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게 드라마 <응답하라 1994>를 다시 제대로 정주행 중이다. 나정이를 둘러 싼 그 묘한 애정 기류들에 나도 덩달아 자꾸 설레어 당황스러울 때가 있다. 마흔의 아줌마와 볼살 통통하고 걸핏하면 짝사랑과 그것이 응답받는 착각에 빠지곤 했던 그 대책 없던 스무 살의 간극은 몇백 광년 같다. 스무 살의 오월 나는 짝사랑에 빠졌다. 너무 큰 애정과 그 응답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실의와 넘치는 그 사람을 다 안을 수 없는 내 보잘것없음에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오열하기도 하며 파란만장한 연애사를 쓰던 시간들은 다른 차원의 다른 삶, 때로는 하나의 과장된 허구 같다. 정말 그 때 그 아이는 나였을까? 그렇다면 그러한 내가 썼던 그 오글거리지만 원없이 사랑했던 시간들은 어떻게 이 억겁의 시간 안에 쌓일까, 혹은 사라질까, 여전히 그 차원에서 그 공간에서 그 일은 현재진행형일까도 싶고. 하여튼 말로 담을 수 없는 온갖 회한과 공상과 그리움은 그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할 막무가내의 열정과 헌신과 범벅이 되어 기억의 화석이 되어 가끔 돌아보게 된다.

















영문판 표지만 봐도 이 소설의 사랑이 어떤 종류일지 대강 짐작할 수 있다. 남녀 간의 사랑이 아니라 열일곱 소년 엘리오와 그의 이탈리아 집에 부모님의 젊은 학자들의 책출간 후원의 일환으로 초대받게 된 이십 대의 미국 청년과의 감각적인 이끌림을 처절할 정도로 정묘하게 묘사한 이야기다. 비단 퀴어 로맨스물로 한정되어 이해할 수 있는 소설이 아니라 누구나 통과의례처럼 겪게 되는 성장통과 첫사랑이 어떻게 어우러져 한 사람의 삶에 저 나름의 의미를 가지게 되는지에 대한 예리한 통찰이 보편적인 공감을 얻게 되는 작품이다.


특히 함께 자전거를 타고 엘리오의 단골 동네 서점에서 스탕달의 처녀작 두 권을 나란히 나눠 갖는 장면. 엘리오는 자신의 성소, 이미 올리버가 자신의 삶으로 들어오기 이전부터 그를 꿈꿨던 그 곳으로 그를 안내하는 듯한 느낌에 전율한다. 이때의 엘리오의 시점은 복합적이다. 그 둘만의 내밀한 시간이 어떻게 서로의 삶 안에서 기억될지를 앞서 예감하고 인식하는 한편, 미래에 이미 나이들어버린 엘리오가 관조하는 과거의 추억의 생생한 복원처럼 느껴지는 복합적인 시선은 시간이라는 자장 안의 일련의 사건들을 여러 차원에서 더 깊이 있고 넓은 차원에서 재해석하게 된다. 경험하는 나와 서술하는 나와 기억하는 나와 예견하는 나는 흠결없이 하나의 늙어가는 몸 안에서 섞인다. '응사'를 보며 추억하는 스무 살의 나와 그 스무 살이 기억하게 될 스무 살의 일들과 지금 내가 추억하는 그 스무 살의 일들은 각각 다른 차원에서 통합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 때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 때 그 사람과 헤어지지 않았다면. 시간이 아주 많이 지나 담담하게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난다면. 이러한 가정은 그 당시의 그 무모한 열정에 색깔을 더 입히지도 그 것을 바래게 하지도 못한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가정들을 무용한 것으로 만들고 그 교감, 그 열정, 그 치기 자체를 쓰다듬는 애치먼의 언어의 결의 섬세함과 예리함은 경이로울 정도다. 결국 이것은 하나의 짧고 강렬한 사랑 이야기로 삶과 인간 자체를 제대로 시간의 격자 안에서 탐구하는 진지한 철학으로까지 확대된다.


열일곱은 내 경험상 자신 앞에 펼쳐질 삶을 시간의 축소 안에서 조망하는 게 아니라 무한한 공간으로 인식하게 되는 나이인 것 같다. 그렇다면 엘리오의 시선은 엘리오의 열일곱의 시선이 아니라 철저하게 이미 시간이 지나버린 중년의 그가 재해석하는 내면의 가정에서 다시 탄생하는 이야기다. 그 정교한 장치 안에서 결국 청춘은 어리석고 근시안적이어야 제대로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통찰과 예지가 실수와 무모함과 어리석음을 강타하는 시간은 그들의 것이 아니다. 그래서 조금 넘어져도 조금 너무해도 다시 복기할 이야기가 있는 중년은 그 치기의 시간을 소중이 다시 주워담아 구석에 쌓아두려 한다. 


'너'를 만나러 '나'는 간다. 햇살은 눈부시고 나는 너를 보면 눈이 부시고 자꾸 눈물이 나려 해서 제대로 쳐다볼 수조차 없다. 나는 '너'를 사랑하거나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경외한다. 너가 나중에 그렇고 그런 아이로 판명이 난다고 해도 난 그 때 그랬다. 엘리오처럼. 다시는 내 생에 다시 오지 않을 감정이라는 걸 나는 그때 알았으니까. 그렇게 나는 기꺼이 무모한 멍청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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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계 미국인 모델이 우연히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원폭 투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방송에서 듣게 됐다. 그녀는 피해자로서의 자신들의 억울한 입장을 토로했다. 죄없는 민간인들의 피해에 가슴 아파했고 미국인 진행자도 그녀의 이야기에 안타까워 했다. 그녀의 입장이 이해가 갔고 나 역시 전쟁의 가장 증오스러운 면이 그 전쟁에 동조한 적 없는 죄없는 민간인들의 학살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에서 2차 세계대전에 있어 일본의 가해자로서의 책임은 통째로 빠져 있었다. 일본 또한 죄없는 수많은 여자, 남자, 아이들의 학살의 책임의 당사자가 아니었는가. 그 책임의 통감도 제대로 된 배상도 반 세기가 훌쩍 지난 현재에 제대로 이루어진 바가 없다. 나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전혀 개인적 유감이 없는데도 화가 치밀어 올랐다. 무언가를 제대로 알고 논박할 처지어서가 아니라 그냥 본능적으로 감정적으로 속에서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내가 대단한 애국자여서거나 역사에 정통해서가 아니라 이제 남은 자들이 과거의 역사적 사실 중 일부만을 전면으로 내세우며 그 빠진 나머지가 가지는 그 처절한 무게와 진실의 핵을 묻어버릴 경우 얼마나 왜곡된 이야기로 역사가 변질될 수 있을까 싶어 두려웠다. 말하지 못하는 수많은 힘없는자들은 남은 자들의 입과 펜 끝에서 자신을 제대로 변호할 기회조차 갖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테우리'라는 이국적인 말은 한국민속대백과사전에 의하면 "제주도의 주특별자치도에서 목축(牧畜)이나 목축에 종사하는 이들을 관장하는 신. 제주도 에서는 목축에 종사하는 사람, 곧 목동(牧童)이나 목자(牧者)"를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현기영의 '마지막 테우리'는 일흔여덟의 이 마지막 테우리 노인의 차마 말하여질 수 없는 슬픔에 관한 이야기다. 그것은 개인의 것이기도 하고 역사적인 것이기도 하다. 역사라는 올가미 속에 개인의 삶이 포박당해 어쩔 수 없었던 개인의 그 무참하게 짓밟힌 자유 의지에 관한 회한이기도 하다. 현기영의 절창은 노인의 눈을 통해 역사와 무관하게 형형하게 빛나는 자연을 묘사함으로써 그 자연이 품어 온 수많은 범인들의 짓밟힌 삶을 더 한없이 연약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복원한다. 


한철이 끝나버린 목장은 바야흐로 초겨울 특유의 눈부신 빛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스러져가는 생명이 마지막으로 발산하는 아름다움. 눈부신 금빛의 들판과 오름들, 서리 깔린 듯 하얀 억새꽃 무리들, 구름이 그림자를 던지며 지나갈 때마다 마치 마지막 숨을 몰아쉬듯 밝았다 어두웠다 하고 있었다.-현기영 <마지막 테우리>



제주 4.3 사건 또한 역사 속에 음각되어 있던 수많은 민간인들의 희생이 비교적 최근들어서야 제대로 된 진상 규명 요구와 맞물려 드러나고 있다. 현기영은 실제 제주도에서 어린 시절 마을의 몰살을 목격하게 된다. 그의 이야기는 이 비극을 중심으로 파편화된 개인들의 아픈 상처를 형상화하고 있다. 너무 참혹해서 차마 입에 올릴 수도 없는 그 죄없는 죽음들은 반문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반문된들 도저히 얻을 답이 없으니 그 질문은 다시 허공의 메아리로 눈물과 만난다. 일제의 지배를 벗어나 분단된 나라가 아니라 통일 정부를 수립하자는 오빠, 형, 동생들의 요구는 죄없는 가족들의 몰살로 돌아왔다. 왜 죽어야 하는지 왜 맞아야 하는지를 과연 누구에게 어떻게 물을 것인가. 


제주도라는 아름다운 절경의 섬 안에는 이렇게 아픈 역사가 있었다. 제대로 말하여지지도 딱지가 앉지도 못한 상처에서는 아직도 진물이 흐르고 있다. 작가는 고향의 아픈 역사를 우직하게 노래하고 있다. 이제서야 비로소 말하기 시작하여진 것들.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감정적으로 동요했다. 하지만 제대로 적절하게 나의 마음과 입장을 설명한 언어를 찾지 못하는 당황스러움도 그 감정의 일부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사실을 나의 언어로 다시 재정립해서 제대로 설명하고 논박하려면 나의 바깥을 흐르는 역사적 사실들을 내 안으로 먼저 끌고 들어와야 가능하다는 것도 알았다. 개인은 역사 바깥에서 별개의 개인적 삶을 꾸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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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이는 책을 좋아하는 편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아이패드를 할 때 "책 좀 읽어."라고 잔소리하는 엄마라니, 이건 영 아니다, 싶기도 하다. 독서를 강요할 수 있을까? 자꾸 나의 어릴 때를 떠올리게 되지만 그 때에 지금과 같은 스마트 기기에 대한 접근성이 있었다 해도 내가 과연 책을 읽었을까?, 자문하면 자신이 없다. 아이가 듣는 가요가 벌써 시끄럽게 느껴지는 걸 보면 내가 육학년 때 신해철의' 재즈까페'를 들으면 시끄럽다고 불평하던 엄마를 보며 왜 그럴까? 이 좋은 노래가 시끄럽다니, 했던 모습과 겹친다. 결국 나도 이렇게 꼰대가 되어 가는 걸까?

















솔직히 이 책의 제목이 솔깃하기도 하고 거부감이 들기도 했다. 톨스토이까지 공부와 연결시켜야 하는 세태라니. 하지만 우리 아이도 톨스토이가 너무 자주 회자되어 도리어 접근성이 떨어진 작가인 만큼 진가를 마음으로 알아주었으면 싶었다. 톨스토이는 지루하거나 어려운 이야기를 쓴 작가가 아니다. 아이들 눈높이에서 쓴 다소 교조적이기는 하지만 흥미롭고 쉬운 우화 형식의 이야기도 많다. 어렸을 때 접한 톨스토이의 이야기는 주인공들 이름이 죄다 '이반'이라 러시아의 철수 정도의 이름인 줄 알았던 기억이 난다. 아이는 제목을 접하고 좀 두려워하는 눈치였지만 이 책을 통해 톨스토이 할아버지에 대한 입문을 했다. 생각보다 너무 재미있다고 계속해서 반복중이다. 


"엄마, 그런데 <안나 카레니나> 내용은 대체 뭐야?"

"그건 음, 그건 말이지."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대체 결혼 생활 밖에서 사랑을 나눈 안나의 삶에 대해 어떻게 이 어린이 앞에서 설명해야 하나 난감해졌다.  나는 결국 이렇게 얼버무리고 말았다.


"그게 참, 결혼을 했는데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데 그래서... 그게 주는 아닌데 삶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데 진짜 감동이야."


아이는 어리둥절한 모습.


"나도 읽어보고 싶은데..."


최악의 <안나 카레니나>에 대한 설명 아니었나 싶다. 아니, 나는 지금도 나를 살 떨리게 했던 <안나 카레니나>가 왜 감동이었냐고 묻는 사람 앞에서 제대로 설명해 낼 재주가 없다. 내가 받은 감동과 톨스토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와 듣는 자가 원하는 이야기는 이렇게 또 엇갈린다. 요새에 들어서야 언어의 체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그 수많은 진짜들에 숨이 차다. 말하여질 수 없는 것들과 도저히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답답하다. 그냥 느끼고 원하는데 그걸 언어로 담으려면 벅차다. 몇 마디로 진짜를 이야기하고 싶은데 얼크러진 헛소리가 자꾸 나온다. 그러면서 더 멀어지고 더 헤매는 듯한 혼란에 때로 자괴감이 든다. 

















아이가 언젠가 <안나 카레니나>를 제대로 읽고 그 벅찬 감동을 내가 하지 못했던 언어로 제대로 표현해 내주었으면 좋겠다. 나는 도저히 이 이야기를 담아내어 적절하게 표현할 언어를 아직도 찾지 못했으니까. 그게 가능한 건지도 확신이 안 선다. 나날이 더 배우고 더 잘 하고 싶은데 어느 지점을 넘어서면 그게 아니라 퇴락일지도 모른다는 예감은 정말 선뜩하다. 무한한 길이 뻗어 있고 공부 할 수 있는 여지와 영역이 펼쳐져 있었던 시간들이 아득하다. 그게 착시였을 지라도 그러한 착각이 허용되던 그 시간들이 눈물겹게 그립다. 한번 지나오면 다시는 돌아가지 못하는 것일까? 아직 나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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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 (리커버 특별판)
메리 셸리 지음, 김선형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3월
평점 :
품절


나이가 들면서 절대선과 절대악에 대한 확신이 흔들린다. 특히 한 인간이 선의 구현 그 자체이거나 악의 화신이라고 단정짓기 어려워졌다. 모든 상황 논리 앞에서 선악의 경계 그 자체를 모호한 것으로 지워버리자는 것은 아니지만 여하튼 선한 얼굴 뒤의 어두운 비도덕적 행위나 악행들에 묻힌 선한 대목들을 끊임없이 목도하다 보면 생명이 가지는 가변성과 역동성은 인간이 추구하는 불변의 것들의 근간 자체를 뒤흔들 수도 있겠구나 싶다. 사람은 너무나 복잡하고 삶은 점액질이다.


너무 많이 들어 진부해진 고유명사는 어느덧 대명사처럼 녹아들어가 그 고유의 본질 자체를 놓치기도 한다. 나에게는 '프랑켄슈타인'이 그랬다. 잘 알지 못했던 이 괴물은 어느새 너무나 자라버려 나에게는 '악의 '화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으로 다가왔다. 나는 '프랑켄슈타인'을 오해했다.


<프랑켄슈타인>의 화자는 프랑켄슈타인도 그가 만들어 낸 괴물도 아니다. 청자는 독자가 아니다. 북극점 탐험을 떠난 로버트 월턴이 누이에게 보내는 서간문은 프랑켄슈타인의 서사를 두 겹, 세 겹으로 감싼다. 말하여지는 진실은 이미 날것 그대로가 아닐 것이다. 의도하지 않은 탄생은 그것이 어떻게 삶의 우연들과 불가역성과 만나 악으로 변질되는지에 대한 자기 서사를 다른 이의 삶을 관통하여 해명한다. 이 세 개의 삶은 어쩌면 애초부터 별개의 것이 아니었는지 모른다. 결국 대원들의 안전을 위해 자신의 야망을 접게 되는 탐험가도 의도치 않게 자신의 야망 너머에서 악의 결론을 몸소 경험해야 했던 남자도 선의와 애정을 기대했던 만큼 돌아온 배신에 절규하며 악으로 갚게 되는 괴물도 기실은 한 인간의 내면에 다 함께 지니고 있는 본성으로 치환된다. 관찰하는 자, 욕망하는 자, 그 욕망의 화신은 모두가 다 '나'이다.


괴물은 바로 나 자신의 흡혈귀, 무덤에서 풀려나 내게 소중한 것들을 모두 파멸로 몰아넣을 내 자신의 생명이었다.


빅토르의 고백은 괴물의 탄생 그 자체가 자신의 내면 그 자체에서였음을 보여준다. '나 자신의 생명'은 그렇게 나 자신의 금제를 뛰어넘을 욕망의 숨결을 통해 세상에 마침내 현현한다. 이쯤 되면 프랑켄슈타인 자체가 괴물로 육화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든 사랑하는 것들을 마침내 파괴하고 마는 그 욕망의 종착점은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나 자신이다. 


창작 당시 십 대의 메리 셸리가 선과 악, 인간과 괴물의 경계 자체를 지워버리고 확장하는 지점의 언어는 역설적으로 아름답고 투명하다. 괴물의 목소리는 떨리고 그의 어휘는 때로 자신의 어두운 숙명을 그 자체로 이해받을 수 있을 정도로 예리하고 설득력이 있다. 참담한 현실은 언어의 집에서 안식을 찾는다. 이야기해질 수 있을 때 인간은 산다. "불행이 나를 악마로 만들었다."는 괴물의 절규는 메리의 이야기가 나아가는 과녁이 인간과 삶이 만날 때 벌어지는 일들 속에 인간이 강제로 부여한 규약, 관습, 통례 들은 판단의 준거가 되기 힘듦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괴물의 이야기가 아니다. 누구나 될 수 있는 사람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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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개와 폭우로 음산한 여름밤, 시인 바이런은 문학사에 길이 남을 제안을 친구들에게 한다. 무료하게 실내에 칩거하며 보내기엔 아까운 시간들을 타인이 이미 완성해 놓은 이야기들로 채울 것이 아니라 직접 으스스한 유령 이야기 같은 것들을 만들어 경연을 하자는 것이었다. 마지막에 살아 남은 이야기는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이었다. 19세기 초, 유부남과 사랑의 도주를 감행한 소녀의 상상력이 만들어 낸 어쩐지 처연하게 느껴지는 괴물의 이야기는 시대적 공분을 샀다. 여성 예술가는 프랑켄슈타인 못지않은 괴물로 치부되는 시대였다. 상당 기간 수많은 창작의 영역에서 영감, 모방, 복제의 원천으로 끈질기게 살아남은 괴물은 심지어 그녀의 남편 퍼시 셸리의 것으로 왜곡되기도 했다. 괴물을 낳은 여자는 괴물 그 자체여야 했다.



   















<프랑켄슈타인>을 읽고 나니 대체 이런 인간의 양면성과 내면의 복잡다단함을 투명하고 명징한 언어로 시처럼 묘사한 작가의 삶은 어떤 것이었을까 궁금했다. 대략적인 약력만 봐도 결코 평범치 않은 삶이었다. 21세기에도 시의성을 잃지 않고 디스토피아적인 미래의 전망에서도 소환되는 프랑켄슈타인이 벌써 이백 년도 전에 스무 살도 안된 소녀에게서 태어났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서사의 발원점처럼 느껴졌다. 메리 셸리. 그녀의 이름이다. 게다가 그녀의 어머니는 페미니즘의 주창자라 해도 과언이 아닐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다. 똑같은 이름의 모녀는 기실 제대로 눈을 마주친 적이 없음에도 딸이 삶 자체로 어머니의 못다 이룬 꿈을 실현함으로써 강하게 결속된다.  이 전기는 그러한 모녀의 일대기를 교대로 풀어나감으로써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해체하여 페미니즘의 견인의 역할을 하게 된 두 여인의 질곡 많은 삶을 생생하게 복원해 낸다. 출산 휴유증으로 채 보름도 함께 하지 못한 어머니와 딸은 격동의 시대에 그 시대의 압력과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삶으로써 만난다. 18세기에 이미 불행한 결혼 생활로 고통 받는 자매가 독립할 수 있도록 독려하고 결혼 제도 밖에서 딸을 출산하고 그 딸을 데리고 삼십 대 후반에 메리의 아버지가 될 고드윈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여성의 인권을 남성과 동등한 시점에서 역설하는 책을 펴내 수많은 사람들의 질타와 잔인한 언사를 견뎌내며 여전사처럼 살아나가는 어머니 메리의 삶은 딸이 마침내 남성과 동등한, 아니 어쩌면 한 발 더 나아간 경계에서 만들어 낸 <프랑켄슈타인>의 발원점 그 자체다. 딸 메리가 아버지의 눈을 피해 어머니의 무덤 근처에서 연인 퍼시 셸리와 데이트를 하며 어머니의 책을 함께 읽는 장면은 상상만으로도 도발적이다. 


사랑과 자신이 추구하는 대의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모녀의 모습은 인간적으로 보이면서도 안타깝다. 메리 셸리는 자신의 생살을 찢어내는 것만 같은 자녀의 죽음을 무려 네 번이나 겪어야 했다. 남편 퍼시 셸리의 여성 편력과 계모의 딸 제인 클레어몬트와의 기이한 삼각 관계 또한 지난하게 그녀를 괴롭힌다. 혈연으로 얽힌 관계도 아닌 이 두 자매의 삶이 끊임없이 연결되는 지점도 흥미롭다. 독립적인 삶과 여성의 인권에 대한 깊은 이해와 지지, 투신에도 사회에서 전방위로 가하는 압박과 비난, 배척은 두 모녀에게 깊은 상실감과 우울감을 남긴다. 상흔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페미니즘은 갑각류의 갑옷이 아니었다. 자신을 던져 인간의 근원적 존엄함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결여한 사회를 설득하려 했던 모녀의 희생과 노력은 결국 후세가 걸어갈 자양분이자 숙제가 되었다.


어머니도 딸도 자신들의 숙원이 자신들의 세대에서 완수되지 못할 것임을 예견했다. 항상 후세를 의식했고 뒤에 올 시대를 기대했다. 서로의 기억과 서로에 대한 희망은 작고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메리는 메리를 기억하고 사랑하고 신뢰했다. 그리고 그 근저에는 인간이 성차를 떠나 동등하게 존엄하고 행복할 권리가 있음에 대한 깊은 자각과 이해가 있었다. 


이 어마어마한 두 생애를 현재의 것에 버금가게 복원해 낸 작가의 노력과 그 생애에 대한 깊은 애정과 경탄이 배어나오는 활자들이 경이롭게 느껴졌다. 죽음은 많은 것을 파괴하고 지워버리지만 끝내 죽음도 지고 마는 것이 있음을 의식하게 만드는 책이었다. 
















으슬으슬 비가 내리는 비로 계속 된 실내 생활에 진력이 날 대로 나 불곁에 모여 앉은 바이런, 퍼시 셸리, 메리, 포리도리, 클레어는 메리 셸리가 악몽에서 세기를 넘어 영생을 누릴 프랑켄슈타인을 마침내 창조하게 될지 예감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날의 그 자리에 살짝 동석해 보고 싶다. 아직 다 저마다의 삶의 고통으로 지치기 전, 빛나는 청춘들은 위대한 창조의 현장에 증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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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8-04-04 23: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 읽다 으슬으슬 등 뒤가 썰렁하게 느껴졌어요 ! ^^ 이미 완성해 놓은 글을 읽는 1인이..

2018-04-06 13: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07 02:5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