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농장.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7
조지 오웰 지음, 김기혁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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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이 나의 집이 될 수 있는 단 한 사람 : 안회



조지 오웰의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은 가난에 대한 이야기다. 아니, 가난이라고 하면 너무 낭만적으로 들릴 수 있으니 '빈곤'에 대한 이야기라고 하자. 더군다나 '만들어진 빈곤'이라니! 만들어진 빈곤이라고 하는 이유는 절대 빈곤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대규모로 지속적으로 공급되어야만 자본주의 시스템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산업예비군'이라고 말했지만 그건 너무 점잖은 표현이다. '산업극빈층'이라고 해야 옳다.



숙소 가까이에 있는 어떤 술집에는 이런 아가씨도 있었다. 1년 내내 아침 일곱 시부터 자정까지 식사할 때는 제외하고는 앉아보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한번은 내가 춤추러 가자고 그녀에게 청했다. 그랬더니 그녀는 웃으며 자기는 몇 달 동안 길모퉁이도 돌아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녀는 폐병 환자였는데 내가 파리를 떠날 즈음 죽고 말았다.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


만약 그녀가 몇 달 동안 길모퉁이를 하루에도 몇 번씩, 아니 단 한 번씩만 돌아봤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녀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이건 좀 아니지'라고 자책하며 최소한의 여유를 누리고자 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정말 잔인할 정도로 이 사람들이 굶어죽지 않을 정도로만 수입을 유지하게 만드는 것은 자본가들의 엄격한 원칙이었다.



논어에 나오는 인물 중에서 가난에 관해서 '대가'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은 단연 안회다. 안회는 공자보다 먼저 죽었는데, 논어에서는 공자가 꺼이꺼이 하면서 우는 장면이 나온다. 제자들의 만류에 공자는 "이 사람이 아니면 내가 누구한테 이렇게 할 수 있겠느냐"라고 말했다. 안회에 대한 정보가 워낙 적어서 신화적이라는 인상을 풍기는데, 안회에 대한 연구자들의 연구 결과만을 토대로 말해보겠다. 공자의 어머니 이름은 안징재였다. 아버지 추숙흘이 별세했을 때는 공자 나이가 세 살배기에 불과했다. 추숙흘은 건강한 아들을 얻기 위해서 야합에 가까운 결혼, 그러니까 손녀뻘 여자와 결혼을 한 것이기 때문에 아버지 가문의 후원을 받을 수 없었고 외가에 의존했는데 그것이 바로 안씨 가문이다. 공자와 안회는 외가 쪽으로 친척이라고 할 수 있다. 안씨 가문은 전반적으로 가난했다. 공자는 어려서부터 아동노동을 해야 했는데, 그것만 봐도 안씨 가문이 얼마나 가난했는지 알 수 있었다. 안회는 위생 문제로 사망했다고 학자들은 보고 있다. 결국 빈곤이 사람을 죽이는 방식에 안회도 당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내가 안회를 초인적이라고 평가하는 부분은 가난에 대한 인식 때문이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절대로 할 수 없는 경지에 도달했다고 생각한다.



공자가 말했다. "어질다, 안회여! 한 그릇의 밥과 한 표주박의 마실 것으로 누추한 골목에 있는 것이 남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근심이지만, 안회는 그 즐거움을 고치지 않으니, 어질다, 안회여!

『논어』, 「옹야」 편


가난을 즐거움이라고 표현한 것, 그리고 그 즐거움을 고치지 않는다는 게 구체저으로 어떤 것인지 알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렇게 질문할 수 있다. 가난이 나의 집이 될 수 있는가? 만약 이것을 누군가에게 말한다면 명백한 모욕이 될 것이다. 이 세상 에너지의 원천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있다. 대부분은 가난한 사람들의 것을 뺏어먹으면서 부를 유지하지만 안회는 가난한 사람들을 자신의 집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의 가난을 깊이 이해하고 함께 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들을 가난에서 구하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이 점에 있어서 가난을 낭만화했다는 비판을 피하긴 어려울 것 같다. 다만 가난한 자들의 가난을 이용하지도 않았고, 그들을 더 가난하게 한 것도 아니었고, 가난을 미화한 것도 아니었다. 그들과 함께 가난했다. 이 정도라고 하더라도 나는 안회가 가난의 대가, 빈곤의 대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가난한 자들이 부와 권력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동서양 할 것 없이 권력자나 부자라면 다 알고 있었다. 가난한 자들을 자신의 부와 권력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가난한 지들이야말로 세상의 원천이자 세상의 목적이며 그들의 삶과 고통을 이해하는 것을 자신의 앎의 원천으로 삼는 사람들은 안회처럼 "가난은 나의 집이다!"라고 선언하게 될 것이다. 내가 당장 가난하지 않더라도 가난한 자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고통에서 헤어나오게끔 하는 노력은 멈출 수 없다. 



조지 오웰은 똥침을 놓는다, 가난에 대한 고정관념을 향해서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은 조지 오웰의 데뷔작이다. 이 작품은 1931년 4월 조지 오웰이 처음 문학적인 에세이로 게재한 르포르타주 <스파이크>(The Spike ; 부랑자(노숙자)를 위한 임시 무료 수용소를 일컫는 속어)를 발전시켜서 쓴 작품이다.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 27장과 35장에 <스파이크>의 내용이 나온다.




그러니까 조지 오웰은 소설가보다는 르포르타주 작가로서 세상에 첫인사를 한 셈이다.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뿐 아니라 『위건 부두로 가는 길』, 『카탈로니아 찬가』 등이 르포르타주 작품이며 산문집 『나는 왜 쓰는가』에서도 르포르타주 작가로서의 진가를 확인할 수 있다.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은 잭 런던의 『밑바닥 사람들』을 벤치마킹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밑바닥 사람들』이 미국의 밑바닥을 조명한 데 비해,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은 영국과 프랑스의 밑바닥을 조명했다는 점에서 문화적 차이를 살펴볼 수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조지 오웰이 작품속에서 잭 런던과 그의 작품, 미국 빈곤 문화와 영국의 빈곤 문화에 대해서 논평하는 대목이 나온다는 점이다. 이 논평은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의 주제의식을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무착 중요한 메시지다.



미국인 부랑인을 다룬 잭 런던의 책에 등장하는 냉소적이고 의도적인 기생주의는 영국인의 성격에서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영국인은 빈곤에 대해 강한 죄의식을 가진 양심적인 민족이다. 보통의 영국인이 일부러 기생충이 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 이러한 국민성이 실직을 했다고 결코 변하는 것도 아니다. 사실인즉 떠돌이란 실직한 영국인에 불과하고, 법률에 의해 방랑 생활을 강요당한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떠돌이 괴물이라는 관념은 사라진다.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


한마디로 조지 오웰은 미국인을 유대인 다음으로 혐오한다. 프랑스 식당에서 미국인 손님을 만나면 등쳐먹으려고 인달이다. 등쳐먹으면서 돈을 버는 것도 있지만 스포츠처럼 즐기는 부분도 있다. 유럽인들이 미국인이게 얼마나 큰 반감을 가지고 있는지 잘 보여주는 사건도 있다. 한 돈 많은 미국인에게 시리얼과 마멀레이드를 제공하고 만찬의 식사값을 받는가 하면, 피츠버그에서 온 손님은 건포도와 스크램블드에, 코코아 저녁식사를 주고 원가절감을 했다. (232쪽)


앞서 인용한 것처럼 영국인에게 빈곤이라는 개념이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차상위계층 같은 고급 개념은 언감생심이고 범죄자로 보는 경우가 있었다. '노오력'을 하지 않아서 빈곤으로 추락했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벌을 받아야 한다는 관념이 팽배했다. '사회적 빈곤'이라는 개념도 형성되기 훨씬 이전이었다. 빈곤이 자본주의의 발달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사실, 빈곤을 산소호흡기로 자본주의가 연명한다는 사실은 그저 본능적으로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걸 보여주는 단적인 장면은 보호소에서 멀쩡한 음식을 짬시키고 극빈자들에게는 형편없는 음식을 제공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피해자가 하는 말을 통해 알 수 있다.


자신도 다른 떠돌이와 마찬가지로 굶주리고 있지만, 그는 음식을 떠돌이에게 주지 않고 버리는 이유를 곧 간파했다. 그는 아주 엄중하게 나를 훈계했다. "그렇게 해야 마땅하죠." 그가 입을 열었다. "이런 곳을 너무 편하게 만들어놓으면 전국에 있는 인간쓰레기들은 모두 몰려들 겁니다. 그런 쓰레기들을 못 오게 하는 건 형편없는 음식뿐이고요. 여기 이 떠돌이들은 게을러서 일을 안 하는 겁니다. 바로 그게 크게 잘못된 거죠. 그런 자들을 격려할 피룡는 없습니다. 그네들은 쓰레기예요." 나는 그가 그릇된 생각을 하고 있다고 반박하려 했으나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되풀이해서 강조했다.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

그러고 보니 정리해고된 실업자가 정리해고를 해야 하는 이유를 역설했던 『빌리 엘리어트』도 영국 소설이다. 조지 오웰은 똥침을 놓는다. 빈곤이 범죄라고 부르는 무지와 몰상식에 대해서, 빈곤한 자들은 노오력을 하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빈곤한 자들을 구제하고 새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종교단체 사람들을 향해서. 이를 논어적으로 해석하자면 '다원(多媛)'이라고 할 수 있다.



공자가 말했다. 무분별하게 이익을 추구하면 곳곳에서 원망이 들끓는다.

『논어』, 「이인」 편


조지 오웰이 만난 부랑아, 극빈자, 노숙자, 거리의 화가들은 주눅 들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이 가난해진 것이 죄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을 함부로 하는 자들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복수한다. 그 복수가 짜릿하다.


오르간이 미리 몇 번 우릉우릉하더니 예배가 시작되었다. 그러자 그 즉시 신호라도 떨어진 것처럼 떠돌이들은 가장 난폭한 형태로 무례한 짓을 하기 시작했다. 교회 안에서 그러한 광경이 벌어지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회랑 곳곳에서 예배석에 비스듬히 기대어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소란스럽게 지껄이고, 앞으로 몸을 내밀어 아래층 교인들에게 빵 부스러기를 던졌다. 나는 내 옆에 앉은 사람이 담배에 불을 붙이는 것을 약간의 완력을 써야 제지해야만 했다. 떠돌이들은 예배를 순전히 희극의 한 장면으로 취급했다. 정말, 몹시도 우스꽝스러운 예배였다. 느닷없이 '할렐루야!' 하고 고함을 지르기도 하고, 즉석기도를 끝도 없이 해댔다. 그래도 떠돌이들의 행동은 도가 지나쳤다. 회중에 늙은이 한 사람이 있었는데-부틀 형제인가 하는 이름이었다-그는 몇 차례 우리를 기도로 인도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런데 이 노인이 일어설 때마다 떠돌이들은 극장 안에서나 하는 발 구르기를 시작했다. 떠돌이들의 말에 따르면 지난번 예배 때는 즉석기도를 25분이나 끌어서 마침내 목사가 그만하라고 중지시켰다는 것이었다. 한번은 부틀 형제가 일어서자 떠돌이 한 사람이 말했다. "절대 7분 이상은 안 돼!" 그 소리가 무척 커서 교회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이 다 들었다. 얼마 안 가서 우리가 내는 소음이 목사의 설교 소리보다 훨씬 커졌다. 수시로 아래층에서 누군가가 화난 목소리로 "쉿!" 쇨를 내기도 했지만 별 효과는 없었다. 예배를 우롱하기로 한 이상 우리를 저지할 재간은 없었다.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


조지 오웰은 프랑스에서는 보리스라는 러시아 친구와, 그리고 영국에서는 거리의 화가 보조라는 친구 등과 함께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들을 밀착 취재한다. 스스로 따라지 인생이 되어서. 영국에서 빈곤에 대한 혐오가 어느 정도 해소된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빈곤에 대한 혐오가 왕성하기에 빈곤 문화와 빈곤에 대한 이해가 성숙해지기 위해서는 꼭 읽어야 하는 책이다.



개인적으로 조지 오웰이 보수주의자인 점이 밑바닥 사람들의 문제와 사회적 빈곤의 문제를 건드리는 데 더 효과적이었다고 생각한다. 『동물농장』이 출간되자마자 거의 1등으로 한국에 번역된 것은 러시아와 북한 공산당에 대한 반감을 확산시키려는 미국 정보당국의 전략이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조지 오웰의 정치적 스탠스를 잘 알 수 있다. 물론 조지 오웰이 반공 작가라는 것은 아니다. 러시아 공산당에 허위를 직업적으로 비판했을 뿐이다. 러시아 팬클럽이 광범위했던 당시 영국에서 『동물농장』이 1인출판사나 영세출판사를 구해서 겨우 출판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이를 보여준다. 만약 조지 오웰이 지금보다 더 진보적이었다면 가난에 어떤 관념을 형성했을 것이다. 만약 '사회적 빈곤'이라는 것이 지금도 중요한 의제라고 생각한다면 조지 오웰은 역사상 가장 훌륭한 발제자다.






 노동조합의 의뢰를 받아 위건 탄광에서 직접 광부 일을 하면서 쓴 책 <윅건 부두로 가는 길>



▲ 1937년 3월 쿠데타로부터 스페인 민주정권을 지키기 위해서 국제 의용군으로 참전하고 군사 교관을 하는 키다리 아저씨 조지 오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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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은 몰라도 카프카라면 '독신자의 불행'에 대해서 일가를 이룬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펠리체 바흐어와 두 번의 약혼과 두 번의 파혼은 많은 것을 말해준다. 카프카는 결국 독신으로 살다 죽었지만 독신자로 살고 싶지 않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독신자의 불행을 잘 알고, 평생 독신자의 불행에 대해서 생각한 카프카는 왜 독신자로 살아야 했을까? 첫 번째 이유는 글쓰는 자유를 위해서다. 펠리체 바흐어와 결혼생활을 하면서 카프카는 글쓰기를 계속 할 수 있을지 시뮬레이션을 여러 번 돌려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견적이 안 나왔다. 카프카의 글쓰기는 자유이자 생존인데 그것이 위협받을 바에는 차라리 독신자의 불행을 선택하는 게 나았을 것이다.


내가 궁금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카프카는 약혼을 두 번이나 했느냐 하는 것이다. 약혼을 깬 것보다 약혼을 한 것이 나는 더 궁금하다. 카프카는 가족들과 관계가 좋지 못했다. 형제 관계도 별로였다. 마음의 집이 될 사람이 필요했을 것이다. 만약 결혼생활과 글쓰기가 공존할 수 있다면 약간의 자유를 희생하면서도 해볼만 했을 것이다. 실제로 카프카는 결혼생활과 글쓰기 생활이 공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이제까지의 연구와 비평은 카프카의 파혼에 집중한 반면, 두 번의 약혼에 대한 관심이 너무 적다. 영화 <올드보이>에서도 '왜 가뒀느냐?'가 아니라 '왜 풀어줬느냐?'는 질문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유지태가 말하지 않았던가?

두 번째 파혼 원인은 아버지와 연관된 것이 아닌가 싶다. 억압적인 환경에서 아버지의 강력한 통제력 하에서 별 저항도 하지 못하고 살았던 장남 카프카에게 결혼이란 것은 아버지의 영향력이 강해지는 것을 말할 것이다. 결혼은 펠리체 바우어와의 결합도 있지만, 카프카 집안과 펠리체 집안의 거래적 성격이 강하다면 글쓰기의 자유는 더욱 제약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결혼한 사람들은 알겠지만 '시댁의 구속'과 '처가의 구속'은 실체가 있는 구속이니까.

카프카는 마음의 집이 될 사람을 애타게 찾음과 동시에 독신자의 불행에 대한 공포를 느끼고 있었고, <독신자의 불행>에는 그런 감정이 상세히 묘사돼 있다.


몸이 아프게 되면 자신의 침대 한구석에서 몇 주일씩이라도 텅 빈 방을 바라보아야 하고, 언제나 대문 앞에서 작별을 해야 할 뿐 한 번도 자신의 부인과 나란히 층계를 올라올 수 없고, 자신의 방안에 있는 앞문들은 단지 낯선 집안으로 통해 있을 뿐이며, 늘 한손에는 자신의 저녁거리를 들고 집으로 와야 하고, 낯선 아이들을 놀라워하며 바라보아야 하지만 "나에겐 아이들이 하나도 없구나"하고 줄곧 되풀이해서도 안 되며, 젊은 시절의 기억에 남아 있는 한두 독신자들을 따라 외모와 태도를 꾸며 나가야 한다는 것은 정말 괴로운 일이다.

『카프카 단편전집』, 「독신자의 불행」


카프카에게 가장 모욕적인 말은 '독신주의자'라는 평가일 것이다. 위의 문장을 보면 독신주의자라는 말을 할 수 없을 뿐더러, 약혼을 두 번이나 했다가 파혼을 하는 과정 역시 독신주의자로서 할 수 없는 행동이다. 아마도 카프카가 자신은 독신자로 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체념적으로 깨달으면서 스스로에게 선고를 내린 것은 아닐까? 그래서 "결국은 그렇게 될 것이다"고 덧붙인 것 아닐까?


마지막으로 '선택'이라는 측면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카프카는 어쨌든 자신의 인생에서 중요한 선택을 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파혼이며 독신자의 길이다. 고통스러운 결단의 과정에서 카프카에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 상처투성이이긴 하지만 자유롭게 글을 쓰는 카프카 자신이다.


다만 오늘날이나 후에는 실제에서도 하나의 육신과 하나의 진짜 머리, 그러니까 손으로 치기 위한 이마를 가지고 있는 존재로 서 있다는 것을 제외하고느 말이다.

『카프카 단편전집』, 「독신자의 불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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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3-03-06 17: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난 카프카 일기 멋모르고 도전했다가 깨갱댔는데...
경지가 느껴지는 글이군. 흠.

승주나무 2023-03-06 1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무슨 경지 씩이나 ㅎㅎㅎ
 

이어령 1주기에 맞춰 국제 학술대회와 기사, 단행본이 밀려든다. 그 중에서 내 눈에 띄었던 것은 '김수영-이어령' 지상논쟁을 다뤘던 교수신문 기사였다.  (전복의 혁명아 4·19 세대, 자유주의 외치다)


김수영의 상황 인식에 대한 좋은 참고 자료는 김수영과 이어령의 논쟁이다. 그 논쟁의 핵심은 이어령이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에 대한 문인들의 두려움을 엄살이라고 치부한 데 비해, 김수영은 문인들을 소시민으로 몰고 가는 사회적 조건의 억압성을 문제삼았다는 데에 있다.

「전복의 혁명아 4·19 세대, 자유주의 외치다」


신문 칼럼과 문예지 지면 등을 통해서 펼쳐졌던 지상논쟁은 여러 차례에 걸쳐서 이루어졌다. 『김수영 산문전집』에서는 세 편의 글에서 논쟁의 내용을 다루고 있다. 논쟁이 펼쳐진 시기는 1968년 1월~3월 3개월 동안이다. 물론 이어령 교수의 비판에 대한 김수영 시인의 주장이기 때문에 한계는 있겠지만, 김수영 시인의 글을 통해서 쟁점을 찾을 수 있다. 글은 「지식인의 사회참여」, 「실험적인 문학과 정치적 사유」, 「<불온성>에 대한 비과학적인 억측」에서 볼 수 있다.


지난 연말에 「우리 문화의 방향」이 실린 같은 신문에 게재된 「<에비>가 지배하는 문화」(이어령)이라는 시론은, 우리나라의 문화인의 이러한 무지성과 타성을 매우 따끔하게 꼬집어준 재미있는 글이었다. 그런데 이 글은 어느 편인가 하면, 창조의 자유가 억압되는 원인을 지나치게 문화인 자신의 책임으로만 돌리고 있는 것 같은 감을 주는 것이 불쾌하다.

『김수영 산문전집』, 「지식인의 사회참여」








이어령이 근대화해 가는 자본주의의 고도한 위협의 복잡하고 거대하고 민첩하고 조용한 파괴작업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고 있다는 것이 비판의 요지다. 그렇다고 우리나라의 문화인이 허약하고 비겁하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김수영의 글에서 강조된 낱말은 '단견'과 '피상적'이라는 것인데, 젊은 비평가가 현상 진단을 진지하게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담은 것으로 보인다.


그 당시의 문학이 정치 삐라의 남발 같은 인상을 주었다고 해서 그 책임이 그 당시의 정치적 자유에 있다고 생각하거나, 일부의 <문화를 정치사회의 이데올로기와 동일시하는 문화인>에게만 있다고 생각하고 그 폐해를 과대하게 망상하는 것은 지극히 소아병적인 단견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김수영 산문전집』, 「실험적인 문학의 자유」


그는 (중략) 해방 직후와 4.19 직후를 예로 들면서, 정치적 자유의 폭이 비교적 넓었던 시기의 문화현상을 <자유의 영역이 확보될수록 한국문예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도구로 화하여 쇠멸해 가는 이상한 역현상이 벌어지고 있다>고 무모한 일방적인 해석을 내리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지극히 위험한 피상적인 판단이다.

『김수영 산문전집』, 「실험적인 문학의 자유」



작가의 책임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작가를 둘러싼 사회적인 구조와 억압을 소홀히 할 수 있는데, 이것은 가난해진 것이 개인들의 '노오력'이 부족하고 게을렀기 때문이라는 비판과 닮았다는 점에서 나는 이어령의 탈정치성과 자기계발적 성격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김수영-이어령 논쟁은 '에비 논쟁'으로 부를 만하다


또한 이 필자는 끝머리에 가서 <우리는 그 치졸한 유아언어의 '에비'라는 상상적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다시 성인들의 냉철한 언어로 예언의 소리를 전달해야 할 시대와 대면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소설이나 시의 <예언의 소리>는 반드시 냉철할 수만은 없다.

『김수영 산문전집』, 「지식인의 사회참여」


아민 그레더 그림책 『섬』의 한 장면. 이 그림을 보면 '에비'가 생각난다



이어령은 한국 문단의 작가들이 일종의 '자기검열 기제'를 가지고 작품활동을 하면서 막연한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는 모습을 비판하면서 '에비'라는 단어를 꺼냈다.


'에비'란 말은 유아언어에 속한다. 애들이 울 때 어른들은 '에비가 온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말을 사용하는 어른도, 그 말을 듣고 울음을 멈추는 애들도 '에비'가 과연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르고 있다. 즉 '에비'라는 말은 어떤 구체적인 대상을 가리키는 명사가 아니라 막연한 두려움이며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불안, 그리고 가상적인 어떤 금제의 총칭한다. 어렸을 때와 마찬가지로 인간들은 복면을 쓴 공포, 분위기로만 전달되는 그 위협의 금제감정에 지배되는 경우가 많다.

『김수영 산문전집』, 「지식인의 사회참여」


이어령의 '에비' 비판에 대해서 김수영은 우리들의 에비는 결코 가상적인 금제의 힘이 아니라 구체적인 대상을 가리키는 명사이며, 가장 명확한 '금제의 힘'이라고 항변했다. 이어령의 주장에 대해서 김수영이 짜증을 내는 부분은 명확한 형태가 없다는 점이다. <질서는 위대한 예술이다>라는 언사는 '정치권력의 시정구호'로서는 알맞지만 문학의 백년의 대계를 세워야 할 전위적인 평론가가 내세울 만한 기발한 시사는 못 된다는 김수영 시인의 비판이 그러한데, 그 중 압권은 아래와 같다. 이 논쟁 과정에서 김수영은 이어령과 완전한 결별을 한 듯하다.


그는 <문학은 권력이나 정치이념의 시녀가 아니다>의 서두부터 <문학작품을 문학작품으로 읽으려 하지 않는 태도, 그것이 바로 문학을 가장 직접적으로 위협하고 있는 형편이다>라고 비난하고 있는데, 이런 비난은 누구의 어떤 발언이나 작품이나 태도에 근거를 두고 한 말인지 알 수가 없다. 이런 중대한 말을 실제적인 예시도 없이 마구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혹시 그는 내가 말한 나의 발표할 수 없는 시를 가리켜서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발표할 수 없다고 한 나의 작품은 나로서는 조금도 불온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는 작품이다.

『김수영 산문전집』, 「<불온성>에 대한 비과학적인 억측」


그런데 이어령 씨는 <불온하다고 보여질 우려>가 있는 작품을 기관원도 단정을 내리기 전에 먼저 불온하다고 단정을 내림으로써 <불온하다고 보여질 우려>가 있는 작품이 불온하지 않게 통할 수 있는 문화풍토를 조성하자는 나의 설명을 거꾸로 되잡아서, <불온하다고 보여질 우려가 있는 작품>이 바로 <불온한 작품>이니 그런 문화풍토가 조성되면 문학이 말살된다고, 기관원이 무색할 정도의 망상을 하고 있다. 이런 망상은 문학이론으로서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

『김수영 산문전집』, 「<불온성>에 대한 비과학적인 억측



기사를 검색해 보니 김수영 시인 50주기인 2018년에 이어령 교수의 발언이 소개돼 있었다. (김수영 50주기, 이어령의 회고 “누운 자리 달랐어도 같은 꿈 꿨을 것”)


“돌이켜 보면 논쟁 과정에서 절친한 사이인 김수영 시인과 인간적으로 멀어졌던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는 이어령 교수의 발언을 미루어 보면 이 논쟁 이후로 둘 사이는 완전히 멀어진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 만세>(김일성 만세 대자보 사건 관련 기사)라는 시를 세상에 내놓아도 두려움에 떨지 않을 수 있는 사회를 꿈꿨던 김수영 시인으로서는 젊은 비평가 이어령의 피상적인 비판이 몹시 부당하고 불쾌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김수영과 조지 오웰의 글들을 보면서 개인적으로는 이어령의 글이 다소 한가하게 느껴진다.

김일성 만세 / 김수영

‘김일성 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언론의 자유라고 조지훈이란

시인이 우겨대니

나는 잠이 올 수밖에

‘김일성만세’

韓國의 言論自由의 出發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정치의 자유라고 장면이란

관리가 우겨대니

나는 잠이 깰 수밖에

(-1960년 김수영 <김일성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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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3-03-01 19: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네가 말했던 거구나.
그런데 좀 어렵네.ㅋ

승주나무 2023-03-01 19:40   좋아요 1 | URL
그렇죠. 좀 어렵죠. 이어령이 김수영의 역린을 제대로 건드린 건 확실한 것 같아요
 














예전에는 카프카가 넘사벽이었다. 어렵다는 말을 너무 많이 들어서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그러다 몇 년 전에 카프카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성>, <실종>, <소송> 등 장편들을 읽으면서 왜 이제야 읽었는지 후회했다. 대학원 조교를 2년 했는데 카프카 덕분에 버텼다. 교수 연구실과 대학 본부를 누비면서 <성>의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건물과 건물, 인물과 인물 사이에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고, 그들 사이의 갈등과 알력은 더더욱 논리적이지 않았기에 카프카 주인공의 당혹스러움이 훅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하마터면 카프카를 신으로 섬길 뻔했다. 조르주 아감벤, 발터 벤야민 등 전공서적을 읽을 때도 카프카는 계속 소환되었다. 특히 단편과 손바닥소설이 많이 소환되었는데 큰맘 먹고 단편 전집을 질렀다. 그리고 나서 읽지 않았다. 1일1카프카는 아니더라도 카프카의 단편을 읽고 글을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 번째 작품이 <국도의 아이들>이다. 

카프카 장편(손바닥소설) <국도의 아이들>을 몇 번을 읽었는지 모른다. 이제야 조금 이해가 된다. 카프카의 텍스트는 알 수 없는 엄청난 힘에 짓눌린 자를 주인공 또는 화자로 삼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어두운 세계의 소년 백석"을 떠올린다.백석 시인의 유년 세계는 빛으로 짜인 옷이라면, 카프카의 유년 세계는 어둠으로 짜인 옷이다. 카프카의 인물들은 항상 무언가의 통제 안에 있다는 점에서 어린이의 확장에 불과하다.


국도의 아이들은 어떻게 놀까? 나는 그림책 <지름길>이 생각났다. 지름길의 아이들은 집으로 가장 빨리 갈 수 있는 기차길을 지름길로 택한 아이들이 굉음을 내고 달려오는 기차의 실체를 보고 깜짝 놀라서 그 비밀을 영원히 간직한다는 이야기다. 


국도의 아이들을 보면서 지름길의 아이들이 생각났던 까닭은 철저히 타자의 공간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와 사람을 다루기 때문이다. <국도의 아이들>은 국도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과는 무관하게 살아가고 논다. 그들은 결코 주인공이 되는 일이 없다. 완벽하게 위계적인 사회에서 어린이들은 곤충이나 애완동물과 비슷한 위치의 피라미드 층에 사는 존재일 뿐이다. 어린이들의 삶은 어쨌거나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환경 안에서 둘레를 치지만, 지금까지 어린이를 보는 시선은 달라진 게 거의 없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어린이들의 지적 수준이 높아지고 서로 긴밀히 공유한다는 점이다. 어느새 어린이들에게 어른들은 대부분 파악이 되었다. 


우리가 아이들을 어떤 방식으로 가르치든 우리는 그 아이들을 반드시 다시 만나게 되는데, 그 때 중요한 것은 아이들의 표정이다. 화가 난 표정으로 모든 것을 부서버리는 아이들의 표정을 만날 확률은 최소 90%는 된다고 생각한다. 이 확률을 49%로 줄이는 것이 나의 "불가능한 목표"다.


바보들은 피곤해지지도 않는다고?

- 바보들이 어떻게 피곤해질 수 있겠니?

카프카, <국도의 아이들> 서로간의 대화


'아이들'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카프카의 공간'이다. '국도'라는 공간이 명시적으로 표현된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소설적 공간은 '무대'와 같기 때문에 대부분의 소설가에게 공간이 중요하게 다뤄지지만 카프카에게는 공간이 더욱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푸코의 '헤테로토피아'개념으로 <국도의 아이들>을 해석한 논문도 있던데, '다른, 낯선, 다양한, 혼종된'이라는 의미를 가진 hetero와 장소라는 의미의 topos/topia의 합성어인 헤테로토피아 개념을 가지고 푸코는 시간과는 달리 여전히 신성화에 묶여 있는 근대적 장소의 폐쇄성을 비판한다. 공간에 대한 민감성을 가지고 카프카 소설을 읽는다면 하나의 재미를 추가할 수 있다. 예컨대 <성>의 경우 '성'이라는 공간에 접근하기 위해서 주인공이 끊임없이 이동하는데 성과 주인공의 거리는 결코 가까워지지 않는다. 공간은 권력이 반영된 장소이므로 위계질서가 완성된 카프카의 소설 사회에서는 결코 허락되지 않는다. 하지만 인물들은 끊임없이 공간을 넘보고, 거기서 수많은 좌절과 몰락이 만들어진다. 위에 언급한 마지막 대화는 두 아이가 국도를 타면 갈 수 있는 남쪽의 도시에 대한 소문을 비평한 것이다. "생각 좀 해봐! 그곳에서는 사람들이 잠을 자지 않는다!" 불이 꺼지지 않는 도시를 '잠을 자지 않는다'고 상징한 것이다. 국도의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잠을 잘 수 없는 것이다. 


<국도의 아이들>이 또 하나 특이한 것은 '길'이라는 독특한 공간을 추가했다는 것이다. 왜 지방도가 아니라 국도인가? 먼저 국가권력을 생각할 수 있다. 공간과 공간은 길로 연결돼 있기 때문에 길은 공간에게 명령한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길은 명령권자가 아니다. 어떤 공간에 거주하는 '갑'이 최종 명령권자라고 할 수 있지만, 그건 큰 의미가 없다. 명령을 받은 공간에서 그 내용물을 길 앞에 내놓아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 유통이 공간과 공간을 연결하는 수단에서 종국에는 공간의 지배자로 바뀌는 것과 비슷하다. 길은 문고리 권력이지만, 문고리 권력이야말로 절대 권력이다. 카프카 소설의 절대 권력자는 '문고리 권력'이자 '문지기'인데, 감춰진 권력은 주인공들과 인물들이 볼 수 없고 그들의 '하인'만이 권력을 대표한다. <성>에서 하인은 목수에게 딸과 잠자리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한다. 목수는 하인의 명령을 어긴 죄로 그 사회에서 매도당해 생계의 극한에 내몰린다. 농부의 딸은 스스로 하인에게 가서 자신의 몸을 허락하는데, 하인들은 비로소 농부에게 내려진 사회적 형벌을 취하한다. 내가 1일1카프카를 하고 싶은 까닭은 카프카가 권력과 위계질서를 거의 공기처럼 잘 그려놓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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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회차 논어 강의 목록을 만들었다.

소인론, 반역의 시대, 필생의 라이벌(양호 또는 양화. 논어 17편이 양화편이다)이라는 내용은 이번에 새롭게 업데이트가 되었다. "반체제적 복고주의자"라는 형용 모순의 특성이 "반체제적 권모술수가"인 양호(양화)와 평생 긴장하면서 어떻게 단련되었는지 드라마틱하다. 요즘 공자 연구서들은 양호에 주목하고 있는 점이 특색이다.











공자는 복고주의자이자 혁명가이다. 《공자전》(펄북스)을 집필한 시라카와 시즈카 선생은 "혁명자"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안했다. 나도 혁명가보다는 혁명자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공자는 혁명으로 일가를 나눈 것이 아니라, 모든 혁명가들의 혁명 태도를 기초했기 때문이다.


프랑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은 교육이 사회 체제를 유지하는 보수적인 역할을 하지만, 예외적으로 병든 사회를 정화하는 기능을 할 때가 있다고 말했다. 좋은 스승이 태어난 경우다. 뒤르켐은 선생의 사회학적 기원을 "비주류 평민"이라고 설명했다. 공자는 사 계급으로 평민과 귀족 사이에 위태롭게 서 있는 비주류에서부터 자수성가한 인물이다.


반역의 시대에 태어나 활약한 공자에게 반역자의 특성이 없을 수 없다. 다만 양호와 당대 권모술수가들의 반역은 권력투쟁에 머물렀지만, 공자의 반역은 변혁 사상에 근거한 것이라는 점이 다르다. 공자 강의 요청이 계속 있으면 공부를 더 할 수 있으니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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