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엔 영혼이 몸을 경멸적으로 보았고, 그 당시엔 그러한 경멸이 최고의 것이었다.
영혼은 몸이 야위고 끔찍해지고 굶주리기를 바랐다. 그렇게 하여 영혼은 몸과 대지로부터 벗어날 셈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 그 영혼 자신이 야위고 끔찍해지고 굶주리게 되었고, 그리고 잔혹함이 그 영혼의 환락이었다.
그러나 나에게 말해다오. 나의 형제들이여,
너희의 몸은 너희의 영혼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지를. 너희의 영혼은 가난이며 더러움이며 가련한 안락이 아니던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춤이 땅 위의 인간과 신을 연결하던 시대가 있었다.
고독한 인간은 알 수 없는 언어를 해석하고 싶어했고, 절대적인 존재와의 관계를 통해서 안정을 취하려 했다. 샤먼은 누구나 될 수 없는 것이었지만, 모두에게 존재했다. 하지만 국가는 샤먼을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 신은 죽어 버렸고, 인간은 인간을 찾는 춤을 추게 된다. 
신체를 구속함으로써 권력을 쥐는 사회는 소통을 경계한다. 입이 되어 저항을 잠재웠으며, 눈이 되어 의식에 사슬을 채웠다. 그렇게 군림하는 자는 감각을 지배함으로써 탄생한다.
타자에게서 느껴지는 살내음과 체온으로 자신을 찾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경멸의 대상이 된다. 춤은 표현이며 소통이기에 그들은 몬스터가 되어야만 했다.

그들이 컴컴한 실내에 모여들었다. 그곳은 관이며 죽음이다. 흘러간 노랫가락은 장송곡처럼 울린다. 추자, 추수, 리에, 똑똑이, 꽃님이라 불리던 한 여인을 두고 서로의 이야기를 하지만, 각자의 몸짓은 엉킨 스텝마냥 엉성하다.
그녀의 죽음에서 드러나는 것은 현대인들이 느끼는 무산한 자아의 몸짓이다.
수 많은 이름으로 명명된 삶, 그 삶을 비추는 '조명', 조명 없이는 헤쳐갈 수 없었던 여인의 목소리는 구슬픈 듯 하다. 누구의 말대로 '밥상만 차려놓았다'. 거칠어서 씹어먹기엔 소화장애를 불러올 듯한 연출이 인상적이다. 미디어 아티스트가 참여했다는데 텍스트와 영상, 그리고 무대의 접목은 '신선한 듯' 했으나...   현대인들이 느끼는 영혼의 굶주림, 이름도 없이 스친 사람들, 누군가의 꿈으로 재생될 모습들의 혼란스럽고 산만한 느낌에 묻혀버렸다.

카바레 무대와 관객의 거리는 참으로 멀었다...
춤을 추었고, 육체의 향연으로 소통하려 했다.
하지만 그 언어의 잡스러움에 고막은 지지직거릴 뿐이었다.
스테이지~... 아마도 그 스테이지는 그들의 몸짓을 담을 만한 공간이 아니었나 싶다.

 

 

<와이키키 브라더스> 오지혜 '사랑밖에 난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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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의 귀환 -

"모든 정체성이 관계적이라는 것, 또 각각의 모든 정체성의 실존 조건이 어떤 차이의 긍정,
즉 '구성적 외부' 역할을 할 하나의 '타자'를 결정하는 것임을 우리가 받아들일 때,
우리는 적대가 일어나는 방식을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의 경계를 설정해 '우리'를 창조하는 것이 관건인 집단 정체성 형성의 영역에서는,
우리와 그들의 관계가 친구와 적 유형의 관계로 전환될 가능성이 항상 존재한다.
달리 말해 슈미트의 용어 이해에 따르면 이런 관계는 항상 정치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샹탈 무페 『정치적인 것의 귀환』



비극의 리어왕이 정치적으로 귀환하였다.
운명의 비극에 피눈물을 흘리던 리어왕이 관계의 폭력성에 피눈물을 흘린다.
적을 규정하고 성벽을 쌓고 결국엔 그 모든 것들로 무너져 내린다.
계급과 권력, 욕망과 폭력의 얽힌 실타래는 푸는 자의 몫이 아니었다.
잘라내고 제멋대로 이어붙이기만 한다면 그 누구의 것이라도 되는 것이다.
그것은 똘똘 뭉친 무지로, 몰이해를 품고, 일방적으로 가능하게 했던 인간의 방식이었다.

혈관에 꽂는 주사기처럼,
너와 나를 가르는 결계처럼,
구분된 인간 계급처럼,
태어날 때부터 자식과 부모로 규정된 혈육처럼,
선택할 수 없는, 선택되어진 이름 없는 모든 것들에게 폭력이라는 이름을 새긴다.

그러나 폭력의 명암은 좀 더 면밀하게 그려낼 필요가 있다.
너무나 다양한 성질의 것을 동질의 것으로 묶기엔 그 방식 자체조차도
폭력적이기 때문이다. 

권력 본연의 얼굴은 과연 피칠을 한 유령의 모습이었을까..
절뚝거리는 인간의 역사에 절망과 허무만이 가득하다면,
이 연극은 무엇을 말했어야 하는가...
고전의 재해석은 새로움이 아닌 이미 알고 있는 것에 각성을 던져줄 뿐이었다.

연출에 있어서는 지나치게 깜짝놀래키려는 음향과 시각효과로
관객에게 폭력성 그 자체를 노출시키고 있다.
극의 몰입과 장악력을 확대하려 한거 같은데, 세련된 방식은 아닌지라 투박함만 더했고,
3시간동안 중견 연기자의 열연이 없었더라면, 그 공허의 무게는 엉덩이에 더 심한 피로감을 누적시킬 뻔 했다. 

 

   
  나의 삶을 보노라,
물가의 검은 나무 한 그루의 나무.
가지들은 눈물로 덮여 있다.
눈물이 빛을 받아 반짝거린다.
바람은 눈물을 하늘로 날린다.
그리고 나의 눈물이 내게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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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당시에는 엄청 심각했던 이별도 사랑도 추억이 되면 '피식' 웃음을 주게 될까..
꾹꾹 눌러짠 감정의 무게를 세월이 덜어줘서?
기억의 파편은 '형상기억합금'처럼 아름다움의 원형으로 되돌아가는 성질을 갖고 있어서?
아마도 70년 전 히치콕 감독이 만든 스릴러 '39계단'에서 스릴, 서스펜스~!를 쑥 들어가도록 '피식' 거릴 수 있는 것도 '세월'이 보여준 힘이 아닐까...

그것은 영화의 화려한 기술이나 기법이 진화했기 때문이 아니라,
(심형래 영화가 아무리 돈칠을 해도 심형래표 영화의 한계를 지니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 캐릭터들을 한발작 떨어져서 바라볼 수 있어서이다. 
갈등과 불안에서조차 느껴지는 허술함, 인간의 감수성이 세월과 시대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고 있는지를 반증할 뿐이다.

과거는 우습고 현재는  진지하고 미래는 발걸음을 떼기 조차 힘든 이 선형의 무게감은 어찌됐던
이 연극이 차용한 중요한 요소이다.

코믹! 스릴러~

스릴을 코믹하게 화학적 변질을 일으킨 중요한 또 다른 장치는 '공간'이다.
소품의 배치와 사용만으로 비좁은 무대를 200% 활용하는 뛰어난 무대 연출은
관객의 상상력을 마구 뽑아 먹는다.
무대는 연극이면서 관객의 머릿속이다.
시각과 인식의 매듭을 교묘하게 엇지르는 이 유쾌한 상상은
대중매체의 값싼 비쥬얼과는 비교할 수 없다.

러닝타임이 꽤 긴 연극이지만, 재치와 상상력이 조화로워서 유쾌하게
즐길 수 있었던 연극이었다.

영화를 보고 연극을 보면 재미가 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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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나 2008-09-14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대할께요 *^^*

웽스북스 2008-09-14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었나보다~ 오홋~
요즘 완전 문화생활 라주미힌이에요 ㅎㅎ
 



세익스피어의 비극이 몸짓과 언어로 끊임없이 시대와 세대를 불문하고 재생될 수 있는 것은 지인의 말마따나 "인간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고전이 지금까지 계속 팔"리고 있는 것이다. 리어왕은 질긴 욕망의 운명적 파멸 속에서 파헤쳐지는 인간의 진면이 무엇인가를 고아낸다. 

견디기,
견딜 수 없을 때까지 끌고 가 대면하게 하고, 온몸의 세포에 반응을 살피며 마치 그것을 즐기기위해 그런 것인냥, 욕망이 삼켜버린 인간들의 순환적이고 총체적인 광기를 드리운다.

친족살해,
그것으로 마지막 인간에 대한 신뢰를 분쇄하여 그 최후의 흔적까지 용출하고자 함은, 비극이 비극이기 위한 그 마지막 가능성까지도 용납하지 않는 막장의 드라마라서?

죽음,
세대간의 갈등을 종말시키는 세대의 절멸...
하지만 모두에게 공평한 신의 섭리는 흉폭한 죽음의 신이 내리는 최선의 자비이다.

그러니 삶은 기적일 수 밖에 없지 않나..
인간은 비극으로 인생을 알게 되고, 죽음을 통해 삶을 배운다.
신경 마디마디를 잘라먹는 듯한 슬픔이야 말로 인간의 내면을 엿볼 수 있는 위대한 순간인 것이다.

인간 내외의 갈등을 증폭시키는 '선명한 조명'과 동양의 향취가 자욱한 음악이 배우를 돋보이게 한다. 자칫 '지겨운 연극'으로만 기억될 뻔 했는데, 스타카토식 돌발적인 연출을 심어 놓은 것이 인상적이다.
설 마.. 그런 장면을....
미리 알았더라면 눈에 불을 켰을 텐데...  ㅎㅎㅎ
아쉽게도..  아쉽게도.... 

허나, KBS 사극에 고정출연하는 듯한 신하들처럼 특색없고 힘만 잔득 들어가 있는 배우들의 목소리톤이 아쉽다. 언제나 '라'에 멈춰있구나. 대사 전달이 불분명한 점도 집중력을 떨어뜨리고,..
생뚱앚는 대사가 툭툭 떨어지니깐.. 시트콤 같기도 하고...

옆 사람의 '으윽~~~, 악~, 으아~, 으으으~ '
현장감 있는 특수효과음은 특별 보너스였다.
즐거움이 예상치 못한 곳에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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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과 야구.
각본 없는 드라마는 왜 9회말부터 시작되는가.
"야구... 몰라요 몰라"라며 야구를 몰라 했던 하일성이 그렇게 될 줄 몰랐던 것처럼, 야구와 인생이 늘 가능성과 불확실성의 연장선에서 갈팡질팡 하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은 과정보다 결과가 말해주기 때문에?

아쉽게도 그라운드는 프로와 아마추어를 구분한다. 이 세계는 '포함'될 자를 고르기 위해 '제외'될 대상을 생산해내고 있으므로 드라마는 각본의 형상일 뿐이다. '당신의 노력'이 당신의 인생을 좌우할 것이라는 믿음은 '자유롭고 공정한 시장'의 논리를 벗어날 수 없는 환상 속의 희망에 불과하다.

박민규는 "치기 힘든 공은 치지 않고, 잡기 힘든 공은 잡지 않는다", "우승을 목표로 한 다른 팀들로선 절대 완성할 수 없는 - 끊임없고 부단한 야구를 통한 자기 수양의 결과"를 제시하며 삶의 본질적인 방향과 목적에 대한 격한 핸들링을 보여주었다. 비주류의 독립선언. 주류에게 '쌈 싸먹어'를 날리고 그들을 위한 룰이 아닌, 스스로를 위한 룰을 만들어 가는 것이 진정한 삶의 기적을 이룰 수 있음을 이야기 한다.

"인생은 결국, 결코 잘하리라는 보장도 없이-거듭 버틸 수 있는 데까지 버티다가 몇 가지의 간단한 항목으로 요약되고 정리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지금도 버티고 있는, 그래서 아무 일 없이 흘러가고 있는 우리의 삶은- 실은 그래서 기적이다."

질긴 것은 강한 것을 이길 수 있다.
투수를 괴롭히는 것도 타자의 임무인 것처럼 삶은 버티는 자의 몫이다.
과학이 원리와 질서, 불확실과 불명확한 세계를 인간의 인식 체계에 포함시키기 위한 영도자의 길을 걸어 왔지만, 수 많은 오해와 오류를 야기시켰듯이 인생은 수 많은 헛스윙과 아웃의 연속이다. 언제나 승리할 수 없기에 언제나 패배할 수만은 없다.
'생의 의지'는 환경적 요소를 얼마나 만족시킬 수 있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극복할 수 있음을 긍정하는 것에 있다.

5할 타자가 성공한 것일까? 3할 타자는 평범한 것일까? 1할 2푼 3리의 타자는 어떤 운명일까?
타율이 지배하는 세상은 승리와 패배만을 부른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승리한 자에겐 모든 것이 있고, 그 외에는 있을 것이 없다.

연극은 스스로를 강하게 하는 법을 알려주지만, 그 너머의 존재로 가는 방향을 적확하게 짚어주지는 못했다. 단지 '인생의 홈런'을 치기 위한 마인드 컨트롤이 있음을 말한다.
지금 우리는 위로가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은 기적이다'라는 명제를 가슴에 새길 용기가 절실한 때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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