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불교의 모습은 기복과 호국으로 정리할 수 있다. 전자는 개인적 차원에서, 후자는 사회적 차원에서 그러하다. 온전한 불교 정신을 절이 아닌 세상에서 삶으로 구현하려 시도하는 순간 불교 내부와 외부 모두에서 공격받기 일쑤다. 과연 붓다와 제자들이 만들고자 한 세상이 이러했을까. 박노자는 이런 한국 불교에 일침을 던지며 아집을 부정하고, 여기(아집)에서 비롯하는 국가, 자본주의, 제국을 해체하는 실천적 불교를 제안한다. 이는 초기 불교 정신에 대한 '해방적' 해석이자, 현대사회에서 불교의 참 역할을 되살리는 시도다. 언제나 '아, 우리가 이렇게 사는구나' 하는 감각을 명징한 논리로 깨우치는 박노자의 신작 <붓다를 죽인 부처>. 서문과 본문 일부를 공개한다.

 

 

서언 : 해방불교를 위하여!

대개 특정 종교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말하기는 매우 곤란하다. 종교의 교리도 실천도 결국 해석방법에 따라 달라지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예컨대 기독교를 봐도 “재판관에게 가지 마라”, “부자가 낙원에 드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기보다 더 어렵다”, “땅에서 재물을 모으지 마라”와 같은 일종의 ‘고대형(型) 공산주의’를 방불케 하는 말씀을 중심으로 해석하는 쪽과, “종들이여, 주인들에게 복종하라”와 같은 부류의 말씀을 중심으로 해석하는 쪽은 분명히 다르다.

전자의 방식으로 해석한다면 레오나르도 보프나 구스타보 구티에레스의 ‘해방 신학’으로 귀결될 수 있겠고, 후자의 방식으로 해석한다면 부자를 ‘축복받은 이’로 보는 순복음 교회 식 ‘부와 성공의 신학’으로 귀결될 수 있겠다. 해방 신학도 순복음 교회의 기복적인 성공 주의도 기독교의 역사적 전통을 각자 나름대로 계승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결과는 상반된 것임이 틀림없다. 그만큼 종교를 이해하는 데 기본 경전 이상으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바로 ‘해석’이다.

이 책은 어떤 의미에서 초기 불교에 대한 ‘해방적’ 해석의 시도다. 우리 불교가 국가 내지는 지배계급과 유착한 역사가 이미 2,000년을 슬쩍 넘은 만큼 우리 의식 속에 남아 있는 불교는 현실을 따라가며 인정하는 식이거나 지극히 개인 중심적이고 보수적인 성격을 띤다. 개인의 문제들을 모조리 개인의 악업으로 설명하는 등 탈(脱)사회화, 개별화되었고, 그 문제의 해결책 역시 개인적 차원의 ‘업장(業障) 소멸’에 그친다. 이렇다 보니 불교 하면 절에 들어가 불공을 드리고 복을 비는 모습부터 떠올리게 된다. 이런 현실 순응적, 개인 중심의 불교에서는 작복(作福), 즉 선업 쌓기도 결국 개인적 수행이나 신앙 행위의 차원에서 이해된다.

또한 불교의 대(對)사회적 측면 역시 현실을 무조건 긍정하고 재확인하는 ‘국가 수호’, 즉 소위 ‘호국’에 국한되고 만다. 그들에게는 ‘대입 기도’로 고생하는 학부모들도, 서울 삼각산 도선사 명부전에서 걸려 있는 고 박정희 부부와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초상화도 별문제 될 것이 없다. 입시 경쟁도 개인의 신앙 행위(기도)를 통해서 해결될 문제고, 권력이나 재력을 장악한 사람도 “선업을 잘 쌓아 그렇게 되었”기 때문에 긍정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이나 파키스탄에서 미군의 폭격을 받아 처참하고 고통스럽게 죽어간 죄 없는 아이들을 생각해 보자. 그 아이들이 당한 고통을 두고 스스로 지은 ‘악업’의 결과일 뿐이라 말하며 은근히 워싱턴의 살인마들에게 면죄부를 건네주는 것이 옳은 일인가? 혹은 입시 경쟁이라는 지옥에서 고통받는 대한민국의 아들딸들을 두고 “악업을 지은 결과”라 정당화하면서, 고액 과외를 받은 강남 자녀의 ‘무사 통과’에는 “선업을 잘 쌓은 결과”라며 박수를 보내야 하는가?

그런 식으로 해석한다면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는 살인마들의 살육도, 소수 부유층 사이의 명문대 간판 대물림도 영구화되고 또 다른 이름 모를 무수한 타인에게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을 끊임없이 안겨줄 것이다. 불교의 목적은 일체중생의 이고득락(離苦得樂: 고통을 없애고 즐거움을 얻음)인데, 제국주의와 자본주의가 낳은 고통을 영구화한다는 것은 불교의 근원적 목표와 상반된다. 고통을 증가시키는 쪽으로 고통을 이해한다면 이는 ‘나’와 우리 모두의 해탈을 궁극적으로 방해할 뿐이다.

생로병사의 고통을 발생시키고 강화시키는 여러 요소 중의 하나는 바로 나에 대한 집착인 아집(我執), 즉 ‘나’와 나를 제외한 나머지 세계가 별개의 것이라는 뭇 중생의 착각이다. 이 착각만큼 반(反)불교적인 것도 없다. 나와 너, 세계가 따로 없으며 모든 것이 상즉상입(相即相入: 모든 현상은 상호 융합되어 있고 인과관계를 이룸)한다는 불교적 진리의 차원에서는 머나먼 아프가니스탄에서 죽어간 아이들도 바로 우리고, 그들이 겪는 고통도 바로 우리의 고통이다.

아이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은 개인의 악업으로 인한 결과라기보다 우리 모두가 만든 집단적 악업의 업보(業報)다. 인류가 아직도 제국주의라는 괴물을 청산하지 못하고 합리화하고 순응한 결과, 이 괴물은 지금 아프간이라는 머나먼 지구의 한구석에서 우리들의 분신(分身)을 잡아먹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입시 경쟁이라는 이름의 지옥도 경쟁의 당사자인 학생 개개인과 학부모들만의 문제는 결코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철저한 위계서열을 받아들이고 그 서열을 매기는 기준으로 학벌 자본(academic capital)을 받아들인 우리 모두가 함께 만든 결과다.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닌 자본주의의 멍에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 모두의 집단적 악업인 셈이다. 이 악업에 대해 책임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올바른 불교적 실천이다.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불교적 실천이란 결국 ‘국가 수호’의 정반대라고 할 우리의 아상․아집에 대한 부정 및 해체며, 거기서 시작되는 국가와 자본주의,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과 부정 및 해체의 작업이다. 이것이야말로 중생이 겪는 수많은 고통의 상당 부분을 덜어줄 수 있는 집단적 치유의 길이며 집단적 선업을 쌓아가는 길이라 할 수 있다. 개인의 해탈과 병행될 수 있는 ‘더불어 하는 수행’인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사는 지구와 사회의 세포 하나하나를 갉아먹는 암(癌)과 같은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폐해에 대항해 혁명적 투쟁을 벌이는 것도 집단 전체를 위한 해탈의 경험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장 혁명이 어려운 지금과 같은 시점에서는 우리의 해방을 준비하는 모든 행위가 집단적 치유를 위한 길이라 할 수 있다. 파업하는 노동자들을 위해 연대하고, 사회적 약자를 위한 집회에 참석한다거나,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구체화하여 발표하고 읽는 등의 지적 작업 역시 집단적 해탈을 향한 수행의 일종이라 하겠다.

어떤 보상도 주어지지 않는, 반대로 어쩌면 처벌을 받을 수도 있는 행동에 동참하며 우리는 욕심으로부터 멀어지는 법을 배우고, ‘남’을 나 자신보다 앞에 두며 나보다 타인을 더 생각하는 법을 배운다. 바로 여기서 자아와 타자의 경계선이 지워지고, 우리의 ‘자아’가 궁극적으로 망상일 뿐이라는 점을 이해하게 된다. 자아도 타자도 궁극에 가서는 없으며 나만의 행복도 나만의 해탈도 무의미하게 된다. 하화중생(下化衆生: 중생을 교화함)이 따르지 않으면 그 어떤 깨달음도 이기적인 정신의 유희에 불과할 뿐이다. 중생의 모든 고통이 나와 관련된 것이라는 사실을 망각하는 순간 불교의 영혼은 도망가고 없다.

‘해방 불교’에는 사찰도 불상도 기도도 필요 없거나 이차적이다. 해방 불교는 부처에게 비는 것이 아니라 붓다가 되는 것이다. 고통이 있는 곳이라면 그곳에 임하고, 고통의 원인을 파헤치며 모든 중생과 함께 고통을 치유한다. 고통의 원인을 식별하고 치유하는 방법은 우리가 현대를 사는 한 오늘날의 사회과학에 의존하지 않을 순 없다. 그러나 이 작업의 근저에 흐르는 정신은 지난 2,500년 동안 바뀐 게 없다. 자아의 경계선을 넘는 자비의 정신은 불교의 시작이자 끝이다. 

  

9장. 한국불교, 전통이 아니라 시대를 만나라

해방적 색깔에서 방편론으로

불교의 연기론(緣起論)으로 보면, 오늘날의 폭력적인 현실은 과거의 원인에 의해 발생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업설’이나 최악(最惡)을 점진적으로 제거하기 위해 방편적으로 ‘차악(次惡)’을 임시적으로 인정해 이용하는 지혜는 분명히 불교의 태생적인 장점일 수 있다. 그런데 단점은 바로 이런 장점의 연장에 있다.

인도의 종교문화 풍토에서 수행자는 보통 특권계급 출신이며, 전사회적으로 그 권위를 인정받는다. 아울러 국가·지배체제는 사회의 존경을 한몸에 받는 ‘정신적 지도자’를 필요로 한다. 이런 풍토에서 현실을 방편적으로 수용할 것을 전제로 한 종교운동은 국가·지배체제와 유착할 여지를 언제든지 갖고 있었다. 문제는 그 운동을 지휘하는 ‘스승’의 의지였다.

붓다 자신과 일부의 직계 제자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일부 수행자들은 불평등과 폭력이 없는 공동체 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다. 그들은 속인(俗人)들이 불평등과 폭력으로부터 벗어날 것을 염원했다. 초기 불교를 보면 그 시대로서는 보기 드문 ‘해방적 색깔’이 뚜렷하다. 바로 이 ‘해방적 색깔’은 불교가 민중들로부터 빠르게 인기를 얻는 기반이 됐다.

그러나 진정한 ‘해방에의 의지’를 갖고 있던 초기 지도자들이 사라진 뒤에는, 현실과의 타협을 정당화하는 ‘방편론’ 등이 불교가 발빠르게 ‘국가 종교화’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그리고 이후부턴 역사적인 상황에 따라 불교 교단의 현실에 대한 순응 형태가 바뀌었을 뿐, 그 이론적인 ‘뼈대’는 그대로 이어졌다. 법현 등 중국 구법승求法僧들이 목격한 소작인들을 부리는 부유한 인도 사찰의 권위주의적 승려들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또한 초호화 자가용을 타고 다니면서 사찰의 고용자들에겐 노조조차 허용하지 않는 오늘날의 한국 스님들도 외형적인 모습은 다를지언정 그 생활태도나 이론적인 토대는 같다.


 

불교의 원칙대로

국가의 뜻을 거스를까 염려해, 양심적 병역거부와 같은 진실한 불자다운 실천까지 불인(不認)하는 승단(僧團)의 태도를 고치려면 재가 신도로서 어떤 마음가짐과 이론적인 기반을 갖춰야 할까? 오늘날 서구에서 “교황보다 더 독실한 가톨릭(More Catholic than the Pope)”이란 말은 지나친 종교 열(熱)을 조소하는 속담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붓다 후대의 제자는 어떤 면에서 붓다 자신보다도 붓다가 제시한 근본 원칙에 충실해야 할 듯하다. 그렇다면 붓다가 제시한 가장 근본적인 원칙은 무엇일까?

불교의 ‘제법무상(諸法無常)’은 우주의 모든 구성 요소들이 쉴 새 없이 달라지고 바뀌고 탈바꿈하는 만큼, 불변하며 고정된 대상물이란 우리의 착각에 불과하다는 지적이다. 그리고 ‘무아(無我)’는 ‘나’라고 보이는 주체 역시 갖가지 요소와 인연이 일시적으로 합쳐져 만들어진 늘 고통받고 바뀌어가는 존재라는 뜻이다. 이 둘은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철학이자 원리다.

주체와 대상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인연’에 따라 늘 유동적으로 바뀌면서도 고통을 면하기 어려운 속세에서는 누구의 이름으로도 자신과 남에게 추가적인 고통을 안겨주어선 안 된다. 어떤 국가, 단체, 운동이 ‘폭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라면 결국 언젠가 그들의 이념이 허구였음이 밝혀질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이름으로 세상에 새로운 고통을 추가시킨 행위는 ‘나쁜 원인(惡因)’이 되어 폭력행위자를 비롯해 모두에게 ‘나쁜 결과(惡果)’를 가져다줄 것이다. 수탈기구로부터의 민중 방어라는, 특정 상황에서 진보운동가들이 피하기 어려운 ‘민중 방어적 폭력’이라 하더라도 불가피한 차악은 될 수 있을망정 선이 될 수는 없다. 따라서 ‘방어적 폭력’을 행사하는 상황이더라도 그 폭력의 나쁜 결과를 인식하고 이를 중지시켜 비폭력적으로 대체 할 수 있는 길을 열심히 찾아야 할 것이다.

‘민중 방어적 폭력’도 나쁜 원인을 피하기 위해 출구를 급히 구해야 하는 ‘길이 막힌 골목’이지만, 자본이 부추기는 경쟁이나 국가가 유지시키고 훈련시키는 군대와 같은 억압적인 상설 폭력기구들은 ‘나쁜 원인’ 이외에 아무것도 만들어낼 수 없다. 국가(특히 군대 당국)와 자본 등 사회적 고통을 제공하는 자들과의 유착에서 벗어날 수 없는 불교는 죽은 불교다. 그리고 “어머니가 외아들을 지키듯이, 모든 살아 있는 것에 대해서 한량없는 자비심을 발하라”는 붓다의 말씀을 실천할 하등의 능력도, 의지도 없는 불교 역시 죽은 불교다.

붓다가 기존 사회질서와 타협한 부분, 현실에 순응한 부분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그것은 붓다가 살았던 시대의 한계이자 귀족 출신 남성으로 태어난 붓다 자신의 한계다. 이 한계가 붓다의 기본 교리와 충돌할 경우 우리는 근본 교리의 정신을 선택해, ‘악의 씨’이며 제도화된 폭력으로 기능하는 국가나 소외된 노동을 잉태하는 자본에 대해 비타협적인 입장을 취해야 할 명분과 필요가 있다. 불교 교단이 붓다의 원리를 진실로 실천하려면, 양심적 병역거부, 붓다 자신도 평등한 분배의 전제 조건으로 주장한 부유세 도입, 고질적 불안감이라는 최악의 고통을 심어주는 고용의 비정규화에 대한 반대 투쟁과 대책을 적극 지지해야 할 것이다.

불교에서 아힘사(비폭력)는 자본주의적 국가 사회의 제도화된 폭력을 무저항적으로 수용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진정한 불교의 아힘사는 제도화된 폭력의 장벽을 무너뜨리기 위한 투쟁이다. 붓다와 그 후대의 제자들이 이와 같은 투쟁을 소홀히 하거나 아예 하지 못한 것은, 그들의 정신과 가르침을 배반하는 그들의 한계를 보여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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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인 박웅현은 전작 <인문학으로 광고하다>에서 "광고라는 미디어를 통해 사람들과 소통하는 방법을 찾는 일을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소통하는 방법을 찾을 때 창의력이 필요한 거고요."라고 자기를 소개했다. 이번 책 <책은 도끼다>는 그 창의력의 근간인 독서를 다룬다. 고은의 시부터 톨스토이의 고전까지, 다채로운 텍스트 읽기 속에서 '보는 눈'을 확장하는 그만의 방법을 살펴볼 수 있다. 그는 사고와 태도에 변화를 주지 못하는 독서는 책과 나를 동시에 죽이는 독서라 말한다. 이 책은 죽은 독서를 쳐내고 갇힌 생각을 열어주는 강력한 도끼질이라 하겠다. 

광고인은 자본주의 시대의 시인일 터, 이들이 세상을 분석하고 이해하는 방법은 어쩌면 우리가 사는 세상을 가장 처절하게 체득하는 게 아닐까 싶다. 그래서 슬프지만, 읽어보고 싶은 책이다.
 

 

저자의 말

울림의 공유

우리가 읽는 책이 우리 머리를 주먹으로 한 대 쳐서 우리를 잠에서 깨우지 않는다면, 도대체 왜 우리가 그 책을 읽는 거지? 책이란 무릇, 우리 안에 있는 꽁꽁 얼어버린 바다를 깨뜨려버리는 도끼가 아니면 안 되는 거야.
- 1904년 1월, 카프카, 「저자의 말」, 『변신』 중에서
 
내가 읽은 책들은 나의 도끼였다. 나의 얼어붙은 감성을 깨뜨리고 잠자던 세포를 깨우는 도끼. 도끼 자국들은 내 머릿속에 선명한 흔적을 남겼다. 어찌 잊겠는가? 한 줄 한 줄 읽을 때마다 쩌렁쩌렁 울리던, 그 얼음이 깨지는 소리를.
  시간이 흐르고 보니 얼음이 깨진 곳에 싹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고, 느껴지지 않던 것들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촉수가 예민해진 것이다.

“콩나물 줄기 속에 물기가 가득하구나!”
“단풍잎의 전성기는 연두색이구나!”
“그 사람의 그 표정이 그런 의미였구나!”

그 예민해진 촉수가 내 생업을 도왔다. 많은 경우, 광고 아이디어를 내야 하는 회의실에서 예민해진 촉수는 내가 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문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것은 나의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했다. 신록(新綠)에 몸을 떨었고, 빗방울의 연주에 흥이 났다. 남들의 행동에 좀더 관대해졌고, 늘어나는 주름살이 편안해졌다.
  머릿속 도끼질의 흔적을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었다. 경기창조학교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2011년 2월 12일부터 6월 25일까지 강독회를 진행하게 됐고, 학생들과 삼 주마다 한 번씩 토요일에 만났다. 냉정한 겨울에서 찬란한 봄을 거쳐 맹렬한 초여름까지, 나의 도끼였던 책들과 나의 독법(讀法)을 이야기하는 자리였다. 그러나 어차피 독법에 정답은 있을 수 없는 것. 그저 나의 독법일 뿐이었다.
  종이 낭비가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무릅쓰고 그 강독을 이렇게 책으로 묶어내는 이유는, 이 책이 다른 책으로 가는 다리가 될 수 있으리라는 작은 기대 때문이다. 말하자면 나의 도끼였던 책들을 독자 제현(諸賢)에게 팔아보고자 하는 의도. 결국, 나는 광고인이니까.
  인간에게는 공유의 본능이 있다. 울림을 공유하고 싶다.
 
 

본문 한 자락 

삶의 풍요를 위한 훈련

저는 지금 인문학과 관련된 강의를 하고 있지만, 그동안 사람들이 저를 통해 듣고 싶어했던 것은 '창의력'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창의력이 중요하다고 하는데 가르치는 학과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마침 창의력이 광고의 수단이 되니까 광고를 만드는 박웅현이 발상하는 과정을 보여줘봐라 해서 얘기를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전달해야 할까 고민이 많이 됐지요. 창의력이라는 게 가르치기 참 어려운 것이더군요. 그런데도 그동안 사람들은 이걸 기어이 가르치려고 했구나, 그래서 '좋은 카피를 쓰는 20가지 방법' 같은 것들이 나왔구나 싶었죠. 저도 사회 초년병 때 배웠던 것들입니다.

좋은 카피를 쓰는 20가지 방법.
1. 의문문으로 써본다.
2. 명령문으로 써본다.
3. '나'를 주어로 써본다.
4. '너'를 주어로 써본다.
……

 

이런 식으로 20가지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십사 년간 광고 현장에서 일하면서 단 한 번도 이번에는 카피를 의문문으로 써봐야지, 이번에는 '나'를 주어로 써볼래, 그렇게 마음 먹고 써본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카피란 그렇게 써지는 게 아니거든요. 창의성이라는 건 상품화하거나 규정화하기 어렵습니다. 아이디어는 총체적으로 나오지 도식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가르치는 것은 도식적이지 않으면 어려우니까 설명할 수 없는 것을 굳이 설명하려고 노력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처음엔 저도 그 도식적인 것을 바탕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생각 끝에 내가 만든 카피를 범주화해볼까도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안 되겠더군요. 그러니까 광고 일은 소림무술영화 같은 겁니다. 이론을 읽고 느낀 걸 잘 정리하면서 배우지만, 그것이 발상에 도움이 되지는 않습니다. 일목요연한 정리도 좋지만, 아이디어를 내는 건 현장입니다. 만약 이연걸이 소림사에서 무술을 배우고 내려와 싸움을 하게 된다면 싸울 때 배운 대로 될까요? 소림사가 등장하는 무술영화를 보면 소림사의 넓은 마당에서 상대와 마주보고 인사한 후 싸움을 시작합니다. 정해진 규칙이 있어요. 그러나 실제로 싸울 때는 그렇지가 않아요. 일도 마찬가지죠. 그런 규칙은 없습니다. 상황이 다 달라요. 저의 경우라면, 같은 광고주도 두 달 전과 지금이 달라요. 모든 게 유기적으로 움직이니까요. 소비자의 반응, 경쟁사의 반응에 따라 다 달라집니다. 적이 내가 밥 먹고 있다고 해서, “그럼 너 밥 다 먹고 싸우자, 조금 있다가 마당으로 나와”라고 하지 않습니다. 밥을 먹고 있는데 표창이 날아오고 만두를 먹고 있는데 갑자기 발이 날아와요. 그럼 그걸 쳐내야 하잖아요. 걸어가고 있는데 공격해올 수도 있고, 그러다 절벽에서 뛰어내릴 수도 있고 말이죠. 순발력입니다.
  우리가 배우는 이론 대부분은 소림사 마당입니다. 그 마당에서는 기본만 익히는 거예요. 생각의 기초체력만 기르는 겁니다. 수많은 경우의 수들을 이론으로 전부 다 정리해놓을 수는 없어요. 그 모든 것들을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다른 일들도 그렇겠지만, 광고는 특히 변수가 많은 일 중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요즘 강의할 때 광고에 필요한 발상을 배울 수 있는 유일한 교실은 책이나 수업이 아니라 회의실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결국 창의성과 아이디어의 바탕이 되는 것은 '일상'입니다. 일상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지고, 대처 능력이 커지는 것이죠.
  요즘 책을 읽으면서 참 많은 고수들이 일상의 중요성에 대해 깨달았구나 싶습니다. 박재삼이, 존 러스킨이, 헬렌 켈러가 같은 생각을 했어요. 사과가 떨어져 있는 걸 본 최초의 사람이 뉴턴이 아니잖아요. 사과는 늘 떨어져 있지만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은 겁니다. 상황에 대한 다른 시선, 절박함이 사과를 보고 이론을 정리하게 했죠. 답은 일상 속에 있습니다. 나한테 모든 것들이 말을 걸고 있어요. 하지만 대부분 들을 마음이 없죠. 그런데 들을 마음이 생겼다면, 그 사람은 창의적인 사람입니다. 두 시간 강의에서, 한 권의 책으로 제가 가르칠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단, 여러분 안에 씨앗이 들어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나한테 울림을 줬던 것들이 무엇인지 찾아봤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창의성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왜 모두 창의적이 되어야 하는 거죠? 저는 광고를 해야 하니까 창의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창의성과 관련 없지만 가치 있는 일도 꽤 많잖아요. 그런데 이게 왜 필요하느냐, 왜 다들 굳이 배워야 하느냐? '직업'의 범주를 벗어나 '삶'의 맥락에서 볼 때, 저의 대답은 창의적이 되면 삶이 풍요로워지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풍요’라는 이야기가 나왔으니 생각해볼까요? 풍요로운 삶이라 하면 대부분 성공한 삶을 떠올려요. 그럼 성공한 삶이 무엇이냐에 대한 개념 정리를 한번 해봅시다. 성공한 삶이라는 게 뭘까요? 일단 당장 성공한 삶이라면 외제차, 좋은 집, 돈이 떠오르겠죠.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세요. 돈만 많은 사람과 정서적으로 풍요로운 사람의 표정을 떠올려보세요. 진짜 어떤 것이 풍요입니까? 최고급 샴페인과 캐비어를 매일 먹을 수 있는 삶이 풍요로운 삶일까요? 그가 죽을 때 풍요로운 삶을 살았다고 만족할까요? 햇살과 나뭇잎의 아름다움 하나 보지 못해도 최고급 샴페인과 캐비어만 있으면 행복한 삶일까요? 행복은 순간에 있습니다. 중국의 옛 시 중에 이런 시가 있습니다.

하루 종일 봄을 찾아다녔으나 보지 못했네
짚신이 닳도록 먼 산 구름 덮인 곳까지 헤맸네
지쳐 돌아오니 창 앞 매화향기 미소가 가득
봄은 이미 그 가지에 매달려 있었네
― 작자 미상

봄을 찾아 짚신이 닳도록 돌아다녔는데 정작 봄이 집 매화나무 가지에 달려 있다는 얘기입니다. 자, '봄'을 '행복'으로 바꿔서 읽어보세요. 모두 멀리 보고 행복을 찾는데 행복은 지금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삶은 순간의 합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삶을 레이스로 생각합니다. 초등학교 때는 명문 중학교를 가야죠, 명문 중학교를 가면 행복해질 거야, 명문 중학교 갈 때까지만 희생하자. 명문 중학교 가면 외고에 가야 해요. 외고 갈 때까지만 희생하자. 그럼 행복해질 거야. 외고를 가면 서울대를 가야 하고, 서울대에 가면 대기업에 가야 하고 대기업에 들어가면 부장이 되어야 하고 그러다 보면 나이가 일흔이에요. 레이스가 된 삶은 피폐하기 이를 데 없죠. 왜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 그래서 저는 순간순간 행복을 찾아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행복은 삶을 풍요롭게 해줍니다. 그러나 풍요롭기 위해서는 훈련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같은 것을 보고 얼마큼 감상할 수 있느냐에 따라 풍요와 빈곤이 나뉩니다. 그러니까 삶의 풍요는 감상의 폭이지요.
  이철수의 한 문장을 읽고 나서는 열매를 그냥 못 지나칩니다. 삶에 변화가 생기는 겁니다. 옛날에는 1킬로미터를 걸어가면서 아무것도 안 보였는데, 지금은 베인 나뭇잎, 날아가는 새, 반짝이는 빗방울이 다 아름답습니다. 제가 죽을 때 떠오르는 장면은 프레젠테이션 석상에서 박수 받는 순간이 아닐 겁니다. 아마 어느 햇살이 떠오를 것 같습니다. 어느 나뭇잎이 떠오를 것 같고, 어느 달빛이 떠오를 것 같습니다. 혹은 어떤 대화, 표정, 그런 것들이 많이 축적되어 있으면 풍요롭게 살다 가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무시로 해외여행을 다닐 수 있고, 매일 로열 캐리비언 크루즈를 탈 수 있고, 루브르 박물관에 가면 “야 빨리 빨리 와, 찍어, 가자” 하는 사람. 그리고 십 년 동안 돈을 모아 간 5박6일간의 파리 여행에서 휘슬러의 <화가의 어머니>이라는 그림 앞에서 얼어붙어서 사십 분간 발을 떼지 못한 채 소름이 돋은 사람. 이 두 사람 중 누가 더 풍요롭게 생을 마감할까요?
  중요한 것은 휘슬러의 <화가의 어머니>를 보면서 소름이 돋으려면 훈련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저자 유홍준은 “문화미와 예술미는 훈련한 만큼 보인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저도 처음 피카소의 작품을 볼 때 왜 좋은지 몰랐습니다. 좋다니까 감동을 짜내며 좋은가보다 했죠. 그런데 지금은 좋은 걸 알겠습니다. 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 같은 책들을 읽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책들을 읽고 난 다음에 본 피카소의 그림은 정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아름다웠습니다. 이젠 앙리 루소의 어떤 그림을 보고 걸작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인생이 풍요로워지기 시작한 겁니다. 이철수가, 최인훈이, 유홍준이, 김훈이, 그 외의 많은 작가와 예술가들이 나를, 내 인생을 풍요롭게 해주었고, 해주고 있습니다.


‘시청’이냐 '견문'이냐

시이불견 청이불문(視而不見 聽而不聞). 제가 좋아하는 말입니다. 시청은 흘려 보고 듣는 것이고 견문은 깊이 보고 듣는 거죠. 비발디의 <사계>를 들으면서 그저 지겹다고 하는 것은 시청을 하는 것이고요, 사계의 한 대목에서 소름이 돋는 건 견문이 된 거죠. <모나리자> 앞에서 '얼른 사진 찍고 가자'는 시청이 된 거고요, 휘슬러 <화가의 어머니>에 얼어붙은 건 견문을 한 거죠. 어떻게 하면 흘려보지 않고 제대로 볼 수 있는가가 저에게는 풍요로운 삶이냐 아니냐를 나누는 겁니다. 존 러스킨은 “당신이 보고 난 것을 말로 다 표현해보라”라고 했습니다. 나뭇잎을 봤다면, 나뭇잎의 균형감각이 어떻게 되어 있고, 앞뒷면의 촉감이 어떻게 다르고, 끝부분은 어떤 모양이고, 햇살이 떨어진 각도에 따라 나뭇잎의 색깔이 어떻게 다른지 볼 줄 알면 창의적인 삶을 살 수 있다고 했습니다.
  헬렌 켈러는 또 이렇게 얘기했죠. “내가 대학교 총장이라면 '눈 사용 법(How to use your eyes)'이라는 필수과목을 만들겠다”라고요. 보지 못하는 자신보다 볼 수 있는 우리들이 더 못 본다는 것이죠. 전부 다 '시청'을 했을 뿐이라는 겁니다. 아름다운 영미 에세이 50선에 드는 헬렌 켈러의 에세이, 「삼 일만 볼 수 있다면」에 나오는 말입니다. 헬렌 켈러는 책 첫 부분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숲을 다녀온 사람에게 당신은 뭘 봤냐고 물었더니, 그가 답하길 '별것 없었어요Nothing special'라고 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겁니다. 자기가 숲에서 느낀 바람과, 나뭇잎과 자작나무와 떡갈나무 몸통을 만질 때의 전혀 다른 느낌과, 졸졸졸 지나가는 물소리를 왜 못 보고 못 들었냐는 거죠. 이렇게 인생이 특별할 게 없는 사람들은 생의 마지막에 떠오를 장면이 없을 겁니다. 그렇지만 거미줄에 달려 있는 물방울의 아름다움을 본 사람들은 죽을 때 떠오를 장면들이 풍성하겠죠.
  삶은 목걸이를 하나 만들어놓고 여기에 진주를 하나씩 꿰는 과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진주는 바로 그런 삶의 순간인 겁니다. 딸아이가 중학교 3학년 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삼 주 정도 해외여행을 가자고 했더니 난리가 난 겁니다. 삼 주면 수학 수업, 영어 수업을 몇 번이나 빠져야 하는지 아느냐는 거죠. 얘기 끝에 가족이 내린 결론은 이거였습니다. 아마도 수학을 놓치고 영어를 손해볼 거다, 하지만 평생 아이가 가져갈 수 있는 순간, 우리가 살면서 문득 떠올릴 수 있는 순간, 마지막에 당신은 뭐가 생각나느냐는 질문을 받고 떠올릴 순간, 이런 것들 하나가 생길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죠. 진주 한 알이 생길 수 있을 것이라는 얘기를 했어요. 그런데 그 진주들은 내가 눈이 있고, 훈련이 되어 있어야 생길 수 있는 것이거든요.
  그런 면에서 저는 행복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더, 그리고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한가로운 일요일 오전 11시에 고양이가 내 무릎에 앉아 잠자고 있고, 제이슨 므라즈의 음악이 들리고, 책 한 권 읽는, 그런 순간이 잊히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이런 순간이 몇 개가 각인되어 있느냐가 내 삶의 풍요라는 생각이 듭니다. 말씀드렸듯 그것들은 약간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다행히 기준을 잡아주는 훌륭한 사람들이 많고, 그 사람들 대부분이 책을 씁니다. 그래서 그 책들을 읽으면서 훈련을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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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과 극은 서로 통한다 했으니, 즐거움과 괴로움도 매한가지일 터. 남의 눈에 비친, 남의 옷을 걸친 가짜 즐거움을 떨치고 자기만의 옷을 찾는 괴로움을 거쳐야만 인문학적 즐거움에 이를 수 있으니, 어쩌면 이번 책 <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은 전작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의 프리퀼이라 할 만하다. 김수영, 김춘수, 황동규와 들뢰즈, 사르트르, 비트겐슈타인의 만남을 기획한 전작에 이어 이번에는 최승호와 게오르그 짐멜, 문정희와 이리가레이, 채호기와 맥루한의 만남을 마련했다. 매 꼭지가 하나의 책처럼 전혀 다른 감각을 일깨우는 탄탄한 구성에, 사랑, 돈, 여성, 타자 등 전통적인 철학의 주제부터 대중문화, 글쓰기, 감각, 관계 등 현실과의 접점까지 함께 다룬 폭넓은 시선이 '역시' 강신주답다.

 

 

들어가는 글 

당혹스런 일이었습니다. 아파트 10층 현관문 앞에 도착한 순간, 나는 절벽을 마주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 채로 산에 갔다 온 탓일까요. 현관문 앞에서 도무지 문을 열 수 있는 암호가 떠오르지 않는 겁니다. 휴대전화기를 찾았지만 주머니나 배낭 안에서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능선 산행을 할 거라 휴대전화기를 집에 두고 나왔다는 사실을 때늦게 기억하게 됐습니다. 암릉을 기어오를 때 여간 귀찮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당혹스러운 상황에 가족에게 전화도 할 수 없게 된 겁니다. 심지어 휴대전화기에 저장된 가족의 번호마저도 헛갈립니다. 매번 저장된 번호를 기계적으로 눌러왔기에 번호가 도통 떠오르지 않는 겁니다.
  진퇴양난이란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일 겁니다. 그렇지만 용기를 내서 주민등록번호, 생일 등등 내가 비밀번호로 쓰고 있는 모든 번호를 입력해봅니다. 그러나 잠금장치는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암호를 한두 번 잘못 입력하면, 몇 분간 입력도 되지 않는 첨단 도어록이라는 사실을 이때서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암호는 갈수록 오리무중에 빠지고, 당혹감은 나를 더 옥죄기 시작했습니다. 내 집 인데 들어갈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아무데도 연락을 할 수 없다는 것.
  불현듯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의 소설,《성(Das Schloss)》이 떠올랐습니다. 주인공은 당혹스런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성에 들어가려고 하면 성에서 자꾸만 멀어지고, 성을 벗어나려고 하면 어느 사이엔가 성이 눈앞의 뿌연 안개 속에서 등장하기 때문이지요.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을 벗어나 인근 편의점을 찾았습니다. 다행히 호주머니에 잔돈이 조금 있었습니다. 커피를 마시면서 애써 집과 현관문의 암호를 잊으려고 애썼습니다. 늪에 빠진 현관문 암호가 저절로 떠오르기를 기다리면서 말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진짜 집과 암호에 대한 생각을 잊게 되었습니다. 철학자 아도르노(Theodor Adorno, 1903~1969)의 이야기를 음미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주저《부정변증법(Negative Dialektik)》에 등장하는 구절이었을 겁니다. “대상을 인식한다는 것은 자물쇠들을 여는 것과 같고, 그 열림은 하나의 개별적인 열쇠나 번호가 아니라 어떤 번호들의 배열에 의해 이루어진다”라는 취지의 생각이었지요. 그렇습니다. 모든 것은 특정한 암호로 열리는 자기만의 고유한 문을 가졌는지도 모릅니다.
  편의점에서 커피를 마시며 이런저런 상념에 젖어들었습니다. 시인과 철학자를 포함한 모든 진지한 인문 저자들은 저마다 고유한 문의 암호를 잃어버린 사람들 아닐까요? 그러니 암호를 찾아내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이제 느낌이 오시나요? 시집과 철학책들은 모두 특정한 문을 열 수 있는 암호와 같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시인과 철학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알려주는 암호를 아무리 입력해도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당혹스런 경험을 했던 겁니다.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의 책《젊은 베르테르의 슬픔(Die Leiden des jungen Werthers)》을 읽고 그들은 사랑에 대해 잘 알게 되었다고 자신했습니다. 그렇지만 막상 실제로 사랑에 빠졌을 때, 그들은 알게 된 겁니다. 베르테르의 사랑으로는 결코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열 수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탄식하며 절규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도대체 사랑이 뭐지? 어떻게 해야 그녀의 마음을 열 수 있지?” 그들은 사랑이란 문을 열 수 있는 암호를 잃어버린 겁니다. 그렇다고 절망만 하고 있을 수도 없습니다. 바로 그 순간, 사랑의 암호는 그들에게 사활을 건 문제이기 때문이지요.
  삶에서 만나는 다양한 사물과 사건들, 그리고 소중한 모든 가치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바뀌기 이전에 통용되던 암호를 떠올리며 항상 문을 열 수 있다고 자신하는 것은 아닐까요? 막상 살아가다 보면 어떤 문도 열지 못하는 나약한 상태라는 것을 종종 깨닫게 됩니다.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려면 암호를 스스로 만들어내야만 합니다. 다른 사람이 알려주는 암호로는 우리가 들어가고 싶은 문을 통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보다 먼저 암호를 다양하게 배열해서 문을 열려고 했던 작가들의 분투는 매우 중요한 가치를 갖습니다. 우리와 유사한 삶의 조건을 공유하는 시인과 철학자들은 더욱 그렇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는지, 그리고 그 골목 을 어떤 식으로 벗어나려고 했는지를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교훈은 그들처럼 우 리도 사물이나 사건, 혹은 가치에 들어갈 수 있는 문의 암호를 잃어버렸다는 자각 아닐까요? 그것을 자각할 때 비로소 잠금장치의 숫자를 다시 신중하게 배열하려는 의지와 용기가 나올 수 있을 테니까요. 삶은 남의 제스처로는 살아낼 수 없다는 것. 오늘 바로 이 순간 우리가 깊이 되새겨야 할 가르침은 바로 이겁니다. 

 

프롤로그

1.
라흐마니노프(Sergei Rachmaninoff, 1873~1943)를 아시나요? 그렇다면 그의 《피아노 협주곡(Piano Concerto)》제2번과 제3번을 기억하실 겁니다. 러시아의 작곡자이자 뛰어난 피아니스트이기도 한 그의 연주는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듭니다. 바닥없이 추락하는 절망에서 희망으로 비상하는 감동을 주니까 말입니다. 라흐마니노프를 몰랐던 시절, 내게 그의《피아노 협주곡》제2번과 제3번을 들어보라고 권했던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습니다. 라흐마니노프를 굉장히 좋아해서 그런지, 혹은 내가 라흐마니노프 음악도 들어보지 않았다는 사실이 안타까워서인지, 그녀는 시간을 내 직접 라흐마니노프 음악 연주회에 나를 데리고 갔습니다. 연주회가 시작되기 전 좌석에 나란히 앉았을 때, 그녀는 내게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에서 자신이 느꼈던 감동을 전하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습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자신의 애인을 소개시켜주는 처녀처럼, 그녀는 달뜬 표정으로 이야기를 이어갔습니다.
  마침내 연주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녀는 라흐마니노프 음악의 비장한 선율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나랑 같이 연주회에 있다는 사실마저 잊은 것처럼 말이지요. 음악에 ‘집중’하는 그녀의 모습은 무척 매력적이었습니다. 화려하기도 하고 때로는 비장하기도 한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이 연주회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음악을 들으면서 눈을 감았다 뜨기를 반복했습니다. 눈을 감고 듣다가 어떤 선율에서는 양미간을 찡그리곤 했습니다. 같이 듣고 있었지만 나는 그녀가 왜 그런 감정적 반응을 보이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당시 내가 라흐마니노프 음악으로부터 전혀 감동을 받을 수 없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단지 그녀처럼 라흐마니노프를 ‘깊이’ 느낄 수 없었을 뿐입니다. 연주가 끝난 뒤 나는 어느 부분이 좋았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녀는 전체적으로 좋았다고만 이야기할 뿐, 자신이 어느 부분에서 더 감동을 받았는지 말하지는 못했습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집중은 자신을 떠나서 관심을 가진 무엇인가로 건너가는 상태니까 말입니다. 영어로 관심이나 흥미를 뜻하는 ‘interest’ 라는 단어를 아시나요? 사실 이 단어는 ‘사이’를 뜻하는 라틴어 ‘인테르(inter)’와 ‘존재함’을 뜻하는 ‘에쎄(esse)’로 이루어진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이에 존재함’으로써 ‘interest’는 나와 타자 사이에 존재하게 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집중은 바로 내가 나와 어떤 타자 사이에 머물러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집중의 상태는 완전히 나로 머물러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타자로 건너가서도 안 됩니다. 전자의 경우라면 집중은 불가능할 수밖에 없습니다. 상념에만 매몰되어 있다면, 우리는 음악은커녕 상대방의 이야기조차 들을 수 없기 때 문이지요. 후자의 경우라면 집중은 일종의 최면이나 환각 상태로 변질됩니다. 집중해야 하는 주체, 즉 ‘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녀는 라흐마니노프 음악에 집중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순간 그녀는 결코 자신이 라흐마니노프의《피아노 협주곡》에 ‘깊이’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겁니다. 사실 라흐마니노프 음악에 깊이가 있다고 느낀 것은 그녀가 아니라 나입니다. 단지 그녀는 집중하고 몰입하고 있었을 뿐이지요. 그녀뿐만 아니라 무엇인가에 집중하는 사람들에게서 우리는 헤아릴 수 없는 깊이를 느끼게 마련입니다. 이제 역으로 말해도 좋을 것 같네요. 여러분이 깊이가 있다고 느끼는 모든 사람들은 무엇인가에 집중하는 사람들이라고 말이지요. 그래서 ‘집중’과 ‘깊이’, 이 두 상태는 동전의 양면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제 우리는 알게 되었습니다. 집중하는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깊이의 비밀을 말입니다. 그는 자신의 내면을 깊게 파고드는 사람이 아니라, 반대로 세계의 무엇인가로 열려 있는 감수성을 가진 사람이었던 겁니다.


2.
이름 모를 꽃이 가득 피어 있는 길을 걸어본 적이 있나요? 상념에 빠져 그냥 지나쳤다면 꽃들과 길에 대해 어떤 감흥도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만일 그렇지 않고 잠시 걸음을 멈춰 한 송이 꽃에 집중할 수 있었다면, 여러분은 그 꽃을 상세하게 묘사할 수 있습니다. 오직 응시와 집중만이 사물에 대한 섬세한 묘사를 가능하게 만드는 법이니까요. 나아가 사물을 통해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에 이르는 시적 감수성도 기적처럼 솟구쳐 오르게 될 겁니다. 언젠가 질 것이기에 더욱 찬란하기만 한 꽃을 노래할 수도 있고, 아니면 꽃을 통해 자신과 이웃의 삶을 예견할 수도 있습니다. 지하보도를 그냥 지나치지 마세요. 버려진 종이상자로 작은 집을 만들어 그 속에 누에고치처럼 들어가 잠을 청하고 있는 노숙자의 삶을 응시해보세요. 당신도 겪어내고 있는 자본주의적 삶을 묘사할 수 있는 기회가 될 테니까 말입니다. 꽃을 묘사하면서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처럼, 노숙자를 응시하고 묘사하다 보면 자본주의로부터 상처받고 있는 자신의 삶도 명료하게 들어올 겁니다.
  자신이 직면하게 된 사람이나 사물 혹은 사건에 고강도로 집중할 때, 우리는 그로부터 발생하는 내적인 동요를 묘사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춘 셈입니다. 그래서 집중은 자기만의 표현과 묘사, 즉 고유한 스타일을 낳는 동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위대한 시인이나 철학자들의 글은 읽기가 힘든 겁니다. 너무나 난해하고 추상적인 이야기를 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이 집중하고 있는 것을 자기만의 생각과 감정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너무나 구체적이고 개성적이기 때문에, 바꾸어 말한다면 내가 그 작가가 아니기 때문에, 그들의 글을 이해하기 힘든 겁니다. 위대한 시 나 철학의 비밀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표면적으로 그들은 아주 높은 곳으로 비상해서 모든 것을 관조할 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불가피한 착시효과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바로 자기 자신의 삶으로 하강해서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데 성공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시인이나 철학자들은 모든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것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자기만이 느끼고 생각한 것을 이야기한 겁니다. 이제 느낌이 오시나요? 삶이 묻어나는 가장 구체적이고 생생한 표현이 가장 어렵다는 사실, 그리고 자기만의 생각을 이야기한 것들이 가장 어렵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A la recherche du temps perdu)》에서 프루스트(Marcel Proust, 1871~1922)도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단 하나의 세계가 아니라 몇 백만의 세계, 인간의 눈동자와 지성과 거 의 동수인 세계가 있고, 그것이 아침마다  깨어난다”고 말입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만의 세계를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권력이나 자본 혹은 관습이 강요하는 공통된 색안경을 끼고 자기의 세계를 살아갑니다. 한마디로 말해 자기만의 제스처가 아니라 남의 제스처로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항상 삶이 우울하고 무거울 수밖에 없지요. 자기 옷이 아닌 남의 옷을 입고 사니까 말입니다.
  시인이나 철학자들은 자기 몸에 맞는 자기만의 옷을 만들어 입는 데 성공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한 사람이 태어나는 순간 하나의 세계가 탄생한다는 사실을 알았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들의 시와 철학을 읽는 이유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자신의 삶을 정직하게 응시하는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로부터 제스처를 배워서 그것을 흉내 내서는 안 됩니다. 그들과 헤어진 뒤, 우리는 다음과 같이 각오를 다져야만 합니다. “아! 저 친구는 저렇게 자신의 삶과 그로부터 발생하는 감정과 생각에 집중하는구나. 나도 그래야지. 이제 더 많이 내 감정과 생각을 돌아봐야겠다.”이제 시인이나 철학자들을 선생님이나 정신적 멘토로 숭배하지 마세요. 그들이 남긴 시나 철학을 만고불변의 진리로 여겨 외우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의 삶이니까 말입니다. 여러분이 느끼고 고민했던 것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도록 노력하세요. 언젠가 여러분도 자기만의 삶을 긍정하고 그것을 표현 할 수 있는 시인이나 철학자가 되어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3.
인문학은 다른 학문과는 달리 ‘고유명사’의 학문입니다. 수많은 시인과 철학자들은 자기만의 목소리로 무엇인가를 노래하거나 논증합니다. 그들의 시와 철학에는 유사성은 있지만 공통점이라고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김수영의 시와 신동엽의 시, 그리고 바흐친의 철학과 바르트의 철학이 유사하지만 미묘하게 차이가 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모든 시인과 철학자는 자기만의 목소리를 내는 데 성공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수많은 시인과 철학자들의 궁극적 유사성은 바로 그들이 자기만의 제스처와 스타일을 완성했다는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시와 철학을 읽는다는 것은 우리도 그들처럼 자기만의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인문정신의 소망입니다. “다른 누구도 흉내 내지 말고 자신의 삶을 자 신의 힘으로 영위하고 그것을 표현하라!”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이 각 자의 삶에서 자유와 기쁨을 얻도록 도울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우리에 게 인문학이 필요한 유일한 이유일 겁니다.
  우리에게 김수영이라는 시인이 있었다는 사실은 기적에 가까운 행운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는 단순히 시인이기보다 인문정신이 무엇인지를 온몸으로 보여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1964년에 집필한 <요동하는 포즈들>이란 시평에서 김수영은 이렇게 강조했습니다. “거짓말이 없다는 것은 현대성보다도 사상보다도 백배나 더 중요한 일” 이라고 말이지요. 거짓말이 없다는 것은 물론 자신의 삶과 감정, 그리 고 생각에 진실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마디로 남의 제스처를 흉내 내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이런 정신은 1953년에 쓴, 비교적 초기 작품에 속하는 <달나라의 장난>에서도 분명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팽이가 돈다
어린아이고 어른이고 살아가는 것이 신기로워
물끄러미 보고 있기를 좋아하는 나의 너무 큰 눈앞에서
아이가 팽이를 돌린다
살림을 사는 아이들도 아름다웁 듯이
노는 아이도 아름다워 보인다고 생각하면서
손님으로 온 나는 이 집 주인과의 이야기도 잊어버리고
또 한번 팽이를 돌려주었으면 하고 원하는 것이다
도회 안에서 쫓겨 다니는 듯이 사는
나의 일이며
어느 소설보다도 신기로운 나의 생활이며
모두 다 내던지고
점잖이 앉은 나의 나이와 나이가 준 나의 무게를 생각하면서
정말 속임 없는 눈으로
지금 팽이가 도는 것을 본다
그러면 팽이가 까맣게 변하여 서서 있는 것이다
누구 집을 가보아도 나 사는 곳보다는 여유가 있고
바쁘지도 않으니
마치 별세계같이 보인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팽이 밑바닥에 끈을 돌려 매이니 이상하고
손가락 사이에 끈을 한끝 잡고 방바닥에 내어던지니
소리 없이 회색빛으로 도는 것이
오래 보지 못한 달나라의 장난 같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돌면서 나를 울린다
제트기 벽화 밑의 나보다 더 뚱뚱한 주인 앞에서
나는 결코 울어야 할 사람은 아니며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과 사명에 놓여 있는 이 밤에
나는 한사코 방심조차 하여서는 아니 될 터인데
팽이는 나를 비웃는 듯이 돌고 있다
비행기 프로펠러보다는 팽이가 기억이 멀고
강한 것보다 약한 것이 더 많은 나의 착한 마음이기에
팽이는 지금 수천 년 전의 성인(聖人)과 같이
내 앞에서 돈다
생각하면 서러운 것인데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듯이
서서 돌고 있는 것인가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 김수영, <달나라의 장난>

1953년 어느 날, 김수영 시인은 돌아가는 팽이를 봅니다. 그리고 팽 이에게서 자신의 삶, 혹은 우리 인간의 삶을 직감합니다. 아무리 기세등등하게 돌고 있어도 팽이는 언젠가는 멈추게 마련입니다. 어차피 멈출 것을 왜 돌고 있는지 의아스럽기만 합니다. 그래서 시인은 슬픕니다. “팽이가 돈다/팽이가 돌면서 나를 울린다.” 그렇지만 시인은 압니다. 팽이는 오직 돌 때에만 팽이일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팽이의 목적은 돌기를 멈추고 바닥에 누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팽이는 돌기 위하여 존재하는 겁니다. 그래서 시인은 스스로 채찍질해야만 한다고 각오를 다집니다.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과 사명”을 의식하고 있었으니까 말입니다. 그렇지만 팽이는 다른 팽이가 돌도록 도움을 줄 수 없습니다. 팽이놀이를 해본 분은 알겠지만, 돌고 있는 팽이 가 다른 팽이와 부딪치면 둘 중 하나는 바닥에 내동댕이쳐져 멈추게 됩니다. 다른 팽이의 운동을 따라 하다가 스스로 멈추는 팽이처럼 우 리도 스스로 돌면서 아름다운 궤적을 만들어가야만 합니다.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시인의 말처럼 “생각하면 서러운”일이지만, 어쩌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자유로운 인간의 숙명인 것을 말입니다.


4.
2010년에 출간한《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많은 분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한 독자가 내 책에서 받은 인상을 토로했던 대목입니다. “시인은 그것이 무슨 씨인지도 모른 채 씨를 뿌리고 지나갑니다. 시간이 흘러 그 씨앗들이 다양한 꽃을 피우겠지요. 그러면 철학자가 뒤따라가면서 시인이 뿌린 씨가 어떤 꽃의 씨인지를 하나하나 알려줍니다.”이처럼 위로가 되는 평가가 또 있을까요? 고맙습니다. 나를 더 기쁘게 했던 것은 내가 다루었던 시인의 시집들이 과거보다 조금이나마 독자들의 관심을 받았다는 점입니다.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고, 스스로 뿌듯하게 여기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 와중에 나는 예기치 않은 투정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좋아하는 시인을 다뤄줄 수 없느냐는 독자들의 바람이었습니다. 여기에 편승해서 기다렸다는 듯이 출판사 편집자들도 내게 압력을 넣습니다. 마침내 나는 홍대 근처 상상마당에서 철학과 놀기 13기 강좌를 시작했습니다. “철학과 시가 부르는 사유의 노래”라는 제목으로 말입니다. 상상마당 아카데미의 꽃, 아름다운 매니저 한나 씨가 붙여준 매력적인 제목이지요.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을 본 독자들이 수강을 신청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그 책의 부록처럼 강의를 하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었습니다. 비록 강의가《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의 속편일지라도, 그 자체로 완결된 하나의 세계이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사랑’, ‘돈’, ‘여성’, ‘그리스도’, ‘타자’, ‘미디어’, ‘자유’, ‘역사’, ‘대중문화’, ‘글쓰기’, ‘감각’, ‘관계’ 등등을 주제로 생각해보았습니다. 이를 토대로 반드시 읽어보아야만 할 우리 시인들과 그들의 정직한 속앓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현대 철학자들을 선정했습니다. 시인을 선정하면서 특히 염두에 두었던 것은 전편에서 많이 다루지 못했던 여성 시인들이었습니다. 문정희, 고정희, 그리고 김행숙 시인을 다루면서 나는 여성 시인들에게 진 빚을 조금이나마 갚으려고 했습니다. 또 개인적으로《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에서 다루지 못한 것이 못내 아 쉬웠던 시인들을 다루게 되어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백석, 신동엽, 이성복, 김정환, 그리고 허연 시인이 바로 그들입니다. 특히 신동엽 시인과 이성복 시인을 다룰 수 있어서 더 행복했습니다.
  강의는 매주 강의안을 책 원고라는 완성된 형식으로 집필하여 읽었던 나만의 방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강의를 하면서 나는 김수영 시인을 울렸던 하나의 팽이와 같은 역할을 하고 싶었습니다. “아! 선생님은 자신의 삶을 응시하고, 그것을 솔직하게 표현하려고 애쓰는구나.” 뭐, 이런 느낌을 주려고 애를 썼습니다. 팽이가 돌면서 김수영 시인을 울렸던 것처럼 나도 돌면서 수강한 분들을 울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김수영의 시 <폭포>를 기억하는 분이라면 “폭포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곧은 소리는 소리이다/곧은 소리는 곧은/소리를 부른다”는 구절을 떠올릴지도 모를 일입니다. 수강하는 분들이 자기 삶을 채찍질 하며 스스로 서기 위해 노력한다면, 내 강의는 그 목적을 완수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강의는 내 의도대로 진행된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수강생들이 자신의 속내를 정직하게 토로하기 시작했으니까 말입니다. 결국 강의실 안은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지 않는, 스스로 도는 힘으로 도는” 팽이들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나로서는 이런 고마운 선물이 다시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공통된 제스처가 아니라 자기만의 제스처로 돈다는 것은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의 제목에 ‘괴로움’이 란 말을 넣었습니다. 이런 괴로움을 잘 이겨내면, 우리는 자신만의 즐거움을 얻게 될 겁니다. 어쩌면 인간에게 즐거움은 항상 괴로움이란 어둡고 긴 터널을 통과할 때에만 찾아오는 것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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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11-09-23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즐거움을 가지고 있으니 괴로움도 가지고 있어야겠군요.

인문MD 바갈라딘 2011-09-27 05:39   좋아요 0 | URL
이미 갖고 계신 거 아니었나요?? ^^ 아니라면 이번 책으로 만나보심이... 고맙습니다.

상상마당아카데미 2011-10-15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상상마당아카데미입니다. 이번에 강신주 박사님의 <철학적 시읽기의 괴로움>을 주제로, 독자들과 만나는 [어쿠스틱인문학]프로그램이 10/25(화)예정 중에 있습니다. 도서평론가 이권우 선생님 사회로 진행되는 풍성한 대화의 시간에 많은 분들이 함께 모여 좋은 시간으로 만들어갔으면 좋겠습니다.(많은 분들이 좋은 책도 읽고 저자와의 농도진한 만나는 시간도 가져보셨으면 하는 바람에서,,무례할 수도 있지만, 요렇게 홍보글을 댓글로 달아봅니다.^^;;)
 

  

나꼼수로 몽매한 시민의 눈과 귀를 뚫으사
이땅의 메마른 정치에 생명수를 부어주신 그분의 복음. 

겉과 속에 한 치의 다름도 없는 무학의 통찰에 이르신 
한국 정치의 선지자께서는 2012년 대선을 앞두고
과연 어떤 말씀으로 세상을 깨우치실 계획이실까.

이제 열흘 후면 한 권의 책으로 계시를 내려주실 터,
무릇 읽고 따르는 자에게는 축복이,
읽고도 믿지 못하는 자에게는 어둠만이 영원하리라.

 

졸라 짧은 서문

이게 다 조국 덕이다. 서울대 법대 교수 조국 말이다..
그의 등장과 부상에 열렬 환호했다.
오! 스펙, 얼굴, 기장, 음색, 사상. 이건 뭐, 토털 패키지. 이만하면 역대 최고 선수. 신난다.
달뜬 채 《진보집권플랜》 집어 들었다. 서문 읽다……덮었다.
재수, 없을 수 있겠다…… 재수 없다가 아니라.
그리고 재미, 없다…… 재미없을 수, 있겠다가 아니라.
전자는 위험하고 후자는 안타깝다.
이렇게나 훌륭한 선수가. 에이, 씨바.
안 되겠다. 돕자.
아무도 안 시켰는데, 괜히 나 혼자 불끈.
'진보집권플랜 B-'가 필요하다.
어디까지나 조국을 위한, 무허가 해제, 야매 보론, 측면 지원, 셀프 차출.
그렇다. 그렇게 시작됐다, 이 짓.
근데, 잦아들었다. 조국 바람이.
너무 빨리. 우씨. 어떡해, 이거. 난 이미 출발했는데.
에라이. 기왕 나선 거, 내처 달리자. 일이 그리 된 게다.
그러니 사전 경고한다.
다음 페이지부터 펼쳐질 내용, 어수선하다.
근본도 없다. 막 간다.
근본 있는 자들은 괜히 읽고 승질내지 말고 여기서 덮으시라.
다만 한 가지는 약속한다.
어떤 이론서에도 없는,
무학의 통찰은 있다.
물론, 내 생각이다.
반론은 받지 않는다.
열 받으면 니들도
이런 거 하나 쓰든가.
서문 긴 건,
딱 질색이니
여기까지.
졸라. 
 

졸라 재미난 본문 

좌, 우. 사바나로 돌아가자

지 _ 왜 진보가 집권해야 하는지 말하기 전에 진보, 보수를 먼저 규정해야 하는 거 아냐?
김 _ 좋아. 좌, 우가 뭔지부터 얘기를 하자고. 굉장히 흔하게 쓰이지만, 사회과학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면 어려워하는 개념이니까. 그나마 전 국민이 공통으로 가진 좌, 우에 관한 기준이 북한을 바라보는 태도 정도인데, 북한에 대한 태도를 가지고 좌우나 진보, 보수를 나누는 건 사실 굉장히 한국적이고 예외적이며, 애초 유럽에서 기획된 좌, 우의 개념에도 들어맞지 않거든. 그러니까 더욱 헛갈리지.
  나도 80년대에 20대가 걸쳐 있었기 때문에 그 시절의 평균적인 학습 세례를, 그 시절 유행했던 《전환시대의 논리》같은 책을 통해 받았지만 나이가 들수록 그런 이론이 내겐 관념적이고 작위적으로 느껴졌어.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그런 정교한 이론을 기반으로 얼마든지 반박할 수 있어. 나도 그런 이론들 대부분은 알아. 하지만 그런 건 제쳐두자고. 중요한 건 그런 정교한 이론이 아니니까. 큰 덩어리의 본질을 이해하는 게 중요한 거니까. 자, 그럼 내 방식대로 좌와 우를 설명해볼게. 무학의 통찰로.(웃음)

지 _ 진보, 보수를 나누고, 세계를 이해하는 것, 내 스탠스를 찾는 것이 학습의 결과가 아니란 말이지?
김 _ 내가 살아가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부대끼면서 순간순간 경험으로 터득한 건데, 그러니까 근본은 없어.(웃음) 어쨌든 그런 순간들을 경험하면서 나름대로 내재적 속성을 직관과 통찰로 발견한 거라고 난 주장하는 거지, 일방적으로.(웃음) 자, 이제 사바나로 돌아가보자, 사바나 시절로. 현재의 우리 사고 회로가 설계된 건 바로 그 시절이거든. 그 시절, 사회적 규범도 대단히 미약하고, 학습의 기회나 장도 달리 없고, 대단히 동물적인 자연인 상태였던 그때는 과연 좌, 우가 없었는가? 좌, 우의 원형질에 해당하는 사고방식은 과연 없었는가? 좌, 우의 어떤 기원에 해당하는 인식 체계, 세계관이 그때는 존재하지 않았는가? 난 당연히 있었다고 생각해.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사고의 회로를 어느 날 갑자기 인간들이 발명해냈을 리 없거든. 그런 사고의 경향성이 없었던 게 아니라 그런 생각을 설명할 정교한 언어를 갖지 못했을 뿐이지.
  그렇다면 그 시절의 좌, 우는 어떤 것이었을까? 어느 날 문득, 그 원형질에 해당하는 감정이나 태도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보게 된 거지. 어떤 동물이건, 물론 사람도 포함해서, 그 태도를 결정하게 만드는 건 결국 크게 두 가지라고 생각해. 하나는 욕망이고, 나머지 하나는 공포야. 그게 모든 동물의 생존 방식을 결정하는 두 축이라고 봐. 간단히 말해, 살고 싶은 건 욕망이고, 자기 존재를 위협하는 건 공포지. 그 시절의 기본적인 욕망을 유추해보는 건 어렵지 않아. 먹고 자고 섹스하고. 모든 동물이 가진 본능적 욕구를 안정적으로 해결하기에도 만만치 않은 시절이었을 테니까. 그걸 해결하기에도 바빴겠지.

그럼 공포는 어떤 모양이었을까? 사자일까? 천둥과 벼락을 내리치는 하늘? 가장 큰 공포는 불확실성이었다고 생각해, 불확실성. 물론 사자도 두려워. 그렇지만 사자보다 더 두려운 것은 저 풀숲에서 튀어나올 게 뭔지 아예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저 밀림 속에 오로지 사자밖에 살지 않는다면, 그럼 사자의 습성을 알고 조심하는 걸로 대처하면 되거든. 그런다고 공포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예측하고 준비할 근거는 있는 거니까.
  그런데 거기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른다고 생각해봐. 미지의 포식자와 자연재해를 예상할 수 있나. 없다고. 언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른다는 것, 그런 불확실성, 나는 이게 바로 공포의 원형질에 해당한다고 봐. 인간의 현대적 욕망을 가장 충실히 반영하는 자본 게임인 주식시장을 봐. 주식시장이 가장 싫어하는 건 불확실성이야. 불확실성에는 논리적으로 대처하는 방법이 따로 없으니까. 인간이 그런 불확실성이라는 공포에 따로 대처할 방도를 찾지 못하니까 굿도 하고, 별자리도 보고 그러는 거지. 토템이 어느 지역에나 있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일 테고. 그러다 그게 세련되어지면 종교가 되는 거고.
  이 모든 노력은 결국 인간의 논리로는 도저히 대처할 수도 없고 해결할 수도 없는 불확실성을 어떻게든 축소하고 제거하기 위한 거지. 초월적 존재에 의탁해서. 악어가 인간을 잡아먹는 동네에서는 그 대상이 악어가 되기도 하는 거고. 염주 차고, 십자가 걸고 기도하는 거나, 동물 뼈 목에 걸고 굿하는 거나, 본질적인 동력은 같은 거라고. 우리는 신이 아니기 때문에 저 앞의 밀림에서, 자신 앞의 삶에서, 뭐가 튀어나와 날 해칠지도 모른다는 공포, 불확실한 삶의 조건 속에서 견뎌내야 했던 거
지. 



우, 겁먹은 동물

지 _ 그 공포의 핵심이 바로 불확실성이라는 것이 되겠네?
김 _ 그렇지, 그런데 이 불확실성에 대처하는 방식이 크게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 사람에 따라서. 생각해보면 그 시절엔 내가 오늘 먹을 것이 있다고 해서 내일 먹을 것이 보장되는 게 아니었잖아. 요즘 우리는 내일 먹을 것에 대한 불안을 돈으로 환치시켜 생각하는데, 돈만 있으면 다 해결되니까, 그 시절은 그게 아니었잖아. 내가 오늘 사슴을 잡았다고 해서 내일도 그 자리에 다시 사슴을 잡을 수 있으리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고. 자신의 생존이 그러한 불확실성에 좌우되는 상황이지.
그 공포에 대처하는 두 가지 서로 다른 방식이 바로 좌, 우다, 난 그렇게 생각해. 우는 기본적으로 세계를 약육강식의 전쟁터로 이해한다고. 그렇게 생존이 상시로 위협받는 약육강식의 환경에선 내가 더 강한 포식자가 되어, 더 많은 자원을 확보하고, 더 악착같이 그걸 독점해, 우선 내가 살아남아야겠다. 그게 난 굉장히 동물적이고, 본능적인 반응이라고 생각해. 당연히 일단 내가 살아남아야지. 나는 죽고, 옆 사람이 살면 뭐 해.
  그래서 그들이 인지하는 세계에선 자신이 더 많은 것을 가지려고 하는 게 도저히 죄가 될 수 없는 거야. 당연한 생존의 권리지. 그래서 더 강한 자가 더 약한 자를 지배하는 것도 죄일 수가 없어. 마땅한 권리 행사일 뿐이지. 그리고 그렇게 고생해서 자기 것을 챙겼는데, 만약 그걸 누군가 가져가거나 남들과 나눠야 한다고 생각해봐. 억울하잖아. 그러니까 그들에게 사유재산은 대단히 중요한 거야.
  자기가 강해서 획득한 자산, 그걸 남에게 뺏기지 않을 권리, 그렇게 확보한 자산의 차이로 만들어지는 위계, 그렇게 형성된 계급의 유지, 그 유지를 위해 필요한 질서, 그 질서의 지속적 보장, 그들이 인지하는 세계에선 그런 것들이 무척 중요해지는 거지. 그렇기 때문에 그 격차로 인한 불평등은 너무나 당연한 자연의 이치가 되는 거야. 뒤처지거나 약한 건 전부 자기 탓이니까.
이명박이 항상 나태해지지 말라고 하잖아. 그 말뜻은 그런 거지. 내가 강한 건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내가 잘나서고, 내 덕에 내가 여기까지 온 거다. 난 그렇게 대통령까지 된 사람이다. 열심히 살지 않고, 불평불만 늘어놓는 자들, 남 탓만 하는 자들, 그 모든 건 자기 탓이다. 그러니 뒤처진 자들은 남 탓할 거 없다. 여기서 ‘ 남’은 바로 대통령까지 된 이명박 자신이지. 그러니 날 탓하지 말고, 정권을 탓하지 말고, 네 일이나 열심히 해라. 그런 소리지.
  노력만으론 개인이 극복할 수 없는 사회구조 같은 건 보이지도 않아. 청소부가 열심히 일하지 않아서 가난한 게 아닌데, 그런 건 관심 없어. 이명박이 항상 자기는 뭐든 해봤다고 주장하잖아. 내가 해봐서 안다고. 그건 자기는 여기까지 왔다고, 스스로를 대견해하며, 니들도 그렇게 해보라는 소리거든. 그러니까 니들은 니들이 못나서 그런 거라는 말이지. 성공한 우의 전형적인 사고 패턴이야. 모든 문제를 개인의 무능으로 환원시켜,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장악한 시스템 자체에 대해선 시비를 못 걸게 만드는 거지. 씨바.

그렇게 생각해보면 결국 우는 공포에 지배당하는 자들이 보여주는 본능적 대응이야. 두려우니까, 무서우니까, 자신만이라도 살아남겠다며 발버둥 치는 것들의 리액션. 그래서 난 우는 세계관이 아니라 반응이라고 생각해. 공포와 마주한 동물의 반응. 그런 수준의 반응은 인간이 아니라 동물도 다들 하는 거거든. 식량이 없는 두려운 겨울을 견디고 봄까지 살아남기 위해 가을에 졸라 많이 처먹는(웃음) 곰의 적응과 하등 차이가 없는 거라고.
  그래서 우의 엔진은 공포라고. 그 공포를 경쟁 대상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표정은 엄숙, 비장한 것이고. 그 경쟁에서 이길 경우 자신이 너무 대견해서 안하무인이 되고. 졸라 촌스럽지. 조갑제가 칭송하는 우의 비장미가 바로 그런 속성을 가진 거지. 그렇게 불확실성이란 공포를 상대하는 동물적 반응, 그 관점으로 우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고.
  이런 건 기질적인 것이고 타고나는 거라고 봐. 게다가 치열한 경쟁은 어쩔 수 없는 거라고 가르치고, 넓게 머리 써서 지혜롭게 협동하기보다 잔머리 써서 다른 사람을 이기는 놈이 잘난 놈이라고 세뇌시키는 우리나라 시스템에서 우가 대다수인 건 더더욱 당연한 거지. 우가 본능적이고 일차원적이잖아. 일단 나부터 살고 보자는 것이 나를 둘러싼 시스템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보다 쉽고 자연스럽거든. 유아적이라고 할 순 있어도 말이지. 현상 뒤의 구조를 읽어내는 건 막대한 정신 에너지가 필요하니까.
  그리고 여기서 한국의 우가, 한국적 보수가 북한을 대하는 태도를 설명할 수 있는 단서 또한 얻을 수 있어. 그 정서적 단서를. 북한은 한 마디로 불확실성 그 자체거든. 마치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밀림의 포식자처럼. 그럴 경우 그 두려움을 가장 손쉽게 처리하는 방식 중 하나는 상대를 악으로 규정해버리는 거야. 공포스러운 대상을 윤리적 단죄의 대상으로 바꾸는 거지. 그쪽이 훨씬 처리하기 간편한 감정이거든. 무섭다고 하기보단 나쁘다고 하는 거지. 무서워서 싫은 게 아니라 악해서 싫다고 말하는 거지. 그러니까 북한에 대한 우리나라 우의 반응은 한마디로 원시인 수준이야.(웃음)

지 _ 우리 우파 정당에 친일파나 그 후손이 많이 모여 있는데, 그게, 더 강한 놈이 있으면 ‘어쩔 수 없다. 쎈 놈이니 복종해야 한다!’는 멘탈리티를 가진 사람들이라서 그런 건가?
김 _ 그렇지. 물론 자기 걸 뺏으려는 자에게 누구나 일단 반항하지. 하지만 그 힘의 차이가 압도적일 경우, 그래서 모두 잃더라도 맞서느냐 아니면 그 힘에 복종하느냐를 선택해야 하는, 그런 결정적 선택의 순간이 오게 되면, 결국 본질적 기질이 드러나게 된다고. 그때 우의 사고 회로는 자기를 압도하는 힘에게 복종하고 바짝 엎드리는 게, 자기가 더 힘이 세면 남을 지배하는 게 당연하듯, 받아들여야 하는 이치라고 여기기 십상이라고. 자기가 약하면 복종하는 건 도리 없다고 받아들이는 게 우의 인식체계라는 거지. 동물하고 똑같아. 붙어봐서 안 되면 바로 꼬리 내리고 슬슬 기는 거지. 아예 도망치거나.
  지금도 일제 강점기의 장점을 어떻게든 찾아내려는 우파 학자들 있잖아. 그러면서 자기는 객관적이라고 착각을 하지. 객관적인 게 아니라 지가 그렇게 생겨 먹었을 뿐인데. 정보는 그 자체로는 데이터에 불과하고 결국 어떻게 프로세스 하느냐가 중요한데, 그 처리 과정을 지배하는 게 바로 자신의 생겨먹은 기질이란 걸 스스로는 자각하지 못하는 거지. 그렇게 압도적 힘을 거스르기보다 따르려고 하는 건, 우의 멘탈리티로는 쪽팔린 게 아니라 당연한 거지.
  항상 경쟁을 이야기하고, 경쟁에서 탈락하면 지 탓이라 하고, 그 경쟁에서 승리한 엘리트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과, 일본 같은 식민본국, 미국 같은 슈퍼 파워, 그 이전의 중국 같은 대국에 우가 머리를 조아리는 건 같은 맥락인 거지. 그리고 우의 기질과 원형질이 그렇다 보니까 우의 경제라는 건, 우선 지가 다 처먹고 나서 남은 찌꺼기를 나누어 주는 걸 경제라고 하는 거고. 일단 지가 다 먹고 나서. 이게 핵심이야.(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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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는 꼼수다'는 서막에 불과했다! 김어준의 명랑시민 정치교본
    from FaitHopeLove 2011-09-22 17:45 
    아... 이거 베스트셀러다!! 구입해서 함께 읽고 싶은 책이지만... 아내님에게 허락을 받을 수 있을까? ㅠㅠ
  2. 김어준의 책이 좀 팔리네
    from 행간을 노닐다 2011-10-03 20:30 
    김어준의 신간 가 예약 판매로 각종 온라인 서점에 베스트셀러 상위에 올랐다. 참 희한한 일이다. 물론 내용을 보지 않았으니 딱히 할 말은 없다. 그렇다고 보고 싶은 생각도 없다. 하지만 읽어 볼 것이다. 김어준은 무학의 통찰(요즈음 김어준이 나는 가수다 때문에 잘 쓰는 말이다), 반론은 받지 않는다는 식이다. 자기 할 말만 하고 그만 둔다. 그래도 많이 팔리면 장땡 아닌가? 아프니까 어쩌구도 100만부가 넘게 팔렸는데... 한데 김어준..
 
 
수호천사를믿어요 2011-10-06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민주당 정권 10년의 세월이 지났다 보수인 MB가 정권을 잡았다. 그의 독설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리고 빛을 보았다.
 

 

자기계발서가 맡던 역할의 일부분을 심리서가 이어받은 지난 몇 년. 이제(혹은 여전히) 철학도 이 역할을 해보려는 모양새다. 아직 이런 책들을 위한 분류는 없어 대개 인문 에세이나 교양 인문학으로 자리를 잡는데 어쩌면 치유 철학 정도의 소분류가 생길지도 모르겠다. 철학 상담가를 자처하는 레베카 라인하르트의 저작 두 권이 연달아 한국에 소개되는데, 이번 책의 제목은 <방황의 기술>, 부제는 '불확실한 삶이 두려운 이들을 위한 철학 연습'이다. 눈치 빠른 분들은 여기에서 세 권의 책을 떠올리지 않을까 싶다.(편집자가 의도한 건 아닌 듯) 어쨌든 철학의 효용이 늘어간다는(발견이 적합할지도) 건 먹고사니즘과 관련해서도 반가운 소식이다. 이제 마음이 아프면 철학 상담소를 찾아가게 될까. 아차, 한국은 이미 수많은 철학원을 갖고 있는 이 분야의 프런티어 아니었던가. 아쉽게도 이에 대한 분석은 잠시 미뤄두고 <방황의 기술>을 만나보자. 철학자 강신주의 추천사와 저자의 프롤로그를 차례로 소개한다.

 

방황, 혹은 자발적 여행의 지혜

- 철학자 강신주 

얼마 전 출간된 내 책을 들고서 어느 독자가 수줍게 사인을 요청했다. 웃으면서 나는 그의 얼굴을 잠시 본다. 그러고는 펜을 잡고 책 앞면에 다음과 같은 글귀를 적었다. “여행과도 같은 삶을 살아내시기를 기원합니다.” 물론 그와 만난 장소와 시간, 그리고 내 사인을 병기하는 걸 잊지 않는다. 내 팬인지 그 독자는 사인을 받은 것으로 아이처럼 행복해한다. 나도 행복한 표정을 짓지만, 속으로는 안타깝다. 그는 내가 왜 ‘여행과도 같은 삶’을 이야기했는지 깊게 고민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사인 요청에 기계적으로 응하지 않고, 내가 독자들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는 이유가 있다. 그들이 어떤 역사를 껴안고 살아왔는지, 그리고 그것이 그들에게 어떤 아우라를 남겼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유심히 보지 않아도 상관은 없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아도 된다. 그저 한 번의 느낌만으로 족하다. “여행과도 같은 삶을 살아내시기를 기원합니다.” 이 글귀로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따로 있다. “당신은 안주하면서 살고 있군요. 그래서는 안 됩니다.” 바로 이 말을 나는 하고 싶었던 것이다.

몽테뉴의 《수상록》에는 내가 좋아하는 글귀가 실려 있다. 여행을 통해 아무것도 얻지 못했던 사람이 있었다는 말을 듣고 소크라테스가 다음과 같이 말했나 보다. “아마도 그는 자기 자신을 짊어지고 갔다 온 모양일세.” 그렇다. 여행은 바로 이런 것이다. 낡은 것을 내려놓고 새로운 것을 짊어지고 오는 것이다. 낡은 것이라니? 그건 바로 자기 자신이다. 낡은 ‘나’를 버리고 새로운 ‘내’가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여행의 본질이다. 얼마나 설레는 일인가? 자신이 새롭게 된다는 것이 말이다.

낙관하지 말자. 새롭게 된다는 것이 반드시 더 바람직스럽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여행을 무서워하는 것이며, 심지어 “집 나가면 개고생이다”라는 명언 아닌 명언도 만들어진 건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주먹을 불끈 쥐고 입술을 앙다물고 다시 배낭을 꾸려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의 삶 자체가 항상 이미 그리고 앞으로도 여행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여행과도 같은 삶’은 사실 ‘삶다운 삶’을 말한다고 말이다. 

어머니 자궁으로부터 나와 낯선 부모를 만났을 때, 과연 우리는 자신이 어떤 어린이로 자랄지 예측할 수 있었을까? 이것도 여행이다. 훌륭한 부모를 만났다면, 우리는 유년 시절의 상처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반대로 미성숙한 부모를 만났다면, 우리는 죽을 때까지 치유하기 힘든 상처를 품고 살지도 모를 일이다. 사랑에 빠질 때, 우리는 자신이 어떤 사람으로 변할지 짐작이라도 할 수 있었을까? 이것도 여행이다. 인간의 삶 자체를 저주할 수밖에 없는 사랑을 할 수도, 혹은 태어난 것이 행복하다는 느낌 속에서 사랑을 누릴 수도 있다. 모를 일이다.

여행을 포기하고 익숙한 생활을 그대로 유지하고 싶은가? 유지하고 싶으면 해보라. 불가능할 테니까 말이다. 가만히 있으려고 해도 세계는 여러분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주식 대폭락이나 금융 질서 붕괴와 경제 위기가 닥칠 수도 있고, 아니면 지진과 수해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날 수도 있다. 혹은 여러분의 애인이 여러분의 무미건조한 생활에 싫증을 내고 결별을 선언할 수도 있다. 본의 아니게 새로운 환경이 여러분을 덮칠 것이다. 그러니 싫든 좋든 여행을 할 수밖에 없는 셈이다.

결국 우리에게 남은 선택은 단순하다. 자발적인 여행을 할 것인가, 아니면 타율적인 여행을 할 것인가? 급류를 거슬러 수영을 할 것인가, 아니면 급류에 휩쓸려 내려갈 것인가? 어느 경우든 우리는 과거와는 다른 ‘나’로 변할 것이다. 그렇지만 전자의 경우, 우리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욱 성장하는 자신을 확인할 테지만, 후자의 경우라면 갈수록 약해져만 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사실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지혜롭다면, 자발적 여행을 떠날 일이다.

지금 여러분이 들고 있는 책 《방황의 기술》의 저자 레베카 라인하르트는 자발적 여행을 ‘방황’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우리에게 인간은 왜 방황해야만 하는지, 왜 방황할 수밖에 없는지, 그리고 방황이 인간에게 얼마나 커다란 선물을 줄 수 있는지를 가르쳐주려고 한다. “낯선 것, 예측할 수 없는 것들과의 만남을 통해서만 이 세계에서 우리가 있는 자리가 어디인지, 인간이라는 것과 인간성이라는 것이 진정으로 어떤 의미인지를 알아낼 수 있다.” 얼마나 매력적인가? 방황이라는 여행이.   

아직도 방황에 주저하는 독자에게는 라인하르트가 인용한 노발리스의 말이 힘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삶이란 주어진 소설이 아니라 우리가 만든 소설이어야 한다.” 남들이나 환경이 만들어놓은 소설의 조연 노릇을 할 것인가, 아니면 남들과 만나고 새로운 환경에 머물면서 소설의 주인공이 될 것인가? 더 이상 여행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이 빠질 때, 다시 말해 삶을 마무리할 때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바로 그 순간, 엷은 미소를 띠면서 혼잣말을 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지금까지 파란만장했고 순간순간 힘들었지만 돌아보면 흥미진진한 소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소설을 쓴 것 같다”라고.

한동안 독자들에게 친필 사인을 할 때 내게 덧붙일 말이 하나 생긴 것 같다. 라인하르트의 책을 한번 읽어보라고. 어쩌면 독자들은 여행과도 같은 삶을 살아내기를 기원하는 나의 마음을 더 쉽게 알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 삶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야 하는 것이다. 삶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발적인 방황을 과감하게 선택하고 그것을 기꺼이 감내해야만 한다. 오직 그럴 때에만 우리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나’만의 삶, 다시 말해 ‘나’이기 때문에 혹은 ‘내’가 이 세상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살아낼 수 있는 삶을 제대로 살아낼 수 있을 것이다.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은 방황하는 기술이다

- 프롤로그 

불안의 시대에는 안전이 고가의 자산이다. 우리 모두는 안전한 직장과 보장된 연금, 믿을 수 있는 파트너를 원한다. 제아무리 사나운 변화의 폭풍이 몰아쳐도 모습이 변치 않는 것, 푹 믿고 기댈 수 있는 것. 하지만 변치 않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을 손에 넣었다고 믿는 순간 문제는 다시 시작된다. 사랑스럽던 파트너가 갑자기 우울증 환자임이 밝혀진다. 그렇게 말 잘 듣던 아이는 질풍노도의 나이가 된다. 직장은 위태위태하다. 직장에서 잘리면 어쩌나? 혹시 암이라도 걸리면 어쩌나?

불안하다. 세상만사가 내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려고 한다. 다시 붙들고 싶다. 불확실한 건 싫다. 실패할까 봐 겁난다. 궤도에서 이탈하고 싶지 않다. 망망대해를 정처 없이 떠도는 방랑자가 되고 싶지는 않다. 착오와 실패는 계획에 없는 일이다. 모든 것을 제대로 하고 싶다. 일, 가정, 건강, 적당한 수입. 직선거리로,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목표를 이루고 싶다. 실험은 안 된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가만히 있어야 한다. 비전과 꿈을 갖는 것이 낭만적이긴 하겠지만 그것으론 건질 것이 없다.

미래는 완벽하게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과거에도 늘 이런저런 예기치 못한 문제와 씨름했듯 미래도 편안한 산책길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 모험을 강행하여 미지의 땅을 정복하려 할 것이 아니라, 그저 조심 또 조심하는 편이 옳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극대화하고 완성하는 것으로 족하다. 지금보다 더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삶을 꾸려갈 것이며, 미심쩍은 불확실성은 애당초 차단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남는 시간이 있거든 여유 있게 즐기면 될 것 아닌가.

하지만 바로 이런 태도가 왜 우리가 여기에 있는지,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지에 대한 탐구를 가로막는다. 남보다 뛰어난 시간 관리가 과연 인생의 의미가 될 수 있을까? 손실을 최소로 줄이는 것이, 최대한 즐기는 것이 인생의 최종 목표가 될 수 있을까? 그저 이 세상에 왔을 때보다 조금 더 똑똑해져서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삶의 목표가 될 수 있을까?

나는 철학자이기에 매일 이런 문제들과 만난다. 책에서도 만나지만, 내가 운영하는 상담소나 병원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통해서도 늘 이런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나는 인간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철학도 무가치하다고 생각한다.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아주 다양하고(아픈 사람, 건강한 사람, 젊은 사람, 늙은 사람, 공부를 많이 한 사람, 못 한 사람, 돈을 잘 버는 사람, 못 버는 사람) 인생 역정도 가지각색이다. 하지만 이야기를 듣다 보면 결국 관심사는 다 거기서 거기다. 다들 행복이 무언지,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사는지 알고 싶어 한다.

그들과 대화를 나눌 때마다 새삼 확인하는 사실이 있다. 사람들은 대부분 불확실한 상태에 있는 걸 못 견뎌 한다는 것이다. 집안일이든, 직장 업무든, 병이든 마찬가지다. 모든 문제에 해결책이 있는 건 아니며, 어떤 땐 오히려 해결책이 없는 편이 더 낫다는 사실을 절대 이해하지 못한다. 불확실한 상태에서 헤매는 것은 무조건 시간과 비용의 낭비라고 치부해버린다. 그리고 그 참을 수 없는 상황에서 해방시켜주겠다는 전문가를 서둘러 찾아 나선다. 재미있는 건 불확실성을 견디지 못하는 원인이, 전문가들의 주장과는 달리 결코 힘들었던 어린 시절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그 원인은 해결 지향성이 지혜의 마지막 결론이라고 주장하는 이 시대, 어린 시절부터 효율과 효과를 추구해야 한다고 가르치면서 예측 불가능한 것들을 체계적으로 차단시키려 애쓰는 이 시대와 훨씬 더 관련이 깊다. 물론 아이러니하게도 예측 불가능한 것들을 차단시킬 수는 없다. 인생이란 그 자체가 예측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솔직히 예측 불가능이라는 매력이 사라진 우리의 삶은 상상만 해도 너무 황량하지 않겠는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시대의 맥락에서 파악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나는 나를 찾는 환자들을 통해 거듭 확인한다. 나아가 자신과 자신의 문제를 보다 포괄적인 철학적 관점에서 관찰할 수 있다면 정말 못 견딜 것 같은 문제들도 갑자기 전혀 다른 성격을 띠게 된다. 불확실한 세상을 떠도는 방황이 죄나 벌이 아니라 기술로 보이는 그런 관점 말이다.

이 책은 미래를 두려워하고 해결을 지향하고 계산에 집착하는 이 시대에 더 많은 용기와 호기심을 갖자고 외치는 변론이다. 이 책은 고대 영웅 오디세우스를 모델로 삼아 일상적이지 않은 일, 낯선 일, 한계상황에 뛰어들라는 초대장이다. 자신의 불완전함이 드러날 일을, 심지어 실패할 줄 뻔히 아는 일을 감행해보라는 초대장. 이유가 뭘까? 우리는 절대 직접적으로는 우리 자신에게 다가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빙빙 돌아봐야, 삼천포로도 빠져봐야 자신에게 갈 수 있다. 낯선 것, 예측할 수 없는 것들과의 만남을 통해서만 이 세계에서 우리가 있는 자리가 어디인지, 인간이라는 것과 인간성이라는 것이 진정으로 어떤 의미인지를 알아낼 수 있다. 솔직히 말해 쉽게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쉽게 정리가 안 되고 쉽게 내 손아귀에 안 들어오는 것이 더 매력적이고 더 스릴이 있는 법이다.

―헤매다
―헷갈리다
―착각하다
―혼란스럽다
―길을 잘못 들다
―길을 잃다

방황을 인생의 장애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나와 다른 것, 쉽게 정체를 알 수 없는 것, 혼란스러운 것을 무시한다고 해서 두려움이 사라지는 건 절대 아니다.

두려워 말자. 망설이지도 말자. 지평을 넓혀라. 방황을 기술로 생각하자. 방황의 기술을 배워 인생의 가장 흥미진진한 즉 예측 불가능한 측면들을 만나보자. 수동적인 자세에 신물이 났다면, 다시 인생의 방향을 정하고 싶다면, 현재의 상황이 참을 수 없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이 책은 당신의 멋진 동반자가 되어줄 것이다. 습관으로 굳어버린 세계관을 버리고 불확실한 것에 다가갈 수 있는 용기와 호기심과 능력을, 숨어 있던 그 능력을 일깨우라고 재촉할 테니 말이다. 놀랄 만한 인생의 다양성, 일상의 근심 때문에 미처 보지 못했던 그 다양성을 새삼 깨닫게 해줄 테니 말이다. 더 용기를 내라고 외칠 것이고, 조금 더 참고 조금 더 인내하라고, 더불어 사는 법을 배우라고 가르칠 테니 말이다. 공동체는 저절로 생기는 게 아니다. 진정한 공동체는 ‘우리 것’과의 동일시를 넘어 남의 것, 낯선 것과 친구가 될 때 탄생하는 것이다.

책을 읽으며 수많은 질문들의 해답을 찾아보길 바란다. 모든 경우에서 서둘러 (소위) 올바른 해답을 내기보다는 올바른 질문을 던질 줄 아는 능력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불확실성, 다의성, 모순을 ‘합리화로 제거하는 것’은 손실이 없을 수 없다. 철학에서도, 실제 삶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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