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원주민
최규석 지음 / 창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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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테오도르 칼루자는 우리가 사는 세계가 3차원만이 아닌 그 이상의 차원으로 이루어졌을지도 모른다는 파격적인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다차원에 관한 아이디어는 기존 물리학의 기반을 흔들었고 새로운 아이디어와 이론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가 사는 차원이 다른 차원의 일부일 뿐이라는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은 차원을 확장하면 할수록 스펙터클한 변화를 맞게 된다. 그렇다고 여분의 차원이 우리의 삶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으로 인하여 우주는 전혀 다른 의미를 띄게 된다. 선과 면, 공간, 시간.. 그 이상의 차원을 알게 된다면 우리가 보고 있는 세계를 기존의 관념대로 판단할 수는 없는 것이다. 시공간의 틈을 메워 좀 더 견고한 세계관을 갖추는 일은 어쩌면 우주적으로 숭고한 일이다. 그리고 이 세상을 이해하고 그 속에 살아가는 인간의 행동과 삶의 양식에 일어나는 잔잔한 파장에 몸을 맡기는 것도 흥이 나는 일일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다양한 차원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차원 속의 차원… 우리는 모두 같은 시대, 같은 방식으로 살아간다는 착각을 최규석이 가볍게 부셔버렸다. 나와 1살 차이인데, 그와 나의 경험은 반세기를 넘나들었다. 그의 말마따나 시간은 마디마디로 끊어지는 것이 아니라 겹쳐져서 진행되고 있었다. 낯설지 않은 이야기를 생각치도 못한 곳에서 마주하게 되니 우리가 사는 세계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된다. 역사책에 있던 그런 이야기들과는 때깔부터 다르고, 국가와 기관, 엘리트 계급이 만들어낸 시대의 논리가 전혀 닿지 않은 곳의 이야기는 감동이라 부를 수 없는 어떤 다른 차원의 감흥을 안겨준다. 이 불완전한 세계의 다른 한 켠에서 기록된 역사, 아름답지만은 않지만 그것을 품으로 당겨올 수 밖에 없는 끌림이 묘한 매력이라고나 할까.

대한민국의 원주민… 오스트레일리아나 아메리카 인디언 보호구역처럼 ‘격리 보호’라는 이름으로 구경거리나 배제의 다른 이름으로써의 원주민이 아니라. 자신에게 익숙했던 것들과 타의적으로 격리된 사람들을 지칭하기에 적절한 의미를 갖는 단어인 것 같다. 이데올로기의 격전에서 살아 남아 산업화, 도시화,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라는 괴물이 어슬렁거리는 이 땅 위에서 묵묵히 살아가고 있으나, 그 존재의 흔적들마저 지워져 가는 사람들. 마치 소립자처럼 현대인에게 관측되기 힘든 돌돌 말려있는 차원에 사는 수 많은 원주민들을 최규석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끄집어내려 한다.

1차원의 시간과 9차원의 공간… 우리가 사는 세계를 당연하다고 부르기에는 너무 많은 사연과 이름들이 있다. 그것 하나 하나의 아쉬움을 달래기에는 우리의 시야는 3차원에 머물러 있지 않나 싶다. 시간에 쫓기고, 바둥거리는 공간 속에서 욕망 하나 움켜쥐고 퀭한 눈을 번뜩이며 과잉 식욕과 파괴적 발전에 가열차게 전진만을 외치는 현인류에게 그는 은근히 날카로운 비수를 들이댄다.
‘니들이 우리 세계를 알간?’

최규석의 경험과 기억, 아마도 그것을 공감하기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19세기 하겐베크가 인간을 전시 했던 동물원처럼 이 책이 읽힌다면 심각한 오독이다. 먼 시대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옆에서 벌어지고 있는 가난과 결핍, 모두가 몸서리치는 그것에 익숙해지는 법도 있음을 진지하게 말을 걸고 있는 것이다. 막연히 긍정할 수도 부정할 수 없고 스스로가 강한 자가 아님을 깨닫고 웃어넘기는 최규석 작품에서 물씬 풍기는 인간적 원숙함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세상에 의해 길러졌으니까.

"원주민들은 자기가 갖지 못한 것을 뚜렷하게 인식한다"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프란츠 파농

최규석은 빈궁함 때문에 우리 시대를 더욱 뚜렷하게 인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책에서 느껴지는 종이에 베인 살갗의 느낌은 섬세하게 혈도를 짚어가는 그의 시선에 있지 않나 싶다.



올림픽이 열리고 있으니깐 국가와 정부에 대한 증오가 넘쳤던 광장에 '죽어 버린 국가'의 이름을 목놓아 외치는 빨간 남방의 사람들로 꽉 채워져 있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는데 외치고 싶은 마음이 들까.
이들은 뭘로 불려야 적당할까… 대한민국 좀비?
하여간 재미있는 세상이다... 다양한 차원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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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최규석 지음 / 길찾기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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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석 작가의 작품은 약자를 세분화하여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든다. 피억압자, 무산계급, 정신지체인, 이방인, 불청객, 경계인, 사회적 소수… 각각의 이야기 조각을 맞추다 보면 우리가 사는 세상의 난감한 몽타주가 완성이 된다. 미디어에서 보여지는 기술과 문화와 유행이 미치지 못하는 곳을 상상하기란 어려운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최규석의 만화를 보면 마치 잊었던 현실을 되찾은 기분이 든다.

약자를 세분화할 수 있다는 것은 집요한 시선으로 현실을 관찰하고 이해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것을 풍자 할 수 있다는 것은 현실의 깊이를 잴 수 있는 눈을 가졌다는 것이고, 현실에 기댄 상상 속에는 세상에 대한 애정과 기대가 녹아있다. 우리가 일상이라는 변명거리로 애써 무시하던 것들을 한 보따리 펼쳐 놓았으니 이미 이것은 만화가 아닌 사회적 정치적 예술이 된다. 언어는 날카롭고, 그림은 거칠다. 그것은 외과용 메스가 되어 살 속을 파고든다. 이 땅에서 선택이라 불려졌던 강요들이 하나 하나 적출되어, '당신을 병들게 했던 그것이다!'라고 마침내 눈 앞에서 굴러다니게 된다.

만화로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을 그가 알고 있다는 점이 고무적이다. 정직하고 담담하게 그리고 냉정하게 우리의 모습을 그려냈다. 우리가 걸친 현실의 옷은 실크나 벨벳처럼 결코 매끈하지 않다. 누군가의 살을 먹고, 고통의 즙을 짜내고, 눈물로 얼굴을 적시게 하며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다만, 수 많은 단계를 거침으로써 시스템의 내부를 보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어쩌면 마음의 편이를 위해 우리는 ‘편리한 삶’에 스스로를 길들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걷는 것보다 실려 가고, 소비하기 위해 죽여야 하는 삶.

디지털화 된 세계가 가져온 풍요가 인간의 고통을 감추고 있다. 마치 가상의 세계처럼 만들어버렸다. 레벨을 올리고 아이템을 얻기 위해 살아가는 듯 하다. 최규석 작가의 만화는 그것에 대한 심한 불만을 드러내놓는다. 좀 더 가까이… 인간들 틈 속에서 서성이며 이야기를 주워 담는다. 네가 느끼고, 내가 느껴야 할 감각들…

그것들에게 감각을 빼앗겼다면 상상하라.
상상할 수 없는 것은 없다. 다른 세계를 상상할 수 있다면 곧 현실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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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스 2008-08-04 2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는 책이 많이 안팔려서 우울해하고 있더라는 -_-;;
모두들 만화를 사서 봅시다아~ (알라딘서재인들만같아라아~)

라주미힌 2008-08-04 2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낡은구두님.. 최규석 많이 좋아하시죠? ㅎㅎㅎ

순오기 2008-08-05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놓기만 하고 아직 못 봤어요. 우리애들은 다보고 지들끼리만 통하는 얘기를 한다니까요~ 나도 빨리 봐야지. 리뷰 잘 보고 갑니다~ 저도 최규석팬이에요.^^

라주미힌 2008-08-06 0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잘 만들어진 글과 그림이에용... ㅎㅎ
 
습지생태보고서 - 2판
최규석 글 그림 / 거북이북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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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뭔가 문제가 있는 걸까?
그것이 싫은 논리적인 이유를 백가지는 더 댈 수 있는 세상에서 벗어나려는 것은
선택일 수는 없는 걸까?
패배할 것이 두려워서 출발선에 서기를 피하고 있는 걸까?
혹은 어른이 되는 날을 자꾸만 미루고 있는 것일까?
불안한 눈빛으로 친구의 연봉을 묻거나 부동산 정보를 뒤적거릴 어쩌면 슬플 그 날에
한때는 이렇게 되지 않으려 노력했노라 자위할 기억을 만들고 있는 것뿐일까?
세상 안으로 성큼 들어서지도 발을 빼지도 못한 채
자기 안의 수많은 모순과 세상의 두려움을 한 가득 품고도
영문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기분 좋은 외침은…..

단지 어리석음 때문만은 아니겠지? 252p




‘가진 것이 망치 밖에 없을 땐 세상의 모든 문제가 못대가리로 보이게 마련이다’
은밀한 불안과 상(쌍)스러운 나날이 끊이질 않는다. 전과 14범이 지배하는 사회를 배경으로 쥐커가 날뛰는 영화를 만들면 ‘다크 나이트’보다 더 흥미진진한 영화가 되지 않을까라는 상상을 하게 되는 요즘.


젊음은 꽃처럼 피었다 지고, 자아는 푸른 낯빛을 하고 하늘을 본다. 긴 세월을 신어온 신발이 내 몸처럼 여겨질 때가 되면 다른 것들은 어느새 이물질이 되어 있다. 두려운 것은 감각의 상실이다. 자신의 삶이 나의 의지로 움직여지지 않고, 익숙했던 것들의 주검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고독이 기도를 막아 버린 상태다. 거친 숨소리만이 들린다. 토해내지 않으면 살 수 없을 것처럼 폐부를 쥐어짜는 일상. 평균수명이 증가하는 것을 보면 인간에게서 짜낼 수 있는 것의 마지막 까지도 짜낼 작정인 것 같다.

지혜는 경험에서 나오고, 경험은 어리석음에서 나온다 했나. 현실을 주저하면서도 현실에 저항해야 했고, 마침내 투항해야 했던 ‘청춘’의 열병.
한낮의 뜨거움이 한참 지난 아스팔트 같다. 한껏 뜨거워졌다가 그 열기에 지쳐서 서서히 공기 속으로 뱉어내는….
허나 저자의 경험은 어리석다라고 부를 수 없는 묵직함이 있다. 물을 가득 머금고 있는 스펀지처럼 기대 이상의 중량감이 든든하다. 게다가 머리 위에서 짜낼 때의 상쾌함도 있다.

'인생이 뭐 그렇지'라는 달관이 아직은 쓰다.
그래서 더욱 입안에서 쉬이 가시지 않은 그 쓴 맛에 취하려고 하는가 보다.
궁상…
“1.5평의 장점은 뭐에요?”
”누우면 방 끝까지 손이 닿아 어느 물건이든 집을 수 있다는 거”
<와세다 1.5평 청춘기> 중에서…

협소한 것도, 궁상도, 빈손도 미덕이 있다.
웃음으로는 하늘을 덮을 수도 있다.
우리에게 허락된 땅은 없을지라도 하늘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 않은가…
습지의 생태, 더 가질 것도 없어 더 가지려고도 하지 않은 세계를 엿보면 하늘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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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 2008-07-31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득, 이렇게 멋져보이기도 하는구나. 최규석씨 얘기 아니고^^
 
굿바이 클래식 - 조우석의 인문학으로 읽는 클래식 음악 이야기
조우석 지음 / 동아시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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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자기 잘난 맛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다. 힘이 지배하던 시대에는 약탈능력으로 과시할 수 있었으나, 그것이 불가능한 시대에 접어들면서부터는 재산, 지식 같은 무형의 권력을 행사함으로써 위게질서를 세우려고 한다. ‘체질’ 탓인지 남과 같은 부류가 된다는 것을 참을 수 없는 그들은 안타깝게도 활동도 왕성하다. 좋게 말해서 노력파이기도 하지만, 그 노력은 ‘병적자기애’에서 출발하기에 인간에 대한 예의는 찾아보기 힘든 경우가 많다. 그들의 정체성은 오로지 ‘구별짓기’, ‘거리두기’에 기반하며 타인과의 차별화 전략으로 자신의 몸 값을 올리기 위해 충혈된 눈을 지닐 뿐이다. (광종(狂宗) 이명박처럼 잠이 없으면 더욱 좋지 않다.)

흔히 전문가, 마니아라고 불리는 부류들 중에 그런 인간들이 많은 것 같다. 대중이 갖고 있지 못한 영역을 ‘식민화’하고 그 식민지의 왕 노릇하면서 큰 소리를 친다. 대체로 ‘보통명사’를 나열하기를 좋아하고, 숫자와 인명에 강하며, 역사와 인문학적 지식을 적절하게 사용하여 아름답게 꾸민다. 그런 점에 있어서 태생적으로 계층 음악이었던 클래식은 참으로 좋은 먹잇감이었다. 그것을 향유할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그들은 특별해지니깐. 적절한 미사여구로 음악을 글로 옮겨놓기까지 한다면 금상첨화렷다. 알아먹지 못할 말로 하면 더욱 효과가 좋다.

이 책의 저자는 클래식 마니아였다. 서문만 읽어도 클래식에 ‘미쳤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엄청난 지식을 늘어놓는다. 그 부분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이 책이 클래식의 신화, 클래식이 안고 있는 우리 시대의 인식, 화이트 콤플렉스, 클래식 울렁증을 깨려는 목적을 갖고 있어서인지 더욱 그렇게 보이려고 한다. ‘나 이만큼 알거든. 내 말의 권위를 인정해’

저자의 ‘전향’이 별로 궁금하지는 않았지만, 왜 그가 전향을 했는가는 읽어보아야만 했다. 15000원씩이나 주고 샀으니까. 객관적일 수 없는 부분까지도 무지막지하게 아우르는 ‘주관적 근거와 논리’들을 열거하고 있다는 것이 심히 부담스러웠지만, 클래식이란 음악이 이성 중심주의고 제국주의 음악인데다 위-아래, 안-밖, 중심-주변부, 엘리트-대중을 구분하기 때문에 진정한 음악이 아니며, 음악가들은 과대 포장되어 진입장벽이 높은 시화적 상징이 되었고, 악보 중심주의에 의한 죽은 음악의 리플레이에 불과하다는 식의 주장들은 그럭저럭 동감한다.

문제는 저자다. 그것에 매몰되었던 자기자신의 ‘구원’에 관한 ‘간증’을 無재수 문체로 서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그것을 넘어서 대중을 계도하려고 까지 한다. ‘아직도 클래식에서 허우적거리십니까?’ 이런 뉘앙스…
“나는 여러분이 좀 더 자유로워지기길 기대한다” 307p

저자는 클래식의 신화를 창조하고 계급의식을 먹고 향유하던 축에 속했던 인물 아니었던가. 창조된 신화 뒤에 숨어서 지식권력, 문화권력을 유감없이 실컷 발휘하고 남은 저자의 콤플렉스 찌꺼기를 왜 우리 대중에게 떠밀지? 완전 웃겨.
음악은 듣는 사람의 코드와 해석의 영역에 존재한다. 개개인의 취향과 감각에 의존하는 분야인데 ‘배경’이 침투하여 해석의 오류를 만들어 내고, 그 틈으로 허세적, 계급적 침탈을 일어나게 한 당사자가 이제는 그것의 오류를 깨달았으니 너희도 깨달으라는 식의 ‘선민적 계몽’을 하나? 클래식 마니아의 비극적 사랑을 일반화하는 것은 명백한 오버다. 실컷 좋아하다가 그것이 성형 된 얼굴이라고 마음껏 내팽개치는 짓은 개인선에서 끝낼 일이다.
당신이 만든 상상 속에서 사랑한 그녀가 못났다는 것을 이제 알았는가?
'우린 속았어~' 가 아니라 '당신의 거짓말에 당신이 속은 거야.’
'
‘해석’의 달인들...
펜으로 '해석'과 '공감'을 대중으로부터 격리시키고 자신만의 '식민지'로 만들어간다. 자신의 역할을 대중 속에서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신화를 끊임없이 창조할 것이다. 그 신화가 깨질 무렵에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 그 속에 숨으려 할 것이다. 저들이 제일 두려워 하는 것은 자신의 식민지를 잃어버리고 대중과의 구분이 사라지게 되었을 때다. 대중을 계몽의 대상으로 보고 있는 이 사람의 '의식 속의 클래식'부터 구조조정이 있어야 할 것 같다. 클래식에서 재즈로 재료만 바뀐다고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음악 마니아들은 말한다. 클래식을 수십 년 동안 오래 들어온 사람은 나이 들어 재즈로 바꾸는 게 일반적인 사이클이라고….” 10p
이젠 재즈라고? 마니아의 수순이라고?
재즈도 위험하게 됐군. 어쩐지 재즈쪽에서 잡음이 많이 들린다 했다.
'문제는 당신이야! 음악이 아니라'

글에 녹아있는 오만함이 "지루하고 짜증나는 클래식" 보다 더했다.
이런 사람들 때문에 “구분 없는 음악”이 멀어져 가고 있음을 본인들은 모르고 있는 것일까.
이 사람은 이제서야 '뭔가'를 깨달았지만, 여전히 어슬렁거리며 새로운 먹잇감을 찾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공자 "교묘하게 꾸며진 말과 보기 좋게 꾸며진 표정에는 인이 드물다” 73p

책값, 시간값, 리뷰값 때문에 별 하나 더 깍아야겠다.
몇 년 만에 불쾌함을 한껏 받은 책이었다.
그런데 리뷰를 쓰다보니 배설의 쾌감을 느끼게 해줬다.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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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8-07-21 0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멋, 정말 속시원한 리뷰라 추천해요. 특히 7~8째줄, 명언이십니다. ㅋㅋ

바람돌이 2008-07-21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평들이 영 아니군요. ㅎㅎ
마니아문화가 그저 자신이 즐기고 행복해하는 것에서 끝난다면 그건 좋은 일이지만 그것이 타인에 대한 우월감으로 연장되는건 웃기죠? 근데 마니아들 중엔 꼭 그런 사람이 있어요. ^^

이팝나무 2008-07-22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정말 마음에 듭니다. 속이 시원합니다.욕하면서 읽다가 오디오 가격 나오는 부분에서는 침을 뱉었습니다. 그런 우월감은 어디서 나오는지...
 
페르세폴리스 2 - 다시 페르세폴리스로
마르잔 사트라피 지음, 최주현 옮김 / 새만화책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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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만의 출간이라니.. 얄미운 감정을 뒤로 하고 잽싸게(2주씩이나 지난 후에) 읽어보았다. 내용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차도르의 검정 색채, 투박한 그림이 그리웠다. 이란과 여성의 삶이라는 흔하지 않은 주제를 그린 만화의 잔상은 시간을 견딜 만큼 묵직했다. 전쟁을 피해서 망명 겸 유학생활을 하는 마르잔 사트라피보다 남겨진 가족의 ‘생사’가 궁금한 것도 있다. 급박했던 역사의 회오리를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가. 생의 의지를 확인하고 싶었다고나 할까. 그리고 마르잔 사트라피가 보여준 국가와 종교의 억압에 끈질기게 저항한 인간 해방의 가지가 어디까지 뻗어나가나 지켜보고 싶었다. 그것을 응원이라고 해야 할 지는 잘 모르겠으나, 누군가의 삶을 관찰하면서 심정적 동화가 일었다.

1편보다 2편은 더욱 인간적인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다. 불완전한 인간임을 스스로 고백하는 장면들이 많다. 권력과 종교에 대한 불복종이 생활 속의 일탈을 이끌었고, 어느 곳에서도 정착할 수 없는 정체성에 방황하고, 다시 이란으로 돌아가는 과정은 굴곡의 역사만큼이나 극적이다. “참아 낼 수 있는 불행이라면 우리는 스스로를 동정할 수 있다. 하지만, 한계를 넘어 버리면, 이 참을 수 없음을 견디는 유일한 방법은 농담과 웃음”이라 하면서 누군가, 무언가에 의지해야만 했던 나약한 면도 숨김없이 드러낸다. 많은 오류와 반성, 노력 끝에 진정한 여성 해방, 인간 해방이 무엇인지를 살며시 건넨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인간이야말로 찾아낼 수 있는 그 곳, 그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에너지가 ‘검은 만화’에 듬뿍 담겨 있다.

영웅적이지도 모범적이지도 그렇다고 평범하지도 않은 한 인간의 삶을 진솔하게 그려낸 만화의 힘 또한 기억해야 할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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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8-05-05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만화구나. 주제가 딱 내건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