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자본주의라는 용어의 문제에 대해 간단히 언급해 두고 싶다. ‘인지’라는 말은 주로 과학용어로 사용된다. 인지과학이라는 용어를 통해 비교적 널리 알려진 ‘인지’는 신경생리학, 뇌과학, 컴퓨터공학, 심리학, 교육학 등의 용어로도 자주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추세 때문에 정치경제학 용어인 ‘자본주의’라는 말과 ‘인지’라는 용어의 결합은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바로 이 생소함이야말로 우리가 인지라는 말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이다.

 
   

 

 

제국, 다중, 아우또노미아... 조정환 하면 함께 떠오르는 개념이다. 물론 캘리니코스, 네그리, 하먼 등의 이름도 빼놓을 수 없다. 그의 연구를 거칠게 정리하면 '현대 세계의 성격과 구조를 탐구하고 이 조건 속에서 가능한 사회변혁의 가능성과 방법을 고민'하는 학문이라 하겠다. <인지자본주의>는 이 여정의 일단락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번 책은 입론이라 변혁의 대안에 대해서는 <혁명의 세계사>(가제)에서 따로 다룰 계획이라 한다. 다중이 어느새 (그 내용에 대한 이해를 떠나) 익숙한 표현이 되었듯이, 인지자본주의도 세계를 이해하는 새롭고 강력한 틀로 자리잡을 수 있을까? 몇 가지 질문과 답변, 서문을 통해 <인지자본주의>를 읽기 위한 준비운동을 제안한다.

 

Q. 인지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 금융자본주의, 탈산업사회 등의 다른 이름인가?
이것들이 사유하는 대상은 거의 같다. 하지만 신자유주의론은 자본주의 정책 형태의 변화를 중심에 놓고 사고하며 그것의 대안은 주로 사회(민주)주의적 정책변경에서 찾아진다. 금융자본주의론은 자본형태를 중심으로 사유하며 그것의 대안은 지금까지 주로 산업자본에서 찾아졌다. 탈산업사회론은 주로 기술형태를 중심으로 사유하며 그것의 초점은 대안기술과 문화에 모아졌다. 인지자본주의론은 노동형태의 변화를 중심으로 사고하며 그 대안은 노동의 대안적 자기조직화이다.
 
Q. 인지자본주의는 산업자본주의의 한 유형일 뿐, 자본주의의 새로운 국면은 아니라는 주장이 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인지활동도 신체를 사용하며 신체에 의존한다. 인지노동은 육체노동에 대립하는 노동이 아니라 육체노동이 확장되고 진화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지노동은 산업노동과 연속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지노동은 산업노동으로 환원될 수 없다. 산업자본주의에서 육체노동은 정신노동과 분업적으로 구별되었고 심지어 대립되었다. 구상과 실행의 분리가 그것이다. 인지자본주의에서 이 분업적 구별과 분리는 사라진다. 육체노동이 인지화하며 인지노동이 육체화한다. 그 결과 모든 노동은 육체노동이면서 동시에 인지노동이라는 이중적 성격을 띠고 나타난다. 인지자본주의를 산업자본주의로 환원하는 것은 이 핵심적인 변화를 간과하면서 인지화가 가져오는 변화의 여러 지점들을 놓친다. 이 책에서 내가 분석하는 것은 인지화가 가져오는 실제적 변화들, 그 결과들, 그리고 의미들이다.
 
Q. 인지자본주의론이 인지노동자들을 특권화시키지는 않겠는가?
인지자본주의에서는 대학이 공장으로 되고 메트로폴리스가 미술관으로 되고 국가가 스펙타클로 된다. 이것의 영향으로 전통적 공장들도 점점 디자인 작업실로 바뀐다. 이런 의미에서 인지노동의 헤게모니가 나타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이 학생, 예술가, 공무원 등을 인지노동자로 특화할 수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모든 노동들이 인지노동의 성격을 더 많이 띠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원자력발전소의 노동자들을 전통적 산업노동자로 부를 수 있겠는가? 고도의 지식을 요하는 유기농산물 생산자를 농민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인지노동은 산업노동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산업의 메트로폴리스로의 확장이며 또 그것의 변화한 특질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지노동의 헤게모니를 말하는 것이 인지노동자의 정치적 특권이나 헤게모니를 의미할 수는 없다.
 
Q. 인지자본주의론은 공통되기를 위한 인지혁명을 주장한다. 그렇다면 인지자본주의론은 SNS(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등 인지적 성격이 강한 신기술의 영역을 운동과 혁명의 핵심영역으로 간주하는가? 예컨대 최근의 아랍혁명을 SNS 혁명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전통적 관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SNS는 표현수단에 불과했고 실제로는 노동운동이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고 말한다.
인지자본주의론은 기술을 노동과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자본과 노동의 적대관계 속에서 고려하지 그 자체로 독립적인 것으로 고려하지 않는다. 아프리카와 중동에서 폭발한 혁명의 성격을 묘사하면서 그것을 페이스북 혁명이라거나 트윗 혁명이라는 말로 묘사하는 것은 그러므로 일면적이다. 튀니지와 이집트의 경우에 대해 특히 그러하다. 이러한 말들의 유행은 혁명을 테크롤로지 의존적인 것으로 표상할 위험성이 있다. 이러한 표상은 혁명을 기술적 지적 엘리뜨의 과업으로 만들고 이러한 테크놀로지에서 소외되어 있는 대중들의 혁명적 역할을 간과하거나 폄하할 수 있다
   반면 고전적 혁명 관념을 가진 사람들은 트윗이나 페이스북은 발화수단일 뿐, 진정한 혁명은 공장에서 파업을 통해 준비되어 왔고 또 그것을 통해 완성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SNS나 그와 연관되어 있는 사람들(학생과 청년들)를 주변적이거나 종속적인 힘으로 묘사한다. 이러한 관점은 20세기 운동의 표상을 현재로까지 가져와 육체적 산업노동자들을 중심에 놓으면서 새로운 노동자층의 혁명적 역할을 간과하거나 폄하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이 두 관점은 모두 현존하는 혁명능력들을 축소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SNS는 오늘날의 공장이다. 사회적 인지력을 연결하는 망은 공장노동자들을 연결하는 콘베이어벨트와 같다. 내가 현대의 메트로폴리스를 거대공장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이다. 이것을 통해 가치생산이 이루어지고 축적이 이루어진다. SNS 사용자들을 산업공장의 노동자들과 구별짓는 것은 그들의 생산방식이나 그 생산과정의 특성일 뿐이다. 자본주의적 생산과 재생산의 구성부분이라는 점에서 양자는 동일하다. 그러므로 SNS가 생산의 장소가 아니라 혁명의 장소로 사용된다는 것은 공장이 점거되어 파업투쟁의 장소로 사용되는 것과 같다. 그것은 투쟁의 특권적 장소로 파악되어서도 안 되며 투쟁을 보조하는 종속적 장소로 파악되어서도 안 된다. 메트로폴리스에서의 혁명은 산업적 투쟁과 사회적 투쟁 그리고 담론적 투쟁 모두를 위계 없는 관계로서 포괄한다. 이 각각을 서로 연결되어야 할 특이한 투쟁력들로 파악할 때에만 현대의 혁명이 뿌리에까지 이르는 혁명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책머리에]

과거에 비해 오늘날의 사람들은 어느 나라 어느 곳에서나, 유사한 경험을 한다. 실업으로 인해 소득은 줄어들고 치솟는 물가로 인해 상품들의 문턱은 높아지며 양극화로 인해 가난하다는 느낌은 점점 깊어진다. 역사적 공동체들을 대체한 국가는 지배계급을 옹호하는 이익집단으로 행동하고 제국은 소수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에 의해 조종당한다.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에 의해, 특히 사적 이익집단들에 의해 무차별적으로 이용당한 지구생태계는 단말마의 신음을 내뿜으며 점점 인간에 적대적인 양상을 드러내고 있다. 이런 것들로 인해 개개인들은 점점 더 의외의 시간에, 의외의 방식으로, 질병에 걸리거나 죽게 되고, 인류 전체가 종말의 시간을 맞이하고 있다는 묵시록적인 공포의 정서가 일상세계에서뿐만 아니라 학술세계에서도 전염병처럼 확산되고 있다. 이럴수록 사람들의 삶은 고통스럽고 무의미한 것으로 되고 공포와 절망의 감정은 모든 윤리적 감각을 마비시키는 마취제로 작용한다.
   그리고 어느 나라 어느 곳에서나 통치집단들의 모습도 비슷하다. 뻔한 거짓말을 지겹도록 늘어놓고 모든 것을 돈에 종속시킨다. 심지어는 인도주의라는 말조차도 자원약탈과 제국주의적 침략의 수사학으로 이용한다. 정치, 경제, 교육, 미디어, 종교, 군대 등 모든 영역들에서 지배집단들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뿌리깊은 부패의 사슬에 연루되어 있다. 그래서 이들은 더 자주, 그리고 더 깊이 사람들 사이의 경쟁에, 집단들 사이의 갈등에, 그리고 전 지구적인 전쟁에 의존한다. 그리하여 정치가들이 자신의 지역을 멋지게 가꾸었다고 자랑하는 목소리가 높으면 높을수록 그 지역의 오염과 훼손은 심각해지고, 주가가 떨어지건 고공행진을 하건 대중들의 가난은 깊어가고 GNP 지표가 하락하건 수 만 달러를 가리키건 하루 2달러 미만으로 사는 사람들의 수는 늘어나고, 텔레비전 드라마와 광고가 꿈같이 화려한 세계를 누구나 만져보고 싶도록 연출해서 보여주면 그럴수록 일상의 삶은 그 만큼 더 비루해지며, 구원이 가까왔다는 목소리가 높아질수록 행복은 아득하게 멀게만 느껴진다.
   부와 가난의 양극화는 권력과 무력의 양극화로, 탐욕의 끝모르는 질주와 희망의 추락이라는 양극화로, 마천루 높은 곳에서 아래를 굽어 보는 삶과 뒷골목 쓰레기통을 뒤지는 삶의 양극화로 이어진다. 조산(早産)된 21세기는 1968년 혁명에서 시작해서 부채위기로 점철되었고 냉전을 제국적 내전들과 테러에 대한 전쟁으로 대체했으며 2008년의 금융위기로 조로(早老)현상을 드러냈다. 나는 이 조로하고 있는 21세기의 자본주의를 인지자본주의라는 말로 명명했다.
   현대 사회를 인지자본주의로 파악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한국에서 지난 이 십 여 년 동안 이루어져온 연구들의 많은 부분은 인지자본주의의 증상들과 결과들을 탐구하는 데 바쳐졌다. 인지자본주의가 고용에 미치는 영향에 집중하는 실업, 비정규직, 불안정노동이라는 대중화된 주제들, 인지자본주의가 소득에 미치는 영향에 집중하는 88세대론이나 양극화론, 인지자본주의가 주체 재구성에 미치는 영향에 집중하는 신세대론을 비롯한 각종의 세대론과 청년론, 인지자본주의가 과학과 테크놀로지 발전에 미치는 영향에 집중하는 인지과학, 생명공학, 정보화론, 인지자본주의가 공간재구성에 미치는 영향에 집중하는 도시개발론, 메트로폴리스론, 환경공학, 인지자본주의가 기업형태 변화에 미치는 영향에 집중하는 네트워크 기업론이나 사회적 기업론, 인지자본주의가 대중의 문화체험에 미치는 영향에 집중하는 스펙타클론이나 시뮬라크르론, 인지자본주의가 가져오는 권력형태의 미시적 재구성에 집중하는 우리안의 파시즘론, 대중독재론, 부드러운 파시즘론, 인지자본주의가 자연에 미치는 영향에 집중하는 다양한 생태론, 인지자본주의가 성별 문제에 미치는 영향에 집중하는 돌봄노동론과 페미니즘론 등등의 주제가 그러하다. 인지자본주의론은 이 미시적이고 다양한 탐구들이 천착하고 더듬어온 문제들을 노동형태 및 자본형태의 변화, 그리고 이 둘 사이의 사회적 관계의 변화라는 거시적 틀 속에서 종합하고 각각의 문제들의 위치를 밝히며 총체적인 발전의 경향을 밝히려는 시도이다.
   우리가 분석 대상으로 삼은 인지자본주의는, 2011년에 들어 발생한 두 개의 사건들을 통해 자신이 발전과정에서 불러낸 힘들을 그 자신이 통제할 없음을 고백하고 있다. 그 중 하나는 일본 대지진에 뒤이은 원자로 폭발과 방사능 위기이며 또 하나는 북아프리카 및 중동에서의 연쇄적이고 연속적인 혁명이다. 원자력 발전은 우라늄이라는 자연물질을 이용하는 것이지만 그것의 분열과정은 인간의 과학기술에 의해 인지적으로 정교하게 조직되어 있다. 인간은 핵분열 조작을 통해 거대한 핵에너지를 인공적으로 발생시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후쿠시마 원자로의 폭발과 누출되는 방사능에 대한 통제불가능의 상황은 인지자본주의가 거대한 힘을 불러낼 수는 있지만 그것을 그 자신이 통제할 수 없을 수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원자 에너지는 켤 수는 있지만 끌 수 없는 불이다. 인간은 그것을 냉각시킬 수 있을 뿐이고 수 만, 수 십 만, 아니 수 십 억 년에 걸쳐 진행될 그것의 반감을 기다릴 수 있을 뿐이다. 일본 핵상황의 불확실성은 전 세계에 불안과 공포를 확산시키고 있다.
   아프리카와 중동에서의 혁명은 이 통제불가능성의 또 다른 예이다. 인지자본주의는 아프리카와 중동에서 핵연료인 우라늄을 비롯한 막대한 광물자원과 석유자원을 채굴했고 그것으로 거대한 자본을 축적했다. 2011년, 이 지역의 다중들의 혁명과 그것의 연쇄적 확산은 인지자본주의가 빠져 있는 통제불가능성과 무능력을 전혀 다른 방향에서 보여준다. 튀니지에서 시작된 혁명은 이집트로 확산되었고 이어 리비아, 알제리, 모리타니 등의 아프리카 지역 뿐만 아니라 예맨,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오만, 시리아, 팔레스타인 등 중동의 전 지역으로 확산되었고 이 지역에 통제불가능성과 불확실성을 확대시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절실해지는 것은 우리가 속해 있는 인지자본주의가 어디에서 와서 지금 어떻게 운동하고 있고 무엇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 하는 물음이다. 이 물음은,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고 또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진보와 실천의 물음뿐만 아니라 우리의 능력 가운데 무엇을 발전시키고 무엇을 억제해야 하는가 라는 윤리적 선택과 자제의 물음도 포함해야 한다.
   1991년 사회주의 소련이 붕괴하고 미국에 의해 새로운 세계질서가 선포되었을 때, 문제는 그 새로운 세계질서의 성격, 그것의 구조, 그것의 내적 모순, 그리고 그것의 동학에 대한 탐구였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우리로 하여금 냉전 이후의 이 통합된 세계질서가 가져오는 새로운 주권형태가 무엇인가를 탐구하도록 우리를 이끌었다. 그 탐구의 결실은 네트워크 주권형태로서의 제국에 대한 개념화로 나타났다. 그러나 2001년 9/11 사건과 그에 대한 미국의 대응으로서의 테러에 대한 전쟁, 그리고 그에 뒤이어진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제2차 걸프전은 제국의 형상을 수정했다. 9/11 사건은 군주국 미국이 정치적으로 뿐만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도전받는 상태에 있다는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 이러한 상황을 이용해 미국은 제국의 다원주의적 합의 체제를 깨뜨리고 일방주의적으로 행동하는 쿠데타를 감행했다. 테러에 대한 전쟁이라는 이름 하에서 수행되어온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은 이 일방주의적 행동의 산물이다. 그러나 이 전쟁들은 미국을 단독적 군주국으로 만들어주기는커녕 미국을 더 깊은 수렁으로 끌어들였다. 10년 여 계속되고 있는 이 전쟁은 제국 내부에 커다란 긴장과 갈등을 불러왔을 뿐만 아니라 미국을 정치적 군사적으로 실추시켰고, 2008년의 금융위기는 미국의 이 쿠데타가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종말을, 나아가 세계자본주의의 결정적 위기를 불러오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제국의 위기가 자본주의의 결정적 위기로 이어진 것이다. 금융위기는 세계경제위기를 불러오면서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 수습되기는커녕 나날이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음을 보여준다. 전 세계적 수준에서 다중의 저항과 혁명은 이러한 상황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대응으로서, 라틴아메리카에서 아시아로, 아시에서 유럽으로, 유럽에서 아프리카로, 아프리카에서 중동으로 순환하고 있는, 다중의 전 지구적 대장정의 형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2008년 이후의 위기는 자본주의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현 시대를 재조명하는 과제를 절실한 것으로 만든다. 많은 경제학자들은 이것을 자본주의의 순환적 위기의 한 국면으로 간주하곤 한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인지자본주의하에서 누적되어온 위기의 축적과 그 축적된 위기가 갖는 탈순환적이고 구조적인 성격을 간과하는 것이다. 이것은 과거의 경험을 통해 현재를 해석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 나는 현재의 위기의 구조적 성격을 규명하는 한편, 현재의 체제 속에 자본과 노동의 적대가 고스란히 살아 있음을 확인하면서도 그것이 결코 고전적 형태 그대로가 아니고 변용된 형태로 살아있음을 밝힐 것이다. 이 작업은 우리 시대에 가능한 혁명의 기원과 경향과 형태를 밝히는 작업-이 작업은 곧 출간될『혁명의 세계사』(가제)에서 이루어질 것이다-의 필수적인 전제가 될 것이다.
   지난해부터 이 책을 준비하면서 나는 지난 십 여 년 동안의 나의 연구과제 대부분이 바로 현대 세계의 성격과 구조를 탐구하고 이 조건 속에서 가능한 사회변혁의 가능성과 방법을 탐구하는 데 바쳐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철학을 다루든, 정치경제를 다루든, 문학예술을 다루든, 늘 나의 문제의식이 이 문제를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나는 지난 해 이후 의식적으로 이 책의 발간을 목표로 기고활동을 조직하고 이 책의 기획 이전에 썼던 글들을 이 책의 취지에 맞게 편집하고 수정했으며 일관된 서술체계를 부여했다. 이 책은 인지자본주의의 구조와 특성에 대해 서술한 책이기 때문에 대안을 찾는 데 관심을 갖고 있는 독자들을 충분히 만족시켜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각 장의 끝 부분과 책의 마지막 부분, 그리고 간주곡에 해당하는 몇 편의 글을 통해, 그 대안이 고려해야 할 거시적 조건들과 대안이 추구되어야 할 커다란 방향이 제시되거나 최소한 암시될 수 있도록 노력했다. 하지만 그 서술의 내용은 이 책에 필요한 범위에 제한되었다. 이 책에서 다루어지지 못한 사회혁명적 대안문제에 관해서 나는, 『혁명의 세계사』에서 역사서술적 방식을 통해 좀 더 상세하게 다룰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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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지만 마리 여사의 강의 지상중계는 오늘로 막을 내립니다. 네 번에 불과하지만 너무 질질 끌었나 싶은 생각도 해봅니다. 마지막 강의는 '국제화'와 '글로벌리제이션'의 의미를 통해 세계질서의 변동에 대응하는 일본인의 자세를 보여줍니다. 우리 모습을 빗대어본다면 어떻게 말할 수 있을지. 앞서 말씀드렸듯이 이제 마리 여사의 책은 세 권 남았습니다. 계획대로라면 올해 안에 완간이 될 터인데 더 많은 이들이 곱씹을 수 있도록 널리 알려지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문득 일본에서는 마리 여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추억하는지 궁금해지네요. 참고 삼아 알라딘에서 진행한 요네하라 마리 리뷰 대회 페이지를 소개합니다. 한번 살펴볼 만합니다. 

http://www.aladin.co.kr/events/wevent_detail_book.aspx?pn=100802_mari_end 

 

제4장. ‘국제화와 글로벌리제이션 사이’에서

이미 국제화를 이루었지만

비일상적이라고 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이미 국제적인 교류랄까 다른 나라와의 교류는 일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 한편으로 일본인의 의식 속에는 전통적으로 국제적인 일은 비일상이라는 관성의 법칙(외부로부터 힘이 가해지지 않는 한 현재의 상태를 유지하려는 성질)이 아직도 남아 있다. 마음속에도, 행동양식에도 이 관성의 법칙이 살아 있어서 현실은 이미 국제적인데도 마음은 여전히 비非국제적인 상태 그대로다.
  국제적이게 된 요인으로는 먼저 교통수단과 운반수단의 발달을 들 수 있다. 굳이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너지 않아도 비행기로 한번에 외국에 갈 수 있다. 국경이라는 울타리가 차츰 낮아지고 있다. 또 통신수단이 발달해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일도 몇 초 후면 텔레비전 중계로 방송되고 인터넷으로 전해진다. 눈 깜짝할 사이에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난 일들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다. 유럽에서는 10여 년 전에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되어 체제의 벽이 없어졌다. 그래서 다국적 기업이 자원을 조달할 때도 국경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최근 일본의 엔화가 약세다. 경제 불황이 이어져 엔화가 힘을 쓰지 못한다고 하는데, 그래도 국제적으로 보면 엔화의 수준은 상당히 높고 강하다. 그러면 일본에 값싼 노동력이 자꾸 들어온다. 외국인이 일본 열도로 몰려든다. 그런 의미에서도 현실에서 일본은 이미 국제화되어 있다. 다른 국가와의 교류가 증가하고 있다.
  바다는 더 이상 국경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국제화는 비일상이 아니라 일상이 되었는데도 뉴스를 봐도 그렇고, 일반인들을 봐도 그렇고, 세계나 국제라는 말을 들으면 약간 흥분한다. 이웃현縣의 손님보다 외국 손님이 오면 흥분하는 것과 같은 게 아닐까? 아무튼 일상의 연장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국제화는 영어로 뭘까

어떤 이유에선지 사람들은 일상적인 일이 아니면 평상심을 잃는데, ‘국제’와 ‘국제화’에 대해 차분히 생각해보자.
  ‘국제화’라는 말에 우리는 많은 개념을 뒤섞어 집어넣고 있는 게 아닐까? 일본어로 ‘국제적’이라고 할 때와 ‘국제화’라고 할 때 똑같이 ‘국제’라는 단어를 쓰는데, 영어로 ‘국제적’은 ‘international’이다. 그럼 ‘국제화’라고 할 때는 ‘internationalization’이라고 하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을 쓰지 않는 것은 아니다. 사전에도 나와 있다. 그런데 ‘국제화’라는 의미는 아니다. ‘internationalization’은 ‘국제 관리화’라는 뜻이다.
  파나마 운하를 예로 들어보자. 남북 아메리카를 잇는 잘록한 땅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파나마라는 나라다. 파나마 운하는 파나마 지협地峽을 횡단해 태평양과 카리브해(대서양)를 잇는 장소라서, 그곳의 이권을 쥐는 것은 교통이나 군사적인 면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파나마 운하를 한 나라가 아닌 국제 공동 통치하에 두어 관리한다고 할 때 ‘internationalization’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일본은 미국, 소련, 프랑스, 중국 등 아홉 개의 나라로 이루어진 연합국—연합국은 9개국이었던 걸로 기억한다—의 통치하에 놓였다. 국제 공동 통치하에 놓인 것이다. 독일도 그랬다. 이런 경우에 ‘internationalization’이라는 말을 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국제화’는 영어로 어떻게 번역할까? 사전에 나와 있듯이 ‘globalization’, 글로벌리제이션 혹은 글로벌라이제이션이라고 한다.
  일본인이 ‘국제화’라고 말할 때 그것은 어떤 의미일까? 일본은 장사 습관이나 행정 방법 등 많은 것들이 특수한 나라로, 국제사회와는 약간 다르다. 그래서 일본인의 양식을 국제사회의 양식에 맞추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인이 국제화라고 말할 때는 국제 양식에 맞추는 것, 흔히 글로벌 스탠더드global standard라 말하는 세계 표준에 맞춘다는 의미다.
 


글로벌리제이션의 진짜 의미

그럼 ‘국제화’로 번역되는 ‘글로벌리제이션’은 어떤 의미일까? 글로벌리제이션이라는 용어의 중심 개념은 ‘글로브globe’다. 글로브는 지구의 구球, ‘지구의地球儀’를 말한다. ‘영어로 지구는 earth인데?’라고 생각할 텐데, 글로브는 지구가 구형인 것, 즉 둥근 것을 강조할 때 사용한다. 글로벌리제이션은 영어니까 영국과 미국이 자신들의 기준, 자신들의 표준으로 세계를 뒤덮으려는 것이 글로벌리제이션이다.
  그래서 나는 동시통역을 할 때, 일본인이 국제화라고 말하면 거의 자동적으로 글로벌리제이션—러시아어니까 글로발리자치야Глобализация—이라고 번역했는데, 지금 말한 것처럼 사실은 반대 의미다. 앞서 말했지만 ‘국제화’라 할 때 일본인이 말하는 국제화는 국제적인 기준에 자신들이 맞춘다는 의미다. 지구촌, 국제사회에 맞춰간다는 의미.
  미국인이 말하는 글로벌리제이션은 자신들의 기준을 세계에 보편화한다는 의미다. 자신들은 달라지지 않는다. 자신들은 정당하고 정의롭다. 자신들이 법이다. 이것을 세계 각국에 강요하는 것이 글로벌리제이션이다.
  똑같이 국제화라고 하지만 자신을 세계의 기준으로 하려는 ‘글로벌리제이션’과 세계 기준에 자신을 맞추려는 ‘국제화’ 사이에는 아주 커다란 도랑이 있는 것이다. 정반대의 의미다. 일본인은 이 점을 자각해야 한다. 이것이 첫 번째 문제점이다.
  두 번째 문제점은 무엇일까? 일본인이 세계에 자신들을 맞추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할 때의 세계 혹은 국제사회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일본인의 전통적인 습성으로, 일본인에게는 그때그때의 세계 최강국이 곧 세계가 되는 경향이 있다. 게다가 세계 최강국이라고 할 때 무엇을 기준으로 하는가 하면, 기본적으로 군사력과 경제력, 이 두 가지만 보고 문화는 염두에 두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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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3강, 마리 여사의 전공 분야군요. 꽤나 분주한 화요일입니다. '차이'건 '사이'건 틈이 없는 하루입니다. 

내일은 마지막 강의를 전하겠습니다. 나머지는 책에서 확신하시라.(자료를 제공해준 출판사에 전하는 제 마음의 표현입니다)

 

제3장. ‘통역과 번역의 차이’에서
 


사전 없이 책을 독파하다

당시 여름 숲속학교에 도서관이 있었다. 어느 날 도서관에서 책을 뒤지다가 한자로 ‘箱根用水하코네용수’라고 쓰여 있는 책을 발견했다. 일본을 떠난 지 6개월 정도 됐을 때여서 낯선 땅에서 같은 고향 사람을 만난 듯한 정겨움에 그 책을 꺼내어 꼭 움켜쥐었다.
  표지는 한자였지만 안은 온통 러시아어였다. 그런데도 망설임 없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다카쿠라 데루高倉テル1891~1986라는 일본 작가가 쓴 소설이다. 후지산 기슭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이 물에 좌우되었던 에도시대에, 지하터널을 통해 하코네箱根 아시노코芦ノ湖 호수의 물을 끌어와 저수지와 운하를 만들어 농사짓는 데 쓰기 위해 권력층과 싸우고 많은 사람의 협조를 얻어 그 사업을 성공시키는 이야기다.
  나는 책 내용에 푹 빠졌다. 한창 읽을 때는 그것이 러시아어로 쓰였다는 것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사실 캠프에 가기 전에도 학교 도서관에서 몇 번인가 책을 빌려 읽으려고 했는데, 말을 몰라서 제대로 읽을 만한 것이 없었다. 단어의 뜻을 모르면 보통 사전을 찾는다. 일일이 사전을 찾으며 읽다 보니 흥미가 줄어들어 도중에 책장을 덮고 좌절할 때가 많았는데, 이때 처음으로 끝까지 읽었다. 그래서 사전 없이 책을 읽는 데 자신이 생겼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해졌는지에 대해서는 이후에 이야기하자.
  그 캠프에서 마음에 맞는 아이들끼리 독서회를 열었다. 재미있을 것 같은 책을 정해 소리 내어 낭독하는 방식이다. 그러면 우스운 장면에서는 같이 웃고, 슬픈 대목에서는 같이 눈물을 흘린다. 사람이 느끼는 마음의 진동은 다른 사람의 진동과 공명하면 더 깊고 커진다. 그만큼 더 깊은 희로애락을 맛볼 수 있다. 한편 똑같은 문장도 사람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 그것으로 서로 충돌하는 재미도 있으니 독서회는 해보는 게 좋다.
  한번은 함께 읽을 책으로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가 선정되었다. 익살스런 표현이 러시아어로 잘 번역되어 있었다. 그 학교는 대충 50개 나라의 아이들이 다녔는데, 여러 나라의 아이들이 모두 배를 잡고 웃었다. 메이지시대의 일본인이 쓴 이야기를 이렇게 여러 나라의 아이들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구나 싶어 자랑스러웠다.
독서회를 자주 갖다 보니 러시아어로 된 글자를 읽는 게 편해졌다. 그래서 차츰 러시아 작가가 쓴 책에 도전하게 되었다. 지금 그 이유를 생각해보면, 마침 그때가 초등학교 4, 5학년 무렵이어서 남녀관계의 미묘한 사정과 섹스 같은 게 너무 알고 싶었는데, 선생님이나 부모님께는 물을 수 없지만 문학 작품에는 그런 내용이 잔뜩 나와 있으니 열심히 읽은 것 같다. 아무튼 많이 읽었다. 



살아 있는 말을 하기 위한 과정

통역을 할 때 그 모호함의 결과로서 즉 개념의 결과로서 나온 코드화한 문자나 소리만을 주워 옮겼기 때문에 동시통역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사람의 입에서 말이 나오는 과정은 모호함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우리는 개념이 표현된 것을 문자나 소리로 인식했을 때 그 내용을 듣거나 읽어 해독한다. 그러고 나서 ‘아, 이것을 말하고 싶었구나’ 하고 그 모호한 대상의 정체를 인식한다. 모호한 대상의 정체를 알게 되었을 때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문자 그 자체가 아니다.
  그래서 통역을 할 때는 이 모호함을 다시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된다. 즉 말이 생겨난 과정을 다시 한 번 거쳐야만 한다. 말이 생겨나고 그것을 듣거나 읽고 해독해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 하는 개념을 얻어서 그 개념을 다시 한 번 말로 한다. 코드화해서 소리나 문자로 표현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살아 있는 말이 될 수 없다. 결과만, 즉 말만 옮기는 것이 빠를 것 같지만 사실은 앞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 더 빠르다.
  왜냐하면 말이란 그 부품인 단어가 아니라 하나의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소설뿐 아니라 예를 들어 물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물리학도 좋고,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축구 기사도 상관없다. 말이란 그런 텍스트다. 이렇게 텍스트가 된 것을 인식하고 다시 텍스트로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그래서 단어마다 주워서 암기하거나 문법이라는 해골만 머리에 넣는, 살아 있는 말과 관계없는 행위를 열심히 해봤자 아무 의미가 없다. 매력도 없다.
  동시통역은 개념을 파악해 옮겨야 성립한다. 수화의 경우는 어떨까? 아마 단어 하나, 문장 하나를 일일이 옮기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것이 가능하다는 신앙을 버리지 않는 한, 통역으로의 비약은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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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의 메신저, 차이를 알고 사이를 좁히다

‘소통의 메신저’로서 마리는 자신이 경험하고 깨달은 것들을 글을 통해 세상에 전하기 시작한다. 사는 것 자체가 곧 ‘소통’이라는 말처럼, 그녀가 쓴 글들과 그녀의 인생 자체가 ‘소통’을 의미할 텐데, 이번 작품은 암이라는 고통과 싸우면서도 직접 젊은이들과 얼굴을 마주한 그녀의 마지막 소통, 마지막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이 강의가 자신이 이 세상에서 해야 할 마지막 사명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홍성민, 옮긴이의 말 가운데)

 
   

오늘은 바로 강의에 들어가겠습니다. 드디어 책을 만났기에, 강의실보다는 혼자 집에서 읽으려고요. ^^ 2강의 주제는 '커뮤니케이션의 이해'입니다.

 

제2장. ‘이해와 오해 사이’ 에서

같이 웃을 수 있는 기쁨

그런데도 내가 왜 통역사가 되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마무리하도록 하자.
  나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의 일 때문에 가족이 함께 체코 슬로바키아의 수도 프라하에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5년 동안 러시아어로 가르치는 학교에 다녔다.
  4학년이 되던 해에 치보라는, 캐나다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를 둔 남자아이가 전학을 왔다. 그런데 이 아이가 아주 심한 장난꾸러기였다. 전학 온 첫날, 앞자리에 앉은 여자아이의 갈래머리를 잘라버려 그 아이가 엉엉 소리 내어 우는 바람에 수업이 엉망이 되었다. 다음 날에는 교실에 비치해둔 지구의에서 구를 떼어내어 그걸로 복도에서 축구를 했다.
  선생님들에게 치보는 몹쓸 전염병을 일으키는 역신疫神 같은 아이였고, 치보 아버지는 치보가 못된 장난을 칠 때마다 학교에 불려왔다. 그럴 때면 치보를 잡으려는 아버지와, 교무실의 펜이며 서류를 던지면서 도망치는 치보 사이에 항상 술래잡기 한판이 벌어졌다.
  분명 선생님들도 이런 치보를 미워했을 텐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치보는 결석 한 번 하지 않고 등교했다. 짓궂은 장난으로 수업을 망치는 것이 그 아이가 살아가는 유일한 보람인 것 같았다. 선생님들이 치보를 보는 순간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버리는 날이 계속되었다.
  그렇게 선생님들도 두 손 두 발 다 들었을 무렵, 한 사건이 일어났다. 수학 도형 시간이었는데, 치보가 교실에 갖고 온 거품기의 스위치를 켜 요란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을 옆자리의 여자아이에게 들이대며 장난을 쳤고, 여자아이는 꺅꺅 비명을 질러댔다. 그 난리를 치니 수업이 될 리 없었다.
  그러자 수업 중이던 갈리나 세묘노바라는 여선생님이 갑자기 치보를 향해 주먹을 쥐어 보이며 “더 이상 말썽 피우기만 해. 그 불룩한 감자 얼굴을 시머트리symmetry로 만들어줄 테니까” 하고 말했다.
  시머트리는 ‘대칭형’이라는 뜻이다. 그 말을 들은 순간 교실 안은 웃음바다가 됐다. 치보까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도 그럴 것이, 치보는 싸움을 한 뒤여서 오른쪽 볼이 보라색으로 불룩하게 부어 있었고, 우리는 바로 전 수업시간에 ‘시머트리’라는 단어를 갓 배운 터라 굉장히 신선한 말이었던 것이다. “오른쪽 볼하고 똑같이 되도록 왼쪽 볼에 한 방 먹여주겠다” 하는 틀에 박힌 어투가 아니라 매우 시적인 여운이었기 때문에 모두감탄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사건 이후 치보가 수업시간에만큼은 조용한 아이가 된 것이다. 이 사건은 ‘갈리나의 기적’으로 교내에서 유명해졌다. 단, 식당의 포크와 나이프가 가끔 몽땅 사라져 모두가 의아해할 때, 옥상에서 치보가 보란 듯이 그것들을 운동장 화단을 향해 던지며 악동의 체면은 유지하고 있어서 모두 묘하게 안심하기는 했지만.
왜 치보는 ‘시머트리 사건’ 이후 수업을 망치는 장난을 갑자기 그만두었을까? 갈리나 선생님의 말은 확실히 박력이 있었다. 선생님의 애인은 플라이급인지 밴텀급인지 되는 권투 선수였는데, 애인과 나란히 서면 선생님이 훨씬 어깨도 넓고 가슴도 두꺼웠다. 그렇게 몸도 말솜씨도 헤비급인 선생님이 치보에게 왜 더 빨리 그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걸까?

인간은 끊임없이 커뮤니케이션을 원한다

나는 오랫동안 그것에 대해 생각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 수수께끼가 풀렸다. 치보의 체험을 나의 체험에 끌어다 생각해보니알 수 있었다.
  나는 치보가 전학 오기 2년 전 프라하에 살기 시작했는데, 러시아어로 가르치는 학교로 처음 전학 갔을 때는 안데르센 동화의 인어공주와 다를 게 없었다. 매일 4시간에서 6시간 동안 아무것도 알아듣지 못하는 수업에 계속 출석해야 했기 때문이다. 정말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학교 아이들이 짓궂은 장난을 쳐도 선생님께이를 수도 없고, 아이들에게 따지거나 항의할 수도 없었다. 그건 정말 억울하다. 제일 억울하고도 서글픈 것은 반 아이들이 웃는데 같이 웃을 수 없을 때였다. 그런 상황이 너무 슬펐다.
  어른이라면 가방을 챙겨 집에라도 갈 수 있지만 아직 어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매일 비통한 각오로 학교를 다니는 수밖에 없었다. 겨우 아홉 살인 아이가 어깨 결림과 편두통에 시달릴 정도로 학교 가는 일은 고통이었다.
  치보 역시 전학 온 당시에는 나처럼 낯선 환경에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짓궂은 장난으로 수업시간을 때웠던 것은 결국 나의 어깨 결림이나 편두통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갈리나 선생님이 ‘시머트리’라고 한 순간에는 선생님의 말을 알아들었던 것이다. 소리 내어 웃었으니까. 같이 웃을 수 있다는 기쁨을 그 순간 치보도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치보는 더 이상 장난으로 수업시간을 때우는 행동을 멈춘 게 아닐까. 인간은 끊임없이 타인과의 커뮤니케이션을 갈구하는 동물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커뮤니케이션은 불완전한 행위라서 완벽한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기는 영원히 불가능하다. 그러나 인간은 항상 커뮤니케이션을 갈구하는 동물이라는 확신이 나에게는 있다. 아마 그런 확신이 내가 통역 일을 하는 이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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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치 2011-03-29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귀여운 마리 여사 ㅎㅎ
 

   
 

드물게 귀여운 ‘지적 앙탈’
전혀 팬시하지 않고도, 소녀적 감수성이 이리 살아남을 수 있다니. 세계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마침내 해석해내고 마는 그의 통찰은, 그 지점과 만나 그렇게 드물게 귀엽다. 내가 그의 생각들을 '지적 앙탈'이라 부르기로 결심한 이유다.
                                                                                                                       -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

 
   

  

 

 

네, 그분입니다. 알라디너가 사랑한 그녀, 마리 여사.
이번 책은 1998년부터 2005년까지 그녀가 강의한 내용입니다.
저도 아직 실물을 보지 못했으니 길게 설명드리긴 어렵습니다.
하지만 기쁜 소식 한 가지는 전해드리지요.
오늘,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에 걸쳐 하루에 한 꼭지씩 본문 내용을 공개합니다.
작년에 마리 여사의 책이 여럿 나와 지칠 법도 하지만, 기필코 기운내셔야 합니다.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그녀의 글은 한정되어 있고,
그마저도 몇 권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모두 기운냅시다. 

 

제1장. ‘사랑의 법칙’에서
 


암컷이 본류다

고민이 있으면 역시 책을 많이 읽게 된다. 이쪽 분야의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를 선택하는 현상은 지금 말한 여러 사회적 요인에 더해, 인류라는 종種이 절멸하지 않고 존속하기 위해, 즉 종을 유지하고 진화해가기 위해?진화란 환경에 적응해가는 것이므로 이것도 존속을 위해서는 필요하다? 부지런히 대대로 이어온 행위의 일환이 아닐까 하는 데 생각이 미쳤다.
  예를 들어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는 명작이 있다. 열네다섯 살쯤 됐을까, 로미오와 줄리엣은 사랑에 빠진다. 줄리엣은 로미오와 섹스를 하는데 특별히 아기를 갖고 싶은 것은 아니다. 로미오의 아이를 원해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섹스를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사랑을 정신적인 행동이나 마음의 움직임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생식행위와도 관계가 있다.
  지금은 섹스가 점점 쾌락으로 기울고 있다. 쾌락 쪽으로 관심이 기운다면 특별히 생식행위는 하지 않아도 될 텐데, 굳이 피임까지 하면서 섹스를 한다. 호모섹슈얼동성애자은 아이를 낳지 못하면서도 유사類似 생식행위를 한다. 그래서 생식이라는 인류 존속을 위한 행위와, 남녀간에 서로 끌리는 감정은 사실 그 뿌리가 같다.
  인간을 포함해 압도적으로 많은 생물들은 왜 수컷과 암컷이 있을까? 인류는 왜 남자와 여자가 존재할까? 만일 누구를 고를 필요 없이 아무하고나 섹스를 해도 마찬가지라면 한 개체 안에 남녀의 기능이 갖춰져 있어도 될 텐데. 그렇게 되면 누구는 퇴짜를 놓아서, 또 누구는 퇴짜를 맞아서 상처 받지 않아도 되고, 퇴짜 놓은 쪽도 스스로 잔혹한 인간이라고 자기혐오에 빠지는 일도 없을 텐데 말이다.
  실제로 생물계를 넓게 조망하면 섹스 없이도 생식하는 생물이 많다. 아메바처럼 세포 분열로 증식하는 생물도 있고, 찾아보면 많다. 또 수컷 없이 암컷 혼자 알을 낳고 알에서 다시 암컷이 태어나는 단성생식을 반복하는 생물도 있고, 정자의 개입 없이 난자가 분열해 개체로 성장하는 생물도 있다.
  하나의 개체가 환경 변화에 따라서 수컷이 되기도 하고 암컷이 되기도 하는 생물도 있다. 최근에는 인간의 줄기세포로 복제인간을 만드는 기술까지 개발되었다. 즉 정자 없이 난자만 있으면 자기와 닮은 개체를 만들어 종족을 유지하는 생식이나 번식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기본적으로는 다음 세대를 만들 수 있다.
  성서를 보면 성모 마리아는 추잡한 섹스 따위 하지 않고 동정童貞인 채로 신에게 수태 고지를 받아 예수를 잉태해 출산하는데, 사실은 이것이 오역이었다는 걸 알고 있는가? 맨 처음 헤브라이어로 쓰인 성서에는 단순히 ‘결혼하지 않은 여자’라는 의미였는데, 이것을 라틴어로 옮길 때 ‘처녀’라고 번역해버린 것이다.
  또 어떻게 신이 지금의 세상을 만들었는지에 대해 쓰여 있는 「창세기」 처음 부분을 보면, 신이 최초의 인간으로 아담을 만들고 아담의 갈비뼈(속설에 의하면 13번째 갈비뼈)로 이브를 만들었다고 나와 있다.
기독교 세계인 유럽 쪽 언어에서는 ‘인간’과 ‘남자’를 뜻하는 단어가 같은 경우가 많다. 영어도 그렇다. ‘man’은 ‘남자’라는 뜻과 함께 ‘인간’이라는 뜻도 갖고 있다. ‘woman’은 ‘man’이라는 단어에 비하면 왠지 불필요한 것이 붙어 있고, 그래서 인류의 지류支流처럼 생각된다.
  유럽 문명에서 자라다 보면 아무래도 남자가 본류고 여자가 지류구나 하는 느낌이 들지만, 순생물학적으로 보면 여자가 본류다. 암컷이 본류다. 인류도 여자가 본류다. 수컷 없이도 존속할 수 있다. 그래서 종種의 유지라는 생명 전략 자체에는 수컷이 필요 없다. 남자 없이도 종은 유지해나갈 수 있다.
 


수컷의 존재 이유

그럼 수컷은 왜 존재할까? 왜 남자가 있을까? 암컷만으로 생식이 이루어질 경우, 새끼는 암컷의 형질을 그대로 이어받는다. 완전히 복사가 되는 것이다. 복사기로 복사를 하면 길게 두 쪽 낸 참외처럼 꼭 닮은 것이 나오는데, 복사한 것을 복사하고, 또 복사한 것을 복사하고, 다시 그것을 복사하고, 그렇게 계속 복사하다 보면 어느 시점에서는 마모되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된다. 복제인간도 마찬가지다. 최초의 복제인간으로부터 복제인간을 만들고, 그것의 복제인간, 또 그 복제인간, 하는 식으로 복제해가면 유전자 정보의 많은 부분이 소모되어 더 이상 복제할 수 없거나 불완전한 복제가 된다.
수컷과 암컷, 두 가지 성性이 참가해 다음 세대를 만드는 생식에서는 암컷과 수컷의 유전자가 혼합된다. 그리하여 암컷의 복제도 아니고 수컷의 복제도 아닌 전혀 다른 형질의 2세가 생겨난다. 그래서 남자는 인류의 존속 자체를 위해서는 필요하지 않지만, 인류가 진화하고 변화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다. 퇴화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은 사람도 있지만 말이다.
 


남자는 샘플이다!

나는 젊었을 때 이 두 성性의 관계에 대해서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흥미를 가졌다. 1960년대 구舊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의 구성원인 아르메니아1922년 소련에 흡수되었다가 1991년 독립했다의 게오다캰 박사(이론 생물학자로 당시에는 아직 공학박사였다)가 ‘남자는 샘플’이라는 주장의 글을 잡지에 발표했다. 글을 읽은 순간 박사의 가설에 흥미가 생겨 그가 쓴 책들을 찾아 읽었다. 거의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가설이었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관심이 아주 많이 갔다. 박사의 가설은 이런 것이다.
  가령 물소 100마리를 키우는 목장이 있다고 하자. 여러분이 목장 주인이라면 수컷은 몇 마리, 암컷은 몇 마리를 키울 것인가? 우선 송아지가 많이 태어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암컷 99마리에 수컷 1마리로 해야 한다. 그러면 99마리의 송아지가 태어날 수 있다. 이것이 양적으로는 가장 많은 숫자다. 암컷의 수에 비례해 송아지가 태어나기 때문이다. 단, 수컷의 유전 형질은 한 종류뿐이니까 암컷에 의해 각기 다른 형질의 송아지가 태어난다. 99종류의 송아지 99마리. 암컷의 숫자와 같다.
  만일 태어나는 송아지의 다양성을 최대한 추구한다면 수컷 50마리에 암컷 50마리로 해야 한다. 50×50으로 2500종류의 송아지가 태어날 가능성이 있기는 한데, 물론 2500마리가 생기지는 않는다. 암컷의 수와 같은 50마리의 송아지가 태어난다. 이것은 1세대에 한해서다.
  그럼 형질을 우선하고 싶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목장 주인이 양만을 추구해서 계속 수컷은 한 마리만 키우면, 질병이 돌거나 천재지변이 일어날 경우 한 번에 싹 죽게 된다. 그래서 우수하고 강한 소를 만들어야 할 때 목장 주인은 수컷을 99마리로 늘리고 암컷은 1마리로 줄여야 한다. 그러면 수컷들 사이에서 경쟁이 심해진다. 자신의 유전 형질을 다음 세대에 전달할 수 있는 것은 99마리 가운데 단 한 마리뿐이기 때문이다.
 수컷들의 경쟁 못지않게 암컷의 안목도 예리해진다. 한 마리의 유전 형질밖에 얻을 수 없지만, 치열한 경쟁에서 이긴 수컷인 만큼 우수한 송아지가 생기는 것이다. 암컷에 의해 더 우수한 수컷이 선별되고, 그것으로 더 우수한 송아지가 생긴다는 계산이다.
  앞에서 남자를 ABC로 분류한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남자도 그런 식으로 여자를 분류할 거라고 생각한다. ABC나 ABCD 혹은 ABCDE 하는 식으로. 하지만 남자를 보는 여자의 눈이 더 까다롭다. 가끔 너그러운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대개는 매우 까다롭다.
  남자에 비해 여자가 이성을 보는 눈이 까다로운 이유는 뭘까? 출산의 고통을 겪으며 자식을 낳는 것도 여자고, 어느 정도까지 키워야 하는 것도 남자가 아닌 여자인 만큼 건강하고 강한 아이를 원하는 게 당연하다. 여자는 우수한 아이를 낳고 싶어한다. 그래서 상대를 고를 때 남자보다 더 질質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남자에 따라서 여자의 운명이 좌우되는 사회가 계속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회적 영향도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아무튼 암컷의 수가 많으면 다음 세대 역시 양적으로 증가하고, 반대로 수컷이 많으면 다음 세대의 질적 변화의 폭이 커진다. 수컷은 할 수만 있다면 많은 암컷을 상대해 다음 세대에 자신의 유전자를 이어받는 개체 수, 즉 양을 늘리려고 한다. 암컷은 이와는 반대로 될 수 있으면 우수하고 강한 수컷을 골라 상대하려고 한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다음 세대 만들기에 분업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수컷은 양을 추구하면서도 질을 맡는다. 변화의 담당자이자 질質의 담당자다. 암컷은 양을 맡으면서도 질을 추구한다. 실로 완벽한 분업이지 않은가.
  이 논리는 남자의 바람기를 합리화하는 근거가 될 만한데, 순수하게 생물학적으로 그렇다는 것뿐이지,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라서 꼭 이대로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근저에는 이러한 남녀의 역할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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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고 2011-03-25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조금 먼 곳에서 추천하고 가오. ^^ 내일 서점에 가서 마리 여사 책들 표지 구경이나 해야겠는 걸. ㅎㅎ

인문MD 바갈라딘 2011-03-28 13:22   좋아요 0 | URL
네, 아마 나머지 책들이 모두 출간되면 이전 표지들을 최근 표지에 맞춰서 세트로 판매할 수도 있을 듯.

최 여사 2011-03-25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ㅎㅎ 저도 사랑합니다, 그녀.
월요일도 화요일도 수요일도 찾아올게요. ^^

인문MD 바갈라딘 2011-03-28 13:22   좋아요 0 | URL
꼭 제때 올려야겠군요. 퇴근 전에는 올리겠습니다. 꾸벅.

룰루브이 2011-03-25 1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 꾸욱- 누르고 갑니다~^^

2011-03-26 12: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인문MD 바갈라딘 2011-03-28 13:22   좋아요 0 | URL
아, 잘 지내시죠? 인문학스터디가 별다른 뒷풀이가 없어서 따로 인사도 못 드렸네요. 고맙습니다.

금자 2011-03-27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 마리여사 책이 나왔군요! 두든반 새근반~ 서점으로 고고씽!

인문MD 바갈라딘 2011-03-28 13:23   좋아요 0 | URL
아, 알라딘도 있습니다. 잊지 마시길... ^^

순오기 2011-04-01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산책에서 보고 클릭했답니다~~~~
착실하게 읽어보렵니다.
카테고리가 '북 엠마고'군요.^^

인문MD 바갈라딘 2011-04-02 07:30   좋아요 0 | URL
아, '북 엠바고'입니다. 늘 본문이 길어 읽는 데 어려움이 있는데, 마리 여사의 글은 분량도 맞춤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