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사관에 기대어 절대계몽군주의 개발독재를 용인하는 ‘정조신화’
전통적 정치이념인 ‘붕당정치’를 파괴한 절대왕정이 사대부보다 보수적


▣ 장정일/ 소설가


<누가 왕을 죽였는가>(푸른역사, 1998)라는 제목으로 초간되었다가 최근 제목을 바꾸어 재간된 이덕일의 <조선 왕 독살사건>(다산초당, 2005)은, 27명의 임금 가운데 독살설에 휘말린 8건의 사례를 연구한다. 그 가운데는 세종대왕에 버금가는 영명한 학자군주로, 왕조 중흥의 전성기를 이룩했다는 22대 정조대왕도 들어 있다. 저자는 “‘만약 정조가 10여 년만 더 살았다면’ 조선의 운명은 바뀌었을 가능성이 높”았다면서, 그의 사후 전개된 극단적인 수구 정치가 조선의 멸망을 불러왔다고 말한다.

개혁을 시도하다가 수구파에게 독살된 절대계몽군주라는 ‘정조신화’를 대중에게 널리 알린 사람은 이인화다. 그가 쓴 <영원한 제국>(세계사, 1993)은 오늘의 선진화된 유럽 국가는 봉건 시대 말기에 하나같이 강력한 절대왕정기를 거쳤다는 사관 아래, “홍재 유신이 실패함으로써 우리 민족사는 160년이나 후퇴했다. 우리의 불행은 정조의 홍재 유신 대신, 박정희의 10월 유신을 경험”할 수밖에 없었던 사실을 안타까워한다.

홍재 유신의 실패 대신 10월 유신?

정조 독살설에 정조의 개혁군주상(像)이 겹쳐 있기 때문에, 이 음모론은 자세히 해명될 필요가 있다. 사전처럼 곁에 두고 보는 이이화의 ‘한국사 이야기’ 가운데 제15권 <문화군주 정조의 나라 만들기>(한길사, 2001)는, 정조 사후 꾸준히 나돌았던 독살설은 노론 벽파에게 오랫동안 소외되어 울분에 빠져 있던 영남 남인과 일부 소론이 지어낸 것이라며 배척한다. 또 이보다 앞서 출간된 박광용의 <영조와 정조의 나라>(푸른역사, 1998) 역시 동일한 해석 끝에, “정조가 계몽절대군주를 지향했다고 주장하는 경우”에는 마땅히 독살설을 부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까닭은 “계몽군주는 무엇보다도 부지런하고 신민들의 사랑을 받는 것이 특징”이므로 “이런 군주를 독살하려는 음모가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지 않아야 정상이라는 것이다. 최홍규의 <정조의 화성 건설>(일지사, 2001)이 좋은 예다.

유봉학의 <정조대왕의 꿈>(신구문화사, 2001)은, 정조 독살설이 솔깃한 까닭은 “자주적 근대화에 실패했던 원인”을 통속적으로 해명해주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근대로의 개혁이 과단성 있는 지도자 정조 한 사람에 의해 진행되다가, 독살이라는 폭력적인 방법에 의해 지도자가 시해되자, 이후 그가 추진한 근대로의 개혁이 좌절”되었다는 상황을 설정하고 있는 정조 독살설은, 전근대적 영웅사관에 입각해 개발 독재마저 용인해주는 논리가 된단다.

정조의 정치와 개혁정책에 관한 가장 폭넓고 냉철한 평가는 박현모의 <정치가 정조>(푸른역사, 2001)에 기술되어 있다. 따로 또 한 편의 독후감이 필요한 이 책은, 독살설을 일절 언급하지 않으면서 “과로와 조로화(早老化)”가 원인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정조가 죽던 재위 24년째 대왕은 “연신(筵臣) 중에 나와 나이가 같은 자는 소년이나 다름없는데 나는 정력이 이러하니 이상하지 않은가”라며 피폐해진 육신을 슬퍼했다. 실제로 스물다섯에 왕위에 오른 준비된 왕 정조만큼, 오랜 재위기간 동안 경장(更張·개혁)에 공을 쏟은 왕은 없었다.


새롭게 보는 조선조 붕당정치


하지만 “경장 반대세력의 움직임에 지나칠 정도로 예민하게 반응해 본격적인 경장을 추진하지 못”했으며, “때를 틈타 좀더 과감한 개혁을 추진하지 못한 것은, 정조의 학문적·정치적 역량을 고려해볼 때 대단히 아쉽”기만 하다. 그나마 정조가 애써 이룬 경장책은 그의 사후 정권을 차지한 세력에 의해 말짱 ‘도루묵’이 되었고, 더욱 나쁜 것은 정조가 죽으면서 조선의 붕당정치(공론정치)도 따라서 무덤에 묻힌 것이다. “필자는 이 점에서 정조 사후 63년간 지속된 세도정치가 사실상 영·정조 시대에 배태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정조의 왕권 강화 정책은 조선의 전통적 정치이념인 붕당정치를 파괴했다. 유봉학에 의하면 정조대의 사대부와 각신들이 수구로 몰리면서까지 정조를 따르지 않은 것은 “왕권 강화에 대한 집착은 다가오는 새로운 시대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점, 조선조의 붕당정치를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해주는 한편, 근대를 맞이하기 위해 절대왕정기가 ‘필수 코스’라고 믿어온 우리들의 서구중심주의를 재고하게 해준다. 오늘의 관점이든 당대의 관례로든, 사대부들보다 정조가 오히려 보수적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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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일 전에, 즉 1월19일에 모스크바에서 또 다시 충격적 소식이 들렸습니다. 마르켈로프 변호사가 모스크바 시내에서 백주대낮에 괴한의 권총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와 함께 걸어가고 있었던 야당지 <노바야 가제타>의 바부로바 여기자가 괴한에게 저항을 시도했다가 역시 흉탄에 쓰러져 결국 유명을 달리 하게 됐습니다.


   
  ▲ 미르켈로프 변호사


모스크바 시내, 크레믈린궁과 도보 30분의 거리에서 말씀입니다. 괴한의 행동을 보면 꼭 사형을 집행하는 '공무원'의 행태였답니다.

백주대낮에 두 사람을 죽인 뒤에 천천히 지하철역을 향해 걸어가 지하철에서 잠적하고 말았지요. 권총도 버리지 않았답니다. 아주 유유자적하게, 아주 태연하게...

공무집행과도 같은 태연한 살인

확실히 사람이 '국살' (國殺)의 막대한 책임을 지고 일을 저지를 때에 공연히 덤빌 일이 없어요. 누가 잡기라도 하겠어요? 공인된 직업인데 말씀입니다.

이 마르켈로프씨를 떠올리면 식민지 시대의 허헌 선생님이나 최근의 조영래 변호사와 같은 像이었어요. 인권 변호사의 전형이었지요.

그가 수임한 일 중에서는 개발업자들로부터 시민의 숲을 지키려다가 '괴한' (그 정체를 아마도 경찰만이 모를 것입니다)들로부터 살인적 구타를 당해 지금 중태에 빠져 겨우 목숨을 유지하고 있는 모스크바 부근 한 지역 신문의 편집장도 있었고, 지난 번에 비슷한 형태의 '국살'로 숨진 안나 폴리트코브스카야 기자의 유족들도 있어요.

그러나 그가 수임한 사건 중에서는 가장 사회적 파급력이 있었던 것은 물론 '부다노프 대령 사건'이었습니다. 체첸 독립운동 진압에 참전한 부다노프 대령이라는 사람(?)이 2000년2월에 딸이 태어났다고 하여 '잔치와 같은 기분'을 탔을 때에 처음에 '재미'로 큰 대포로 체첸 마을 하나를 초토화하려 했는데 부하의 저항에 부딛쳐 죄절됐습니다.

기분이 나빠지자 18살의 체첸 처녀를 붙잡아 '폭도들의 저격수'라고 혐의를 덮어씌워 자신의 사무실에서 강간하여 목졸라 죽인 것이었습니다.

여성 납치, 강간, 살해... 그 당시에 러시아 진압군 측에서 그러한 일이 다반사이었는데, '부다노프 사건'에 대해 독일 등 러시아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할 위치에 있는 몇 개 유럽 나라에서 알아차려 강력한 조치를 주문했습니다.

기쁨에 넘친 러시아 극우파들

그 외압도 있고 체첸 민심에 대한 생각도 있어 부다노프 대령이 재판이라도 받았는데 (그 당시 다수의 러시아군 전범들과 달리) 결국 10년형으로 일단락됐습니다. 그 재판에서 마르켈로프 변호사는 그 체첸 여성 유족을 대변했어요 (암살의 위협에 시달려온 그 유족들은 지금 여기, 노르웨이에서 망명 생활합니다).

그러다가 금년 1월초에 부다노프가 '모범수'로서 조기석방하게 됐는데, 마르켈로프가 유족을 대표해서 조기석방취소 가처분신청을 해놓은 상태이었어요. 그러나 부다노프가 석방되고 그 뒤에 바로 4일 지나서 마르켈로프가 살인됐습니다.

그리고 러시아 인터넷에서 파시스트 등 극우들이 기쁨에 들떠 자축하는 분위기로 돌변됐지요. "우리 영웅적 군인이 드디어 석방되고 그 깜둥이 놈들을 변호하던 병신이 드디어 응당의 처분을 받았구나!" 대체로 이런 식입니다.

물론 한국에서는 보도조차도 거의 안됐던 것 같아요. 대한민국의 재벌과 재벌언론들은 러시아에서 휴대폰 판매와 에너지 개발 이상의 그 어떤 관심이라도 갖겠어요? 또 미국이나 일본에서 그런 일이 저질러졌다면 보도라도 됐겠지만 러시아 같은 '변두리'에 대한 관심은 별로 없지요.

남의 나라에서 이루어지는 이 끔찍한 일들을 갖고 제가 글을 쓰는 이유는 무엇이냐고요? 이웃 나라이기에 일단 러시아의 점차적 파쇼화 과정에 대해서는 국내에서도 관심을 갖고 연구라도 해볼만합니다. 러시아 파시스트로부터 공격을 받아 숨지거나 부상을 당한 수백 명의 외국인 중에서는 한국인/북한인 몇 명도 있는데 말씀입니다.


   
  ▲유리 부다노프


그리고 러시아와 비교될 수 있는 수준은 결코 아니지만 '외국인 범죄', '외국인 불법 체류자 추방'이니 들먹이는 일부 '아류 파시스트'들이 국내에도 있고 세계 불황이 깊어짐에 따라 또 활발해질 수도 있기에 일단 경각심을 갖고 있는 게 좋습니다.

친절한 명박랜드, 즐거운 민간 파시스트 

물론 외국인에 대한 살인적 단속을 국가가 알아서 다 해주는 이 '친절한 명박랜드'에서는 민간 파시스트들이 굳이 할 일도 그리 많지 않은데 (지금 이상으로 외국인 노동자를 더 괴롭힐 수 있나요?) 모든 카드들을 다 써버리게 되면 극우 세력들이 '배외주의' 카드를 꺼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요. 러시아만큼은 안가겠지만 그래도 안심할 수는 없지요.

그리고 마르켈로프 변호사에 대한 '백색 테러'를 이렇게 한글로 논하게 되는 또 한 가지 이유는 정치적 살인의 중요한 논리 하나를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번 일이 '주상께서 분부하신 바'인지 그 '주상'의 주위에서 결정해 처리한 것인지 아니면 민간 파쇼들이 국가보안기관의 지원을 적당히 받아 한 것인지 저도 모르고 아무도 모르는 것이지요.

'민간 파시스트 + 어느 정도의 안보기관의 지원'일 가능성이 제일 높은 듯합니다. 그러나 어쨌든 간에 주인네들이 이러한 '국살'의 형태를 이용하여 백성들 중에서 '叛民'이라고 생각되어지는, 남보다 용감한 이들을 '쥐도 새도 무르게' 처리해버릴 때에 꼭 한 가지 판단이 그 전제가 됩니다.

"이 일쯤 가지고 민란이 일어날 일 없겠다"라는 판단이 있지 않고서야 누가 인권변호사를 크레믈린 근방에서 죽이게 하겠어요? 즉, '다수의 침묵', '대중 독재', 즉 독재적 권력에 대한 다수의 동의의 지속은, '불평불만 분자 개인'에 대한 '비공식적 사형'의 전제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대중의 침묵이 살인 무기

그리고 독재자들은, 저들이 운영하는 사회를 너무나 잘 알고 있어요. 좌파와 자유주의자 등이 경악하고 분개하고 있지만 러시아인의 절대 다수는 별로 신경쓰지 않는 것은 인권 변호사의 죽음입니다. 그들의 침묵이 계속 지속되기에 다음의 '불평불만 분자' 제거에 대한 계획도 수립될 만할 것입니다.

한 사람씩, 한 사람씩... 다수가 자기 밥그릇만 챙기는 '순한 양'이 되면 '순한 양'이 될 수 없는 개인들이 이렇게 처리됩니다. 대중의 침묵이란 살인 무기에요, 살인 무기...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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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이란 무엇인가



어떤 이가 그러더란다. "김규항 씨의 교육관은 존중해요. 하지만 아빠 때문에 아이가 희생되어선 안 되잖아요?" 올해 중3이 되는 내 딸이 학원 같은 데 하나도 안 다니는 걸 두고 한 이야기였다. '희생이라...' 이야기를 처음 전해 들었을 땐 씩 웃고 말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에 내내 걸렸다. 그가 보수적인 사람이라면 그러려니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는 지난 해 여름 내내 촛불집회에 개근한 사람이며, 이명박이라면 아주 이를 가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런 사람이 아이를 학원에 보내지 않는 걸 아이를 희생시키는 일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아이가 학원을 안 다니면 경쟁에서 뒤쳐질 것이고 경쟁에서 뒤쳐지면 결국 불행한 인생을 살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명박 이름만 나와도 이를 가는, 자신이 세계관과 철학과 신앙에서 이명박과 정반대라 자부한다는 그는 이명박 씨와 적어도 한 가지는 같아 보였다. 바로 행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행복이란 무엇인가? 얼마 전 우연히 본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에서 나는 참 오랜만에 그 정답을 되새길 수 있었다. 제주도의 해녀할머니들을 그린 다큐멘터리였다. 평생 물질로 살아 온 여든 된 해녀할머니에게 물었다. "스킨 스쿠버 장비를 사용하면 더 많은 수확을 하실 텐데요?" "그걸로 하면 한 사람이 100명 하는 일을 할 수 있지." "그런데 왜 안 하세요?" "그렇게 하면 나머지 99명은 어떻게 살라고?"
인류가 생긴 이래, 행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두 가지 생각이 존재해왔다. 남보다 많이 갖는 게 남보다 앞서는 게 행복이라는 생각, 그리고 그런 걸 오히려 불편해하고 나보다 못한 사람이 눈에 밟혀 더디더라도 함께 가는 게 행복이라는 생각. 앞의 것은 한줌의 지배계급에게, 뒤의 것은 대다수 정직하게 일하는 사람들에게 이어져 내려온 생각이다. 인류 역사는 행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두 가지 생각의 대립이기도 했다.
인류가 그나마 여태껏 사람 사는 세상의 꼴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어떤 흉악한 세상에서도, 어떤 악랄하고 탐욕스럽고 막되어먹은 놈들이 세상을 지배할 때에도 행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다수 일하는 사람들의 생각이 유지되어왔기 때문이다. 행복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온다는 것, 아무리 많이 가지고 아무리 앞서도, 나를 진심으로 아끼고 염려하는 사람이 없다면 나와 진심으로 사랑을 나누는 사람이 없다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다는 것을 사회 성원의 대다수가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그 수천 수만년 동안 유지되어 온 생각이 오늘 사라지고 있다. 경쟁력이 행복을 가져온다는, 남보다 많이 가질수록 남보다 앞설수록 행복할 수 있다는 생각은 더 이상 한줌의 지배계급의 생각이 아니다. 대다수 노동자의 생각이며 대다수 농민의 생각이며 대다수 서민들의 생각이다. 불거지는 사회문제에선, 이를테면 언론노조 파업이나 철거민 살해 사건 따위에선 짐짓 그렇지 않은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오늘 한국 성인들의 사회적 리트머스 시험지라 할 아이들 교육문제에선 여지없이 정직하게 드러난다.
오늘 많은 사람들, 민주적이고 개혁적이며 진보적이라는 사람들은 한 목소리로 말한다. "이명박이 우리를 불행에 빠트리고 있다!" 백번 맞는 말이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명박 씨가 우리를 불행에 빠트리기 전에 이미 우리 스스로 행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잊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수천 수만년 동안 우리와 우리가 사는 세상과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지켜온 생각을.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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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람 돕지 마라, 외부세력 된다

이 나라에서는 억울하고 힘든 지경에 있는 사람들이 국가권력에 문제를 제기하고 항의하는 일을 도우면 안 된다. 같은 피해를 입은 사람들끼리 힘을 합해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억지떼를 써서 난리를 펴는 "떼 잡이" 소동이 된다. 강도 만나 죽을 지경이 된 사람을 도운 착한 사마리아인은 징벌대상이다. 그건 어디까지나 제3자 개입이고, "외부세력"의 준동이기 때문이다. 이 나라의 공권력은 제3자 개입과 외부세력에 대해 엄단하고 있으니 남이 무슨 일을 당하든 괜히 다치지 않으려면, "나 몰라라" 해야 한다. 아무리 동조하고 싶어도 못 본 척 해야 한다.

그렇게 냉혹한 사회가 되는 일에 기여하면 할수록 국가권력은 매우 기뻐한다. 이런 국가 권력이 가난하고 힘없는 국민들을 보호해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애초부터 엄청난 착각이다. 그런 국가권력은 더 이상 정상적인 국가의 힘이 아니다. 다섯 명의 철거민들을 처참하게 죽게 하고 나서 변명으로 일관하고 사건의 진실을 계속 은폐하려는 행위는 국가이기를 포기한 모습이다. 우리에게 지금 최대의 숙제는 명백한 범죄를 범죄로 인식하지 못하는 집단이 되어가는 국가권력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이다.

사람이 다섯이나 죽었는데 '공무집행하다 접시 깨는 것'쯤이야?

용산 철거민을 비난하면서 특공대 진압을 옹호하는 어떤 자는 라디오 토론방송에 나와서, "공무를 집행하다가 접시를 깨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그것도 인간의 말이라고 주절거렸다. 이 말을 하면서 그 자는 대통령 이명박도 이미 공무원들의 공무집행에서 발생할 수 있는 실수를 두려워하지 말라며 힘을 실어준 바 있다고 주장했다. 국민의 목숨이 희생된 것을 공무를 추진하다가 깨져도 되는 접시로 보는 자들이 저토록 목소리를 높이고 당당하다면 무서운 일이다.

철거민 가운데 죽은 사람들은 안타깝네, 애도하네 뭐네 하면서, 살아 있는 사람들은 도심테러 운운으로 졸지에 테러리스트로 만들고 있는 자들의 입이 바로 도심 테러다. 우린 지금 집권세력과 국가권력의 테러에 직면하고 있는 중이다.

한편, 공권력의 위상을 갖지 않아도 가난한 사람들을 공격하고 노동자들의 요구를 진압하며 언론인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는 일에 나서면 그건 "내부세력"이다. 내부세력은 공권력의 지원과 협력을 보장받는다. 내부세력을 다르게 표현하면, "지네들끼리"라는 말이다. 아 그러고 보니, "한 통속"이라는 말도 있다. 이번 용산 참사를 보면, 이 "지네들끼리"가 어떤 자들을 포함하는, 또는 "한 통속"이 누구인지 드러난다. 이들은 서로 조직적인 관계를 가지고 그에 기초한 행동도 한다.

내부세력 연대, 한통속 정치

현장에서 철거민들을 윽박지른 철거용역은 그곳 땅 부자, 건물 부자들이 조합이라는 이름 아래 고용했다. 철거용역과 부자들은 한 편이 되어야 세입자들을 거지처럼 만들어 몰아낼 수 있다. 그 철거용역이 경찰과 합동작전을 폈다. 아니 경찰이 철거용역과 합동 작전을 폈다. 아니, 그게 그거다. 부자와 경찰과 철거용역은 이렇게 해서 다정한 "지네들끼리"가 된다. 부자들의 뉴타운 식 재개발 정책은 권력자들이 돕는다, 또는 선도한다. 부자들이 권력자들에게 무엇을 건네주는지는 조사해봐야 자세히 알겠지만, 권력자들은 부자들에게 경찰을 내준다. "한 통속"은 이렇게 해서 완성된다.

우린 그 한 통속의 면면을 지금 보고 있다. 자, 경찰은 깡패를 잡아야 한다. 그런데 용역이 철거민들에게 폐타이어를 태워 독성 연기를 마시게 하는 등 깡패 짓 하게 내버려 둔다. 깡패 짓 하는 용역이 한통속이기 때문이다. 미리 짜고 친 내부세력이기 때문이다. 드러난 무선교신은 그걸 그대로 입증해주고 있다. 깡패 짓 하게 사주한 자들도 잡아야 한다. 그러나 "지네들끼리"니 잡지 않는다, 또는 못 잡는다.

그런데 깡패 짓 한 용역과 하나가 된 경찰은 누가 잡나? 그 경찰의 총수로 내정되어 용역과 합동작전을 편 특공대 파견을 결정한 사람은 누가 잡나? 그런 결정을 내린 경찰의 총수를 그 자리에 앉히고 싶어 하는 권력은 잡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외부세력 연대, 누가 부추기나?

책임전가와 진상 은폐를 위해 "전철연(전국철거민연합회) 때려잡기"로 문제를 덮고 싶어 하는 권력, 보수라는 이름을 걸쳐 입고 사실은 잔혹한 품성을 가진 수구언론, 이들과 하나의 몸이 된 냉혈 부자들. 그리고 이들에게 몸을 대주는 용역 철거반과 이들과 합동작전에 몸 사리지 않는 경찰들. 이들이 하나가 되어 "내부세력연대"를 강력히 구축하면서 "지네들끼리의 세상"은 견고하리라 믿을 것이다.

이런 그들에게 "전철연"을 비롯해 가난하고 힘없는 일반서민들은 "적대해야 할 외부세력"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외부세력이 이제 하나가 된다. 아니, 이들을 모두 하나로 만들어주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그들이다. 외부세력의 연대와 강력한 투쟁을 부추기는 배후세력은 "한통속 세력"이다. 그렇게 해서 외부세력이 내부세력을 전 방위적으로 포위해가는 맛을 이제 보고 싶어 하려는 걸까? "너희는 포위됐다, 너희는 포위됐다, 완전 포위됐다, 무기를 버리고 나오라." 뭐 이런 대 테러작전 선무방송 듣고 싶은 것일까?

<조선일보>의 지원사격

더욱 가관인 것은 왜 이런 사태가 생겨났는지, 그 본말을 뒤집거나 침묵하면서 희생자들을 가해자로 만들고 문제제기의 사회적 확산을 막기 위해 기괴한 논리를 동원하는 언론들이다. <조선일보>는 "법질서 못 세우는 정부는 자격 없는 정부"라는 제목의 1월 23일자 사설을 통해 철거민들의 저항을 도시게릴라 운운하면서 철거민들의 고통은 아랑곳 하지 않고 국가의 강력 진압을 촉구한다. 누가 또 죽어나가기를 바라는가? 그러면서 돈을 모아 용역을 동원한 자들의 문제는 전혀 제기하지 않고, 철거민들의 망루 장기 투쟁 비용 마련은 맹렬한 비난을 가하고 있다.

<조선일보>는 또 그 전날인 22일에는 "겁 없는 좌파들, 용산 불행 이용해 촛불 재판 꿈꾸나"라고 하면서 이번 사태의 근본에 대한 고민이나 성찰은 일체 없는 채로 좌파 운운으로 또 다시 색칠장난이나 하고 있다. 권력과 부자들에 대한 <조선일보>의 지원사격은 언제나 이런 식이다. 그건 그러나 모두 자기도 모르게 써나가는 언론범죄의 기록이다.

국가권력이 폭력진압을 주도해 국민을 죽게 하는 범죄 집단화되고, 이들과 짝한 언론과 방송도 거짓과 은폐와 왜곡으로 진실을 가리는 범죄 집단이 되고 사설 용역집단과 경찰이 한 몸이 되어 가난한 이들을 공격하고 도처에서 민주주의를 체포하는 일을 벌이며, 검찰과 법정이 이런 범죄를 정당화해주는 일을 맡고 그런 범죄에 국민들이 계속 희생되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정부가 국민의 인권과 자유를 유린할 때, 주권이란…

"어떤 형태의 정부라도 그 정부가 생명과 자유 그리고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권리를 파괴하게 되는 때에는, 언제든 이런 정부를 바꾸거나 소멸시키고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는 것은 국민(인민)들의 권리다." 1789년 프랑스 혁명에도 영향을 미친, 근대 민주주의의 정신을 압축한 <미국 독립 선언서(1776년)>의 유명한 대목이다.

이 정신에 따르면, 국민의 일원인 가난한 사람들의 생명이 국가권력의 테러 앞에서 위협받고, 민주주의의 기본 토대인 표현과 집회의 자유가 억압되고 사회적 약자들이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권리가 봉쇄되고 있다면 국민들은 어떤 때라도 자신의 주권적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미국 헌법 수정조항 1에서 10까지는 "미국의 권리장전"으로 알려져 있는 바, 국민들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는 법을 의회는 만들 수 없게 되어 있음을 골자로 하고 있다. 모두 <독립선언서>의 기본정신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셈이다. 이후 모든 민주국가는 이러한 정신을 보편적으로 따르고 있다.

우리의 헌법 2장 제10조는 이렇게 되어 있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이 의무를 저버릴 경우, 그건 이미 국가의 헌법적 토대를 상실한 조직이나 집단 내지 개인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그런 정부나 국가를 따를 책임이나 의무는 그로써 원천 소멸된다. 아니 이러한 정부를 바꾸거나 교체하거나 소멸시키는 권리가 새롭게 발생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언제나 불온하다

민주주의는 언제나 불온하다. 권력에게 불온하지 않은 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국가권력은 늘 민주주의를 진압하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민주주의는 권력의 독선과 폭력을 거부한다. 인간의 생명을 앗아간 범죄를 어떻게든 정당화하려는 정부는 민주주의의 적이다.

민주주의의 적이 되고 싶지 않다면, 깊이 머리 숙여 용서를 구하라. 진솔하게 사과하라. 희생자들을 모독하는 모든 독설과 욕설을 사죄하라. 도심 테러 운운한 자들도 모두 머리 숙여라. 무릎을 꿇어라. 그리고 책임자를 처벌하라. 폭력적인 재개발 정책을 철회하라. 엉뚱한 사람들을 원인 제공자나 가해자로 몰지 마라.

정히 그럴 수 없다면, 오랜 옛날 갈릴리의 한 청년의 말대로 된다. 가난한 민중들이 새로운 하나님 나라를 꿈꾸며 현실의 권력자들을 질타하고 새로운 시대가 오기를 환호하자 이를 당대의 지배세력이 억압하려 든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들의 입을 막으면, 돌들이 소리치리라."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90127120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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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28 14: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라주미힌 2009-01-28 15:54   좋아요 0 | URL
제가 좋아하는 곳인데.. 빼먹었네용 ㅎㅎ
 

나의 <프레시안> 칼럼은 월요일 아침에 나간다. 어지간하면 지키려고 한다. 환율 폭등 때 주중에 한 번 더 쓴 적이 있고, 개인적으로 이사하면서 한 번 쉬었다. 이 용산 살인 사건을 보고 칼럼 주기라는 것이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참을 수 없는 한국을 향해 펜을 들어야겠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사건을 일본에서 접했다. 마침 아사히 신문에서 인터뷰가 있어 사건이 터지자마자 이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대통령의 서울시장 시절 은평 뉴타운을 추진할 때부터 나는 이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철거민들 앞에서 마이크 잡고 기자회견 주도한 적도 있고, 도시빈민 문제를 꽤 오래 다룬 편이기 때문에 속사정도 좀 안다. 공영개발에서 세입자의 발언권과 권리에 관해 글을 몇 편 쓴 적이 있다. 용산지구 개발에서 '한국의 두바이'라는 코드명으로 불리던 용산의 국제업무지구와 집창촌 재개발에 관해서도 글을 쓴 적이 있다. 모르는 일이 아니다.

물론 정책적으로 제도 정비가 시급한 측면이 있고, 도시빈민의 주거권 문제에 대해 새로운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정도에 대해 나도 아주 할 말이 많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 개선과 정책 방향을 따지기에 앞서, 이 사건은 살인 사건이라는 점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자본주의 내부에는 사적 소유권의 다툼이 있고, 아무리 정비하더라도 흐름에 따라서 폭발적으로 나오게 되는 문제들이 존재하기 나름이다. 그러나 나는 이번에 죽은 6명의 귀한 영혼들이 최소한 안면을 취하게 되었거나 억울함이라도 풀리게 되었다고 생각될 때까지는 이 사건에 대해 '제도적 개선'을 논할 생각은 없다.

역사적으로 본다면, 철거민 사건은 박정희 정권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최근에는 사망 사건까지 가게 된 경우는 거의 없다. 원래 철거민 투쟁은 농민 투쟁과 함께 한국 사회에서 가장 과격한 '경제적 갈등'의 두 축이다. 농민과 도시빈민, 두 집단 모두 더는 물러날 구석이 없고, 특히 세입 사업자의 경우는 한국 사회에서 끝까지 몰린 사람들이다. 그냥 먹고 살만한 정도였는데, 정부나 개발업체의 이익을 위해서 정말 아무런 자신의 잘못 없이 순식간에 삶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뉴타운과 같은 대규모 공영개발 사업이 20년에서 30년 동안 걸리게 되는 것은 일본이나 영국과 같은 선진국이 바보이거나 비효율적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 편이 더 합리적이고 부당한 결정이나 사회적 부작용을 줄이게 되기 때문이다. 그걸 5년 내에 한다고 하는 이명박의 뉴타운은 처음부터 이런 극한 투쟁을 잉태할 수밖에 없는 사업 프레임이었다.


▲ 선진국에서 재개발 사업이 20-30년 걸리는 것은 그들이 비효율적이어서가 아니다. 이것을 5년 안에 하겠다는 이명박의 뉴타운은 처음부터 이런 비극을 잉태하고 있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프레시안

그러나 그 어떤 쪽으로 설명하더라도, 이 사건은 살인 사건이다.

본질을 따지자면, 경제적 타당성과 국민경제의 효율성 같은 고상한 단어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1% 정도의 토호들과 땅부자를 위한 토목 자본주의라는 경제형태, 그리고 결국 힘으로 대중들을 누르고 갈 수밖에 없는 정치형태로서의 경찰국가가 딱 만난 지점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이다.

용산 개발 하나 하는데 벌써 6명이 죽었는데, 뉴타운만 25개에 민간 부문을 포함하면 100개는 족히 넘을 재개발지구에서 얼마나 많이 죽어야 하는가? 게다가 전국적으로 50조원의 토목비용을 새로 투입한다는 데, 도대체 제대로 보상금도 지급되지 않은 수많은 세입자들이 얼마나 더 죽어가야 하는가? 그리고 그때마다 애매한 경찰들은 얼마나 더 죽거나 상하게 되겠는가?

전국적 재개발과 SOC 사업의 집행에서 밀리면 안된다는 경찰국가의 수장으로서의 대통령의 입장은 이해가 가지만, 그래도 이 사건은 본질적으로 살인사건이고, 사람을 죽이면 안된다.

이제 한미 FTA가 국회 비준이 통과되면, 암담하게 되는 농민을 비롯한 많은 경제적 약자들이 또 최소한의 경제적 보상을 위해서 움직이게 될텐데, 본보기로 미리 몇 사람 죽인 것이 이 사건의 종합적 실체 아닌가? 경찰국가도 좋다. 어차피 방송과 언론이 경찰국가를 지지하는 마당에, 사법부가 국민들을 지켜줄 이유도 없고, 존재감 없이 자리나 지키고 있다고 엄하게 경찰한테 몰매나 맞는 입법부가 국민을 지켜줄 것 같지도 않다. 경제 위기의 클라이막스를 거치면서, 수십명 아니 수백명이 경찰 작전 중 이런저런 이유로 죽게 될텐데, 미리 몇 사람 본보기를 하는 것이 전체적인 사망을 줄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정말 할 말 없다.

그러나 아무리 본질적으로 한국이 경찰국가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살인을 그렇게 쉽게 하면 안된다. 그건 정상적인 자본주의가 가졌던 최소한의 '에토스'이고, 기본적으로 지켜야 하는 규범이다. 전임인 노무현 대통령도 사람을 죽였다. 농민 몇 사람과 건설 노동자를 죽이고 나서, 그는 임기 말년까지 인기를 회복하지 못했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시민사회와 농민들의 전폭적 지지를 얻어내지는 못했다. 탄핵으로 힘을 찾은 전임자도 살인사건 이후에 인기를 만회하지 못하고, 결국 정권을 내준 경험이 있다.

넓고 길게 보자. 아무리 미사여구로 치장한다고 하더라도, 자본주의 경제에는 미리 조정되지 않은 경제적 갈등이 생겨나게 되어있고, 아무리 완벽하게 제도정비를 한다고 하더라도 변동된 상황에서 새로운 미비점이 드러나고, 그때마다 삶의 기로에 서게 되는 경제적 피해자가 생기게 마련이다. 그때마다 경찰들이 사람들을 죽였다면, 선진국이 지금과 같은 형태로 최소한의 질서를 가지고 있었겠는가?

한국 자본주의, 너무 급하게 달려오느라고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갖추지 못했다. 사실이다. 이명박 정권, 너무 정치를 못하느라고 경찰들 뒤에 숨게 되었고, 그래서 1년만에 경찰국가로 한국이 전환된 것도 사실이다. 폭력 뒤에 숨은 대통령에게 '명분'과 '대의'를 말할 생각은 없다. 어차피 경찰 진압봉과 물대포가 아니라면 단 하루도 버티지 못하는 정권이 되었으므로, 경찰국가 체계로 한국은 운영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죽이지 말자. 때리지 말라고 해도, 어차피 이미 피를 본 경찰들이 국민이든 국회의원이든 가리지 않고 때릴 것이 분명하므로, 때리지 말라고 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죽이지는 말자. 그건 이미 경찰국가로 전환된 한국 자본주의가 더 이상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을 마지막 안전판이고,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이 가지고 있는 '에토스'의 근간이다.

이를 위해서 하나만 부탁하자. 언론들에게 부탁한다. 한달만, 법률이 어쩌니, 보상체계가 어쩌니, 잘 알지도 못하는 제도 개선에 대한 입방정을 자제하고, 망자에 대한 예의를 갖추자. 경제적 약자인 도시빈민과 철거민들을 폭도취급하는 것도 단 한달만 자제하고, 망자에 대한 예의를 갖추자.

일단 사람이 죽지 않았는가? 조선조에도 억울하게 사람이 죽으면, 애도를 표했고, 원혼을 달래주었지, 지금처럼 폭도 취급하고, 반역도로 몰아가지는 않았다. 지금 일부 언론이 하는 일이 조선조라면 역도로 억울한 죽음을 몰아가는 일과 똑같지 않은가?

여섯 명이나 억울한 원귀가 되었다. 제도 개선, 논란, 그 후에 해도 좋다. 일단 예의부터 갖추자. 예의를 갖추지 못한 자본주의, 이런 나라가 21세기에 선진국이 된 사례는 없다.

피맛을 본 경찰 지도부에게 예의를 갖추라고 하지는 않겠다. 그들이 한국의 복잡한 공영개발 체계와 의사결정 과정 혹은 보상금 체계에 대해서 뭘 알겠나? 이미 피맛을 본 경찰 지도부들이 더 이상 살인을 하지 않기 위해, 그리고 한국 자본주의가 미처 배우지 못한 인간에 대한 에토스라는 개념을 탑재하기 위해, 정말로 일부 언론에게 부탁한다. 망자에 대한 예의부터 갖추자.

청와대에서 경제팀 개편에 여념이 없고, 한국을 국정으로 운영한다는 것에 대해서 별 생각이 없던 사람들이 피맛마저 본 상황에서, 그들에게도 예의를 갖추라고 주문하지는 않겠다. 그들은 어차피 대중들이 등 돌린 상황에서 경찰들 데리고 자리라도 보존하는 것 외에는 지금 아무 생각이 없을 것이다. 아마 세상이 하얗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언론은 다르지 않은가? 한국이 살아야 당신들도 살고, 한국 자본주의가 다음 단계로 전환되고 개선되어야 당신들에게도 미래가 있는 것 아닌가? 그래서 일부 언론에 진심으로 부탁한다. 망자에 대한 예의부터 갖추자.

한국의 지배층은 40만 명, 경찰은 10만 명, 그리고 살기가 팍팍해진 대중은 4000만 명이 넘는다. 대중들이 분노하면, 10만 경찰로 못 막는다. 경찰국가의 종말을 결국 보고 싶지 않다면, 지금이라도 망자에 대한 예의부터 갖추자.

지금처럼 입방정 떨면, 4.19를 다시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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