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지음 / 창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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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주림만 알고 있는 아이는 울지 않는다. 배만 볼록하고 한번도 걷거나 뭔가를 쥐어 본적이 없을 듯한 팔과 다리는 아무것도 없어왔고, 이제 그 무엇도 없을 거라고 말을 한다. 거동이 불편하고 욕망의 씨앗조차 말라버린 것을 늙음이라 말하기엔 뭔가 설명이 부족하다. 애초에 싹을 틔우지 못한 이런 경우도 있으니까. 김애란 소설의 소년은 그렇게 늙었다. 상실을 안고 살아가지만, 상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 내면의 빈 공간이 너무 커져 공간 안에서 머물고 있다. 떼 쓰는 애도 아니고, 떼 안 쓰는 늙은이도 아닌 애늙은이… (흡사 김애란에 대한 평가가 나이, 경험, 욕망의 깊이에 관한 것이 많았던 것을 보면 소년은 애란이었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도 든다.)

갑자기 성인의 세계에 발을 내디뎌 학창시설을 잃어버린 아이돌처럼 뭔가 열렬히 갈망할 것 같은데, 쉽게 그것을 드러내놓지 않는다. 하나가 있다면 부모님을 웃기는 것. 최초의 욕망은 아이의 것이면서 부모의 것이다. 부모의 욕망에 의해 소년이 태어난 것처럼 필연적 관계를 형성한다. 소년의 것은 어디에 있을까. 내 인생을 내 심장을 뛰게 만드는 것은 어디에 있을까. 줄 듯 말 듯 감질난다.

세상의 말을 익히기 위한 소년의 몸부림은 글로 시작한다. 글을 읽고 글을 쓰지만, ‘관계’없이 새겨지지 않는 말도 있다. 아버지가 그랬고, 어머니가 그랬다. 딱 한 번의 계기가 있었지만, 사기였다. 그것조차 소년에겐 오래 가져갈 수 없는 것이었다. 잡을 수 없을 만큼 시간의 속도는 빠르다. 그런 속도감을 안다면 허무는 자연스러워진다. 쿨 한 것이 아니다. 쿨 해질 수 밖에 없는 설정. 소설은 대단히 제한적 상황과 특수성을 부여하고 있으며, 인간성과 동물성, 시간과 인생, 희노애락의 알레고리를 연출한다. 가장 짧은 생애를 살면서 느낄 수 있는 것들 말이다. 아니면 없는 것들에 관한 이야기인 것이다.

작가는 격렬한 방식을 선택할 수 있었을 텐데, 젖어 들다 한참이 지나서야 뭔가를 빼앗긴 것을 알아채도록 타이머를 작동시킨다. 허탈감과 상실감이 더욱 커지는 이러한 구조는 시간적이지만, 비선형적으로 그렸다. 부모의 생과의 이어짐을 계속 강조한다. 열린 시간이며, 다른 생과의 끊김 없는 인연을 보여준다. 소년이 마지막까지 붙잡고 싶었던 것, 부모가 놓고 싶지 않았던 것, 살아간다는 건 그것을 따라간다는 것. 소년은 결국 상실을 가슴 깊이 새긴다. 이제 막 성장했는데, 죽음이 다가온다. 영결식은 성인식이 된다.

소년의 최후의 말은 최초의 욕망이었다. 거기까지였고, 그것으로 완성되었다.
간절함… 늙어도 죽어도 사라지지 않는 소년의 마음이다. 모두는 그런 간절함이 있다.
떨린다고 또는 살아있음을 심장은 쉼 없이 말을 한다. 내 생의 민낯을 보게 될 불안 그리고 설레임. 괜히 눈물이 난다. 없는 줄 알았는데, 너무나 큰 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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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이제는 깨달음이다 - 종교를 보는 새로운 시각, 심층종교에 대한 두 종교학자의 대담
오강남.성해영 지음 / 북성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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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같은 사람도 이런 책을 읽게 한다.

때늦은 신정정치 체제에 살려니 적응하기가 만만치 않아서이기도 하지만, 거대한 종교시설만큼의 위세를 떨치고 있는 자들의 입심에서 나는 구취가 참을 수 없다. 유사상품이 상거래 질서를 어지럽힐 때 정품이 뭔지 알고 싶은 욕망 따위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절대 넘어가면 안될 보이싱 피싱 같은 침 튀듯 튀어나오는 구원과 자비가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는 이 세계에 종교의 근본에 대한 설명은 현명한 소비자의 덕목처럼 다가온다. .

두 종교학자의 대담은 대단히 쉽게 쓰여져 있다. 다만 두 학자가 사제지간이란 그런지 생각이 비슷해서 지루한 감이 있지만, 개인적으로 비교종교학이라던가 신비주의 같은 오해 했던 부분들을 짚어주는 것만으로도 유익했다. 종교의 유,무해성, 사회적 기능, 역할(‘만들어진 신’ 같은)보다 인간의 영적 성숙으로 가는 성찰과 깨달음의 심층종교를 대중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은 대단히 유의미한 결과물이라고 본다. 문자 그대로 성직자의 말 그대로를 믿고자 하는 세태의 부작용에 대한 처방전인 것이다. ‘회의 없는 믿음은 뿌리 없는 신앙’이라는 어느 목사의 말씀처럼 자기화 하는 과정이 생략된 체 날로 먹으며 나는 진리라고 외치는 것은 부실한 자기의 신앙을 자기강화로 메우려는 얄팍함일 뿐이다.
또한 기복신앙에만 집착하는 것은 각 신앙인이나 성직자의 각성만으로는 해결 될 수 없는 사회적 현상을 내포하고 있다. 신과의 거래를 종용하고 그것의 달콤함에 젖어들어 거래 승인 버튼을 힘껏 누르는 사람들 때문에
그래서 장로는 신이 되었다.
결국 기복신앙의 정점에는 권력과 자본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고, 장로는 4대강을 파헤치고 있다.
종교는 깨달음이라는 이 터분한 제목은 단순하면서도 명쾌한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너와 네가 공유하고 있는 종교적 성질은 그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죽었던 신은 자본으로 부활하였다. 고배당, 고이율, 무위험이라는 달콤한 속삭임을 설파하면서…
신이 있다면 완전한 인간이 되어야만이 진정한 신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아무나 이를 수 있는 길이라면 이런 세상은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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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큐리 2011-07-02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종교책을 읽으신다니... 반가운데요..ㅎㅎ 저는 '추악한 동맹'이 더 확 끌리던데요..^^

2011-07-02 22: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03 12: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보이지 않는 고릴라 - 우리의 일상과 인생을 바꾸는 비밀의 실체
크리스토퍼 차브리스 & 대니얼 사이먼스 지음, 김명철 / 김영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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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각은 자유라지만, 민폐를 끼친다면 마냥 자유가 될 수 없다. 사회적 활동에 있어서 경제적 정치적 영향이 크다면 더욱 민감한 부분인 것이다. 자신감, 기억, 인지, 사고, 인과관계 등의 한계적 오류가 바로 인간이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는 틈새라고는 다들 생각한다. 하지만 책의 사례에도 나왔듯이 인명사고나 범죄, 경제적 과실의 흔한 예를 본다면 우리 일상의 위험은 ‘실수’라고 불리던 자기확신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음을 감지하게 된다.
충분한 교육을 받았고, 훈련되어지고, 이성적이라도 벗어날 수 없는 인지능력의 생물학적 비밀보다는 그것이 우리 생활에 어떤 식으로 미치고 있는가를 또렷하게 인지하고 있는 것이 중요해 보인다. 의심하고 다시 성찰해 보는 계기가 될 만한 책이다.

“우리의 뇌는 스스로 경험하거나 혹은 신뢰하는 사람으로부터 들은 증거만 접할 수 있는 환경 속에서 진화했다. 필요에 의해 많은 사람의 다양한 상황을 종합한 정보가 아닌 특정 사례들을 통해 학습했다. ~
우리는 다른 사람의 경험에 공감할수록 그 경험이 전달하는 메시지를 덜 비판하고 더 잘 기억하게 된다. “259p

대중과의 호흡이 더딘 진보정치의 모습, 언론과 권력의 정치적 메시지, 미디어 광고의 효과, 소셜미디어에서 보여지는 트랜드…
그 안에 숨어있는 고릴라를 찾아보는 재미도 이 책을 즐겁게 읽는 포인트가 될 듯 싶다. 대안도 그 안에 있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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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아의 나라 - 몽족 아이, 미국인 의사들 그리고 두 문화의 충돌
앤 패디먼 지음, 이한중 옮김 / 윌북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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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다른 사회에서 살아가야 한다면 엄청나게 두꺼운 매뉴얼이 있어도 평범하게 살기란 쉽지는 않을 듯 싶다. 언어, 행동, 사고, 윤리, 전통 그 무엇에도 공통점을 찾을 수 없는 곳이라면 더더욱 소외와 고립을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행동 하나하나에는 규격이 있을 것이고, 따르지 않았을 시에는 규제가 있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외국인의 유입에 가장 개방적인 나라인 미국에서 벌어진 이 책의 이야기는 만남과 충돌의 임계점을 치밀하게 파고들면서 드라마틱아이러니의 진면을 보여준다. 다문화사회가 갖는 고민과 갈등의 주요 쟁점을 맨 눈으로 살피는 ‘탐사문학의 걸작’이라는 평은 옳다.

어느 사회이건 다문화라는 말은 일반적이게 되었다. 익숙한 것과 낯선 것들이 풍부해지면서 오해와 이해의 긴장을 늦추는 방법을 찾기 위한 노력들이 이뤄지고 있다. 이 책에서 놀라운 것은 모두가 선의를 갖고 행동해도 뜻대로 결과가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점과 아무리 좋은 시스템이라도 개개인에게는 굴레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합리성은 결코 포괄적이지 않다. 각자의 합리성에 따라 자전하고 있으며 그것의 방향과 속도를 제어하려는 것은 대단히 위험 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하기 쉽다.

“그 누구도 리아에게선 발작 말고는 아무것도 알아채지 못했을 거야. 리아는 곧 발작이었으니까”
P420

온전한 이해는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그 간격을 좁히는 일은 가능한 일이다. 단지 언어와 문화의 차이만으로 인식하는 정도를 논하기에는 이미 시간이 많이 흘렀다. 엉키지 않게 잘 섞는 방법이라는 양가적 명제의 해법에 관한 기대수준은 한참 높다. 결국 충돌이 아닌 만남으로, 국경의 유연성 만큼이나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성에 관한 인류학학적 접근이 필요해 보인다. 기능과 역할로서의 인간을 대하는 것에 앞서 다른 것들을 고민할 수 있는 부분이 더 없는가. 이 책을 통해 그 공백을 채워나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민족이라는 민족적 특수성을 들어서 ‘몽족 아이’의 ‘뭉족 문화’로 접근하는 방식이 과연 적합한가는 의문이 든다. 그들이 갖는 문화적 특수성 또한 누구의 시선인가. 그것 또한 제대로 된 이해를 바탕으로 인지되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 물론 집단적 경험과 가치를 공유함으로써 그들의 개인성에 끼친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책의 구성이 좀 더 깊은 이해를 요구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이해해야겠다.

간질이라는 병이 갖는 이 책의 상징성은 꽤나 의미심장하다. 육체를 고치려는 현대적 의료기술과 영혼의 병변으로 보고 치료하려는 몽족의 희생제의 화해를 보는 듯한 구성은 심적 동요를 일으킨다. 결국엔 누구의 바람도 노력도 이루어지지 않은 채 리아의 육체와 혼이 분리되어 진 상태가 의미하는 바는 매우 크다 볼 수 있다. 병리적 사회현상에 대한 치유책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기도 하다.
가족으로 돌아오시게. 가족으로 돌아오시게.
책의 말미에 있는 희생제의는 마치 잃어버린 영혼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진혼곡처럼 울린다. 삶도 혼도 그 어느 것도 가질 수 없었던 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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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또예프스키 평전>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도스또예프스끼 평전
에드워드 H. 카 지음, 김병익.권영빈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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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개인의 삶과 역사적 서술이 궁합이 잘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럴듯해 보이기는 하다. 역사를 알고자 함이 진실에 다가서는 것과 달리 해석에 기반한 것처럼, 생애를 다루는 것이 그를 알고자 하는 것과는 다르지 않을까 싶다. 우리가 글이나 말 또는 행동을 통해 가늠하는 것은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보여지는 것들뿐이니 어쩌겠는가, 이것은 소설처럼 개연적인 일들에 관한 지루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어찌됐던 그의 행적을 쫓아가기에는 심하게 부담스러운 ‘열린책들’식 편집과 폰트사이즈에 기절부터 하게 된다. 게다가 러시아 문학의 거장으로 불리는 도스토예프스키를 만나기에 앞서 그의 작품을 읽지 않았다는 것은 긴 여행에 있어 지도를 빼먹은 것과 같다.
중학생일 때 죄와 벌을 읽다가 긴 이름들의 한 무리에 깔려 아이디만 건져 올린 아픈 기억이 또 아려온다. 읽으면서 긴 이름이 여전히 낯설다. 작품 해석이 이 책에서 많은 부분이 있다 하더라도 읽지 않은 책에 대하여 귀를 열고 싶지는 않다. 그건 나의 해석에 대한 침해라는 느낌을 받아서인데, 이 부분도 읽기엔 힘들었다. 그렇게 개인의 삶을 쫓아가는 데에 주력하면서 읽었다. 사회상, 국제정세, 문학인들과의 교류와 개인적 풍파를 통하여 그의 이면들을 엿보는 재미가 간간히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와 ‘문학의 농익은 여드름’ 을 어떻게 연관 지어서 상상할 수나 있었을까. 말년에는 전쟁을 부르짖던 ‘어버이 연합회 회장’ 같은 모습도 보이니 문학만으로 그를 평가하거나 인식된다는 것은 그에게도 우리에게도 좀 아쉬운 부분이 많을 것 같다.
그래서 평전을 읽나 보다.

비록 그의 책을 끝까지 본 적은 없지만, 평전을 다 읽었다는 것에 만족한다. 다만, 한 발짝 다가서면 두 발짝 달아나는 도스토예프스키를 이젠 놓아줄 때가 된 것 같다. 우린 인연이 아닌가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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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큐리 2011-04-28 2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발작 다가서면 두 발작 달아나는 도스토예프스키...공감가는 말이에요...물론 저는 한 발다가서지도 못하지만 말이죠..ㅎㅎ

라주미힌 2011-04-29 10:18   좋아요 0 | URL
왠지 저도 떳떳해지는데요 ㅎ

감은빛 2011-04-29 0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주미힌님의 독특한 필명이 도스또예프시끼의 작중 인물의 이름이라지요?
(무슨 작품이었던가요? 갑자기 기억이 가물가물~~)
'열린책들'식 편집과 폰트사이즈에 기절부터 하게 된다는 말에 공감합니다!

라주미힌 2011-04-29 10:19   좋아요 0 | URL
아이디는 죄와벌에 나와용 ㅎ
읽다보면 익숙해지기는 하는데;;; ㅎㅎ 호감은 안가는

pjy 2011-04-29 1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길고도 어려운 외쿡이름들~
성인지 이름인지 애칭인지 복선인지.....전 이름땜에 책을 덮었습니다ㅋㅋ

라주미힌 2011-04-30 18:46   좋아요 0 | URL
ㅋ... 저만 그런게 아니었네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