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지키고 싶은 것은 종이책의 물성이 아니라 책이라는오래된 매체와 그 매체를 제대로 소화하는 단 한 가지 방식인독서라는 행위다. 세상에는 그 매체를 장식품, 장신구, 장난감, 부적, 팬클럽 회원증, 후원금 영수증 등으로 소비하는 이들도 있다. 그것은 소비자의 자유겠으나, 그런 소비를 독서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 P113

나는 오히려 읽고 쓰면 더 좋은 인간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 실제로는 편리한 면죄부로 쓰이는 것 아닐까 의심한다. 힘들게 행동하지 않으면서, 읽고 쓴다는 쉽고 재미있는 일만으로 자신이 좋은 인간이 되고 있다고 믿고 싶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그런 허약한 가설에 기대 은근한 우월감을 즐기는 듯비칠 때에는 좀 딱해 보인다.
- P156

요즘은 "책을 왜 읽어야 하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타인과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한다. 내가 아닌 남의 이유에 대해서는 그렇게 말해도 될 것 같다. 타인과 세계를 체험하지 않고 이해하는 방법은 언어뿐이고, 그들은 무척 복잡한 존재이기 때문에 아주 긴 언어로 표현해야 하고, 긴 언어를 순서대로 기록하고 재생하는 가장 효율적인 매체는 책이라고, 다른 사람과 세상을 깊이 이해하다 보면 더 나은 인간이 될 수도 있을 테고, 헌데 가끔은 그 질문에 대해 "그야 물론 재미있으니까"라거나 "억지로 읽지 않아도 됩니다"라고 대답하고픈 충동도 인다.
- P158

이런 왕국을 각자 세우면 어떨까. 우리 모두, 읽고 싶은 책들의 목록을 써보는 것만으로도 당신 한 사람을 위한 정신의영토, 취향의 도서관이 탄생한다. 탐색하고 고르는 일은 그자체로 의의가 있고, 해보면 꽤 즐겁다. 읽고 싶은 책들을 숙제가 아니라 가능성이라고 여기는 것이 시작이다.
참고, 이 왕국은 한 번 건설하면 땅이가 끝없이 확장된다. 아시다시피, 읽고 싶은 책들은 읽은 책보다 언제나 훨씬더 빠르게 늘어난다.
- P234

서구 지식인들이 진영 논리(‘누가‘의 문제)에 빠져 소련의 실체를 보지 못하거나 보고도 눈 감았을 때 오웰은 그러지 않았다. ‘누가‘를 따진 사람들은 공산주의를 파시즘과 자본주의에맞서 싸운 체제라고 믿었다. ‘어떻게‘를 살핀 오웰은 공산주의와 파시즘의 공통점을 봤다.
- P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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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성실히 읽고 쓰는사람은 이중 잣대를 버리면서 남에게 적용하는 기준을 자신에게 적용하게 되고, 그로 인해 반성하는 인간, 공적인 인간이 된다고 생각한다. 대신 그는 약간 무겁고, 얼마간 쌀쌀맞은, 진지한 인간이 될 것이다. 그사이에 충실히 말하고 듣는사람은 셀린과 제시처럼 다정하고, 비언어적으로 매력적인인간이 된다.
- P49

지금 나는 이것이 ‘말하고 듣기‘와 ‘읽고 쓰기에 같은 원칙이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두 문장으로 표현하면 이러하다. 말하고 듣는 사람 사이에서는 예의가 중요하다.
읽고 쓰는 사람 사이에서는 윤리가 중요하다.
- P54

정직하게 고백하건대, 나는 정직해지는 것이 두렵다. 정직하게 썼다가 정치적으로 바르지 않다거나 미학적으로 서둘다는 비판을 받으며 고립되고, 이런저런 변명을 속으로 늘어놓다가 내면이 일그러지게 될까 봐 무섭다.  - P69

중요한 것은 어느 공동체가 개인을 배제하느냐가 아니다.
그 배제에 원칙이 있는지, 그 원칙이 우리가 믿는 보편 윤리와 인권 의식에 부합하는지다. 그런 원칙이 없거나 윤리적이지 않은 사회에서는 다수가 횡포를 부리게 되며, 거기서 몇걸음 더 나아가면 강제수용소가 등장한다.
- P84

처음에는 책 이야기가 우리 자신에 대한 이야기로 번지는것에 당황했다. 우리가 너무 수다스럽고 사생활 털어놓기를좋아하는 사람들이라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건가 궁금했다. 그러다 머지않아 이게 여러 독서 모임에서 흔히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P97

책은 우리가 진지한 화제로 말하고 들을 수 있게 하는 매개체가 되어준다.
- P98

가만히 놔두면 우리는 자꾸 다른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려 든다.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된다. 삶의 가치에 대한 대화도, 우주의 신비에 대한 토론도 "그런데 그거 알아?"라든가
"맞아, 그때 걔도 그런 말을 했었는데……" 같은 몇 마디 말로방향이 휙휙 바뀐다. 종종 우리는 사회에 대해, 세계에 대해이야기한다고 믿으면서 실제로는 다른 사람에 대해 말한다.
-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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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책을 언제 어디서 읽느냐"는 질문을 받기도 한다. 나에게는 그게 물을 언제 어디서 마시느냐"는 질문처럼 들린다. 그냥 아무 데서나 수시로 읽는다. 팟캐스트 출연을 기다리며 스튜디오에서 읽기도 하고, 마산으로 내려가는 무궁화호 열차에서 읽기도 하고, 장례식장에서 문상객을 맞는 틈틈이 읽기도 한다. 물을 안 마시면 목이 마르고 책을 안 읽으면마음이 허하다. 그리고 책 정도면 포터블한 물건 아닌가?
- P21

인류와 인간을 동시에 사랑하는 건 어렵다. 그러나 어느 한쪽만 사랑하는 것은 가능하다. 인류를 사랑하고 인간을 미워하는 것보다, 인간을 사랑하고 인류를 미워하는 편이 더 낫다. 아주 더. 굉장히 더. 쓰는 장강명과 말하는 장강명 모두 그렇게 생각한다.
-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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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1-07-07 12: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을 어디서 읽느냐?
주로 집에서 읽어요. 그리고 여행 갈 때나 시댁-대구에 갈 때 그러니까 잠을 자고 와야 할 때 꼭 가방에 넣어 갖고 갑니다.
잠이 안 오는 밤에 읽으려고요. 마음만으로도 든든해져요.

바람돌이 2021-07-07 14:30   좋아요 1 | URL
저도 주로 집에서 읽어요. 어디 갈땐 언제 어디를 가든 가방에 책 한권 정도는 있어야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다는.... ㅎㅎ 잠이 안오는 밤은 잘 없고요. 늘 오는 잠을 쫓으며 왜 인간은 잠을 자야하나? 책읽어야 되는데라는 깊은 고뇌를 하며 책들고 졸고 있다죠. ㅎㅎ
 

 꿈에 젖은 어머니가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라고? 우리는 우리 너머를 바라보며 다른 곳에 있기를 갈망하는 어머니를 원하지 않는다. 이 세계에 발 디딘,
활기차고 능력 있고 우리의 필요와 요구에 전적으로 집중하는 어머니를 필요로 하지.
- P104

아버지가 세계에 나아가 해야만 하는 일들을 할 때, 우리는 그게 아버지가 응당 해야 할 몫이라며용인한다. 어머니가 세계에 나아가 해야만 하는 일들을할 때는 어머니가 우리를 버렸다고 느낀다. 이리도 모순되고 사회의 가장 강력한 독기를 머금은 잉크로 쓴 메시지를 어머니가 용케 견더 내는 게 가히 기적이다. 그러니이성을 잃지 않을 수가 있나.
- P106

다른 사람이 우리 대신 상상해 온 인물이 되는건 자유가 아니다. 다른 사람의 두려움에 우리 삶을 저당잡히는 일이지.
상상으로나마 자유롭다고 여기지 못한다면, 우리는스스로에게 맞지 않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 P107

아주 어린 나이부터 우리는 자기 표현을 할 줄 알아야 한다고 배우지만, 언어를 중단하는 것이 적당한 언어를 찾는 것 못잖게 중요한 순간들도 있다. 진실이 저녁 식사 자리에 모인 손님 중에서 반드시 가장 재밌는 손님으로 꼽히는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뒤라스가 암시하듯 우리에겐 다른 어느 누구보다도 우리 자신이 항상 더 비현실적으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 P116

여자가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찾기 위해 자기 이름을 지워버린 사회의 서사와ㅠ결별할 때, 그가 맹렬하누자기 혐오에, 미칠 것만 같은 고통에, 눈물이 멎지 않는 회한에 빠지리라는 게 사회 통념이다. 이런 것이 여자를 위해 마련된,
그가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 손에 쥘 수 있는 가부장제의왕관에 박힌 보석들이다. 눈물지을 순간이 넘치는 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아무런 가치도 없는 그 보석들에 손을 뻗느니 검고 푸르스름한 어둠을 두 발로 통과해 지나는 편이 낫다.
- P160

당신이 지금 읽고 있는 이 글은 삶의 비용으로 만든 글이며 디지털 잉크로 만들어졌다.
-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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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꺼는 대로 삶을 말하고 표현하는 것도 하나의 자유이지만 우리는 대개 이 자유를 택하려 들지 않는다. 그러나 그날 내가 엿본 여자의 내면은 하고 싶은 말들, 다른사람은 물론이고 자기 자신에게도 불가사의하게 다가오는 말들로 살아 생동하고 있었다.
- P12

그저 와이프일 따름이 구나. 이 남자는 행사 자리에서 만난 여자들 이름을 십중팔구 잊는 편이어서 어쩜 저럴 수 있을까 의아할 정도였다.
그래서 늘 이름 대신 누구누구의 와이프 또는 여자 친구라고 칭했다. 마치 그 여자들에 대해선 누구의 배우자 또는 동반자인지 아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듯이 말이다.
우리에게 이름이 없다면 우리는 과연 누구인 걸까?
- P18

남자와 아이의 안위와 행복을 우선 순위로 두어 오던 가정집이라는 동화의 벽지를 뜯어낸다는 건 그 뒤에 고마움도 사랑도 받지 못한 채 무시되거나 방치되어 있던 기진한 여자를 찾는다는 의미다. 모두가 즐거이 누리는 가정, 순조롭게 기능하는 가정을 짓는 일은 수완과 시간과헌신과 공감 능력을 요한다. 다른 이들의 안녕을 건설하는 일은 무엇보다도 넉넉한 인심에서 비롯하는 행위다.
- P21

자유는 결코 공짜가 아니다. 자유를 쟁취하고자 분투한 사람치고 그에 수반하는 비용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 P26

이는 내가 『알고 싶지 않은 것들』에서 다룬 주제이기도 한데, 그 글에서 난 우리가 알기를 꺼리는 것들이란 어쩌면 우리가 이미 알고 있지만 너무 면밀히 바라보려 들지는 않는 것들이 아닐까추측했다. 프로이트는 아는 것을 알지 않으려 하는 이런소망을 동기화된 망각motivated forgetting이라 불렀다.
- P96

헛간에서 메두사 신화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내 안에 메두사가 들어앉았다. 메두사가 내 내면에 깃든 게 반길 일인지 아닌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메두사는 막강한 힘을지닌 여자이자 심기가 거슬린 여자였다. 남성의 시선을피해 눈을 돌리는 대신 정면으로 되쏘아 보며 맞서는 여자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메두사는 신화 중에서도 특이한 경우에 해당하고, 결국 여자가 잔혹히 참수되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여자의 머리 (곧 마음, 주관, 주체성)와 몸의 분리로, 여자의 머리가 지닌 잠재력이 그만큼이나 위협적이란 듯이 말이다. 로버트 그레이브스는 위협적인 여성 권력을 끝장내고 남성 지배를 공고히 하려는 목적에서 메두사를 참수한 것이리라 추정한 바 있다.  - P97

오웰은 1936년에 쓴 「코끼리를 쏘다』란 산문에서 제국주의자는 "가면을 쓰며, 얼굴이 가면에 맞춰 점차변해 간다"는 데 주목했다. 와이프 또한 가면을 쓰고, 그갖가지 변형된 모습에 맞게 얼굴의 양태가 달라진다. 집안의 주소득자인 여성 중에 그들이 성취한 성공을 빌미로 남자 식솔에게 간사한 제재를 받는 이도 있었다. 남성반려자가 원망과 분노, 우울감에 빠진 경우였다.  - P99

남자가 성공적인 사람으로 간주되는 이유가 여자들을 (가정에서, 일터에서, 침실에서) 진압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라면, 사회는 이런 측면에서 실패하는 것을 위업으로 여겨야 마땅하다.
-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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