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해면 이십년이 되네요
당신은 죽은 채 세월을 낭비하고 있어요
우리가 얘기하곤 했었던, 지금은 그러기엔 너무 늦은,
도약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요

난 지금 살고 있어요
그런 도약은 아니라도,
짧고 강렬한 움직임을 유지하면서 말예요

각각의 움직임은 다음 것을 약속해주거든요* - P19

리치와 비숍이 서로를 이해하고 이해받았던 그 몇시간이 미치도록 부러울 수밖에 없었던, 개인적인 몰이해의 시간이 떠올랐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제 마음을 이해받고 싶었지만 끝내 실패했던 어느여름의 이야기입니다. 처절하게 오해받았던 어느 겨울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 시간을 진술하는 일은 리치가말한 ‘짧고 강렬한 움직임‘에 해당할지도 모르겠습니다. - P20

그렇지만왜 울었냐고 한번쯤은 물어볼걸 그랬습니다. 살다보면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는가 하면, 모든 말을 다털어놓고 싶을 때가 있지 않던가요.  - P71

줄줄 울면서 지하철 계단을 내려가고 열차 안에 서서도 계속 울었습니다. 사람들이 흘끔거렸지만, 퇴근 시간 지하철 안에서 혼자 우는 여자가 그리 희귀한 풍경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꿋꿋이 울었습니다. - P94

세진은 그새 화가 풀린 모양이었는데, 그 사실에 저는 더 화가 났습니다. 다시 지은 죄도 없이 용서를 받은 기분이었습니다. - P107

저들은 왜 나의 애도를 방해하는가 왜 내 마음을 슬픔 대신 분노로 채우는가 무슨 의도인가.  -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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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티드 맨 잭 리처 컬렉션
리 차일드 지음, 정경호 옮김 / 오픈하우스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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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 리처 시리즈는 편마다 부침이 좀 있다.

지난번에 읽은 <어페어>는 굉장히 좋았던 반면 연달아 읽은 <원티드 맨>은 읽어나가는 중에도 계속 뭔가 모자라는 듯한, 그러니까 진짜 2%가 부족한 것이다. 


일단 히치하이크를 해서 타게 된 차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만나게 되는데 바로 그 차에 동승한 여성이 납치된 여성인 것. 그런데 거의 책 분량의 3분의 1일 지나도록 나의 잭이 아무것도 못한다. 계속 눈치만 보고 상황 분석만 하고..... 아 진짜 열터지도록 머리만 굴리고 눈알만 굴리고 있다니.... 이거 잭 리처 당신 스타일 아니잖아....ㅠ.ㅠ  그러니까 뒤에 가면 이것도 뒷장면을 위한 복선이긴 한데 그 설정을 위해서 갑자기 우리 잭을 바보 신중이로 만들어버렸달까? 하여튼 실망이야 잭...ㅠ.ㅠ


이번 편에는 자주 나오는 연애담이나 섹스신이 안 나온다. 대신에 뭔가 변태같은 잭이 나온다. 동행하게 된 FBI 수사관인 소렌슨의 엉덩이에서 총을 빼앗는 장면에서 잭이 느끼는 것이다. 


소렌슨의 손목 피부의 감촉, 그리고 복부와 엉덩이의 온기, 권총을 뺐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그 기억이 지워지지 않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순면 셔츠, 그리고 그 아래 감춰져 있는 딱딱하지도 무르지도 않은 그녀의 몸......(260쪽)


아 진짜 상대 여성은 아무 생각도 없는데 혼자서 총 뺐다가 저렇게 생각하는거 너무 변태스럽지 않나? 에잇 실망이야 잭!


물론 이번편에서도 잭은 정의의 편이지.


"델펜소를 돕는게 필요하다니 이유가 궁금하군요."

"당연히 필요한거 아니오? 난 인간이니까." (168쪽)


늘 그랬듯이 그가 다른 사람을 돕는데는 따로 이유가 필요하지 않다. 

인간이니까 당연히 그러해야 하므로.....

그래서 아직도 여전히 나는 잭 리처가 좋은데 다음편에서는 변태스러운 잭 말고 사랑을 하는 잭을 다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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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03-01 17: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 총을 빼앗는 상황이라면 뭔가 긴박했을 것 같은데 그 와중에 느끼기 ㅋㅋㅋㅋㅋㅋㅋ

바람돌이 2023-03-01 21:28   좋아요 0 | URL
작가는 말이죠. 잭이 뭔가 여유만만하다는걸 보여주고싶었는지도 모르죠. 아 진짜 근데 느낄 상황이 아니었다니까요. 내가 참 스포때문에 참는다구요. ㅎㅎ

다락방 2023-03-01 19: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변태 리처…..

바람돌이 2023-03-01 21:28   좋아요 0 | URL
제가 처음이니까 딱 한번만 봐준다 이러고 있습니다. ㅎㅎ

stella.K 2023-03-01 19: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별이 넷이네요.
그런 것으로 보아 아직도 잭을 사랑하시는가 봅니다. ㅋㅋㅋ
제가 뭘 알겠습니까?ㅠ

바람돌이 2023-03-01 21:29   좋아요 1 | URL
시리즈 모두가 걸작일수는 없으니.... 그래도 기본 재미는 보장하는 시리즈니까요. 다른 시리즈에 비해서라는거지... 그리고 사람이 의리가 있지 한 번 실수에 어떻게 사랑을 버립니까? 한번정도는 봐주는 저는 관대한 연인이랍니다. ㅎㅎ

희선 2023-03-02 00: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난번과 다른 잭이라니... 이것도 잭이겠지요 총을 빼앗으면서 별 생각을 다 하는군요 여성이 아닌 남성이었다면 그렇게 안 했을 것 같아요 다음엔 좀 멋지게 나오기를...


희선

바람돌이 2023-03-02 11:02   좋아요 0 | URL
여태까지 멋졌으니까 한번쯤 넘어가줍니다. ㅎㅎ 이 시리즈 많이 재밌어요.
 
아이 엠 낫 유어 니그로
제임스 볼드윈.라울 펙 지음, 김희숙 옮김 / 모던아카이브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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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회에서 억압받는 자로 산다는 것은 아주 어린시절 정체성의 형성기부터 억압당하는자로 만드는 것임을 새삼 깨닫게 한다. 그것에 저항하는 것은 백인과 싸우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과 싸워야 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나는 당신당신의 정의에 의해서 규정지어지는 그 니그로가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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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9월 4일 도로시 카운츠는 15세의 나이로 그 지역의 백인 학교에 지원하였다. 그녀가 경찰과 주방위군의 경호를 받으며 등교하는 사진은 유명하다. 의연하게 등교하는 그녀에게 백인 어른들은 그들의 아이들에게 "침을 뱉어라"라고 요구했다. 또한 백인 학부모 여성은 진지하고 침통한 얼굴로 "주님은 살인과 간통은 용서하시지만 인종통합에 대해선 분노를 금치 못하시죠"라고 인터뷰한다. 사실 나를 더 경악케 하는 것은 어른들의 말보다도 도로시 카운츠가 간 학교의 백인학생들의 집단 괴롭힘이다. 웃으며 침을 뱉고 놀리고 욕을 하는 저 또래학생들의 행동이 사춘기의 도로시 카운츠에게 어떤 상처와 두려움이 될지를 짐작하기에 도로시 카운츠의 저 야무지고 결의에 찬 표정을 보고도 안심이 안되는 것이다. 차라리 다행스럽게도 도로시 카운츠는 아이의 안전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었던 부모에 의해 나흘만에 결국 전학을 가게 된다. 잘 된 일이다. 우리의 신념이 아무리 옳다 하더라도 그것을 아이에게 감당하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녀의 사진은 다른 한 사람을 움직였다.  흑인으로서 동성애자로서 미국에서의 억압과 생명의 위협을 견딜 수 없어 파리로 이주해있던 작가 제임스 볼드윈이다. 


우리 중 누군가는 도로시와 함께 있어야만 했다!

바로 그 날, 화창한 오후에 프랑스를 떠나자는 생각이 들었다.

더는 파리에 눌러앉아 알제리 문제나 미국 흑인 문제를 논하며 빈둥댈 수는 없었다.

다들 자신의 몫을 하고 있었고 나도 돌아가 내 몫을 해야 할 차례였다. - 41쪽


내가 역사를 좋아하는 것은, 그리고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바로 이런 사람 때문이다. 역사속에는 어리석고 나쁘고 이상한 인간들이 정말 많지만 이렇게 훌륭한 사람도 많기 때문이다. 자신이 꼭 하지 않아야 할 일에 자신의 양심과 마음속의 정의감때문에 행동하는 이들이 정말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흑인 인권운동도 우리나라의 독립운동도 여성운동도 있을 수 있었고, 세상이 나아지기를 바라며 싸우는 현재진행형의 사람들도 있는 것이다. 늘 인간이 이기적이냐 이타적이냐를 묻는 질문은 질문 자체가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이타적인 인간도 이기적인 인간도 넘쳐난다. 그냥 그게 세상이다. 다만 그 이타적인 인간들로 인해 그나마 인류가 지금까지 망하지 않고 살아남은 것일 뿐이다. 


작가였던 제임스 볼드윈은 미국으로 돌아와서 텔레비전 출연, 강연 등등 자신이 할 수 있는 여러가지 일들을 통해 흑인의 삶을 이야기 한다. 세계 최초의 흑인공화국을 세웠던 나라 아이티출신의 영화감독 라울 펙이 제임스 볼드윈이 갔던 길을 따라가며 그의 삶을 되살린다. 제임스 볼드윈이 흑인 인권운동가들- 메드가 에버스, 맬컴 액스, 마틴 루터 킹-에 관해 썼던 <Remerber This House>의 초고 메모 또는 원고 등 30여페이지의 그 글이 이 영화의 시작이었다. 


영화는 제임스 볼드윈의 여로를 따라가고 그의 말을 따라가고 그의 생각을 따라간다. 

흑인들은 왜 항상 인종이나 종교에 집중해야 하느냐고? 당신은 흑인이라는 정체성보다는 작가이고 지식인이라는 정체성이 더 크지 않느냐는 백인의 질문에 제임스 볼드윈은 "나는 파리에 정착했을 때 수중에 40달러 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미국에서보다 더 나쁜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여기서는 한번 등을 돌렸다하면 죽을 수 있으니까...."라고 말하는 그의 표정과 눈빛은 그저 말이 아니라 실제로 그런 위험속에서 살아온 자신과 동족의 슬픔을 강렬하게 대변한다. 

우리가 미국의 인종차별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을 그저 언어나 먼 나라의 사건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느끼는 것은 너무도 다를 수 밖에 없다는 것.

미국에서는 백인 아이들도 흑인 아이들도 같은 텔레비전을 보면서 자랐다. 텔레비전에 방영되는 영화속에서 언제나 백인은 영웅이었고, 흑인은 사회적 루저 아니면 악당이다. 5살 6살 정도의 흑인 아이가 자신이 그 루저나 악당인 흑인임을 자각하는 순간을 생각해보라. 그 정체성의 혼란을 깨닫는 순간부터 그는 차별받는 이로서의 삶을 사는 것이다. 심지어 언제 어디서든 공격받을 수 있는 위험천만한 차별 말이다. 


  메드가 에버스, 맬컴 액스, 마틴 루터 킹, 이 세사람은 모두 흑인의 인권을 위해 싸웠지만 주장하는 바도 싸움의 방법도 모두 달랐다. 그러나 그들 모두 40세를 넘기지 못하고 모두 암살당했다. 감히 흑인 주제에 인간이기를 요구했기 때문에...... 


  제임스 볼드윈이 꿈꾸던 세상은 그저 흑인이 백인과 평등해지는 세상만은 아니었다. 인종차별의 벽을 넘어 도달하고자 하는 어떤 세상에 대한 메타포가 그에게는 있었다. 다분히 공상적이고 이상적인 생각들. 그러나 언제나 세상은 그런 사람들이 길을 밝혀왔다. 인간은 앞으로도 여전히 이전투구할 것이지만 그럼에도 세상이 나아갈 바를 이렇게 얘기하는 이가 있어 우리는 길을 잃었다가도 다시 돌아오곤 하는 것이다. 


새로운 메타포가 있다. 새로운 소리가 있다. 새로운 관계가 있다. 남성과 여성은 전과 달라질 것이다. 아이들도 달라질 것이다. 그들은 돈버는 읽을 쓸모없게 만들 것이다. 인간의 삶을 그보다는 가치있게 하라. 일의 개념을 고역이 아니라 즐거움으로 회복하라. -13쪽


영화와 극본집을 같이 보고 읽었다. 

번역은 극본집이 훨씬 유려해서 내내 다시보기 하듯이 읽었다.

처음으로 영화와 극본집을 통해 제임스 볼드윈을 만났으니 이제 책을 통해 그를 만날 차례다.


















아 참 책 <아이엠 낫 유어 니그로> 163쪽에 

영화 편집자 엘리자베스 스트라우스가 서문을 쓴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라는 문장이 있다.

책의 앞에 서문에는 편집자 이름이 알렉산드라 스트라우스이다. 

어느쪽이 맞을까? 알렉산드라쪽일 거 같은데.... 어쨌든 다음 판에서는 수정을....

엘리자베스 스트라우스라고 해서 올리버 키트리지의 그 엘리자베스인줄 알고 잠시 깜짝 놀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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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3-03-01 01: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세상엔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과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겠지요 어디나 인종차별은 있겠지만, 미국은 가장 심하고 지금도 아주 사라지지 않았겠습니다 프랑스도 심하다고 한 듯한데... 미국에서 자라면서 텔레비전을 보면 백인과 흑인을 다르게 보겠네요 이건 미국만 그렇지는 않겠습니다 한국도 다르지 않죠 한국사람은 다른 곳에 가면 차별받고...

한번에 달라지지 않겠지만, 앞으로도 조금씩 바뀌어가길 바랍니다 지금까지도 그랬겠습니다 바람돌이 님 삼월 좋은 달이기를 바랍니다


희선

바람돌이 2023-03-01 16:00   좋아요 1 | URL
어쩌다 여행객으로 지나치면서 느끼는 인종차별과 그곳에 살면서 삶에 속속들이 틀어박히는 차별을 느끼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인거 같아요. 또 차별받는 사람들은 자기보다 약해보이는 또 다른 인종을 차별하고.... 세상이 참 힘든데 그래도 이렇게 양심에 따라 사는 사람들로 인해 나아지고 있고 나아질거라고 믿고싶습니다. 희선님도 봄냄새와 함께 하는 따뜻한 삼월 되세요.

거리의화가 2023-03-01 08: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안 그래도 <아이엠 낫 유어 니그로> 이야기해주셔서 궁금했는데 이렇게 올려주셨군요.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최근에 <톰 아저씨의 오두막>과 <여성, 인종, 계급> 읽으면서 여러 생각이 들던 참이었어요.
역사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고자 하는 사람들이 더 일어서고 그래서 잘못된 역사는 바뀔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책도 영화도 궁금하네요.

바람돌이 2023-03-01 16:02   좋아요 1 | URL
책이 극본집이라 영화와 같이 나가지만 그럼에도 또 다른 감동이 있었어요. 스쳐가는 영화의 화면 대신 스틸사진들을 문장과 함께 오래 응시하면서 느껴지는 감정은 좀 다른 듯도 했구요. 같이 보시는거 추천드려요. ^^

레삭매냐 2023-03-01 10: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희망도서로 읽다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못 다
읽고 반납한 기억이 나네요.

영화로도 있다고 하니 한
번 보고 싶어지네요.

바람돌이 2023-03-01 16:04   좋아요 1 | URL
제가 희망도서로 신청하고 읽다가 다 못보고 반납한 책 쌓으면 그것도 하늘 높은줄 모르고 올라갈거예요. ㅎㅎ
요즘은 관심가는 영화가 있으면 어디서든 저렴한 가격으로 찾아볼 수 있으니 그건 참 좋은거 같아요. 영화와 함께 봐서 더 좋은 책이었습니다. ^^

페넬로페 2023-03-01 21: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역사를 잘 몰라도 도로시 카운츠의 저 사진은 너무 유명하죠!
세상에 악인도 많지만 더 좋고 의식있는 사람이 많아 그나마 세상이 굴러가는 것 같습니다.
영화도 봐야겠어요.

바람돌이님!
내일부터 다시 출근하시는데 건강 유의하시고요^^

바람돌이 2023-03-01 22:34   좋아요 2 | URL
영화도 좋았습니다. 생각보다 제임스 볼드윈의 영상자료가 많이 나와요. 그의 목소리, 표정 이런 것들이 말보다 더 많은 것을 전달해주는 영화였습니다.
오랫만에 출근하려니 이것저것 챙겨야 하는게 어찌나 많은지 하루종일 부산한 하루였네요. 걱정하고 격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몸으로 읽는 세계사 - 사소한 몸에 숨겨진 독특하고 거대한 문명의 역사
캐스린 페트라스.로스 페트라스 지음, 박지선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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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자에 읽은 역사 책 중 재미로는 단연 압권, 얼른 누군가에게 얘기해주고 싶어 입이 근질거린다."라는 최재천선생님의 추천사가 아니었다면 읽지 않았을 책이다. 이런 류의 다이제스티 역사서가 이제 좀 지겹기도 했고, 또 이런 류의 역사책을 가장한 가쉽서들에 대한 불만도 있어서 말이다. 그런데 책을 읽고난 결론은 나 역시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린다. 고로 이 글은 입이 근질거려서 쓰는 리뷰 되겠다. 





 일단 목차가 근사하다. 이 그림이 진짜 목차다. 1. 구석기 시대 여성의 손 2. 핫셉수트 여왕의 턱수염 이런 식으로 말이다. 다만 미리 말하는데 이 그림에는 사진이나 삽화가 없다. 딱 1개의 삽화가 있는데 그게 이 차례이고, 그리고 딱 1개의 그림이 있는데 그건 바이런의 초상화다. 사진이라고 딱 1장 넣어놓은게 왜 굳이 바이런의 초상화였을까? 그걸 짐작할 수 있는 이유는 어디에도 나와있지 않은데 내 추측으로는 바이런이 잘 생겨서이지 않을까이다. 거짓말이라고? 아니 이 책을 읽어본 분들이라면 분명 나의 의견에 동의할 것이다. 이 책의 작가들은 남매라는데 사심이 가득하다. ^^ 사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그 바이런의 얼굴이다.(바로 이 책 유일의 그림이다.)




뭐 이정도면 사심이 가득해도 할말 없는 얼굴이지 않나? 바이런은 이 잘생긴 얼굴로 엄청난 바람둥이였다니 여러방향으로 인류애 가득한 분이셨겠다. 물론 이런 얘기에 집중했다면 이 책은 애초에 몇 페이지 읽지 않고 내 손에서 던져졌을 것이다. 저자들이 바이런에서 얘기하는 것은 장애가 있던 그의 발과 그의 삶 문학이 연결되는 지점들을 찾아보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외모와 삶과 문학작품이 일치하는데다가, 또한 그 일치를 위해 삶의 다양한 장면들을 관리하고 이미지를 만들고 유지하는 모습까지 보다 보면 어쩌면 바이런은 당대의 아이돌 스타가 아니었을까싶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영광만 있을 수는 없는 법이니, 그의 신체이형증(자신의 신체적 불완전성, 그러니까 발의 장애-을 지나치게 곱씹는 정신질환)과 당시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어, 점으로 표현되던 동성애취향에 대한 고뇌까지가 모두 바이런이다.(이 장면에서 책 내용과 상관없는 하나의 궁금증을 풀었는데, 그것은 해리포터에서 볼드모트를 항상 이름을 말할 수 없는자라고 부르는것에 대한 궁금증이다. 서양전통에서는 무언가 지나친것에 대한 이런 표현이 일종의 관용적 표현인듯 하다.) 



  사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있는 이야기는 내게는 첫번째 구석기 시대의 여성의 손이었다. 부끄럽게도 나 역시 동굴벽화 하면 알타미라나 라스코의 동물그림부터 떠올리는데 그게 최초의 그림들이 아니란다. 최초의 동굴그림은 여성과 아이들로 추정되는 이들의 손도장이다.



지금 현재 알려진바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동굴벽화이다. 보르네오섬에서 발견되었다. 이런 류의 손도장은 세계 곳곳에서 발견된다. 아래 사진은 프랑스 가르가스 동굴의 손도장 벽화이다. 




사실 벽화라고 하는 것도 손도장이라고 하는 것도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이런 손도장은 손을 벽에 대고, 대나무 대롱 같은것에 물감을 가득 넣어 입으로 뿌려서 자국을 남기는 기법으로 그려졌다. 오늘날 그래피티를 그리는 기법과 비슷하다.

그러면 도대체 구석기시대의 인간들이 왜 이런 손그림을 남겼을까? 정답이야 아무도 알 수 없다. 그저 우리는 상상할 뿐이다.  어둡고 불편하고 위험해보이는 동굴 깊숙한 곳에 여성들과 아이들 몇몇이 조심스럽게 들어가는 장면을 상상한다. 그리고 벽에 손을 대고 입에 대롱을 물고 물감을 뿌린다. 그리고 자신의 손그림을 보며 무언가의 행위를 당연히 했을테고 그 무언가는 종교적인 것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어떤 부족은 자기 부족의 손자국을 전부 구별해낼 수 있다고도 하는데 그렇다면 이것은 무언가를 기원하고 남긴 서명일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여기서 이 책이 가진 장점 첫 번째를 말할 수 있다. 생각보다 몰랐던 이야기들이 많다. 이런 역사책들이 가지는 구태의연한 통속성, 여기저기 흔히 알려진 이야기들을 끌어모아 재배치한 느낌이 없다는.... 원래 이런 책을 읽을 때 책이 재미있으려면 내가 모르는 얘기가 훨씬 더 많아야 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재미를 보장한다. (물론 27편의 이야기가 다 재미있는 것은 아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더 많다는 것뿐.... 해리엇 터브먼의 뇌의 이야기는 좀 믿기 힘들고, 마르틴 루터의 장 이야기는 과장된 느낌도 있다. 하지만 이 정도의 흠은 책의 재미에 비하면 넘어갈 수 있는 수준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 이야기들을 더 좋아할 수도 있고......)



  이 책의 두번째 장점은 정치적 올바름이다. 특히 여성에 관한 서술에서 그 올바름을 유지하는 것말이다. 



  사실 다비드상 같은 조각을 볼 때 궁금했던게 있다. 조각의 다른 부위에 비해서 성기가 너무 작은 것이다. 그런데 부끄럼 많은 나는 어디에도 못 물어봤는데(사실 아는 사람이 있을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서가 더 정답에 가깝지만), 이 책에서 제우스를 표현한 이 조각을 예로 들어 그 비밀을 말해주고 있다. 바로 당대의 그리스인들이 생각한 완벽한 남성의 특징 중에 바로 '작은 음경'이 포함된다는 것이다. (정말???? 믿을 수 없어!!! 그럼 오늘날은 왜 이렇게 된거야????)그리스 인들의 생각에 모범적인 남성은 '햇볕에 그은 피부, 잔근육, 탄탄한 몸, 평온하고 신중한 마음'이 포함되는데 크고 불룩한 음경은 이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큰 음경뿐 아니라 곧추선 음경 역시 무절제와 무분별한 성관계를 상징하는 것이므로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당연하게도 공식적인 입장일 뿐이고 사적으로는 성난 황소와 같은 음경이 각광을 받으면서 은밀하고도 공공연하게 만들어져 유통되었다고 하니 남성들의 성적 이중성은 시대를 막론한다. 저자들은 여기서 여성의 조각에 대한 이야기로 이야기를 이어가는데 아주 기묘하다는 이야기를 한다. 즉 고대 그리스 여신 조각상들은 크기에 상관없이 모두 성기 자체가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글을 보자.


여러 학자들은 이것이 작은 음경을 이상적으로 여기는 미소지니스트(여성을 혐오하는 남자라는 뜻으로 놀랍게도 그리스어다!)의 사고가 확장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남성들은 욕망을 억눌러야 했던 반면, 성적으로 적극적인 존재로 여겨진 여성들은 조각상에서만큼은.... 욕망을 가져볼 기회조차 거부당했다.  - 48쪽


  고대 미술에 나타나는 이 오래된 미소지니를 확인하는걸 잊지 않는다. 참 성차별의 역사는 길기도 길지만 모든곳에서 깨알같이 많기도 하구나. 서양만 그러한가? 그럴리가!!! 베트남의 영웅 찌에우 티 찐은 가슴이 90cm여서 가슴을 뒤로 넘겨 다녔다는 전설이 있는 이이다. 3세기 중국의 침략에 대항해서 싸운 여성영웅이다. 워낙 오래된 일이고 자료가 없어서 그의 실제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는데, 오히려 수세기가 지난 뒤에 중국의 영향을 받아 유교문화권이 된 베트남에서 그녀가 어떻게 평가되고 쓰여졌는지를 알려준다. 베트남의 유교적 가치관에 입각한 가부장제에서 그녀는 역사적 인물이 되기 어려웠다. 그래서 온갖 믿기 어려운 일화들과 신체적 특징들이 과장되이 전해지게 된다. 결국 그것은 그녀를 신화화해서 무성적 존재로 만드는 방법에 의해 유교질서 안으로 그녀를 끌어들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해서 다른 생각도 가능하겠지만 이렇게 역사속에서 서양과 동양 가릴 것 없이 성차별의 역사가 스며 있는 것을 찾아내는 것도 신선한 시도였다. 그 외 카톨릭의 성유물 숭배와  당대 카톨릭의 부패를 연결하는 이야기, 세익스피어의 작품이 당대의 권력자에 대한 아부가 되는 이야기들도 우리가 어떤 사건들을 볼 때 그 이면을 같이 보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려주었다.


세번째로 이 책의 장점은 잘 알려지지 않은 다양한 대륙의 이야기들을 균형있게 이야기 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아메리카 대륙의 문명에 대해서는 정말 아는 것이 없는데 이 책을 통해서 식상하지만 그들에 대한 이야기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이 알아보기 힘든 조각은 멕시코 치아파스에 있는 마야문명의 유적이다. 마야의 야스칠란 왕국의 왕비였던 카발 쇼크 부인이 자신의 혀에 구멍을 뚫은 다음 나오는 피를 받아 제사를 지내는 제의의 한 장면이다. 이런 피어싱이 여성에 한해서만 이루어졌던 것은 아닌듯하고 그 대상을 어떻게 선정했는지는 오늘 우리가 알 수 없으나 끔찍하면서도 흥미로운 의식임에는 틀림이 없다. 신들이 인간을 위해서 성스러운 필을 내주었기에 인간은 이 조각의 쇼크부인처럼 자신의 피를 양식으로 신에게 내주어 우주의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고 믿는 그들의 종교도 이해는 힘들지만 흥미진진하다. 


  결국 이런 이야기들을 읽다보면 입이 근질거리지 않을 수가 없다. 이렇게 재미있고 괜찮은 이야기를 나만 알고있는것은 부당하니 말이다. 앗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책의 장점이 하나 더 있는데 소소하지만 정말 깨알같은 유머와 농담을 즐길 수 있다는것이다. 딱히 대단한 농담도 아닌데 책을 읽다보면 저자들의 농담에 낄낄거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농담이 너무 많으면 짜증나는데 그 경계를 잘 지키고 있으니 책의 퀄리티에 대한 걱정은 접어두고 즐기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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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3-02-25 18: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바람돌이님 유머러스 하신데 그런 분이 읽으면서 웃으셨다면 믿고 볼 수 있겠네요!ㅎㅎㅎ

최근 미드에서 영국 남성의 성기를 봤는데(시체였지만..) 다비드상과는 꽤 큰 차이가 있더라구요.🙄

바람돌이 2023-02-25 19:27   좋아요 1 | URL
유머 역시 코드가 맞는게 중요한데 저랑 잘 맞는 코드였어요. ㅎㅎ 앗 요즘 저의 유머감각을 칭찬해주시는 분들이 늘어나서 으쓱으쓱하고 있습니다. 역시 노력이 중요하다고.... 앞으로도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

다비드상 걔는 완전 꼬마잖아요. 저기 제우스도 마찬가지.... 제가 실제로 본건 거의 다가 꼬마 아기들건데말이죠. 거의 그 크기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른 남자가 저러면 심각하게 병원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

햇살과함께 2023-02-25 22: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목차 너무 맘에 드는데요?
근데 바이런 정말 저렇게 생겼나요?
미화된 건 아니구요? 제 스탈은 아니지만…

바람돌이 2023-02-25 23:24   좋아요 0 | URL
그쵸. 저도 목차보면서 신선하다고 생각했어요. ㅎㅎ
바이런 정말 잘 생겼대요. 다른 그림 찾아봤는데요. 저 그림보다 더 잘생겼던데요. 물론 미화된게 있겠지만 그대로 본바탕이 전혀 아니면 저렇게 못나오죠. ㅎㅎ

bookholic 2023-02-25 22: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꼭 읽어보고 싶게 하는 리뷰입니다.. ㅎㅎ
제 리스트에도 올려야겠습니다~~

바람돌이 2023-02-25 23:25   좋아요 0 | URL
재밌게 읽으실 수 있을거예요. 요즘 많이 나오는 다이제스트식 역사서 중에서는 제일 좋았던 책이에요.

희선 2023-02-26 01: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차례가 신선하네요 그래서 몸으로 읽는 세계사군요 정말 몸으로... 그런 걸 찾아내는 것도 쉽지 않을 것 같은데 대단합니다 유머도 있다니... 바이런 초상화를 넣은 건 바람돌이 님이 생각하신 것처럼 이걸 쓴 두 사람이 좋아해선가 봅니다


희선

바람돌이 2023-02-26 21:57   좋아요 1 | URL
컨셉을 잡고 몸의 모든 부위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찾아내고 그것을 억지스럽지 않게 자연스럽게 서술한다고 공이 많이 들어간 책이었어요. 다소 무리가 있는 컨셉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는 훨신 잘 써진 책이었습니다.

은오 2023-02-26 15: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당대의 그리스인들이 생각한 완벽한 남성의 특징 중에 바로 ‘작은 음경’이 포함된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읽고 헐 한국남자들 저때 그리스에서 태어났으면 완벽남에 가까웠을지도? 하다가....
”사적으로는 성난 황소와 같은 음경이 각광을 받았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럼 그렇지....

목차 진짜 멋지네요 ㅋㅋㅋ 오오

바람돌이 2023-02-26 21:58   좋아요 0 | URL
그럼 그렇지요. 그 부심이 어디 가겟어요? 만국공통이지.... ㅎㅎ
목차도 멋지지만 전 그 목차만큼이나 내용이 재미있어서 좋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