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핀은 정말 볼가강으로 향했다. 배 끄는 인부들과 친해져 그들의표정과 동작을 관찰하고 그들의 이야기에 싫증 내지 않고 귀를 기울이자 그들 한 명 한 명이 실로 개성 넘친다는 것을 새삼스레 깨닫는다. 레핀 자신이 지금까지 극빈층을 하나의 검은 집단으로밖에 보지않았다는 증거였다. 둔전병(屯田兵)의 아들로 태어나 고생 끝에 미술학교에 다니는 처지면서도 계급 사회에 눈이 어두웠던 것이다. 그때부터 그의 눈은 인간 자체를 향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완성한 그림이 〈볼가강의 배 끄는 인부들이다. - P101

둥근 유리병에 붉은 꽃이 두어 송이 꽂혀 있다. 어떤 꽃인지는 모른다. 혹갈색 연무가 화면 전체를 뒤덮어 낡고 그리운 세피아 톤 사진을 보는 듯하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 있는 듯한 이 독특한 색조는 화가의 이름을 따서카리에르의 안개‘라고 불린다. 야외의 밝은 색채로 둘러싸인 인상파 전성시대에 그는 내면으로 침잠해 색의 가짓수를 줄인 모노톤의 아름다움을자신의 트레이드마크로 삼았다. 좋아해 주는 사람이 있기는 했지만 결국대중의 인기는 얻지 못했다. 마치 순문학 회화 같다고 할까.
- 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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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들은 최소한 고립 상태를 해제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그러한 행위가 도시의 이른 멸망을 유도하게 될 것을 두려워했고, 대부분은 어쩔 줄을 모른 채 공포와 혼란에 빠져 있었다. 감염은 속절없이 퍼져나갔다. 온갖 뜬소문과 괴담이 돌기 시작했다. 여러 사람의 혈액을 한꺼번에 주입하여 면역 기능을 강화하면 감염으로부터 안전하다는 속설이 퍼겼을 때, 불멸인들은 서로를 해치기 시작했고, 폭력은 감염병보다 빠르게 전파되었다.
- P36

완전한 믿음도 완벽한 연기도 아닌,
내가 라이오니라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단지 그렇게 믿고 싶은 상태. 기계가 죽음을 맞이할 때 어떤 상태가 되는지 나는 상상할 수 없지만, 그런 종류의 중첩 상태가 있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 열흘 동안, 셀은 어떤 순간에는 나를 라이오니라고 믿고, 어떤 순간에는 그렇게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나를 라이오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낯선존재로 대하며 이어지는 그 기나긴 이야기가 가능했을것이다.
- P47

나는 지금도 가끔 눈을 감으면 셀을 만난다. 그는 무너져 내리는 도시를 지키며 소리 내어 웃고 있다. 파편들이 셀의 위로 떨어진다. 그리고 이상한 일이지만 그 풍경속에는, 내가 아닌 라이오니가 있다. 죽어가는 셀의 곁에서 라이오니는 셀의 손을 잡는다. 둘은 멸망을 맞이하고있지만 불행하지 않다.
나는 그 뒷모습을 바라본다. 나의 원본이 아니라, 그자체로 최후이자 유일한 존재였던 라이오니의 모습을 - P49

그래서 이 주제를 다룰 거라면 아주 멀리 가자고 생각했다. 멀지만 나에게 친근한 세계, 그러니까 우주가 배경인 청소년 SF의 세계이다. 초광속 우주선을 타고 은하계로 진출하는인류, 장엄한 그림이지만 여기엔 좀 오싹한 구석이 있다. 멀리서 보면 인류는 바이러스와 크게 다르지 않다. 자신의 유전자를 복사해 최대한 많이 전파하려는 작은 로봇들. 이 유사점을파보면 재미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 너무 직설적이지는않게. 너무 직설적이면 쓰는 내가 재미없을 테니까.
- P70

물론 나도 2020년을 기점으로 세상이 바귀었다는사실 자제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실습실에 들여서는 안되는 사전 지식이지만, 근대인들에게 2020년은 혐오를재발견하는 시기였다. 혐오가 죄조로 발명된 게 아니고,
잠재해 있던 혐오를 하나하나 그집어내기 시작안 시대라는 뜻이다. 감염병이 전 세계에 버지자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증오하기 시작했다. 원래도 싫어했지만 이제 더는 숨기지도 않았다. 그래서 이 시기의 혐오에관해서는 남아 있는 자료가 엄정나게 많았다. 말도 안 되게 많았다. 슬모없는 21세기인들 갇으니.
- P149

2020년이 2019년과 달라지기 시작안 것은, 2019년사람들이 모두 병으로 죽어버려서가 아니다. 그보다는2020년 사람들이 2019년의 삶을 불결하다고 느기기 시작안 게 결정적이었다. 2021년 사람들은 2020년의 생활양식마저 비위생적이라고 느겼고, 2022년 사람들은 그2021년에 대해서도 우월감을 갖게 되었다. 격리실습실이시간을 격리하듯, 한 시대는 바로 압 시대와 거리를 두었다. 매우 잛은 시간 간격을 두고,
- P150

"통촉하여 주시옵소서어어어어!"
그 말은 세상에서 제일 억울하게 들리는 문장이었다.
글자 그대로 내면의 억울함이 분출하는 듯안 발성이었다.
문자를 동해 전달되는 의미 이상의 무언가가 서한지의목소리에 담겨 있었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한(恨)이라는 건가?
- P152

언니가 다니는 회사는 어떤 면에서는 첨단이면서 어떤부분은 구식인 게 비슷하다. 언니는 사람과 사람의 피부가 맞닿는 것이 진짜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포포처럼 접촉 혐오가 있는 젊은 애들이 이해가 통 안 간다고 혀를차는 구식 인간이다. "탈학교가 사람들을 다 버려놨다니까." 언니가 투덜거리면 포포는 그냥 못 들은 척한다.
- P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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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아키아의 내부를 둘러보면 추억들이 저마다 내게 속삭이며 말을 걸어온다. 그건 각각의 물건에 애초부터 완결된 형태로 담겨 있었던 이야기가 아니다. 그 물건이 나를 향해 밟아온 여정의 이야기이면서 그걸 내가 맛이 하느라 남긴 자취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수집이란 그 물건의 오랜 이야기에 내 이야기를 얹고 싶은 마음이다. 내가 눈 돌린 세계에 나름의질서를 부여한 뒤 그 세계에 나를 붙들어 매는 행위다. 그러니까 수집품은 그 물건의 역사와 수집한 사람의 삶이 만나 뒤엉키는 순간에 새로운 이름으로 다시 태어난다. 나는 지나은 삶의 은유로 가득 찬 추억의 극장 파이아키아에서 끊임없이 서성이는 관객이다.
- P32

나이가 들어갈수록 다양한 취향에 대해 마음을 열게되고, 타인의 취향에 대해 적대감을 드러내지 않게 되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시금, 취향의 비무장지대.
- P392

동네 레코드숍에서 쥬스 뉴튼의 레코드판을 사 들고 돌아오던날, 설레면서도 아쉬웠다.
왜냐하면 집에 레코드판을 들 수 있는 오디오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음악을 틀 수 있는 기기라곤 당시 우리 집에 카세트테이프 레코더밖에 없었다. (하도 많이 들어서 그 카세트테이프레코더의 모델명이 지금까지 생각난다. 아직 LG가 아닌, ‘금성‘에서 나왔던 TCR-433이었다.) 레코드판을 틀 수 있는 오디오도 없는데 얼마나 갖고 싶었으면 레코드판을 먼저 사 들고 들어오다니.  - P395

그냥 그건 유전자의 문제다. 말하자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수집하는 자와수집하지 않는 자. 물론 그 둘 사이에 우열 같은 건 없다. 하지만 명백히 차이는 있다. 좀 더정확히 말하면 나는 수집하는 자가 아니라, 수집하지 않을 수 없는 자다.
- P4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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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0-10-23 2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한때 두 종류의 사람으로 나누곤 했죠. 독서를 하는 사람과 안 하는 사람.
그다음엔 글을 쓰는 사람과 쓰지 않는 사람으로 나눴고요. ㅋ

바람돌이 2020-10-23 21:11   좋아요 1 | URL
하하하 그렇게 나누면 끝이 없을것같네요. 전 특별히 사람을 나누어서 생각하는건 잘 모르겠어요. 친한 사람과 친해지고싶지않은 사람? ㅎㅎ
 
르코르뷔지에 - 건축을 시로 만든 예술가 클래식 클라우드 23
신승철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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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태어나서 최초로 살았던 집은 창고위 다락방이었다.

시골마을에서 오래 살았다보니 그 다락방은 늘 내 눈앞에 있었고, 그곳에서 살던 기억은 간간이 단편들이 떠오른다.

다락방이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낭만은 없다.

다락방이니 온돌이 있을리 없고 방은 늘 추웠을테다. (솔직히 너무 어릴때라 추웠던 기억은 없다.)

부엌이 따로 없어 방안에 석유곤로를 두고 밥도 해먹고, 아마도 겨울에는 얼어죽을 듯 시린 방을 난로의 열기로 데우고 두툼한 이불로 때웠을거다.

다락방이다보니 내려오는 계단이 꽤 가팔랐는데 어머니의 증언에 의하면 내가 거기서 몇번 굴렀단다.

지금도 내 머리가 시원찮은건 그 탓이라고 나는 굳게 믿고 있다.

그 집에서 우리집 셋째인 내 막내동생까지 태어났으니 딱 6년을 살았다.

그 뒤 잠시 온돌이 있는 방 한칸으로 옮겼었는데 나는 오히려 이집의 추위가 더 기억이 난다.

겨울이 되면 우풍이 어찌나 세던지 이불속에서 나오지 않고 누워, 얼굴만 빼꼼 내밀고 엄마가 입에 넣어주던 고구마를 먹던 기억이 있다.

내가 8살이 되던 해 아주 작은 양옥집을 새로 지어서 이사를 했다.

부모님이 처음으로 가진 집이다.

지금 생각하면 이 집도 딱히 좋은 환경은 아니어서 앞은 좁고 뒤쪽은 길다란, 그런데 그 뒤쪽이 좌우뒤로 모두 꽉 막혀서 하루종일 햇빛이라곤 일도 들지 않는 어두컴컴한 집이었다.

시골마을에서 가난이란게 뭔지를 알려면 배를 곯아야 하는데 그정도는 아니었고, 자식들 먹는것과 공부시키는 것에 유난했던 어머니덕분에 나는 우리집이 가난한지도 잘 모르고 자랐다. 다행이었다고나 할까?

내 부모님이 햇빛 잘 드는, 사람이 살만한 집을 가지는데는 딱 15년이 걸렸다.

 

그 시절은 내게는 천방지축 행복하기만 한 어린시절이었지만 어머니에게는 어찌 살았는지 지금도 눈앞이 캄캄한 시절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집이란 무엇일까를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르코르뷔지에는 집을 살기 위한 기계라고 불렀다그는 우리 삶에 최적화된 집을 만들기 위해 자동차비행기대형 여객선을 모델로 삼았다 기계들은 표준화규격화를 거쳐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킨다르코르뷔지에는 여기에 시대정신이 담겨 있다고 믿었다집이라는 기계 "목욕햇빛따뜻한 ,
찬물난방요리가족 간의 대화위생아름다운 비례같은 복잡한요구를 가장 실용적이고 효율적인 방식으로 충족시켜야 한다산업화 이후 그의 시대는 다양한 재료와 구조를 통해 그에 걸맞은 해결책을 속속 내놓고 있었다- P134

 

르코르뷔지에가 살았던 20세기 초반부터 지구의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한다.

농업 생산력의 발달과 페니실린같은 항생제의 개발은 그 폭발의 주요 이유 중의 하나였다. 거기다가 산업화 이후의 도시로의 인구집중은 더더욱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고 있었다.

그러면 과연 주택 문제는 어떤 대책을 가지고 있었을까?

 

산업혁명기 투기꾼들에 의해서 지어진  맨체스터의 노동자 주택단지들을 보면 그것은 집이 아니다.

인간으로서의 기본 삶을 해결 할 수 있는 공간이 전혀 아닌 것이다.

 

심지어 저 집들은 주택 하나에 한 가족이 살았던 것도 아니고, 대부분의 가족들은 방 하나를 차지할 수 있었을 뿐이다.

더더더 심지어는 저 마당에서 사는 가족도 있었단다.

 

르코르뷔지에가 말하는 "목욕햇빛따뜻한 ,찬물난방요리가족 간의 대화위생아름다운 비례의 집은 중산층 이상의 계급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지 사회 하층의 사람들에게는 꿈조자 꾸기 어려운 허상이었다.

 

어떤 건축가도 이 문제에 대해서 제기하지 않을 때 르코르뷔지에는 주장하고 계획하고 행동한다.

 

하지만 르코르뷔지에는 예술가의 독창성이 발휘된 집에서 누구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주택은 표준화규격화되어야 하고대량생산될  있어야 했다그는 건축가가 아니라 만인을 위한 집을 짓겠다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 P176

 

그러면 르코르뷔지에는 도대에 어떤 식으로 모든 사람에게 인간다운 저택을 제공하고자 했을까?

사실 답은 너무 쉽다. 우리 주변에 널려있는 대형 아파트 단지를 생각하면 된다.

그의 도시계획 도판들을 보면 우리나라 곳곳에 있는 아파트 단지들이 바로 떠오른다.

이쯤에서는 그게 뭐야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형태가 같다고 그 속에 담긴 정신이 같은 것은 아니지 않을까?

 

르코르뷔지에가 꿈꾼 도시와 건축을 요약하면

인간의 신체를 기반으로 하는 모될로르 척도에 의해 구획되어 짐으로써 는 공간,

필로티를 세워 벽면의 한계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활용되는 평면을 통해 다양한 가족 구성원들을 자유롭게 수용할 수 있는 공간,

자유로운 입면으로 아름다움을 충분히 표혀할 수 있는 건축,

옥상정원이나 도시내 편의시설들을 통해 모두가 자연을 누리고 휴식과 편의를 누릴 수 있는 건축이라고 할 수 있다.

 

잠시 생각해보면 그 많은 인구를 수용할 수 있는 도시의 대안이 아파트 단지가 아니고 무엇이 있을까싶다.

르코르뷔지에의 계획이 한국에 와서 그의 인간적인 척도를 모두 상실하고 형태만 남은 것이 건축가의 책임은 아니지 않는가?

더더군다나 집이 삶의 터전이 아니라 부동산투기와 재산증식의 수단이 되어 버린 것은 더더욱 르코르뷔지에의 책임이 아니지 않는가?

르코르뷔지에 자신의 종교는 건축이었다.

그는 자신의 건축 계획 외에 어떤 이념에도 상관하지 않았다.

심지어 파시스트와도 만나 도시계획을 논의한다.

하지만 그의 도덕성을 논의하기에는 그의 건축이상이 너무 아름답지 않은가라고 반문하고싶다.

누구도 사회적 하층 사람들의 가장 기본적인 주거의 문제를 얘기하지 않을 때 대중을 위한 건축을 얘기했던 어쩌면 건축계의 가장 급진적인 혁명가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책속에서 르코르뷔지에의 이상을 공유한 오스카 니마이어라는 건축가가 설계한 브라질리아의 도시 구획 사진을 보면 딱 북한의 평양이 떠오른다.

책에서 따로 언급은 없지만 실제로 르코르뷔지에의 계획은 전후 사회주의 국가들에도 많은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싶다.

기본적인 주택의 공급을 국가가 책임진다는 사회주의의 이념에서 르코르뷔지에의 규격화, 표준화를 통한 대단위 도시계획과 주택의 보급은 딱 들어맞는 이론일 수 있다.

실제로 구 사회주의 국가들의 주택단지를 보면 르코르뷔지에의 구상과 일치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물론 현실의 사회주의 국가들 역시 대부분 주택정책이 성공적이지는 못했던 듯하다.

소설 <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다보면  사회주의 국가에서 청춘들이 자신만의 공간을 갖는 것이 얼마나 요원한 일인지가 나온다.

기성세대들은 국가에서 배급된 주택을 갖고 있지만 이후 경제정책의 실패로 국가는 더 이상의 주택을 짓지 못하고, 그래서 30살이 넘어도 자신에게 배급되는 주택을 가질 수가 없는 청춘들의 분노가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이 역시 한국과 마찬가지로 현실 사회주의 정책의 실패지, 르코르뷔지에의 책임은 아니다.

다만 그는 위대한 건축가였던 것이지, 정치가도 사상가도 아니었으므로.....

여전히 우리는 자신의 경제적 처지에 따라 너무도 불평등하게 공간을 점유하는 나라에서 살고있다.

고시촌 쪽방부터 호화 펜트하우스까지.

당장 이 불평등 자체를 다 뒤집어엎자고 말할 수는 없다.

그래도 한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품격을 유지할 수 있는 공간은 보장되어야 하지 않을까?

르 코르뷔지에가 말하는 건축의 핵심은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의 부제는 건축을 시로 만든 예술가이다.

이 부제에 걸맞는 르코르뷔지에의 대표작을 꼽자면 '롱샹성당'을 꼽아야 할 것 이다.

하지만 나는 르코르뷔지에에게 더 걸맞는 대표작은 마르세유에 세워진 아파트 '위니테 다비테시옹'이라고 생각한다.

근대 건축의 개척자, 건축으로 인간을 품고자 한 혁명가로 그를 불러도 되리라.

 

그런 그에게도 말년의 집은 지중해 작은 마을의 4평짜리 오두막이었다.

그의 아내와 그가 행복을 영위하는데는 그 정도의 공간으로 충분했던 것이다.

그리고 죽은 뒤 그가 차지한 무덤의 공간도 1평쯤 될까나?

그러나 이 위대한 건축가는 자신의 무덤조차도 영혼의 안식을 위한 가장 적당한 넓이와 위치를 계획하고 실현했다.

 

 

내게 어릴 때의 집에서 지금 살라고 하면 너무도 고통스러울것이다.

단순히 그것은 넓이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는 그냥 빈공간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태어나 기본적인 품위를 유지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정도의 경제력이라면 최소한 쪽방에서 사는 사람은 없어야하지 않는가싶은 생각을 간절하게 하게 되는 책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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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0-10-20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천재였지요.
이책 살까 말까 망설이는중이랍니다.

바람돌이 2020-10-20 00:08   좋아요 0 | URL
지금까지 읽었던 이 시리즈 중에서는 제일 좋더라구요. 그래봤자 4권이지만... ㅎㅎ 다만 대표적인 건축물의 사진은 의외로 없어요. 그건 거의 다 인터넷 열심히 검색하면서 읽었어요

mini74 2020-10-20 0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릴 적 우풍 심한 집에서 살았어요 전형적인 싼 자재로 대강 그리고 대량으로 찍어낸 빨간 벽돌 이층집. 볼이 터서 아팠던 기억이 나네요 ~

바람돌이 2020-10-20 00:43   좋아요 0 | URL
그래서 우리 볼이 다 빨갰잖아요. ㅎㅎ 오우 그래도 저에게 이층집은 로망이었답니다. 한번도 못살아봤네요. ㅎㅎ

페크pek0501 2020-10-20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집들이 많은 동네를 산책하길 좋아해요. 다양함을 보는 게 재밌어요. 일종의 건축 감상 시간인 거죠. ㅋ
건축에 관한 공부도 흥미로울 것 같군요.

바람돌이 2020-10-21 22: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건축에 대해서는 항상 공부하고싶던데 깊이있는 공부가 안돼요. 아직은 그냥 설렁설렁 이 책 저책 뒤지고만 있는데 항상 재밌더라구요. 하지만 본격적으로 들어가면 이 분야는 또 접근하기가 많이 어려워요.
 

르코르뷔지에는 파리 도심 주택에서 선보인 공간 경험을 빌라 사보아에서 극대화했다. 빌라 사보아는 나선계단과 경사로를 따라 위아래로 이동하면서 건물 안팎을 오가게 구획되었다. 집 안을 오가는 동안 연속적으로 변화하는 공간을 체험하게 한 것이다. 이는 오직 건축이라는 예술만이 줄 수 있는 경험이다. 경사로를 오르내리고, 유기적으로 연결된 집 내부와 외부를 오가면서, 그리고 가로로난 수평창과 천창을 바라보면서 사보아 가족은 공간의 지속적인 변화를 몸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발터 베냐민은 영화가 장면 변화를건축에서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르코르뷔지에의 스케치는 정말 영화인들에게 귀감이 될 만했다. 르코르뷔지에는 건물을 지을때 영화감독처럼 스토리보드를 미리 만들었다. 그는 창문을 통해들어오는 바깥 풍경과 집 안을 걸으며 경험하는 공간의 변화를 상상해 그림으로 그렸고, 이 이미지를 실제 공간에 옮겨놓았다. 필로티와 경사로는 이를 위해 투입되었다.
- P160

빌라 사보아는 프랑스 최초의 근대건축물로기념될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현대화된 건축양식과삶의 모습을 구현하고 있었다. 산업화는 진작 시작되었지만 르코르뷔지에의 등장 이전까지 유독 건축만은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르코르뷔지에는 건축계의 피카소가 되었다. 그는 새로운 재료와 구조로 건축이 나아갈 바를 보여주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철근콘크리트로 건물을 짓고, 그가 제안한 건축의 요소들을 이상향으로 삼고 있다. 그를 통해 건축은 비로소 근대화되었다. 빌라 사보아는 행복을 위한 주택이 아니라 역사적인 기념비로 명맥을 잇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이 기념비를 찾아 근대건축의 출발과 그것을가능하게 한 건축가의 존재를 기린다.
- P165

‘행복의 건축‘은 다른 곳에 있지 않았다. 삶을 편안하게 하고 사람들의 관계를 가깝게 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르코르뷔지에는 모든 평범한 이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하고 그들이 사회적 관계를 형성할 수 있도록 돕는 건축과 도시를 만드는 데 일생을 바쳤다. 물론 그 자신도 작은 집에서 행복을 누렸다. 그는 1931년 집에다이빙대를 설치하고 매일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작은 집은 알베르의 스튜디오가 되었다. 잔느레 가족의 집은다시 음악으로 채워졌다. 작은 집은 다양한 방식으로 가족을 품었다. 머물 곳 없던 가족은 집을 짓는 작은 아들 덕에 아름다운 호숫가에서 작은 호사를 누렸다. 집은 행복의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필요조건임이 틀림없었다.
- P170

하지만 르코르뷔지에는 예술가의 독창성이 발휘된 집에서 누구나 살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주택은 표준화, 규격화되어야 하고, 대량생산될 수 있어야 했다. 그는 건축가가 아니라 만인을 위한 집을 짓겠다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박람회 의도와 정면 충돌하는 전시를 누가 좋아했겠는가. 이는큰 갈등으로 이어졌다.
- P176

 그는 미개척지지를 찾아 헤매는 탐험가도, 그곳을 식민화하려는 제국주의자도 아니었지만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바꾸려 했다. 그리하여 현대적인도시의 모습을 제안하고, 그러한 삶을 어디에서나 통용되는 보편적인 것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의 건축은 지중해 인근 도시에 세워져야 했고, 바닷길을 따라 세계 각처로 퍼져나가야 했다. 건축에서 모더니즘은 그렇게 형성되었다.
- P182

세계 각 도시는인구 과밀, 교통 체증, 비위생적인 주거환경 같은 비슷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건축가들은 산업화된 재료와 기술로 건축을 혁신하고, 도시의 고질적인 문제들을 일거에 해소하고자 노력했다. 낡은 전통 대신 현대적인 이념과 양식이 제안되었고, 이는 ‘국제주의internationalism‘라 불리는 세계 건축의 질서가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전 세계 건축과 도시는 비슷비슷한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 P184

그는 이 도시를 근대화해 지정학적질서에 변화를 가져오고자 했지만 식민지의 현실에는 크게 관심이없었다. 알제리의 종교적 전통과 사회적 분열, 유럽 문명과의 충돌등은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는 식민 통치자의 시선 또는 반대로 아예 탈식민화된 시선으로 도시 문제 해결에만 관심을 두었고, ‘희망없는 나환자촌‘ 같은 도시의 무질서 극복에만 관심을 두고 전 세계어디서나 통할 만병통치약을 찾았다. 그는 지중해라는 세계의 중심에서 하나의 질서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 P190

하지만 모될로르의 유용성을 제대로 보여준 것은 마르세유의 아파트였다. 인체를 기초로 표준화, 규격화한 건축은 생활하기에 편리했고, 무엇보다 대량 공급이 가능했다. 이전까지 건축가들이 설계한 주택은 귀족과 부유층의전유물이었다. 안타깝게도 그가 1920년대 이후 선보인 주택들 역시 설계비를 지불할 능력이 있는 재력가들의 차지였다. 위니테 다비타시옹은 그동안 소수의 선별된 이들이 독점해온 공간을 모두에게 제공했다.
- P200

위니테 다비타시옹은 마르세유뿐만 아니라 낭트, 브리에, 심지어 적국이었던 독일 베를린에도 지어졌다. 그의 건축은 어디에 지어져도 이상하지 않았고, 누구에게나 편리했다. 건축가의 집‘이 아니라 건축가가 지은 집을 모두에게 선사하고 싶었던 그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그가지은 아파트는 식민주의자들이 신대륙을 차지한 것보다 빠른 속도로 세계 각국의 도시를 파고들었다. 오늘날 아파트는 어디에서도전혀 낯설지 않은 주거 방식이 되었다. 건축의 모더니즘은 인민을위해 시작되었고, 건축가들의 휴머니즘은 도시의 모습을 비슷하게만들었다.
- P201

 라투레트수도원은 건축가의 기억 속 에마수도원처럼 수사 개인의 삶을 보호하고, 여럿이 함께하는 공동생활을 가능하게 했으며, 무엇보다 눈에 보이는 세상 너머 영적 세계를 드러내는 장소가 되었다. 모될로르에 기초한 콘크리트 건축물은 빛 아래에서 ‘형언할 수 없는 공간‘으로 거듭났다. 라투레트수도원은 사람과 사람, 인간과 자연, 신과 세상을 연결하면서 오늘날까지 위대한건축으로 칭송받고 있다. 순수하고 진실한 건축을 추구한 예술가의인생은 시골 마을 산비탈에서 제대로 된 결실을 맺었다.
- P226

밖에서 보면 르코르뷔지에의 오두막은 그저 허름해 보인다. 통나무를 대충 쌓은 헛간처럼 보이는 이 집은 위대한 건축가가 아내를위해 지었다고 하기에는 너무 볼품없다. 그는 이런 집을 자신의 ‘걸작‘이라고 자평하면서 ‘성‘이나 궁전‘ 등으로 불렀는데, 이는 단순히 역설적인 표현만은 아니었다. 그는 이 작은 집을 대단히 만족스러워했다. 집은 편안했고, 좋은 이웃이 곁에 있었으며, 돈으로 살 수없는 아름다운 자연 풍경이 바로 앞에 펼쳐졌다. 그의 건축 사업에도 기여가 있었다. 오두막은 미리 재단된 자재들을 조립해 제작했고, 이는 주문 제작 주택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 P238

1935년의 모마 전시는 이것이 부당한 처사임을 보여준다. 르코르뷔지에는 맹목적으로 자신의 이상을 추구하기보다 그것에 예술을 덧입혔다. 그의 살기 위한 기계들은 편리하면서 아름다운 산업생산물처럼 감응의 대상이 된다. 그는 모마가 서정성이라고 투박하게 정의한 자기 건축의 특징을 시적 반응‘ 이라고 칭했다. 그의 건축은 아름답다. 그것은 마치 자연의 아름다운 사물과 경치를 바라볼때와 같은 감동을 준다. 그는 건축이 행복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기술적 합리성을 추구한 모더니스트였지만 그의 근대는오직 인간의 행복과 시적 아름다움을 위한 것이었다.
- P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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