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기호, 일상 속의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를 예민하게 짚어내며 조근조근 자기 발언과 활동의 공간을 넓혀온 문화인류학자 혹은 사회학자(물론 중요한 구분은 아니다). '88만원 세대'와 '김예슬 선언' 이후 20대를 둘러싼 세대론이 넘쳐나는 요즘. 오랜 기간 지근거리에서 그들을 바라보며 함께 생활해온 그는, 남의 입을 빌리지 않고 20대의 생생한 목소리를 담아내며 공명의 가능성을 살핀다. 가을이 무르익는 10월 말 어느깨 "너흰 충분히 괜찮다"며 20대를, 우리를 응원하는 그의 목소리가 친근한 경상도 사투리에 실려 날아들었다.
                                                                         (인터뷰 진행 및 정리: 알라딘 인문MD 박태근)

 
 

그리하여 나는 인간이 된다? 

글 이외에는 뵙기 어려웠는데 이렇게 만나니 반갑습니다. 말씀이 빠르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녹취 작업에 난항이 예상되는데요. (웃음) 이번 책은 정치, 교육, 가족, 사랑, 소비, 열정… 우리가 마주하는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요. 각론으로 들어가서 차례대로 짚어가는 방식으로 진행해보겠습니다. 그간 저작을 돌아보면 멀게는 <닥쳐라, 세계화!>, 가깝게는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 <거꾸로 생각해 봐! 2>가 있는데요. 최근 두 권의 책에서 이번 책의 단초를 볼 수 있는데, 그간의 작업을 다른 말로 표현해보면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우리 일상에 얼마나 깊이 침투해서 삶을 파괴시키느냐’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일련의 관심이 20대에 가닿은 까닭이 무엇인지 궁금한데요.

굉장히 단순한 겁니다. 제가 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또 가끔 대안학교에서 청소년을 만나기 때문에 일상적으로 들을 수 있고 관찰할 수 있는 거죠. 이런 파트너십이 가장 중요해요. 짧게는 수 개월, 길게는 1,2년 이상 만나온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만난 이야기들인 거죠. 아마 제가 노인 분들과 만나는 상황이었다면 마찬가지로 그분들에 대해 글을 썼을 거예요.
  이유를 하나 더 꼽자면 교육과 성장에 대한 제 관심 때문이에요. 제 경험과도 관련이 있는데, 저는 전교협(전교조 전신)이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교육에 냉소하던 인간이었어요. 초등학교 2학년 때 선생님이 돈을 무척 밝히는 분이었는데 저희 집이 그 욕망을 채워줄 만큼 잘살지 못했거든요. 반장을 하면서도 이런 부분을 채워주지 못하니까 탄압이 심했죠.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하기도 했고요. 그런 과정에서 공부를 잘하면 건드리지 않는다는 걸 알아챈 거죠. 그러다가 중학교 2학년 때인가 전교조 해직 교사들이 쓴 <내가 두고 떠나온 아이들>이란 책을 만났는데, 제 인생의 전환점이라고 생각해요. 이런 교육, 교육을 통해 아이들에게 다가가고 세상을 바꾸는 일이 가능하다는 걸 알게 되었고, 교육에 대한 애정, 헌신, 열정을 갖게 되었어요.
  그리고 대학에 와서 조한혜정 선생님을 만나서 배움과 삶이 동떨어져 있지 않다는 깨달음, 삶을 언어화하는 게 배움이고 학문하는 거라는 가르침을 얻었죠. 그렇기 때문에 내가 선 자리에서 내가 만나는 사람들과 서로 배우면서 우리 사회를 성찰하는 게 제 삶의 중요한 지점이 된 거죠.

그렇게 만난 20대 친구들의 글을 인용하시면서 책을 구성하셨는데, 저는 읽으면서 두 가지 느낌이 있었어요. 우선 이 친구들이 무척 솔직하다는 거, 다른 말로 표현하면 자신을 정확하게 바라보고 있다고 할 수 있겠죠. 다른 하나는 ‘엄청 똑똑한데’라는 느낌이었는데, 아마 다른 분들도 비슷한 반응이 보일 듯한데요, 이런 반응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물론 글 잘 쓰는 친구들이 있죠, 그런데 소수고요. 사실 문맥에서 떼어놓고 글 자체만 보면 무척 투박하죠. 그런데 글에 힘이 있어요. 그 힘은 솔직함에서 나오거든요. 매끈하게 글을 쓰는 거랑 솔직하게 글을 쓰는 건 다른 문제 같아요. 이 친구들의 글은 수업하는 과정 내내 고군분투한 결과예요. 자기 삶을 언어화한다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절절하게 느끼며 쓴 이야기거든요. 저는 언어화했다는 말을 드러냈다는 말과 구분하는데, 후자는 전시하는 수준이지만 전자는 성찰이 전제된 개념이거든요. 이 힘이 단어나 문장, 문체 같은 형식을 압도했다고 생각해요.

 

초반에 ‘김예슬 선언’이 주요한 이야기로 등장하는데요. 한 친구가 김예슬을 인정하면 자신이 부정당하는 모순을 솔직하게 드러낸 부분이 기억에 남습니다. 386세대는 김예슬을 진정한 후배처럼 여기는데 반해 동세대들은 지지하면서도 뭔가 뒷맛이 개운치 않은 상황인데요, 현장에서 바라본 동세대 친구들의 이야기를 조금 더 듣고 싶습니다.

처음에 아이들에게 이 사건에 대해 글을 써보라고 했을 때, 대학제도나 대학교육에 대한 격렬한 비판이 나올 거라 예상했어요. 그런데 이런 이야기보다는 그 선언을 둘러싼 사회와 언론의 반응에 대해 더 많은 말을 하는 거예요. 사실 대부분의 친구들이 김예슬을 지지해요. 그런데 뭔가 찝찝한 거예요. 나는 소위 ‘좋은 대학’을 들어가지 못해서 사회에서 한 번 부정을 당했는데, 너는 좋은 대학을 들어간 데다 그걸 박차고 나온 용기까지 갖고 있는 상황인 거죠. 내가 초라해지는 거예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 사회가 이들에게 얼마나 많은 패배감을 안겨주었던가 하는 반성을 하게 되었어요. 여기에 대한 성찰은 전혀 없거든요. 학벌사회나 대학 서열 체제라는 담론은 있었지만, 이 체제 안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초라해졌는지에 대해서는 한 번도 제대로 들어보지 않았구나. 이런 상황에서 대학 서열 체제가 문제라는 이야기들이 이들에게 과연 얼마나 의미 있는 말이 될 수 있을까 생각을 하게 되었죠.
  책에도 썼듯이 김예슬 선언 마지막에 나오는 ‘그리하여 나는 인간이 된다’는 말 있잖아요. 여기에서 ‘인간’이라고 하는 게 뭔지 다시 물을 수밖에 없는 거예요. 서울에 가지 못하면, 서연고/서성한으로 분류되는 몇 개의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면 스스로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친구들에게는 또 한 번 인간이 되지 못하는 상황이 되는 거니까요. 우리가 이들의 이야기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는 거, 놀랄 정도로 없다는 거, 이게 앞으로 우리가 풀어가야 할 논의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회를 폭로하고 사람을 옹호하라!

본문 주제가 7개인데요, 저는 연속한 주제들을 둘씩 묶어서 읽었습니다. ‘정치 혹은 민주주의’와 ‘교육’, ‘가족’과 ‘사랑’, ‘소비’와 ‘돈’, 이런 식으로 말이죠. 질문도 이렇게 연결해서 드려볼까 합니다. 우선 ‘정치 혹은 민주주의’와 ‘교육’을 읽으면서 이 친구들이 무척 회의적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물론 선생님께서는 도피를 위한 무관심이나 무력감 하고는 다르다고 하셨지만 말이죠. 이 주제는 제도적 부분하고 문화-삶의 영역으로 구분해볼 수도 있을 텐데요. 이렇게 보면 문제를 조금 다른 시선에서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들의 삶은 제가 살던 시대보다는 훨씬 민주화되어 있어요. 특히 부모와 자식 사이의 관계가 과거처럼 권위적이지 않고 친구처럼 지내는 경우도 많거든요. 이런 부분에서 보면 생활 속의 민주주의는 상당히 긍정적으로 변화했다고 볼 수 있죠. 그런데 문제는 문화로서의 민주화가 냉소를 극복하는 방식이 아니라, 특히 교육의 영역에서는 엄청나게 냉소적인 양상으로 나타난다는 거예요. 예를 들면 체벌을 하는 교사가 줄어든 건 분명하지만, 이들의 태도가 ‘그래, 때리지 말라고? 알았어, 안 때리지 뭐. 얼마나 잘 크는지 두고 보겠어’ 하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것 같거든요.
  민주화라는 게 관계를 평등하고 동등하게 만들면서 서로가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방향으로 가는 게 아니라 관계 자체를 냉소적으로 바라보게 만든다는 거죠. 관계 속에서 평등의 실천을 모색하는 게 아니라 관계 자체를 맺지 않으려는 태도거든요. 학교를 보면 선생들은 공부 못하는 친구들을 유령 취급하면서 사고만 치지 말라고 하고, 아이들도 선생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상황이 되는 거죠. 이게 민주화인가요? 우리가 말하는 생활 속의 민주화가 이런 식으로 변질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 비폭력 혹은 반폭력조차도 아이들에게는 이런 식으로 비춰지는 게 아닌가 싶어요. 맞은 건 오히려 언어화하기가 쉬워요. 그런데 이건 아예 언어 밖에 놓인 존재로 취급받는 상황이니까 언어화할 수도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냉소할 수밖에 없는 거죠.

다음 주제는 ‘가족’과 ‘사랑’인데요. 자본이 안정적인 기반을 마련해주지 못할 때, 와르르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는 현실이 함께 보였습니다. 우리가 상상해온 가족, 사랑은 이런 게 아닌데 말이죠. 세대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로 보이는데요. 

저도 사랑이 굉장히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했는데, 이번 책을 쓰면서 사고의 역전을 경험했어요. 예를 들면 ‘등가교환’, 이거 너무하다고 생각했거든요. 겉으로 보면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내면을 보면 합리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를 지속시키기 위해서 이들이 고군분투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거예요. 이 바닥에는 곤궁함, 가난이라는 게 있거든요. 이 친구들은 정말 가난해요, 예전 세대들이 ‘사랑만 있으면 되지 무슨 돈이 필요해’라고 하는 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야기거든요. 서울에서 원주로 통학하는 친구들은 버스비가 30만원이에요. 휴대폰, 인터넷. 이게 사치품인가요? 이런 필수품을 유지하는 데에도 한 달에 10만원이 들어가거든요. 강남의 중산층이 아닌 다음에야 아이들이 가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에요. 이걸 서로 배려하는 방식이 ‘등가교환’이에요. 그런데 이걸 ‘합리적’이라고 말하는 건 도대체 누구의 시각인지 되물어야 한다는 거죠. 그야말로 정말 가진 자의 시각인 거죠. 사람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 거예요, 이걸 들어야 실체가 보이는 건데 말이죠.
  지금 청춘들이 부담해야 하는 비용은 임계치를 넘어버렸어요, 등록금은 이미 서민들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거든요. 그리고 우리가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기본적으로 장착해야 할 부분이 있잖아요. 휴대폰, 인터넷, 이런 것들이요. 그리고 최소한의 문화자본. 이런 걸 추구하는 거 자체가 임계치를 넘어선 상황이라는 거예요. 이건 이전 세대들이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상황이거든요. 


최근 프랑스 학생들의 시위도 비슷한 이유에서 벌어진 거잖아요. 언론에서는 쥐 죽은 듯이 체제에 순응한다며 한국의 청춘들에게 각성을 요구하기도 했는데요.

저는 다르게 생각해요. 세계화는 프랑스 안에 케냐가 만들어지고, 케냐 안에 프랑스가 만들어지는 상황이거든요. 프리드먼은 좋은 의미에서 세계는 평평하다고 했지만, 반대의 의미에서도 세상은 정말 평평해졌어요. 그러니까 그들에게 그러한 것은 우리에게도 그러하고, 우리에게 이러한 것은 그들에게도 이러하거든요. 양쪽에서 똑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거예요. 이걸 이해하지 못하면서 프랑스 젊은이들, 프랑스 파업 등을 말하면서 프랑스를 낭만화하는 건 세계화의 구조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태도예요.
  저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 조건이 무엇인가 살펴봐야 해요. 프랑스는 고등학생들이 정치, 파업을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나라예요. 우리는 그게 없는 나라고요. 책임을 아이들에게 떠넘기는 게 아니라, 우리 아이들이 왜 들고 일어나지 않는가를 가지고 우리 사회의 진실을 폭로해야 하는 거죠. 우리 사회가 그들을 어떻게 통치하고 있는지를 말이죠. 저는 사회과학과 좌파의 목적은 사회를 폭로하고 사람을 옹호하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우리나라는 반대로 사회를 옹호하고 사람을 폭로하고 있거든요. 저는 이 부분이 진보와 좌파가 가장 보수적이고 우파적인 태도를 보이는 지점이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데모를 하다가 도망쳤다, 이런 경우에도 그렇게 도망치게 만들 정도로 끔찍한 통치의 폭력성을 폭로해야지 그 사람을 비겁하다고 몰아세울 문제는 아니거든요. 

    

프랑스 파업을 다루는 모습을 보면서 사회학자로서 굉장히 분개했어요. 한편으로는 프랑스라는 나라를 낭만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의 시민, 학생, 젊은이를 폭로하고 있거든요. 이러면서 무엇이 감추어지는가 하면 바로 한국사회의 폭력성이거든요. 그리고 동시에 프랑스 사회의 폭력성도 감추어지는 거죠.
  이 책을 내고 인터뷰를 하면서 왜 청춘들을 옹호만 하느냐, 이들에게도 따끔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요. 이거야말로 저와 인연이 없는 발언이에요. 저는 아이들을 옹호하기 위해 이 책을 쓴 게 아니라 아이들과 함께 우리 사회를 폭로하고 있는 거예요. 이 친구들의 세대를 말하는 게 아니라 이들과 함께 우리 사회를 폭로하는 게 제 위치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도 끊임없이 20대에 대한 이야기로 읽고 있어요. 신기할 정도로 말이죠, 무슨 도돌이표처럼. (웃음)
  

길들여지지 않은 열정

다음 주제 ‘소비’와 ‘돈’은 앞선 주제들과는 조금 다르게 보였습니다. 이 세대들은 이런 가치가 만연한 사회에서 평생을 살아온 셈이니까요. 차례를 보고 이 친구들이야말로 이 주제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세대겠구나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글을 읽으면서는 이 친구들이 정말 괴롭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왜냐하면 이 논리를 잘 알고 있는데도 벗어날 수 없고, 이용도 해야 하는 상황이잖아요. 가슴이 아팠어요.

그렇죠, 아이들도 돈 쓰는 거 좋아하죠. 사실 안 즐거운 사람이 얼마나 있겠어요. 말씀처럼 아이들이 돈의 정체에 대해 잘 알고 있죠. 그런데 뒤집어서 이런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어요. ‘요즘 아이들이 돈 귀한 줄 모른다, 막 쓴다.’ 이런 이야기를 할 때 과연 그 아이들이 누구냐 하는 거죠. 돈 아까운 줄 모르고 펑펑 쓸 수 있는 그들은 누구냐 하는 게 아까 말씀드린 사회의 폭로인 건데, 이게 아니라 뭉뚱그려서 소비세대라고 이름붙이는 건 하나마나한 이야기거든요. 이 책에는 사는 집 아이들 이야기가 간단하게만 언급되는데, 들여다보면 잘 사는 집 아이들 이야기가 더 재미나죠. 어렸을 때부터 돈 교육을 어떻게 시키는가 하는 부분들이 있거든요. 이렇게 자란 아이들은 ‘돈이 흘러간다’는 걸 알게 돼요. 바꿔 말하면 돈이 자본이라는 걸 알게 된다는 거죠. 그런데 이 책에서 바라본 아이들은 돈의 실체를 깨닫는 거예요, 노동을 해서 돈을 벌어 써야 하는데 이건 부모가 주는 용돈과는 무게가 다르잖아요. 돈을 경험하는 두 가지 경로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거죠. 그런데 계급 좋아하는 좌파들이 왜 이 문제를 이런 시각으로 보지 않는지 모르겠어요.
  혜교라는 친구는 이번 방학 내내 돈을 벌어서 중국 여행에 다 썼어요. 이걸 어른들이 보면 미쳤다고 하겠죠. 물론 이 친구는 삶의 방향을 바꾸기 위해 여행을 다녀왔지만, 많은 경우 유럽 배낭여행은 일종의 필수 문화자본이 되었거든요. 이 사회에서 살아남는 데에 이게 얼마나 막강하게 작동하는지 혹은 이 사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 경제자본의 시각으로만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돈을 낭비하는 걸로, 허투루 쓰는 걸로 보이는 거죠.

2부의 마지막 주제가 ‘열정’인데, 이 단어는 구조나 대상에 대한 태도라기보다는 그 자체로 움직인다는 느낌을 줍니다. 선생님께서는 열정마저도 끊임없이 착취해가는 구조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이런 착취마저도 능동적으로 바라보는 청춘들의 시선이 있잖아요. 그런데 그들의 에너지가 구조의 변화라는 현실적인 지점에 부딪혔을 때 상황을 바꿔내거나 견뎌낼 수 있을까 하는 우려가 있거든요.

자본주의, 신자유주의가 괴물 같은 체제이긴 하지만, 그 자체를 괴물로 만들어버리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무슨 말이냐 하면, 아이들은 착취당한다는 걸 잘 알면서도 이것이 자아실현의 한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상황이거든요. 저는 과연 이 체제가 이들의 열정을 모두 포획할 수 있을지 의문이에요. 이 사회에 편입되려는 ‘순응의 에너지’를 체제가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해요. 이 체제는 이미 노동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 체제로 변환을 해버렸기 때문이죠. 바우만의 표현대로 노동력을 ‘쓰레기’로 만들어버린 상황이거든요. 과거처럼 체제 밖으로 탈주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무너지는 게 아니라 그 안으로 들어가려는 사람이 많을수록 폭파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해요. 그 이후의 모습이 자본주의의 또 다른 모습일지 아닐지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 체제는 어쨌든 순응의 힘을 담아내지 못한다는 거예요. 대신 구경꾼으로 만들어버리는 거죠. ‘슈퍼스타K’가 비슷한 현상이에요. 한두 명의 성공담을 보여주고는, 다른 이들이 대리만족을 느끼면서 박수를 치게 하는 상황 말이죠. 그래서 신자유주의보다 무서운 게 구경꾼을 만드는 사회라고 생각해요. 물론 이 둘은 같이 가고 있지만요. 구경꾼이 되려는 친구들이 많아지는 것보다 내가 착취를 당하지만 나는 여기에 열정을 쏟고 싶다고 하는 친구들이 많아지는 게 오히려 이 사회를 폭파시킬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그들’은 이 친구들이 열정을 쏟아 붓길 바라지 않거든요. 적당히 열정을 쏟아 붓다가 탈락하면 구경꾼이 돼주기를 바라는데, 아이들이 구경꾼이 되기 싫다고 노력하면 할수록 이 체제는 더 힘들어지는 거잖아요.
  최근 유명환 딸 사건 때 정부가 급하게 수습에 나선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어요. 그만큼 편입되길 바라는 친구들이 많은 거니까요. 민란 수준이었잖아요. 그래서 저는 아이들이 더 많은 열정을 쏟아붓는 게 전혀 나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오히려 착취를 감수하면서도 열정을 쏟아부으려고 하는 태도가 이 체제를 폭파시킬 거라고 생각해요. 이걸 길들여졌다고만 바라보는 사람들은 신자유주의를 너무 괴물화해서, 신자유주의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 걸 보지 못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결국, 각자 서 있는 자리에 대한 이야기 

마지막으로 ‘교실’ 이야기를 해야겠는데요. 한편으로는 은유적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정말 우리가 겪어온 공간으로도 보이는데, 은유로 읽게 되면 뜬구름 잡는 소리로 끝나버린다고 오해할 수도 있을 법하거든요. ‘교실이 불가능한 사회에서 여전히 교실을 꿈꾸는’ 선생님의 말씀을 정리해주실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저는 사회과학에서 ‘그리하여 결론이 뭐냐’는 것만큼 허망한 물음이 없다고 생각해요. 사회과학의 결론은 네 자리가 어디냐, 거기에서 누구를 만나고 있느냐, 그들과 함께 무엇을 할 것이냐 하는 거예요. ‘여기가 로두스다, 여기서부터 뛰어라’는 말과 같은 의미거든요. 많은 사람들이 ‘마지막에 왜 이러냐’ 하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저로서는 이렇게 쓸 수밖에 없는 거예요. 앞에 나온 이야기의 대부분이 만들어진 장소가 그곳이기 때문이죠. 모든 이야기가 상영된 극장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건 앞에 나온 이야기에 대한 배신인 거예요.
  대학은 죽었어요, 그런데 사회도 죽었거든요, 역사도 죽었고요. 어떻게 보면 다 죽은 거죠, 그런데 그 폐허 속에 조그만 틈들, 빈틈들이 남아 있거든요. 우리는 여기에서 뭘 하고 있는가, 많은 경우 한국의 좌파나 진보들이 자기가 서 있는 자리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으면서 사회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버리는 게 문제라는 거예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나는 어디에 있고, 누구와 있고, 이들과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바로 윤리고 정치의 출발이거든요. 그런데 사회를 옹호하고 사람을 폭로하다 보니까 마지막에 가서 윤리가 발생하지 않는 거예요. 자기는 사회의 뒤편에 숨는 거죠. 이런 부분에서 생소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저는 지금과 다르게, 거꾸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결론이 뭐냐고 묻거나 낯설게 받아들일 수도 있어요. 사회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기 전에, 그러니까 저는 지금 필요한 것은 사회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는 게 아니라 이와는 다르게, 거꾸로, 각자가 서 있는 자리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이제 알라딘 인터뷰의 공식 질문 하나만 남았는데요. 인터뷰를 마치기 전에 한 가지만 더 여쭤보겠습니다. 책의 내용과는 크게 상관이 없지만, 여러 분들과 함께 듣고 싶은 이야기라서 질문을 드리는데요.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조한혜정 선생님이나 지근거리에 계시는 김찬호 선생님에게는 ‘문화인류학’이라는 이름표가 붙잖아요. 두 분 선생님도 그렇고 선생님의 활동도 그렇고 보통 ‘인류학’하면 떠올리는 이미지와 달리 끊임없이 지금, 여기의 문제를 다루시잖아요. 물론 이 자체가 인류학이라는 학문에 대한 오해와 편견일 수 있지만요. 한 번쯤 설명해주시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한국의 주류 인류학자들은 저란 존재를 알지도 못하겠거니와 안다고 해도 저를 인류학자라고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 (웃음) 맞는 말이기도 한데, 제 학문적 기반은 현대문화연구에 훨씬 가깝죠. 그런데 방법론으로는 조한혜정 선생님께 배우기도 했고, 인류학의 방법들을 많이 쓰죠. 의도적으로 문화연구라기보다는 인류학이라고 이야기하는 부분도 있어요. 지금 우리 사회가 점점 종족화되어가는 현상을 보이는데, 저는 이걸 ‘신종족주의’라고 표현을 하는데요. 무슨 말이냐 하면 이전에는 보편에 대한 지향이 강했잖아요, 문명화되어야 한다는 거 말이죠. 그런데 이제는 보편을 주장하지 않아요, 특수를 주장하거든요. 특수할 권리를 주장하는 경우가 훨씬 많아요. 그래서 평등에 대한 요구보다는 관용에 대한 요구를 하는 경우가 많아진 거죠. 그건 ‘너희와 상관없이 우리끼리 이렇게 살겠다’라는 문화적 특수주의를 강조하는 거예요. 문화적 상대주의를 굉장히 보수적인 방식으로 사용해서, 자신의 종족을 본질화하는 상황이거든요. 새로운 종족의 출현이죠. 그래서 저는 그간 종족을 연구해온 인류학이 이 새로운 종족을 설명할 때도 유용하다고 생각해요.

미리 말씀드렸듯이 마지막 질문은 알라딘 인터뷰의 공식 질문, 추천해주고 싶은 책입니다.

제가 소개해드리고 싶은 책은 대개 ‘불운’한 책들인데요. 우선 올리비에 라작이 쓴 <텔레비전과 동물원>을 추천하고 싶어요. 리얼리티 쇼 부분은 별로였는데 동물원 부분은 정말 좋아요. 그리고 <폐인과 동인녀의 정신분석>이란 책이 있는데 절판되었죠. 일본 외톨이 문제를 다뤘는데 저자가 임상의라 상당히 쉽게 풀어썼어요. 다른 분야에서는 논형에서 나온 ‘일본근대 스펙트럼’ 시리즈를 많이 읽으면 좋겠어요. 운동회, 박람회, 백화점 같은 작은 이야기로 전체를 조망하는 작업이거든요. 우리 학문 풍토에서는 대개 거시적인 조망을 내세워야 학문 세계의 시민권을 획득할 수가 있는데, 그렇지 않고도 탄탄하게 설명해낼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책이라고 생각해요. 장서용으로는 기 드보르 선생의 <스펙타클의 사회>를 권하고 싶어요. (웃음) 현존하는 학자 가운데 제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바우만이에요. 당대를 깊이 있게 바라보면서 쉽게 풀어내거든요. 바우만의 책들도 함께 추천하고 싶네요.

 

 

 

 

 

 

 

오늘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조만간 강연회(http://blog.aladin.co.kr/culture/4267014)에서 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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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으로 한국에 처음 소개된 피에르 바야르, 여름언덕에서 '패러독스' 시리즈로 그의 책을 꾸준히 소개하는 덕분에 텍스트 읽기의 새로운 맛과 멋을 즐겁게 마주하는 요즘입니다. 올해에도 <예상 표절>과 <셜록 홈즈가 틀렸다> 두 권이 소개되었고, <망친 작품을 어떻게 개선하는가>와 추리비평 3부작의 마지막 작품 <햄릿>도 멀지 않은 때에 출간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무엇보다 반가운 소식은 내년 봄 그가 한국에 온다는 거죠. 강연과 인터뷰가 이어질 텐데 가능하면 알라딘 독자분들과의 자리도 마련해보겠습니다. 

며칠 전 한국일보에 인터뷰 기사가 실렸는데(http://news.hankooki.com/ArticleView/ArticleView.php?url=culture/201010/h2010101721061486330.htm&ver=v002), 지면의 한계로 인터뷰 전문이 실리지 못했습니다. 피에르 바야르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집중되는 알라딘에서 이 사태를 간과할 수 없어서 출판사의 도움을 얻어 이메일 인터뷰 전문을 공개합니다. 인터뷰 진행과 번역은 <예상 표절>과 <셜록 홈즈가 틀렸다>의 번역자 백선희 선생님께서 맡아주셨습니다.

 

추리비평이란 무엇인가? 

<셜록 홈즈가 틀렸다>와 <누가 로저 애크로이드를 죽였는가?>로 이야기를 시작해보겠습니다. 두 책의 장르를 "추리비평"이라고 명명하셨습니다. 추리비평은 단순히 '추리소설을 대상으로 한 문학비평' 이상의 의미를 지닌 듯합니다. 추리비평을 어떻게 정의하고 계십니까?

사실 추리비평에 해당하는 작품은 <누가 로저 애크로이드를 죽였는가?>, <햄릿에 대한 수사>, <셜록 홈즈가 틀렸다>입니다. "영문학 3부작"이라고 부를 수 있을 텐데, 이 책들은 한편으로는 추리과정을 좇아서 책의 마지막에 그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문학에 관한 이론적 성찰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니 두 가지 독서가 가능하다고 할 수 있지요. 독자들은 책 한 권 값에 두 권을 얻는 셈입니다!
  추리의 관점에서 추리비평의 목표는 추리소설의 저자들과 그들이 무대에 등장시키는 탐정들이 범인을 지목할 때 종종 오류를 범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있습니다. 이론적 성찰의 관점에서는 매번 다른 문제에 관해 숙고하는데, <누가 로저 애크로이드를 죽였는가?>에서는 '해석의 망상'을, <햄릿에 대한 수사>에서는 '귀머거리들의 대화'를, <셜록 홈즈가 틀렸다>에서는 문학작품 속 인물들에 관해 성찰하고 있습니다. 추리와 이론적 성찰 가운데 한쪽만 읽고 싶은 독자는 관심 없는 장을 "건너뛰어도" 좋지요.

추리비평은 모든 추리소설에 적용이 가능한 건가요? 아니면 어떤 특성을 지닌 추리소설만 추리비평의 대상이 될 수 있는지요?

추리소설 대부분에 적용이 가능합니다. 대개의 추리소설은 수사가 치밀하지 못하고, 진짜 범인들은 꽤나 지능적이어서 법망을 벗어나곤 하기 때문이지요. 추리비평은 갖가지 미스터리(도난이나 실종 등)에 관해 수사하는 것을 임무로 삼습니다. 또한 인물들이 그들을 만들어낸 저자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나 책 속에서 자율적인 삶을 산다는 원칙에서 출발합니다. 그런데 인물들은 살인만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마찬가지로 평온하게 살기도 하지요. 종종 작가가 알지 못하는 비밀을 간직한 채 말입니다. 그들의 비밀스런 삶을 밝혀내는 것이 추리비평의 몫이지요.

3부작에서 애거서 크리스티의 <로저 애크로이드 살인사건>, 셰익스피어의 <햄릿>, 코난 도일의 <바스커빌가의 개>와는 다른 인물들을 살인범으로 지목하셨는데요. 그것이 저자들의 의도라고는 생각하시지 않는지요? 다시 말해 이 저자들이 진짜 범인들을 감추고 독자가 책을 '제대로' 읽어내어 진짜 범인을 찾아내주길 기다린다고 생각할 수는 없을까요?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선생님께서 작품에서 찾아낸 그 정교한 플롯을 훨씬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런 가정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이 작가들이 말하고 있는 내용은 아니지요! 중요한 건 진실을 바로잡는 것입니다. 작가에 의해 범인으로 잘못 내몰린 이 인물들의 후손들이 조상이 범했다고 간주되는 죄의 중압감에 눌린 채 살아가는 걸 상상해보세요. 저는 이들을 위해 싸우고 있는 겁니다.
  

 

 

이론적 픽션이란 무엇인가?

독서에 대한 충격적이고 전복적인 생각을 담고 있는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은 선생님의 저작 가운데 가장 유명한 책이고 한국에서도 출간 이후 큰 관심을 모았습니다. 문학교수로서 정독하지 않은 책들을 거론하며 논의를 펼친다는 것이 상당한 부담이 됐을 법도 한데요.

저의 모든 책이 - "추리비평"과 관련된 책만이 아니라 - 제가 "이론적 픽션"이라고 부르는 것, 다시 말해 픽션과 이론 중간쯤에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이 책들에서 "나"라고 얘기되는 인물은 제가 아니라 한 사람의 화자입니다. 픽션의 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 구분을 하는 건 매우 중요합니다. 인문학 서적에서 화자는 으레 저자와 동일시됩니다. 그런데 제 책에서 화자는 저의 일부분일 뿐입니다. 이를테면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의 첫 페이지에서 화자는 책 읽는 걸 좋아하지 않으며 읽지 않은 책에 대해 강의를 한다고 말하지만, 어떻게 제가 그러리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래도 사실이라고 보기 힘들지 않겠습니까? 대충 훑어봐도 필요한 그 많은 예들을 찾기 위해 충분한 독서를 한 사람이 쓴 책임을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론적 픽션의 이점은 소설가가 작중 인물들을 다룰 때처럼 여러 이론들을 온전히 제 것으로 삼지 않으면서 그 이론들에 대해 성찰할 수 있게 한다는 데 있습니다. 바로 이 점이 유동적인 텍스트를, 그 자체가 문학작품으로서 열린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텍스트를 창출해내지요. 어쨌든 제가 바라는 바는 그렇습니다.

책 제목에서도 느껴지듯이 이 책에서는 유머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유머에 어떤 자리를 부여하시는지요?

제 책에서 유머는 아주 중요합니다. 심지어 제 글의 첫째 목표라고 할 수도 있지요. 많은 인문학 서적에 유머가 있긴 하지만, 으뜸가는 자리를 차지하지는 않지요. 그렇지만 제 글에서는 유머가 중심에 있습니다. 유머 - 제 시도가 제대로 통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서질 않습니다만! - 는 인문학의 경우 대개 딱딱하기 마련인 이론적 진술 속에 일종의 '틈'을 만들지요. 이 '틈'이 조금 전에 픽션에 대해 얘기한 것과 같은 의미에서 텍스트를 한결 유동적으로 만들어 성찰하기 좋게 만들지요. 그런가 하면 인문학 서적은 진지하다는 생각에 길들어 있는 많은 독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들기도 하지요.

선생님께선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개념을 빌려 모든 독자에게 책이란 '화면 책들(livres-écrans)'이며 독자는 "책들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상황이 만들어낸 그 대체물들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것"(73쪽)이라고 규정하셨습니다. 독서란 결국 주관적 행위일 수밖에 없다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책은 인간에게 어떤 메시지를 의미의 훼손 없이 전달하려는 의지가 담긴 매체이기도 합니다. 글을 써서 자기를 이해시키기란 불가능하다고, 씌어진 내용을 있는 그대로 읽기란 불가능하다고 받아들여야 할까요?

불가능하다고 해야 할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어쨌든 자신을 이해시키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이 책을 쓰기 시작할 무렵 제 흥미를 끌었던 건 두 사람이 읽지 않은 책에 대해 얘기를 나누는 부조리한 상황이었습니다. 부조리한 상황이지만 사실은 자주 일어나는 일이고, 인간의 의사소통을 그대로 보여주는 상황입니다.
  저는 <햄릿에 대한 수사>에서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대한 해석들을 주의 깊게 비교 분석하고 나서, 같은 텍스트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믿는 두 비평가가 사실은 같은 책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그런데 이 비평가들은 적어도 해당 작품을 읽기는 했지요. 논의하는 텍스트를 읽지 않은 비평가들 사이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텍스트에 개입하라!

<예상 표절>은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이 그렇듯 제목부터 강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킵니다. 표절은 시간상 선행하는 텍스트에 대해 이뤄진다는 통념을 여지없이 뒤집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해한 바로 '예상 표절'은 '예술적 혁신의 선취', 즉 앞으로 일어날 예술적 혁신을 미리 간파해 자기 작품에 반영한다는 의미로 이해되는데, 이는 비난의 대상이긴커녕 예술가들의 지상목표가 아닐까요?

제 책에 제시된 사례에는 그런 '선취'만 있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표절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 문제의 작가들은 후대 작가들에게서 예술적 요소들을 명백하게 차용하고 있지요. 그건 올바른 일이 아닙니다. 추리비평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저는 정의를 실현해서 각자에게 제 몫을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좀더 진지하게 말하자면, 비선형적 방식으로 문학과 예술의 역사를 생각해보는 건 흥미로운 일입니다. 마치 위대한 창작자들이 미래의 예술적 주제와 형태들이 어떨지 예감이라도 한 것처럼 어떤 주제나 형태가 순환적인 방식으로 되풀이되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오늘날 작가들에게 "미래의 발명에 가담할 수 있는 미학적 요소를 과거로 찾아나설 것"(118쪽)을 조언하고 있습니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역시 어떤 면에서 창작을 활성화할 수 있는 독서방법을 제시하는 책으로 읽힙니다. 책(독서)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계신 것은 결국 뛰어난 창작법을 확립하기 위해서인지요?

제가 제 책에서 펼치고 있는 비평의 행보 전체가 곧 창작의 행보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독자에게 텍스트 앞에서 가만히 있지 말고 텍스트에 개입하도록 촉구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독자는 의식하지 못한 채 이미 개입하고 있지요.
  게다가 <예상 표절>이 허구(픽션)의 화자에 의해, 다시 말해 한 등장인물에 의해 얘기되고 있다는 점도 잊지 마십시오. 저라면 몇 가지 점에서는 화자보다 훨씬 신중한 태도를 보였을 겁니다. 하지만 이 화자는 책에 대해 매우 창의적인 태도를 보이며 아주 멀리까지 나아갑니다. 거의 책들을 다시 쓰라고 제안하지 않습니까.

그동안 많은 책을 내셨는데 선생님의 관심사를 기준으로 그간의 저작들은 어떻게 분류될 수 있을까요? 아울러 최근에 새 책을 출간하신 걸로 압니다. 어떤 이야기일지 궁금한데요.

제 책들은 모두 "개입주의 비평"이라고 불릴 만한 것에 속합니다. 다시 말해 저는 텍스트들 앞에서 가만히 있지 않고 개입해서 텍스트들을 바꾸거나 전통적으로 이루어진 독서를 바꾸지요.
  이번에 출간된 <작품의 작가가 바뀐다면?>에서도 역시 픽션의 이름으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작품이 알려진 작가가 아니라 다른 작가에 의해 씌어졌다고 상상해보자고 제안합니다. 이를테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톨스토이가 썼다고 상상하면 텍스트가 전혀 달라 보이고, 눈에 띄지 않았을 여러 측면들에 관심을 갖게 되는 거죠. 또한 학문적 탐구에 새로운 길을 열어준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카뮈가 쓴 <이방인>에 대한 연구는 이미 너무도 많지만, 카프카가 쓴 <이방인>에 대한 연구는 훨씬 적을 것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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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랩 2010-10-20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리비평이라...몰랐던 분야인데 추리소설과는 또 다른 맛이 있을 것 같네요.^^ 앞으로 텍스트에 개입하는 독자가 되어 매의 눈으로 날카롭게 책을 읽어야겠어요~ㅎㅎㅎ
 

 

9월 3일 오후 4시 반, 여름 날씨라고 하기엔 바람이 심심찮게 불고 가을이라 하기엔 여전히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당기는 긴 햇살을 맞으며 약속 장소로 걸어가는 길. 봄날인양 원피스 자락을 하늘거리는 ‘작가 목수정’을 만났다. 알라딘 인문학스터디 강의가 6월 3일이었으니 정확히 세 달만의 만남, 강의에서 들려준 ‘야성의 사랑학’은 그 사이 <야성의 사랑학>으로 무르익었고 그는 한국에서 파리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전작 <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맛속까지 정치적인>으로 우리가 목수정을 발견했다면 이번 책은 그가 발견한 우리의 스산한 풍경이지 않을까. ‘야성의 사랑학’이 어떻게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지 그에게 물었다. 
                                                                        (인터뷰 진행 및 정리: 알라딘 인문MD 박태근)

  

 

(이 인터뷰는 책이 출간되기 전에 진행한 ‘사전 인터뷰’이며, 진행자는 원고의 절반 정도를 미리 읽고 진행했다. 알라딘과 그의 첫 번째 인터뷰는 다음 링크에서 볼 수 있다. http://www.aladin.co.kr/author/wauthor_interview.aspx?AuthorSearch=@827060)

  


우리 시대의 ‘사랑학 개론’을 시작하다

첫 질문은 편집자께 드리겠습니다. 지난 목수정 선생님과 알라딘의 인터뷰에서 이번 책의 단초를 보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부분에서 생각의 고리를 잡아 선생님을 만났는지 궁금한데요.

인터뷰 말미에 이런 질문이 있었어요. “요즘 많은 사람들이 우울증 같은 사회적 질병을 앓고 있는데 이들에게 어떤 말을 해주겠느냐”, 선생님께서는 “마음껏 달리면서 당신 속에 있는 야성과 만나라, 당신의 야성이 해답을 줄 거”라고 말씀하셨죠. 흔한 자기계발서나 심리치유서에서는 만날 수 없는 대답이었어요. 그리고 ‘사랑학’에 대한 책을 써보고 싶다고 말씀하셨거든요. 이런 분이라면 임기웅변 같은 사랑의 잔기술이 아니라 삶과 세상을 바꿔낼 만한 제대로 된 사랑의 기술을 말해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고, 이야기가 시작된 거죠.

선생님께서도 지난 인터뷰에서 그런 주제에 대해 공부를 해야겠다고 다짐을 하셨는데요. 이런 제안을 받고 바로 쓸 수 있겠다는 확신을 가지셨나요?

출판사로부터 제안을 받은 게 작년 3월인데 5월부터 집필을 시작했어요. 다음 책에 대한 고민이 많았는데 그 제안이 불을 당겨준 셈이죠. 사실 문화정책에 대한 책과 사랑학에 대한 생각을 구체화시키는 방향 두 가지 가능성이 있었거든요. 주변에서도 많은 이야기가 있었는데 특히 첫 책에 추천사를 써주신 박재동 선생님께서 직접 전화까지 주시며 재촉을 하셨어요. 선생님도 그 나이에 가장 결핍된 부분, 가장 아쉬운 부분이 “어떻게 사랑하는가”의 문제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삶에서 가장 필요한 게 이 부분인데 우리는 어디서도 배우지 못하고 탐구할 자유도 얻지 못한 채 살아왔다는 거죠. 하루아침에 할 수 없는 일인데도, 당장 시작해야 한다며 강하게 말씀을 하셨어요. 사실 이 주제는 앞으로 10년, 20년, 30년 뒤에도 공부하면서 새롭게 쓰고 싶은 마음이에요. 이 책은 그 시작이죠. 대학 시절부터 고민한 문제지만 구체적으로 책을 쓰게 된 원동력은 프롤로그에 쓴 문제의식이에요. 그걸 화두로 삼아 내가 고민해왔던 사랑학에 대한 얘기를 풀어보자. 그렇지 않으면 시작할 수 없을 거다, 그런 생각을 한 거죠. 그래서 참 많이 부족하고 미완성인 상태에서 시작한 책이에요. 

"슬픈 풍경들에 부대끼던 마음이 차츰 무뎌질 무렵, 하나의 부재가 선연히 고개를 들었다. 거리에서 마주친, 자신들의 가슴을 불시에 두드리는 여인에게 다가가 차 한 잔 할 수 있냐고 청하는 남자들의 부재. 그걸 어떻게 발견한 걸까? 3개월 남짓 면밀한 관찰자의 입장에 있으면서, 일단 그런 일이 일어나는 광경을 전혀 목격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앞으로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모래바람 이는 황량한 산하와 이미 오래전에 방전되어 버린 에너지를 통찰했다면 믿으시려나."(8쪽)  

말씀처럼 프롤로그의 첫 장면이 중요하고 또 강렬한데요. 제 생각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 장면에 대해 왈가왈부할 것 같습니다. 제가 주변을 탐문해본 결과 대략 96, 97학번까지는 그런 경험이 있는데 99, 00학번에 접어들면서 그런 일을 보지 못했다는 대답이더군요.

네, 의외로 세대적인 경계가 아주 선명해요. 그런데 부끄러움의 측면에서 보면 이전 세대도 마찬가지거든요. 제 기억을 돌아보면 어떤 남자가 학교까지 작심하고 쫓아왔는데, 제가 그 사람이 쫓아오는 걸 알고는 지하철에서 내려 다음 열차를 탔거든요. 그 사람도 따라 내려서 또 같은 열차를 탔는데 문에 딱 끼인 일이 있거든요. 그런 수모를 겪는 게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에요. 게다가 그때는 전화번호를 달라는 말을 할 수도 없고, 무조건 시간 있으면 차 한잔 하자, 이런 거니까요.

본문에서 프랑스 일간지 <리베라시옹>을 말씀하시잖아요. 우연히 마주친 인연을 찾아주는 코너가 있다고. 참 낭만적이라고 생각했어요. 우리 환경하고는 다른 듯한데 이것 역시 이성과 야성의 문제로 볼 수도 있을 듯해요. 언론이라는 매체가 다뤄야 하는 대상, 시각 이런 부분에 대한 사회적 기준과 틀이 일정하게 자리 잡고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우리는 일정한 엄숙주의에 묶여 있는 거죠. 모두가 베일 속에서 살고 있는 거예요. 대학교 2학년 때 한 친구가 ‘너는 어떤 일을 하는 것과 어떤 사람을 만나는 것 가운데 뭐가 더 중요해?’라고 물은 적이 있어요. 저는 어떤 사람과 만나는 게 더 중요하다고 대답했거든요. 그 이상 가치 있는 일이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대답을 하고 나서는 잠깐 후회도 했는데 지나고 생각해보니 맞는 얘기 같은 거예요. 내가 뭘 하든지 그걸 함께 나눌 사람이 곁에 없으면 즐겁지 않거든요. 영원할 필요는 없지만 사랑으로 서로를 강렬하게 끌어당기는 상대와 함께 있는 건 굉장히 중요한 일이에요. 이런 능력을 배양하는 일도 중요하고요. 물론 그런 사람을 만나고 함께 사랑을 키워내는 일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죠. 삶의 퀄리티를 크게 좌우하는 일이니까요.

지난 인터뷰에 우리가 범상치 않는 사람에게 ‘예술하세요?’라고 물어본다는 얘기 있잖아요. 다들 그런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는데요. 그걸 읽으면서 사랑, 정치, 예술이 밀접하게 연관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마 이 책의 구성도 그렇지 않을까 짐작이 가는데요.

네, 맞아요. 문화 내지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계속 쌓아왔던 것들, 족쇄가 되는 것들을 끊어내는 해방의 과정을 우리에게 안겨주는 것이 예술이고 사랑이고 정치죠. 이 세 가지가 제대로 작용을 한다면 말이죠.

 


가장 자연적인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고 가장 야성적인 것이 가장 문명적인 것이다

<야성의 사랑학>, 제목이 강렬한데요.

제목이 마음에 들어요?

네, 일전에 출판사에서 제목에 대해 물었을 때 좋다고 생각했어요. 야성이라는 말은 일상에서 자주 쓰는 말은 아니잖아요. 사실 ‘야성’과 ‘사랑’을 함께 생각하면 막장 드라마에 나오는 과격하고 치명적인 사랑이 떠오르기도 하고요. ‘야만’과 ‘야성’을 예민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을 듯한데요.

야성이라는 말과 가장 가까운 말이 자연인 것 같아요. 타고난 본성, 타고난 직관. 그러니까 일고여덟 살짜리 아이들이 보여주는 본능적인 반응을 보면 되는데, 아이들은 정말로 자연이 하는 소리를 듣나 봐요. 우리는 스스로가 자연의 일부라는 걸 뒤늦게 막 깨우치려고 하잖아요. 그런데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아는 거예요. 아이와 길을 걷다가 껍질이 벗겨진 나무를 봤는데 “엄마, 저 나무 아프겠다. 얘 이렇게 상처 나서 아프겠다.” 비가 보슬보슬 오고 있었는데 “비야, 사람에게 내리지 말고 얘한테 내려. 얘가 너무 목이 마를 거야. 빨리 커야 해.” 이렇게 말을 해요. 옛말에 ‘벼는 농부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말이 있는데 실제로도 그런 연구 결과들이 있잖아요. <물은 답을 알고 있다> 같은 책도 있고요. 우리가 고맙다는 말을 하면 물이 가장 아름다운 결정을 이룬다는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가이아 이론도 있고요. 우리는 책을 읽으면서 지식으로 습득하지만 아이들에게는 자연스럽게 체화되어 있는 거예요. 이걸 교육이라는 틀로 묶어 놓는데 사실은 ‘그 상태로 아이들에게 있는 것’, 그게 인간의 본성, 야성인 거지요.

그 패턴이 사랑에도 적용된다는 말씀이죠?

네,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가슴이 쿵쾅거리잖아요.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각자의 취향이 있어요. 아무리 잘생긴 애가 있어도 모두가 그 친구를 좋아하는 건 아니거든요. 자연스럽게 작동하는 방식이, 문화가 있는 거죠. 저는 오늘날의 교육이 그걸 죽이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서 성인이 되었을 때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봐요. 그러니까 자발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본능을 대신해서 스펙이 내 짝을 찾아주는 촉수가 되는 거죠. 취향이 다양하지 못하고 일정한 방향으로 획일화되는 현상이 야만이고, 자연에 가까울수록 야성이면서 진정한 의미의 문명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책에서 콘라드의 거위를 예로 드는데, 거위들도 짝짓기를 할 때 모든 문화적 코드를 동원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가장 많이 파괴된 동물이 인간이라는 거죠. 제 이야기와 연결해보면 짝짓기나 살아가는 방식에서 오히려 거위 같은 동물이 인간보다 문명화되어 있다는 거예요.

문명과 이성, 이성과 야성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발상이군요.

우리 인간들은 많이 먹으면서 한편으로는 다이어트로 살을 빼는, 이런 일들을 하잖아요. 너무 많은 폐기물을 만들어내고 그걸 정수하기 위해 돈을 쓰고. 굉장히 어리석은 일을 끊임없이 하는 존재예요. 어쩌면 가장 고등한 삶의 방식은 식물일 수 있어요.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으면서 가장 적게 소비하고 가장 오래 평화롭게 생활하는 거죠. 자연이 만들어낸 것 가운데 촌스러운 건 하나도 없어요. 정말 신기하게 모든 자연은 우아함을 갖고 있거든요. 가장 자연적인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고 가장 야성적인 것이 가장 문명적인 것이라는 말이죠. 현재 한국사회에서 제가 보는 가장 끔찍한 야만적인 풍경은 학원버스에 붙어 있는 플래카드예요. 전교 1, 2, 3등의 이름과 학교가 적혀 있는데, 글을 깨치기 시작한 아이들부터 동네 사람들까지 모두가 보잖아요. 예전에는 적어도 이름 한 글자는 지웠던 거 같아요. 본격적인, 거침없는 경쟁 사회가 된 거죠. 이런 게 야만이에요.

그럼 책의 내용으로 들어가기 전에 쉬어가는 질문 하나 드릴게요. 선생님의 소울메이트, 빌헬름 라이히는 어떻게 만나신 건가요?

사실 한국에 있을 때는 몰랐어요. 그런데 희완이 저에게 당신은 하이쉬를 만나야 한다, 이렇게 자꾸 말하는 거예요. 라이히가 프랑스어로 하이쉬거든요. 그때만 해도 누군지 모르다가 어느 날 하이쉬가 라이히라는 걸 알게 된 거죠. 처음에는 라이히 전기를 봤어요. 그런데 제 자신이 라이히 같다는 느낌이었어요. 희완이 저를 잘 본 거죠. 평소에 한국 사회의 위선적인 모습, 그 중에서도 성에 대한 위선이 가장 견딜 수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이 부분에 대한 비판을 늘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 부분이 대화 중에 튀어나왔겠죠. 그러면서 희완이 제가 말하는 내용을 체계적으로 이야기한 사람이 있다고 알려준 거죠. 라이히의 책을 읽으면서 빙의된 듯한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라이히가 성과 정치를 결합하면서, 그러니까 프로이트와 맑시즘을 결합하면서 양쪽으로부터 다 버림을 받거든요. 우리 사회에서도 계급 문제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여전히 개량이라는 비판을 받잖아요. 제가 레디앙에서 겪은 수모도 운동권 내에 여전히 살아 있는 엄숙주의 때문이었죠. 이런 주제를 감히 신성한 운동의 공간에 퍼질러대는 저라는 인간에 대한 단죄였거든요. 그래서 제가 앞으로 받아야 할 비판과 수모가 라이히의 삶에서 보였던 거죠. 라이히는 망명을 다니면서도 자기 주장을 놓지 않았고, 결국 감옥에서 죽었어요. 정말 ‘혼자’였죠. 한 사람이라도 마음 깊이 이해해줘야 한다,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사랑을 좀먹는 것들, 사랑을 일깨우는 것들

책이 3부로 되어 있는데요. 2부 ‘위선, 연애불능의 사회’에서 ‘사랑을 좀 먹는 것들’이 무엇인지 보여주시잖아요. 특히 유교와 효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시는데, 한국사회에서는 적어도 심성적으로는 여전히 이 가치가 강력하게 자리 잡고 있잖아요. 그런데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부분, 그러니까 사랑에서는 접점은 전혀 보이지 않고 결절 지점만 보이거든요. 혹 다른 맥락에서 일말의 가치를 찾아볼 수는 없을까요?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혹시라도 말이죠.

가장 큰 문제는 효란 단어에 너무 많은 것들이 뭉뚱그려져 있다는 거예요. 효가 뭐냐고 물으면 ‘부모에 대한 사랑’이라고 말하거든요. 대부분 사랑이라고 생각을 해요, 이게 문제라는 거예요. 그게 사랑이면 왜 부모에 대한 자식의 사랑을 효라고 따로 불러야 하냐는 거죠, 다 똑같은 사랑인데. 왜 그토록 각별한 작명이 필요했느냐 하면 사실 효는 도리거든요, 사랑이 아니라. 도리는 ‘그럼에도 불구하는 지켜야 하는’ 거예요.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지만, 동시에 자식에 대한 엄청난 권력을 갖고 행사하는 사람들이죠. 제 경우,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는데 언젠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면 진짜 내가 쓰고 싶은 걸 다 쓸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거든요. 그러니까 내 안의 도덕의 틀, 자기 검열을 엄마라는 존재가 계속 하고 있는 거죠. 그러니까 유교가 정말 작동을 잘 한 거죠. 국가가 해야 할 일을 가정으로 위임하면서 전체 가족들의 위계를 잡아주는 역할을 한 셈이니까요.

효가 당연한 걸 다른 것으로 구분하면서 권력을 획득한다는 말씀이군요. 그럼 효, 아니 ‘부모에 대한 자식의 사랑’을 포함하는 ‘사랑’의 조건은 무엇인가요?

사랑의 기본적인 조건은 ‘자발성’이에요. 그렇지 않은 사랑은 없잖아요. 그런데 도리는 자발성과 무관한 개념이거든요. 자발성에 맡겨두었을 때 작동하기 너무 힘들기 때문에 도리로 만들어 놓은 거죠. 어쩌면 효가 부모에 대한 사랑을 좀 먹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하고 싶다가도 누가 시키면 하기 싫어지는 것처럼 말이에요. 예를 들면 추석 때 찾아뵙고 싶지만 못 갈 수도 있잖아요. 불효자가 되는 거죠. 그런데 불효자가 되는 건 내 부모와의 관계뿐 아니라 내 부모를 둘러싼 많은 사람들의 지탄까지 포함하는 개념이거든요. 저는 효라는 게 불효자를 만들어 내기 위한 검열의 역할을 한다고 생각해요. 효가 불효를 양산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저는 이게 사라지면 더 좋아질 거라고 봐요. 검열이 있으면 검열의 안과 밖이 생기지만, 검열이 사라지면, 비로소 우리가 원하는 것, 그리운 사람, 하고 싶은 일들을 하게 되겠지요.  효도하기 위해 그 어떤 모험도 하지 못하는 사람, 효도하지 않기 위해 자기 인생을 일부러 망치는 사람은 이제 없어졌으면 좋겠어요.

2부에 있는 ‘언어에 담긴 성의 사회적 온도차’에서 프랑스나 스페인 말은 남녀 성을 구분한다는 내용이 기억에 남습니다. 몰랐던 사실이 아님에도 새롭게 다가왔거든요.

저는 여성이잖아요. 그래서 이런 언어를 배울 때 맨 처음 검열하는 건 어떤 명사에 남성을 붙이고 어떤 명사에 여성을 붙이는가 하는 부분이에요. 독일어는 하늘에 여성을 붙이는 유일한 언어예요. 대부분의 언어에서 하늘은 남자고 땅은 여자거든요. 동양의 언어들도 겉으로 드러나 있진 않지만 감춰져 있고요. 저는 성에 주어진 계급적 의미들을 가장 먼저 관찰했던 것 같은데, 결혼한 여자와 결혼하지 않은 여자는 구분해서 부르고 남자는 구분하지 않는 나라가 여럿 있어요. 프랑스의 마담(madame), 마드모아젤(mademoiselle), 므슈(monsieur)도 그렇죠. 한국에는 처녀, 총각, 아줌마, 아저씨가 있으니까 덜 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웃음) 이런 생각을 했어요. ‘모든 종류의 순결, 정조에 대한 요구는 여성에게만 존재하는 것이다.’ 저는 순결이란 단어가 여자에게만 있는 단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어요. 이 사회가 추구하는 가치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20대가 되어서 알고 보니 그렇지 않았던 거죠. 그게 바로 여기서 드러나더라고요. 여자는 언어 자체가 결혼 전과 결혼 후를 구분하고 남자는 그렇지 않다는 거죠. 세상의 모든 언어가 이걸 기준으로 여자의 의미를 매겨왔고 본질적으로 성에 대한 억압은 오로지 여성에 대한 억압이었다는 걸 그런 언어를 통해서 다시 느꼈어요.

하나의 명제로 제시하신 게 ‘성과 애는 결합시키고 성과 경제는 분리해야 한다’는 말인데요. 이 책에서 문제제기 하신 부분이 해결되려면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이 명제의 반대 상황이 주류 사회에서는 하나의 포맷인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시는지요.

제도적으로 접근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해요. 다른 식으로 말하면 성평등이 제도적으로 이루어진 것과 같아요. 우리가 나아가야 할 중요한 지향점이란 말이죠. 아까 말씀드렸듯이 성적 억압은 여성에 대한 억압이에요. 여성을 덜 억압하는 사회가 되면 성적 억압이 줄어들고, 이게 양성 평등에 가까워지는 길이거든요. 사실 능력이나 참여에 있어 남여는 이미 동등한데 사회는 그들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악랄하게, 외환위기 이후에는 더 극심하게 차단하고 있거든요. 이 부분이 제도로 보장되면 바로 성과 경제가 분리되는 거예요. 여자들이 혼자 아이를 갖게 되었을 때, 그러니까 비혼모가 되었을 때 85%의 여성이 아이를 낳길 원해요. 우리나라에서 아직 이들에 대한 시선이 따갑지만, 정책적으로 비혼모에게 일정 기간 동안 지원을 해주는 제도가 생겨서 출산과 양육을 위한 경제적 여건이 마련된다면, 그들은 모멸감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을 낳으려는 사례가 많다는 거예요. 이게 프랑스의 모습이기도 하고 러시아 혁명 직후의 모습이기도 하거든요. 사소한 제도 하나가 현상을 확 바꿀 수 있다는 거죠. 관념적인 게 아니라 제도적인 장치로서 바로 해결될 수 있는 부분이에요. 흔히 관념적 혁명이 이루어져야 제도가 바뀔 거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제도가 움직이면 사람들이 따라가는 경우가 많아요. 민주노동당의 경우를 봐도 처음 국회에 입성했을 때 사람들이 이런 당이 있는 줄도 모르다가 국회의원 10명이 되니까 한 달 만에 지지율이 25%로 뛰었거든요. 내심 지지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주저하던 이들이 너도나도 지지하게 되는 상황인 거죠.

제가 차례를 보고 얄팍한 생각으로 이걸 먼저 읽어야지 했던 꼭지가 ‘야성을 일깨우는 아홉 가지 방법’인데 아쉽게도 이 부분은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힌트를 좀 주시지요.

제가 첫 번째로 꼽은 게 접촉이에요. <감각의 박물학>을 쓴 다이앤 에커먼의 이야기인데, 생명체에 있어 접촉은 태양만큼이나 중요하다는 거예요. 애정은 추상적일 수 있는데 이건 직접적인 거죠. 아무리 사랑해도 직접 안아주지는 않는, 우리 엄마 같은 사람들이 한국에는 진짜 많아요. 지금도 접촉이 전혀 없어요. 이게 알게 모르게 어떤 한이 쌓이는 것 같아요. 내가 왜 그렇게 20대에 애정을, 사랑을, 연애를 갈구했을까 생각을 해보면, 본능적으로 요구했던 접촉의 결핍이 쌓여온 결과로 보이거든요. 실제로 제가 몇 가지 사례를 들었는데, 12세기 여러 나라를 점령했던 하인리히 2세의 실험이 대표적이에요. 아이들이 어떤 접촉도 없을 때 처음 하는 말이 무엇일까 알아보기 위해 어떤 접촉도 없이 먹이기만 했는데 그 아이들이 다 죽었다는 거예요. 또 다른 사례는 루마니아 차우셰스쿠 정권에서 낙태를 금지하고 여자들에게 아이를 5명씩 낳으라고 강요한 일인데요. 아이가 늘어나니 결국 한 보육사가 100명이 넘는 아이를 돌봐야 하는 상황이 된 거죠. 그때 거기서 양육되었던 많은 아이들이 다른 나라로 입양이 되었는데 그 아이들 가운데 많은 수가 자폐증을 앓았어요. 사실 사육에 가까웠던 거죠. 이런 극단적인 예가 아니더라도 부모가 아주 살벌한 관계를 형성하는 가정의 아이들은 성장기에 성장이 멈추기도 해요. 불안이나 공포 속에서 접촉 없이 자란 아이들 말이죠. 반면에 꽃향기가 있는 오일로 마사지를 해주면 치매가 호전이 된다고 해요. 아이들이건 어른이건 접촉이 생명과 같다는 거죠.  

접촉이 생명과 같다, 선생님께서도 이 방법을 실천하고 계신가요.  

저도 어쩌면 접촉을 많이 할 수 있는, 많이 하는 사람과 살고 있기 때문에 10년, 20년 전보다 야성이 발달한 것 같거든요. 이게 머릿 속에 강렬하게 자리 잡은 상황에서 아이를 키우다 보니, 이 아이한테는 널 만지지 않는다는 게 무척 슬픈 일이더라고요. 이 아이는 접촉이란 영양소를 충분히 섭취한 아이인데 이게 없으면 엄청난 형벌인 거죠. 자기가 받아야 할 접촉의 함량을 인지하면서 요구하는 삶. 그러면서 명랑하고 쾌활하게 성장하는 거죠. 직관이 잘 발달하고요. 직관이 발달하려면 오감이 발달해야 하거든요. 현대인이 가장 덜 발달한 부분이 촉감이라고 생각해요. 내 손끼리 부딪치는 게 아니라 남과 맞닿으면서, 정 어려우면 마사지라도 받아야 하는 거예요. 나를 안아주는 연인이 내 곁에 없다면 마사지를 받고 해주는 감각을 일깨우는 아주 원시적인 방법도 시도할 필요가 있어요.

 

 

 

 

 

 

  

 

나머지 여덟 가지 방법도 궁금한데요. 선생님께서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중년의 사랑, 노년의 사랑도 들려주실 거라 기대합니다. 마지막으로 알라딘 인터뷰의 공식질문입니다. 우리의 야성을 일깨우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책을 몇 권 추천해주시지요.

우선, 조금 전에 말씀드린 <감각의 박물학>이 있고요. 리처드 윌킨슨이 쓴, <평등해야 건강하다>도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평등해야 서로 사랑할 수 있거든요. <자유로운 아이들 서머힐>도 추천하고 싶어요. 저자 A.S 닐은, 멀리서나마, 라이히를 끝까지 지지하고 격려한 거의 유일한 사람이고, 라이히가 생각한 방식으로, 그리고 제가 이 책에서 주장하는 바대로 학교를 운영한 사람이죠. 모든 금기로부터 자유로워졌을 때 인간이 얼마나 아름다워질 수 있는지, 세상을 대하는 태도가 얼마나 열릴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많은 얘기를 해줘요. 마르잔 사트라피의 <페르세폴리스>는 2년 전에 선물을 받았는데 최근에야 읽었어요. 이 책을 읽고 책을 쓰면 더 좋았겠다 싶을 정도로 좋은 책이에요. 조기유학을 계획하는 모든 소녀들, 여기가 아닌 저기를 꿈꾸는 모든 제3세계의 여자들에게 도움이 될 책이에요.

재미난 말씀 고맙습니다. 책이 나오면 많은 독자들과 새로운 이야기로 다시 만날 수 있겠죠? 서울과 파리를 잇는 새로운 접촉의 방법을 고민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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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로망 2010-10-05 1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전작 <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맛속까지 정치적인>을 감명깊게 읽은 독자로서, 더할 나위없이 끌리는 책이네요! <야성의 사랑학>! 저의 페이보릿 작가가 되어버린 목수정 님.>_< 찬찬히,야금야금,아껴 읽겠습니다!

인문MD 바갈라딘 2010-10-07 11:04   좋아요 0 | URL
어쩌죠? 글이 너무 시원시원해서 단숨에 읽히는데... ^^

주성치 2010-10-06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력적인 인터뷰네요. <야성의 사랑학> 요즘 읽고 있는데, 막힌 속이 뚫리는 기분으로 책장을 넘기고 있답니다. 이 책을 읽고 저도 더 추워지기 전에 제 안에 숨은 야성을 좀 깨워봐야겠어요. 꾸준히 책을 쓰신다니 앞으로의 행보도 응원하겠습니다.

인문MD 바갈라딘 2010-10-07 11:51   좋아요 0 | URL
아홉 가지 실천 방안으로 하나씩 연습해보시면 길이 열리지 않을까요? 요즘 한겨레21 마지막 페이지 칼럼을 맡고 계신데 찾아보셔도 좋을 듯하네요. http://search.hani.co.kr/hani/search.php?pageType=han21&keyword_str=목수정
 

   
  책 제목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은, 나의 독서 버릇에서 나온 것이다. 나는 많은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 읽는데, 책을 읽는 도중에 빌려 읽기가 너무 아까운 좋은 책이나, 다 읽고 나서 필히 곁에 두어야 할 책을 뒤늦게 산다. 이런 검증을 거치지 않은 책 가운데는 읽고 나서 버려지는 것들도 많다. 책을 읽는 방법이 천차만별이듯 버리는 일도 그럴 것인데, 내가 가장 애용하는 방법은 외출을 할 때 미리 준비했다가 아무 공중전화 박스의 전화기 위에 올려놓는 것이다.  
   

  

3년 만에 돌아온 장정일의 독서일기,

파란여우 님의 글(http://blog.aladin.co.kr/bluefox/4119139)을 비롯하여

알라딘서재에서 꾸준히 사랑받고 있습니다.

이에 부응하여 출판사에 장정일 선생님 인터뷰를 요청했고

선생님께서 흔쾌히 서면 인터뷰를 허락해주셨습니다.  

 

       

    저보다 여러분들의 궁금함이 더 시급한 문제라고 생각하여

    질문을 공개모집합니다. 9월 26일 일요일까지 댓글로 질문을 남겨주세요.

    서면 인터뷰니 시간의 제약 없이 가능한 모든 질문을 전할 작정입니다.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을 중심으로 한 책읽기와 글쓰기에 대한 질문도 좋고,

    작가 장정일에 대해 묻고 싶었던 이야기도 좋습니다.

    장정일 선생님께 '사서 읽을 만한 책'을 권해주셔도 괜찮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궁금증을 모으고 제 궁금증도 보태 선생님께 답을 구해오겠습니다. 

 

    최근에 예술MD께서 정성일 선생님 인터뷰(http://blog.aladin.co.kr/tbox/4123545)를 위해  

    서재에서 질문을 공개모집했는데, 괜찮은 방법인 듯하여 저도 숟가락을 얹어봅니다.
  

 

 



     

 

 

 

 

    사족) 마티 출판사에 여러분의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사연을 듣는 이벤트를 제안하여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으니,

            조만간 책을 둘러싼 신기하고 놀라운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기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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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18 15: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05 10: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여름의 문턱에서 만난 반가운 책과 사람 <불편해도 괜찮아>와 김두식 선생님입니다. 인사동의 호젓한 전통찻집에서 시원한 냉모과차를 나누며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어느새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가을 바람을 마주하는 요즘입니다. <불편해도 괜찮아>를 이미 읽으신 분들께는 깊이 있는 이해를 위한 보충 자료로, 아직 책을 만나보지 못하신 분들께는 '인권감수성'을 전할 좋은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흔쾌히 인터뷰에 응해주시고 마지막까지 원고를 검토하며 꼼꼼하게 수정해주신 김두식 선생님, 반가운 책을 펴내고 좋은 자리를 마련해주신 창비 출판사에 고마움을 전합니다.(인터뷰 진행 및 정리_알라딘 인문MD 박태근)

 

 

책을 쓰는 일은, 사람에 대한 안타까움이고 세상에 말을 거는 방법이다

트위터에서 종종 뵙다가 이렇게 직접 만나니 반갑습니다(인터뷰어와 김두식 교수는 맞팔 관계다). <불멸의 신성가족> 때는 알라딘에서 서면인터뷰를 진행했는데 이렇게 얼굴을 맞대고 인터뷰를 하니 약간 긴장도 됩니다. 최근에 알라딘에 보내주신 추천도서 잘 보았습니다. <유혹하는 에디터>는 저도 재미나게 읽은 책이라 반가웠습니다. 물론 최근에는 <불편해도 괜찮아>가 가장 반가운 책이었죠. <헌법의 풍경> 이후 5년 동안 책을 내지 않으셨는데(2007년 출간한 <평화의 얼굴>은 <칼로 쳐서 보습을>의 개정판이다) 지난 1년 새 무려 3권의 책을 연이어 쓰셨습니다. 집필에 집중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많이 쓰겠다고 작정하고 쓴 건 아니었고 우연히 그렇게 된 겁니다. <불멸의 신성가족>은 희망제작소에서, <불편해도 괜찮아>는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제안한 기획인데, 분명한 방향과 틀을 가지고 있어서 쉽게 공감하면서 집중적으로 집필할 수 있었어요. 그 전에는 <헌법의 풍경> 비슷한 책을 만들어보자는 출판사들의 제안을 많이 받았는데, 그런 기획에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거든요. 1년 동안 학교에서 집필을 위한 시간을 배려해준 점도 큰 도움이 되었고요. <교회 속의 세상, 세상 속의 교회>는 오래 미뤄두었던 작업인데, 국가인권위원회 내부 사정 때문에 <불편해도 괜찮아> 프로젝트가 약간 공전한 덕분에 마무리할 시간을 얻었답니다. <불편해도 괜찮아>는 저에게 행복한 작업이었습니다. 다른 두 권의 책은 한 줄 한 줄 고민과 부담이 많았거든요. 하나의 표현이 자칫 누군가에게 피해를 줄까 걱정이 되어서 말이죠. <불편해도 괜찮아>는 원하는 영화를 실컷 보며 책을 쓰는 프로젝트라 누구라도 하고 싶은 작업이었을 겁니다.

 

성급한 질문이지만 집필과 관련한 내용이라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평화의 얼굴> 서문에서 국가의 본질, 교회의 본질을 말하기 위해 3권의 책을 쓰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평화의 얼굴>, <헌법의 풍경>, <교회 속의 세상 세상 속의 교회>겠지요. 말씀하셨듯이 그 이후 두 권의 기획물을 출간하셨는데, 하나의 큰 흐름을 마무리한 지금, 선생님께서 새롭게 그리고 계신 계획은 무엇인가요?

사실 아무 생각이 없어요. 지금 대학이 살벌한 경쟁에 놓여 있는데, 특히 로스쿨 전환 이후 강의 부담이 커지면서 대부분의 교수가 일반인과 대화하는 책을 쓸 수 없는 상황이에요. 저 같은 경우도 학교에서 계속 살아남으려면 논문도 쓰고 해야 하는지라, 당분간은 전공에 맞는 학문적 글쓰기를 해야 할 것 같네요.

선생님께서 계획하고 실행하신 일련의 저작활동이 애초의 목적의식을 어느 정도 성취했다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제 생각이 이렇게 폭넓은 공감을 얻어낼지 몰랐어요. <헌법의 풍경>도 이렇게 오래도록 사람들에게 읽히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거든요. 어떤 의미에서는 남을 위해 책을 쓴다기보다는 제 생각을 정리한다는 의미에서, 저를 위해 책을 쓰는 면도 있어요. 제가 어렸을 때부터 기독교 평화주의에 대한 생각을 품고 있었는데, 나 혼자 이상한 생각을 하는 것 같아서 늘 불안했거든요. 그런데 미국에서 좀더 폭넓은 공부를 하다 보니 저의 그런 생각이 이상한 게 아니라 기독교 윤리와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흐름이었음을 알게 되었어요. 그런 깨달음의 과정을 정리한 게 <평화의 얼굴>이죠. 만약 저와 비슷한 고민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이제는 제 책을 읽고 그걸 기반으로 훨씬 멀리 나갈 수 있을 겁니다. <평화의 얼굴> 뿐만 아니라 다른 책도 모두 그렇습니다. 제 작업의 의미라면 그 정도 수준인 것 같아요.

선생님 글을 보면 한 꼭지의 글이나 한 권의 책, 더 넓게는 전체 저작 활동에서 나로부터 시작하는 문제의식을 볼 수 있습니다. <불멸의 신성가족>에서 자기고백, 내부고발자의 측면을 볼 수 있듯이 말입니다. 누구나 자기 고민이 있지만 현실에서는 유보하거나 타협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렇게 자기 고민을 드러내고 표현하게 만드는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가까운 곳에서 어려움을 겪는 사람을 보고 느낀 안타까움이 집필의 출발점이 된 경우가 많아요. 사실 저는 평온한 중산층 가정에서 잘 자랐고 지금도 여전히 아내, 딸과 중산층으로 행복하게 살고 있어요. 제 능력보다 훨씬 잘 된 사람이죠. 그러니 늘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있는 겁니다. 고통 받는 사람을 보면 저는 ‘내 인생이 여기까지 잘 풀려온 게 바로 이때를 위한 것 아니었을까’ 생각해요. 그런 책임감을 느끼면 글을 쓰게 되는 거죠.
  저는 거대 담론을 싫어하고 이야기를 좋아해요. 추상적이고 어려운 책은 힘들더라고요. 좋은 책은 이야기, 즉 내러티브를 담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예수님을 보면 그 분이 잘 준비된 논리로 누군가를 설득하는 경우는 많지 않아요. 뜬금없는 이야기로 시작해서 비유를 풀어내실 때가 많거든요.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명령이 아니라 그냥 그분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사람들의 생각이 자연스레 바뀌는 방법을 취하신 거죠. 제가 감히 예수님 흉내를 낼 수야 없겠지만, 그래도 저는 같은 맥락에서 결국 사람들을 움직이는 것은 논리가 아니라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학술적인 내용도 포함하되, 이야기 형식을 지키고 싶었는데, 생각같이 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상황이 인권문제의 장이다

 

이제 본론인 <불편해도 괜찮아>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해보겠습니다. 여러 주제 가운데 청소년 인권과 여성 인권을 다룬 장이 기억납니다. 청소년 인권은 따님 이야기인데 선생님 딴에는 배려하고 노력했지만 여전히 딸의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장면이 나오고 여성 인권에서는 강의실에서 (사법시험 합격 이후 마담뚜가 접근해온다는 맥락에서 여학생을 배제하는 표현이 되어버린) 마담뚜를 말씀하시다가 크게 얻어맞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서문에서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은 듯합니다. 앞서 든 예처럼, 살다보면 의식이 작동하지 못해 깨지는 순간들이 있는데 선생님께서는 그런 자각을 어떻게 받아들이시나요?

저는 체질적으로 정답을 싫어해요. 한국의 진보적 지식인들을 보면 어떤 문제를 던져도 그 자리에서 바로 답을 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훌륭한, 정말 아는 게 많은 분들인데 저는 그런 스타일이 아니고 그런 게 좀 불편해요. 대개 제 책들을 보면 문제제기를 해놓고 답이 없잖아요. (웃음) 그게 제 책의 한계인데 실제로 답을 찾기 어렵다는 걸 제가 많이 의식하는 것 같아요. 한 방 맞는 것도 어쩌면 그 문제에 대해서 고민을 시작하게 만드는 계기라서, 한 방 때려주는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이 있어요. 주로 제 처가 그런 역할을 많이 해주죠. 사람은 자기중심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외부적으로 그런 충격을 받지 않고는 자기중심성이 사라지지 않아요.  

 <불편해도 괜찮아>도 논리보다는 감성에 호소한 책이에요. 판례나 인권 협약을 설명한 게 아니라 이야기거든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저는 이야기가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해요. 글을 쓰는 사람이 가르치려 하는 게 아니라 남과 공유할 수 있는 경험을 솔직히 나누다 보면, 거기서 공감이 시작되죠. 그래서 늘 제 이야기로 글을 시작하게 되는 건데, 생각해보면 그게 또 쉽게 글을 쓰는 방법이기도 하고요. 사실 제 책들은 저의 고민에서 시작해서 제가 그 시점까지 찾은 답들을 얘기하는 것에 불과하거든요. 대단한 사회과학 책이 아니고요. 안타깝게도 사회과학 분야는 훨씬 넓게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인데도 접근성이 떨어질 때가 많아요. 어렵다는 선입견도 있고, 교보문고만 봐도 사회과학 코너가 제일 구석에 있거든요. 사회과학과 문학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어요. 제가 사회과학 코너에서 종교까지는 발전했는데 아직 문학 코너까지는 가보지 못했어요. (웃음) 이 책을 쓰면서 그 경계를 넘어설 수 있을까 기대했는데, 이 책의 분류도 여전히 사회과학을 벗어나지 못하더군요. 사람들이 수필을 재미나게 읽고 인문학은 지식을 준다고 생각하는데 사회과학은 피곤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죠. 한번 그걸 넘고 싶어요.

피곤하다는 부분도 이유겠지만, 문제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부분이 큰 이유인 듯합니다. 내가 몸담고 있는 사회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수치나 자료로 표현되니까 불편함을 느끼는 거겠죠.
  저는 인권감수성이란 표현에 주목했습니다. 제가 이 책의 소개글을 쓸 때 ‘지키는 인권에서 공감하는 인권으로’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는데 강남에서 논술을 가르치는 제 친구가 인종문제를 다루면서 아이들에게 물었답니다. 지하철을 탔는데 빈 자리가 두 개 있다. 하나는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백인 옆자리고 다른 하나는 노동자로 보이는 동남아 사람 옆자리인데 어디에 앉을 거냐. 다분히 의도적인 질문이었는데 여학생의 답변이 기가 막힙니다. ‘잘 생긴 사람 옆이요’라고 했답니다. (웃음)

훌륭하군요.

이 책을 보면서 그런 상황이 떠올랐습니다. 인권이 이미 상식이 되어버려서 ‘인권은 좋은 거야’, ‘인권은 지켜야 해’라는 생각을 강박처럼 가지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변화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 상황 말이죠. 그런 면에서 지키는 인권보다 공감하는 인권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겁니다.

남의 인권을 지켜줘야 한다는 생각은 누구나 하죠. 그런데 임순례 감독의 영화 <날아라 펭귄>을 보면 채식주의자 이야기가 나오는데 일상적인 회식문화에서는 채식주의자를 전혀 배려하지 않거든요. 이런 걸 보면 인권이라는 게 생각만으로 되는 건 아니고 결국 그 사람 입장이 되어봐야 길이 열린다는 걸 알 수 있어요. 그런 면에서 공감이 중요하죠. 공감하면 그만큼 실천도 쉬워집니다.
  모든 인간관계에서 권력의 문제가 생긴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잘 인정하지 않아요. 더 가진 사람은 덜 가진 사람을 억압하거나 전체 상황을 주도하는 힘을 갖죠. 일단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게 중요하고요. 권력을 가진 사람이 그 권력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갖지 못한 사람은 그 상황에서 어떻게 당당해야 하는지 고민이 필요한 거죠. 결국 일상의 모든 국면에서 인권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인권감수성이란 말도 이런 맥락에서 제안한 거고요.


아직 멀지만, 인권의 미래는 밝다

여기 오기 전에 알라딘 리뷰와 40자평을 살펴봤는데, 독자들이 인상 깊은 구절로 언급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지랄 총량의 법칙이나 따귀 다큐멘터리 같은 감각적인 표현에 대한 호응이 좋고, ‘의심스러울 때는 약자의 이익으로’라는 명제에 공감하는 듯합니다. 아직 책을 읽지 못한 분들을 위해 이런 표현의 맥락을 짚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의심스러울 때는 약자의 이익으로’부터 말씀드릴게요. 사회가 다원화되다보니 어느 쪽이 옳은지 결정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잖아요. 사실 저도 그럴 때 많이 흔들리거든요. 이쪽 얘기 들으면 이쪽 얘기가 맞는 것 같고 저쪽 얘기를 들으면 저쪽 얘기가 맞는 것 같고 말이죠. 그런데 인권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누가 옳은지 불분명한 상황에서는 약한 사람의 편을 드는 게 옳다는 원칙을 말씀드린 거예요. 물론 누가 약자인가 하는 문제는 남죠. 아주 거친 표현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약자 기준의 정의 판단은 매우 중요한 인권의식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해요.
  따귀 다큐멘터리는 그냥 적은 게 아니고 정말 만들어봤으면 좋겠어요. 만들기 어렵지도 않을 거고요. 드라마에 엄청나게 많이 나오는 따귀 장면을 보여주면서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이 이것뿐이냐고 묻는 거죠. 우리나라 드라마는 연인들끼리 너무 자주 때리거든요. 사랑을 표현하는 것도 노력과 학습이 필요해요. 그런데 기껏 따귀 때리는 걸 애정표현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죠.

전체 주제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게 동성애자 부분과 병역거부 문제입니다. 동성애자 문제는 기독교인이란 선생님의 위치 때문이고, 병역거부 문제는 <평화의 얼굴>에서 본격적으로 다룬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동성애자 문제부터 말씀을 드리면 예로 드신 영화 <윌과 그레이스>에서 역지사지하는 장면이 놀라웠거든요. 생경한 감각 말이죠. 그런데 말미에 선생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동성애자 문제는 전적으로 프라이버시에 속한 문제라서 이성애자들이 관용하고 말고 할 문제가 전혀 아니”라고. 그런데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개인과 사회의 문제를 근거로 듭니다. 인간은 홀로 떨어져 살 수 없는 데 전체 사회의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배려할 수 있느냐 하는 주장인데요. 선생님께서는 이런 반론에 어떻게 답을 하시겠습니까?

규범적으로 어떤 행위가 용인이 되느냐 되지 않느냐를 말할 때는 기준이 있어야 하거든요. 법학에서 이야기하는 가장 폭넓은 합의점은 남에게 피해를 주느냐 주지 않느냐 하는 기준이에요. 물론 이런 견해에도 비판의 여지는 있지만 현재로서는 그나마 가장 합리적이고 보편적인 기준이에요. 동성애는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영역이거든요. 기독교 윤리의 차원에서는 여러 논쟁이 있지만, 그냥 일반 사회의 논리로 이야기하면 동성애자에게 시비를 걸 수 있는 근거는 없어요. 남의 사생활을 보고 불편함을 느낄 이유가 없는 거죠.

병역거부 문제의 경우, <평화의 얼굴> 이후에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그간 현실에서의 변화나 가능성을 보셨는지요.

그 책이 참여정부 말기에 나왔어요. 그때는 제가 사람들의 심리적 장벽을 넘는 것이 어렵다고 이야기하면 병역거부자를 돕는 분들이나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정책 활동을 하시는 분들께서는 저에게 왜 그렇게 부정적으로 생각하냐는 말씀을 많이 하셨어요. 지금도 4주 훈련만 받고 일종의 대체복무를 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4주 훈련을 받고 안 받고 정도의 문제는 금세 해결될 수 있다고 본 거죠. 저는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고 오랜 설득이 필요하다 말씀을 드렸거든요. 결국 참여정부 때 다 해결될 줄 알았는데 그렇지 못했고, 이번 정부 들어서는 이런 논의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도 못하게 되었어요. 여전히 갈 길이 먼 상황입니다.

선생님 말씀을 들으니 정말 그 문제가 사회적으로 논의되다가 사라져버린 듯합니다. 최근에 관련 소식을 들은 기억이 없습니다. 당분간 희망은 없는 걸까요?

저는 젊은 세대에 희망을 걸고 싶어요. 우리 사회에서는 여전히 나이가 중요한 요인이에요. 예를 들면 제 책도 저보다 나이가 많은 분들은 잘 읽지 않아요. 저는 이제 그걸 현실로 받아들여요. 그래서 제가 이야기 나눌 주된 대상은 저보다 나이 든 사람이 아니라 저보다 젊은 다음 세대라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젊은 세대와 이야기하려면 몸을 낮추고 말을 걸어야죠. 제 책 자체가 그런 ‘말걸기’의 과정이었다고 생각해요. 병역거부 문제만 보더라도 20대 친구들은 나이 든 분들과 생각이 상당히 다르거든요.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멀지않은 시점에서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이 문제에 대해 마음을 열어줄 거라고 생각합니다.


입장을 떠나 자기를 정직하게 드러내는 게 중요하다

본문 주제에 대해서 하나만 더 여쭤보겠습니다. 영화 검열을 다룬 장에서 영화에 대한 선생님의 절절한 사랑을 느꼈습니다. 다른 장에서는 치밀하게 문제를 파고든다기보다는 공감에 집중하신 듯한데 이 부분에서는 영상물 관리 등급의 역사에서부터 미국의 법률까지 다루시며 열중하는 모습이었거든요. (웃음) 수용자 입장에서 보면 사용료를 지불하면서도 정해진 기준에 맞춰서 보게 되는 상황인데요. 현실에 존재하는 심의 과정을 넘어설 대안이 있을까요?

사전 심의 과정을 통과하지 않고는 어떤 영화도 상영될 수 없는 제도는 잘못된 겁니다. 근본적으로는 나이로 획일적인 선을 긋는 것도 문제죠. 다른 맥락에서 얘기를 해보면, 저는 돈을 다 내고 정품 디비디를 사보려고 노력을 하는데요. 저처럼 정품 디비디를 사보는 사람은 뭉개지거나 잘려진 화면을 보지만 어둠의 경로로 구해보는 친구들은 미국이나 유럽의 무삭제판을 마음대로 구해보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돈 내고 사서 보는 사람은 잘린 걸 보고, 어둠의 경로로 구해보는 사람은 제대로 된 걸 본다는 것 자체가 시장 좋아하는 분들의 표현을 빌자면 시장 왜곡인 거죠. 검열이란 시스템 자체가 굉장히 오래된 거잖아요. 문을 막아두면 아이들을 보호할 수 있다는 생각인데 저는 이 프레임 자체가 끝났다고 생각해요. 얼마나 좋은 가정을 만드는지, 우리 사회가 얼마나 아이들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고 긍정적 가치를 전해줄 수 있는지가 중요한 거지, 영화 한 편을 보고 못 보게 하는 걸로 아이들을 지키는 시대는 지나간 거죠.

이제 책 밖으로 나와서 이야기를 이어가보겠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책, 영화, 드라마 모두 즐기시잖아요. 영화나 드라마는 상대적으로 행간이 넓은 매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선생님처럼 이야기의 근거로 사용할 때 자유로운 측면이 있는 반면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고자 할 때에는 의도적으로 일부분을 강조할 수도 있잖아요. 선생님의 매체 읽기의 태도랄까 방법에 대해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매체에 대한 특별한 시각이 있는 건 아니고 일단 재미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파든 좌파든 미학적으로 완성되어 있으면서 정직함이라고 할까요, 그런 부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면 <밴드 오브 브라더스>같은 드라마가 있잖아요. 우파의 가치를 전달하는 드라마죠. 틈만 나면 성조기가 나부끼고 전쟁에 참여하는 애국청년들의 모습을 보여주니까요. 그런데 <밴드 오브 브라더스>는 독일군을 악마로 그리지 않아요. 상대방도 자기 이유를 가지고 싸우는 사람들이고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밀도 있게 그리고 있거든요. 그런데 제가 요즘 트위터에서 줄기차게 비판하고 있는 <로드 넘버 원>과 <전우>를 보면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있는 건 말할 것도 없고, 북쪽 사람들은 맨날 민간인을 학살하거나 고문하고 남쪽 군인들은 인간미가 뚝뚝 떨어지는 걸로 그려요. 전쟁 자체가 얼마나 참혹한 것인가를 잘 보여주면서도 우파의 시각을 충분히 전달할 수 있는데도 우리 드라마들은 너무 유치하다는 거죠. 그래서 아무도 안 보잖아요. 자충수라고 생각해요. 어떤 시각을 담을 수밖에 없지만 정직해야 한다, 이렇게 생각을 해요. 저는 그런 정직한 시각을 담은 드라마로 좀 오래되었지만 <떨리는 가슴>을 꼽고 싶어요. 원래 편성된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구멍이 나서 노희경, 인정옥 등의 작가들에게 맡겨서 급하게 만든 드라마라고 들었는데, 정말 잘 만들었어요. 우리에게 어떤 시각을 강요하지 않고 사는 게 저런 거지, 사람이 약한 부분도 있고 모자란 부분도 있는 거지, 생각하게 만드는 드라마였거든요. 그런 작품이 많이 만들어졌으면 좋겠어요.

최근 보신 작품 중에서 그런 영화나 드라마를 꼽는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인생은 아름다워>를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좀 오래 되기는 했지만 <네 멋대로 해라>도 추천하고 싶네요. <쩐의 전쟁>도 메시지가 분명하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어요.

이제 알라딘 저자인터뷰의 마지막 질문입니다. <라디오 스타>의 마지막 질문 같은 거죠. 독자들에게 책을 한 권 추천해주신다면?

<김대중 자서전>을 추천하고 싶어요. 김대중이라는 한 거인의 삶을 통해서 한국 현대사를 공부할 수 있는 좋은 책이죠. 그리고 얼마전 재미있게 읽은 소설책이 <제리>인데요.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젊은이들의 표현이 가슴에 박히는 부분들이 있었어요. 인권 관련해서는 <미국과 대량학살의 시대>가 떠오르네요. 기독교 쪽에서는 조성기 선생의 소설 <야훼의 밤>이 20년 전 책이기는 해도 공동체의 문제를 깊이 고민한 책이라 추천하고 싶습니다.

오랜 시간 친절하게 답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멀지 않은 때에 새로운 책으로 또 뵙길 기대하겠습니다.  

 

1967년 서울에서 태어나 이사, 임지 변경, 유학 등의 이유로 여러 교회와 단체에서 신앙생활을 했다. 고려대 법대와 미국 코넬대 법과대학원을 졸업했고, 군법무관, 검사, 변호사, 한동대 법학부 교수를 거쳐 현재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에서 형법, 형사소송법, 형사정책 등을 가르치고 있다. <헌법의 풍경>, <평화의 얼굴>, <불멸의 신성가족>, <교회 속의 세상, 세상 속의 교회> 등 몇 권의 책을 썼다. 

트위터 @kdoos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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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sco98 2010-09-06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김두식 교수님의 책은 헌법의 풍경밖에 접하지 않았는데 다른 책들도 꼭 읽어보고 싶습니다.

인문MD 바갈라딘 2010-09-07 12:29   좋아요 0 | URL
<불편해도 괜찮아>가 가장 접근성이 좋습니다. 기독교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교회 속의 세상, 세상 속의 교회>를 권하고 싶네요.

수옹이 2010-09-07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김두식 교수님도 네 멋대로 해라, 덕후셨군요. ^^

인문MD 바갈라딘 2010-09-07 12:32   좋아요 0 | URL
네멋은 디비디 소장할 만한 드라마죠.

ziyeoni 2010-09-07 2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친구가 권해서 읽기 시작했던 <불편해도 괜찮아> 를 이제 제가 주변에 권하고 있습니다 ^^ 인터뷰 잘 봤습니다.
맞팔 관계다. 라는 말에 흠칫 놀라며 저도 확인해봤다는 ㅋㅋ

인문MD 바갈라딘 2010-09-08 10:30   좋아요 0 | URL
뭐, 맞팔이 특별한 관계는 아니니까요...

karen012 2010-09-08 0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편해도 괜찬은 사회가 빨리 오길 바랍니다.

인문MD 바갈라딘 2010-09-18 08:13   좋아요 0 | URL
조금씩이나마 진전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인권처럼 이미 상식이 되어버린, 그러나 현실은 크게 바뀌지 않은가치 문제가 아예 잘못가고 있는 문제보다 어려운 과제인 듯합니다. 더 세심한 관찰로 변화의 가능성과 여지를 찾고 실천해야 하니까요.

사고픈책 2010-10-19 0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린시각,좋은글(그리고 문장).,잘읽었습니다. 고운가을보내시길..

인문MD 바갈라딘 2010-10-20 23:40   좋아요 0 | URL
네, 한여름에 나온 이 책이 아직까지 많은 분들의 사랑을 받아 기쁩니다. 가을, 유독 아침 햇살이 좋은 계절입니다. 만끽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