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항 칼럼] 촛불과 지식인들 1

 

촛불은 아름다웠다. 어른들이 '세상이 다 그런 거지' 뇌까리며 느물거릴 때 촛불을 들기 시작한 여중생들도, 아이들 손을 잡고 나온 사람들이 이룬 거대한 대열도, 그들이 보인 유쾌한 직접 민주주의의 풍경도. 제정신을 가진 누구도 그 아름다움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왜 이렇게 달라진 게 없을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외치고 행동했는데 이렇게 달라진 게 없을 수 있을까? 딱히 달라진 건 없더라도 사회 진보의 열기가 살아나는 계기라도 되었어야 마땅한데, 오히려 다들 맥이 빠져버린 모습이니 대체 어찌된 일일까?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그렇지만 다들 너무 이기적인 것 같다. 촛불 시위 피켓엔 '이명박 너나 미친 소 쳐먹어' '내 인생 좀 펼쳐보려고 하니 광우병 걸렸네' 등 내가 죽고, 내 이웃이 죽고 우리 국민이 죽는 문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조금 더 나아간다 해도 친미 정부, 자국민을 생각하지 않는 정부를 탓하는 지점에서 끊긴다. 대한민국 안에만 들어오지 않으면 된다는 생각들이다. 그러나 지구 위 어딘가에서 미친 소와 병든 닭, 그리고 오리는 여전히 아프다. 이런 병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누가 어떻게 끊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은 집회현장에는 거의 없었다. 좁은 우리에 꽉꽉 채워 넣어 면역력을 떨어트리고 지구상의 모든 인간이 충분히 먹을 만큼 많은 곡식을 소에게 먹여 소수가 먹을 고기를 만들고, 그도 모자라 소가 소를 먹어 병들게 만든 것. 이것이 가장 근본적인 문제인데 말이다." (<인디고잉> 12호)
  
  촛불의 열기가 한창이던 즈음 나온 글이다. 글을 쓴 사람은 저명한 생태주의자도 논객도 아닌, 부산에 사는 한 고등학생이다. 우리는 이 '아이'의 견해를 통해 '광우병 소 반대' 구호는 '우리 동네에 쓰레기 소각장 반대' 구호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아프게 깨닫게 된다. 쓰레기가 처리되는 방식을 되돌아보며 생태주의적 대안을 제시하려는 게 아니라 내가 사는 동네에선 쓰레기를 처리할 수 없다는 이야기와, 광우병 소라는 현상을 통해 자본주의적 축산 산업을 근본적으로 되돌아보자는 게 아니라 나와 내 새끼는 광우병 소를 먹을 수 없다는 이야기는 말이다. 한국의 지식인들 가운데 이 '아이' 앞에서 부끄럽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정상적인 사회란 아이들이 지식인에게서 배우는 사회지 지식인이 아이들에게서 배우는 사회가 아니다.
  

▲ "촛불은 아름다웠다. 어른들이 '세상이 다 그런 거지' 뇌까리며 느물거릴 때 촛불을 들기 시작한 여중생들도, 아이들 손을 잡고 나온 사람들이 이룬 거대한 대열도, 그들이 보인 유쾌한 직접 민주주의의 풍경도. 제정신을 가진 누구도 그 아름다움을 부인하지 않는다." ⓒ프레시안

  물론 지식인들은 말한다. "촛불은 광우병 소라는 일개 사인이 아니라 이 고통스러운 현실을 만들어낸 이명박 정권을 공격하는 더 큰 의미가 있었다." 맞는 말이다. 촛불은 그랬다. 그런데 과연 이 고통스러운 현실은 모두 이명박이 만들어낸 것인가? 노동자들은 하루가 다르게 불안정 노동층으로 전락하고 농민들은 국가에 의해 공식적으로 뿌리 뽑히며 청년들은 실업자로 사회에 진출하며, 불안감에 젖은 부모들은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아이들을 '경쟁의 지옥'으로 내모는 이 현실은 말이다. 나 역시도 '이 모든 게 쥐박이 때문'이라고 말하면 마음만은 개운하겠지만, 사실은 아니다. 이명박은 나쁜 대통령이지만, 불과 몇 달 동안 이 모든 걸 뚝딱 만들어낼 만큼 전능한 대통령은 아니다.
  
  촛불을 음해하는 놈들은 말한다. "미국산 소고기 문제는 이미 노무현 정권 시절 다 진행이 된 것이고 이명박 대통령은 사인만 했다." 그들이 그런 말을 하는 더러운 의도와는 별개로 그 말은 사실이다. 오늘 우리의 삶을 옥죄는 이 고통스러운 현실은 이명박이 뚝딱 만들어낸 게 아니라 꽤 긴 시간 동안 진행되어 온 어떤 거대한 흐름의 결과다. 올해 초 미국에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터지자 사람들은 의아해했다. 아니 미국 경제가 고작 하층 계급의 부실 대출 문제로 흔들린단 말인가? 그러나 그 문제는 미국을 넘어 전 세계로 파급되자, 사람들은 세계의 경제가 하나로 구조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 구조가 근본적인 위기를 맞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30여년 전, 레이건과 대처에 의해 시작되어 자라온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괴물이 말이다.
  
  이 고통스러운 현실은 단지 이명박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 괴물의 아가리에 들어앉아 있기 때문이다. 그 괴물의 아가리에 한국 사회를 집어넣은 건 '쥐박이'가 아니다. 한국이 군사 파시즘에서 빠져나와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탑승하면서 시작된 일이며, 본격적으로는 김대중, 노무현 정권 10년 동안 진행된 일이다. 이명박에겐 책임이 없고 김대중 노무현 책임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김대중에서 노무현으로 그리고 이명박으로 줄기차게 이어지고 있는 일이라는 이야기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은 민주적이고 개혁적인 정권이고 이명박 정권은 수구기득권 세력의 정권인데 무슨 소리냐고 반문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바로 그게 문제다.
  
  우리가 사회 문제를 이야기할 때 늘 미궁에 빠지는 가장 큰 이유는 '정권'에 지나치게 집착하기 때문이다. 마치 고대 사회에서 정치란 단지 '왕이 누구인가'의 문제였던 것처럼 우리는 '정권'과 '대통령'에 집착한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지배자는 '정권'이 아니라 '정권을 포함하는 훨씬 더 넓고 복잡한 체제'다. 노무현 정권과 이명박 정권은 분명히 '다른' 정권이지만 '같은' 지배 체제의 일원일 수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 지배체제의 그런 '신묘한' 정체는 지난 10여 년 동안 '양식 있는 사람들'에게서 입버릇처럼 뇌까려진 '진보개혁 세력'이라는 말에 집약되어 있다.
  
  사실 진보개혁 세력이라는 말은 개념상으로 성립할 수 없는 말이다. 진보 세력이란 좌파를 일컫고 개혁 세력이란 자유주의 우파 세력을 일컬으니, 진보개혁 세력이라는 말은 결국 '좌파우파' 세력이라는 말인 것이다. 그런 '말이 안 되는 말'이 그토록 진지하게 사용되는 연원은 과거 군사 파시즘 체험에 닿아 있다. 군사 파시즘 시절 한국 사회 문제의 본질은 물론 군사 파시즘 세력이었다. 그 시절 한국 사회는 군사 파시즘 세력과 민주화 운동 세력이 대립하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문제는, 군사 파시즘이 물러나고 절차적 민주화가 진행되기 시작한 후에도, 말하자면 한국 사회의 문제의 본질이 군사 파시즘이 아니게 된 다음에도 여전히 그 구도가 이어졌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는 민주화를 통해 국가 권력이 자본(재벌!)을 거느리던 체제에서 자본이 국가 권력을 거느리는 체제로 바뀌기 시작했다. 한국 사회 문제의 본질은 파시즘이 아니라 '자본화'가 된 것이다. 자본화의 시절을 맞아 옛 군사 파시즘 세력은 대중들, 특히 젊은 세대의 지지를 잃고 급기야 10년 동안 정권을 잃기도 하지만, 탐욕의 결정체들답게 자본화의 흐름 자체에는 매우 빠른 속도로 적응해나갔다. 그들은 처음엔 인민을 대놓고 누르고 밟을 수 없는 세상이 난감했지만 이내 더 자유롭고 효율적인 부의 축적이 가능한 세상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옛 민주화 운동 세력은 두 가지 세력으로 분화했다. 하나는 자본화의 흐름을 수용하는 개혁 세력이다. 다른 하나는 자본화의 흐름을 거부하는 좌파 세력이다.
  
  한국 사회는 당연히 자본화, 즉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수용하는 세력과 반대하는 세력으로 나누어져야 했다. 군사 파시즘 출신 세력과 민주화 운동 출신의 개혁 세력이 구우파와 신우파로서 우파 진영을 이루어, 좌파와 맞서는 구도로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군사 파시즘 시절의 구도가 그대로 이어졌다. 구우파가 우파를 맡고 신우파와 좌파가 이른바 '진보개혁 세력'이라는 이름으로 좌파를 맡는 해괴한 구도를 이룬 것이다. 게다가 대형 시민단체를 비롯한 이런저런 개혁 운동이 대중들의 각광을 받으면서, 좌파 세력은 '철지난 몽상에 빠진 비현실적인 사람들'로 치부되어 버렸다. 말이 '진보개혁' 세력이지 그 주도권은 거의 전적으로 개혁 세력이 쥐게 된 것이다. 결국 한국 사회는 자본화의 시절을 맞아 정작 자본화를 반대하는 세력은 배제된 채 자본화를 찬성하는 두 세력이 각각 우파와 좌파를 자임하며 싸우는 괴상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게 김대중 정권 이후 10년 동안의 상황이다. 구우파와 신우파 세력은 옛 군사 파시즘 시절에 쌓인 감정과 정치적 민주화에 대한 입장 차이로 서로 '수구 기득권 세력'이니 '좌파 빨갱이들'이니 욕하며 원수처럼 으르렁거렸지만 신자유주의 자본화는 아무 문제없이 진행되었다. 자본화는 개혁 세력, 즉 신우파가 집권한 10년 동안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신우파는 한국의 거의 모든 양식 있는 사람들을 예의 '진보개혁 세력'이라는 이름으로 묶어 구우파(수구기득권 세력이라 일컬어지는)와의 싸움에 전념하게 해놓고는, 차곡차곡 신자유주의 자본화를 진행한 것이다.
  
  인민들은 당연히 고단해져갔다. 인민들로선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히 세상은 좋아지고 있는데, 민주화가 되고 민주화 운동 출신 인사가 대통령이 되고 <조선일보> 따위 '수구꼴통들'이 젊은 세대에게서 외면 받는 형국까지 보이는데, 갈수록 삶은 고단해져만 가니 말이다.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상황까지 내몰리자 인민들은 이게 다 '좌파 정권 탓'이라고 믿게 되었다. 결국 이명박 씨가 압도적인 표차로 대통령에 당선되며 구우파 세력은 10년 만에 신우파 세력을 누르고 다시 집권한다. 상황은 좀 더 심각해져버렸다. 구우파가 집권하든 신우파가 집권하든 자본화가 지속되는 건 본질적으로 달라질 게 없지만, 구우파가 다시 전면에 부각되면서 자본화라는 지배체제의 본질은 훨씬 더 쉽게 은폐되는 상황이 된 것이다.
  
▲ "슬프게도, 촛불의 열기 속에서 지성이란 그저 거대한 분노의 대열에 편승해 깃발을 꼽아대는 것을 뜻했다." ⓒ프레시안


  촛불 광장에서 진보적임을 자처하는 지식인들은 "이명박이 한국 사회를 20년 전으로 되돌리고 있다"고 소리쳤다. 물론 구우파들은 신우파에 비해 훨씬 더 거칠고 추악한 외양을 갖고 있다. 박정희나 전두환 시절에서 금방 도착한 듯한 꼴통들도 적잖이 있고 그들에 의해 시대를 거꾸로 흐르는 엉뚱한 일들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나 바로 그런 꼴통들의 행태야말로 지배체제가 우리에게 던진 미끼다. 20년 전으로 되돌리고 있다면, 그렇다면 10년 전 5년 전은 괜찮았단 말인가? 이명박 정권은 부자 편만 드는 몹쓸 시장주의 정권이지만 노무현이나 김대중 정권은 노동자와 서민의 정권이었다는 말인가? "이명박이 한국 사회를 20년 전으로 되돌리려 한다"는 말은 하나의 선동적인 수사로서 유용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여 흥분하는 건 우리 스스로 20년으로 돌아가 주겠다는 말이며, 20년 동안 한층 세련되어지고 치밀해진 지배체제에 고스란히 먹히겠다는 것이다.
  
  우리는 개혁이 사회 진보로 가는 현실적인 과정이라는 잘못된 믿음이 오늘 이 현실을 낳았다는 사실을 '이제라도' 인정하고 정신을 추슬러야 한다. 정치적 민주화를 근본적으로 되돌리기는 게 불가능해진 이후, 지배체제의 목표는 한국 사회를 군사 파시즘 시절로 되돌리는 게 아니라, 끝없는 자본화를 진행하여 무한정 부를 축적하는 데 있다. 현재 지배체제에게 가장 중요한 건 오늘 한국 사회 문제의 본질이 자본화라는 사실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은폐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지배체제 입장에서 이명박 정권은 대개의 진보 지식인들의 말하듯 '무능하고 쓸모없는 정권'이 아니라, 오히려 오늘 한국 사회에서 존재하는 모든 정의감과 사회 의식과 사회 진보의 열기를 모조리 흡수해주는 매우 '유능하고 기특한' 정권이다.
  
  촛불 광장 그 몇 달 동안 '모든 게 이명박 때문'이라는 논리에서라도 벗어난 예는 단 한번, 불교 집회 때 수경 스님이 낭독한 108배 참회문뿐이었다. 기막힌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촛불 광장에 아이 손을 잡고 나온 모든 사람들을 지배체제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쥐박이' 욕만 했다고 비난할 순 없다. 사회에 대해 공부하고 연구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지식인들도 지난 10년 동안 '진보개혁 세력'이라는 말이나 뇌까리며, 개혁을 사회 진보로 가는 현실적인 과정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구우파와 싸우는 일을 사회진보의 충분한 실천이라고 생각한 판에, 사회 공부는커녕 먹고사는 일에 치어 정신이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보다 나을 수 있겠는가? 그들이 모든 분노를 '쥐박이'에게 집중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지식인들은, 특히 진보 혹은 좌파를 자처하는 지식인들은 경우가 다르다. 그들은 그 소중한 분노가 이명박이라는 인물에만 집중되어 소모되어버리지 않도록 도와야 했다. 물론 그런 행동은 분노의 열기에 젖은 사람들에게서 오해를 받거나 전선을 흐트러트리는 짓으로 비난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성이란, 바로 그런 상황에서 '오해와 불편을 무릅쓰고' 문제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다. 슬프게도, 촛불의 열기 속에서 지성이란 그저 거대한 분노의 대열에 편승해 깃발을 꼽아대는 것을 뜻했다. 생각이 모자라서 그렇게 한 것이든, 누구 말마따나 포퓰리즘을 통해 제 세속적 이해를 도모한 것이든, 분명한 건 그 열기 속에서 지성은 작동을 멈추었다는 것이다.

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6008102018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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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여러 대답이 가능하겠지만 저는 진보란 행복해지는 것이라 대답하겠습니다. 그런데 극소수의 지배 계급과 대다수의 정직하게 일하는 사람들이 똑같이 행복해지는 방법은 없습니다. 사회가 행복해진다는 것은 대다수의 정직하게 일하는 사람들이 행복해진다는 것이지요. 또 하나 중요한 문제는 행복이 아닌 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행복을 가지고 행복해지려고 노력하는 것, 그것이 진보라고 생각합니다.

대다수의 정직하게 일하는 사람들이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을 때 그것은 그냥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변혁을 통해서 주어지겠죠. 사회구조가 확 바뀌어야 하니까 근본적으로. 이 문제를 얘기하려면 아주 기니까 그 중에서 한국사회에서 가장 큰 문제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이른바 국익이라는 것입니다. 한국전체의 이익, 이런 식의 개념이 한국사회에 지나치게 횡행한다는 것이죠. 국익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계급간의 모순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그 사회 성원의 전체에 해당하는 공통된 이익이나 공통된 손해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를테면  FTA가 한국에  큰 손해를 가져다준다고 얘기하지만 이건희씨 같은 사람은 훨씬 이익이죠. 대다수의 일하는 사람들에게 재앙이 되는 거죠. 그러니 FTA가 한국에 어떤 이익이 있는가, 미국에 어떤 이익이 있는가 이런 식으로 말한다는 것 자체가 사실은 기만적인 것입니다. 또 요즘에 ‘양극화’란 말은 정말 아주 개나 소나 하는데 ‘계급’이란 말을 하면 ‘에이 80년대 얘길 하고 있어?’ 이런단 말이죠. 잘 생각해 보십시오. 양극화란 말은 계급적 격차가 더 벌어진다는 것이잖아요.
국익이라는 건 실은 ‘지배계급의 이익’입니다. 우리는 ‘노동자의 이익’ ‘농민의 이익’ 이런 이야기를 공공연하게 합니다. 그런데 지배계급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지배계급의 이익’ ‘극소수 부자의 이익’ 이런 식으로 말했다간 당장 난리가 나겠죠? 그래서 지배계급은 어느 시대나 자신의 이익을 ‘국익’ ‘우리나라의 이익’ ‘우리민족의 이익’ 따위로 표현하는 겁니다. 한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그런 식의 기만에 빠져있고 계급적 갈등이나 어떤 억압을 느끼다가도 뭐 월드컵 같은 것 벌어져서 대한민국 짝짝 짝짝짝 하고나면 전 사회성원이 ‘우리는 하나’ 이런 식으로 통합돼 버리는 거죠. 그게 우리 사회가 근본적으로 변화하는데 가장 큰 장애로 작용하고 있다. 우리는 국익이란 실은 거짓말이며 오로지 계급의 이익만 존재한다는 걸 되새겨야 합니다.

계급을 한 개의 수직선으로 표현해볼까요. 맨 꼭대기가 최상층계급, 그리고 맨 아래가 최하층 계급이라 치지요.  그러면 좌우라는 것은 뭐냐 하면 이 계급을 한 개의 수직선을 시계방향으로 90도 돌린 것입니다. 왼쪽은 좌 오른쪽은 우죠. 그리고 맨 왼쪽은 극좌 맨 오른쪽은 극우입니다. 극좌는 최하층계급의 이익을 타협없이 지키려는 태도라 할 수 있고 극우는 최상층계급의 이익을 타협없이 지키려는 태도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극좌는 확 뒤집어엎으려는 것이고 극우는 아무런 변화도 용납하지 않으려는 것이죠.
한국 사회는 해방 후 50년 동안 우파 정치만 존재해왔습니다. 공화당, 민정당, 한나라당으로 이어지는 극우파와 신민당, 평민당, 열우당, 민주당 같은 좀 자유주의적이거나 개혁적인 우파들로만 이어져왔죠.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극우파와 자유주의적인 우파가 각각 우파(보수) 좌파(진보)를 자임해왔다는 것입니다. 이게 왜 문제가 되냐 하면 지금까지 한국 정치가 지배계급의 이익만 일방적으로 대변해왔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젠 민노당이나 진보신당 같은 곳을 선택해도 군사독재 시절처럼 잡아가지 않지만 여전히 정치하면 우파정치 안에서만 생각하는 경향이 높습니다. 사실 민노당이나 진보신당은 한국에선 제일 좌파 정당이지만 냉정하게 보면 중도좌파, 어떤 정책에선 그냥 중도에 불과합니다. 대다수의 인민들은 민노당이나 진보신당이 지나치게 온건해서 계급의 이해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다고 불만을 가져야 하는데 오히려 뭔가 비현실적이고 관념적이라는 생각에 빠져있죠. 이런 모든 게 지배계급이 우리에게 심어놓은 허위의식들입니다. 사회변혁과 관련하여 중요한 또 하나의 문제는 87년 이후에 진행된 민주화가 실제 더 중요한 내용은 자본화였다는 것이죠.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것이 말하자면 70년대 중후반부터 국제적으로 시작된 것이라고 하는데, 국가권력이 경제를 딱 틀어쥔 딱딱한 사회는 신자유주의체제에 포섭될 수가 없죠. 신자유주의체제에 포섭시키기 위해서는 민주화 될 필요가 있는 겁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혹시라도 오랜 기간 동안 민주화 운동에 헌신한 분들을 폄훼하는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저도 거기 참여했던 사람이지만,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국사회의 민주화는 신자유주의세계체제 포섭의 준비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한국의 사회운동세력이나 진보운동하는 분들이 국제적인 세계자본주의의 이런 변화에 대해서 경계의식이 굉장히 적었습니다. 군사 파시즘이 물러나면 저절로 좋은 사회로 계속 진행할 거라는 낭만적인 믿음이 있었죠. 그리고 80년대 후반에 현실사회주의가 무너지면서 그나마 반자본주의적인 운동을 하던 세력들이 많이 쇠락을 했고, 그러면서 한국사회는 신자유주의 자본화가 별 장애 없이 진행이 된 거죠. 신자유주의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된 것은 구제금융 이후, 김대중 정권부터입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김대중 노무현 정권은 민정당이나 한나라당 같은 세력과 정치적으로는 분명히 구분되는 세력이지만, 이 신자유주의 자본화라는 논지에 있어서는 사상 동지적적인 관계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노무현씨가 한 3년전에 한나라당의 합당을 제안하면서 ‘한나라당과 우리간에 실질적인 정책간의 차이는 없다고 본다’고 말한 적이 있죠.
그런데 우리는 대개 민정당 한나라당은 우파 김대중 노무현은 좌파 이런 식으로 구분해왔죠. 좌파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민노당부터 출발하는 것인데, 계속 한나라당은 우파 김대중 노무현은 좌파, 조중동은 우파 한겨레는 좌파, 이런 식의 왜곡된 이념구도 속에서 신자유주의 자본화는 점점 더 빠르게 진행되어 왔습니다. 정치적 민주화를 내세운 사회경제적 신자유주의 자본화, 그걸 이른바 ‘개혁’이라고 부르죠. 그러나 개혁은 지난 10년 동안 언제나 진보적이고 좌파적인 것으로 여겨져왔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한국사회는 정치나 사회문화의 면에서 노동자 인민의 이익은 거의 반영되지 않는 구조인 것이고 오늘의 이 상황, 복잡하고 고된 이 상황은 그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행복 이야기를 좀 하겠습니다. 여러분들 촛불시위, 많이 나가보셨죠? 제 둘째 아이가 지금 초등학교5학년 남자아이입니다. 여러분들 초등학생들이 이명박 싫어하는 거 잘 아시죠?  엄청나게 싫어합니다. 광우병하고 관계가 없이 처음부터 싫어했어요. 그런데 이 녀석이 며칠 전에는 뜻밖에 약간 의미심장한 질문을 하더군요. 갑자기 밥 먹다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아빠, 근데 어른들이 이명박 대통령으로 뽑은 거 아냐?” “그렇지.” “그런데 왜 이명박 욕만 해? 어른들은 왜 그래?” “그러게.” 어른의 한 명으로서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얘기하는 애들이 또 있니?" "응, 우리 반에 여러 명.“ 지각있는 사람이 촛불이나 광장의 열기에 100% 감흥에 젖을 수 없는 이유가 그겁니다. 지각 있는 사람은 자기의 책임이 포함된 어떤 나쁜 일이 벌어졌을 때 두 가지 행동을 동시에 하게 되죠. 비판과 분노. 그 상황에 대해서. 자신에 대해서 반성과 성찰, 그런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이번 5, 6월의 촛불과 광장의 의미는 그런 기운이 없습니다. 사실 이명박이 대통령으로 뽑힌 이유는 참 더러운 것이었습니다. 그가 좋은 정치인이라서가 아니라 그가 대통령이 되면 뭔가 짭짤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에 그를 뽑은 것이지요. 그래놓고선 우리 새끼 광우병 고기 먹이는구나 하니까 다들 들고 일어나는 건데 이걸 민주화운동에 비견하거나 위대한 항쟁이라고 말하는 건 사실 민망한 데가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한국사회가 성찰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가 되어버린 게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많이 변했습니다. 그걸 알수 있는 대표적인 케이스가 이른바 교육입니다.  이명박 씨가 0교시, 학교자율화, 학교서열화 하니까 양식 있는 많은 분들이 이명박이 아이들 다 죽인다 라고 비판을 했는데, 글쎄요 이명박이 갑자기 애들 죽이기 시작했나요? 이미 애들은 우리 손에 다 죽어가고 있지 않았습니까? 이미 고등학교로 보면 공부 못하는 아이들이 새벽 2시에 집에 들어가는 수준입니다.
초등학교 아이들은 얼마나 나은가요? 저는 박정희 정권에 태어나서 고등학교 2학년때 박정희씨가 죽었는데 초등학교 때 거수경례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구호가 “건설합시다”였습니다. 그렇게 학교를 다녔지만 하교 후엔 우리는 군사파시즘은 아무런 관계가 없었어요. 그 당시에 오후 세시 쯤에 소재가 정확하게 파악되는 아이는 병든 아이거나 아니면 징계중인 아이였죠. 그렇게 아이들이 놀면서 건강해지고 자랐었는데, 지금 보십시오. 오후 세시에 초등학교 아이가 한 30분 정도 행적이 안밝혀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30분이 뭐 30분입니까? 15분만 행적이 안 밝혀져도 이제 큰 문제가 발생합니다. 세상이 험해서 아이를 보호한다 이런 면도 있지만 실은 관리와 감시체제의 측면이 훨씬 더 강하죠. 아이가 계속 학원을 돌아야 하니까. 애들을 이렇게 키우던 사람들이 이명박이 0교시 뭐 어쩌고 하니까 갑자기 화를 내면서 이명박이 애들을 죽인다고 하면 정작 애들이 볼 때는 우리가 미친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까요?
대운하도 마찬가집니다. 여기 계신 분들이 아마 100% 가 대운하에 반대할 겁니다. 그런데 밤늦은 시간에 두시에 길게 늘어선 수십대의 학원버스들, 그 안에 생기잃은 낯빛으로 실려가는 아이들, 그게 대운하가 아니고 뭡니까? 저는 그 대운하가 경부 대운하 보다 훨씬 더 파괴적이 고, 거대한 대운하라고 생각합니다. 그 대운하에 자기 아이를 ‘아이의 미래와 발전을 위해서’ (어디서 들어 본 말이죠?) 실어보내는 이명박의 경부대운하를 정색을 하고 반대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어쩌면 우리는 개혁을 외치던 지난 10년 사이에 작은 이명박들, 작은 이건희들이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군사파시즘은  말입니다. 사람을 때리고, 고문하고, 폭압하고, 잡아가고, 죽이고 그렇게 다스리죠. 그런데 그런다고 해서 사람이 상대를 존중하게 되나요? 그런  폭압 속에서도 보통 사람들은 고개숙이고 눈치보면서 살지만, 속까지 변하는 건 아닙니다. 위험하고, 겁이나니까 숙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른바 자본화가 무서운 것은 내 스스로 가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군사파시즘은 폭력과 억압으로 우리를 다스리지만, 자본화는 우리한테 욕망을 심어주어서 우리가 그 욕망을 쫓게 만듦으로서 우리의 정신과 가치관과 영혼을 송두리째 변질시킴으로서 지배하는 것이죠.
가치관이 변하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치관은 크게 두가지로 나뉩니다. 자본의 가치관과 일하는 사람들의 가치관. 자본의 가치관은 뭐냐 하면 남보다 더 많이 갖고, 더 잘살고, 이런 것을 성공이라고 생각하고 자랑스러워 하는것입니다. 일하는 사람들 의 가치관은 뭐냐하면은 그것을 오히려 불편해하면서 좀 더디게 가더라도 같이 가고 싶어하고, 자기보다 좀 더 떨어진 사람들에 대해서 연대하고 싶어하고, 이것이 일하는 사람들 의 가치관입니다.  지난 10년동안 한국사회의 성원들을 가만히 보시면 거의 대부분 자본의 가치관으로 변질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도 일단 커야 성공한 교회이고, 사람을 평가할 때도 물질적이고 외형적인 게 절대적 기준이죠. 그래서 젊은 여성들은 자기 상품가치를 높이기 위해 다들 성형수술을 하고 다이어트를 하고 그러는 거죠. 요즘 아이들 장래희망 중 가장  많은 게 뭔지 아세요?  연예인입니다. 문론 옛날에도 가수나 배우되고 싶어하는 아이들이 있었지만 그건 자기 재능이나 취향과 관련된 것이죠. 지금은 그게 아니라 우리가 아이들에게 심어준 가치관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연예인이 자유롭고 편안하면서도 물질적으로도 아주 잘 나가는, 근사한 삶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행복한가.  다 아이의 미래와 행복을 위해서 그렇게 하고 있는데 진짜 우리가 행복한가 가까운 예를 하나 들어 보죠.  여러분들 주변에 고등학교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들이 엄마한테 어떻게 하는지 가만히  보십시오.  굉장히  함부로 합니다. 적대감 같은 게 있어요. 사춘기의 반항이 아니라 아주 일관된 그런게 있습니다. 엄마는 청춘을 바쳐서 아이를 위해서 그렇게 헌신하고 봉사하는데 왜 아이들은 고등학교 정도가면 엄마를 저렇게 함부로 하고 막하는가?  이유는 하나입니다.  지금 엄마와 아이의 관계가  코치와 선수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엘리트 체육에서 중요한 것은 경기 성적일 뿐이죠. 코치가 선수를 붙들고 ‘경기 성적도 중요하지만 그거 보다는 스포츠 인으로서의 태도와 인간미가 중요하다’는 얘기를 할 수 있겠어요? 안 그래도 과도한 훈련으로 심신이 포화상태가 된 그 선수한테. 그런 관계이기 때문에 아이와 엄마 사이에 인간적은 존경 같은 건 갈수록 사라지는 겁니다. 엄마는 아이를 위해 모든 걸 다 포기하고 헌신하는데 아이 입장에서 엄마는 경기성적에만 매달려 자신을 관리하고 괴롭히는 냉혹한 코치일 뿐이죠. 지금 이런 상태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가 이렇게 애를 쓰고 고생을 하고 있는가? 이런 생각을 한번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모든 게 이명박 때문인 것처럼 분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작은 이명박, 작은 이건희인 우리에게 성찰없는 분노는 카타르시스일뿐이죠.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은 자기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갖게 되어 있는 거니까.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은 이명박씨는 군사쿠테타로 박정희나 전두환처럼 군사쿠데타로 억지로 집권한 사람이 아니라, 이른바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선거에 의해서 압도적인 표차로 선출된 대통령이라는 것입니다. 이명박을 비판하고 욕한다는 것은 우리 자신에 대한 비판과 욕이기도 해야하다는 것을 기억을 해야 된다.  이명박이 생각하는 행복, 이건희가 생각하는 행복과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이 다를 게 없다면 어떤 분노나 싸움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얘기를 하면 어떤 분들은 겁을 내더라고요. 이를테면 내일부터 권정생 선생님처럼 그렇게 사는  것으로. 왜 그런 극단적인 상상을 하면서 겁을 내는지 저는 이해가 안가요. 사실 그것은 그렇게 가고 싶지 않아하는 욕망을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죠.  권정생 선생님의 인세가 수억원이 통장에 들어옴에도 불구하고 한 달에 20만원 가지고 사셨다, 우리 시대의 성자다.  이런 거를 우리는 잘 알지만 모든 사람이 권정생 선생님처럼 산다면 그처럼 훌륭한 세상은 없겠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한 세기에 한두명 나올까 말까 하는 특별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세상을 목표로 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늘 흔들리고 욕망도 있고 속물적인 즐거움을 가지면서 또 반성하고 성찰하면서 사는 사람들이죠. 
우리는 지금 고속 인터넷과 최신 휴대폰이라는 족쇄를 차고 살고 있기 때문에 여유가 없어서 되새겨 볼 수가 없어서 그렇지 우리는  대단히 비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 시대라 세계가 다 이런 줄 알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초등학교아이들이 저녁까지도 학원을 돌고, 고등학교의 공부못하는 아이들이 새벽 2시에 들어오고, 핸드폰이나 엠피쓰리. 운동화 이런 걸 가지고 아이들이 행복을 느끼고, 거의 모든 아이들이 장래희망이 없거나 아니면 거의 모든 아이들의 장래희망이 연예인인 이런 사회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괴상하고 비정상적인 상태가 우리의 미래와 행복을 위해서 당연한 일인양 휩쓸려 가고 있습니다.
다르게 살자는 것은 내일아침부터 권정생선생님의 삶으로 이전하자는 것이 아니라 이 괴상하고 비정상적인 삶에 한번쯤 브레이크를 걸고 되새겨 보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게 정말 행복한건가? 내가 애들 이렇게 키워서 10년후 20년후에 나하고 아이들하고 인간적으로 믿고 진정으로 대화할 수 있는 관계가 될 수 있을까? 아이는 정말 고마워할까 ?  이렇게 계속가면 내 인생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명박 욕만 할게 아니라 이런 생각을 해보자는 것입니다.
아까 처음에 말씀드렸다시피 진보라는 것은 행복하자, 잘 살자는 것입니다. 진짜로. 행복이 아닌 것을 행복이라 믿고서 인생을 소모시키거나 더욱더 고단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을 위한다며 아이들을 못살게 구는 것이 아니라, 진짜 행복하자 더 잘살자는 것입니다. 올바르고 정의롭기 때문에 고통과 헌신을 감수하자는 것이 아니라 진짜 더 잘살고 더 행복해지자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함께 되새겨보는 시간을 갖기를 여러분들에게 그리고 저 자신에게 정중하게 제안합니다. (6월, 작은책 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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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미힌 2008-09-05 0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글과 사람이 조화롭다...

머큐리 2008-09-05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면의 성찰이 부족하다 보니 촛불이 힘을 받지 못하는 걸까요...구구절절이 옳은 소리라 오늘 하루라도...정말 진지하게 되새겨 봐야 할 듯 하네요

라주미힌 2008-09-05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규항씨 글을 보면.. 소통 의지가 분명한 지식인임을 느낄 수 있어요.
알기 쉬우면서도 정곡을 예리하게 군더더기 없이 베어내는 사무라이 같다고나 할까...

니나 2008-09-05 15: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신이 내놓는 의견과 일치하는 삶을 사려는 노력을 최선을 다해 하고 있는 분이라 그런 것 같아요. 고래가 그랬어도... 미약해 보인다 하더라도, 오랜 시간이 걸린다해도 최대한 실천적이며 대안적인 실제 행동과 함께 쏟아져나오는 지성이라 항상 존경스럽다는. 겉멋으로 부리게 되는 열정, 냉소주의 이런거에 빠지기 쉬운 젊은날에 본보기가 되어주시는
 

정태인, “부동산 붐 이후 버블 붕괴 가능성 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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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인 성공회대 겸임교수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 기조는 ‘토건형 신자유주의’로 박정희식 개발독재와 시장만능의 시장독재가 뒤엉켜져 있으며, 이 같은 정책 기조가 바뀌지 않을 경우 부동산 경기의 반짝 붐 이후 한국 경제는 ‘파국’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정태인 성공회대 겸임교수는 26일 ‘진보금융네트워크’가 주최하는 ‘열린 강좌’에서 이 같이 전망하고 한국경제가 “지난 10여 년간 빠른 속도로 시장화가 진행된 결과 과잉유동성에 따른 버블 경제화와 투자 부진의 결합이라는 앵글로색슨형 경제의 특징, 즉 자산주도형 경제의 폐해를 보이고 있다"고 분석했다.

정 교수는 이명박 정부가 원래의 정책 기조대로 부동산 경기를 일으켜 일단 경기후퇴를 막으려 하는 경우 한국 경제는 “(미국의)서브프라임 모기지 게임처럼 파국 직전의 정점을 향해 치달을 것”이며 “세계경제의 침체, 중국경제의 쇼크가 단숨에 거대한 버블을 터뜨리는 순간을 목도할 가능성이 높다”고 예측했다.

버블 폭발 가능성 높아

정태인 교수는, 김대중 대통령 이후 지속되고 있는 ‘시장과 민주주의’가 실제는 “시장독재였고 기본적 민주주의의 침해”라고 평가하고,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 기조를 “멕시코의 길”, “토건형 신자유주의”라고 불렀다.  

정태인 교수는 이명박 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가격이 지속적으로 올라야 투자 수익이 보장된다는 점에서 … 정확히 서브프라임 모기지와 똑같은 길을 밟을 것”이며, ‘광역경제권 구상’은 “무안국제공항과 같이 과잉설비를 부추길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이어 정 교수는 이명박 정부의 “신앙인 수출지상주의가 과연 국민경제 도움이 되는 것일까”라고 물으며, “수출의 고용유발효과는 10억 원당 10명 정도”라고 수출지상주의를 비판했다.

정 교수는 또 공기업 민영화가 “일반 국민은 그동안 누리던 공공서비스마저 잃게 되고 … 서비스 가격이 급등하거나 서비스 자체가 끊어질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또, 정 교수는 “고삐 풀린 재벌규제”가 “시장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인 감독, 나아가서 사법적 처리에도 압박을 가하고 있는 것”이라 말했다.

한국사회 선택의 기로에


정 교수는 한미FTA와 이명박의 결합은 '최악'이며 현 정부의 "사회경제 정책기조는 자발적 민영화/자유화이며 한미FTA는 이런 정책기조를 영원히 역전불가능한 것으로 못박는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는 "이런 기조의 원산지인 미국이 심각한 경제위기에 빠져들고 있다"며 서브프라임 모기지 위기는 이것의 귀결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또 "중남미 많은 국가들이 개방화/민영화로 위기가 오면 더 많은 개방화/민영화를 택하고 다시 더 큰 위기를 맞는 길을 선택했다"며 노무현 정부가 시작하고 이명박 정부에서 활짝 열린 '멕시코의 길'을 벗어나기 위해 한국 사회는 선택의 기로에 놓여있다고 강조했다.

정 교수는 "이 세상에 시장해법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 해법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공공성을 강화해야만 우리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지지를 얻는 것이 중요하며, 촛불 시위에서 나타난 시민들의 요구는 이런 맥락에서 중요하게 봐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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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문화평론가) / 씨네21 No.668

애플사의 CEO 스티븐 잡스는 스탠퍼드대학의 졸업식장에 껄렁하게 청바지를 입고 나타나 자신이 내린 생애 최고의 결정 가운데 하나가 대학을 중퇴한 것이었다고 말했단다. 명문대 졸업생들의 부푼 자부심에 기얹은 이 썰렁한 축사는 전세계 네티즌의 열광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마이크로소프트 빌 게이츠 회장의 연설도 유명하다. 그는 하버드대학의 명예졸업장을 받는 자리에서 전통적 기부나 자선의 차원을 넘어 사회적 빈곤과 불평등을 극복하는 '창조적 자본주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 역시 자신이 내린 생애 최고의 결정 중 하나고 아마 대학 중퇴를 꼽았을 것이다.

하지만 천하의 스티브 잡스나 빌 게이츠라도 한국에서라면 별볼일 없었을게다. 여기서는 대학 졸업장이 모든 것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뿐인가? 이 보수적 사회에서 식장에 청바지를 입고 나타난 스티븐 잡스는 '인간에 대한 예의'가 없다고, 빈곤과 불평등을 해소하자고 말하는 빌 게이츠는 '좌파 평등주의 빨갱이'라고 비난받기 십상이다.

스티븐 잡스의 제품발표회는 예술적 퍼포먼스에 가깝다. "이 노트북은 두께가 1.9cm"라고 말하는 것고 얇은 서류봉투 속에서 슬며시 초박형 노트북을 꺼내는 것은 애초에 효과가 다르다. 이 미학성은 PT만이 아니라 애플 제품의 디자인 자체의 원리다. 디지털 시대의 생산력은 이렇게 예술적 창의성에서 나온다.

빌 게이츠에 따르면, 시장의 힘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써야 자본주의가 제대로 발전할 수 있다. 바로 그것이 '창조적 자본주의'다. 실제로, 한국 자본주의의 성장을 가로막는 것은 사회적 양극화다. 그런데도 한국의 지배층은 구태의연하게 성장 제일주의를 외친다. 모자란 사회적 상상력이 한국 자본주의를 창조적이지 못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정부와 보수언론에서는 툭하면 '경쟁력'을 외친다. 문제는 그들이 말하는 '경쟁력'이 더 이상 경쟁력이 없다는 데에 있다. 세계는 상상력과 창조성의 경쟁을 벌이는데, 그들의 굳은 머리속의 '경쟁력'은 획일적인 입시경쟁일 뿐, 도대체 국제중학교에 들어가 명문대 가려고 밤늦게가지 토플 공부를 하는 초등학생에게 상상력과 창조성을 기대할 수 있을까?

사회적 상상력의 결여야말로 한국 경제의 고질병이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의 기술생태계가 파괴되어 있어, 대기업의 수출이 아무리 늘어도 그 효과가 중소기업으로 흐르지 못하는 게 우리 경제의 문제다. 아무리 대기업의 수출을 늘려도 성장이 잘 안된다면, 뭔가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는 데 생각이 미쳐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여기에 대한 정부여당의 대책은? '삽질'로 내수를 살리겠다는 것이다. 고용창출을 위한 대책은? 건국절 기념으로 비리 기업인들 대거 사면해주는 것이다. 한나라당 대변인은 기껏 욕먹어가며 사면해줬더니 왜 대기업에선 신규고용을 안 해주냐고 볼멘소리나 하고 앉았다. 비리 기업인 사면으로 고용을 창출하는 정부가 세상에 또 있을까?

한마디로, 우리의 문제는 미시적 차원과 거시적 차원 모두에서 경제운영의 창의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이명박 정권은 그 특유의 복고 취향에 힘입어 이 경향을 더욱더 악화시켰다. 개발도상국인 중국도 양적 성장에서 질적 성장으로 전환할 것을 고민하는 즈음에, 이 정권은 747공약(주 : 매년 7% 성장, 국민소득 4만 불, 세계 7대 경제대국)을 추진하겠단다. 그것도 앞으로 10년간 계속 추구할 목표로 삼겠단다.

경쟁력없는 경쟁력을 신처럼 신봉하는 굳은 머리들에 들려주고 싶은 얘기가 있다. 19세기에 옥스퍼드대학에서는 졸업생 중에서 성적이 가장 우수한 이에게 상을 주는 제도를 도입했다고 한다. 문제는 그 제도가 도입된 이후 100동안 그 대학은 수학자를 배출하지 못했다고 한다. C.P.스노의 조서 <두 문화>에 나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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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8-08-26 2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0동안 >>> 100년 동안이란 말이겠죠? 진교수님 일갈, 오랜만에 듣네요.
 

신학자들은 예수가 젤롯당의 무장항쟁이나 바리새인들의 시민운동에 적극 참여하지 않은 것을 두고 정치적 해방에 관심이 적었다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예수가 젤롯당의 운동에 적극적이지 않거나 바리새인들과 마치 원수처럼 불화하는 모습을 보였던 건 예수의 관심이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라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인민들이었기 때문이다. 설사 대로마 항쟁에서 이겨 해방된다 해도 인민들의 처지에선 억압과 착취의 주체가 로마인에서 같은 유대인으로 바뀌는 건 외엔 달라질 게 없었다. 바리새인들은 위기에 처한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분연히 일어난 윤리적이고 정의로운 사람들이었지만, 율법 준수를 기준으로 하는 그들의 운동 방식은 율법을 일일이 지키다간 굶어죽을 수밖에 없는 인민들에겐 또 하나의 끔찍한 억압일 뿐이었다. 예수는 그래서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이 목숨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던 ‘이스라엘 민족’과 ‘하느님의 율법’을 부서트려 진정한 이스라엘 민족과 진정한 하느님의 율법을 세우려 했던 것이다. 예수의 선택은 오늘 우리에게 몇가지 매우 직설적인 가르침을 준다. 그 중 하나는, 인민의 입장에서 조선은 아직 독립되지 않았다는 것, 인민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던 주체가 일본인에서 조선인으로 바뀌었을 뿐이라는 것, 이다. 오늘 광복절은 것을 바로 그걸 기념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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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미힌 2008-08-16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나는 신나게 잠만 잤다... 진정한 해방을 꿈꾸기 위해
(비루한 변명?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