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한 대형 할인매장에 알록달록한 파자마 차림의 여성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쇼핑카트를 끌기도 하고, 매장 한중간에서 베개를 베고 드러눕기도 하다가 한마디 말을 남기고 유유히 계산대를 빠져나온다. “잠 좀 잡시다.” 뒤늦게 할인매장 경호원들이 달려왔지만 여성환경연대 회원들은 이 퍼포먼스를 통해 대형 할인마트의 24시간 영업을 반대한다는 메시지를 확실하게 전달했다.



여성환경연대의 퍼포먼스를 보면서 가슴이 뜨끔했다. 사실 지난해 이맘 때 홈플러스 부천 여월점에 견학을 갔다. 여월점은 태양광·풍력 발전시설에다 LED 조명, 형광등 밝기 조절, 중수 이용 등 건물에서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에너지 절감과 친환경 기술을 갖추고 있었다. 탄소발자국관리시스템도 자체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견학을 다녀온 후에 할인마트의 기후변화 대응 사례로 홈플러스를 소개하기도 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경솔한 행동이었음을 반성하게 되었다.

올해 내내 홈플러스는 대형 할인마트의 24시간 영업을 주도하고, 동네 골목까지 진출한 기업형 슈퍼마켓(SSM)으로 지역 소상공인들과 갈등을 빚어왔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홈플러스는 여월점 ‘그린스토어’를 통해 투자금액보다 훨씬 많은 광고 및 마케팅 효과를 얻었다고 하는데, 어찌 보면 나도 일조를 한 셈이다. 대형 할인마트의 24시간 영업은 에너지를 엄청나게 소비할 뿐만 아니라 지역소상인들의 생계도 위협한다. 아무리 태양광발전기를 달고, LED 조명을 설치한다 한들 24시간 영업에 드는 전력량을 감당할 수 있을까. 여성환경연대가 펼친 ‘파자마 퍼포먼스’는 거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할인마트에서 밤을 새워 일을 하는 여성들의 건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여성 노동자들의 잦은 야간 근무는 신체 호르몬 분비를 교란시켜 유방암을 일으킬 수 있다. 인하대 임종한 교수에 따르면 우리 몸에서 암·당뇨 등을 예방하는 호르몬인 멜라토닌은 주로 야간에 잠을 잘 때 분비되는데, 야간 근무를 하게 되면 이 호르몬이 부족해 유방암 발생률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덴마크에서는 최근 장기간 야간 근무자의 유방암을 직업병으로 인정했고, 국제암연구소(IARC)는 야간 근무를 발암요인으로 분류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속도 사회’ 한국은 거꾸로 간다. 백화점 영업시간은 연장되고, 대형 할인점은 24시간 영업 경쟁에 나섰다. 심지어 연중무휴로 영업을 한다. 기업에서는 ‘소비자의 편의’ 때문이라는데, 실제로는 할인점이 24시간 영업을 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밤에 쇼핑을 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우리 사회가 얼마나 속도와 편리를 추구하는 사회이기에 이렇게 곳곳에서 불을 환히 밝히고, 밤을 새워 일하고, 공부하고, 먹고, 쇼핑을 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 삶의 방식을 바꿔야 지구도 구하고 건강도 지킬 수 있다. 소비자들은 한밤 대형 할인매장 이용을 줄여야 하고, 홈플러스도 ‘그린스토어’를 자랑하기 전에 자발적으로 ‘24시간 영업’을 중단해야 한다. 홈플러스를 비롯한 모든 기업들이 내세우는 ‘지속가능경영’에는 소비자와 노동자들의 삶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배려도 담겨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11031802385&code=99000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미디어법과 관련된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상당한 충격과 함께 철학적 질문을 던져준다. 물론 미디어법 자체도 파장이 작지 않다. “과정은 불법이지만, 결과는 유효하다”는 헌재의 논리는 좌우 혹은 진보 논란을 넘어 ‘절차적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든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제도적 틀은 과정도 유효해야 한다는 전제였고, 그래서 X파일 사건의 도청 파일도 열어보지 못하도록 한 것 아닌가. 물론 마라도나의 ‘신의 손’ 사건처럼 손으로 넣었더라도 ‘골은 골’이 된 일은 있었지만, 그걸 알았더라면 골로 인정되지 않았을 것이다.



건설 자본주의에서 ‘언론 자본주의’로 전환하게 되는 결정 내용도 큰 파장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의 최종심이 바로 헌법재판소이고, 이 재판소의 운영이 역사적으로 실패라는 것이다. 헌법재판소가 던진 진짜 철학적 질문은, “너희들이 어쩔건데?”라는 질문이다. 그렇다. 혁명 혹은 혁명에 버금가는 대중의 저항 없이 헌법재판소 앞에서 더는 해볼 도리가 없는 것이 9차 개정헌법, 즉 1987년 체제의 특징이다. 그리고 그 약점을 우리가 이번에 본 셈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노무현 정권 때 진행된 개헌 논의에서 줄곧 반대 입장을 피력했고, 시민사회 내부의 개헌 논의도 지금까지 반대했다. 경제민주화 조항과 경자유전 조항을 지키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걱정 때문이기도 하고, 5년에 한 번씩 대통령이 바뀌는 체제가 그런 대로 잘 맞는다는 개인적인 생각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 헌재 결정을 보면서 나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임기 6년, 그것도 연임인 9명의 헌법재판관이 사실상 헌법 위에 있고, 헌법 해석권을 독점하고 있는 상황이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역행한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특히 연임을 기대하면서 정부와 법관 눈치를 보게 된 현 시스템은 구조적 오류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자, 내가 생각해 본 방법은 다음과 같다.

개헌을 하자. 그리고 구조적 오류에 빠진 헌법재판소는 폐지하자. 그러면 궁극의 ‘판단’ 문제가 생길 것인데, 기본적인 판단 업무는 미국이나 일본처럼 대법원으로 보내고, 예를 들면 국민 1%의 서명을 받은 헌법 판단 사건에 관해서는 국민투표로 올리자. 1년에 한 번, 몇 가지 사건을 모아서 헌법재판소의 판단을 가늠할 국민투표를 여는 방식을 사용하면, 헌법재판소 없이도 헌법에 합치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해결하는 데 문제가 없을 것이다. 1년에 서너번씩 국민투표를 하는 스위스에서 국민투표로 인해서 무슨 대단한 문제가 생겼다는 보고는 없고, 그렇게 직접민주주의 요소를 최대한 활용하면서도 가장 먼저 국민소득 4만달러를 넘어선 나라 중의 하나가 되었다.

물론 국민이 매번 투표를 한다는 것은 번거로운 일이기는 하지만, ‘국민이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제도를 운영하는 것이 다음 단계 우리의 진화 목표일 수 있다. 이제 9차 개정헌법의 오류를 더는 외면할 수 없다. 이건 좌우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 시스템 오류에 대한 ‘디버깅’ 과정이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11031805325&code=990304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무해한모리군 2009-11-04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뭘 해도 지금만 못하겠냐는 생각이 자꾸 드는 요즘 --;;

라주미힌 2009-11-04 22:09   좋아요 0 | URL
현상 유지도 이토록 어려울 줄은..;; 생각했던 것보다 심해요. ㅋ
 

전에 살던 동네에선 몇 집이 한 식구처럼 지냈다. ‘물푸레마을’이라는 이름도 붙이고 짬만 나면 모여 술먹고 놀았다. 어른들이 노는 동안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놀았다. 그런데 자주 티격태격 다툼이 일어났다. 이놈이 울고 저놈이 울고. 그럴 때마다 어른들은 “사이좋게 놀아야 착한 사람이지.” 하나마나한 훈계를 하거나 소시지 안주나 아이스크림 따위로 아이들을 무마하곤 했다.

이건 아닌데, 싶은 마음이 점점 더해진 어느 날 “재미있는 이야기 해줘요, 삼촌!” 몰려든 아이들에게 ‘양보’에 대해 말했다. 주절주절 설교한 건 아니고 일단 믿어봐라 식으로 짧게 말하고는 문답식으로 되새겼다. “우리가 다투지 않고 끝까지 즐겁게 놀려면?” “양보!” “안 들려, 뭐라고?” “양보!!” 아이들은 재미나 죽겠다는 얼굴로 깔깔 거리며 양보를 외쳤다.

그날 아이들은 자정이 넘도록 단 한 번도 다투질 않았다. 그리고 그 후로도. 이적이 분명했지만 비결은 간단했다. 녀석들의 다툼은 언제나 먹을 것이나 놀 것을 두고 서로 더, 많이 가지려 하는 경쟁심에서 일어났다. 충분한가 모자란가는 오히려 본질이 아니었다. 충분해도 경쟁심 때문에 다투었지만 모자라도 서로 양보하니 다 만족했다.

어쩌니 저쩌니 해도 한국이라는 사회가 옛날에 비해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진 건 분명하다. 절대빈곤 국가를 벗어난 지도 오래다. 그런데 왜 우리는 전보다 더 ‘먹고사는 일’에 찌들려 있고 갈수록 더 고단하고 미래엔 아무런 희망도 느껴지지 않는 걸까? 왜 우리 아이들은 마음껏 놀기는커녕 마치 감옥의 수인들처럼 시들어 가는 걸까?

역시 이명박 때문인가? 오늘 반이명박을 외치는 사람들은 이명박 씨가 우리 삶의 외부에서 침략한 존재인 양 말한다. 그러나 이명박 씨는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 그것도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된 대통령이다. 이명박 씨의 당선이 ‘대중의 보수화’라는 건 빗나간 이야기다. 그것은 보수화도 진보화도 아닌 ‘민영화’, 즉 정치의 종식이었다. 이제 한국인들은 대통령이 아니라 CEO를 뽑는다. 한국인들이 그들의 CEO에게 기대하는 건 인간적 면모도 정치 이념도 아닌 ‘장사능력’이며 대통령 이명박은 그 순정한 반영이다.

이명박을 찍지 않은 사람, 오늘 반이명박을 외치는 사람들은 예외일까? 꼭 그렇진 않다. 이를테면 이명박 정권을 반노동자 정권이라 성토하면서 비정규직 노동자들과의 연대엔 철저히 무심한 정규직 노동자들은 실은 이명박 노동정책의 지지자들이다. 이명박의 시장주의 교육을 맹비난하면서 제 아이의 시장 경쟁력은 알뜰하게 챙기는 교육운동가들은 실은 이명박 교육정책의 충직한 실천가들이다.

우리는 씁쓸한 얼굴로 자문한다. 그 뜨겁고 아름다운 촛불의 열기는 왜 아무 것도 바꾸지 못했을까? 촛불 속에서도 ‘이명박’은 살아 활보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명박을 어떻게 물리칠 수 있을까? 이명박과 다른 방식으로 사는 것이다. 이명박을 넘어 이 땅에 다시는 그런 장사꾼 대통령이 등장하길 바라지 않는다면? 우리 아이들을 상품으로 키우는 걸 중단하고 사람으로 키우는 것이다.

맞는 이야기지만 왠지 불안하고 아이의 미래가 걱정이라고? 바로 그게 당신 안에서 들려오는 이명박의 목소리다. 뿌리쳐라. 비장한 얼굴도 심각한 결단도 필요 없다. 물푸레마을 아이들처럼 깔깔대며 그냥 뿌리쳐라. 안 죽는다. “수입이 좀 줄어들었지만 그렇다고 굶는 것도 아니고, 삶이 훨씬 더 자유롭고 충만해졌어요. 만족해요.” 내가 만난, 이미 뿌리친 사람들의 일치된 증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나이가 지긋한 분들은 혹시 기억하실지 모르겠다. 외환위기 직후 개그우먼 이경실씨는 경제가 어렵다고 무작정 허리띠를 졸라매면 안 된다며 ‘합리적 소비’를 호소하는 공익광고를 했다. 케인스가 자신의 유효수요이론을 직관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고안한 ‘절약의 역설’을 이경실씨는 케인스보다 더 효과적으로 국민에게 전했다.

투자 위축·실업 증가·저출산

경제가 나쁘면 소비를 줄이는 것이 합리적이다. 호황기에 흥청망청 빚을 졌다면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렇게 행동한다면 아무도 물건을 사지 않게 되고 급기야 공장이 문을 닫을지도 모른다. 노동자들이 직장을 잃는다면 추가로 수요가 줄어들고 상황은 더 나빠진다. 개인이건 기업이건 지극히 합리적 행위를 했는데 나라 전체로 보면 나쁜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소비를 줄이면 저축이 증가할 것이고, 은행이 이 돈을 기업에 대출하면 투자가 늘기 때문에 ‘절약의 역설’이 항상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고전파 경제학의 세계에서는 저축이 바로 투자로 연결되도록 이자율이 정확히 조정될 것이므로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한치 앞도 보이지 않을 때는 기업가의 ‘동물적 본능’도 “조금 기다려보자”는 쪽을 선택할 것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정부가 나서야 한다는 것이 케인스 ‘일반이론’의 핵심이다.

이런 ‘역설’은 경제 곳곳에 있다. 안갯속 같은 경기라면 기업가들은 일단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 노동자들을 해고한다. 지극히 합리적인 행위이다. 그러나 모든 기업이 그렇게 행동한다면 나라는 실업자들로 넘쳐날 것이고 경제성장률은 바닥을 칠 것이다.

물론 고전파 경제학은, 아니 현재의 주류 경제학도 실업의 증가는 즉시 임금을 떨어뜨릴 것이므로 다시 고용이 늘어나리라고 가르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발효되어 농업이 몰락하면 농민들이 쥐꼬리만한 월급만 받더라도 즉시 반도체 공장에 취직할 것이므로 한국의 국내총생산(GDP)이 장기적으로 6%나 증가할 것이라는 ‘계산가능 일반균형모델(CGE)’의 오류가 바로 그렇다.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됐다면 해고된 노동자들이 되도록 빨리 더 나은 직장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요컨대 어떤 변화로 인해 할 일을 잃은 생산요소들을 빨리 일자리로 이동시켜야 하는 것이다.

4대강 사업비로 ‘역설’ 해결을

한국의 출산율이 1.13으로 떨어진 것도 합리적 행위의 결과다. 대한민국에서 버젓한 사람이 되려면 이른바 일류대학을 나와야 하고, 또한 ‘과외’를 시켜야 한다. 다행히 대학에 간다 해도 한 학기 수업료 500만원을 감당할 수 없으니 대표선수 하나만 낳아서 경쟁을 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모두 그렇게 행동하면 결국 인구가 반으로 줄어들고 1인당 성장률도 형편없이 떨어져서 필경 현재 40대 이후는 20년 후 국민연금도 못 받게 될 것이다.

현재의 제도를 그냥 놔둔 채, 아니 국제중학교를 만들어 초등학교부터 사교육을 하도록 강요하면서 애를 더 낳으라고 하는 것은 극도로 비합리적이다. 대학을 평준화하고 사교육을 없애면서 보육시설과 서비스를 대폭 늘리면 위의 세 가지 역설이 동시에 해결된다. 쓸데없이 강바닥을 파헤치는 것보다 훨씬 낫지 않은가? 정운찬 총리 후보자가 케인스의 ‘일반이론’에서 익히 배운 사실이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9151805095&code=990000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무해한모리군 2009-09-16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녹색평론 108호에 김종철발행인이 이런 요지의 말을 합니다.
우리의 아이를 미래의 연금, 세금 납입줄로 보는 이런 기계적인 시각에서 나온 출생률 운운 자체가 불쾌하다구요.
이 미친 세상을 유지하는 고리로 내새끼를 놓고 싶은지 고민이 들때가 많아요..

라주미힌 2009-09-16 16:01   좋아요 0 | URL
고기 뒤집듯이 세상을 확... ㅡ..ㅡ;;;

turnleft 2009-09-17 0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 옳은 말인데.. 얼굴 마담이 될게 거의 확실해 보이는 총리한테 뭘 저리 기대하는 척 이야기를 거는 걸까요. 어차피 저들 안에서 어떤 자기모순이나 언행불일치가 발견된다고 해서 별로 새로울 것도 없는데 말이죠.

뭐랄까.. 칼럼 같은거 읽으면 이 사람들이 나한테 말을 걸고 있구나, 나한테 세상을 이렇게 바꾸자고 하는구나 하는 느낌을 받는 경우가 별로 없어요. 다들 너무 시크해요!

라주미힌 2009-09-17 13:18   좋아요 0 | URL
'일반이론'에 따라만가도 봐줄만 할텐데.. 왠지 암울하죠.
 

이 강의를 제가 7월25일 전주에서 한 것이었습니다. "변혁의 가능성"을 이야기한 것인데, 제가 보기에는 이제 곧 시작된 저성장 내지 무성장 시대에는 재분배현 국가로의 전환이란 거의 "유일한 해결"에 가깝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40년 후에 이 나라 인구의 거의 40%를 이룰 65세 이상 노인에게도 인간다운 노후를 보장할 수 없을 것이고, 또 쏟아져 나오는 대졸, 고졸들에게 "행정 인턴"과 "취업 준비" 이상의 미래도 보장할 수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결국 "정치"입니다. 보수 - 한나라당이든 그 어떤 새로운 노무현이든 - 가 계속 집권할 경우에는 "한국형 재분배 사회"란 토건 예산과 인턴 채용의 사회일 것이고, 국민의료보험 적용의 범위가 계속 조금씩 넓어져가도 공립 병원 하나 찾을 수 없는, 그런 사회일 것입니다. 사회주의/사민주의 세력이 기적적으로 집권할 경우에는 우리는 늦게나마 무상 의료/교육으로의 여정을 시작이라도 할 수 있을 것이고, 망가져 가는 영세 상인들의 자살을 그들에게의 실업 수당, 재교육 수당 지급 보강으로 막을 수 있을 것이지요. 그런데 제게 매우 자명한 이 이야기로 대한민국의 다수 유권자들을 어떻게 설득해야 할 것인지, 저도 솔직히 좀 오리무중입니다...
 
1) 변혁 – 바람직한 변혁 방향:
 
1. 사회 자원 관리권은 관료-재벌 블록으로부터 민주 사회에.
 
현실 인식 – ”재벌 준(準)독재”로서의 한국. 특권 집단으로서의 재벌: 10대 기업의 유효 세율은 약 16%에 불과 (특히 삼성전자/LG전자는 6% 안팎 – 대조적으로는 일반 기업은 약 19%, 참고로 유럽 연합의 평균 기업 세율은 26%임). 지난 12년 동안 (1997-8년 위기 이후) 주요 재벌들은 자산 대 부채 비율을 높이는 등 ”건강”해졌으며, 계열사 수를 늘리는 등 ”문어발 식 확산”에 계속 힘을 쏟았다.
관료 집단 – ”4대강 정비 사업” 등 막대한 토건 예산이나 사법 권력 남용 등을 무기로 기업과 지역사회, 시민사회 등에 힘을 행사할 수 있으며, 거시적으로는 재벌 집단의 관리를 받고 있음. ”관료에 대한 재벌의 관리” 실체의 일면을 노회찬 의원이 공개한 ”X파일” 등이 전했는데, ”재벌-관료 지배 블록” 전체를 견제할 만한 세력은 현재로서 한국 사회에서 존재하지 않음.
 
바람직한 변혁 방향 – 기업 세율 및 재산 세율, 소득 세율을 유럽 복지 국가 수준으로 상향 조절하여 경기부양책을 토건 예산이 아닌 복지 예산을 통해 실행하는 것. 그렇기 위해서는 포괄적 의미의 ”진보” 세력은 ”재벌-관료 블록”을 제압할 만한 힘을 키워나가야 함.
 
2. 경쟁 사회에서 공공 위주의 사회로
 
현실 인식: 자본주의를 벗어나지 않는 이상 사회적 ”서열” 자체는 없어지지 않지만 한국에서는 이 서열은 사실상 ”대입”에서, 이미 10대 후반에 정해지는 것이고 그 뒤로는 거의 바뀌지 않는다. 즉, 한국 사회는 ”초기 선발형” 사회에 속하는데, ”초기 선발”은 세습 신분제보다야 낫다 해도 결정적 선발의 시기가 초기일수록 출발 조건의 영향이 크다는 것은 정설임. 더군다나 ”학력 세탁” (지방대 졸업 등 ’불리한 학력’을 명문대에의 편입 등을 통해 극복하는 일)이 대단히 어렵기 때문에 ”매우 경직된 초기 선발형”이라고 봐야 함. 초기 선발일 때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교육 비용을 대줄 부모의 경제력인데, 한국의 1% 부자가 57%의 부동산 가치를 독점하는 반면 60%의 직장인들이 고용보험 가입조차 못해 실직 때에 사실상 기본생계 보장조차 불가능하다. 불황임에도 상위 10분위 (10%의 부유층)의 소득은 지난 1년간 2% 이상 늘어나도 하위 1분위 (10%의 최하 빈곤계층) 4% 이상 줄어든 것은 최근의 대한민국이다 – 사회격차의 수준은 이미 멕시코와 같음. 극단적 격차 사회에서는 경직된 초기선발형 신분상승 경쟁 구조란 사실상 ”카스트 제도” (신분세습)로의 퇴행을 의미할 뿐임.
 
바람직한 변혁 방향 – 전체 졸업자 중의 비율에 맞추어서 중소기업 이상의 일체 기업에서 지방대 졸업자 등 차별 피해자의 고용 의무화 및 공무원 시험을 1,2차로 나누어 1차로 자격이 있는 후보를 선발한 뒤에 2차로 지방대 출신의 비율을 전체 졸업자 중의 비중에 맞추어서 지방대 출신을 할당해 선발하는 제도 등 적극적 역차별 정책. 보다 장기적으로는, 사립재단 이월금 관리권을 국가 교육 당국이 갖도록 사립대학 운영 구조를 공공화시키고, 궁극적으로는 일체 고등교육기관을 공공화하는 것은 바람직함.
 
의료부문 – 인구 1천 명당 활동 의사 수는 한국은 아직도 1.7명 밖아 안돼 프랑스 (3.4명) 등 유럽 복지 국가보다 약 2배 낮은 것으로 나타남. 동시 공공의료기관의 비율은 10%도 안돼 OECD 평균의 75%보다 몇 배 적은 것임 – 즉, 아직도 빈곤층과 중산층 하위계층 등은 공공부문의 무료 의료 서비스를 많이 누리지 못하고 있음. 그리하여 앞으로 의료 기관의 증설을 공공 위주로 하여 공공부문의 의료 서비스 제공 비율을 적어도 일본 수준 (35%) 내지 그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것은 급선무임. 장기적 목표: 북유럽 복지 국가처럼 공공부문 위주 (공공부문 비율 85-90%)로 돼 있는 무상 교육과 의료.
 
3. 위험/폭력 사회에서 자아 실현 사회로
 
현실 인식: ”위험 사회”로서의 한국 사회 – 시험스트레스와 성적 스트레스, 취직, 실직 스트레스, 군사주의적 직장 문화, 경제적 불안과 미래 전망 부재 등으로 자살율은 OECD 최고 수준 – 하루 35명 꼴, 인구 10만 명 당 연간 25명 – ”자살 공화국”. 한국 노동 인구의 35%가 자영업자들인데, 그 도산의 속도가 대단히 빠름 - 식당 1개 당 인구 80명인데 식당 밀도는 미국보다 약 8배 높음 – 즉, 영세 식당 업자 파산 불가피. 최근 할인점 등 대형 소매업 확산으로 영세 소매업자들의 파산은 큰 문제. 안전망이 없는 상태에서 파산 당한 영세 사업자들은 생계 곤란, 자살 위험에 빠짐. 파산, 자살에다가 ”산업 재해” 위험 정도가 매우 높음 – ”산재 공화국” – 2008년 재해 피해자는 거의 10만 명, 사망자는 2422명이었음. 재해로 인한 사망만인율(노동자 1만명당 재해 사망율)은 한국이 1.49%로 미국(0.36%)과 영국(0.07%)에 비해 월등히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산재로 인한 사망자가 미국보다 4배나 많고 영국보다 사망자가 21배가 많다는 것이다. 이 통계도 산재 보험 적용 대상자만 잡히는 통계인 관계로, 상당수 중소기업 노동자 및 외국 노동자의 재해 사고 (사망 포함)은 여기에 잡히지 않음 – 특히 노동자의 “약자층”은 “목숨을 버릴 각오”로 노동에 임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현실.
 
“폭력 사회”로서의 한국 사회 – 군의 일부 부대 (특히 의경 등)에서는 여전히 생명 및 정신 건강을 위협할 수준으로 폭력 행위가 횡행하며 학교/가정 체벌의 근절은 여전히 요원한데다 학생 사이에서의 폭력 행위는 꾸준히 증가되고 흉악해짐. 직장에서의 수직적 명령-복종 체계는 비록 물리적 폭력으로 나타나지 않아도 개인에 대한 심적 폭력으로 체감될 확률이 높음.
 
바람직한 변혁 방향 – 누진 세율 적용, 부유층 집중 과세 (현재 한국 국내총생산 대비 부동산 보유 세금 총액 비율은 0,8% 밖에 되지 않지만 영국만 해도 3,3%임)를 통해 영세 자영업자까지 포함시키는 포괄적인 사회 안전망 구축, 안전 사고에 대한 기업체 책임 강화, 학교에서의 학급 성적순 발표 금지 등 ”경쟁 교육” 근절 등 각자가 ”자아 실현”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안전하고 쾌적한 사회” 만들기를 위한 노력.
 
2) 변혁을 이끄는 방법:
 
한국사의 경험 – ”온건한” 개혁이라 해도 대체로 ”밑으로부터의” 급진적 운동의 압박을 받아야 이루어질 수 있었음:
 
- 동학 농민 전쟁 – 전쟁 자체는 패배와 농민에 대한 말살 (관군과 일본군은 약 2만 명 이상을 도살한 것으로 추정됨)로 끝났지만 불합리한 행정 관행과 유교 사회의 억압적 법률 등을 시정하라는 농민의 요구는 갑오 개혁 과정에서 어느 정도 받아들여졌음 (노비 혁파, 과부 재가 허용, 일반 행정과 세정 분리로의 움직임 등)
 
- 1919년 3.1 운동 – ”독립”을 이루어내지 못했지만 ”무단 통치”를 ”문화 통치”로 바꾸도록 지배자들에게 압력을 가한 것이고, 1920년대의 공산주의/아나키즘 운동부터 야학, 형평사 운동까지 각종 해방적 움직임들의 심성적 기반을 조성했음.
 
- 1948년 북한 건국 초기의 각종 급진적 개혁 (무상 몰수와 무상 분배 식의 토지개혁 등) – 이승만 정권으로 하여금 민주당 등 지주계층이 주도하는 정치조직들의 저항을 뚫어 불완전하게나마 토지개혁 등을 단행하게끔 ”압력”을 가한 점이 인정됨.
 
- 1960년4월의 ”학생 혁명”의 목적 (민주화)은 결국 달성되지 않아도 ”밑으로부터”의 불만 표출은 한국 사회 지배 구조의 취약함을 노출시켰으며 지배층으로 하여금 경제 개발에 대한 강력한 압박감을 주었음 – 경제 개발이 되지 않을 경우 전체적 ”사회의 폭발”이 예상됐음. - 박정희, 전두환 정권의 일련 ”평등 지향적” 정책 (고교 평준화, 대학 정원 확대, 과외 금지 등)은 결국 사회적인 불평등 확대에 대한 민중적 불만을 무마하려는 의도에서 나왔음 – 역사 원동력으로서의 ”민중의 불만”.
 
- 1985년의 구로 동맹 파업 등 군사 독재 정권 말기 노동자 투쟁 – 최저 임금제의 최초 법제화 (1986년) 등 여러 양보를 따내는 데에 주효했음.
 
-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 민주 노조의 확립과 기초적 복지제도 (의료보험의 적용 범위 확대 등) 착근 – 노동자들이 투쟁으로 따낸 ”양보”들
 
- 이명박 정권 하에서도 2008년 하게 ”촛불 집회” 등 집단적 불만 표출들은 ”대운하 계획”과 같은 가장 무리한 종류의 토건국가적 프로젝트를 좌절시키는 데에 있어서 주효한 바 있었음.
 
결론: 변혁을 이끌기 위해 앞으로 필요한 총력 투쟁 – 1996-97년 총파업과 2008년 촛불집회 투쟁의 ”혼합형태” – 즉, 파업 투쟁과 중산층의 시위투쟁, 불매 운동 등이 상승효과를 낼 경우에는 강력한 압력으로 작용돼 정치계의 전반적 ”진보화” 등으로 가져다 볼 가능성이 보일 수 있음. 결국 복지/공공성 위주 국가로의 전환의 전제조건은 노동계급과 중산계층들의 강력한 ”진보연대”와 공동투쟁. 

 

http://blog.hani.co.kr/gategateparagat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