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누군가 필자에게 이번 지방선거의 가장 큰 특징을 말하라면, 진보가 배제 혹은 소외된 정치경쟁의 구도가 실현된 점을 꼽고 싶다. 흥미로운 것은 그것이 보수에 의해서가 아니라 넓은 의미의 진보 내지 진보 개혁 세력 내부에서 만들어졌고, 이를 가능케 했던 것은 속칭 ‘반MB’라고 불리는 강력한 반정부 투쟁론이었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 향후 한국정치는 미국이나 일본과 유사한 ‘진보정당 없는 민주주의’로 귀착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번 선거에서 진보 후보들의 표가 어떻게 나타날까 하는 문제보다 이 점을 훨씬 중요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필자는 본다.

2.

권위주의 시절의 민주주의는 반체제를 특징으로 하는 것이었다. 그 시절 민주화는 곧 전복적인 열정을 나타내는 말이었다. 민주화가 된 이후 상황은 달라진다. 정치체제에 참여하는 문제가 더 중요해지고 결국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정치체제의 운영권을 둘러싼 다툼 내지 경쟁의 내용을 더 많이 갖게 되는 것으로 귀결된다.

그러면서 상대를 절멸하고자 하는 태도를 갖는 세력은 정치의 장에서 힘을 갖기 어렵게 되며, 공존을 전제로 한 경쟁에서 유능함을 발휘하는 자가 승자가 된다. 초기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민주주의를 거부했던 많은 사례들에서 볼 수 있듯이, 민주주의만큼 혁명에 대한 가장 확실한 안티테제는 없다.

결국 민주주의가 지속될수록 점진주의적 진보파만이 살아남고 ‘관용’, ‘타인에 대한 정중함’, ‘상호성’ 등의 가치는 움직일 수 없는 규범으로 자리 잡게 된다. 필자가 아는 한 민주주의의 역사가 비교적 오래된 나라들의 사례를 놓고 볼 때, 이를 벗어나는 경향을 발전시킨 나라는 없다.

민주주의와 혁명

이 점에서 반MB는 민주주의의 규범과는 거리가 있는 접근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마치 과거 보수파들의 잘못된 열정으로 표출된 ‘반DJ’나 ‘반노’와 크게 다를 바 없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인격적 모독과 인간적 무례함 속에서 우리가 발견했던 것은 우리 사회 보수파가 갖는 권력 상실에 대한 극도의 두려움 내지 적대감이었는데, 형태는 다르지만 내용적으로 별다르지 않은 반MB 담론이 진보와 개혁 세력 사이에서 자유롭게 유통되었다는 사실은 부끄러운 일이라 생각한다.

현직 대통령이나 보수를 존재해서는 안 될 ‘악의 축’으로 보는 태도는 권력을 상실한 개혁파나 누구보다 강한 반정부성을 자랑하고 싶은 진보진영 내부자들에게는 자연스러울지 몰라도 보통의 상식을 갖는 시민들에게는 매우 부정적인 효과를 미쳤다고 생각한다.

집권 2년 반을 지나고 있는데도 역대 정부와는 달리 현직 대통령이 급격한 지지율 하락과 같은 사태를 맞지 않고 있는 데에는, 지금 정부와 대통령이 잘해서라기보다 반대세력의 잘못과 과도함이 훨씬 크게 작용하고 있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3.

민주주의는 '다수 지배'의 형식으로 실현된다. 그런데 그때의 다수는 수많은 소수파들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내용적으로 보면 다수 지배는 ‘소수파들의 지배’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다수를 형성하고 정치경쟁에서 승리하는 문제는, 잠재적 다수를 구성하는 내부의 이견과 차이를 조정하고 통합하고 변화시키는 과정을 어떻게 잘 하느냐에 달려 있게 된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이견과 차이가 민주정치가 치러야 할 어쩔 수 없는 비용이나 장애가 아니라 거대한 에너지원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 있다. 논리적 순서를 제대로 해서 말하자면, 그러한 이견과 차이를 다루면서 광범한 대중의 에너지와 힘을 조직하는 것이 민주주의가 갖는 역동성의 비밀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정치에서 이견을 다루는 방법에는 크게 두 방법이 있다. 하나는 이견을 부정하고 억압하는 방법이다. 총화단결을 강조하고 연합이라는 대의를 위해 이견과 차이가 희생되는 게 필요하다는 태도 등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이견의 시민권을 인정하고 상호 조정하는 방법이다. 여기에도 두 방법이 있다 하나는 각각의 견해를 일정한 영향력으로 환산해서 거래하고 타협하는 방법이다. 다른 하나는 현재의 협의와 토론을 통해 현재의 이견을 변화시켜 새로운 견해를 형성하는 방법이다. 전자의 경우 조정 이후에도 기존의 이견은 그대로 존재하는 반면 후자의 경우에는 이견의 구조나 분포 자체가 달라진다는 차이가 있다.

시민 원로 사제적 권력의 반민주성

반MB 연합 논의는 기본적으로 이견을 억압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악의 축에 대항하는 공동전선이 도덕주의적으로 강요되었고 따라서 협력과 연대는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가치가 됨으로써 그 자체 매우 강한 이데올로기적 권력효과를 낳았다.

이 과정에서 시민운동 원로를 자임하는 사람들의 역할은 컸다. 그들이 발휘했다고 알려진 영향력의 기초는 물론 역사적 요청을 대행하는 윤리적 명령이었다. 선출된 대표에게 권력을 위임하는 민주적 규범과는 거리가 있는 일종의 ‘사제적’ 권력 행사의 유형이라 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반MB 연합이 후보단일화의 문제로 집약되었을 때, 누가 왜 후보가 되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윤리적 기준은 사라지고 후보가 누가되든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무규범적 공리주의 내지 맹목적 성과주의로 전면화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다보니 후보 조정의 최종 단계는 어느 후보가 더 협박 능력이 강한가를 시험하는 차원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의 부정적 결과는 반MB 연합 내부적으로는 경선이라는 민주적 후보선출 과정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다른 한편 외부적으로는 진보정당들을 포함한 약한 정치세력들을 희생시키는 것으로 이어졌다.

이 상태가 지속된다면, 이번 선거 이후 한국의 정당체제는 이명박 정부를 중심에 두고 김대중 정부(민주당)와 노무현 정부(국민참여당), 나아가 박정희 정부(박근혜당)라는 과거 세력들이 경합하는 구조로 퇴락해 버릴 가능성이 높다.

4.

반MB가 이견을 억압하는 형태로 이루어짐에 따라, 한편으로 집권세력 대 반MB 세력 사이의 정치적 적대는 격렬하게 나타나는 반면 다른 한편 일반 대중들의 참여는 오히려 위축되는 이상한 결과를 낳았다. 정치학에서는 경쟁이 참여를 자극하는 기제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경쟁을 민주주의의 엔진으로 간주한다.

그런데 한국정치에서 지금의 경쟁 구도는 대중 참여를 오히려 약화시키고 언론의 영향력에 대한 의존을 높이며 나아가서는 자신들의 독점적 지지 시장을 갖고 있는 정당들 사이의 퇴행적 다툼으로 이끌어내고 있다.

이런 선거가 사람들에게 적극적인 열정을 갖게 만들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당장 지난 주 마감된 후보등록 상황만 봐도, 지난 지방선거에 비해 자유선진당, 국민참여당, 진보신당 등 새로운 정당이 더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출마자 비율은 크게 낮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출마자 비율이 낮아진 이유

유권자는 어떨까. 중앙선관위가 방송을 통해 내보내고 있는 투표 참여 독려 광고를 보면, 4명씩 두 번 나눠서 기표하는 선거 방식이 쉽고 편하니 이제는 ‘투표로 말하라’고 하는데, 필자가 보기에 이는 그야말로 현실을 호도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필자가 사는 선거구를 기준으로 말한다면 8명을 선택해야 하는 이번 선거에서 필자가 놓고 고민해야 할 후보의 숫자는 23명에 이른다. 그런데 그 가운데 이름이라도 들어본 사람은 3명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무슨 세탁기 세제 고르듯 선택해야 할 판이다.

물론 선관위는 각각의 후보들이 만든 홍보물과 공약자료를 우편으로 보낸단다. 선거법의 규정대로 모두가 다 보낸다면 아마 그 분량은 500쪽 가까이 될 것이다. 과거 선관위가 보낸 후보 관련 우편물을 받아본 사람이면 알겠지만, 그런 자료를 보고 투표 결정을 하긴 어렵다. 이번 선거에서 대부분의 유권자는 누군지로 모르는 후보들 이름을 놓고 장막으로 가려진 ‘기표소 안에서의 고독한 독백’을 해야 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선거를 민주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누가 이런 선거에 책임을 져야할까. 많은 원인이 있겠지만, 굳이 반MB 연합을 두고 말하자면 그것은 한국정치의 희망이기보다는 절망에 좀 더 가까운 결과를 낳았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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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MB론 비판] '비지론', 정치적 질병…자유주의자 '형'들에 의탁

한국을 연구하는 사람이면 보통 꼭 관심을 집중하는 일군의 '코드'들이 있습니다. 사회 분야에서의 '교육열'이라든가, 정치 분야의 지역주의라든가, 그리고 경제에 있어서의 원-하청 이중 구조와 재벌체제 등등입니다.

정체성 포기, 기회주의적 투표

논문을 쓰거나 강의를 할 때에 보통 이 부분에 대해 꼭 언급을 하고 넘어가곤 합니다. 특히 비전문가들을 독자로 상정했을 때에는, 이 '코드'들을 설명하지 않고서는 계속 논리 전개할 수는 없지요. 그러나 - 요즘 지방 선거 유세전의 현상을 보면서 드는 생각입니다만 - 이 '코드' 뭉치에다가 하나를 꼭 더 집어넣어야 합니다. 바로 '비지론'(비판적 지지론), 즉 스스로 '진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사표 심리 등등으로 인한 자기 자신의 본래적 정치 정체성 포기와 기회주의적 투표 현상입니다.

물론 '비지론'을 순수한 국산으로만 생각할 수는 없지요. 대개는 어느 정도 주류 정치에 진입할 만큼 힘이 있는 진보(사회주의)정당이 없는 보수주의적 민주주의 국가마다 '진보 지식인'들이 좀 '비지론'이라는 정치적 질병을 앓게 돼 있습니다.

대표적으로는 우리 상국을 예를 들 수 있는데, 거기 같으면 촘스키와 같은 '사림의 사표'마저도 '차악'이라고 하여 종종 대선을 앞두고 민주당 후보 지지 발언을 하곤 하죠. 물론 아방의 '비지론자'들보다 이 촘스키라는 분은 한 수 위라고 봐야죠.

민주당을 차악이라고 부르면서도 "공화당과 마찬가지로 대기업의 정당일 뿐"이라고 꼭 못을 박곤 합니다. 그러니까 좋아서 지지하는 게 절대 아니라는 걸 일단 명확히 한다는 것이죠. 한국의 '온건한 진보' 지식인들이 "위대한 민주주의자 노무현의 유지를 받들어" 창당되었다는 당을 지지한다고 했을 때에는 그렇게 입바른 소리를 대개 잘 하지 못합니다.

실용을 내세우는 무리들이 권병을 잡든, '개혁'을 팔아 성공하겠다는 정객들이 다시 그리운 청와대를 되찾든 간에 경제, 사회 정책의 윤곽을 어차피 삼성경제연구소 등 이 나라의 실질적 권력자들의 브레인들이 그릴 것이라는 말을, 우리의 '얌전한 진보 지식인들'이 잘 못한단 말이죠. 그런 면에서는 같은 '비지론자' 치고도 촘스키는 그나마 멋이있기라도 하지요.

촘스키의 경우

한국에서의 비지론 같으면, 큰 역사적 안목으로 본다면 사회주의자를 학살해버리고 진정한 진보정당들을 파괴시켜버린 독재 권력의 또 하나의 유산이라고 보면 됩니다. 여운형계가 남한에서 제대로 정계에서 남았거나 진보당이 '민족의 태양 이승만 박사'에게 완전히 박살나지 않았다면 김철수와 같은 거물 사회주의자가 신익희 후보 지지 발언을 했었겠어요?

사회주의자가 몸을 둘 수 있는 '진보의 집'이 없기에, 어쩔 수 없이 차악이라고 생각하여 부르주아 자유주의자에게라도 '투탁'을 하는 셈이지요. '민족의 태양'이나 '조국 근대화 지도자'보다 그나마 근대적 합리성이라도 좀 있겠다 싶어서입니다.

사실, 작년에 서거한 김대중 선생도 애당초에 그런 케이스에 속했죠. 원래 건준계, 즉 여운형 등이 지도한 범진보계에 속했다가 결국 진보가 다 박살이 난 시절에 한민당 후계자들에게 간 셈입니다. 또 김대중과 같은 카리스마적인 '약간 좌파적 자유주의자'마저도 주류 자유주의 정치에 몸 담았다는 것은, 1987년의 미완의 혁명은 민주노조의 성립으로 이어져도 민중 정당 창당으로 바로 이어지지 못한 이유 중의 하나가 된 것이지요.

IMF 충격이 오고 김대중이 반민중적 신자유주의 노선으로 돌아서고 그 주류정치인으로서의 '본색'을 드러내자 드디어 거의 40년 만에 민노당의 창당으로 '혁신계'(개혁적 사회민주주의) 노선이 다시 소생된 것입니다.

문제는, '민족의 태양'과 '조국 근대화'의 광기가 어느 정도 가라앉아도 극도로 보수적인 한국 정치의 전체적 '판'이 전혀 업그레이드되지 않았다는 점이죠. 구 민노당의 좌파민족주의자들도 계속 김대중계에 대한 '보조원 노릇'을 해왔지만, 분당 이후의 지금의 (잔류)민노당도 반세기 동안의 비지론을 전혀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민주노동당, 비지론 벗어나지 못해

스스로의 무력함을 고백하고 주류 부르주아 자유주의자 '형'들에게 '몸과 마음'을 맡긴다는 게 이제 어떻게 보면 대한민국 자칭 '진보계'의 전통이 아닌 전통이 다 된 셈이죠. 이를 좋은 말로는 '반MB' 전선이라고들 하는데, 저는 도저히 대북 정책 이외에는 MB가 그 전 자유주의 정권과 뭐가 그리 다른지를, 전혀 모르겠어요.

예컨대 쌍용자동차를 보면, 파업 파괴를 MB때 했지만 쌍용의 비극의 씨앗이 된 해외 매각을 과연 누구 때에 했습니까? MB야 사라질 때가 되면 사라지고 또 새로운 극우 정객에 의해서 교체되겠지만, MB가 있든 없든 간에 이미 무한 경쟁의 정글이 다 된 대한민국의 전체적 상황이 전혀 개선될 것 같지 않다는 게 문제입니다.

공기업 매각부터 국외 파병까지 거의 모든 반민중적 정책을 지지 내지 방관해온 부르주아 자유주의자들을 "비판적으로 지지한다"는 것은, 진보정당으로서는 일종의 '자기 부정'에 가깝습니다. 진보정당의 힘과 슬기란 한국을 신자유주의화시킨 사람들에게 들러리 서줄 정도 밖에 안된다면 그러면 진보정당을 굳이 할 필요는 뭐가 있겠습니까?

그러한 측면에서는 '반MB 연합'에 참여한 자칭 진보 정치인에 대해서는 아주 실망하고 만 것입니다. 그리고 개인으로서의 '비지'는 결국 일종의 정치적인 '자아 포기'가 아닌가 싶어요. 정치란 꼭 권력을 획득하는 장만은 아니지 않습니까?

정치라는 장에서는 사람마다 그 소신, 그 생각을 외면화시켜 타자들과의 소통과 연대를 모색하는 것이죠. 그러한 측면에서는 정치의 장이란 대자적 자아 형성의 장이기도 해요. 그래서 자신의 내면에 전혀 맞지 않은 정치인을 오로지 '사표 심리' 등 정치공학적 고려 때문에 찍는다는 것은 결국 자율적인 자아 형성 및 외면화에 대한 스스로의 포기 정도입니다.

에릭 홉스봄의 경우

자율적 개인으로 살지 않겠단 이야기죠. 영국 사학계 석학 에릭 홉스봄이 영국 공산당의 집권 가능성을 믿어서 평생 공산당원으로 산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집권 가능성은 당연히 제로이었지만, 공산주의에 대한 꿈을 떠나서 홈스봄이라는 개인이 도대체 존재할 수 없었던 것이죠. 결국 그로서는 당비를 내고 공산당에 투표한다는 것은 자아의 외면화의 한 표현이었어요. 그는 그렇게 해서 세상과 소통한 것이죠.

그런데 대한민국의 소위 진보적 지식인 중에서는 그렇게 살만한 용기가 있는 사람은 좀 적은 것 같아요. 압도적 힘에 머리를 숙이는 훈련이 하도 잘 돼서 그런 것인지, 어쨌든 '비지론'의 망령은 이 땅을 쉽게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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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철 변호사의 책, <삼성을 생각한다>의 판매 부수가 10만 부를 넘길 때가 머지않은 것처럼 보인다. 이 책에서 지은이는 우리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삼성 내부의 비리를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있다. 그런데 그 폭로의 대상인 삼성과 이건희 일가로부터 아직 아무 반응이 없는 것을 보면,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가 허황된 거짓말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우리가 김 변호사의 책을 읽고 단지 삼성의 비리에만 분노한다면, 아직 우리는 문제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것이다. 아마도 정도의 차이야 있겠지만 삼성 말고도 다른 모든 기업이 비리를 저지를 것이다. 문제는 삼성이 단순히 불법과 비리를 일삼아 저지른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집단이 지금 한국을, 아니 바로 우리들을 보이지 않게 지배한다는 데 있다.

외환 위기의 터널을 통과하는 동안에 한국 사회는 심각한 변화를 겪었다. 심리적으로 보자면 우리는 너나 가릴 것 없이 돈이 최고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에 상응하여 사회적으로도 자본 또는 기업이 한국 사회의 지배 권력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우리 자신이 그토록 노예적으로 돈을 숭배하는데 어떻게 자본이 우리를 지배하는 권력이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재임 중에 권력이 청와대에서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말한 것은 그런 현실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말은 틀린 말은 아니었으나 그다지 정확한 말도 아니었다. 그가 좀 더 정직했더라면 시장이 아니라 삼성이 지배한다고 말했을 것이다. 우리를 지배하는 권력은 시장이 아니라 자본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본을 가진 사람이 우리를 지배한다. 하지만 모두가 똑같은 힘을 가지고 있다면 아무도 남을 지배할 수 없다. 모든 권력은 불평등하게 집중된 힘에서 생겨난다. 자본 권력 역시 자본의 불균등한 소유로부터 생겨나고 빈부의 격차가 큰 만큼 더 커진다. 삼성의 자본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엄청나게 불어나 이제 다른 모든 기업을 능가하는 절대 권력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이른바 신자유주의의 물결 속에서 우리 사회는 속속들이 기업화되어 대통령이 주식회사 대한민국의 CEO를 자처할 정도로 국가 전체가 가히 기업 국가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국가가 기업이면 일자리를 만들어 주니 좋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현재와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은 인간이 아니라 이윤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런 기업이 주는 일자리는 인간의 삶을 살찌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인간을 도구 삼아 이윤을 남기기 위해 던지는 미끼요 올가미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기업은 가장 독재적인 조직이다. 종업원들이 선거로 사장을 뽑는 재벌 기업을 보았는가? 국가가 기업에 동화되고 기업화된다는 것은 국가가 독재 국가가 된다는 것과 정확하게 같은 말이다. 기업 국가는 기업 독재 국가인 것이다. 물론 우리는 5년에 한 번씩 국가의 CEO를 선출한다. 하지만 그는 유감스럽게도 바지사장일 뿐이다. 한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회장님'은 따로 있다.

이건희 전 회장이 자기 혼자만을 위한 대통령 특별 사면을 받아내고 동계올림픽 선수단 환영 만찬장에서 이명박 대통령과 헤드테이블에 같이 앉은 모습이야말로 바로 그런 권력 구조의 극명한 상징이다. 선출된 권력 이면에 선출되지 않은 자본 권력이 군림할 때, 나라의 민주주의는 근본에서부터 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삼성과 이건희 일가를 정면으로 비판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삼성 불매 운동을 해야 한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물을 것이다. 왜 삼성만 갖고 그러는가? 다른 재벌 기업들이 아니 다른 중소기업들이 삼성에 비해 나은 점이 무엇인가? 하지만 이런 질문은 권력의 본질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잘못된 물음이다. 그것은 마치 40년 전에 왜 '박정희'만이 문제인가, 모든 군인들이 또는 모든 공화당 정치인들이 다 같이 나쁘지 않은가 하고 묻는 것이 어리석은 물음이었던 것과 같다. 박정희 씨를 제거하고서야 유신독재가 끝날 수 있었고, 전두환 씨를 권좌에서 추방한 뒤에야 비로소 신군부의 독재를 끝낼 수 있었던 것처럼, 오늘날 역시 삼성과 이건희 일가를 그 권력에서 추방하지 않고서는 기업독재를 끝낼 수 없다.


▲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삼성은 단순히 하나의 기업 집단이 아니라, 국가 권력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이다." ⓒ프레시안
왜냐하면 삼성과 이건희 전 회장이야말로 지금 우리 시대의 최고 권력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삼성은 단순히 하나의 기업 집단이 아니라, 국가 권력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이다. 지금 재벌 기업이 과거 군사 독재 시절의 군부와 같다면, 삼성은 군부의 실세였던 하나회와 같고, '회장님'은 '각하'와 같다.

우리가 삼성과 이건희 일가를 비판하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즉 우리는 삼성이 재벌 기업이라서 비판하는 것도 아니고 이건희 전 회장이 가장 부유한 자본가라는 이유 때문에 비판하는 것도 아니다. 더 나아가 무작정 자본주의적 경제 질서나 시장경제가 타도되어야 할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만약 이건희 전 회장이 빌 게이츠 씨 같은 자본가였더라면 우리는 그가 아무리 부자라도 단지 그 때문에 그를 비판할 까닭은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삼성과 이건희 일가를 비판하고 더 나아가 이건희 일가를 삼성으로부터 추방하고 삼성을 종국에는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까닭은 이건희 전 회장과 삼성이 단순한 기업 집단도 자본가도 아니고 우리의 자유를 억압하고 나라의 근본인 정의를 파괴하는 독재 권력이기 때문이다.

기업이 자기의 분수를 지키면서 나라 경제를 살찌우고 사회에 이바지하는 한에서 우리 모두는 그런 기업을 사랑하고 지지할 것이다. 하지만 기업이 그 자본을 이용해 오로지 사사로운 이익만을 추구하고, 이를 위해 온갖 불법을 일삼아 저지르며, 그것도 모자라 공직자들을 매수하여 국가 기구 전체를 부패에 빠뜨리고 마지막에는 나라의 공공성과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위협하기에 이른다면, 이제 그런 기업, 그런 자본가는 타도되어야 할 공공의 적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삼성의 모든 타락상은 단순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기업이 저지르는 불법이 아니라 삼성의 특권적 권력에서 비롯된다. 삼성의 권력이 삼성을 다른 기업과 다른 방식으로 반사회적인 기업이 되게 만드는 것이다. 삼성전자가 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이며 이건희 전 회장이 가장 존경받는 기업인이라는 조사들을 우리는 심심찮게 보지만, 과연 이런 경우 사람들은 존경이란 말을 무슨 뜻으로 이해하고 사용하는 것일까?

삼성이 얼마나 반사회적인 기업인지 알려면, 주변의 장애인 친구에게 삼성이 장애인 2퍼센트 의무 고용을 얼마나 지키는지 물어보면 될 것이다. 아니면 이런 것을 또 어떠한가? 3년 전 태안 앞바다에서 삼성물산 소속의 배가 인천대교 건설에 투입되었던 해상 크레인을 끌고 가다 가만히 있는 초대형 유조선을 들이받아 충남 서해안 일대를 죽음의 바다로 만들어버린 사건이 있었다.

그 사건이 일어나자 삼성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삼성답게 먼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항해 일지를 조작한 일이었다. 지역 해양청이 충돌 위험을 무선으로 알렸는데도 그런 경고를 받은 적이 없는 것처럼 꾸민 것이다. 그리고 전 국민 수십만 명이 태안 앞바다에서 손으로 기름을 닦고 있을 때, 삼성은 마치 자기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라는 듯 시치미를 떼고 있다가 사건 50일이 지난 다음에야 마지못해 사과 성명을 발표했다. 하지만 삼성은 앞으로는 사과하는 시늉을 내면서 뒤로는 배상액을 50억 원으로 제한해 달라고 법원에 신청했다.

법원도 한 통속이어서 올해 1월 24일 서울고등법원은 삼성의 편을 들어 태안 유조선 기름 유출 사건에 대해 삼성이 이미 공탁해둔 56억여 원 이외에는 더 배상을 할 필요가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 액수는 삼성이 퇴직한 김용철 변호사의 차명계좌에 본인도 모르게 넣어 둔 돈 52억보다는 조금 많은 돈이지만, 삼성건설이 지은 서울 강남 타워팰리스의 큰 평수 아파트 한 채 값도 안 되는 돈이다.

삼성전자의 2009년 영업이익이 11조 원에 가까웠던 것을 생각하면 56억 원은 주머니 속의 동전에 불과하다. 그런데 천문학적 비자금을 쌓아두고 상상할 수 없는 액수의 돈을 대선자금으로, 공직자 뇌물로 쓰면서도, 자기가 책임져야 할 사고에 대해 배상할 돈은 없는 기업이 삼성이다.

이런 일들은 우리로 하여금 삼성을 감정적으로 혐오하게 만들지만, 정작 더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다. 모든 독재 권력이 그렇듯이 삼성은 국가 권력과 법질서의 통제 밖에 있다. 삼성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법을 만들기도 하고 없애기도 하며, 그것이 불가능할 경우에는 공직자를 매수하고, 이것 역시 불가능할 경우에는 대놓고 법을 무시한다. 분식회계 장부가 법원에 넘어가자 법원 직원을 매수하여 서류를 빼돌려 불태우는가 하면, 공정거래위원회 조사관이 확보한 자료를 삼성직원이 가로채 도망가면서 찢어버리기까지 한다. 그리고 몇 천 만 원 벌금으로 모든 불법을 덮어 버린다.

하지만 삼성이 일삼아 불법을 저지른다 해서 우리가 삼성을 일종의 조직 폭력 집단으로 규정한다면 사태를 오해하는 것이다. 삼성의 문제는 그것이 탈법과 비리를 일삼아 저지르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 기구 자체를 이윤 추구의 도구로 삼고, 국가가 마땅히 수행해야 할 모든 공공적 기능을 무력화시키려 한다는 데 있다.

약하고 가난한 사람을 보호하는 것은 국가의 가장 중요한 존재 이유의 하나이다. 이를 위해 많은 나라들이 이념의 차이에 관계없이 국가적 차원에서 공공적인 사회 보장 정책을 수립하고 그것을 확장해 왔다. 하지만 한국 정부가 국민연금의 보장 범위를 확대하려 할 때 가장 격렬하게 반대한 기업이 삼성생명이었다. 국가가 다 보장해주면 삼성생명은 보험을 팔아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삼성이 꿈꾸는 세상이란 부자들은 감기만 걸려도 삼성병원 특실에서 황제처럼 대접받고 가난뱅이들은 죽을 병이 걸려도 동네병원 문 앞에도 가보지 못하고 앓다 죽는 세상, 부자들은 외국산 수입 생수로 집안 수영장에서 수영을 할 때, 가난뱅이들은 재벌 기업이 운영하는 비싼 수도 요금을 내지 못해, 화장실과 부엌에 수도가 끊어져 공동화장실을 이용해야 하고 빗물을 받아먹어야 하는 세상이다.

이런 악몽이 현실이 되지 않도록 하려면 더 늦기 전에 삼성을 해체해야 한다. 우리가 박정희, 전두환 씨를 권좌에서 쫒아 내고 군부의 권력을 해체한 뒤에야 비로소 시민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누릴 수 있었던 것처럼, '회장님'의 권력을 박탈해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삼성을 해체하지 않는다면 결코 기업 독재를 끝낼 수 없을 것이며, 우리의 자식들은 재벌 기업의 머슴으로 종노릇하는 운명을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삼성 제품 불매는 자본의 독재, 삼성의 독재를 끝내기 위한 대장정의 첫 걸음이다. 유명무실한 삼성 특검 수사와, 대다수 범죄 행위에 대해 관대한 판결을 내려줌으로써 요식 행위에 그친 재판과, 그 재판을 통해 내려진 법의 심판조차 없었던 일로 만들어버린 최근의 특별 사면을 통해 분명해진 것처럼, 국가기구는 더 이상 삼성을 통제하지 못한다. 이미 삼성에 매수되어버린 국가 기구가 삼성이 온전한 기업이 되도록 만들어 주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회장님의 비서가 회장님의 불법을 꾸짖어 바로잡아 주기를 바라는 것만큼이나 비현실적인 소망이다.

그렇다면, 누가 어떻게 삼성을 해체하고 바로 세울 수 있겠는가? 소비자뿐이다. 소비자가 왕이라는 말은 공치사가 아니다. 화폐가 자기 증식 운동을 시작하면 자본으로 탈바꿈한다 하지만, 자본은 결코 저 혼자 불어나지는 못한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노동자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소비자의 지갑을 털어 불어나는 것이다. 국가가 없다 하더라도 자본은 자기 증식할 수 있다.

자본이 국가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까닭도 본질적으로 보자면 그 때문이다. 하지만 노동자와 소비자가 없다면 자본은 절대로 혼자 증식할 수 없으며, 아예 존재할 수조차 없다. 그러므로 자본을 실질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것도 노동자들과 소비자들밖에 없다. 하지만 삼성엔 노동조합이 없다. 삼성이 다른 어떤 기업보다도 더 사악한 반사회적 기업이 된 까닭도 그 때문이다. 안팎으로 아무런 견제가 없는 권력이 어떻게 타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국가도 노동조합도 삼성의 불법을 바로잡을 수 없으니 이제 남은 것은 소비자들의 직접 행동뿐이다. 삼성의 권력이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소비자들에게 자기 제품을 쓰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그것이 모든 자본의 아킬레스건이다. 그리하여 아무도 삼성 물건을 쓰지 않는다면 그날로 삼성은 아무 것도 아니다.

게다가 삼성은 주방용 가전제품부터 안방의 청소기, 사무실의 전화기와 컴퓨터, 가방 속의 노트북과 주머니 속의 휴대전화, 그 속의 반도체 그리고 지갑 속의 신용카드, 생명보험과 자동차보험 등, 우리의 소소한 일상을 이루는 수많은 제품과 서비스를 생산하고 제공한다. 만약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일상을 삼성제품으로 채운다면, 마치 거미줄에 걸린 잠자리처럼 우리 모두 삼성의 먹이가 될 것이다.

하지만 삼성제품을 거부하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버릴 것은 수도 없이 많이 널려 있다. 버릴 수 있는 것은 버리고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꾸고 해약하고 해지할 수 있는 것은 그렇게 하자. 지구 위에 생명체가 등장한 뒤에 모래알처럼 작은 개미들은 영원히 살아남아도 공룡이 멸종하는 것은 한 순간이다. 게다가 삼성이란 공룡을 멸종시키기 위해 우리가 엄청난 노고를 쏟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도리어 하지 않으면 된다. 삼성 제품을 사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하는 일은 어려워도 하지 않는 일은 얼마나 쉬운가.

하던 일을 하지 않기 위해 필요한 일은 오직 하나, 마음을 바꾸는 일뿐이다. 우리의 삶을 삭막한 사막으로 만드는 것도, 푸른 초원으로 바꾸는 것도 우리 마음에서 시작되는 일이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삼성이 어떤 기업인지 그 실상을 깨닫고 삼성에 대한 맹목적인 애착과 삼성의 권력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생각하면 이것이 마냥 쉬운 일만은 아니다. 사람들은 더 좋은 제품을 사용하고 더 좋은 서비스를 제공받는 것을 소비자의 권리라 생각한다. 이 기준에서 보자면 삼성은 소비자들이 선호할 만한 기업임이 분명하다. 제품의 품질은 물론이고 저녁 시간에 냉장고 수리를 신청했더니 두 시간 반만에 고쳐줄 정도로(<한겨레> 3월 9일자 김선주 칼럼) 완벽한 애프터서비스를 제공한다지 않는가. 하지만 그런 완벽한 서비스의 이면에 그만큼 완벽하고 비인간적인 노동 통제가 감추어져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 모두 자본주의 사회의 톱니바퀴로서 도구화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아무 불편 없이 저녁을 준비할 수 있도록 나의 냉장고를 수리하러 온 노동자가 자기 가족과의 저녁 식사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으리라는 것을 헤아릴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의 비인간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경제와 소비에 대한 새로운 철학과 윤리이다. 단순히 제품과 서비스를 통해 나 개인이 느끼는 만족이 아니라 그 제품이 생산되고 소비되는 전 과정이 얼마나 정의롭고 자연 친화적이며 우리 모두를 위해 얼마나 바람직한 것인가 하는 것이 소비자로서 제품 선택에 대한 윤리적 기준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삼성 불매 운동이란 단순히 외적 억압과의 싸움이 아니라 우리들 내면의 탐욕 및 아집과의 싸움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것이 다른 누구도 아니고 바로 철학자가 삼성 불매 운동의 선두에 나선 까닭이다.

이런 사고방식의 전환은 결코 실현 불가능한 이상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더 비싸더라도 유기농 농산물을 선택하고 공정 무역 커피구매한다. 아마도 거기에도 문제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너와 나 그리고 우리 모두를 위해 보다 좋은 것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개인적 손해와 불편을 감수하려 하는 인간의 선한 의지이다. 그런 선한 의지에 의해 우리의 역사는 더디지만 진보해 왔던 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삼성을 해체해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말하는 것은 나중을 위해 남겨두려 한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한국의 부패하고 비효율적인 재벌 경제 체제를 개혁하기 위해 더불어 같이 생각하고 고민해야 할 과제라고 믿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나중에 삼성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두고 토론하기 전에 무조건 삼성 제품을 불매함으로써 삼성의 권력을 해체하는 일을 즉시 시작하는 것이 지금 우리가 할 일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것은 박정희 시대에 '박정희 타도'가 무조건적인 대의였으며, 전두환 독재 치하에서 그 독재자의 제거가 다른 모든 것에 앞서는 선결 문제였던 것과 같다. 그렇듯이 지금 우리에게도 삼성 불매를 통해 삼성과 이건희 일가의 권력을 해체하는 것이 다른 모든 것에 앞서는 역사적 과제라고 우리는 믿는다.

어떤 경우이든, 분명한 것은 박정희 씨가 죽었다고 나라가 망하지 않았듯이 삼성 노트북과 휴대전화를 쓰지 않고 다른 회사 제품을 쓴다 해서 나라가 망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자유와 나라의 정의를 지키기 위해 이제 우리, 삼성은 더 이상 아니라고 말하자. 그리고 삼성 제품을 쓰지 않는 것이 고상한 인간의 품위와 교양의 징표가 되게 하자. 돈이 아니라 사람이 주인 되는 세상을 위하여!

 



/김상봉 전남대학교 교수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100309154532&section=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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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큐리 2010-03-10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삼성을 생각한다 리뷰도 올려주세요..ㅎㅎ

라주미힌 2010-03-11 01:52   좋아요 0 | URL
ㅎㅎㅎ... 잘 쓴 것들이 많아서
 

 수업 시간에 있었던 일이다. ‘동아시아의 자본과 노동 관계’에 대해 배우는 학생들에게 “일본에서 근대적 복지체제의 근간이 만들어진 것은 1937년 중국 침략 이후 상이군인과 퇴역 군인, 그리고 현역 군인들의 가족을 보살필 후생성이 1938년에 세워지고 나서다”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수많은 평민이 한꺼번에 총알받이가 돼야 자본주의 국가가 비로소 ‘복지’에 신경쓰기 시작했다는 사실에 경악한 한 노르웨이 여학생이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


“그러면 전쟁이 없는 자본주의 문명은 과연 불가능한 것인가?”


강대국 간 서열 체제가 유지하는 평화


이 질문을 듣고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전쟁 없는 자본주의라고? 노르웨이처럼, 수류탄부터 미사일까지 온갖 무기를 생산·수출해 세계에서 7위 무기 수출국으로 군림하면서도 노벨평화상을 주는 등 ‘평화국’으로 행세하는 나라는 일단 외면상 전쟁을 국내에서 비가시화할 수 있다. 노르웨이산 무기로 아프간의 미군이나 가자지구의 이스라엘군이 미성년자 ‘테러리스트’를 아무리 많이 살육해도 이를 많은 노르웨이인들은 그저 몰라도 되는 것이다. 그러나 노르웨이와 같은 군소 핵심부 국가가 전쟁으로 돈을 벌면서도 표면적으로 ‘평화국’으로 남는다 해도, 노르웨이도 속하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가 전쟁 없이 굴러갈 수 있다는 것은 순진한 꿈에 불과하다. 세계 산업자본주의란 전쟁 속에서 태어나고 전쟁을 먹고 자랐다. 자본주의 국가에 “전쟁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사냥꾼에게 불살생계를 설법하는 일과 다를 게 없다.
정치외교학계 일각에서 “민주국가 사이의 전쟁은 없다”라는 ‘법칙’을 가끔 들먹이지만, 일소에 부칠 만한 난센스일 뿐이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맞붙은 입헌군주국 영국과 독일은 당대 기준으로 봐서는 ‘민주국가’ 대열에 속했으며, 10년 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군의 공습을 당한 세르비아도 발칸반도의 기준으로 봐서는 ‘민주국가’였다. 1945년부터 오늘날까지 ‘정통 열강’이라고 할 미국·영국·독일·프랑스·일본 등이 더 이상 서로 싸우지 않은 이유는 냉전시대 소련부터 오늘날 중국까지 그들에게 공동의 외부적 적대자 내지 잠재적 경쟁자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1945년까지 각종 대규모 전쟁에서 이미 그들 사이의 ‘서열’이 정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컨대 미국이 영국(1812∼15년 전쟁), 독일(제1·2차 대전), 일본(제2차 대전) 등을 차례로 패배시킨 상황에서 미국의 군사적 우월성을 인정하는 것은 불가피해졌다. 그런데 이 서열이 정해지는 과정은 전쟁의 연속이었고 바로 이 과정에서 자본주의가 성장해왔다.

시장주의자들이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을 들먹이기 좋아하지만, 오늘날 시장을 실제로 쥐락펴락하는 손은 장님이 아닌 이상 누구에게도 잘 보인다. 미국 경제에 1조달러가량의 ‘구제금융’을 아낌없이 부어버린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 등의 손이다. 사실 국가가 매개체가 돼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거대은행들의 부실경영을 책임지고 그 부족분을 채워주는 꼴이 되고 말았다. 과연 미국이라는 국가는 자본주의적 시장을 이처럼 ‘유지·육성’하는 역할을 언제부터 맡은 것인가?


화폐 통일도 안 됐던 미국이 강해진 배경


이는 ‘전쟁’을 빼면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다. 남북전쟁(1861∼65)을 앞둔 미합중국은, ‘중앙집권적 국가’라 하기 어려울 만큼 지방분권적인 정치체였다. 1837년부터 중앙은행 기능이 정지돼 1365개 주립·사립 은행이 각자 다르게 지폐를 찍어내는 ‘화폐 다원주의’ 국가이기도 하고, 상비군이 2만8천 명밖에 되지 않는 지방 민병대 위주의 ‘군사 다원주의’ 국가이기도 했다. 이러한 ‘느슨한’ 국가를 오늘날 군사적 제국이자 하나의 경제단위로 만든 것은 남북전쟁이었다. 전쟁이 호기가 돼 화폐 발행권을 국가가 독점한 것은 물론, 1861년 8월5일부터 그때까지 미국 역사상 없던 연방 소득세가 최초로 전국적으로 부과됐다. 국가가 국내 부의 상당 부분을 독점해버린 것이다. 이 돈은 전쟁 말미에 약 100만 명이 된 연방 군대를 위해서도 쓰였지만, 갑자기 팽창해버린 관료기구들을 뒷받침해주기도 했다. 남북전쟁이 없었다면 과연 보호관세와 철도 부설 지원 등을 통해 미국 자본주의를 ‘키워줄 수 있는’ 강력한 연방국가가 태어났겠는가?

은행에의 ‘구제금융’ 등을 통해 시장을 주도할 수 있는 오늘날 간섭주의적 국가는, 1917년 제1차 세계대전에 뛰어들려는 미국이 군수산업 육성을 위해 일체의 산업경제에 대한 개입 권한을 가진 전쟁산업국(War Industry Board)을 신설하고 나서 탄생했다. 전비 지출로 미국 연방국가의 지출 전체가 2년 만에 약 20배, 7억달러에서 190억달러까지 늘어났다. 그렇게 해서 ‘만능국가’가 태어난 것이다.

그러면 자본가들이 전쟁 비용을 증세와 국채 발행 등 사실상 인플레를 통해 조달하는 ‘국방국가’의 탄생을 반긴 이유는 무엇일까? 군수공업 같으면 그 대답은 자명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개개인 자본가의 전쟁에 대한 호불호를 넘어 자본가 계급 전체로서 전쟁은 ‘축복’이 아닐 수 없었다. 전쟁이 가져다주는 ‘특수’, 즉 산업 호경기가 없는 이상 이윤율이 경향적으로 저하되는 자본주의 경제는 장기적으로 지탱되지 않기 때문이다. 후발주자가 늘 뛰어들어 언젠가 시장이 포화되면서 출혈경쟁으로 이윤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소비재와 달리, 무기와 같은 ‘유사 자본재’의 수급과 가격 등은 시장과 거의 무관하게 사실상 독점에 가까운 생산업체와 정부의 담합으로 결정된다. 그러기에 주기적 불경기로 소비재 시장이 위축될 때 적당한 투자처가 없는 엄청난 잉여자본을 가격이 안정적인 무기 생산에 쏟아부어 불황을 유보하는 것은 자본주의 체제의 중요한 운영 기법이다. 미국 자본의 시각에서 제1차 세계대전을 한번 보라. 중앙정부의 세입이 약 4배로 느는 등 자본가가 더 많은 세금을 내야 했지만, 1916∼18년 공업 생산량이 40%나 늘어났다. 제2차 세계대전은 미국을 대공황에서 회복시켜준 일등 공신이기도 했고, 그 총생산량을 800억달러에서 1300억달러어치로 키워 세계경제 초강대국으로 만든 ‘황금의 계기’이기도 했다. 한 아나키스트의 말대로 전쟁은 실로 ‘국가의 건강’ 그 자체였다.


 
 


» 이승만 시대 학도호국단의 모델이기도 한 히틀러청소년단은 충실한 총알받이를 어릴 때부터 키우는 사회화 조직이었다. 이를 통해 노동계급 출신의 청소년에게 출세의 기회를 미끼로 던지기도 했다. 한겨레 자료
 
 
 

복지국가의 기원, ‘총알받이’ 창출


자본주의 경제가 전쟁을 먹고 자란다는 말은 또 하나의 의미를 가진다. 우리가 흔히 이용하는 절대다수의 민간 부문 기술들은 전쟁을 계기로 태어났다. 제2차 세계대전 종료 이후에 바로 여객기로 변신한 두글래스 DC-6 병력 수송기나 역시 군대 운반의 필요성을 염두에 두고 확장된 철도, 1989년이 돼야 군수 첨단기술 산업 관련자들의 전유물에서 상업적 상품으로 탈바꿈한 인터넷 등은 정부가 지원하는 군 관련 기술 개발이 우리 생활에 미치는 영향을 대변해준다.

그런데 과연 19∼20세기의 총력전, 즉 ‘일체 국민 단결’과 총동원을 수반하는 전쟁의 시대가 바꾼 것은 사회의 ‘하드웨어’뿐인가? 사회의 ‘소프트웨어’라고 할 수 있는 사회조직도 일상화된 전쟁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우리는 복지국가를 통상 ‘사회민주주의의 산물’로 보지만,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사회민주주의자들이 국가적 복지체제를 크게 발전시킬 수 있었던 이유는 모든 국민에게 초등교육을 하고 다수의 남성을 군에 징병해 전장에 보내야 했던 ‘총력전 국가’가 국민 다수를 이루는 빈민·노동층의 생존을 담보해주고 그 충성심을 보장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유럽 복지국가 건설의 선두주자인 독일 같으면 노후연금법과 병가수당법, 실업수당법 등을 1880년대 초반에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숙적인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가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그 목적은? 언제든지 기꺼이 총알받이가 돼줄 ‘국민’의 창출이었다. 마찬가지로 미국에서 노동자 계층을 중산층화한 하나의 계기는 바로 다수가 노동자 출신이던 퇴역 참전군인에게 무상 고등교육 기회 등을 준 1944년의 ‘퇴역군인 대우법’(GI Bill)이었다. 그 뒤 한국에서, 베트남에서, 이라크에서 수많은 ‘열등한 타자’를 도살하면서 스스로도 죽어야 할 제국의 총알받이들에게 일단 ‘당근’부터 지급해야 했다.

그러면 모든 국민을 ‘아군의 승리’에 열광하는 총력전의 ‘능동적 공범’으로 만들려는 국가의 목적은 달성됐던가? 모든 경우에 꼭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제1차 세계대전이 빚어낸 독일과 러시아의 혁명이 말해주지만, 권위주의 정권의 억압과 포섭의 도가 크게 높아지기만 하면 대중 총동원의 성공을 거의 보장할 수 있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전시에도 국가가 주선해주는 단체관광을 즐기고, 전후에 개인 승용차와 단독주택을 공급받을 거라고 약속받고, 나치당과 무장 친위대 등을 통해 여태까지 상상 못한 벼락출세의 가능성을 얻은 수많은 ‘순혈 독일인’ 노동자가, 설령 아우슈비츠에서 매일 수천 명의 유대인과 공산주의자 등 ‘불온 분자’가 죽어나간다는 것을 알았다 한들 과연 히틀러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겠는가. 베트남에서 한국군이 저지른 만행을 이젠 다 알아도 박정희에 대한 향수를 느끼는 수많은 한국인의 의식을 봐도 알 만한 일이다. 비교적 약체인 독일이나 일본에서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부 좌익이 기대한 ‘노동계급의 반란’이 끝내 없어 극소수의 반전 저항에 그치고 말았지만, 강자인 미국에 제2차 세계대전은 당시나 지금이나 ‘좋은 전쟁’으로 대인기를 유지했다. 다수의 주류 백인이 경멸한 ‘황인종 일본’을 주적으로 삼은 것도 대만족이었지만 대공황 때 23%에 달했던 실업률이 전쟁 특수와 대량 징병으로 1%로 떨어지고 워싱턴 근로자의 실질소득이 전쟁 호경기로 42%나 늘어나지 않았던가. 전체주의적 파시스트 독일이든 허울 좋은 ‘민주주의’의 미국이든 적어도 ‘주류’에 속하는 대중이 ‘경제를 살리고 아국의 위세를 높이는’ 대량 학살에 대부분 열광했다는 것은 ‘극단의 시대’(홉스봄)의 가장 아픈 교훈 중 하나다.


홀로코스트는 근대성의 당연한 산물


한때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이나 전시 일제의 ‘일억옥쇄’(一億玉碎)의 집단 광풍 등을 ‘후발 발전국의 후진성을 증명하는 예외적인 야만’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했지만, 지금의 학계에서는 오히려 홀로코스트를 ‘근대성의 당연한 산물’로 보는 지그문트 바우만 교수의 설이 유력해지고 있다. 사실 규모와 방법에는 차이가 있지만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기계적으로 학살한 것이나 한국전쟁 때 이북 지역에 65만t의 폭탄을 퍼부어 ‘원시 상태’로 돌아가게끔 한 것이나 결국 똑같은 기계화된 대량 살육의 유형에 속하는 일이다.

위에서 보여준 대로, 이 대량 살육의 주기적 반복 없이는 자본주의적 세계 체제는 그 경제적 균형도 ‘계급평화’의 허상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없다. 그러기에 1945년 이후부터 이어져온 ‘장기 평화’, 즉 주요 강대국 사이의 대규모 열전 부재 상태는 거시적 시각에서 어쩌면 ‘예외’에 속하는 것일지 모른다. 자본주의가 남아 있는 한, 새로운 홀로코스트와 새로운 히로시마들이 우리를 꼭 기다릴 것이다.

박노자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http://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2627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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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미힌 2009-12-10 1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쟁은 실로 ‘국가의 건강’ 그 자체였다"
 

한 여자 대학생이 텔레비전에서 “외모도 경쟁력이며 180센치미터 이하의 남자는 루저”라고 해서 큰 소란이 났다. 나는 포털의 메인화면에 뜬 기사를 보고 그 일을 알았는데 내가 본 기사엔 두 가지 이야기가 있었다. 하나는 예의 ‘180센치미터 이하의 남자는 루저’라는 이야기고 다른 하나는 낱말까지 정확하게 기억은 못하지만 ‘스펙이 좋다면 사랑 없이도 결혼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내가 두 번째 이야기를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건 단지 내 기억력이 신통치 않아서가 아니라 매우 희한한 상황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첫번째 이야기는 인터넷 마녀사냥 시비가 날 만큼 일파만파 퍼져나갔지만, 두 번째 이야기는 마치 그런 이야기가 없었던 양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사라진 이야기에 공감한 것이다.
그러고 보면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한 이야기도 그 절반, 즉 ‘외모도 경쟁력’이라는 부분은 사라져버렸음을 알 수 있다. 대개의 사람들은 그 역시 공감한 것이다. 결국 남은 건 ‘180센치미터 이하의 남자는 루저’라는 말뿐인데 그에 반발하는 사람들은 물론 자신이 루저라는 말에 발끈했지만 그 반발엔 꽤 중요한 사회적 맥락이 들어 있다.
이제까지 대놓고 외모를 상대 성을 선택하는 기준으로 말하거나 경쟁력 없는 외모를 가진 상대 성에 대한 경멸을 공공연히 표시하는 건 남자만의 권리였다. 이를테면 경쟁력 없는 외모를 가진 여자에 대한 경멸은 오늘 한국의 코미디 프로그램의 가장 핵심적인 소재다. 코미디 프로그램의 지존이라는 <개그콘서트>엔 아예 그런 캐릭터만 전담하여 높은 인기를 구가하는 여자 코미디언이 있으며 대부분의 여자들은 그 여자를 보면서 웃는다.
‘180센치미터 이하의 남자는 루저’라는 말은 그 공고한 체제에 대한 도발이었다. 그 여대생은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그 내용이 바람직하든 않든, 매우 중요한 사회적 도발을 감행한 것이다. 같은 이야기도 미국의 마돈나가 하면 사회적 도발이 되고 한국의 여대생이 하면 골빈 소리가 되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그 여대생의 사회적 도발은 그뿐이 아니다. 그 여대생은 오늘 우리가 어떤 사람들인지 다시 한번 생생히 알게 해주었다.
말하자면 그 여대생은 우리가 사람을 됨됨이가 아니라 스펙으로 평가하며, 그런 사실을 더 이상 숨기려들지 않을 만큼 닳고 닳은 사람들임을 알게 해주었다. 양식 있는 사람들, 말하자면 오늘 이명박 반대를 외치는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사람들은 내가 왜 ‘우리’에 포함되는지 억울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명반 반대를 외치는 사람들은 정말 이명박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다른가?
글이나 말, 혹은 기사나 성명서 따위 말고 실제 삶에서 말이다. 하긴 다른 구석도 있긴 하다. 이를테면 이명박을 지지하는 부모들은 편안한 얼굴로 아이를 경쟁에 몰아넣지만 이명박을 반대하는 부모들은 매우 불편한 얼굴로 아이를 경쟁에 몰아넣는다. 교육목적이 인간이 아니라 스펙이라는 점은 같지만 표정만은 정말 다르지 않은가?
우리가 정말 이명박을 반대한다면 그래서 이놈의 세상을 눈곱만큼이라도 바꾸고 싶다면, 우리가 이명박과 다른 사람이어야 하고 우리 아이를 이명박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다른 방식으로 키워야 한다. 그래도 현실이 어쩔 수 없지 않으냐고? 그렇다면 우리는 이명박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단지 이명박과 사이가 나쁜 사람들일 뿐이다. 여전히 억울하게 느껴지더라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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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9-11-18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아이를 이명박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다른 방식으로 키워야 한다.

는 말이 눈에 쏙 들어오네요.

라주미힌 2009-11-19 00:13   좋아요 0 | URL
저분은 맨날 똑같은 말만 되풀이 하는데... 들을때마다 환기가 되요 -_-;;
아.. 환기하라고 같은 말이 반복되는건가;;;

로드무비 2009-11-19 1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술집에서도 못생긴 여자가 더 서비스를 잘한다, 그런 요지의 발언도 했었죠.
대통령 되기 전이었던가?
아무튼......

이놈의 세상이 눈곱만큼이라도 바뀌긴 할까요?
나부텀도 이렇게 많은 편견과 고정관념으로 똘똘 뭉쳐 있는데.

따지고 보면 김규항 씨의 저 말이 억울할 것 하나 없습니다.


라주미힌 2009-11-19 14:33   좋아요 0 | URL
달라지도록 노력해야겠어요... 정말 보면 다른 것 하나 없구만... 감정의 털끝만 예민해져서리 ㅋ

무해한모리군 2009-11-23 0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형 ttb 목록이 마음에 들어요. 왠지 개성이 느껴지네요 ^^

라주미힌 2009-11-23 09:45   좋아요 0 | URL
재미있는 책들이지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