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모차르트의 오페라에는 보수성과 급진성이 혼재한다. 무수한 여인들을 농락하다가 지옥으로 떨어지고 마는 전설적 호색한을 그린 <돈 조반니>가 대표적이다. 기독교적 윤리관에서는 참회를거부한 죄인이 마땅히 받아야 하는 최후의 심판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19세기 낭만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돈 조반니는 당대의 도덕과 가치관에 거스르는 반反영웅으로 재평가되기에 이르렀다. 예전에는 악인에 대한 심판이라는 권선징악의 교훈을 중시했다면, 주어진 운명에 대한 주인공의 반항과 거부로 강조점이 옮겨간 것이다.
최근에는 성적 충동과 폭력성 등 인간의 어두운 내면에 초점을 맞춘 심리적 해석도 늘고 있다. 이처럼 어제의 고전에 붙어 있는 묵은 때를 벗겨내는 순간, 작품속의 날카로운 급진성이 되살아난다는 점이야말로 모차르트 오페라의 매력이다. - P240

음악학자 랜던은 "모차르트의 삶에서 상류시민 사회와 쉬카네더의 극장이 서서히 궁정 오페라와 귀족의 살롱과 자리를 바꾸기 시작했다"고 표현했다. 실제 개막 이후 <마술피리)는 1년간 100여 차례 공연할 만큼 인기몰이를 했다.
- P262

궁정 귀족 사회에서 음악가는 요리사나 시종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처지였다. 음아가를 독립적 예술가로 존중하는 시민 사회는 아직 멩아 상태에 머물고 있었다. 입장료를 내는 관객들을 위한 연주회나 인세를 지급하는 악보 출판사도 막 생겨나기 시작한 단계였다. 작곡가들이 홀로 서기 위한 물질적 기반은 취약했다.
- P271

흥미롭고도 비극적인 점은 모차르트가 자신의 운명을 인지하지못했다는 사실이다. 음악학자이자 작가 힐데스하이머는 모차르트가 "늦게까지 (너무나 늦게까지) 평생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고 말했다. "그의 고독은 가장 깊고 은밀한 고독이었고, 삶의 마지막 몇 달 전까지는 의식하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선후배 작곡가와 비교해도 모차르트의 삶은 차이가 있다. 선배하이든의 삶은 평생 에스테르하지 궁정에서 봉직하다가 말년에 영국에서 성공을 거뒀다는 점에서 유쾌한 희극이었다. 후배 베토벤은 치명적인 청력 상실의 고통 속에서도 불멸의 걸작을 쏟아냈다는 점에서 장엄하고 영웅적인 비극이었다. 모차르트는 빈에서 음악적으로든 경제적으로든 성공하리라는 낙관적인 믿음을 버리지않았다. 그 가운데 음악적 성공이라는 절반만 실현됐다는 점에서그의 삶은 희비극에 가까웠다. 그 희비극은 어떤 결말을 맺었을까.
이제 스스로 포기하고 추락한 자‘의 마지막 순간으로 향할 때다.
- P272

그런데도 모차르트 이펙트가 열풍을 일으킨 데는 이유가 있다. 모차르트 자신이 도무지 믿기 어려운 기록을 두루 보유한 불세출의 신동이었기 때문이다. 세 살 반 무렵부터 연주를 시작하고, 다섯 살이되기도 전에 작곡했으며, 여덟 살에 교향곡을 쓴 천재의 신기神技를배웠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이 숨어 있다. 모차르트 이펙트는 과학과 합리성을 가장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기복신앙과도 흡사한 염원이 담겨 있다. 어쩌면 모자르트 이펙트는 냉철한 분석보다는 맹목적 믿음의 대상에 가까울지 모른다.
- P311

숨가쁘게 쫓아온 모차르트의 생애를 한마디로 압축하면 그는
‘타고난 천재 보다는 ‘만들어진 천재‘에 가깝다. 그를 천재로 만든건 우선 아버지 레오폴트였고 그다음엔 ‘18세기 유럽‘이라는 드넓은 세상이었다. 아무리 타고난 재주가 뛰어나더라도 평생 타고난재주로만 먹고사는 사람은 없다. 천하의 모차르트도 마찬가지였다.
모차르트의 원천 기술은 선천적으로 물려받은 재능이 아니라 오히려 거침없이 받아들이고 소화하는 흡수력과 학습 능력에 있었다.
- P314

19세기에 낭만주의적인 모차르트가 있었고 20세기에는 영화 <아마데우스>의 모차르트가 있었던 것처럼, 미래의 후손들에게는 그들만의 모차르트가존재할 것이다. 우리 후손들과 미래의 모자르트‘가 서로 대화를 나누는 모습, 상상만 해도 즐겁고 유쾌하지 않은가. 빈의 공원 벤치에앉을 때마다 슬그머니 미소 짓는 이유다.
- P319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초딩 2021-04-26 22: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모차르트 ^^
정말 한 번 꼭 읽어 보고 싶어요.

바람돌이 2021-04-27 21:40   좋아요 0 | URL
쉬운 글이고 사진이 굉장히 많아서 책장이 잘 넘어가요. 시간 나실 때 한번 읽어보세요. 저는 유튜브 틀어서 음악도 같이 들으면서 읽었어요. 모차르트 음악이 더 좋아지더라구요. ^^
 

흔히 ‘신동 탄생‘은 아이의 재능에만 달린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모차르트 가족의 그랜드 투어는 두 가지 요소를 함께 감안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일러준다. 아이의 재능을 조기에 발견할 수있는 부모의 전문가적 식견과 아이가 충분히 재능을 발휘할 기회를마련해주는 추진력이다. 모차르트 가족의 그랜드 투어는 레오폴트의 예술적 감식안과 추진력, 모차르트의 음악적 재능이라는 삼박자가 행복하게 맞아떨어진 경우였다.
- P72

그랜드 투어를 떠날 당시에 이들 남매는12세와 7세에 불과했다. 하지만 잘츠부르크로 돌아왔을 때 난네를은 15세, 모차르트는 10세였다. 더구나 이들 남매의 놀라운 재능을접한 유럽 궁정 귀족이나 상류층은 똑같은 재주에 두 번 놀라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모차르트 남매의 음악적 재능도 한계 효용 체감의 법칙‘에서 예외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성공리에 유럽 투어를마쳤지만, 정작 레오폴트의 시름은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과연 레오폴트는 어떤 비장의 카드를 마련하고 있었을까.
- P87

따지고 보면 이유는 여러 가지다. 낭만주의 시대에 이르면 베토벤의 음악적 유산을 충실히 계승할 것인지, 고전주의 양식은 완성된 것으로 보고 오페라 같은 다른 분야로 개혁을 확산시킬 것인지를 놓고 독일 음악의 진영이 양분됐다. 이 복잡다단한 논쟁을 딱 한마디로 압축하면 ‘교향곡이냐 오페라냐‘가 된다. 전자에 해당하는슈만과 브람스가 교향곡에 매진했던 반면, 후자의 대표 주자인 바그너가 음악극의 혁신을 주도했던 건 우연이 아니다. 미리 의도했던 건 아니었지만 이러한 현상은 교향곡과 오페라의 교집합이 줄어드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 P90

이처럼 까다로운 조건에 들어맞는 예외적 존재가 모차르트다. 교향곡 41 곡과 피아노 협주곡 27곡, 바이올린 협주곡 5곡과 현악 4중주 23곡, 오페라 22편까지 정식 번호가 붙은 작품 수만 봐도 어디하나 빠지는 장르가 없는 전천후 작곡가가 모차르트다. "모차르트의 음악을 듣는 사람은 그 속에서 18세기 전체 음악을 듣게 된다"는스위스의 신학자 카를 바르트의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니다.  - P90

한 가족에서 두 스타가 탄생하기 힘들다는 점을 인정한다고 해도, 클래식 음악사에서유독 여성들이 배제와 차별의 대상이 됐다는 사실만큼은 부인하기 힘들다. 단네를 역시예외가 아니었다. 1769년부터 남동생 모차르트가 이탈리아에서 눈부신 음악적 성과를거두는 동안 난네를은 어머니와 함께 잘츠부르크에 남아 있었다. 반대로 1777년부터 모차르트가 어머니와 파리 여행을 할 당시에는 레오폴트와 함께 잘츠부르크에 머물러다했다. 난네를 역시 작곡을 했고, 동생 모차르트도 편지에서 난네를의 작품을 듣이 평가했다. 하지만 레오폴트는 편지에서 난네를의 작품에 대해서는 언급한 적이 없다. 레오폴트가 특별히 비정하거나 부당했다기보다는 남녀 차별적인 당시의 고정 관념이 투영된 결과로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아쉽게도 난네를의 작품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 P114

마지막으로는 신분적 질서의 대립도 깔려 있었다. 아버지 레오폴트는 음악가가 교회와 궁정에서 일자리를 구하지 않으면 비렁뱅이신세로 전락하는 봉건적 세상에서 실있다. 반면 모차르트는 봉건적질서에 넌더리를 내고 ‘프리랜서 음악인‘이라는 전인미답의 세계로 나아가려고 하고 있었다. 이들 부자는 세대와 지역, 신분이라는삼중의 갈등을 겪고 있었다. 모차르트의 눈에는 아버지 레오폴트와고항 잘츠부르크, 내주교가 구질서의 삼위일체 처럼 보였을 것이다. 이 점이야말로 이들 부자의 진정한 비극이었다.
결과적으로 모차르트는 대주교와의 갈등을 통해서 아버지 레오폴트로부터도 독립을 쟁취한 셈이었다. 거꾸로 레오폴트의 입장에서는 모차르트가 잘츠부르크를 떠나려는 모습이 자신에 대한 거부로 보였을 것이다.
- P173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희선 2021-04-25 0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차르트한테 누나가 있었군요 그것도 재능이 있는... 버지니아 울프가 셰익스피어한테 여동생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걸 쓰기도 했던데, 모차르트한테 누나가 있었네요 누나가 쓴 곡은 전해지지 않았다니 아쉽습니다


희선

바람돌이 2021-04-25 02:04   좋아요 1 | URL
굉장히 재능이 뛰어났다죠. 그럼에도 동생에게 밀렸고, 아버지 레이폴드에 의해 결혼한 이후 평범한 삶을 살았다는데 어쩌면 그녀의 재능도 모차르트 못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무하는 작품을 제작할 때 작품의 세세한 부분 모두를 구성하고디자인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그런 이유로 무하의 풍부한 상상력으로 완성된 여인들의 의상, 소품, 액세서리 하나하나가 우리에게 생생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점 때문에 그의 작품은 프랑스의 패션과 유행에 큰 영향을 끼쳤다.  - P168

무하는 비로소 포스터 화가, 삽화가로서뿐만 아니라 보석 디자이너, 조각가, 실내 장식가로서도 그 재능을 알리게 되었다. 이제파리 유행의 정점에서 사람들은 무하라는 이름과 만나게 되었다.
그는 실로 다양한 방면에 재능을 보여주며 아르누보의 총체 예술‘
이념을 성공적으로 보여준 가장 독창적인 아르누보 예술가 중 한사람이 되었다.
- P175

무하에 대해 알려진 것은 대부분 파리 시대의 장식적인 포스터나 패널화에 한정되어 왔다. 미치 파리를 떠닌 그는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비춰졌다. 그러나 조국에 돌아온 그는 여전히 영감이 넘치는 포스터들을 남겼다. 체코 시대의 포스터는 파리 시대의 화려함은 사라졌고 단순하고 민속적인 요소들이 강한 인상을 남기고있다.
- P240

문화와 예술, 평화와 종교적 자유에 있어 인류사에 공헌한 슬라브 민족의 역사를 그려내면서 무하가 꿈꾸었던 일은 모든 슬라브민족이 현재 겪고 있는 고통과 억압에서 벗어나 이상적인 화합을이루는 것이었다. 그것은 당시 팽배해 가던 범게르만주의의 폭력성에 대한 대항이었고 민족의 독립을 고취하는 선창가였다.
- P254

제1차 세계 대전을 겪은 후에 무하가 선택한 전쟁의 장면들은전쟁의 비극성을 극적으로 보여주며 전쟁의 잔혹성을 통렬히 비판한다. 비트코프 전쟁이 끝난 후〉, 〈보드나니에서의 페트르 헬치츠키〉, 〈그룬발트 전쟁이 끝난 후>에서처럼 무하는 치열한 전투 장면을 그리지 않았다. 그보다는 전투 후의 참화와 남아 있는 자들의고통을 묘사했다. 그는 비참한 전쟁의 고통을 통해 평화를 호소하고 있었다.
- P259

그의 작품에서 사진을 사용하는 것은 오히려 작품의 정지성과 비현실성을 강화하고 있다.  - P299

당시 이러한 상징과 장식은 이상주의와 신비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었고 또한 이것은 세기말 프랑스의 다른 동향, 심령학과 오컬트의 유행과 연결되어 있었다. - P303

이 시기 심리학의 발전은 이전에는 이해되지 않았던 방법으로예술이 보는 이에게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을 밝혀냈다. 특히 최면과 암시의 기법은 이미지를 통해 직관적인 감정이나 정신을 전달하려 했던 상징주의 화가들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 P305

무하는 무의식의 이미지와 최면적인 암시력에 의해모든 소비재는 영향을 받아들이기 쉬운 소비자에게 호소하는 수단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광고, 장식 패널, 달력, 비스킷 깡통,
접시, 일용을 위한 여러 다른 제품들, 이것들은 무하에 의해 고도로 도덕적인 용도로 받아들여져 예술이 된다.
- P31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당대의 새로운 예술에 목마른 미술가들은 철과유리, 영화와 자동차, 새로이 출연한 대중 매체에 걸맞은 양식을창출하고자 했다. 아르누보는 미술과 삶이 결합해 주변 환경의 총체적 변혁을 요구하는 예술 운동이었다. 아르누보는 상류층의 전유물이었던 예술을 시민의 손에 쥐어 주었다.
- P5

페르펙타 자전거의 포스터 속 여인은 자전거의 심벌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무하‘라는 화가의 세기말 이상적인 여인의 심벌이기도 했다. 무하가 그린 포스터 속의 상품을 구매한다는 것은다시 말해 ‘무하라는 브랜드를 소비하게 되는 것과 같았다. 현대의 우리는 특정 대중 스타의 이미지가 특정 상품 혹은 기업의 이미지를 대변하는 데 익숙해져 있지만 무하가 살던 시대에 이것은 완전히 새로운 개념이었다.
- P121

책을 위한 무하의 일러스트는 상업적 포스터보다 다양한 스타일로 구사되어 그의 철학적이고도 미학적인 관심사, 영적인 교감,
슬라브 민족에 대한 애정이 드러나 있다.
- P134

사람들은 《일세를 보며 중세의 필사본을 연상하면서도 그것이매우 현대적이라고 느꼈다. 이렇게 무하는 프랑스 아르누보에 또하나의 새로운 장식 언어를 소개하게 된 것이다.  - P150

이 시대의 감수성이란 역시 상징주의에 있었다. 우리 시대의 눈으로 이 시대의 장식 미술을 보고 있노라면 장식은 그저 장식일 뿐표면적이며 궁극적 실체가 없는 것으로 여겨지기 쉽다. 그러나 당시 상징주의 이론은 장식적인 회화의 새로운 개념을 끌어내고 있었다.
장식 미술은 상징적이고 종합적인 형태를 통해 보는 이로 하여금이상을 직감하게 하는 예술 표현의 가장 심원한 수단이었다. 물론빅토리아 시대나 에드워드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장식이 내포한 상징적인 의미들은 지금의 우리에게 보다는 훨씬 익숙한 것이었다. 또한 아름다운 미술작품은 우연이든 의도적이든 자연을 닮아야 한다고 생각한 아르누보 작가들에게 자연의 형태는 상징적인것으로, 비의적인 종교적 의미를 띨 수도 있었다.
- P16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9년 1월 당시 중3졸업을 앞두고 있던 둘째 딸과 단 둘이서 떠났던 도쿄 여행은 운이 좀 좋은 편이었다.

(이 해 봄에 No Japan이 시작되었으니 하마터면 오래도록 못갈뻔..... )

하여튼 여행에서는 나는 항상 운이 좋은 편이다. 감사하게도....

 

당시 도쿄에서는 각종 거대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는데 뭉크, 베르메르, 루벤스 전이 한꺼번에 열리고 있었고, 심지어 전시회가 열리는 미술관이 우에노 공원 안에 다 모여 있다는 것 역시 행운이었다.

저 전시회들 중에서도 최고 화제였던 것이 바로 뭉크 전시회였다.

이 책에서 몇 번 언급되는데 당시 노르웨이의 국립미술관이 대대적인 리모델링 작업이 들어가는 바람에 뭉크의 작품들을 전시할 공간이 없어지면서 대규모의 해외 전시를 진행하고 있었던 것인데 일본이 그 기회를 낚아챘던 것 같다.

덕분에 평소라면 나라 바깥으로 한꺼번에 나오는건 꿈꾸지도 못할 뭉크의 대표작들 대부분이 한꺼번에 전시되어 뭉크의 진면목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드문 기회였다.

물론 머나먼 노르웨이를 직접 방문하는 것은 빼고 말이다.

 

정말 큰 기대를 품고 전시장에 갖고, 이 책에 나오는 뭉크의 대표작들을 포함하여 그의 초기부터 말년까지 정말 꽉 찬 컬렉션이었는데....

아 전시회를 감상하는건 작품의 질로 모든 것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 문제였다.

전시 공간은 그리 넓지 않은데 아니 사람이 무슨....

심지어 그 유명한 <절규>앞에선 방 입구부터 3줄 겹으로 줄서서 한발짝씩 한발작씩 움직이며 그림의 영접을 기다려야 했고, 정작 그림앞에선 1분도 채 머무르지 못했다.

일본 사람들이 서양화에 관심이 많다더니 이건 무슨 돗대기 시장같은 꼴이다.

사람 많다는 얘기는 들어서 평일 아침 미술관 문 열자마자 갔음에도 이 꼴이다.

 

뭉크는 <절규>의 화가이고 그의 그림 대부분이 우울과 절망과 어쩔 수 없는 운명에 끌려가는 사람들의 비극성에 맞춰져 있다.

그런 그림을 제대로 보려면 대충 분위기는 맞춰야 하는데 이건 무슨....

내 마음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너무 힘들어서....

그래도 꾸역꾸역 전시회를 보고 나오니 딸이 엄마 토할 것 같아.....

마음이 토할 것 같은게 아니고 진짜 토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절규>의 감흥은 '아 이 유명한 작품을 드디어 봤어'라는 정도 외에는 딱히 없었다.

뭔가 특별한 감성을 느끼기 위해서는 실제 작품에 대한 약간의 신비감이 있어야 하는데 이 작품은 지나치게 알려지고 온갖 재인용으로 이용되어 져서 그림 속 주인공의 비명을 느끼기에는 너무 다른 이미지들이 중첩되어 버린 것이다.

심지어 <절규>속 주인공을 보면 영화 <스크림>의 가면이 자동으로 떠오르는 것만으로 작품의 이미지는 반쯤 날아가버리니 말이다.

지나친 상업적 인용의 폐해라고나 할까?

 

이 노트를 읽어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하나 알 수 있다. 뭉크의 노트에 ‘절규‘라는 말은 없다는 점이다. 절규. 누가 처음 한국어로 번역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노르웨이어 스크리크skrik 는 있는 힘을다하여 부르짖는 ‘절규‘보다는 너무 놀라 지르는 외마디 소리인 ‘비명‘으로 해석하는 게 더 적절하다. 이 그림을 더 정화히 이해하는 데도 ‘비명‘이라는 단어가 도움이 된다. - P57

 

그리고 제목인 절규 역시 항상 뭔가 안맞다 싶었는데 그래도 별 생각없이 그냥 절규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그 위화감을 겨우 알아챘다.

<절규>가 아니라 <비명>이라는 것을.....

제목 하나 다르게 보는데 그림이 새롭게 보인다.

그의 내면의 우울과 절망이 온 하늘을 흔들리게 하는 순간이 훅 다가오는듯하다.

 

그래 뭉크는 한번도 제대로 희망차거나 마음껏 행복해본적이 없는 사람이었던듯 했다.

그의 그림들이 대부분 그러했는데 이 책을 통해 만난 뭉크 역시 마찬가지였다.

타고난 기질이 그러했고, 어릴 적 맞이한 어머니와 여동생의 죽음, 그리고 유부녀와의 비밀스런 첫사랑과 밀회, 그리고 헤어짐....

그의 평생을 지배하는 이 이미지들에서 그는 한번도 자유로웠던 적이 없었던 것 같고, 백야와 긴 겨울이 지배하는 노르웨이의 자연환경 역시 그의 이런 성향을 강화시켰던 듯하다.

평생 마음속에 비명을 안고 사는 사람의 삶이랄까?

 

여성을 그린 그림들은 <마돈나>를 비롯하여 모두 팜므파탈의 이미지가 강하고, 아예 대놓고 벰파이어로 표현되는 경우도 많았다.

평생 혼자였고, 그것 때문에 괴로웠으나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이 또 괴로움이었던 화가랄까?

그런 그의 외로움이 걸작들을 만들어냈지만 한 인간으로서의 뭉크에게는 연민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워낙 은둔형의 인간이라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화가 자체에 대한 특별한 감상을 가지기가 힘들었다.

그의 그림들 역시 어려운 해석이 필요없이 당대의 불안과 개인의 불안이 중첩되어 한 인간을 얼마나 절망적으로 보이게 하는지 애잔한 마음으로만 보게 된다.

 

그런 것들 때문인지 실제 전시에서 가장 인상적인 감동을 준 것은 그 자신의 다양한 자화상들이었다.

특히나 죽기 직전에 그렸던 말년의 뭉크

 

 

자신의 방에 우두커니 서있는 노년의 뭉크는 이제 막 여행을 떠나려는 듯한 느낌이다.

죽음이라는 마지막 여행.

책에서는 그림속 상징들에 대해 이것 저것 얘기해놓았지만 그건 다 필요없는 얘기인듯 하다.

오랜 시간을 외롭게 보내고 그 고단한 인생을 이제는 접어놓으려는 듯, 지친듯하지만 평온하기만 하던 저 표정은 이제서야 길고 힘들었던 삶이라는 여행을 마칠 수 있구나, 또한 여전히 나는 혼자이구나라는 소리없는 비명이 들리는 듯하다.

 

온 하늘이 붉게 요동치고 사방이 그림속 주인공을 향해 압박하던 <절규>속 비명은, 노년에 이르러 모든 것이 단정하게 제자리를 지키지만 어느 것도 애착 가는 것이 없는 조용한 <비명>으로 보인다.

그렇게 하나의 작은 삶이 끝났다.

뭉크의 마지막 저 손에 아주 작은 무엇 하나라도 쥐어주고 싶다.

그 죽음이 외롭지 않게....

 

 

 

 


댓글(20) 먼댓글(0) 좋아요(3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cott 2021-03-14 17:5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우와 바람돌이님 2019년 뭉크 전시회 정말 좋은 기회였네요.
일본이 시스템(전시) 많이 뒤떨어져요.
예약제 도입도 않아고 마냥 기다리게 하고 줄세우고 미어터지게 만들고,,,

따님 말씀처럼 뭉크 그림 넘 오래 보고 있으면 우울에 늪에 빠져버리는,,,





바람돌이 2021-03-14 18:03   좋아요 3 | URL
맞아요. 시스템은 진짜 후짐요. 다른 미술관 갔을 땐 홈페이지에서 쉬는 날을 아예 잘못공지해놔서 못봤다는... 그림도 전체적으로 다 우울한데 전시환경도 우울했어요. ㅠ.ㅠ
아니면 우울함을 확 느껴보라고 일부러 그렇게 만든걸까요? ㅎㅎ

새파랑 2021-03-14 18:0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바람돌이님의 그때 당시의 절규가 보입니다ㅎㅎ 리뷰 읽고 자화상 그림을 다시 보니 외로움이 느껴집니다~

바람돌이 2021-03-14 18:04   좋아요 4 | URL
뭉크 자화상은 젊었을 때것도 딱히 다르지 않아요. 조금 더 명민해 보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우울해요. 그래서 사람들이 뭉크 그림을 좋아하는 걸까 싶기도 하네요. 아 나보다 우울한 사람 여기 있구나 같은 대리 충족? ㅎㅎ

그레이스 2021-03-14 18:13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는 거리를 걷다가 어디선가 비명소리를 듣고 공포에 휩싸였다는 고백을 보고, 실존주의자들이 말하는 극단의 실존체험이란 생각을 했습니다.
세계가 낯설고 차라리 죽음이 편할 것 같은 현기증을 느끼는...
싸르트르의 구토와 비슷한 느낌이었다고 할까요?

바람돌이 2021-03-14 22:56   좋아요 3 | URL
저는 사실 성격이 좀 덜렁덜렁해서 그런지 그런 체험은 실감을 잘 못하겠더라구요. 그저 막연히 아 그럴수도 있겠구나 싶은 정도랄까? 앞으로도 그런 극단적인 체험은 안하고 싶으니 예술가는 글러먹은 것이겠지요. ㅎㅎ

미미 2021-03-14 18:3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 사건 전에 친구랑 나가사키에 다녀왔어요. 🥲
아르테 시리즈에 <뭉크>도 있었군요~♡ 오늘 책주문 하려고 했는데 마지막 한 권으로 정함요👍

바람돌이 2021-03-14 22:58   좋아요 2 | URL
오 나가사키 카스테라 먹고싶네요. ㅎㅎ 아르테 시리즈는 책마다 저자가 다르고 다루는 인물도 워낙 다양해서 편차가 좀 있더라구요. 뭉크는 그림으로 보는게 더 좋다는게 제 생각입니다. ^^

페넬로페 2021-03-14 21:5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한국에서 연 뭉크 전시회에 갔었는데 ‘절규‘‘앞에서 바람돌이님과 비슷한 느낌이었어요~~
오히려 올려주신 저 자화상 앞에서 한참 서 있었던 기억이 나네요^^

바람돌이 2021-03-14 23:00   좋아요 3 | URL
아 같은 느낌을 받다니 좋네요. 사람마다 그림에서 받는 느낌은 천차만별이겠지만 그래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공통성은 있는 것 같아요. 절규가 진짜를 봤을 때 감흥을 크게 못주는건 너무 많은 인용들에 의해서 생긴 선입관이 많이 작용하는거 같고요.

겨울호랑이 2021-03-14 23: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뭉크의 자화상을 보니 정말 떠나는 듯한 느낌을 받네요... 수많은 해설보다 말씀처럼 직관적으로 받는 느낌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바람돌이님의 말씀에 동감합니다. 좋은 작품 알게 되어 감사합니다!^^:)

바람돌이 2021-03-15 00:05   좋아요 1 | URL
그래도 해설을 보면 그 직관이 더 풍부해지는 경우도 있다죠. ㅎㅎ 그림마다 다 다른것도 같고, 그림이나 책을 볼 때의 나의 마음과 상황에 따라서도 다 다른 것 같아요.

cyrus 2021-03-15 09: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뭉크도 자화상을 많이 그린 화가에 속하는데, <절규>가 그의 대표작으로 인식된 탓인지 뭉크의 자화상 작품들이 덜 주목받는 편이에요.

바람돌이 2021-03-15 15:05   좋아요 0 | URL
맞아요. 정말 자화상을 많이 그렸더라구요. 근데 하나같이 어찌나 심각해보이는지.... 안스러웠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자화상들이 다 마음이 많이 가더라구요. 다른 유명한 그림들보다 훨씬 더요. 그 때 제 마음이 좀 우울했을까요? ㅎㅎ

mini74 2021-03-15 09: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죽음과 관련된 그림들이 참 좋았어요. 평생 죽음이란 그림자와 함께 했구나 라는
아이들은 본인 이야기같아서인지 사춘기란 그림 좋아하더라고요. ~

바람돌이 2021-03-15 15:06   좋아요 1 | URL
사춘기의 그 수줍으면서도 대담한 느낌 기억나네요. 아이들이 이 그림에서 동류의 감흥을 느끼는군요. 저희 집 딸은 그 그림은 스치던데.... ㅎㅎ

syo 2021-03-15 12: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절규 걔가 소리를 빽 지르는 게 아니라 어디선가 들려온 비명에 깜짝 놀라는 마음을 표현한 표정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 그림 속 다른 이들은 듣지 못하고 저 혼자 듣는 어떤 절규소리 때문에 ‘으아아아아ㅅㅂ깜짝이야이거뭐야!‘ 하는 거라고....

바람돌이 2021-03-15 15:07   좋아요 0 | URL
맞아요. 주변에서 절규가 들려와 얘가 미치려고 하는거요. 이 책의 해석도 그렇고, 실제 뭉크가 한말도 그게 맞아요. 근데 왜 제목이 절규가 되었는지는 저도 참 궁금.... ^^

희선 2021-03-16 01: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뭉크 그림을 볼 수 있는 기회였는데 사람이 아주 많았다니... 일본 사람도 그걸 알고 많이 그림을 보러 왔나 보네요 다른 전시회는 어땠는지... 책에서만 보던 그림을 실제 보면 어떤 느낌이 들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하는데, 뭉크 그림은 다른 데 써서 다른 걸 더 떠올리기도 했군요


희선

바람돌이 2021-03-16 11:06   좋아요 1 | URL
일본의 경우 서양미술에 대한 관심이 우리나라와는 비교도 안되게 높다더라구요. 그래서 이렇게 큰 미술관이 우에노 공원 안에만 5개인가가 몰렸있고, 굵직굵직한 전시회가 끊이지 않는다더군요. 다른 것도 마찬가지겠지만 그림도 책만큼 좋은 것도, 안좋은것도 있더라구요. 아니면 책과 비교살 수 없게 좋은 것도 있구요. 저는 이걸 사진빨이라고 하는데 사람처럼 그림이나 조각 같은 것도 사진빨 잘 받는 애들은 따로 있더라구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