많지요.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경우들입니다.

1726년에 발표된 <걸리버 여행기>는 작가인 조나단 스위프트가 당시 현실을 풍자하기 위해 쓴 것이지만 SF의 시조로 꼽히기도 합니다. 이 작품에는 반중력장치가 등장하죠. 바로 하늘에 떠 있는 나라 라퓨타(사진 아래 왼쪽)가 이 원리를 쓰고 있습니다.
1911년에 나온 ‘장르SF'의 시조 <랄프124C41+>에서 작가 휴고 건즈백은 TV전화, 형광조명, 신소재, 자기녹음테이프, 마이크로필름, 스텐레스스틸, 전송신문, 태양전지, 자동판매기 등 수많은 과학문명의 이기들을 미리 선보인 바 있습니다.
또 1916년에 러시아의 콘스탄틴 치올코프스키는 <달세계 도착!>에서 현대의 우주선과 같은 방식의 달 여행을 묘사했으며, 액체연료로켓과 우주복, 그리고 우주온실까지 등장시켰습니다.
20세기 초반 미국에서 대단한 인기를 끌었던 에드워드 스미스의 <우주선 종달새호(1928)>에는 초광속우주선과 반물질까지 도입됩니다.
또 1941년에 로버트 하인라인은 <메두셀라의 아이들>에서 요즘 한창 화제가 되고 있는 유전공학이라든가 장수유전자로 노화를 방지하는 설정 등을 묘사했습니다.
그리고 1944년에는 알프레드 앨튼 반 보오트가 <머나 먼 센타우르스>에서 인공동면에 의한 장거리 우주여행을 등장시켰죠.
아서 클라크는 1957년에 <해저목장>에서 해저개발, 고래목축, 해저주택, 플랑크톤 증식기법 등을 선보였고, 1968년에는 <2001년 우주의 오디세이>에서 태양계의 외행성 탐사와 인공지능 컴퓨터를, 그리고 1978년에는 <낙원의 샘>에서 우주 엘리베이터를 자세히 묘사했지요.
20세기 초반 미국에서 대단한 인기를 끌었던 에드워드 스미스의 <우주선 종달새호(1928)>에는 초광속우주선과 반물질까지 도입됩니다.
또 1941년에 로버트 하인라인은 <메두셀라의 아이들>에서 요즘 한창 화제가 되고 있는 유전공학이라든가 장수유전자로 노화를 방지하는 설정 등을 묘사했습니다.
그리고 1944년에는 알프레드 앨튼 반 보오트가 <머나 먼 센타우르스>에서 인공동면에 의한 장거리 우주여행을 등장시켰죠.
아서 클라크는 1957년에 <해저목장>에서 해저개발, 고래목축, 해저주택, 플랑크톤 증식기법 등을 선보였고, 1968년에는 <2001년 우주의 오디세이>에서 태양계의 외행성 탐사와 인공지능 컴퓨터를, 그리고 1978년에는 <낙원의 샘>에서 우주 엘리베이터를 자세히 묘사했지요.
그런가 하면 오늘날의 인터넷이나 3차원 가상현실, 아바타 등은 1984년에 윌리엄 깁슨이 <뉴로맨서>(사진 아래 오른쪽)에서 사실상 처음으로 그 구체적인 양상들을 그려보였습니다. 그런데 깁슨은 당시에 개인용 PC를 전혀 다룰 줄 몰랐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소개한 예들 중에서는 이미 현실로 나타난 것도 있고, 아직 불가능의 영역에 남아 있는 것도 있습니다. 반중력이나 초광속 우주선, 인공동면 같은 것은 여전히 SF에서만 접할 수 있죠. 그중에는 이론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를테면 초광속우주선처럼.
과연 이런 SF들은 다가올 미래를 정확하게 내다보고 미리 예측을 한 걸까요? 아니면, 혹시 다르게 생각해 볼 여지는 없을까요? SF가 예측을 한 게 아니라, 후대의 사람들이 SF를 보고 거기에 나오는 신기한 것들을 그대로 모방하여 만들어 낸 것이라고 말입니다.

원자폭탄을 예언했던 SF
잠시 흥미로운 역사의 비화 한 토막을 소개합니다.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4년 어느 날, 미국 FBI 수사관들이 뉴욕에 있는 한 작은 잡지사에 들이닥쳤습니다. 잡지의 이름은 <어스타운딩 사이언스 픽션(Astounding Science Fiction)>. 그들의 혐의는 국가기밀 누설이었지요. 당시 미군(혹시 ‘미국’은 아닐까요?)에서 극비리에 개발 중이던 가공할 신무기가 그 잡지의 한 단편소설에 생생하게 묘사됐기 때문입니다. 문제의 작품은 클리브 카트밀이란 작가가 쓴 「데드라인(Deadline)」(사진 왼쪽)이란 SF였고, 이 단편에서 묘사된 신무기란 다름 아닌 원자폭탄이었습니다.
당시 미국정부는 세계 최고의 과학자들을 끌어모아 ‘맨해튼 프로젝트’라는 이름 아래 극비리에 원자폭탄을 개발하던 중이었지요. 그리고 그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 모든 언론매체에 그와 관련된 일체의 정보공개를 막았고, 심지어 과학 잡지에서 학술적인 주제가 되는 일도 교묘하게 방해했습니다.
그런데 SF잡지만큼은 아무런 통제나 공작도 취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었습니다. 당시 미국에서 발간되던 SF잡지들은 대부분 유치한 그림의 표지와 싸구려 종이, 말초적인 오락소설 등으로 채워져 점잖은 대접을 못 받고 있었기 때문에, ‘유치한 SF작가나 독자들’은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지요. 그 결과 당시 핵무기에 대해 공개적으로 자유롭게 논의했던 사람들은 SF잡지와 그 독자들뿐이었다고 합니다.

아무튼 FBI의 취조 결과 밝혀진 정보의 출처는 다름 아닌 공공도서관이었습니다. 작가는 그곳에서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물리학 이론서만을 참고했을 뿐, 나머지는 오로지 작가의 과학적 상상력만으로 채워나간 것입니다. 결국 이 사건은 순전히 우연의 일치, 아니 SF작가의 상상력에 기인한 필연적 우연이었던 셈이지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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