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가지는 일에 흔히 연상되는 이미지는 귀여운 아기다. 임신하기 이전에 내가 아픈 아이를 낳을 수도 있다는 상상을 하거나 극심한 사춘기 반항아를 떠올리지는 않을 것이다. 비단 임신, 출산뿐만은 아니다. 완벽한 인생의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는 이미지는 역설적으로 현재 내가 겪는 일들을 비정상적인 것이나, 과도기적인 측면으로만 폄하하게 한다. 이 어려움만 지나가면, 다음에는 완벽한 이상향의 시기가 올 거야, 와야 마땅해 같은 생각. SNS에 수시로 업데이트되는 타인들의 찰나의 이미지는 행복한 장면들 뿐이다. 인생은 그런 순간들로 이루어져야 마땅하다는 생각은 더 강화된다. 


아이를 낳았다. 귀엽기야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아무도 아이를 낳으면 두 시간마다 일어나서 아이에게 수유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미리 알려주지 않았다. 잠이 들 만하면 다시 반사적으로 일어나 아이의 배고픔을 달래줘야 한다. 이 시기만 끝나면 평화로울 거야. 그러나 이후 아이가 걷기 시작하며 사방의 모든 것을 입안으로 집어넣기 시작했다. 잠시도 방심할 틈이 없었다. 높은 곳에 올라가 굴러 떨어지는 일도 다반사였다. 이제 유치원에만 가면 나에게도 자유가 올 거야. 기관에 가면 평화로운 시간은 막간에 아주 잠깐뿐, 끊임없이 각종 집단생활 때문에 감염병에 걸려온다. 뭔가 장기적인 계획을 세울 수 없다. 중요한 약속도 잡지 못한다. 아이가 드디어 학교에 간다. 드디어 본게임 시작이다. 사교육을 시켜도 시키지 않아도 온전히 그 선택은 나의 몫이다. 그렇게 비장하지 않아도 괜찮았겠지만, 그러나 내 아이 앞에서 완벽하게 쿨하기란 어렵다. 

그리고, 드디어 클라이맥스가 펼쳐진다. 사.춘. 기. 내 생살 같았던 아이를 떼어 놓으려면 이 시기의 혼란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언제까지나 엄마가 세상의 전부고 엄마 말이 전부라면 그 아이는 영원히 성장할 수 없다. 반항도 하고 거부도 하고 나만의 비밀스러운 세계도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말만 쉽다. 아이를 키우는 일은 이 세상의 불완전함과 불합리함, 삶의 부조리를 가장 실시간으로 농축하여 체험하는 일이다. 노력한다고 선의를 가진다고 다 제대로 풀리지는 않는다. 


















이 세 책에는 우리가 부모가 되는 일에서 감히 상상하지 못할 반경을 넘어 성장한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공통점은 이 세 아이들이 아프기 전 모두 부모에게 기쁨을 주던 빛나던 사랑스러운 아이였다는 점과 이들을 그 누구보다 사랑하고 최선을 다해 키우려 노력했던 부모들이 뒤에 있었다는 점이다. 바깥에서는 비난할 수도 있는 아이들의 모습 안에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한 부모의 헌신과 사랑이 있었다. 이들 중 그 누구도 자기 아이가 자라나 다른 아이를 가해하거나 약물에 중독되거나 양극성 질환을 앓게 될 거라 상상하거나 생각하며 아이를 대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그런 일은 우발적 사고처럼 일어난다. 

아이들을 키우는 일은 인생에서 가장 취약한 우발적 사건, 사고에 내 생살을 내어놓는 일과 다름 아니니까. 내 아이가 가해자가 되거나 피해자가 되거나 아플 수 있다. 언제나 건강하고 언제나 나를 으쓱하게 해줄 훈장으로 아이를 여기게 된다면 그것 또한 바람직하지 않다. 나의 에고는 아이로 인해 부풀어 오를 것이고 인생의 본질적 취약성, 유한성을 인정하지 않게 될 가능성이 높으니 말이다. 나의 성취를 나에게서 쉽게 떼어 놓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건강한 분리는 그리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세 책의 공통점은 또 하나 있다. 아이들이 정신적으로 아팠다는 점이다. 바깥으로 드러내어 놓지 않은 정신질환에 대한 편견은 사춘기를 만나 발현된 아이들의 질환에 대한 대처 또한 어렵게 했다. 사람들은 비난하고 쉽게 비판한다. 때로는 심지어 예비 범죄자로 아픈 아이들을 대한다. 최근 일어난 각종 사건, 사고들로 이런 편견들은 더 강화되고 있다. 정신질환자의 범죄에 대한 부모의 책임론에 대한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그건 정말 쉽게 이야기할 대목이 아니다. 내 품에서 벗어난 아이들에 대한 부모의 책임이 어디까지인가에 대하여 그 임계점을 상정하는 건, 가장 가깝지만 가장 멀어지는 그 부모, 자식 관계의 아이러니에서 가장 어렵고 복잡한 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아이는 태어난 순간부터 활시위에서 떠난 화살처럼 자유로운 존재이고 부모에게는 그 화살의 경로를 강제로 수정할 어떤 권리도 힘도 없다. 아이가 질병을 얻어 방황하거나 심지어는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되는 것도 인간사에서 다반사로 일어난다. 이 사실을 인식하고 아이가 준 행복했던 기억들은 이따금씩 열어보는 보물상자로 간직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딸이 조용히 무너져 있었다> 김현아


아이 대신 삶을 대입해도 말이 된다. 세 부모가 예상치 않았던 경로로 틀었던 아이들과의 시간을 통해 고통 속에서 성장하는 이야기는 우리의 성장과 도약이 때로는 우리가 가장 바라지 않았던 형태로 이루어질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그 통제할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이 지나고 난 자리에 남는 심오한 깨달음을 공유하게 해주어 저자들에게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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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 않음으로 말하는 이야기가 있다. 그 여백과 공백 사이로 핵심 메시지가 들고 난다. 많은 것을 말한다고 해서 그 모든 것을 이해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느 지점에서 멈춰야 하는지 덜어내야 하는지를 기민하게 의식하는 것만으로도 예술은 성립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윤희에게>는 드라마틱한 서사가 없다. 대학 입시를 앞둔 딸 하나를 이혼 후 홀로 키우는 윤희가 일하던 곳에서 휴가를 얻지 못하자 충동적으로 그만두고 딸과 함께 일본 오타루로 여행가는 게 주요 이야기다. 핵심은 윤희가 왜 하필 일본으로 무리해서 딸을 데리고 가느냐는 것이다. 거기엔 고등 시절 우정과 사랑의 경계를 넘나들었던 일본인 혼혈 친구 쥰이 있다. 쥰은 일본으로 가고 윤희는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과정에서 연락이 끊겼다 우연히 쥰에게서 편지를 받는 것이 그 계기다. 이렇게 이야기해도 이 영화의 깊이와 감동은 쉽사리 설명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영화가 울림을 가지는 지점은 그런 여백과 공백을 김희애라는 노련한 배우가 소화해서 연기하는 곳이고, 오타루의 눈이 부시는 설경과 그 설경 속에서 잔잔하게 흐르는 아름다운 ost고, 많은 것들을 서로 이야기하지 않지만 사랑하고 독립해 나가는 큰 딸과 엄마의 현실적인 교감의 지대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을 너무나 조화롭게 형상화해낸 연출의 역할이다. 


아주 오랜만에 많은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 반드시 많은 것을 동원할 필요는 없다는 각성을 준 좋은 작품을 만났다. 좋은 이야기를 좋은 방식으로 하는 일은 언제나 설득력을 지닌다. 



















라디오 PD 정혜윤 작가의 글에는 실재가 있다. 언제나 산 체험이 있고 절실한 경청이 있다. 물론 그 글이 언제나 전부 다 내 의견과 같다거나 전적으로 긍정할 수 있었다는 것은 아니다. 때로 다른 생각도 있었고 의문을 가질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글을 적극적으로 찾아 읽을 수 있었던 건 함부로 쉽게 무언가를 재단하고 쓰는 작가가 아니라는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다. 정혜윤 작가의 글에서는 어떤 에너지가 있다. 그 에너지는 이 세상의 연약하고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뜨거운 애정이다. 그 애정은 잊고 살았던 것들을 환기시킨다. 


예를 들면, 우리가 대구 지하철 참사 피해자 유족들과 지하철 노조 덕택에 불연재로 된 지하철 좌석에 타고 다닐 수 있다는 것. 그 이전에는 지하철 내부에서 화재가 생기면 쉽게 옮겨 붙는 가연재 재질의 지하철 좌석에서 위태롭게 졸고 있었다는 것. 아직도 그날 그 불붙은 지하철 안에서 "미안하지만 돈까스는 못해줄 것 같아." 라고 마지막 메시지를 자녀에게 보냈던 어머니의 죽음에 관련한 사연으로 울컥한다.


저자는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전범이 되어 사형당해야 했던 조선인 포로 감시원들의 잊혀진 사연도 이야기한다. 일본 식민지 시절, 다만 배를 안 곯기 위해 지원했던 연합군 포로 감시원직은 청년들을 졸지에 BC급 전범으로 만들어 버렸다. 평범한 대다수의 사람들처럼 대단한 명분도 악의도 없이 일본이 위에서 시킨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던 그들은 종전 직후 갑자기 천하의 몹쓸 죄인이 되어 사형당하거나 설사 석방되었다 해도 정신, 육체의 피폐함으로 평생 고통받으며 살아나간다. 자녀에게 때로는 자신의 과거를 숨기고, 당시 함께 일하다 죽은 동지들의 이름과 고향 주소를 적은 종이를 "우와기"에 넣고 다니며 세상에 드러내어 놓고 한탄할 수 없는 고통을 사는 그들의 증언은 뼈아프다. 왜 하필 그런 일을 했냐? 거부할 수는 없었냐? 고 묻는 일은 가볍고 그런 일들을 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상황과 이후의 그들의 비극적 삶은 한없이 무겁다. 자신의 무지를 죄악이라 여기며 죽어갔던 이십대 젊은이의 유서. 역사적 비극의 현장에서 개인의 개별적, 구체적 삶은 통째로 무시되고 폄하됐던 그들의 삶과 죽음 앞에서 숙연해진다. 


죽은 아기 돌고래 주위에서 먹이도 먹지 않은 채 계속 그 돌고래를 수면 위로 펌핑하듯 띄워 올리는 엄마 돌고래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해경이 그 아기 돌고래를 보트에 묶어 운반하자 엄마 고래 '시월이'는 휘슬 소리를 내며 계속 따라온다. 아기의 죽음을 알고 그 슬픔을 표현할 길 없었던 돌고래의 마음이 전해져 와 눈물이 났다. 세월호, 이태원, 그밖에 많은 사건, 사고들로 자녀를 잃은 부모의 마음은 차마 언어로 표현할 길이 없다. 


이 세상의 모든 약하고 덧없는 생명들에게 연민과 사랑을 전하는 작가의 마음은 결국 우리가 그러한 이야기들을 경청함으로써 좋은 삶을 발명해낼 수 있다는 믿음으로 확장된다. 모르니까 그러는 것일 뿐, 우리는 이야기를 듣고 앎으로써 결국 공감과 사랑으로 만날 수 있다는 그 믿음이 소중하다. 오늘 하루도 나는 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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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10-31 09:3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말씀하신 것처럼 특별한 서사가 등장하는 게 아니고 요란하지도 않은데요, 저는 <윤희에게> 를 보면서 울어버렸습니다. 하아-

blanca 2023-10-31 12:00   좋아요 3 | URL
저 ˝나도 네 꿈을 꿔.˝라는 김희애 마지막 대사에 울었어요. 완전 울컥하는데...이제는 연락이 끊긴 고등 때 단짝 친구가 떠오르더라고요. 감독이 각본까지 다 썼다는 얘기에 놀랐고요. 이미 김희애 여배우를 떠올리며 작업을 했다는 이야기도 흥미롭더라고요.
 
프로방스 숲에서 만난 한국문학
장클로드 드크레센조 지음, 이태연 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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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한국학 연구자가 쓴 한국 소설, 한국 문화에 대한 이야기다. 저자 장클로드 드크레센조는 마르세유에서 태어나 엘스마르세유 대학교에서 한국학을 창설한 사람이다. 이런 배경을 듣게 되면 흔히 설정하게 되는 기대치가 있다. 즉 대단히 심오하거나 한국적 정서에 대한 깊은 이해가 따르지는 않을 거라는. 그러나 이 책은 그런 기대를 보기 좋게 배반한다. 그 어느 한국인 평론가 못지않게 한국 소설에 대한 심오한 이해와 넓고 본질에 가닿은 해석이 놀랍다. 한유주, 장강명, 은희경, 김애란, 저자와 사적인 친분이 있는 이승우에 이르기까지. 미처 읽지 않은 소설에 대해서도 독자들이 충분히 그 내용이나 작가의 의도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하면서도 조심스럽게 스포일러가 되는 것은 지양하면서, 소설과 작가, 그것이 태어난 한국의 사회, 경제적 상황까지 심도 있게 고찰한다. 


특히나 이제는 사라져 가는 한국의 포장마차에 대한 아련한 정경에 대한 글은 한 편의 아름다운 단편 같다. 파란 눈의 한국 문학을 연구하는 프랑스인이 포장마차에서 한국어로 이제는 사라질 옛사람들과 밤새 나누는 일회성의 정담의 풍경은 박완서, 김승옥이 그렸던 포장마차의 풍경을 연상시킨다. 그는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을 우리보다 더 그리워하고 있다. 


한국의 MZ 세대가 느끼는 구조적 불안에 대한 해석 또한 냉철하다. 


그들은 그들의 자리가 없는 사회에서 살아야만 한다. 새로운 사회 규칙은 과잉 상태이다.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기준의 부족이 아니라, 기준의 과잉이다. 새 시대는 긍정의 과잉으로 특징 짓는다. 

-pp.42


우리가 기준의 과잉으로 억압하는 청년들에게 그들의 자리가 없는 사회에서 살기를 강요했다는 고백을 그 사회 속의 기득권인 기성 세대가 과연 과감하게 할 수 있을까? 이 책의 빛나는 지점은 여기에 있다. 애정을 가지고 이국의 문학을 연구하는 학자가 그곳에서 거주하고 그곳의 언어로 그곳의 글을 읽고, 그곳의 사람들과 교유하며 진단하는 여러 문제적 지점들은 우리가 흔히 연상하는 오리엔탈리즘에 근거한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가장 오리엔탈리즘과 대척점에 있을지도 모를 저자의 신중한 제언의 울림이 크다. 그리고 그 진동의 폭은 결국 저자가 한국의 작가와 문학에 가진 진심어린 애정 덕택일 것이다.  


저자가 예견적 시각이라 상찬한 우리 작가들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읽어보고 싶게 만드는 책이다. 누군가 하는 우리의 이야기 덕택에 우리의 이야기로 돌아올 수 있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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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서른다섯이 채 안된 아는 동생이 아직 다섯 살이 되지 않은 아이를 키우는 이야기를 들었다. 익숙한 어려움, 낯익은 환희들, 피곤함 등이 떠올랐다. 대체 서른다섯이 되는 것은 어떤 느낌이었나,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서른다섯 살이 되던 봄" 에 인생의 반환점을 돌고 있구나, 하고 깨달았던 것 같지도 않다. 스무 살의 봄은 생생한데 그 반환점의 기억이 흐릿하다니...


타당하다고 생각되는 수명이 일흔여덟에서 여든이 되고, 여든에서 여든둘이 되고, 여든둘에서 여든넷이 된다. 그런 식으로 인생은 조금씩 길어지게 된다. 그리고 어느 날, 사람들은 자신이 벌써 쉰이 되었음을 깨닫는 것이다. 쉰이라는 나이는 반환점으로는 너무 늦다. 백 살까지 사는 사람이 대체 몇 명이나 된단 말인가? 사람들은 그렇게 해서 저도 모르는 사이 인생의 반환점을 잃어가는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풀사이드> 중




여덟 편의 단편에는 하루키의 실명이 등장한다. 소설가가 청자로서 기능하고 우연히 마주친 화자들은 대부분 그 인생의 반환점에 다다랐거나, 혹은 그 이전 정도의 나이로 저마다 겪은 인생의 이야기를 하루키에게 털어놓는 방식의 이야기들이다.  하루키가 가장 자신 있었다는 이야기는 처음 실린 <레더호젠>이다. 이 이야기가 놀라운 것은 화자 역시 다른 이야기 속의 그들과 마찬가지로 젊지만 그녀가 이야기하는 오십 대의 어머니에 대한 인식이 당시 하루키의 나이를 생각할 때 놀라울 정도로 생생하다는 것이다. 은퇴를 앞둔 남편를 두고 독일에 홀로 여행을 떠난 중년 여성이 남편의 반바지를 구입하며 문든 남편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정확히 직시하게 되며 스스로의 반환점을 뒤늦게 만드는 이야기다. 그건 해피엔딩이었을까? 하루키도 그 이야기를 해줬던 아내의 친구도 섣불리 단정짓지는 않는다.  어떤 변화는 급진적으로 전개되지만 이미 그것은 그 사람속에 예정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루키가 유일하게 인생의 턴지점인 반환점을 삼십대 중반에서 오십대로 나름의 기준으로는 너그럽게 양보한 이야기다. 

















줌파 라히리는 이제 영어로 소설을 쓰지 않는다고 한다. 이탈리아에 이주해 이탈리아어로 글을 쓰고 꾸준히 번역 작업도 하는 모양이다. 개인적으로 그녀의 예민하고 섬세한 촉수로 이방인의 정서를 어루만진 글을 좋아하지만, 외국어로 이중의 이방자 의식을 조탁하며 만들어내는 이야기가 이제 점차 오십대 중반에 아이들을 독립해 보낸 중년의 쓸쓸함으로 가닿은 변화가 반갑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다. 반환점을 맞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 특유의 버석거림이 로마라는 이국적 도시의 정경과 맞물려 그녀 특유의 서정적 정조 아래 투명하게 드러난다. 문득문득 작가 자신의 고백이 아닐까, 하는 심증이 들었지만 그것조차 독자의 자의적 해석의 영역 안에 있을 것이다. 



우리는 나이라는 틀을 자의적으로 부여했지만 그 생물학적 맞물림은 거기에서 우리를 쉽사리 해방시키지 못한다. 내가 이 정도 나이이니 이렇게 행동해야 하고 느껴야 한다,는 사회적 기대가 그러하다. 실제 육체적 노화도 큰 준거점이 된다. 에너지는 떨어지고 그건 분명 삶의 반경을 제약한다. 잃어가고 타협하고 이해하게 된다.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아무도 섣불리 단정짓지 못한다. 반환점을 인식하지 못했으니 나의 반환점은 아직 오지 않은 건지도 모르겠다. 그 반환점이 오면 다시 턴하고 나에게 남은 시간들을 제대로 세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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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10-19 11: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역시나 너무나 좋은 블랑카 님의 글입니다.
저도 줌파 라히리의 신간 주문해 받았어요. 곧 읽을 생각에 설렙니다.

blanca 2023-10-19 16:32   좋아요 0 | URL
애정하는 작가가 있다는 건 또 그 작가가 신간을 낼 수 있다는 건 참 일상의 큰 기쁨인 것 같아요. 작가들의 부고가 뜰 때마다 참 마음이 안 좋더라고요.

스파피필름 2023-10-19 14: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블랑카 님 이 글 참 좋게 읽었습니다^^ 저도 주문했습니다.

blanca 2023-10-19 16:32   좋아요 1 | URL
스파피필름님, 감사합니다. ^^
 

열 살에게 어른의 세계는 위압적이다. 특히나 그 어른이 부모일 경우, 그 세계의 문은 닫혀 있다. 아무리 탈출하려 해도 불가능하다. 그 어린 아이가 어른이 되기 전에는... 그래서 넌 다시 어린이가 되고 싶냐,고 묻는다면 나는 단호히 고개를 젓는다. 아무리 좋은 부모라도 때로 그 부모가 믿는 세계가 얼마나 어린 아이에게 폭압적이 되는지 어른이 되고 나서야 알았기 때문에...


그건 도덕률이 될 수도 있고 때로는 종교가 될 수도 있다. 아이는 선택할 수 없다. 부모가 교회에 가라면 가고, 그 친구를 만나면 안된다고 하면 때로 사랑하는 친구와 헤어진다. 그게 부모의 사랑이라고 한다면 아이는 그걸 도저히 거역할 힘을 낼 수 없다. 그건 반역에 버금가니까. 사랑과 폭력의 경계가 얼마나 얇은지 에리히 프롬은 알았다. 그는 "통제와 폭력 행사는 불과 한 걸음 차이다" 라고 엄중히 경고한다. 내가, 어른이 상정한 완벽한 세계가 과연 절대적인가, 자문하고 의심하는 시간을 주기적으로 가지지 않는다면 나는 나도 모르게 아이를 그 세계 안에 우격다짐으로 구겨 넣게 될 위험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아이가 성장하고 난 후 기억하는 폭력의 시절이 될 수도 있다. 나는 사랑이라고 생각했는데.





뒤늦게 읽은 <1Q84>의 주인공 아오마메와 덴고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아오마메는 어린 시절 주말마다 폐쇄적 종교 단체에 속한 어머니의 전도 활동에 동행해야 했다. 덴고는 아버지의 회사 수금에 동행해야 했다. 그 아이들에게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일요일은 없었다. 아오마메와 덴고는 저마다 나름의 이유로 아픈 시간을 공유한다. 그러나 그 아버지와 그 어머니는 나쁜 사람들이었을까? 내 아이에게 내가 믿는 종교 활동의 전도에 동행하게 하고 나의 삶의 전장에 데리고 다니는 게 과연? 어쩌면  그들에게 그 행위는 하나의 사랑의 방식이라 여겨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들은 결론적으로 부모가 그럼으로써 아이다울 시간을 잃어버리게 된다. 


일요일에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마음껏 뛰어놀아야 하는 것이다. 사람들을 어르고 달래며 수금을 하거나 무서운 세상의 종말을 선전하고 다니거나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런 건-만일 그럴 필요가 있다면 그렇다는 것이지만-어른들이 하면 되는 것이다.

-1Q84


현실 세계와 덴고가 쓰는 허구의 이야기의 세계가 중첩되는 곳에서 아오마메와 덴고가 각자의 시간대를 살아나가며 그 상실과 아픔을 소화하고 마침내 재회하기까지의 여정은 선과 악의 경계와 옳은 것과 그른 것의 분별의 지점을 사정 없이 흔든다. 우리가 절대적인 가치라 믿는 것의 근간을 뒤흔드는 지점에서 끊임없이 혼란과 질문을 유도하는 하루키의 이야기는 그가 그린 달이 두 개 뜨는 세계만큼이나 몽상적이지만 도저히 고개를 돌리지 못하게 하는 마력을 지닌다.


슬며시 하늘을 올려다 보고 정말 달이 두 개일 수도 있다,고 믿게 만드는 건 이야기의 힘일까.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시간이 또 다른 차원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하나의 이야기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의심 또한 그렇다. 리얼리티에 대한 고정관념을 허무는 이야기다. 


사랑이라고 믿고 행하는 것들에 대해서도 돌아보게 만드는 시간이다. 그게 통제하고자 하는 힘으로 분출될 때 얼마나 위험해질 수 있는지에 대한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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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3-10-11 12: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Q84 개정판으로 읽으셨군요~!
3권이긴 하지만 너무 재미있어서 재독하게 되더라구요.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하루키 특유의 이야기는 최고인거 같아요! 오늘밤 달이 두개 떠있는지 살펴봐야 겠습니다 ㅋ

blanca 2023-10-11 14:46   좋아요 1 | URL
진짜 이상한게요. 완전 허구잖아요. 그런데 달을 자꾸 보게 된단 말이에요. 오늘 달이 두 개 뜰지도 몰라, 이러면서...하루키 월드에 빠졌습니다.

다락방 2023-10-11 14: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휴 글 너무 좋네요. 이 글 읽으니 이언 매큐언의 <칠드런 액트> 도 생각나고요. 덕분에 이 책 다시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저는 이 책 읽고 남아있는 기억이라곤 아오마메는 고환을 걷어찰 수 있다는 것 뿐인데요...

blanca 2023-10-11 19:43   좋아요 0 | URL
ㅋㅋㅋ 댓글 읽고 벌써 잊어버렸었네, 이랬어요. 정말 독특한 캐릭터죠. 저 1권 읽다 몇 번이나 빵 터졌는지 몰라요. 하루키 초기작 속 여주인공들은 남주의 대상화가 보여서 거부감 드는데 여기에서는 완전 쎈 언니들 대거 등장해서 속이 다 시원하더라고요.

자목련 2023-10-11 16: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Q84, 읽었는데 내용이 하나도 기억이 안나요. 주인공 이름은 익숙하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ㅎ

blanca 2023-10-11 19:44   좋아요 0 | URL
저는 읽기 전부터 이 두 주인공 이야기는 종종 봤던 것도 같아요. 저는 요새 재독하는 책들이 좀 있는데 다 처음 읽는 것 같아 깜짝깜짝 놀라요.

은하수 2023-10-11 17: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고 그 다음 권을 한동안 계속 기다렸잖아요!
좀 더 희망적인 내용을 기대하면서요.
3권이 끝이라는게 믿기지 않았어요. 그 마음은 지금도 그렇구요^^

blanca 2023-10-11 19:45   좋아요 1 | URL
그죠, 은하수님. 이건 끝이 아니야, 같은 여운이 길어서...그래서 둘이 돌아온 세계는 어디였을까, 정말 궁금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