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피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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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츠메 소세키의 <열흘 밤의 꿈>은 꿈을 꾼 화자가 [이런 꿈을 꾸었다.]라는 말을 시작하면서 현실이면서도 현실이 아닌 꿈 속에서 바라보는 현실의 이야기를 열흘 동안 하나씩 들려준다.

소세키의 작품 중에서 <열흘 밤의 꿈>을 가장 좋아했던 무라카미 하루키는 어느 날 잠을 통 이루지 못한 상태에 멍하게 앉아 있던 중에 문득 소세키의 이 작품이 떠올랐고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다.

'잠을 못 잔 지 벌써 십칠 일 째다.'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는 화자는 이렇다 할 불편을 느끼지 못해서 병원도 찾지 않고 가족이나 친구에게 조차 말하지 않는다.

그녀는 매일 치과 의사인 남편을 내조 하며 외동아들을 키우며 일상 생활에 어떤 균열이나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그녀의 불면증은 대학 시절 부터 시작되었지만 제때 치료나 상담을 받지 않고 잠이 오지 않으면 잠을 자지 않은 채 일상 생활에서 불완전한 수면 패턴을 이어 나갔다.

간헐적으로 밀려오는 졸음은 전철 좌석이나 교실 책상이나 저녁 식사 자리에서 알게 모르게 풋잠을 자듯 꾸벅 꾸벅 조는 동안 기묘할 정도로 자신의 의식에서 분리된 그림자 같은 존재를 느낄 정도로 온전하게 푹 잠이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꾸벅 꾸벅 조는 동안 걷고,마시고, 먹고 자면서 대화를 나누었고 이런 상태를 가까운 지인이나 가족들이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었다.

그녀는 자는 동안 모든 일을 정상적으로 하는 램 수면 상태의 인간으로 시간이 지날 수록 신체의 각 기관이 둔해지고 탁해지면서 감각을 잃어가고 있었다.


[세계의 끝에 있는, 듣도 보도 못한 땅으로 그리고 내 육체는 내 의식과 영영 헤어져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무언가에 단단히 매달리고 싶었다.]


모든 가족들이 깊이 잠든 밤마다 그녀의 정신은 또렷해져서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 조차 불가능하게 된다.

째깍 째깍 시계가 움직이는 소리를 또렷한 정신으로 날이 샐 때까지 들었던 그녀에게 어느 날 아무 전조 없이 느닷없이 까무러칠 정도로 잠이 쏟아져 버린다.

그렇게 하루를 꼬박 넘기고 죽은 듯이 잠을 잤던 그녀는 결혼 후 어떤 이유에서 인지 다시 불면증이 시작되었다.

현실 생활에 아무런 문제도 불편을 겪지 않았다.

단지 잠을 자지 못할 뿐이였다.

남편도 아이도 그녀가 잠을 한 숨도 자지 못한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다.

친구와 동업으로 치과병원을 경영하고 있는 남편은 점심시간인 12시면 집에서 밥을 먹고 다시 병원으로 돌아간다.

아침을 준비하고 차리고 남편과 아이가 출근하고 나면 집안을 정리를 마치면 곧 남편이 점심을 먹으로 집으로 오는 시간이 된다.

남편이 점심을 먹고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고 나면 그녀는 오후 시간동안 장을 보러 나가고 집으로 돌아 오면 어느새 저녁 시간이 되어 외동 아들의 저녁 밥을 차려 준다.

늦은 밤 남편이 퇴근하고 마지막 저녁을 차려 주고 설거지를 마치고 주변을 정리하면 자정이 가까워진다.

빈틈없이 가족의 생활 패턴에 맞추고 나면 어느덧 늦은밤, 자정을 알리는 시계종이 울리면 그녀는 잠을 자지 못하고 어느 날 깜짝 잠이 들었을 때 악몽에 시달리는 끔찍한 경험을 하게 된다.

다시 잠을 청하면 악몽을 꾸게 될 것 같은 두려움사로잡히자 책을 꺼내 읽기 시작하고

가능한 긴 소설을 읽어보자고 마음 먹은 그녀는 톨스토이의 대장편 <안나 카레니나>를 읽기 시작한다.

오래전 학창 시절에 읽었던 <안나 카레니나>의 스토리를 대충 알고 있었던 그녀는 날이 밝을 때까지 온 신경을 그 책 속에 파묻고 나서 일상 생활에 큰 변화가 찾아오기 시작한다.


[매일 같은 일이 되풀이됐다. 집안일을 재빨리 해치우고 오전 내내 책을 읽었다. 그리고 점심 때가 되면 책을 내려놓고 남편을 위해 점심을 만들었다.]


그녀는 결혼 생활 동안 눈을 감고 무감동적이게 기계적으로 할 수 있을 정도로 의무적으로 장을 보고 요리하고 청소하고 아이를 돌보았지만 밤 10시 부터 아침 6시까지 책을 읽고 나서 부터 집 안에 갇혀 있기만 했던 생활 반경을 차츰 넓혀나간다.

차를 몰고 나가 사는 곳 너머 지역을 돌아 당기기도 하며 소소한 일탈을 즐기는 모습을 그녀의 가족 중 어느 누구도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잠을 자지 못한 상태는 멈추지 않고 지속되고 있다.


[처음 잠을 못 잔 것이 지지난 주 화요일, 그러니까 오늘로 딱 십칠 일 째다. 처음 잠을 못 잔 것이 지지난 주 화요일, 그러니까 오늘로 딱 십칠 일째다. 이로써 십칠일동안 한숨도 못잤다].


그렇게 열일곱 번의 낮과 열일 곱 번의 밤 동안 잠을 자지 않은 그녀는 문득 죽음을 떠올리며 잠을 자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 질 수록 일상의 잍탈은 점점 대담해진다.


[눈을 감아보았다. 그리고 잠의 감각을 불러 일으키려 해보았다. 하지만 그곳에는 각성한 어둠이 존재할 뿐이었다. 각성한 어둠...]

시간별 레인을 따라 맹목적으로 가족들의 삶의 패턴에 자신의 삶을 맞춰 살았던 엄마, 아내, 그리고 한 여자는 이런 삶을 어디에도 소비 되지 않은 무의미한 삶이라 생각했다.

숨을 쉬고 있어도 온전한 정신 상태로 살아 있지 않는 자신을 위한 시간조차 없이 잠을 청하지 못할 정도로 누군가의 삶을 챙겨주고 보듬어 주기 위해서 24시간 깨어 있어야 했던 그녀의 삶에서 한 권의 책은 텅비어 버린 머릿 속에 어디서 언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각성 시키며 기억의 회로선을 움직이게 만든다.

사는 동안 불면증에 시달려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물며, 악몽이나 가위 눌림 같은 체험을 하지 않은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문득 잠이 오지 않는 시간이면 어떤 알람도 도착 하지 않았는데 하염없이 불 꺼진 방에서 스마트 폰을 만지작 거리고 수면을 취하는 동안에도 머리 속 한 구역엔 폰이 보여주는 세상이 자리 잡고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 작품을 열흘 동안 쓰고 나서 서랍에 넣어두고 몇 달 후 다시 꺼내 읽으면서 문장을 다듬어 나갔다.

작가들 중에서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하루키는 건강한 정신 상태에서 글을 쓰기 위해 매일 같은 시간에 취침하고 다음 날 같은 시간에 눈을 뜬다.

이렇게 규칙적인 생활 패턴을 지속 했던 무라카미 하루키는 1990년 어느 겨울 이탈리아 로마에서 사방으로 한기가 파고 들었던 어느 날 불면증이 갑자기 찾아온다.

불면증으로 밤을 지새우며 쓰기 이야기는 원고지로 총 12매로 완성하고 그렇게 탄생한 단편들은 전 세계로 번역 되고 단편과 장편을 종횡무진 창작 하며 세계적인 작가가 된다.

잠을 못 잔다고 일상이 엉망이 되지도 않는다.

가족들이 모두 잠든 시간에 틈틈이 노트에 끄적이거나 책을 읽거나 오전 오후 시간에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할 수 있다.

인간은 깨어 있는 동안에도 잠들어 있는 동안에도 신체의 모든 기관은 각자가 맡은 역할에 맞춰 질서 있게 움직이고 있다.

어느 누구에게도 방해 받지 않는 시간에 조금씩 매일 무언가 하고 있다면 별 볼일 없는 인생이 어제 보다 앞으로 더 나가며 먼 훗날 어떤 대가가 따르더라도 그렇게 쓴 시간들은 온전히 내 삶을 위한 시간이 될 것이다.

1979년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소설을 발표한 이후 부터 하루키는 2024년 지금까지 총 15편의 장편 소설과 16편의 단편집을 출간 했다.

소설을 발표하지 않는 해에는 에세이나 논픽션, 번역서, 여행기 회문집, 그림책, 소설 안내집, 대담집까지 출간 해서 한 개인이 출간한 작품의 수는 벽 한 면을 차지 하고 있는 책장을 가득 채울 정도로 엄청난 분량이다.

이 정도의 분량을 쓰려면 매일 10매에서 20매 분량의 원고지를 채워야 가능 할 정도로 엄청난 창작력과 이를 뒷 받쳐 주는 체력이 있어야 가능하다.

1981년 단편집 <꿈에서 만나요>을 시작으로 2020년에 출간한 <일인칭 단수>까지 총 16편의 단편집을 출간한 하루키는 <TV피플> 단편집에 수록된 단편들을 가장 좋아한다.

그는 종종 자신이 진행하고 있는 라디오 FM 무라카미 방송에서 <TV피플> 단편집에 수록된 단편을 종종 읽어준다.


<TV피플>에 수록된 단편들은 총 6편으로 'TV피플'과 '비행기-혹은 그는 어떻게 시를 읽듯 혼잣말을 했나'와 '우리 시대의 포크로어-고도자본주의 전사' 그리고 '잠' 이 네 편은 작가 생활을 시작 한지 10년의 시간이 흐른 1989년에 완성했다.

단편 '잠'은 해외 독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단편 중 하나로 독일의 출판사 듀몬트가 무라카미 측에 독일의 일러스트레이터 카트 멘쉬크가 그린 일러스트를 넣은 책으로 재 출간 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흔쾌히 이 제안을 받아들인 하루키는 독일에서 독일어로 번역된 자신의 책 <잠>을 읽고 마음에 들어서 일본어 판으로 단독 출간 할 정도로 그는 자신의 단편 '잠'에 대한 애정이 깊다.


<TV피플>에 수록된 단편들 모두 삼십 년의 세월을 훌쩍 넘긴 단편들이지만 하루키 초기작에서 맛볼 수 있는 생생한 묘사와 비유, 리듬감이 느껴지는 문장이 매 페이지 마다 살아 숨쉰다.

200페이지 분량의 단편들을 다 읽고 나면 다시 맨 앞장으로 돌아가 첫 장을 펼쳐 들고 자정 시간을 넘기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마지막 장까지 읽게 된다.

(c)Kat Menschik


["그렇게 해서 나는 잠을 못 자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아무것도 두려워할 일은 없다. 요컨대 나는 인생을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 나는 생각했다. 밤 열 시부터 아침 여섯 시까지의 시간은 나 자신을 위한 것이다. 하루의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그 시간은 지금까지 잠이라는 작업에―'쿨다운 하기 위한 치유 행위'라고 그들은 말한다―소비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이제 나만의 것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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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은빛 눈
이요하라 신 지음, 김다미 옮김 / 비채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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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하고 일본 열도 전역의 원자력 발전소 가동이 일시 정지 되었다.

동일본 후쿠시마 원자력 지역 하청회사에서 25년 동안 근무 했던 다쓰로는 원자력 규제 위원회에서 새로운 규제 기준을 통과 시키며 일본 열도 전역의 원자력이 재 가동이 되었다.

다쓰로는 원자력의 위험성과 심각성이 완전히 해소 되지 않은 시기에 더구나 폐원전 처리 문제도 해결 되지 않은 채 미봉책으로 원자력을 재 가동 시키는 정책에 큰 불만을 품고 회사를 그만둔다.

그는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폐원자로 일을 하겠다며 방사능 누출 사고가 발생해서 죽음의 땅으로 변해버린 후쿠시마를 찾아간다.

지진 발생이 후 단 한번도 후쿠시마 땅을 가본 적이 없었던 다쓰로는 해변에 날아드는 연의 방향에 이끌려서 차에서 내리고 연이 날리는 방향을 쫓아간다.

[100미터 정도 앞에서 나이 든 남자가 연줄을 당기고 있다. 몇 명 정도 있을 줄 알았는데, 달랑 한 사람뿐이었다. 연은 육지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받으며 바다 위에 떠 있다. 겨울의 전조처럼 서늘한, 북쪽으로 살짝 고개를 돌린 서풍이다.]

-10만년 뒤의 서풍 중에서


연이 날리는 방향으로 따라간 다쓰로는 연을 날리는 남자를 만나고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연을 날렸던 미국산 '게일러 카이트'연이라는 걸 알고 친근감을 보인다.

후쿠시마 해변가에서 연을 날리는 남자의 이름은 다키구치, 그는 쓰쿠바 기상청 기상 연구소에서 일하다 퇴직한 후 취미로 연을 날리면서 습관처럼 기상을 관측하고 있었다.

다키구치는 기상청 근무 당시 고층 기상 관측 전문가로 라디오존데라는 관측 장치를 기구에 달아서 상공으로 띄워 넣고 예보에 사용할 데이터를 수집하는 일을 했었다.

기상 관측 연구가인 다키구치는 1930년대에는 연에 온도계를 달고 기상을 예측하는데 이용했다며 다쓰로 앞에서 직접 시연을 해 보인다.

그는 매일 해변에서 연을 날리며 레이더도 기구도 드론 같은 최첨단 기상 관측 기기가 아닌 연 줄을 타고 손으로 느껴지는 상공 공기의 감촉과 온도로 바람의 세기와 방향을 예측하고 습관처럼 데이터를 기록하고 있다.

다쓰로는 발길이 머무는 곳마다 연을 날리며 기상을 관측하는 다키구치가 동일본 후쿠시마 지역에서 원전이 있었던 도미오카마치를 갈 예정이라는 말에 원전 회사에 다녔었다는 말을 꺼낸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했던 해에 다쓰로는 보수관리과 과장으로 승진해서 9월 말에 발생 했던 지진으로 인해 원자로 격납시설에 문제가 생겼는지 점검을 나섰다.

진도 4지진 발생으로 원자로의 안전 장치 역할을 하는 필터 벨트에 뒤틀림을 발견한 다쓰로 팀은 보고서를 작성하지만 부장은 새로운 규제 기준에 근거해서 진도 4정도로 배관이 손상되었다는 건 회사 이미지에 악영향을 미치니 보고서를 수정하라고 지시하고 문제가 발생했던 원자로의 일시 가동 중지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

원자로 전력회사의 하청 회사에 소속된 다쓰로는 상사의 지시로 보고서를 수정한다.

그렇게 보고서를 수정하고 나서 리히터 규모 7.3 의 지진과 지진 해일로 도쿄전력이 운영하는 후쿠시마 제1 원자력 발전소의 원자로 1-4호기에서 누출 사고가 발생한다.

이 사고는 분명 현실에서 일어날 리 없는 일이 언젠가 어디선가 일어날 수 있는 일로 뒤바뀐 치명적인 인재 사고 였다.

다쓰로는 폐암 투병 중인 아버지가 평생 동안 자랑스러워 했던 2호기 필터벨트의 뒤틀림 보고서를 수정한 직원이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가족이 사회로 부터 받을 막대한 후폭풍을 감당하기 힘들다는 생각에 사직서를 제출한다.

원전 사고 이후 폐원자로 처리 시설회사 일을 시작한 다쓰로는 원전 사고 유출 발생 지점 근처에서 날리던 연을 따라 서풍으로 이동해서 2차 대전 당시 일본 군부대가 미국이 이끄는 연합군 전선에 날릴 계획을 세웠던 풍선 폭탄의 이야기까지 흘러 간다.

수소 가스를 채운 직경 10미터 짜리 기구에 소이탄과 폭탄을 매달아 지상의 기지에 띄워서 기구가 상공에 강한 편서풍을 타고 이틀 밤 낮으로 날아 미국 본토 서해안에 자동적으로 폭탄을 투하 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1943년 일본 군부대 소속 노보리토 연구소는 300여명이 매달려서 기압계를 탑재한 정밀한 고도 유지 장치, 영하 50도에 달하는 상층 공기를 견딜 수 있는 내한 전지를 풍선 기구에 설치 해서 성능을 시험하기 위해 군수품 제조 공장과 극장, 학교에서 학생들을 끌어다 놓고 풍선 폭탄을 제작하기 시작한다.

1944년 11월 편서풍이 불기 시작했던 날 일본 군부대는 풍선 폭탄을 날려 버릴 기지를 태평양에 면한 해안 세 곳에 설치한다.

후쿠시마현의 나코소, 지바현의 이치노미야 그리고 이바라키 현의 오쓰에서 1945년 4월까지 미국 본토를 겨냥한 풍선 폭탄 기구를 발사한다.

당시 발사된 풍선 기구는 총 1만 발로 약 천 개의 풍선 기구가 미국 본토까지 다다랐다.

일본 군이 날린 풍선 폭탄은 미국 오리건주 마을의 숲과 공원에 떨어져서 무고한 민간인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일본 군부대 소속 노보리토 연구소의 생물 병기 부서에서는 탄저균과 적리균, 우역 바이러스를 풍선 기구에 매달아서 미국 본토로 날려 버린다는 계획까지 세우고 기상학자 아라카와 히데토시는 기구를 발사하는 고도와 적절한 계절과 바람 ,발사 지역 그리고 미국 본토까지 다다를 시간과 확률을 계산한다.

1944년 10월 말 오전 3시 풍선 폭탄에 세균을 장착한 기구를 날릴 준비를 갖추고 정확히 두 시간이 지난 오전 5시 소대장이 '발사' 명령을 내리는 순간 풍선 폭탄은 날아 오르지 못하고 지면에서 폭파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고 풍선 폭탄 사고로 고층 기상대 데이터를 계산하는 중앙 기상대 기수들이 사망한다.

풍선 희생자들 위령비가 세워진 곳에서 다쓰로는 자신의 아이들에게 연락을 해 지난 시절 아버지와 함께 날렸던 연 세트(게일러 카르트)를 구매 했다고 말한다.

원자력 발전 폐기물은 지하 500미터까지 갱도를 파서 사용 완료된 핵원료를 특수한 재료로 덮어 묻는다. 이런 핵폐기물 처리는 인간이 고안해 낸 방법 중에서 가장 안전한 방법으로 10만년 동안 폐기물이 지상으로 올라 올 경우가 없다며 원자로 가동에서 나오는 모든 핵 폐기물 처리는 이런 과정을 거치고 있다.

기후 이상 변화로 지구는 나날이 뜨거워 지고 있고 북극과 남극의 얼음은 빠른 속도로 녹아서 바닷물 수위는 올라가고 있다.

열을 감지한 지변이 흔들리고 계절의 순환은 뜨거운 여름이 지속 되어 강렬한 햇볕과 장기간 무서운 양으로 내리는 비의 양으로 인간들이 파 묻어 놓은 핵폐기물 시설이 10만년을 버텨 낼 것 같지 않다.


고베 대학에서 지구 과학을 전공하고 도쿄 대학에서 지구 행성물리학으로 박사 과정을 수료한 이요하라 신은 1998년 '네 인생의 이야기'라는 단편으로 네뷸러 상을 수상한 컴퓨터 전문가 테드 창의 작품을 읽고 대중들의 시선에 맞는 픽션같은 과학 이야기를 써보겠다는 의지를 불태운다.

2003년 부터 도야마 대학 이학부 조교로 근무하면서 안정적인 일을 하게 된 이요하라 신은 2008년 부터 글을 쓰기 시작해서 1년 만에 완성한 첫 번째 소설< 두번째 보름달>로 에도가와 란포상 최종 후보작에 오른다.

이후 발표하는 작품 마다 우리 일상에서 발생하고 마주 할 수 있는 과학적 현상과 기술을 지극히 평범한 이들의 삶과 연결 시키며 대중적 인기를 얻으며 작가와 평론가 그리고 서점 직원들의 추천서에 이름을 올리는 인기 작가가 된다.

과학자의 시선으로 인간의 삶을 바라보기 때문에 마치 과학자가 일련에 발생하고 있는 현상에 대해 가이드처럼 대화로 묘사로 풀어나가는 이요하라 신의 작품들은 SF장르에 속하지 않고 미스터리로 분류 된다.


단편집 <8월의 은빛 눈>은 일상 속에서 발생하는 과학적인 현상과 자연의 변화를 정확한 명칭과 장소를 제시 하며 마치 과학 잡지에 실리는 개인의 경험담을 이야기하듯 서정적인 문체로 펼쳐 보인다.

과학자인 이요하라 신은 소설을 쓸 때면 '과학자가 보고 있는 풍경 그리고 세계의 모습을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 우연히 들여다 보게 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라는 화두를 던져 놓고 글을 쓴다.

총 다섯 편이 실려 있는 단편집 <8월의 은빛 눈>에 맨 마지막 장에는 이요하라 신이 작품 집필에 참고한 문헌과 인터넷 사이트 주소가 빼곡하게 수록되어서 작가의 소설적 상상에서 비롯된 현상이 아닌 실제 우리 눈 앞에서 발생했거나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과학적 현상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요하라 신은 <팔월의 은빛 눈>에서 팔월에 은빛 눈이 내릴 수 있다는 가설을 이렇게 정의 했다.


[내핵은 지구의 안에 있는 또 하나의 별로 크기는 달의 3분의 2 정도로 열방사 빛을 제거하면 은색으로 빛나는 별이다. 그것이 액체의 외핵에 싸여서 떠 있는데 그 별 표면은 전부 빽빽한 은빛 숲으로 높이 100미터나 되는 철로 된 나무 숲이다. 실제 그 정체는 나뭇가지 모양으로 뻗은 철 결정으로 외핵 밑 부분에서 액체 철이 얼면 내핵 표면으로 은빛 가루가 천천히 눈가루 처럼 흩날린다.]

-8월의 은빛 눈 중에서


은빛 숲에서 내리는 은빛 눈의 소리, 무덥고 습한 7월의 이요하라 신의 단편집 <<8월의 은빛 눈>속에서 발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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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비 2024-06-30 12: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모르던 작가인데 너무 매력적인 리뷰네요. 저도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scott 2024-06-30 12:39   좋아요 2 | URL
이 단편집 정말 좋습니다
과학적 현상을 이토록 현실감 넘치게 묘사한 작가의 문체가 너무 유연하고 탄탄해서
대단하다는 생각만이 ^^
 
워터멜론 슈거에서
리처드 브라우티건 지음, 최승자 옮김 / 비채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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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누구인지 당신은 좀 궁금해 하겠지만 나는 정해진 이름을 갖고 있지 않은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이다. 내 이름은 당신에게 달려 있다. 그냥 마음에 떠오른 대로 불러달라.]


일 년 열 두 달 달콤한 냄새가 감돌고 어떤 꿈이든 실현되는 완벽한 낙원 '워터멜론 슈가에 살고 있는 나는 이름이 없다. 원래부터 이름이 없었는지 아니면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이름을 버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나’가 살고 있는 곳은 아이디아뜨(Ideath)다.

이 아이디아뜨(Ideath)는 '나’를 지칭하는 ‘I’와 ‘죽음’을 지칭하는 ‘Death’를 합쳐서 아이디아뜨(Ideath)로 즉, ‘내’가 죽은 곳에서 ‘이름 없는 나’가 모호하게 살고 있는 곳으로 그저 불리우는 대로 혹은 누군가가 기억해주는 대로의 그 모습이 바로 ‘나’이다.


'나는 아이디아뜨 근처의 통나무 오두막에 산다. 나는 창밖으로 아이디아뜨를 볼 수 있다. 내 오두막에는 침대 하나, 의자 하나, 테이블 하나, 그리고 내 물건을 간직할 수 있는 커다란 농이 하나 있다. 그리고 밤이면 워터멜론 송어 기름으로 타는 등도 하나 있다.'


아이디아뜨에 통나무 집에서 살고 있는 '나'는 창가로 가 창밖을 내다 본다.

아이디아뜨에서는 요일마다 다른 색깔의 태양이 뜬다.

그리고 요일마다 그 태양을 닮은 워터멜론이 자란다. 붉은 태양이 뜬 월요일에는 붉은 색의 워터멜론이 자라고 검은 태양이 뜬 목요일에는 검은 색의 워터멜론이 자란다.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마거릿이 찾아 오고 다음 날엔 프레드가 찾아 오고 잊힌 작품과 물건들에 관한 모호한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프레드가 떠난 후 나는 워터멜론 씨앗으로 만든 잉크에 펜을 적셔 아래 지붕널 공장에서 빌이라는 친구가 만든 목판지에 글을 쓰는 작업을 시작한다.

  1. 아이디아뜨(좋은 곳)

  2. 찰리(내친구)

  3. 호랑이들

  4. 거울동상

  5. 척 영감

  6. 밤에 하는 긴 산책

  7. 워터멜론공장

  8. 프레드(내 단짝)

  9. 야구장

  10. 수로

  11. 에드워즈 박사와 학교 선생

  12. 아이디아뜨의 아름아운 송어 부화장

  13. 무덤조, 수직 통로

  14. 어떤 웨이트리스

  15. 앨, 빌, 다른 사람들

  16. 시내

  17. 태양 그리고 태양이 어떻게 변하는지

  18. 인보일(inboil/작중 등장 인물의 이름)과 그 일당 그리고 그들이 파낸 곳 즉 잊힌 작품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곳, 그들이 저지른 끔찍한 짓과 그들에게 일어난 일, 그리고 그들이 죽어버린 지금, 이 근방이 얼마나 조용해지고 괜찮아졌는지

  19. 매일 이곳에서 생기는 대화와 사건

  20. 마거릿 그리고 밤에 등불을 들고 다니는 그러나 결코 가까이 오지는 않던 여인

  21. 우리의 모든 동상, 무덤에서 나오는 빛과 영원히 함께 할 수 있도록 죽은 이를 묻는 장소

  22. 워터멜론 슈거에서 살아온 내 삶

  23. 폴린(내가 특히 좋아하는 사람이다.)

  24. 그리고 백칠십일 년에 걸쳐 스물네 번째로 쓰이는 이 책

여기 이렇게 목록을 적어 나간 '나'는 잊힌 작품을 쓰는 동안 아이디아뜨에서 누군가는 불륜을 저지르고 누군가 자살을 하고, 호랑이에게 부모가 먹히며 아름다움을 칭송 하고 슬퍼한다.

모든 것이 설탕처럼 달콤 할 것만 같은 아이디아뜨에는 날마다 모든 것이 변하고 있고 매번 다른 빛의 태양을 받은 수박들이 각기 다른 색깔로 자라는 기이한 곳이다.

아이디아뜨 도처에는 숲과 강이 흐르고 심지어 거실에도 강이 흘러 그 강에서 마음껏 헤엄치고 다니는 송어가 있다.

반면 사람을 잡아 먹던 식인 호랑이들을 전부 불태워서 멸종 시켜 버린 자리에 세운 부화장이 있다.

이런 유토피아적 세상과 정 반대로 타락한 세상인 '잊힌 작품'이라는 곳은 악당'인보일'들이 위스키를 퍼 마시며 술에 취해 꿈을 망각한 채 타락한 인간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 살고 있다.

초목은 자라지 않고 짐승 한 마리도 살고 있지 않는 '잊힌 작품' 세상에 호기심으로 넘어간 마거릿은 자살을 하고 '나'는 폴린이라는 여자를 사랑하게 된다.


1967년 미국 문학계를 뒤흔들며 순식간에 200만부가 팔려나간 <미국의 송어 낚시>에 뒤이어 발표한 <워터 멜론 슈거에서>는 날마다 다른 빛깔의 태양이 뜨는 워터멜론 슈거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과 상반되는 잊혀진 작품이라는 가상의 공간으로 나눠져서 자연과 문명, 삶과 죽음, 현실과 이상 그리고 현실과 신화가 단절된 세상이 마치 한편의 우화처럼 그려져 있다.

매 챕터 마다 달려 있는 소제목 아래에 간결한 문장으로 채워진 이야기는 앞선 이야기의 과거-현재-미래가 뒤죽 박죽이여서 장면이 전환 될 때 마다 시점과 시제가 뒤섞여있어서 동 시대 여러 인물들의 다양한 이야기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전개 된다.

1960년대 히피 운동의 문학적 상징이 된 작가 리처드 브라우티건은 기계 문명과 상업자본주의로 타락하고 퇴폐화 된 것에 대한 성찰과 반성을 너머 '인간 중심주의'를 꿈꾸었다.

그가 앞서 발표한 작품< 미국의 송어낚시>의 중심에는 송어라는 상징이 자리 잡고 있듯이 <워터멜론 슈가에서>에서도 송어들이 마음껏 뛰어 노는 세상을 천국이라 지칭했다.

미국 땅에서 흐르는 강에서 가장 많이 살고 가장 많이 잡히는 물고기는 송어로 미국 문학과 철학에서 이 송어가 상징하는 의미는 목가적 이상형을 꿈꾸는 청교도적인 사상을 담고 있다.

너새니얼 호손의 작품 속에는 '박공나무의 숲'이 허먼 멜빌에게는 거대한 '바다'그리고 마크 트웨인에게는 미시시피 강이 있듯이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작품 속에는 '송어'가 있다.



1967년 <워터멜론 슈거에서> 작품이 발표 되었을 당시에 미국 땅에서 더 이상 송어가 뛰어노는 하천을 찾기란 점점 어려워졌고 산업자본주의의 거침없는 확장과 팽창으로 오지와 대자연은 사라져서 송어들이 헤엄치던 곳은 야영지와 리조트가 됐다.


[내가 오래전부터 알아온 송어 한 마리가 무덤을 넣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치어 였을 때 아이디아뜨의 부화장에서 자란 송어였다. 내가 그걸 아는 이유는 그의 턱에 자그마한 아이디아뜨 방울이 묶여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나이가 무척 많고, 몸무게도 무척 많이 나갔는데, 지혜롭게 느릿느릿 움직였다.]


워터멜론 슈거에서 살고 있고 발생하고 있는 그 무엇에 대한 실체는 모두 모호하다

도대체 아이디아뜨는 무엇이고? 마거릿은 왜 자살했고? 폴린은 어디서 불쑥 나타났는지...라는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앞 뒤 페이지를 여러 번 들춰 봐도 명확한 의미도 찾지 못하고 어떤 인간관계나 인물들의 구체적인 특성조차 알지 못한다.

일곱 가지 태양이 뜨는 아이디아뜨에서 일곱 가지 워터멜론이 만들어 내는 일곱 가지 워터멜론 슈가로 무엇을 만들어낼 것인지는 오직 ‘나’만의 선택이고 또 ‘나’의 몫이기 때문에 ‘나’ 또한 정해진 운명 같은 것은 없다.

<워터멜론 슈거에서>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워터멜론 슈거에서는 여러 가지 일이 다시, 또다시 행해졌다.'


1960년대 미국 비트 세대의 우상이였던 리처드 브라우티건은 해가 갈 수록 독자 수는 빠른 속도로 줄어들었고 발표한 작품들의 거듭된 실패로 인해 극심한 좌절감에 고통스러워하다가 마흔아홉 살이 되던 해 1984년 창을 열면 태평양이 보이는 호텔 방에서 수렵용 44구경 매그넘 권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쏴서 자살한다.


이 작품의 마지막은 이런 문장으로 끝이 난다.


[연주자들이 각자 악기를 들고 자세를 취했다. 그들은 시작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제 몇 초 남았을 뿐이다, 라고 나는 썼다.]

그가 남긴 천국은 아름답지만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는 잊힌 작품 입구입니다

조심하십시오

당신은 길을 잃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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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라탄이즐라탄탄 2024-06-17 07: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이디아뜨(Ideath)라는 단어를 보면서 문득 플라톤의 이데아Idea가 연상되었습니다. 플라톤은 이데아만이 완전하고 영원불멸한 실재라고 했는데 서두에 나온 ‘천국은 아름답지만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는 문장과 묘하게 연결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중의적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 작품이 매력적으로 느껴집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2024-06-17 11: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6-17 12: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6-17 12: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6-17 12: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붉은 옷의 어둠 모토로이 하야타 시리즈
미쓰다 신조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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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 대전 중에 히로시마 우지나에 있는 육군 선박포병교도대에 소속되었던 '모토로이 하야타'가 승선한 무장선이 부산해협에서 침몰한 뒤 우지나로 돌아 왔을 때 타고 나갈 배가 단 한 척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야타는 남아 있는 연료조차 없어서 고립 된 와중에 어느 날 만주 건국대학에서 함께 공부한 동기 몇 명과 함께 대학 은사를 만나려고 노우미 섬으로 건너간다.

​모토로이 하야타가 은사의 집이 있는 노우미 섬에 체류하는 동안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지고 서둘러 우지나로 돌아와 곧바로 폭탄이 투하된 지역을 돌아다니며 구호 활동을 펼치던 중 동료들은 방사선에 피폭 되어 죽었고 그만 살아남게 된다.

일본이 미국에 무조건 항복을 하자 패전과 함께 하이타가 소속된 육군 선박 포병 교도대가 해산한다.


[당연히 너는 앞날을 진지하게 생각하며 고민하고 있을 테지만 그런 일은 혼자 고민해봤자 제대로 된 결론을 내릴 수 없으니까 일단 이리로 놀러와라.]


하야타는 우연 곡절 끝에 도쿄로 올라와 여러 번 전차를 갈아타서 마침내 대학 동창인 가이 신이치와 약속한 우에노 역에 도착하자마자 전쟁 이전과 전혀 다른 세상이 되어버린 모습에 큰 충격을 받는다.

도쿄의 주요 번화가 들은 거듭된 공습으로 초토화 되었고 온갖 물건들을 불법으로 거래하는 거대한 암시장에는 국가의 통제 밖에 있는 이들의 주요 활동 무대가 되었다.

전쟁 전에 노점을 관리했던 조직인 데키야가 도쿄 곳곳에 은밀하게 퍼져 있는 암시장을 관리하는 동안 일본군 징용으로 끌려 온 중국과 조선, 대만 사람들이 패전 후 일본에 남아 장터를 차지 하면서 서로 간의 영역을 다툼이 시작되었다.

전쟁 고아들과 교도소에서 출소한 이들, 거리의 부랑아들이 데키야 조직과 야쿠자 조직에 합류하면서 암시장의 규모는 거대해 졌고 이곳에선 일본의 법이 적용되지 않는 무법의 영역이 되었다.

화물 운반 거룻배 운항일을 하는 집안 출신인 하야타와 데키야 두목의 아들인 신이치는 패전 후 나라를 위해 무언가 해야 한다는 공통된 신념을 갖고 있었다.

하야타는 편입한 대학에서 민속학을 전공하고 국가 재건에 보탬이 되기 위해 탄광촌에 뛰어 들어가서 그곳 탄광 종사자들이 살고 있던 주택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을 해결 하고 심리적 변화를 일으키며 사회에 존재하고 있는 검은 세력의 배후를 쫓겠다는 생각을 품게 된다.

그의 친구 신이치는 데키야 조직을 이끄는 아버지를 통해 쇠퇴의 길을 가고 있는 암시장에서 발생하고 있는 괴이한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친구 하야타에게 해준다.


'해가 지며 어디선가 빨간 망토를 입은 괴인이 나타나 아이를 유괴해 죽인다.'


마을에 전설 처럼 내려왔던 괴담이 1906년 2월 11일 밤 후쿠이현 사카이군 미쿠니초에 있는 선박 화물 중개상 하시모토 리스케가 운영하는 상점에서 발생한다.

비좁은 미로 같은 붉은 암시장 거리에는 여성들을 뒤쫓는 '붉은 옷'의 정체불명의 괴인이 잔혹한 살인으로 시장 사람들을 공포 속으로 몰아 넣는 무시 무시한 사건이 발생하자 신이치는 이 암시장을 좌지우지 하는 상인 조합의 보스인 삼촌에게 자신의 대학 동창인 친구 하야타를 소개 하며 이들은 괴이한 살인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정체 불명의 '붉은 옷'을 입은 자가 저지르는 살인 사건은 미로처럼 얽혀 있는 곳에 있는 상점들마다 붙어 있는 밀실 공간으로 하야타가 이 사건을 추적하고 쫓기고 미행 당하는 동안 1936년 육군의 친황파 청년 장교들인 일으킨 2.26쿠데타 사건부터 일본이 일으킨 대동아 전쟁부터 전쟁 중 아시아 전역에 퍼져 있는 군부대에 위안소를 설치해 놓고 중국과 한국, 대만의 미성년자 여자 아이들을 끌어다가 몹쓸 짓을 하게 하고 잔혹한 방법으로 죽이거나 버려 버린 20세기 최악의 비극적인 사건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붉은 노을이 진 깊은 밤, 붉은 옷에

쫓겨 도망친 게 어느 날 밤이었나.

가게 계산대의 매상을

데키야에게 넘긴 건 환각이었을까

열 다섯 누나는 어둠이 되어

고향에 보내는 소식도 끊겼네

붉은 노을이 진 깊은 밤, 붉은 옷을

바라 보고 있어요. 바로 뒤에서

일본 땅 어디에도 주소지를 두고 살지 못했던 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았던 붉은 미로의 판자촌 기사이치유가장의 밀실에서 발생한 사건은 단순히 희대의 살인마가 저지른 사건이 아니였다.

전쟁을 시작한 일본 땅의 남자들을 위해 한반도와 중국 전역 그리고 아시아 곳곳에서 끌려온 소녀들은 전쟁에 패배하는 날 부터 짐승 같이 죽거나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일본 땅 빈민굴에서 숨어 살며 어둠의 세력이 되고 그 어둠의 세력들은 또 다른 약자들의 피와 땀을 착취하며 살아간다.

작가 미쓰다 신조는 20세기 총과 칼로 무장해서 이웃 국가의 무고한 생명들을 마구 짓밟았던 일본에게 강제로 끌려가서 간신히 죽음의 사선에서 살아 남았지만 돌아갈 집도 가족도 모두 잃어 버린 한국인들과 중국인들 그리고 전쟁 고아들이 일본 땅에서 어떻게 살아갔는지 모토로이 하야타라는 20대 청춘이 붉은 옷을 입고 여자와 아이들을 잔혹하게 죽이는 희대의 살인마를 뒤쫓으면서 근대 암울한 역사의 현장을 생생하게 묘사 했다.


이 책의 맨 마지막 장에는 작가 미쓰다 신조가 참고한 문헌에 대한 기록이 두 장에 걸쳐 적혀 있다.

일본 고전문학 전집 부터 시작한 참고 문헌은 숨겨진 전쟁 기록- 도쿄 암시장- 매매춘의 근현대사- 아무도 모르는 국가 매춘 명령-종전 직후의 일본 교과서에 실려 있지 않은 점령하의 일본- 불타버린 벌판의 암시장- 환락가는 암시장에서 탄생했다. - 0년 도쿄 블랙홀-역의 아이의 싸움 이야기하기 시작한 전쟁고아-중국 전선, 한 일본인 병사의 일기 1937년 8월- 1939년 침략과 가해의 일상 까지 작가는 오랜 기간동안 일본이 동아사이와 한국 땅에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소설적 상상력으로 버무린 허구의 세계가 아닌 진실을 추적하기 위해 진심으로 노력했다.

일본은 무모하게 전선을 확대 시켜 나가면서 한국인들의 집안에서 쓰는 가제도구는 물론이고 산과 들 그리고 가축과 짐승들까지 모조리 빼앗아서 군수 물자로 썼고 소녀들을 납치하거나 돈을 많이 주는 공장에서 일하게 해준다고 거짓말을 하고 군부대 마다 차려 놓은 위안소로 끌고 갔다.

부모를 잃은 고아들이나 형무소 생활을 하는 죄인들까지 모조리 끌고 간 일본은 아시아 전선에 군수물자를 보내지 않고 한반도 땅에서 빼앗은 금과 은, 구리 그리고 땅 속 깊은 곳에 파묻힌 광물을 모조리 군수 공장으로 보내 무기를 제조하는데 쏟아 부었고 각 전선마다 배치된 군부대들에게는 철저하게 현지에서 조달하라고 명령했다.

총과 칼로 무장한 일본 군인들은 중국 난징 시를 살육의 처형장으로 만들어 버렸고 만주 전역과 대만 본토에는 희귀한 나무와 나비들까지 전부 뽑아버리거나 멸종 시켰고 일본 땅에서 발발한 간토 대지진 당시 일본 민간인들은 한국인들을 잔혹한 방법으로 살해하고 몰살 시켜 버렸다.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의 가죽을 벗겨 먹었던 일본 군인들은 국가의 명령을 받아 인간으로서 도저히 저지를 수 없는 범죄를 저질렀고 전쟁에서 무조건 승리 하기 위해 일본은 '메스암페타민' 이라는 피로와 졸음을 없애는 마약 성분의 각성제까지 먹여서 반 미치광이 상태로 만들어 살인기계들이 아시아 전역에서 핏물로 물들였다.

패전후 미군에게 항복한 일본은 모종의 거래를 통해 경제적 실익을 차곡 차곡 챙겨서 전쟁 범죄를 저지른 자들에 대한 처벌을 전혀 하지 않은 채 한국 땅에서 발발한 6.25 전쟁으로 경제적 특혜와 군사적 이익을 모조리 쓸어 담아 경제 대국의 자리에 올라서서 자신들이 저질렀던 만행을 역사에서 지우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일본은 자신들의 역사책에서 줄창 미군에게 원폭을 맞고 전쟁 중 도심 곳곳에 폭격과 공습으로 굶주림과 공포에 시달렸던 것만 기록하고 있고 패전 후에도 살아 남은 일왕은 이웃 국가에게 극악의 범죄를 저지른 것에 대한 어떤 사죄를 하지 않고 [통석의 염]이라는 장례식을 거행할 때 치루는 입관 용어를 내뱉고 퇴위했다.

왕이 통치 했던 시절의 아시아 군주 국가에서는 왕이 국가의 모든 시간을 지배한다는 의미로 연호(年號)를 썼지만 20세기 두 차례 전쟁을 겪고 나서 더 이상 연호를 쓰지 않지만 일본은 유일하게 연호를 쓰고 있다.

2019년 10월에 즉위 해서 레이와 시대라 명명한 나루히토 일왕 아키히토는 할아버지·아버지와 달리 전쟁을 직접 경험하지 않았다.

그는 즉위식에서 세계 헌법 준수와 평화라는 지극히 기본적인 외교적 수사 발언을 했다.

2023년 전쟁 피해자 추도식에서 일왕은 “과거를 돌이켜보며 깊은 반성과 함께 앞으로 전쟁의 참화가 재차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말을 했고 아직까지 전범들이 묻힌 야스쿠니(靖國)신사는 참배하지 않았다.

작가 미쓰다 신조가 창조한 20세기 청년 하야타는 탄광에서 검은 얼굴의 여우로 불리는 괴기스러운 사건을 해결하고 암시장에 있는 붉은 미로 속 유곽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을 파헤치고 나서 자신이 나아갈 길은 일본 경제를 다시 세우는데 보탬이 되기 위해 해상 보안청 소속의 항로 표식 직원으로 취직해서 어느 섬의 등대지기가 된다.

붉은 옷의 유래는 풍수지리에서 동쪽의 청룡의 청색, 서쪽의 백호의 백색, 남쪽의 주작은 적색 그리고 북쪽의 현무는 흑색이라 명명하고 천상의 북극성은 황색을 상징했다.

남방 불교에서 아축여래는 청색, 아미타여래는 백색, 보생여래는 적색인 붉은 색, 불공성취여래는 흑색 그리고 대일 여래는 황색으로 다섯 여래를 오색 으로 대응 시킨다.

티베트에서 시작되어 중국 대흥선사에서 자리 잡은 남방 불교의 한 종파인 밀교를 한국의 혜초스님이 일본 땅에 전파 해서 일본인들의 민간 신앙과 뒤섞여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금빛으로 빛나는 네명의 보살을 거느리고 일체의 재물과 보배를 맡고 있는 붉은 색의 보생여래는 중생들의 평등한 삶을 관장 해서 교화하고 구제하는 역할을 한다.

작가 미쓰다 신조는 <붉은 옷의 어둠>이라는 책에서 일본 땅에서 가장 미천한 존재들을 잔혹하게 죽이는 살인마에게 붉은 색 옷을 입혀 놓았다.

아이가 태어나면 탯줄을 보관하는 포 항아리와 검붉은 옷 그리고 붉은 홀겹 옷의 한자에 모두 옷의衣라는 한자가 들어가고 검붉은 옷 색을 의미하는 자赭 한자에 붉을 적赤 한자가 들어가고 홀겹의 옷도 붉다.

이 셋을 합치면 혁의赭衣,즉, 죄인이 입는 <붉은 옷>이라는 의미가 된다.

따라서 작가 미쓰다 신조는 이 책에 등장하는 희대의 살인마에게 붉은 색 옷을 입혔고 그 붉은 색 옷을 입은 살인마 죄인은 지난 시절 일본이 대동아 전선에서 아시아인들에게 저지른 범죄 행위에 대한 형벌을 의미한다.

단순히 밀실 미스터리라 생각하고 이 책을 집어 들고 읽다 보면 청년 하야타가 추적하는 붉은 미로 속 밀실 사건의 붉은 옷을 입은 살인마에게 희생된 불행한 시대의 한국인들의 처참한 모습을 마주하게 되고 얼마나 많은 한국인들이 일본인들 손에 희생 당했는지 미약하게나마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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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과 정전
오가와 사토시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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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SF장르물의 거의 모든 상을 휩쓸고 있는 작가 오가와 사토시는 1986년생으로 도쿄 대학에서 이과로 진학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교양 학부로 옮기고 대학원에서 문화 연구를 전공했다.

박사과정 시절에 쓴 작품 <유트로니카의 이면>이 일본 장르 문학 출판사 하야카와가 주최 하는 SF 콘테스트에서 대상을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소설계로 뛰어들었다.

오가와 사토시는 약 2년에 한 번 주기로 장편과 단편을 발표하는 동안 요시카와 에이지상과 일본 SF대상, 야마모토 슈고로상을 수상했고 야마다후타로상을 받고 나서 마침내 <지도와 주먹>으로 나오키상까지 거머쥐었다.

2015년 부터 2022년까지 약 6년에 걸쳐 이 많은 상을 수상한 작가는 일본 내에서도 오가와 사토시가 유일무일한 기록을 세웠을 정도로 그의 작품 팬층은 굉장히 탄탄해서 출판 즉시 주요 문학상과 서점대상 후보로 줄줄이 올라간다.

가장 최근에 출간한 <너의 퀴즈>로 일본 추리 작가 협회상까지 수상해서 SF물과 미스테리, 역사물까지 거의 모든 장르 분야의 상을 휩쓸었다.


2022년 나오키 상과 야마다 후타로 상까지 2관왕 수상작인 <지도와 주먹> 만주 땅으로 건너간 일본인 통역사와 만주 철도망을 러시아까지 확대 하려는 차르 정부에게 고급 정보를 넘겨 주기 위해서 파견된 러시아 국교회 소속 신부 그리고 삼촌에게 속아서 만주로 오게 된 손오공과 중국 동쪽 지방의 봉촌이라는 곳에서 온 <이가진>까지 지도에도 없는 어느 섬을 무대로 러일 전쟁 전야 부터 시작에서 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까지 50년의 세월 동안 흔적 없이 사라져서 역사에도 기록되지 않는 곳에서 펼쳐지는 지략과 살육의 전쟁을 다룬 SF 공상 역사 소설이다.

역사를 뒤흔들었던 특정 사건과 몇몇 인물들이 이런 선택과 상황에 처해 있었다면 역사는 이런 식으로 흘러 가서 현 시대는 지금과는 달라져 있었을 것이라는 가정을 한 SF 공상 역사물인 <지도와 주먹> 작품에 앞서 출간된 SF미스터리 단편집 <거짓과 정전>은 2022년 대망의 나오키 상을 수상한 작품의 시놉시스 같은 작품이 있다.


[1844년 1월 9일 오전 10시 30분. 지금부터 워딩턴 공장 습격에 관련한 맨체스터 특별 순회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단편 <거짓과 정전>의 첫 장면은 사회주의 혁명과 마르크스 주의 핵심 사상을 응집 시켜서 공산주의 시대를 낳게 한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영국 맨체스터 순회 법원 재판석 피고인 자리에 앉아 있다.

이 재판에 변호인 측 증인으로 나선 인물은 쿡 앤드 휘트스톤식 전신 기사인 새뮤얼 스톡스로 정전의 수호자인 앵커로서 법정 증인석에 앉아 있다.

독일 에르멘 앤드 엥겔스 방적공장의 경영자 프리드리히 엥겔스 시니어의 아들이자 방직공장의 후계자인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재판석에서 이런 변호를 시작한다.


[저는 이 법정에서 유럽에 존재하는 흉악한 인간이 아일랜드인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만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고자 합니다. 이미 아일랜드인 수십 명이 순회 재판에서 유죄를 선고 받은 바 있지만 독일인인 치고가 저지른 죄는 그저 날뛴 것 뿐인 아일랜드인들보다 더 악질적입니다. 피고인은 폭동을 빌미로 사업 경쟁 상대의 공장을 파괴함으로써 엥겔스 공장의 가치를 상대적으로 올리려 했기 때문입니다.]


여러 공방이 오고 가고 나서 마지막 증인 발언 시간에 정전에서 기사 스톡스가 자리에서 일어 났다.

그는 지금 증인석 자리에 서있는 스톡스는 정전의 수호자의 중계자에게 메시지를 받고 나서 모종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사 년 전 부터 기다리고 준비 해 왔다.

이 정전기사는 지난 육백 년에 세월에 걸쳐 활동하면서 1884년 1월 마침내 영국 맨체스터 법원 재판석에서 '역사 전쟁'을 종결 시키는 작업에 돌입하기 시작한다.

반 세기의 시간이 흘러 미국과 소련 스파이들이 모스크바 한 가운데서 주요 연락책과 긴밀하게 연결해서 서로 치열한 첩보전을 펼치고 있던 중 한 소련인 과학자 안톤 페트로프가 미국 CIA에게 포섭된다. 그는 자신이 갖고 있는 최신 기술을 넘기려고 하던 중 굉장히 놀라운 사실을 우연한 계기로 발견하게 된다.


'우르마노프형 정전 가속기로 전자를 고압 방출하면 특정 조건 아래 전자가 사차원 공간을 통과한다는 걸 알았습니다.'


이 원리는 전자를 임의의 과거 일시, 장소로 방출할 수 있고 기술을 활용하면 초광속으로 과거와 통신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이론이 나온다.

안톤 페트로프는 직접 시현을 해보는데 전자를 이용해서 지난 시절에 살아있던 아버지와 메시지를 주고 받기도 하던 중 미래에서 온 메시지를 받게 되자 그는 마침내 자신과 비밀리에 접촉 중인 CIA요원 화이트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

기기 작동을 두루 살피며 시험 해 보는 동안 소련 과학자 페트로프의 주변 인물들이 KGB비밀요원들에 의해 체포되어 소식조차 알지 못한 상태가 되고 서서히 포위망이 페트로프로 집중되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이 백년의 세월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영국 맨체스터 법정에 피고인으로 서있는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선고형을 확 뒤집어 버릴 수 있다면 현 세상에 공산주의라는 사상도 국가도 전멸하게 될까?


[역사는 때로 중대한 양자 택일을 강요 당한다. 전쟁인가, 비전쟁인가, 폭력인가, 비폭력인가, 정직인가, 거짓인가, 대통령이 아니어도 황제가 아니어도 판단을 그르칠 때가 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에게 무죄 판결을 내린 판사는 잘못된 판단을 내렸다. 엥겔스가 실제로 유배형에 상당 하는 행동을 했는지 아닌지는 문제가 아니었다. 진실이 무엇이든 그는 유배형을 받았어야 했다. 그는 마르크스를 수정하지 말았어야 했다]


오가와 사토시의 가상의 SF역사물의 시작은 만약에 이 인물이 이런 선택을 했다면, 만약에 이 장소에 이런 사람이 살게 되었다면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나오키 수상작 <지도와 주먹>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君は満洲という白紙の地図に、夢を書きこむ

너는 만주라는 백지 지도에 꿈을 써넣는다.

단편 <거짓과 정전> 역시 작가가 백지의 종이 위에 공산주의는 만유인력처럼 특정 인물(뉴턴)이 없었어도 존재했을까? 아니면 <올리버 트위스트>처럼 특정 인물(찰스 디킨스)이 없었다면 존재하지 않았을까?라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만일 뉴턴이 없었더라도 만유인력은 발견됐을 것이다. 왜냐하면 만유인력은 이미 케플러 같은 앞선 과학자들이 이룬 성과의 마지막 한 조각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찰스 디킨스가 없었다면 <올리버 트위스트>는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불후한 성장 서사가 없었기에 당대 영국 땅에서 어떤 작가도 어린 고아 어린이가 어른들의 불법적인 행위와 노동에 착취 당하는 이야기를 쓴 적이 없었다.

따라서 찰스 디킨스의 존재 자체가 <올리버 트위스트> 작품과 같은 의미이기에 ‘역사적 필연성’은 존재 할 수 없다.

그렇다면 헤겔의 사상을 계승한 무신론 철학자 마르크스와 산업혁명 이후 영국의 노동운동에 정통했던 엥겔스 이 두 인물이 서로 만나지 않았다면 공산주의는 탄생 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공장에서 일어난 폭동에 연루돼 재판을 받고 있는 엥겔스의 모습에서 시작해 냉전 시대 미국과 소련의 치열했던 냉전시대까지 조망한 <거짓과 정전>에는 역사에서 공산주의를 없애려는 사람과 지키려는 사람 그리고 현대 역사를 변형 시키려는 사람과 전송 수단 통신 기기인 ‘정전’을 고수하려는 사람이 서로 대립하며 시간 여행이라는 SF적인 발상으로 마지막 장까지 긴박감을 향해 종횡무진 질주하는 SF 역사 스파이 스릴러 물이다.

장편으로 늘려 써도 좋을 만큼 재치 넘치는 설정과 기발한 전개, 여러 상황들이 역사적 시간대별로 절묘하게 들어 맞아 움직인다.

능숙한 조련사처럼 작가 오가와 사토시는 군더더기 없는 묘사와 인물들끼리 주고 받는 대사 그리고 복잡한 과학 구조 원리와 기술적인 관계를 특정 상황에 대비 시켜 독자들로 하여금 이런 상황이 발생 할 수도 있구나 라고 수긍 시킬 정도로 치밀할 정도로 논리적이다.

2019년에 발표한 SF미스터리 단편집 <거짓과 정전>은 출간 즉시 나오키상 후보작으로 뽑혔고 수록된 단편 <마술사>는 중국 최대 SF어워드인 은하상에서 은상을 수상하며 국제적인 작가가 되었다.

이 단편집에 수록된 또 다른 단편들은 다음과 같다.


-한 줄기 빛

-시간의 문

-무지카 문다나

-마지막 불량배

<마술사>와 <거짓과 정전> 두 단편을 제외하고 나머지 단편들은 기발한 설정이나 놀라운 결말로 치닫는 작품들은 아닌 그저 작가가 여분의 시간에 아이디어 구상처럼 쓴 것 처럼 밋밋한 맛이 느껴지지만 문장과 전개 방식은 뛰어나서 한 번 읽기 시작하면 끝까지 읽게되고 뒷맛도 개운하다.

나는 매해 미국에서 출간 되는 《Asimov’s》나 《FSF(The Magazine of Fantasy and Science Fiction)》 같은 기나긴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잡지를 정기적으로 읽고 있고 로커스상,필립 케이 딕 상,네뷸러와 휴고상 수상작들은 최신작품 부터 지난 시절 수상 작품들까지 전부 섭렵해서 읽었다.

특히 전 세계 SF작가들이 출간하는 단편들 중 한 해동안 출판된 SF 단편 작품들 가운데 수작들만 모은 SFnal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편집자 조너선 스트라한이 발행하는 잡지)의 최근 출판된 것까지 모조리 찾아 읽었다.

일본 문학상 작품 중에 꾸준히 읽는 수상작들은 아쿠타가와와 나오키,일본 추리협회 대상 그리고 가끔씩 요시카와 에이지와 야마모토 슈고로 상을 수상한 작품들은 문고본으로 출간 되기 전 단행본부터 구입해서 읽고 있다.

일본은 최근 십 여년 동안 주요 문학상 작품 후보에 오른 작품 중에서 수상작들 대부분이 역사물이 대세로 메이지 시대 말기의 청춘 미스터리, 신기술을 차용한 미래 사회를 펼쳐 보이는 본격 미스터리,러 일 전쟁, 2차 세계 대전의 어느 유럽 도시,환상과 괴물이 날 뛰어다니는 미래의 가상 도시, 인구 소멸로 인간이 사라진 도시,이상 기후 변화로 강과 바다가 범람해서 지하에서 살게 되는 사람들, 1945년 종전 직전 미스터리한 살인 사건이 발생하는 오사카 어느 마을, 2차 세계 대전 당시 독 소 전쟁터에 나서 소련 여성 스나이퍼 부대까지 현 시대가 아닌 지난 세기와 미래 시대를 넘나드는 대 서사 SF역사 공상 소설물들이 거의 모든 상을 수상하며 베스트 순위에 올라와 있다.


오가와 사토시는 자신의 소설 원칙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SF의 재미는 지금의 현실에서는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것, 또는 의심할 여지도 없이 자명하다고 생각되는 가치관이 붕괴되는 듯한 감각을 맛보는 데 있습니다.'


과거로 시간 여행을 하는 마술을 선보이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담은 <마술사 >단편에서 아버지에게 마법을 가르친 스승 맥스 월턴은 '마술사가 해선 안 되는 일 세 가지'를 반드시 잊지 말라고 당부 했다.


-마술을 선보이기 전에 설명해선 안된다.

-같은 마술을 반복해선 안된다.

-트릭을 밝혀선 안된다.


나 역시 단편 <마술사>의 마술 스승 맥스 월턴 처럼 오가와 사토시의 <거짓과 정전>에 담겨진 모든 단편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2015년 이후 부터 활동한 오가와 사토시에게 일본의 메이저급 작가들은 입을 모아 '천재'라며 매번 발표하는 작품마다 달려들어 가장 먼저 읽겠다고 아우성 치고 있다.

오가와 사토시는 소설가로 데뷔하기 전에 열렬한 책벌레로 주변 사람들 중에 자신만큼 책을 읽은 사람이 없다고 자부 할 정도로 독서광 중에 광인이였다.

그는 대학원 박사 과정 중에 여분에 남은 시간 동안 소설을 끄적이다가 일단 시작했으니 어떻게 해서든 마무리를 짖자 라고 결심하고 고치고 쓰기를 반복했다.

그는 독자들이 이런 작품을 좋아 하겠구나, 지금 시대에 이런 작품이 잘 팔리고 읽혀 지는 구나를 전혀 염두 해 두지 않고 오로지 자신이 생각하고 상상한 이야기를 파고 들어 쓰고 고치는 동안 스스로 재미가 붙어야 작품을 완성하는 성향으로 한 번 쓰기 시작하면 손바닥에 구멍이 생길 정도로 집요하게 달려들어 시대 상황과 자료를 철저하게 조사하고 쓰고 또 쓰기를 반복한다.

나오키 상을 수상한 <지도와 주먹>을 읽은 심사 위원들이 모두 제자리에 일어나서 기립 박수를 칠 때 그는 이 정도 열심히 썼는데 라는 자신감까지 갖고 있을 정도로 스스로 다져나간 창작 주먹이 단단하다.

그럼에도 매번 한 작품을 탈고 할 때마다 영혼의 밑바닥부터 창작의 샘까지 바싹 말라버려서 다음 작품을 집필할 때면 맨 땅에서 헤딩 하듯 맨 주먹으로 처음 소설을 쓰기 시작할 때의 정신 상태로 회귀하는 작가다.


[모모야마는 문화를 사랑했다. 영화도, 소설도, 음악도, 패션도, 미술도 모두 좋았다. 자신은 어째서 문화를 사랑하나. 모모야마는 ‘불필요해서’라고 생각했다. 문화가 없다고 굶어 죽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런 ‘불필요한 것’이 자신들의 생활에 색채를 부여하고 있었다.]

-오가와 사토시의 '무지카 문다나' 중에서


오가와 사토시의 <기억과 정전>은 2024년 상반기 내가 읽은 작품 중에서 지나온 시간의 흐름과 앞으로 이어지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지금 내가 여기’에 존재한다는 감각을, 일깨워준 작품이다.

우리 모두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사고의 발상과 시간 여행이 주는 즐거운 감각을 일깨워 준 오가와 사토시의 단편집 <거짓과 정전> 2014년 한계도 경계도 없이 폭발하는 상상력을 꼭 맛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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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24-04-22 15: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단한 작가로군요 젊기도 하고 @_@;;; 작가도 작가지만 scott님 존경합니다. 뱅글뱅글 @_@;;;;

scott 2024-04-22 17:37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문나잇님 행복한 저녁시간 보내세요
뱅글뱅글 @_@

희선 2024-04-23 03: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 소설이라는 것도 없어도 되는 거군요 그래도 있어서 다행입니다 사람이 그저 살기만 하면 재미가 없을 테니... 이건 언제나 그러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러니 음악 미술 여러 가지가 나타났겠지요


희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