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금을 통틀어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삶의 의미. 그 삶이 고통이라도, 거기에 의미가 있고 목적이 있다면 사람은 어떻게든 견뎌낸다. 그리고 그러한 경험이 오래 지속되면 고통을 견뎌내는 것 자체가삶의 의미가 된다. 삶의 의미를 고통에서 벗어나거나더 건강하고 자학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찾을 능력과자원은 이미 고통을 견디는 데 소모되어 사라진다. - P31

그 어떤 환희나 쾌락도 오로지 감각하는 사람 자신만의 것이며 고통과 괴로움도 마찬가지다. 자신의육체가 경험하는 감각과 사고를 언어 혹은 다른 방식으로 타인에게 전달할 수는 있으니 인간은 오랫동안그렇게 전달하고 소통하고 공유하려 애썼으나 그 어떤 표현의 방식도 결국은 불충분하다. 완전한 의사소통의 방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태어난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신체 안에 고립되어 있기때문이다. - P128

고통에 초월적인 의미는 없으며 고통은 구원이 될 수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무의미한 고통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생존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삶을 이어나가기 위해서 인간은 의미와 구원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 P285

물리적으로 감각하는 모든 정보를 신체가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알지 못할때 마음은 그것을 고통이라 정의했다. 그러므로 기쁨도, 환희도, 초월도, 아마 구원조차도, 인간이 이해하고 해석하고 받아들일 수 없을 때는 모두 고통이었다. - P291

고통의 탐색에 매몰되면 결국 과거의 고통을 끊임없이 되돌아보아야 했다. 그러다 보면 어떻게든 벗어나려 했던 그 고통으로 돌아가 결국 다시 그 속에서 살아가야 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과거에 발목을 잡히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던져야 할 질문들을 모두 던지고 나면 같은 질문에 더 이상 머무르지 말아야 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 P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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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해서 이 예술가들이 열대를 자신들의 문명과 동일한 선상에 놓았던 것은 아니었다. 문명과 야만의 근대적 이분법에서 원시적 이상향이었던 열대는 야만으로 취급받았고, 그들은 이를 ‘고귀한야만 noble savage" 5 이라는 이율배반적인 명칭으로 개념화했을 뿐이다. - P32

결국 열대우림이 제거되는 이유가 우리의 일상생활과 연결되어있다는 엄연한 사실에 비추어본다면, 바로 우리가 열대우림을 갉아먹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 연결고리는 질기다. 웅장하고 아름다운 열대의 자연환경, 그것을 보러 가는 길에 개발로 훼손되고 있는 심각한 지구촌의 문제 또한 어쩔 수 없이 맞닥뜨리게 된다.
열대 여행은 그렇게 우리를 즐겁고도 우울하게 만든다. - P105

당시 전 세계를 누비고 다녔던 영국의 탐험가들은 자신들이 첫발을 내디딘 주요 지점마다 빅토리아 폭포, 빅토리아섬, 빅토리아항 등빅토리아라는 지명을 붙여놓았다. 나는 식민제국주의 시대에 굴러들어온 이러한 지명들이 원래대로 복원되기를 바란다. 예를 하나 더들면, 세계 3대 폭포 중 하나라고 알려진 잠베지강 중류의 빅토리아폭포를 원주민들은 ‘모시-오야 - 둔야Mosi-oa-Tunya‘라고 불렀는데 이는 ‘천둥 치는 연기‘라는 뜻이다. 이곳에 와본 적도 없는 영국 여왕의이름보다 훨씬 실감나는 멋진 이름이 아닌가! - P137

열대의 고산지대는 과거 유럽 식민지배 세력들에게 대단히 매력적인 곳이었다. 저지대의 덥고 습한 열대 기후가 유럽인들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환경이었던 데 반해 고지대의 상춘 기후는 그들이 활동하기에 알맞은 환경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열대의 저지대에원주민들이 밀집한 전통토착도시를 초기 식민통치의 행정중심지로삼았던 유럽인들은 점차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휴식과 위락을 위한휴양도시를 고산지대에 건설하게 된다. 온화한 환경을 지닌 이러한도시를 ‘힐스테이션hill station‘이라 한다. 특히 저지대 전통 토착 행정중심지의 우기가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덥고 습해지면 그 기간 동안일시적으로 도시행정 기능을 아예 힐스테이션으로 옮겨 일종의 계절 수도를 운영하기도 했다.  - P185

이곳의 울창한 열대우림은 또한 유럽 세력들이 신대륙 식민화를거의 끝내는 17세기까지도 마야 문명이 완전히 정복되지 않고 존속할 수 있었던 지리적 배경이 되었다. 즉, 이곳 유카탄 반도는 비록기복이 별로 없는 평평한 땅임에도 열대우림으로 뒤덮여 정복하기어려운 매우 낯설고 힘든 싸움터였던 것이다. 스페인 식민세력은 자신들의 터전인 이베리아 반도의 고원 환경에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유카탄을 제외한 멕시코의 고원지역은 쉽게 정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곳 유카탄의 열대우림은 무지의 땅, 고난의 땅이었을것이다. - P206

인류의 아름다운 자산을 여행을 통해 감상하고픈 욕망 자체는 지극히 당연하다. 다만 그것을 편리한 방법으로 편안하게 즐길 것이나, 아니면 다소 불편하더라도 고된 여정을 참아가며즐길 것이냐의 차이가 있다. 지구 환경의 파괴가 우리 미래의 삶을위협한다는 현실 앞에서 나는 기꺼이 후자를 선택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 P207

세계사 시간에 인류가 미개 - 야만 - 문명의 단계를 거쳐 ‘발전‘을 해왔다고 배웠고, 이러한 단계를 도구 활용 기술의 변화와 연결해석기 - 청동기 - 철기 시대가 순차적으로 이어져왔다고 배웠다. 19세기 사회진화론에 뿌리를 둔 이러한 사고는 문명이곧 발전이고, 발전은 곧 행복을 가져다주는 긍정적인 변화임을 은연중에 우리 머릿속에 각인시켰다. - P230

여행지의 자연과 문화는 서구의, 혹은 한국 사회의 관점이 아닌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 각각의 삶터에서 살아가는 그곳 사람들은 자신들의 자연과 문화의 세게 속에서 가장 바람직한 형태로 적응하며 행복한 삶을 향해 분투하고 있다. 그들과 내삶을 비교해 생각해보되 내 기준으로 타인의 행복을 함부로 재단해서는 안 된다. 각 지역의 지리적 맥락은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고, 그에 적응하며 가장 합리적으로 형성된 그곳 사람들의 삶의 방식 또한제각각인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 P237

지금의 남아프리카공화국 영토 내에서는 백인들 중 보어인이 수적인 우위가 계속 유지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정치적 주도권을 잡게된다. 그리고 이들의 극우적 정치력은 진정한 선주민인 80퍼센트의흑인 코이산족)들을 향한 차별정책으로 이어졌다. 아파르트헤이트(흑인격리정책 같은 지독한 흑인 차별정책은 1994년 공식적으로 사라졌지만, 부유한 백인들이 사는 주택 단지의 담장 위에 설치된 전기 철조망처럼 그 흔적은 여전히 곳곳에 남아 여행자의 시선을 잡아끈다. - P277

싱가포르는 작은 면적의 섬 위에 자리 잡은 도시국가다. 그런데 경제력이 커지면 땅에 대한 수요 또한 커질 수밖에 없으므로 이 문제는싱가포르가 당면한 가장 큰 문제다. 기발함이 넘쳐나는 싱가포르는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왔을까? - P309

표류를 통해 남방 열대지역을 가장 길게 경험하고 그 기록을 가장상세하게 남긴 사람은 아마도 우이도(소흑산도홍어 중계상 문순득이아닐까 싶다. 흑산도 일대에서 홍어를 사서 나주 영산포로 싣고 가서파는 일을 했던 그는 1802년 1월 풍랑을 만나 표류 끝에 유구국(오키나와에 도착한다. 여기서 8개월을 체류한 후 중국으로 가는 조공선을 타지만 또다시 표류해 이번에는 더 남쪽으로 여송국(필리핀 루손섬)에 도착한다. 여기서는 9개월 체류한 후 마카오 상선을 얻어타고마카오에 도착한다. 이후 육로로 중국을 가로질러 북경을 거쳐 한양에, 그리고 마침내 1805 년 1월 고향 우이도에 도착한다.
그런데 그 당시 우이도에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실학자, 정약전이 유배생활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운명과도 같은 만남을 통해문순득의 파란만장한 3년 2개월의 여정이 <표해시말>로 기록되어 전해지게 된다
- P327

문순득의 탁월한 외국어 구사 능력은 고향으로 귀환한 후 엉뚱한기회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1801년 제주도에 표류해 9년 동안이나 억류당해 있던 여송인들의 통역으로 나서 귀환을 성사시킨것이다. 말도 통하지 않는 조선 땅에서 만난 문순득이 그들 눈에는마치 구세주처럼 보이지 않았을까? - P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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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의 삶
압둘라자크 구르나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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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제목 "그후의 삶", 영어 원제 "After lives"

책을 읽고 난 이후 내가 붙이고 싶은 제목은 "어쨌든 사람들은 살아간다"정도? 

뭔가 미묘한 차이들이 있는데 내가 굳이 저렇게 제목을 바꿔본 건  내가 만든 제목이 작가의 스탠스를 보여주지 않나 싶어서다.

전작인 '낙원'에서는 좀 미묘하게 느꼈었는데 가장 최근 작인 이 책을 읽으면서 확실하게 작가인 '압둘라자크 구르나'가 취하는 스탠스가 이해가 된다.


아프리카인이면서 아프리카인이 아니고, 영어로 글을 쓰는 영어권 작가지만 그의 작품의 주요 소재와 입장은 영국이 아니고, 아프리카와 그곳을 살아가는 사람에 대해 애정이 있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삶과는 계속 거리를 유지하는.....

그래서 작가는 때로 방관자처럼 보이기도 하고,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그저 지켜보기만 하는 관조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쨌든 확실한 것은 작가 압둘라자크 구르나는 바라보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 바라본다는 위치는 이 소설을 읽는 내게는 무언가 굉장히 낯설고 생소한 그런 위치였다.


소설의 배경은 20세기 초 아프리카가 제국주의국가들에 의해 영국령 동아프리카, 독일령 동아프리카, 포르투갈령 동아프리카, 벨기에령 콩고 이런 식으로 재구성되고 지배당하던 시기다.

그럼에도 소설 속 인물들에게서 식민지의 삶에 대한 비분강개는 보이지 않는다.


기껏해야 소설 초반에 등장인물 중 하나인 일리아스가 "난 독일인들한테서 친절함 말고는 겪어본 적이 없어요."라고 하자,

주변의 동료들이 "친구, 놈들이 자네를 먹어 치웠군", " 독일인 남자 한 명이 자네한테 친절하게 대해줬다고 지난 세월 동안 여기에서 일어난 일이 바뀌는건 아니야" 정도의 대화가 나오는게 제국주의 독일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가장 저항적인 발언이다.


독일은 나미비아에서 저항하는 헤레로족을 사막으로 몰아넣어 굶겨죽인다. 

이 때 헤레로족의 인구 80%가 죽었다.

소위 말하는 본때를 보이기 위해 헤레로족이 내건 협상 제안, 항복 제안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벨기에가 콩고를 지배한 방식은 끔찍하기로 너무 유명해서 다시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다.

그러니까 아프리카라고 해서 제국주의자들의 식민 지배가 우리보다 덜 가혹했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 야만성의 직접성에 있어서는 일본의 지배보다 훨씬 더 했던 면도 많다.

그럼에도 이 책은 아프리카인들 또는 작가가 식민지의 삶을 바라보는 관점은 우리와 정말 다르다.

우리가 식민지 시대를 다룬다면 어떻게도 일제의 식민지배상황을 비껴갈 수 없고, 거기에 비분강개하는 어떤 장면이 등장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는 정말로 연극무대에서의 뒷배경그림정도랄까? 

역사와 문화가 다르면 생각도 감정도 다를 수 있음을 절감한다.


소설 속 등장 인물들의 삶을 뒤흔드는것은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배뿐이 아니다.

지역 부족민들의 오래된 편견 - 여자 아이가 글을 배운다는것에 대한 혐오와 공포라든가 갇힌 여성의 삶들, 

삶의 조건은 너무나 가혹한데도 그래도 사람들은 살아간다.

어떻게든 살아간다.

무자비한 환경과 변화에 휩쓸리기도 하고 버려지기도 하며 그냥 살아지는 것이고, 또 그렇게 죽어가는 것이다.

잠시 등장했던 일리아스의 삶은 그가 독일 군대에 들어간 이후로는 어떻게 살았는지 알 수 없어진다.

얼마나 수많은 삶이 가족과 터전을 벗어나서 떠도는가?

우리가 찾고 싶다고 해서 찾아 지지 않는 그 많은 이들의 삶의 궤적은 그렇게 묻혀버릴뿐이다.


그럼에도 책의 말미에 삼촌 일리아스의 이름을 단 조카 일리아스는 부모님에게 말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건, 강제수용소에서 죽을게 확실하다는 걸 알면서도 함께 있겠다고 따라갈 만큼 일리아스 외삼촌을 사랑한 사람이 있었다는 거예요. (419쪽)


작가 압둘라자크 구르나가 서있는 관조자의 위치는 어쩌면 바로 이 말을 하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아프리카에서 벌어졌던 그 억압과 고통들이 특별한 것이 아니다.

모든 억압과 고통들은 그 개개로 모두 특별하고 그래서 또 인간이 사는 땅 어디든지에서 모두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다.

그럼에도 보라.

우리는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우리들의 곁에는 내 손을 꼭 잡은 누군가 한 명쯤은 있지 않은가?

삶의 특별함은 억압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잡은 손 하나에 있는 것이 아니겠냐고.....


아주 독특한 관조자로 보였던 작가는 그 삶의 장면들을 뚫어보며 그 잡은 손 하나를 얘기하고 싶었던 것일테다.

그러고보면 우리가 어디에서 어떤 입장에 서 있더라도 결국 중요한건 모두가 마찬가지일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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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3-09-12 01: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람은 누구나 그럴 것 같아요 자기 손을 잡아주는 한사람이 있으면 살아가는... 그런 사람 없어도 살아가기는 하지만... 있으면 더 살려고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희선

바람돌이 2023-09-12 06:40   좋아요 0 | URL
아 없는건 너무 외로울것 같아요. 많지 읺아도 딱 1명만 있어도 괜찮알듯요

새파랑 2023-09-12 11: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압둘라자크 구르나 작품읽기를 계속 하시는군요~! 저도 이 책이 땡기긴 하던데 아직입니다. 구르나 작품이 좀 무겁더라구요. 그런데
이 책 내용이 더 잼있어 보입니다^^

바람돌이 2023-09-12 12:05   좋아요 0 | URL
이제 3권 읽었는데 남은 1권 배반만 읽으면 일단 번역된건 다 읽겠네요. ㅎㅎ 읽은 중에는 저는 바닷가에서가 가장 좋았습니다. 작가가 잘 아는 분야라서 더 직접적으로 와닿는 느낌이었어요. 이 책은 진짜 작가가 심리적 거리를 너무 띄운다는 느낌이 들어 호불호가 갈릴듯해요.
 

시어머니가 며느리로 맞은 이주여성에 대해 불만을 표현하기도 한다. 그런데 불만의 내용이 주로 며느리가 ‘불평없이 부지런히 일하고 아껴 쓰며 남편과 자녀를 돌봐야 하는‘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며느리의 미덕이란 순종, 공경, 알뜰함,
부지런함이라고 여기는 관점에서 질타와 훈계가 시작된다. 애써 벗어나기 위해 노력해온 유교 가부장제의 질서를, 이제 ‘한국의 예절‘이란 이름으로 이주여성을 통해 재생산하려는 것처럼보인다. - P38

오히려 ‘며느리가 남자라니‘라는 구호는 이 사회가 평등을 추구한다면 맞서고 해체해야 했을 가족질서가 뿌리 깊게 남아 있음을 간접적으로 일깨운다. 이 구호를 들으며 성소수자에 대해불편한 마음이 생긴다면, 먼저 며느리는 여자, 사위는 남자여야한다는 관념을 의심하고 질문해보면 좋겠다. 며느리의 역할을남자가 하면 왜 안 되며, 사위가 여자이면 무엇이 문제인가? 며느리와 사위에게 어떤 역할을 기대하기 때문인가? 원치 않는 며느리나 사위를 반대할 권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우리가 알고 있는 가족은 지키고 보존해야 할 불변의 가치인가? - P40

 지금도 사람들은 누군가결혼을 하면 당연히 아이를 가질 것이라고 기대하며 "아이는 언제 낳을 거야?"라고 질문한다. 아이를 낳지 않는 부부에겐 "그럴거면 왜 결혼했냐?"고 반문한다. 그러니 동성커플 사이의 결혼은 어불성설처럼 들린다. 출산을 할 수 없는 동성끼리의 결혼이라니, 그럼 결혼이 더이상 결혼이 아닌 거다. 결혼은 출산의 기반이라는 이상을 지키려면, 동성결혼을 인정할 수가 없게 된다. - P46

부모가 결혼을 안 했는데도 그 자식을 다른 이들과 똑같이 대우한다면, 그래도 사람들이 지금처럼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는 질서를 지킬까? 안타까워도 혼외출생자에게 불이익이 있어야 결혼이란 제도가 특별한 의미를 가질 테고,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차별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런데 의문이 들지 않는가. 이질서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 P55

그러니 의문이 든다. 지금 우리 사회는 무엇을 위해 결혼제도를 수호하는가? 결혼 밖에서 사람이 태어나면 정말 안 되는 걸까? 출산이 결혼의 테두리 안에 있어야 정상이라는 관념은,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사람을 적법과 불법으로 구분하며 생애의 시작부터 불평등을 만들었다. 이런 불평등을 사회가 모르는 게 아니라 부당하다고 생각지 않았던 것 같다. ‘결혼은 출산의 기반‘
이라는 이념이 무너지면 사회의 근간이 붕괴될 것만 같은 불안감에 차별을 정당화해왔다.  - P60

가족질서를 지키기 위해 (안타깝더라도 계속하여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고 ‘일탈자‘를 탓할 것인가 아니면 이런 구분을 거부하며 평등을 위해 가족제도의 변화를 요구할 것인가? 다음 장으로 이어지는 이 질문은, 사회가 사람의 탄생을 수단으로 여기는지, 아니면 그 자체로 소중한 동료시민의 등장으로 여기는지의 관점과 연결된다. - P67

이상하게 가족제도는 예외였다. 가족에 관해서만큼은 평등보다는 전통을 수호해야 한다는 주장이 지배적이었다. 민주주의이념이나 헌법 자체가 서구에서 기원한 것인데, 유독 가족에 대해서만은 한민족의 ‘미풍양속‘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이 우세했다. 양현아의 분석에 따르면, "가족법 (은) 서구법이 아닌 그 민족 고유의 ‘관습‘을 따라야 한다는 원칙 자체가 일제의 식민정책에 의해 수립된 것" 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리하여 평등은전통적 가족질서를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허용된다는 생각은, 지금까지도 가족제도를 동결시키는 "절대적인 원리"가 되었다.  - P79

때때로 가장 강력한 차별은 온정적인 얼굴을 하고 다가온다.
태어날 아이의 불행을 예고하는 염려가 자기실현적 예언이 되는것이다. 사람들은 출산을 생각하는 사람에게 온정적인 염려와경고를 보냄으로써, 세상의 차별이 앞으로도 변함없이 계속될 - P90

것임을 기정사실화한다. 그리하여 실제로 닥치는 불행은 오롯이출산을 ‘선택‘한 개인의 책임으로 돌린다. 결국 그렇게 차별을 보존하고 전승하며 어떤 집단의 미래를 영구적으로 불행하게 만드는 행위에 (의도치 않게) ‘가담한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어떤사람들을 이 땅에 오지 못하게 막는 행위는 얼마나 폭력적인가?
뒤집어 생각하면, 아동의 인생을 생각해 부모가 출산을 포기해야 한다는 말은, 사회가 변화를 도모하지는 않겠다는 변명일수 있다. 반대로, 부모가 출산에 대한 결정을 자유롭게 내릴 수있는 사회는 이미 아동에게도 좋은 사회일 것이다.  - P91

재생산 권리를 보장한다는 건 임신·출산에 관한 개인의 결정을 존중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하여 출생하는 사람을 존엄하고 평등하게 대우하겠다는 약속이기도 하다. 차별을 용인하고 묵인할 때에는 누군가의 출산을 막는 일이 아동의 권리를 옹호하는 일처럼 보였겠지만, 차별과 맞서기로 결정한다면 양육자의 권리가 곧 아동의 권리이고 그 가족의 권리를 옹호하는 일이모든 사람의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옹호하는 일이 된다. - P94

학교는 평등한 교육을 한다고 믿으면서 오랫동안 성별분업을 염두에 두고 교육을 실시했다. 그런데 사회가 이렇게 성별분업 이념을 유지하면서 고용상의 불평등만 해결하려 하면곤란한 상황이 벌어진다. 여성에게 가사 책임을 맡기면서 동시에 임금노동을 기대하는 분위기가 이중의 부담을 초래하는 것이다. 이런 이중의 부담을 감당할 수 없을 때 여성들은 어떤 선택을할까? - P117

성차를 자연적이고 고정불변이라고 여기는 성별본질주의gender essentialism 의 관점이 교육의 이름으로 지속된다. 우리는 모두가 지구상에 평등하게 태어난 사람들이라고 말하면서도,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1" 라고 여길 만큼 성별에 따라 다른 운명을 타고 태어났다는 모순된 메시지에 길들여진다. 성별본질주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면, 지금 보이는 성차가 형성된 사회적·역사적 맥락이 지워진다. 대신 가부장제를 위해 설계된 성역할을 ‘원래 그런 것‘ 혹은 ‘그래야 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이게된다. 왜 성별을 이유로 역할이 배정되어야 하는지 질문하기를잊게 된다. - P132

단순히 여성의 교육과 고용의 증진으로 가부장제가 간단히 사라질 것이라 생각하면 서툰 기대가 아닐까. 가부장제는 가족이 가족에게 행하는 성적인 통제와 잔인한 폭력을 통해서도 연명하고있다. - P140

현대사회의 계급 재생산은 외형적으로는 합법적이고 공정하다. 엘리트 계층이끼리끼리 만나 중산층을 형성하고, 축적된 부와 네트워크를 통해 고소득으로 진입하는 교육 기회를 독점하며, 이로써 자녀에게 계층을 세습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 모든 과정이 가족의이름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 P159

역사적으로 가족은 상이한 생활조건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구성되어왔다." 한국에서도 가족이 변해왔고 지금도 변하고 있다. 가령 지금의 한국은 과거보다 결혼을 적게 하고 이혼을 많이 한다. 이 사실을 두고 가족의 ‘위기‘나 ‘해체‘라고 묘사하는것과, 가족의 ‘변화‘나 ‘다양성‘의 증가라고 표현하는 것은 다르다. 전자의 ‘위기‘와 ‘해체‘ 담론은 특정 가족 형태를 ‘옳다‘고 전제한 진단이다. 이에 대해 윤홍식은 이렇게 비판한다. "가족의특정 형태의 변화를 가족의 해체로 이해하는 것은 가족이 지역과 시대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고 변화했다는 다양성과역동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 P188

 동성애, 그리고 동성결혼을 반대한다는 것은,
곧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이성과 결혼하고 자녀를 출산해야 한다는 메시지이고, 여성과 남성에게는 서로 다른 역할이 있음을 상기시키는 일이었다. 말하자면 성소수자 반대운동은 가족각본을절대적인 도덕률로 신앙화하는 작업이자, 가족각본에서 벗어난삶의 형태를 부정하고 가부장적 질서를 유지시키는 핵심 담론이었다. - P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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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읽으면서 흥미로운 대목이 있어서 메모

1890년대 같은 시기에 똑같이 여성교육이 필요함을 주장하면서도 남녀의 생각이 이렇게 다를 수 있다니....

독립신문의 남성이 쓴 것이 분명한 사설은 여성교육은 자식 교육을 잘하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면

여성이 쓴 <여권통문>에서는 독립된 인격으로서의 여성교육의 위치를 명시하고 있다.

100여년이 훌쩍 넘는 시기동안도 사실상 남녀의 생각의 간극은 딱히 좁혀지지 않았다는 느낌이다.


사나이 아이들은 자라면 관인과 학사와 상고와 농민이 될터이요. 계집 아이는 자라면 이 사람들의 아내가 돌 터이니, 그 아내가 남편만큼 학문이 있고 지식이 있으면 집안 일이 잘 될 터이요, 또 그 부인네들이 자식을 낳으면 그 자식 기르는 법과 가르치는 방책을 알 터이니 그 자식들이 충실할 터이요(...) 그런즉 여인네 직무가 사나이 직무보다 소중하기가 덜하지 아니하고 나라 후생을 배양하는 권이 모두 여인네에게 있은 즉 어찌 그 여인네들을 사나이보다 천대하며 교육하는 데도 등분이 있게 하리오.  -110쪽, 1896년 5월 12일 <독립신문> 사설



어찌하여 신체 수족 이목이 남자와 다름없는 한가지 사람으로 심규에 처하여 다만 밥과 술이나 지으리오. (....) 우리도 혁구종신(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따름)하여 타국과 같이 여학교를 설시하고 각각 여아들을 보내어 갖가지 재주와 규칙과 행세하는 도리를 배워 향후에 남녀가 일반 사람이 되게 하려고 곧 여학교를 설시하오니....  - 114쪽, 1898년 9월 1일 이소사, 김소사(소사란 기혼여성을 부르는 명칭)의 <여권통문>



또 하나 흥미로운 인물 발견


125쪽에 등장하는 최활란이라는 여성

김활란이 아니고 최활란? 활란이란 이름이 흔한 이름인것도 아닌거 같은데 뭐지?하고 찾아봤더니 잘 알려진 김활란과 동명이인이다.

그런데 진짜 웃기는게 이 여성의 본명이 심지어 김활란이다.

최씨 성을 가진 남성과 결혼하면서 서양식으로 최활란으로 바꾼 것.

그리고 인천 출신, 이화학당 출신, 개신교 감리회 신자, 여성운동,친일행적 등에서 김활란과 거의 활동이 겹친다.

웃기는 우연은 이화학당 제2대 메이퀸이었단다. 

우리가 익히 잘 아는 김활란은 제3대 메이퀸이고.....

이 책에 나오는 그녀의 어록은 다음과 같다.


학교에서는 성교육을 시켜 [여학생에게] 자기네의 정조가 생명[처럼] 중대함을 가르쳐서 (...) 스스로가 공포심이 일게 되어 여자로서의 중대한 정조를 지키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 125쪽


2명의 김활란을 굳이 구별하지 않아도 될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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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23-09-08 17: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2명의 김활란을 굳이 구별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ㅋㅋㅋㅋ
이름도 같고 생각도 비슷하고 소름입니다. 어후

자식 교육을 위해 여자가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건, 마치 이 자리는 미래의 어머니가 앉을 자리입니다. 뭐 이런 거랑 느낌이 같네요. 어쩜 변하지를 않을까요...

바람돌이 2023-09-10 22:01   좋아요 1 | URL
처음에는 최활란이라는 이름이 신기해서 찾아봤는데 찾으면서 둘이 너무 비슷해서 진짜 깜짝 놀랐네요. ㅎㅎ
저 변하지 않는 가족주의와 자식을 위한 어머니상을 강요하는 이유가 이 책에서 적나라하게 펼쳐집니다. <가족각본> 강추합니다. ^^

잠자냥 2023-09-09 09: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 마지막 줄 너무 웃겨요 ㅋㅋㅋㅋㅋㅋ 저런 거 보면 사람 인생이 진짜 이름 따라가나 싶기도 하고 ㅋㅋㅋㅋ

바람돌이 2023-09-10 22:02   좋아요 1 | URL
최활란 뭐하는 사람인지 찾아보다가 허탈해진 제 마음입니다. ㅎㅎ

책읽는나무 2023-09-09 11: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활란스럽군요.ㅋㅋㅋ

바람돌이 2023-09-10 22:02   좋아요 1 | URL
오 나무님!! 역시 100자평의 귀재는 딱 한줄로 정리해주시는군요. 감격했습니다. ^^

독서괭 2023-09-09 12: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신기하네요!!
여성교육 주장한다고 하면 마치 페미니스트 같지만 들여다보면 완전 반대인.. 그러면서도 스스로는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할지도??

독서괭 2023-09-09 12:03   좋아요 2 | URL
찾아보니 김활란은 본명이 김기득이고 7세에 세례명 Helen의 한자표기인 활란으로 바꾼 거라 하네요~ 최활란은 본명이 활란이고 ㅎㅎ

잠자냥 2023-09-10 22:05   좋아요 2 | URL
김활란 태어날 때부터 기득권 ㅋㅋㅋㅋㅋㅋㅋ

바람돌이 2023-09-10 22:05   좋아요 1 | URL
저 때 두 활란 모두 자신이 여성계의 선구자라고 생각했을거예요.gg
아 전 김활란의 본명이 김기득인건 처음 알았네요. 그러고 보니 활란이란 이름이 그리 흔한 이름이 아닌데 저렇게 동시대에 같이 있을수 있었을까 궁금했는데 세례명 Helen을 생각하니 알겠네요. 아마 둘다 세례명에서 유래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바람돌이 2023-09-10 22:07   좋아요 1 | URL
잠자냥님 그러게 말예요. 둘다 태어날 때부터 기득권...... ㅎㅎ

책먹는고란 2023-09-12 17: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두 명의 김활란을 굳이 구분 안 해도 된다. 정말 와닿네요......

바람돌이 2023-09-13 21:19   좋아요 0 | URL
이름이 같다고 사는 방법도 같아지는게 아닐텐데 말이죠. ^^ 신기하긴 하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