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총 정치방침 비판 "노동운동 대의 다시 생각해봐야" 

18년 전의 악몽

지금부터 18년 전. 노동운동은 정치세력화라는 큰 대의를 실천하는 과정 속에서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1992년 총선과 대선에서 당시 전노협으로 대표되던 민주노조운동은 조직적 방침을 내리지 못한 채, 민주당과 정책연합에 이끌려 결국 민주당을 지지했다.

흔히 비판적 지지론이라고 불리웠던 보수정치세력에 대한 지지로 노동운동의 정치세력화는 깃발조차 올리지 못했다. 물론 당시에도 고민은 존재했다. 통합민중당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지니는 한계를 부정할 수 없었으며 당시 전국연합은 독자적 정치세력화보다 민주당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통한 민주정부 수립을 정치 방침으로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전노협은 노태우 정권 아래에서 민주노조운동을 무력화시키려는 탄압을 막아내는 것조차 힘겨운 상황에서, 정치방침을 결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전노협이 내세웠던 노동해방과 평등사회라는 운동의 대의와 전략적 목표는 선거의 당락으로 제한되는 것은 아니었다.

전노협과 노동정치

노동자운동에게 선거는 노동자대중을 정치적으로 훈련시키고, 당면한 운동을 일보 전진시키기 위한 열려진 정치적 공간으로 의미가 존재한다. 하지만 당시 민주노조운동은 보수야당인 민주당을 포함한 전국연합 후보 그리고 대선에서 김대중을 지지했으며, 통일된 정치-조직적 방침을 지니지 못함으로 인한 조합원의 혼란도 깊어 갔다.

그리고 10여년이 흐른 뒤 민주노조운동은 노동자정당을 지니게 되었으며, 더 이상 보수야당에 대한 지지로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민주노조운동은 다시 역사를 반복하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정책연대 혹은 반MB후보 단일화라는 이름하에 보수야당 후보를 지지하고 있는 현실이다.

다시 물어보자. 노동자운동은 왜 선거에 개입하는가? 시장이나 의회 의원을 1명을 늘리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이명박 정권에 반대하는 이른바 '민주세력'의 힘을 몰아주기 위해서인가? 그렇다면 민주당과 국민참여당과 노동자운동의 연대를 통한 민주후보의 당선이 선거에 개입하는 목적인가?

어쩌면 1992년 당시 상황과 이토록 닮아 있는가? '악몽'이 재현되고 있다는 생각을 버릴래야 버릴 수가 없다. 노동자운동은 스스로에게 그리고 조합원들에게 다시 질문해야 한다. '왜 선거에 노동자운동은 개입하는가'에 대해서 말이다.

반복되는 역사, 민주노총의 패착

역사가 반복된다는 것, 노동자운동이 잘못된 실천을 반복한다는 것은 앞서 말한 질문에 대해 스스로 묻지 않기 때문이다. 노동자운동이 선거에 개입하는 것은 그 앞에 어떠한 수사를 가져다 붙이더라도, 노동자계급의 자기해방을 위한 조건을 만들기 위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신자유주의 아래에서 분절되고 파편화된 그리고 연대를 두려워 하는 노동자들에게 정치적 논의의 장을 만들고 이들을 정치적 주체로 설 수 있는 계기가 선거이다. 바로 노동자운동은 조합원들이 한 표를 찍는 수동적 주체가 아닌, 노동해방이란 정치적 과제를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선거 속에서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민주노총은 이러한 노동자운동의 선거에 대한 태도와는 거리가 먼, 민주당과 단일화를 통한 반이명박 후보 추대에 방점이 맞추어져 있는 듯하다.

지난 13일 민주노총 중앙집행위에서는, “진보정당이 포함되어 ‘반MB 단일화’를 이루어낸 후보와 진보정당의 후보가 중복 출마했을 경우, 양측 모두 지지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결정했다. 다만 “진보정당의 후보가 민주노총 조합원일 경우”에 한해 예외적으로 해당 후보를 지지하기로 했다. 이는 지난 3월 ‘진보정당 통합(추진)을 대중적으로 책임 있게 공식화하는 정당의 후보를 민주노총 후보, 지지후보로 한다’는 내용의 ‘6.2지방선거 선거방침’과도 거리가 존재한다.

침묵의 카르텔?

문제는 지역에서 노골적으로 보수야당과 연합에 몰두하고 있는 모습이다. 민주노총 경기본부는 5월 25일에 유시민 국민참여당 경기도지사 후보와 사회공공서비스 확대를 통한 좋은 일자리 창출 등을 골자로 한 정책협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이미 민주노총은 심상정 후보를 민주노총의 지지 후보로 정한 뒤에, 당사자인 심상정 후보를 배제하고, 국민참여당 후보를 대상으로 정책 협약식을 체결했다. 민주노총 측은 진보신당 후보의 경우 민주노총 후보로 민주노총의 가치와 정책에 동의한다는 서약서에 서명도 했기 때문에 따로 협약식을 체결하지 않았다고 설명했지만, '보도 자료'라는 이름으로 이를 언론에 알린 것은 민주노총의 유시민 후보 지지라고 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26일에 강원도지사 선거에 출마한 민주당 이광재 후보와 민주노동당 엄재철 후보는 민주노동당 후보가 민주당 후보 지지를 선언하고 후보단일화에 합의했다고 한다. 애초 민노당과 진보신당은 13일에 여론조사를 통해 진보진영 후보단일화를 이룬 바 있다.

결국 민주당 후보 지지선언을 할 것이었다면 진보진영 후보 단일화를 위한 비싼 돈을 들여가며 여론조사는 무엇 때문에 했는가? 또한 두 노동자정당을 지지하던 조합원들에게는 어떻게 보수정당 후보에 대한 지지 선언을 설명할 것인가?

92년 노동자운동이 겪었던 비극들은 2010년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지만, 민주노총 내부는 조용하기만 하다. 이것이 보수야당과 연대라는 '침묵의 카르텔'이라고 부르면 과도한 말일까?

노동해방, 노동자운동의 대의를 다시 생각해보자

솔직히 나는 2000년대 이후 '비판적 지지'니 '보수야당에 대한 연대' 등 단어를 사용하지 않아도 될 줄 알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민주노총은 노동자운동의 대의를 스스로 포기하고 있다. 그것은 노동자운동이 노동자들의 자신의 해방을 스스로의 단결과 연대가 아닌, 보수정치세력의 힘을 빌어 이루려는 노동자운동의 노동해방이라는 대의를 망각했기 때문이다.

이들이 후보단일화와 연대를 구하려는 세력은 한미FTA, 불안정노동자 확대, 사회적 양극화, 의료급여제도 등 신자유주의를 통해 주변계급을 대량으로 낳은 동시에, 이들에게 시민권도 부여하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노무현을 중심으로 하는 참여정부 정치세력을 '실패한 진보'처럼 미화하지만, 이는 엄연히 존재하는 보수정치세력의 과거사를 왜곡하는 것이다.

노동자운동의 자기 해방은 산업, 지역, 성별, 임금, 노동조건 등 자본주의가 강제하는 차별을 스스로의 힘에 의해 극복해 나아가는 지난한 연대라는 실천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지금 민주노총은 연대의 손을 내밀어야 할 불안정노동자, 여성노동자 그리고 이주노동자가 아닌, 민주당과 국민참여당에게 연대를 구하고 있다.

스스로 누구와 연대해야 할지 모르는 노동자운동은 결국 역사 속에서 노동해방을 지체시킨 세력으로 기록될 것을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나보다. 과연 민주노총 내부에서 이러한 문제에 대해 자기성찰적인 사유를 할지는 두고 보아야 할 문제지만, 민주노총이 다시 노동해방이라는 노동자운동의 대의에 대해 생각해보길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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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28 10: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5-28 14: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지난 5월 11일 ‘청와대의 핵심 관계자’가 기자들 앞에서 한 가지 자랑을 했다. 청와대 자체 여론 조사 결과, 이명박 대통령의 국정 지지도가 51.7%를 기록했다는 것이다.

5년 전 2005년 5월 노무현 대통령의 국정 지지도가 20~30%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정말 자랑할 만한 성적이다.

청와대 조사가 아니더라도 이대통령이 50%에 육박하는 지지율을 보이고 있다는 점은 다른 여론 조사 기관의 결과와 비교할 때 이론의 여지가 없다.

청와대가 자랑할 만한 수치

그런데도 지방 선거에서 이대통령을 심판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임기 중반임에도 불구하고 떨어지기는커녕 더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는 대통령을 견제하자고 많은 시민들이 벼르고 있다. 이상한 일이다. 아니, 국정 운영을 잘한다는 대통령을 심판하겠다니 불공정한 일이다.

그의 지지율로 그를 심판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나라를 분열과 대립으로 몰아갔을 뿐 아니라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며 서민들의 삶을 위기에 빠뜨린 국정의 실상과 지지율간의 괴리는 다른 설명을 필요로 한다. 즉, 야당의 역할이라는 변수를 고려해야 한다. 민주당의 지리멸렬, 무능과 무기력, 정체성 상실에 관해 논해야 한다. 민주당이 MB에 맞서 싸우지 못해서가 아니다. 그 반대이다.

우선 민주당은 반MB가 어떤 전망을 갖고 있어야 하는지 제시하지 못했다. MB를 극복하기 위해 어떤 대안적인 지도력, 노선, 조직이 필요한지 고민하지도 않았다. 다만, 이명박 정권을 탄생시킨 원죄를 감추기라도 하려는 듯, 그 원죄를 사면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도 되는 듯 이명박 정권 반대에 앞장섰다. 그러나 왜 반대하고 무엇을 위해 반대하는 것인가라는, 반대 너머의 것이 없는 공허한 반대였다.

당연하게도 이 대안 없는 반대 혹은 대결은 이명박 정권을 견제하는데 효과적이지 못했다. 아무런 준비도 비전도 없는 이 대결은, 이명박 정권이 간단(間斷)없이 던지는 의제를 뒤따라가며 반MB를 외치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반MB로는 이명박 정권의 독단과 독주를 제어할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민주당이 이렇게 세월을 보내는 사이 민주당에 일말의 기대감을 품고 있었던 시민들은 민주당으로부터 멀어져갔고 민주당에 대해 이런 실망은 ‘이명박 정권이 잘 해주기를 바라는 수 밖에 없다’는 체념적 지지로 나타났다. 말하자면 이대통령의 높은 국정 지지도는 민주당에 대한 실망이 반영된 결과인 것이다. 한마디로 민주당은 집권세력에게 자양분을 제공하는 해당행위를 한 것이나 다름없다.

체념적 지지

그런 민주당이 지방선거를 홀로 치를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민주당이 이같이 지방선거에서 선택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하지도 않고, 자신감도 없을 때 등장한 것이 반MB 연합론이다. 이명박을 반대하는 세력이 무조건 뭉쳐야 한다는 이 담론은 하나의 권력이 되더니 곧 야당이 준수해야 할 규범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뭉쳐야 한다는 절박감으로 출발했던 야당 연합논의는 뭉치면 승리할 수 있다는 낙관론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반MB 연대는 민주당 중심의 무조건 결집으로 왜곡되었다. 민주당이 집권세력을 심판하는 장에서 중심을 차지할 자격과 능력이 있는지, 그럴 준비가 되어 있는지 따져 보아야 했지만, 그런 노력은 민주당 내에서도 민주당 밖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연합은 단순하게 각자의 무게를 합치는 것이 아니라, 민주당의 창조적 혁신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에너지의 폭발이어야 했다. 민주당이 혁신을 통해 반MB 연합을 주도하지 않았다 해도 연합의 과정을 통해 혁신의 계기를 찾았다면, 반MB연합이 단순히 반대에 머물지 않았을 것이고, 그 때문에 진보정당과의 연대도 자극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민주당은 조직과 노선, 정책을 재점검하고 신뢰할 만한 야당으로 거듭나고 이명박 정권에 맞설 야당의 구심으로 자리 잡는 전기를 맞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야당과 일부 시민단체 인사가 야당 연합을 위한 공동 정책 과제를 준비하기는 했지만, 그 것은 그 내용이 빈약할 뿐 더러 형식적인데다 최소 합의주의에 기반한 것이어서 실패한 과거를 성찰하게 하거나 혁신을 자극할 만한 것이 되지 못했다. 대신 단일화를 사후적으로 정당화해주는 기능만 했을 뿐이다. 그 때문에 야당 연합 논의 혹은 후보 단일화 과정에서 민주당이 특별히 잘해 보려 할 이유가 없었다.

민주노동당, 진보정당일 필요 있나

오히려 민주당은 제1야당이라는 기득권을 활용해 내외부의 도전으로부터 견고하게 자신을 지킬 수 있었다. 선거라는 중요하고도 민감한 시점을 맞아 더욱 긴장해야 할 때 민주당이 긴장감을 잃었지만, 시민들은 그런 민주당을 관용했다.

평소 민주당에 대한 반신반의, 민주당으로는 안 된다는 불신과 비관, 비판은 사라졌다. ‘이도 저도 안 되니 민주당이 알아서 잘하는 수 밖에 없다’는 생각 때문이겠지만, 그런 체념은 오히려 민주당을 해방시켰다. 민주당이 변화의 압박에서 벗어나 무엇이든 해도 용서받을 수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게다가 혁신에 실패한 민주당에 대한 정치적 승인도 이루어졌다. 그 역할의 상당 부분을 민주노동당이 담당했다.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이 자기의 존재 의의를 진보성의 구현이 아닌, 반MB의 선명성에서 찾은 나머지 민주당의 후원세력이 되어 민주당 가림막 역할을 했다.

변하기 위해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는데도 민주당에게 진보의 월계관을 씌워준 민주노동당은 반MB의 단순함에 진보적 내용을 채워야 하는 진보정당의 책무를 방기한 것이다. 허약한 민주당에 긴장과 자극을 줌으로써 강한 민주당이 될 기회를 열어 주기 보다 자기 만족과 불감증에서 헤어나지 못하도록 했다. 민주노동당이 반드시 진보정당일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다.

사실 지방선거에서 이겨도 민주당은 이대통령의 상대가 되지는 않는다. 그 때문에 민주당이 반MB를 넘어 MB의 대안이 되려는 꿈을 접고 제1야당의 기득권에 안주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사라지지 않는다.

민주당이 이겨도 이대통령 상대 안돼

선거에서 이긴다 해도 대안이 되지는 못하는 이런 이상한 불균형을 깨는 것, 이 잘못된 판을 뒤 흔드는 것, 이 것이야 말로 이명박 정권 심판의 본질이다. 그런 정치적 진보를 위해서는 노무현 정권, 이명박 정권의 한계를 모두 뛰어 넘어야 한다.

사실 그 것은 어려운 일도,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이명박 정권 지지가 50%를 넘나든다고 하지만 잠재적 다수가 존재한다는 엄연한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최근 일련의 여론 조사에 따르면 이명박 정권 견제론이 안정론보다 많다.

물론 반MB로는 이 잠재적 다수를 조직할 수 없다. 지난 정부의 부정적 유산을 계승한 과거 세력과 실패한 세력의 대결로는 이 다수를 차지할 수 없다. MB와 민주당의 적대적 공존 구조를 깨지 않고는 이 다수를 얻을 수 없다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8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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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처럼 보수정치와 진보정치의 구분이 저마다인 사회도 없지만, 보수정치와 진보정치의 가장 보편적인 구분 지점은 역시 대변하는 계급이다. 보수정치는 부자들의 삶을 대변하고, 진보정치는 서민대중의 삶을 대변한다. 자본주의 사회는 부자들이 지배하는 사회이기에 서민대중의 처지에서 얼마나 살만한 사회인가는 대개 진보정치가 얼마나 센가에 달려 있다. 서민대중의 처지에서 한국이 참으로 나쁜 사회인 이유는 진보정치가 약하기 때문이고, 서유럽이나 북유럽 사회가 한국보다 살만한 사회인 이유는 진보정치가 세기 때문이다.

극우반공독재 정권이 지배하는 동안 진보정치는 아예 씨가 말랐다. 민주주의의 최소한의 절차를 요구하는 김대중씨 같은 보수정치인이 간첩으로 몰리는 판이었으니 그럴밖에. 그런 사회, 즉 제도정치가 서민대중들의 삶을 대변할 수 없는 사회에선 주요한 사회적 변화는 결국 정치권 밖에서 인민들의 직접 행동으로 일어나게 된다. 4·19, 광주민중항쟁, 6월항쟁 등 한국 사회의 변화와 관련한 주요한 국면들이 모두 그랬다.

2000년 1월 민주노동당이 창당함으로써 비로소 한국에도 진보정당이 생겨났다. 그러나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 진보정당(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의석수는 전체 296석 가운데 고작 6석이다. 부자의 삶을 대변하는 290명의 의원과 서민대중의 삶을 대변하는 6명의 의원이 만들어내는 정치가 ‘부자의 무한천국’을 만들어내는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대중들의 사회의식은 갈수록 진전되고 있는데 여전히 진보정치가 이토록 미미한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는 제도정치권 밖의 진보적인 정치세력들이 대거 보수정치로 투항했기 때문이다. 지금 민주당과 국민참여당에 있는 이른바 운동권 출신 정치인들이다. 그들은 적어도 극우정치인들과 비교해서 훨씬 상식적이고 인간적인 사람들이지만 그들의 정치 역시 부자들을 대변한다. 그들의 정권 10년 동안 노동자의 절반이 비정규화하고, 농민은 국가로부터 버려졌고, 삼성은 한국 사회의 절대군주가 되었다.

둘째는 그나마 남은 진보정치의 세를 싹쓸이하는 ‘비판적 지지’라는 것이다. 비판적 지지는 ‘최악을 막기 위한 연대’다. 최악을 막는 일을 누가 마다하겠는가. 그러나 우리가 이성을 가진 인간이라면 어떤 일의 양면을 함께 살필 줄 알아야 한다. 비판적 지지는 최악을 막는 데 도움을 주지만, 동시에 실재하는 진보정치의 씨앗을 보수정치로 흡수하는 진보정치의 미래를 없애버리는 굿판이기도 하다.

이번 지자체 선거에서 최악인가 차악인가, 이를테면 오세훈인가 한명숙인가 혹은 김문수인가 유시민인가는 허투루 볼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서민대중의 삶에서 노회찬과 심상정의 득표율은 최악인가 차악인가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진보후보의 득표율은 그 자체로 진보정치의 세와 힘으로 작동하며 그게 얼마나 느는가에 한국 정치의 미래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당선과 무관한 표는 ‘사표’라거나 비판적 지지를 반대하는 건 근본주의적 태도라는 주장은 매우 현실적으로 느껴지지만 실은 사기다.

그래서 최악이 이겨버리면 어떻게 하냐고? 그거야말로 이미 우리가 잘 아는 문제다. 중앙정치든 지방정치든 그 안에서 도무지 해결이 안 되면 언제든 촛불을 들고 짱돌을 들고 나가면 된다. 나가서 직접민주주의의 뜨거운 맛을 보여주면 된다. 앞서 말했듯 한국의 진짜 정치는 오히려 제도정치권 밖에서 존재했으며 290 대 6의 정치구조를 가진 지금도 그럴 수밖에 없다. 이명박 정권의 패악질을 잠시나마 멈추게 한 건 한명숙도 유시민도 아닌, 촛불을 든 시민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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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10-05-27 0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김규항이 이런 글을 쓰는 사람이었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요즘 심사가 격한가봅니다.

라주미힌 2010-05-27 0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의 진짜 정치는 오히려 제도정치권 밖에서 존재했다"

이런 선거구도에서 그들을 위한 투표는 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늘 들곤 하네요.
 

 [기고] 노회찬-심상정 '외로운 투혼'에 박수 보내는 이유

얼마 전 여의도에서 택시를 탔다. 한나라당 당사 부근에 있는 커피숍으로 가고 있었는데, 편하게 한나라당 당사 앞에 내려달라고 했다. 택시 운전사는 내가 한나라당에 근무하는 줄 알고, 나에게 말을 걸었다.

그의 말인 즉, “지금 구도는 60년대 공화당과 민주당‘의 구도와 같다. 공화당이 아무리 잘못해도 그 지지자들이 민주당으로 이동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민주당이 비젼도 없고 새롭지 않기 때문이다”는 것이었다.

요즘 나는 조금 다르면서도 유사한 분석을 하고 있었다. 단지 한 가지를 덧붙이고 싶었다. 즉 60년대 박정희 정권에 반대하는 저항운동이 가열차게 전개되었다. 예컨대 60년대 중반 한일회담 투쟁 때는 박정희 정권을 붕괴시킬 우려를 자아낼 정도로 발전하기도 했다.

새로운 정치적 리더십이 필요할 때

그러나 60년대에는 민주당이나 신민당(67년에 만들어짐)이나 윤보선 후보가 박정희를 넘어설 수 없었다. 그것은 박정희를 넘어서는 대안적 비전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퇴행적 정당으로 비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정작 반독재 민주화운동은 한단계 비약은 바로 70년대 김대중과 김영삼이 주창했던 ‘40대 기수론’이 나타나면서였다. 박정희를 대체하는 정치적 리더십의 ‘희망’이 보일 때 대중들은 움직이기 시작하고 반독재 민주화운동도 거대한 발전을 해가게 된다. 이렇게 ‘희망으로 발동이 걸린’ 반독재 운동을 수용하기보다는 폭력으로 진압하고자 했기 때문에, 박정희 정권은 무너졌다.

87년 이후 지난 20년 동안 반독재 세력을 대표하여 민주당으로 상징되는 반독재 개혁자유주의 정당이 있었다. 그런데 평가가 어떠하건, 정작 반독재 민주정부를 거치면서 그 정당의 새로움과 비전이 고갈되었고, 자유주의 정당의 단일 리더십이 깨졌다. 그리고 그것을 대체하는 새로운 정치적 리더십이 부재하다는 것이 바로 현단계 한국민주주의의 핵심적인 정체 지점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MB정부 하에서의 고통을 넘어서기 위하여, 자연히 반MB 연합을 위한 노력들이 나타났다. 힘이 부치니 연합해서라도 희망을 만들어보고, 단일 리더십이 없으니 집단 리더십을 가지고라도 MB에 대항해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5+4로 상징되는 반MB 연합 시도는 민주당의 리더십 부재와 민주당 내부의 다양한 이기심들로 인하여 좌초했다. 그렇게 되자 불안이 커지는 시점에서, 국민들은 수도권의 유력 후보들, 예컨대 김진표-유시민의 단일화에 대해서도 반가움을 느꼈고, 결과의 예측 불가능성이 더 해져, 단일화 후보의 지지율이 상승하고 있다.

노회찬・심상정, 전진 보폭 만큼 반MB는 풍부해져

이러한 상황의 반전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내 시각에서 보면, 전 정권의 두 정체성을 상징하는 연합만으로는, 자칫 ‘전 정권 대 현정권’의 대립구도로 갈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친노세력이 부상하면 한나라당이 오히려 승산이 있다고 하는 한나라당 일각의 분석도 고민해보아야 한다.

유시민-김진표의 연합이나, 한명숙과 이상규의 연합만으로는, 한나라당을 압도하기에는 충분히 풍부하지 않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민주당-열린우리당으로 상징되는 부분을 넘는 더욱 높은 수준의 희망을 상징하는 세력이 성장하고 그들이 우뚝 대중들 사이에 서고, 그 기초 위에서 연합을 해야 그때의 반MB가 MB를 넘어설 수 있는 것이다. 현재의 반MB가 국민적인 것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것은, 충분히 새로운 대안적 리더십들이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 이후 보수언론에 의해 과잉 폄훼당했던 참여정부를 국민들이 재평가하고 있지만, 분명 참여정부 하에서 실망한 국민들도 존재한다. 한나라당이나 참여정부가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노동자나 빈민들도 존재한다.

물론 MB정부의 신권위주의에 절망하는 젊은 세대, 그리고 정치 일반에 대해 허무주의적으로 느끼는 젊은 유권자들도 또 따로 존재한다. 이러한 다양한 국민들이 새 정치라고 느낄 수 있어야, MB정부에 실망한 국민들에게 온전한 희망으로 다가갈 수 있다.

노회찬과 심상정의 외로운 투혼에 박수를 보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들이 ‘어려운 완주’를 하건, 완주하지 않고 ‘막판 단일화’를 하건, 그들의 전진의 보폭 만큼, 한국정치의 희망이 자라고 반MB는 풍부해진다. 그들의 어깨에 MB를 넘어서는 희망이 걸려있다고 나는 믿고 있다.

79년과 07년, 한단계 높은 민주주의로 가는 병목지점

약간 구조적인 관점에서 이야기를 해보자. 나는, 한국사회가 아시아의 여러 민주화 국가들과 비교하면 87년 이후 지난 20년 동안 ‘자유민주주의적 개혁’단계를 상대적으로 성공적으로 거쳐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제 한단계 높은 민주주의 단계로 이행하는 병목지점에 도달한 것이다.

돌이켜 보면, 70년대 이후 반독재 민주화운동이 발전해왔지만, 79년 박정희의 죽음이라는 계기가 주어졌을 때, 결국 독재에서 민주주의로 가는 병목지점을 통과하지 못하고, 전두환 정부라고 하는 ‘우회로’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전두환 정부 하에서 국민들이 고통받으면서 반독재 민주화운동과 대중 자신의 거대한 변화가 나타났고, 결국 민주화의 대전환점인 87년 6월 민주항쟁이 도달하였다. 현단계 한국사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사실 노무현 정부 말미에 이미 한단계 높은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병목지점’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그것을 추동하는 대중적 힘이 부족하였고 결국 MB정부라는 ‘우회로’로 접어들었던 것이다. 이제 MB정부 하에서 고통받으면서 진보개혁운동과 대중 자신이 변화하면서 또다른 추동력을 얻어, MB정부를 넘어서야 한다.

포스트-민주화 시대의 두가지 도전

변화와 새로운 도전의 성격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나는 ‘포스트-민주화’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87년 이후 지난 20년간을 ‘민주화’ 시대라고 표현한다면, MB정부 이후 한국사회는 ‘포스트-민주화’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포스트-민주화 체제 하에서는 여전히 많은 민주개혁의 과제-예컨대 보수언론의 개혁 등-가 남겨져 있음으로 해서 ‘(민주)개혁 대 반개혁’의 구도가 일정 측면 유효하게 남아 있지만, 이제는 새로운 대치선을 형성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대치를 현실화하기 위해 두가지 주체적 변화가 실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새로운 정치적 리더십의 출현이다. 앞서 노회찬·심상정의 투혼을 강조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반독재 개혁자유주의세력의 정치적 리더십을 대체하는 더욱 새로운 진보적인 정치적 리더십을 출현시켜야 한다.

아니 87년 6월 민주항쟁에 담겨진 민주주의적 과제를 더욱 급진적으로 해석하고 한단계 높은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리더십을 창출해야 한다. 반독재 민주세력의 정치적 리더십의 소진은 이들이 “독재와 싸우는 데는 선전(善戰)하였으나 결국 세계화의 도전에 선전하지 못한" 데서 주어진다.

즉 반독재 민주정부 시기에 반독재 자유주의세력이 대중들의 민주개혁적 정치요구를 일정하게 실현하였지만, 이른바 신자유주의적 프레임을 수용하고 그 결과로 나타나는 파괴적 현상들-예컨대 양극화와 고용불안정 등-에 급진적인 사회경제정책으로 응전하지 못함으로써 대중들이 이반해 버린 것이다.

이 과정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의 의미로 대중에게는 더 이상 희망의 언어가 아니게 되어버린 것이다. 최장집의 표현을 빈다면, “한국의 민주정부는 급진적 신자유주의의 발전으로 인하여 민주주의의 기반 자체를 허무는 위험지역에 접근”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민주주의 담론을 자신의 정당성의 기반으로 두고 있는 반독재 민주세력(개혁자유주의세력)들의 정치적 주도권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하였고, 이명박 정부의 출현에서 상징되듯 새롭게 보수세력이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는 결과로 나타났다고 생각된다.

최근 ‘연합정치’의 공간은 반독재 개혁자유주의세력이 세계화의 도전 앞에서 좌절했으나, 진보정치세력이 그 리더십을 대체하지 못함으로써 출현한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나는 지난 20년 간의 정치적 리더십을 넘는 새로운 리더십을 진보정치세력이 주도적으로 형성하고 담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우리 모두는 87년 6월 민주항쟁의 견결하고 급진적인 계승자로서 존재해야 한다. 그러나 지난 20년 동안, 혹은 지난 10년 동안 대중들이 좌절하였던 문제들에 대해서 새로운 극복의 희망을 담지하는 세력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않된다. 여기에 지난 민주정부 시기에 더욱 급진적인 입장에 서서 새로운 희망을 만들고자 했던 세력들은 상대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다고 하겠다.

세금폭탄이라는 ‘선동’에 주눅들지 않는 국민

둘째의 과제는 국민들의 진보적 변화가 이루어지도록 진보적 세력들이 아래로부터 노력해야 한다. 이것은 진보적 세력들이 대중적인 기반을 가져가는 과정과 동일한 과정이다. 이를 필자는 ‘대중의 급진화’로 표현한다.

이명박 정부라는 ‘우회로’를 도약의 계기로 만들기 위해, 그리고 한단계 높은 민주주의를 요구하고 담지하기 위해, 대중들 자신이 새롭게 변화해야 하며, 진보세력은 이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예컨대 한단계 높은 민주주의는 ‘증세와 복지확대’를 피해갈 수 없다. 그럴 때 ‘세금 폭탄’이라고 하는 보수언론의 ‘선동’에 주눅들지 않고 과감하게 ‘부유세’를 요구하는 대중이 출현해야 한다.

민주정부 10년에 약간 제도화된 복지에 대해서 보수언론들이 ‘사회주의 정책’이라고 융탄폭격할 때 “또 장난치는군”하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진보세력은 지역 풀뿌리 수준에서, 그리고 보수 일색인 대중들의 생활세계 현장에서까 변화를 도모하기 위해 어려운 ‘하방(下方)적 실천’을 해야 할 것이다.

‘차이 속 연합’의 중요성

마지막으로 나는, 앞으로의 정치연합이나 반MB연합은 '차이 속의 연합'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동안 연합 논의는 사실 대중 앞에 충분히 차이가 드러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MB를 압도할 수 있을 정도의 차이들이 충분히 드러나지 못했고, 민주당이나 국민참여당과 다른 정치세력들이 대중 앞에 부상하고 대중 속에 기반을 갖지 못한 것이 문제이다.

대중들의 좌절된 요구와 이해가 수렴될 수 있는 새로운 ‘차이로 이루어진 희망’을 만들어내야 한다. 나는 진보의 전진을 위해서 반MB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토론회에서 김민웅 선생이 반MB야말로 반신자유주의 투쟁의 핵심적인 구성부분이라고 한 것에 동의한다.

그러나 반MB가 ‘폭력적으로’ 작동해서는 않된다. ‘제2의 6월 항쟁’을 기대한다거나 민주세력이 다시 결집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묻지마식 반MB'에 대해서는 전략적 입장에서도 그리고 실리적 입장에서도 단호하게 반대해야 한다.

서둘러 반MB로 모인다고 그 연합이 대중적 효과를 갖는 것도 아니다. MB가 잘못한다고 우리에게 기회가 오는 것이 아니며(지금도 많이 잘못하고 있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역전의 노장’들이 모인다고 지지가 다시 모아지는 것도 아니다.

결국 차이를 ‘봉합’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들 앞에 민주당이나 국민참여당을 넘는 ‘차이’를 갖는 세력들이 대중적으로 부상하고, 그 바탕 위에서 연합이 이루어져야 MB를 뛰어넘는 새로운 시대가 열릴 수 있다고 나는 믿고 있다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8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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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교수(서울대)는 이번 지방선거를 계기로 진보개혁진영이 추구한 ‘반MB 연대’는 “향후 한국 정치에서 진보·개혁진영 사이의 연합정치는 필수품이 될 것”이며 “연합정부를 전망하는 선거연합전략으로서 한국 정치사상 획기적인 시도”라고 평가했으나, 이 같은 ‘전략이 작동·관철되는 방식과 절차’에 대해서는 ‘유감’이라는 내용의 글을 발표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진보개혁 연합정치는 필수지만

조 교수는 한겨레가 20일 문을 연 오피니언 사이트 ‘훅’(hook, High-Quality Online Opinion in Korea)에 올린 “‘친노냐, 친MB냐’, 그게 다가 아니다”라는 제목의 글에서 이 같이 밝히고 △민주당과 연대를 우선시한 민주노동당의 태도 △공개토론과 검증이 빠진 민주당의 후보 결정 절차 △한명숙, 유시민 등 범야권 후보와 노회찬, 심상정 등 진보신당 후보 사이의 공개토론과 정치협상 실종 등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조 교수는 우선 “노무현 정부 시절 신자유주의 정책, 이라크 파병, 한미 FTA 등으로 정부와 각을 세웠던 민주노동당은 이번 선거에서는 ‘반MB연대’를 당면한 최고의 목표로 설정하면서, 같은 진보정당인 진보신당 보다는 민주당과의 연대를 우선시했다”는 점을 제기했다.

그는 “민주노동당은 당세 확장을 위하여 진보대연합 대신 기초단체장이나 기초의원에서 얻을 지분이라는 실익을 냉정하게 선택”함으로써, “‘김대중·노무현과 이회창 사이의 차이가 한강 샛강이라면, 그들과 나 사이에는 한강 본류가 흐른다’라는 권영길 의원의 공언은 무색해졌다.”고 꼬집었다.

그는 이어 “‘반MB연대’를 위한 제1야당 민주당과의 연대는 필요하다는 점, 정당이 당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비난할 수는 없다는 점을 인정하지만, 그 이전에 뿌리가 같은 진보정당과의 연대가 있어야 했던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가시질 않는다”며 아쉬움을 표했다.

그는 “이번 민주노동당의 결정은 두 진보정당 사이의 이미 존재하는 감정적 앙금을 더욱 짙게 할 것이며, 향후 진보정당의 정체성과 진로에 대한 논쟁을 일으킬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진보정당 사이 앙금 더 짙어질 것"

조 교수는 민주당 경선과 관련해 “한나라당 서울시장 후보 경선과는 달리, 민주당 서울시장 후보 경선이 애초부터 김빠진 맥주 격이었다.”며 “TV 토론과 국민 참여 경선을 요구한 이계안 후보의 요청은 철저하게 외면당했다.”고 지적하고 이는 사실상 ‘전략 공천’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한명숙 후보가 민주당과 국민참여당을 묶을 수 있는 최적의 후보이긴 하나, 전략 공천에 따라 이계안 후보의 탁월한 많은 공약들이 대중들에게 알려질 기회가 상실됐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러한 단일화는 민심의 역동성을 무시하고 여론조사로 정치를 대체해버리는 위험을 낳는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와 함께 “한명숙, 유시민 등 범야권의 주류 단일 후보와 노회찬, 심상정 등 진보신당의 후보 간의 ‘반MB 연대’를 위한 공개토론과 정치협상의 실종”을 지적하고, “‘반MB후보단일화’ 프레임이 야권 내의 모든 논쟁과 토론을 묻어버리면서 진보신당은 고립무원의 상태가 되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이어 “인터넷 서점 알라딘의 종합 HOT 신간 1위를 기록하고 있는 노 후보의 정책 공약집 『노회찬의 약속-2010년 6월』의 내용이나, 경제정의실천연합의 경기도지사 후보 공약평가에서 1위를 차지한 심 후보의 공약은 선거판에서 사라졌다.”며 한명숙, 유시민 후보 측에서 노회찬, 심상정 두 후보에 대해 “음양으로 중도 사퇴하라는 압력을 넣고 있는 듯하다.”고 주장했다.

조 교수는 “당내 경쟁자도 아니고 노선과 정책, 이번 선거에서의 목표가 다른 정당의 후보인데, 그들이 후보와 정책에 대한 상호 검증을 요구하고 완주 의사를 밝히면 바로 ‘분열주의자’ 취급을 받을 수 있는 기묘한 상황”이라며 “야권 후보단일화 프레임의 최대 수혜자인 한 후보 측이나 유 후보 측이 소수의 진보신당 지지표가 필요하다면, 진보신당이 납득할 수 있는 단일화의 방식과 절차를 제시하고 설득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지속가능한 연합정치를 위하여

그는 “연합정치가 성공하려면 소수 정파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존중하고 배려해야 한다."며 "그렇지 않다면 진보신당은 이번 선거에서의 나쁜 성적을 감수하고 2012년과 그 이후를 바라보며 독자의 길을 선택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지방선거에서 이루어진 여러 경험을 토대로 하여 연합정치의 기준과 절차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지 않는다면, 지속가능한 연합정치는 어려워질 것이고 진보·개혁진영은 내부로부터 위기를 맞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조 교수는 “토론과 경쟁이 빠진 진보·개혁진영의 무조건 단결과 여론조사에만 의존한 후보 선정은 소수파 후보에게만 ‘독배’―이계안 후보의 말을 빌자면―를 강요하는 문제를 낳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으로는 진보·개혁진영 전체가 ‘독배’를 마시는 것과 같은 후유증을 일으킬 수 있다.”고 우려했다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8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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