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하는 여성, 나혜석과 후미코
나혜석.하야시 후미코 지음, 안은미 옮김 / 정은문고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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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조선 Vs 제국주의 일본

이 단어의 대조만으로 연상되는 수많은 이미지가 있다. 식민지 조선에는 가난함과 어려움, 고통, 비참함이 따라붙을 것이고, 제국주의 일본에는 부유함, 군국주의, 잔인함 뭐 이런 이미지들이 따라붙을 것이다. 그런데 세상은 항상 그렇듯이 그렇게 간단하게 둘로 나뉘어지지 않는다.


나혜석 Vs 하야시 후미코

이 두 여성은 부자집 마님 나혜석과 노동자집안 출신이고 딱히 부자이지 않은 여성작가 하야시 후미코로 이들의 대비는 관념적이고 일반적인 분류를 뛰어넘는다. 내가 이 책에 이끌렸던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 전혀 다른 분류를 보여주는 기획때문이었다. 나혜석의 여행기는 이미 여러 차례 출판되었지만 딱히 관심이 가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색다른 대비를 통해 보여주는 세계는 단순한 두 사람의 글이 아니라 훨씬 다양한 해석과 생각을 하게 해줄듯하였다. 두 사람의 여행기 자체는 그렇게 뛰어난 글들은 아니다. 나혜석보다는 본격 작가인 하야시 후미코의 글이 훨씬 좋긴하지만 뭐 그렇다고 엄청나게 훌륭한 글이라고 할 수는 없고..... 출판사의 기획이 돋보이는 책이며 식민지 시대를 색다른 시각으로 보고, 하나의 시대를 한 가지 시각이 아니라 다른 시각으로도 볼 수 있는 책이라서 나는 읽으면서 참 좋았다. 


원래도 나혜석이란 인물에 대해서는 좀 복잡한 심경이었다. 뛰어난 여성화가였지만 그 외의 부분에 대해서는 섣불리 판단하기가 어려운 삶이랄까? 여성이기 이전에 사람임을 주장한 여성 페미니스트로 이야기되기도 하지만 지금 봐도 너무 독특한 그녀의 주장들과 삶을 따라가다보면 무조건 공감하기에는 거리가 너무 느껴지는 그런 여성이다. 그녀의 여행기 역시 마찬가지이다. 1920년대에 여성이 그것도 결혼을 해서 아이가 셋이나 있던 여성이 시어머니에게 아이들을 모두 맡기고 무려 20개월동안 세계 일주를 한다. 이 말만 들었을 때 나혜석이 얼마나 대단해보였던가말이다. 그런데 그녀의 여행기를 읽다보면 점점 실망하게 되는 것은 무엇때문일까?


수원의 명문가 참판댁 애기씨로 태어나서 그래도 당시로서는 진보적이었던 아버지덕분에 딸이지만 신교육을 받았고, 일본 유학까지 마치고 변호사인 김우영과 결혼해 부자집 마나님이 된 여성, 그리고 화가로서도 성공하여 이름을 떨치던 여성의 세계 일주는 혼자서 간 여행이 아니었다. 만주지역의 부영사를 지냈던 남편이(이 시대 이 정도 직위면 적극적인가 소극적인가의 차이일뿐 친일파로 분류하는 것은 당연할 듯하고....) 힘든 지역의 관리를 6년간이나 지냈다고 일본 정부로부터 포상휴가를 받는다. 포상휴가가 20개월이나 되지는 않았겠지만 아마도 그 포상휴가에 본인들의 돈도 꽤 보태져서 여행이 길어졌을 것이다. 남편과 함께 한 여행에서 이 두 사람은 유명 인사다. 부산에서 출발한 이들은 조선 땅을 벗어나기 전까지는 곳곳에서 마중나온 수십명의 환영인파를 만나고, 극진한 대접을 받는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난 이후에도 일등칸에서 항상 상류층들과 어울리고, 유럽이나 미국지역에 도착해서도 현지에서는 항상 먼저 이곳에 유학을 온 이든 누구든 이들을 맞이하며 온갖 도움을 주는 그런 여행인 것이다. 미국을 거쳐 조선으로 돌아올때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호화유람선 여행까지 정말 아주 럭셔리한 여행이다. 여행이란 원래 자신이 보고싶은 것만 보는 법이다. 여행이 다른 생각을 갖게 하고 세상의 다른 면을 보게 하려면 여행자 자신의 치열한 고민이 전제되어야 하는 법이다. 이 시대의 나혜석에게 그런 고민의 흔적을 기대하는 것은 어렵겠구나 하는 생각을 더더욱 하게 된다. 그녀의 여행기를 읽는건 마치 여행가이드북의 지역 소개를 읽는 느낌이다. 


반면 하야시 후미코의 여행은 자신이 쓰는 돈을 하나씩 하나씩 일일이 기록하며 아껴가며 삼등석 열차를 타고 배 역시 가장 낮은 등급의 방에 묵으며 항해하는 여행이다. 그곳에서 온갖 나라의 온갖 인물을 만나지만 모두 자신과 비슷한 가난한 이들이다. 하지만 여행의 이야기는 원래 이런 칸에서 나오는 법이다. 말이 통하지 않는 속에서도 삼등열차속에서 부대끼며 가다 보면 친해지지 않을 수 없고 그속에서 사람냄새 나는 이야기들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후미코의 시선은 제국주의 일본의 시선보다는 자신의 출신 계급인 노동계급에 더 많이 가 있다. 그래서 러시아 땅을 지나면서는 사회주희 혁명 후의 러시아가 일본의 사회주의자들이 동경하던 그 땅의 현실과 많이 달라보이는 모습을 꼼꼼히 관찰한다. 나혜석처럼 온갖 여행지를 가기보다는 (그러기에는 돈이 없어서) 한 곳에 머물며 사람을 만나고 그들의 사는 모습을 관찰하고 기록한다. 그래서 글을 읽는 재미는 오히려 하야시 후키코의 글이 더 있으며, 심지어 공감이 더 가는 쪽도 하야시 후미코쪽이 되어 버린다. 


아 정말 민족보다는 계급인가? 피는 물보다 안 진하다. 


여행기 중 흥미있었던 대목이 있는데 나혜석이 그들이 부영사로 살았던 만주 단둥현에 도착했을 때의 소감과 하야시 후미코가 만주 창춘에 도착했을 때의 글이다.

 

만주 거주 동포의 경제 발전은 오직 금융기관에 있다는 견해 아래 단둥에 조선인금융회가 설립된 후 이내 단둥에 사는 조선인 금융계의 중심 기관이 되어 그 전도유망함이 우리 눈에 보일 때 한없이 기뻤다. 

총독부와 만철(남만주철도 주식회사)에 교섭한 결과 수백여 명 학생을 수용할 만한 보통학교가 건설되고 이번에 만철 경영이 되어 직원 모두 얼굴에 기쁜 빛이 가득한 모습을 볼 때, 어찌 만족이 없으랴  - 21쪽


1931년 11월 12일 밤, 창춘 도착, 입김이 하얗게 서릴 뿐 눈은 아직 내리지 않는다. 지난해 빈손으로 왔을 때와 달리 트렁크가 네 개나 있는 데다 역 안이 병사들로 가득했기에 한가로이 짐꾼을 부르고 자시고 할 형편이 아니었다. 나는 번쩍이는 검을 꽂은 소총이 숲속 나무처럼 죽 늘어선 일본군 사이를 뚫고 가까스로 어스레한 대합실에 들어갔다. - 149쪽


약간의 시기 차이는 있지만 만철이 일본의 만주침략의 교두보라는 것을 외면하는 나혜석의 모습

그리고 만주사변 직후 만주를 지나면서 일본의 침략을 똑같이 두려워하는 눈으로 지나가는 후미코의 모습이 대비된다.

이런 문장들은 그다지 많지 않지만 비교하면서 당시 조선인과 일본인이 자신이 처한 입장에 따라서도 우리의 예상과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을 찾아 보는 것이 또한 이 책의 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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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3-04-01 11: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렇치않아도 이번 주 벌거벗은 한국사에서 나혜석을 다뤘는데 아쉬운 건 제가 보다가 잠이 들었다는 거죠. ㅋ 눈뜨니까 무슨 선전만 잔뜩..ㅠ 암튼 행려병자가 되어 죽지않았습니까? 너무 곧으면 휘어진다고 나혜석은 시대를 거부하고 싶었나 보죠. 근데 참 두 여인이 대조적이긴 하네요.

바람돌이 2023-04-01 22:21   좋아요 2 | URL
아 그랬군요. 뭐 요즘은 놓쳐도 유튜브에 다 올라오니까 살짝 아쉽긴 해도 다시 볼수 있잖아요. ^^
나혜석은 저는 시대를 앞서간 예술가이자 페미니스트이기도 하지만, 사실상 그의 생을 돌아보면 그런 면보다는 또 지극히 개인적이고 과격할정도로 자기 중심적인 면이 많이 보이더라구요. 저는 그게 어쩌면 귀하게 자라서 귀하게 살았던 삶의 영향이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구요. 자신의 불륜으로 이혼을 함으로써 모든 가족들에게 버림을 받는데 이게 또 가족들의 입장에서는 좀 징글맞다 싶을 정도이기도 해요. 불륜과 이혼만이 문제가 된건 아니거든요. 어쨌든 아주 복잡한 인물인것만은 틀림이 없어서 이 인물에 대해서 공부를 좀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더라구요.
오히려 평범해서 제가 친숙하게 여겨지는 인물은 일본인인 후미코더라구요. ^^

blueyonder 2023-04-01 15: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읽었습니다. 덕분에 잘 모르던 새로운 정보를 알게 되어 감사합니다. ˝피는 물보다 안 진하다.˝라는 말씀이 인상 깊습니다~

바람돌이 2023-04-01 22:22   좋아요 2 | URL
에고 딱히 큰 뜻을 담은 말은 아닌데 인상적이셨다니 갑자기 부끄럽네요. 허접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희선 2023-04-02 23: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느 나라 사람인지 다르기도 하겠지만, 부자인지 가난한지로 다르게 생각하기도 하겠습니다 어디에 있든 다 볼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게 쉬운 건 아닐 것 같습니다


희선

바람돌이 2023-04-03 10:11   좋아요 1 | URL
이런 글을 볼때마다 사람이란 얼마나 다양한지, 그리고 그걸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생각도 얼마나 다양한지를 생각하게 되네요. 그래서 저는 이런 책이 참 좋아요. ^^

공쟝쟝 2023-04-04 12:0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바람돌이님이 진심으로 걱정됩니다! 일단 일본여성 편을 드셨으니 친일파 이십니다. 거기다가 민족보다 계급이라니요! 빨갱이이십니다. 그 뿐입니까? 이건 여성주의자들이 기획한 책임이 틀림없습니다. 친일파 빨갱이보다 더 괴랄한 페미니스트!!! 바람돌이님의 똑똑함과 명석함이 너무도 걱정되어 댓글을 답니다! 좋은 거 많이 보고 맛난 거 많이 드십시오.

바람돌이 2023-04-04 14:38   좋아요 2 | URL
친일파빨갱이페미니스트라니 이건 뭐 대한민국 땅 정도가 아니라 지구를 떠나야 할 수준인데..... 어떡해요. 나 어디서 살아???? ㅠ.ㅠ
일단 살수 있을 때까지 무조건 빌붙어보겠어요. 지금 먹는 한끼가 마지막이다 생각하고 무조건 많이 먹는것부터 시작하는 걸로..... ㅎㅎ
 

1931년 11월 12일 밤, 창춘 도착. 입김이 하얗게 서릴 뿐 눈은 아직 내리지 않는다. 지난해 빈손으로 왔을 때와 달리 트렁크가 네 개나 있는 데다 역 안이 병사들로 가득했기에 한가로이 짐꾼을 부르고 자시고 할 형편이 아니었다. 나는 번쩍이는검을 꽂은 소총이 숲속 나무처럼 죽 늘어선 일본군 사이를 뚫고 가까스로 어스레한 대합실에 들어갔다.  - P149

창에 이마를 대고 자작나무가 눈보라에 부러질 듯 비틀비틀하는 숲을 바라보는 내게 페름 군이 탱고 한 구절을 불러준다. 어찌하여 러시아인은 이토록 노래를사랑하는 걸까. 차라리 이 사람의 아내가 되어 페름에서 내려버릴까 하는 자포자기 심정에 잠시 빠졌지만, 여하튼 말이 통하지 않는 데다 60센티미터 남짓 키 차이가 나서 단념했다.  - P160

자작나무 장작을 가득 실은 삼두마차가 달려가고 눈이 물보라처럼 사방으로 흩어진다. 유리를 포갠 듯 눈길이 반짝이고 기차 소리에 나무 위 눈 덩어리가 도깨비불인 양톡 떨어진다. 정말이지 차창 너머 설경은 일생 잊지 못할 추억이다. 일본에 돌아가 8 전짜리 가락국수를 먹는 것도 나쁘지는않지만 달려, 달려, 기차여! 눈물을 참을 길 없네, 어이, 아직도여긴 시베리아 한복판일세. 혼잣말을 해보며 이중창문 밖을싫증도 안 내고 바라봤다. - P171

언어가 통하지 않은 탓일까, 참으로 불가사의했다. 왜냐하면 내 눈에 들어온 러시아는 일본에서 알던 러시아와 크게 달랐기 때문이다. 일본의 무산자들이 연모하는 러시아가 이런곳이었던가! 일본의 노동자 농민은 도대체 러시아의 무엇을 동경하는 걸까? 그럼에도 러시아는, 프롤레타리아는 변함없이프롤레타리아다. 그리고 어느 나라든 죄다 특권자는 역시 특권자다. 3루블짜리 기차 식당에는 군인과 인텔리풍 사람이 대다수였다. 복도에 서서 잠을 청하는 사람들 중에 군인이나 인텔리는 한 명도 없었다. 대부분이 노동자의 모습이었다. - P174

300 프랑은 가구를 포함한 가격으로, 그 가구란 것이 상당히 보잘것없다. 옷장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한 목재 품질을 뽐내고 두 개 있는 의자는 너무 높아 어떻게 앉아도 발이그네를 타고 만다. 때때로 배꼽 빠지도록 웃기에 딱 맞는 의자랄까. 이 의자에서 즐겁게 일할 수 있다면 어떠한 야심을 품지않아도 그만. 자지러지게 웃고 또 자지러지게 웃으며 죽음을 맞이할 때 제격이겠다. - P189

그녀가 조만간 에펠탑에 데려다준다길래 에펠탑에 올라가도 별로 재미있지 않을 것 같다고 했더니 "밑에서 바람이불어 올라와서 얼마나 기분이 좋은데"란다. 파리는 가벼운 곳이다. 그녀는 품위 없는 곳만 바라본다. 누군가는 눈살을 찌푸릴지 모르지만, 나는 불우하기에 품위 있는 곳과 인연이 없다. - P196

돈으로 당신의 나라에 가보는 거야." 이것이 열일곱 살의 꿈으로 내가 결혼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니 문명이 이토록 우리 젊은이들을 즐겁게 해주기 때문에 서두를 필요는 없단다.
"남자 친구는 많이 있나요?"라고 묻자 "남자든 여자든 친구는많죠"라며 뽐냈다. - P214

사람에게는 아주 다양한 모습이 있나 보다. 피아노 뚜껑을 열고 일직선으로 손가락을 힘차게 달려보지만 지금의 내 마음과 닮은소리를 내주지 않는다. 우물 밑바닥으로 돌을 던지는 듯한 소리다. 가벼운, 바람 부는 소리는 이 세상에 없는 걸까? 나는 있는 힘껏 피아노를 경멸하기로 한다.  - P238

세계대전이후 대체 어디에 평화가 왔나? 각국의 인민은 녹초가 됐다.
유럽을 걸어보면 지금도 베르됭의 피비린내가 난다. 발 없는남자, 한 손 없는 남자, 한쪽 눈 없는 남자, 이런 베르됭의 유물이 무얼 하고 있냐면 대개 샌드위치맨이거나 걸인 또는 비올라켜는 광대다. 과거 인기가 높던 어느 인간의 말로, 그 모습의 사람들이 유럽 각국에서 우글거리며 배출구를 찾고 있다. - P240

삼등실도 이렇게 더운데 기계실 화부나 석탄 운반부, 요리사들은 오죽 숨 막힐까? 다행히도 우리 삼등실 손님들은 일등실 손님처럼 일일이 예의를 갖춰 식당에 갈 필요가 없다.  - P262

베르됭의 망막한 광야에 서 있는 전투 기념비를 본나는 동양의 베르됭, 만주 하늘이 떠올라 몸과 마음에 무언가스며드는 기분이었다. - P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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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대를 살았다고 모두 비슷한 삶을 살지 않는다. 제국에서 태어난 사람과 식민지에서 태어난 사람이 꼭 제국인다운 삶,
식민지인다운 삶을 살지 않는다. 이 책은 여행이란 남성만이 누리던 시절, 민족과 계급이 다른 두 여성의 여행 기록이다. ‘여성‘은한일 근대기에 형성된 하나의 계급이었다. 나혜석의 젠더로서의고민, 하야시 후미코의 프롤레타리아 여성이 처한 냉엄한 현실 고민은 여행기 곳곳에서 드러난다.  - P9

극장 경영을 하려면 근본 문제 즉 조선 부녀 생활을급선무로 개량할 필요가 있다고, 실로 여자 생활에 여유가 없는 사회에서 오락 시설은 번영할 수 없다. - P26

나는 언제든지 좋은 구경 많이 한 사람과 다니는 것보다 도무지 구경 못 한 사람과 다니는 것을 좋아한다. 그 사람이 좋아하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 퍽 유쾌하다. - P27

출발과 동시에 갑판 위에서 관현악곡이 울린다.
태양빛이 흐르는 호수 위에 둥실둥실 떠서 음악 소리에 몸이싸였을 때, 아! 행복스러운 운명에 감사를 아니 드릴 수 없었고 삶에 허덕이는 고국 동포가 불쌍했다. - P44

스위스는 어느 곳을 막론하고 경색이 좋지 않은 곳이 없다.
스위스 전체가 명승지이다. 그림으로 그릴 만한 곳이 무진장이었다. 스위스에 누구든지 구경을 가시거든 숙소를 정하지 말고배낭 하나 짊어지고 가시는 것이 좋을 듯하다. 이것이 스위스를 알기에 제일 상책이다. - P50

 우리 것은 무엇이든지 부끄럽지 않은 것이 없으나 작은 나라 국민 정황을 비교 안 할 수 없다.  - P51

1907년원문은 1918년 헤이그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 출석한 이준 씨가 당회 석상에서 분에 못 이겨 돌아가신 곳이다.
이상한 고동이 생기며 그의 외로운 넋이 우리를 만나 눈물을머금은 것 같았다. 그의 산소를 물었으나 아는 이가 없어 찾지못하고 다만 경성에 계신 그의 부인과 딸에게 그림엽서를 기념으로 보냈을뿐이다. - P80

원래 프랑스는 중앙 집권 나라로 온 나라의 번화한 문명이집중된 파리를 제외하고는 국내 변변한 도시가 없다. 파리에서한 발만 내놓으면 빈약하고 살풍경하니 건전한 문명, 건전한국가라고 말할 수 없다. 오직 물가가 싸고 인심이 평등하고 자유로우며 시설이 화려해 모여드는 외국인의 향락장이다. - P87

다이요마루호 일등실 설비와 그 생활이다. 실내는 좌우 대립으로 침대가 두 개 놓여 있다. 여자승무원, 남자 승무원이있어 여자는 걸, 남자는 보이다. 목욕은 매일 아침 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커피를 마시고 아침밥을 먹는다. 갑판에서 놀고있으면 차를 들고 온다. -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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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있을 때는세심하고도 온전하게 나에게만 집중해주었기에 그가옆에 없을 때도 박탈감이나 소유욕을 느끼지 않았다.
난생처음으로 연인이 나와 함께 있지 않을 때 무엇을하는지가 관심 밖의 일이 되었다. 실로 그가 어디서 무얼하건 내 알 바 아니었다. 그건 해볼 만한 경험이었다. - P267

새벽 네 시에 일어나 책상에 앉아선 일기와 책장을바라보았다. 내가 일하는 장소의 질서정연함을 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엄마는 사랑이라는 신전을 숭배했지만평생 돌려받은 건 권태였어. 사랑이 준 건 죽은경품이었어. - P273

"아, 그렇구나. 그럼 그렇지." 하지만 여전히 뭔가 할말이 있는 것처럼 서 있었다. 그리고내팔에 손을 얹었다.
"결혼하지 마라." 그러더니 복도 쪽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 P284

엄마와 네티는 나를 느슨하게 안고 있다. 그렇다. 그들은웃음을 띤 채 나에게 팔을 감고 있다. 창백한 빛 속에서나에게 말한다. 사랑을 해야만 해 - P298

우리는 말없이 앉아 있다. 우리는 끈끈하게 얽힌 혈육이아니다. 살면서 놓친 그 모든 것과 연기 같은 인생을 그저바라보는 두 여자다. 엄마는 젊어 보이지도 늙어 보이지도않고 그저 당신이 목도하고 있는 바, 그 혹독한 진실에깊이 침윤되어 있다. 엄마한테 내가 어떻게 보일지는 나도모른다. - P301

엄마는 나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엄마는 여든이다.
눈은 흐려졌고 머리는 하얗게 셌다. 몸은 마르고 허약하다.
엄마는 차 한 모금 마시고 컵을 내려놓더니 조곤조곤말한다. "뭐라고 하긴 지옥으로 꺼지라고 했겠지." - P301

내 생각엔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상대에게무엇을 원하는지에만 골몰하는 대신 더도 덜도 말고 딱1분이라도 그저 이 세상에 함께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관심을 기울일 수 있게 됐을 정도로 그 긴긴 세월을살아남았다는 사실에 우리 두 사람 다 감격하는 듯하다. - P311

그러다 조화를 잃어버릴 때면 사랑도 연대도 없이, 실패와박탈감에 산 채로 매장당한 기분에 빠진다. 우정은불완전하고, 고민은 나를 잠식하며, 일은 내 무능력의총체적 결과다. - P314

엄마는 애원하듯 말한다. "엄마한테는사랑밖에 없었잖아. 내가 뭘 가져봤겠니. 아무것도 없었어.
아무것도, 달리 뭘 가질 수 있었겠니? 네가 인생 얘기하는거 다 옳지 다 맞는 말이야. 너한테는 일이 있었잖아.
너만의 일이 있잖아. 너는 여행도 많이 했고, 세상에나,
여행이라니! 넌 지구 반 바퀴는 돌아봤지. 난 여행은 꿈도못 꿔봤는데! 나한테는 네 아빠 사랑밖에 없었어. 인생살면서 누릴 게 그것밖에 없었다고. 그래서 그 사랑을사랑했다. 아니면 뭘 어쩔 수 있었겠니?" - P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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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또한 우리 사이에선그림자와 같았다. 관리인과 그의 아내도 말수가 적었다.
누구에게도 먼저 말 거는 법이 없었다. 아마도 이건 다수안에서 소수가 살아남는 방식일 것이다. 소수자는 저절로침묵하게 된다. - P18

엄마는 여기 아닌다른 세상, 진짜 세상이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가끔은당신이 그 세상을 원한다고 생각했다. 아주 열렬하고절실하게. 엄마는 집안일에 열중하다가도 갑자기 모든동작을 일제히 멈추고, 한없이 길게 느껴지는 몇 분 동안싱크대를 바닥을, 스토브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런데그 세상이 어디 있는데? 어떻게 가야 하는데? 그게 대체뭔데? - P25

엄마가 묻는다. "나한테 뭘 원하는 거냐고 말을 해." 승려가엄마에게 말한다. 엄만 그 사람 말을 듣는다. 그러더니어깨를 쫙 펴서 157센티 정도 되는 키를 최대한 키운 다음대꾸한다. "이봐요, 젊은 양반 난 유대인이고 사회주의자야. 사람이 한평생 그 두 가지 사상만 감당하기도 보거워. 무슨 말인지 알겠소?" - P49

우린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게 자기만의 세상에서고립된 채 살아온 사람들, 평생 서로의 생활 반경에서벗어나지 못해 닮아버린 두 여자다.
이런 순간엔 우리가모녀라는 게 마치 외계인이 전달한 메모처럼 충격적으로다가오기도 한다. 우리는 엄마와 딸이 맞고, 거울처럼서로를 반영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혈연이니 효도니하는 단어는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반대로가족이라는 개념, 우리가 가족이라는 사실, 가족의삶이라는 것 모두 해석이 불가능한 세계처럼 느껴지기시작한다.  - P72

우리는 69번가에 도착해 골목을 돌아 헌터대학교 강당입구까지 걸어간다. 문은 열려 있다. 안에선 이삼백 명의유대인이 말로 다 할 수 없는 참혹한 역사를 증언하는기념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역사의 증언은 그들을하나로 이어주는 끈과도 같다. 그들은 끊임없이 과거를되새기면서 스스로를 납득시킨다. 치유받고 공감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와 인생을 어떻게든 이치에 맞게끼워 맞추면서 수긍하려고 한다.  - P73

"사람들은 각자 자기 삶을 살 권리가 있지." 엄마는나직하게 말한다. - P95

엄마의 물러섬 없는 악착스런 고통 전시에 비하면 모두지나가는 배경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 P103

 엄마는 아빠의 죽음에서회복되지 않기로 결심하면서 부엌일하던 시절에는가져본 적 없던 당신의 타고난 진지함을 발견했다.  - P118

아빠를 애도하는 일은 엄마의 직분, 엄마의 정체성,
엄마의 페르소나가 되었다. 몇 년 후에 나는 우리 모두가깊이 몸담았던 정치사상(마르크스주의와 공산주의의여러 국면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는데, 내가 만난 배관공제빵사 재봉사 들이 본인을 사상가 시인 학자로 여긴다는사실을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남과 다른사람들, 공산당원이었기 때문이다. 엄마도 당신의 과부처지를 그와 같은 방식으로 여긴 건 아닌가 생각한다.
엄마가 볼 때 당신은 남편을 잃었기에 더 차원 높은인간, 정신적으로 우월한 사람이 되었고 감정은 더욱심오해졌으며 수사는 더 풍부해졌다.  - P118

나는 엄마로 뒤덮여 있었다. 엄마는 어디에나있다. 내 위아래에 있고 내 바깥에 있고 나를 뒤집어봐도있다. 엄마의 영향력은 마치 피부조직의 막처럼 내콧구멍에, 내 눈꺼풀에, 내 입술에 들러붙어 있다. 숨을 쉴때마다 엄마를 내 안에 들였다.  - P123

"나도 모르지. 우리 딸이 똑똑하다는 것만 알지. 교육받을 자격 있다마다. 교육받을 거야. 여긴 미국이라고.
여자들이 들판에서 짝지을 수소나 기다리는 젖소가 아니라니까."  - P165

우리는 모두 생긴 대로, 자기 욕구에 따라살 뿐이다. 네티는 유혹하고 싶어했고 엄마는 고통받고싶어했다. 나는 책을 읽고 싶었다. 우리 셋 중 어느 누구도스스로를 잘 다스리고 절제하여 이상적이고 정상적인여자의 삶을 성공적으로 추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기실 우리 셋 중 어느 누구도 그 삶을 성취하지 못했다. - P176

엄마는 당신의 악착스러운불행이 어떤 면에서 상대방에 대한 비하이고 판단이라는사실을 읽지 못한다. 마치 한탄하며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너? 너로는 부족해. 너는 나한테 평안과 기쁨을 줄 수없고 이 상태를 개선해줄 수도 없어. 그래도 내가 가장사랑하는 사람이긴 해. 그러니까 너에게 주어진 의무는이해를 해야지. 내 이 모든 절망과 박탈감을 치료해주기에너는 턱없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걸 매일 깨닫고 사는 게네 운명이야." - P195

한번은 무려 한 시간 반이나 걸려서 여성 잡지에 나온레시피를 따라 최악의 캐서롤(다양한 재료를 넓은 용기에 넣고오븐에 구워 내놓는 음식을 만들었다. 그걸 둘이서 10분만에대강 먹어치웠고, 난장판이 된 부엌을 한 시간 동안 치운건 나였다. 싱크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이렇게 생각한순간을 기억한다. 앞으로 40년을 이렇게 살아야 되는건가? - P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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