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대량학살 하면 보통 홀로코스트가 떠오르며, 홀로코스트는빠르게 진행된 살인 공정‘이었다고 여겨진다. 그런 이미지는 지나치게 단순하고, 명쾌하다. 독일과 소련의 살육 현장에서, 그 살육 방법은 오히려 원시적인 것이었다. 1933년에서 1945년까지 블러드랜드에서 살육된 1400만 명의 민간인과 전쟁포로 중 절반 이상은 식량을비급받지 못해 죽었다. 20세기 중반, 유럽인들은 같은 유럽인을 무지무지하게 많이 굶겨 죽였다. 홀로코스트 다음가는 두 가지 최대 대량학살, 1930년대에 스탈린이 시행한 의도적 굶주림과 1940년대 초히틀러의 소련 전쟁포로 굶기기는 이런 식의 학살이었다. 그건 사실 계획상으로는 더 큰 규모였다. "기아 계획"에서 나치는 1941년과1942년에 걸친 겨울에 수천만 명의 슬라브인과 유대인을 굶겨 죽이려 했다.
- P15

어떤 기술을 썼든 간에 그 학살은 개인적인 살인이었다. 굶주리고있는 사람들은 종종 그들을 굶주리게 만든, 감시탑에 있는 장본인들의 눈에 보였다. 총살당하는 이들은 아주 근거리에서, 셋 중 둘은 소총의 가늠쇠 너머로, 셋 중 한 명은 머리에 권총이 겨눠진 채로 보였다. 중독사하게 될 사람들은 색출되고, 기차에 태워지며, 가스실로 밀려 들어갔다. 그들은 소유한 재물을 빼앗기고, 다음에 입은 옷을 빼앗기더니, 여성들은 머리카락마저 잃었다. 그들 한 명 한 명이 다르게죽었다. 그들 한명 한 명이 다르게 살아온 사람들이었기에.
- P16

나중에 히틀러는 독일 수상으로서 소련과 더불어 폴란드를 분할하는 조약을 맺게 된다. 이 단계를 밟으며, 그는 많은 독일인이 가졌던 극단적인 생각을 품고 있었다. 폴란드의 국경선은 부당하며, 그 국민은 국민 대우를 받을 이유가 없다!  - P38

1930년 우크라이나의 수확량은 1931년에는 달성할 수 없는 기준을 세웠다. 집단 농업이 개인 농업만큼 효율적이라 하더라도 불가능한 수준이었는데, 현실은 그렇게 효율적이지도 않았다. 1930년의 대풍작은 공산당이 1931년의 징발량을 설정할 때의 기준선을 제공했다. 모스크바는 우크라이나가 제공할 수 있는 양보다 훨씬 더 많은양을 기대했다. - P76

누구 못지않게 정치를 사적으로 풀었던 스탈린은 우크라이나 기근또한 사적인 차원에서 접근했다. 그가 먼저 보인 충동적 행동이면서그 뒤로도 바꾸지 않았던 방침은 우크라이나 농민의 굶주림을 우크라이나 공산당 당원의 배신으로 간주하는 것이었다. 스탈린은 자신의 집단화 정책이 비난받을 가능성은 허용할 수가 없었다. 문제는 실행 과정에, 지역 지도자에게 있어야 했고 절대로 집단화라는 개념 자체에 있어서는 안 됐다. 1932년 상반기에 자신의 변혁을 밀어붙이면서, 스탈린이 골몰한 문제는 국민의 고통이 아니었다. 집단화 정책의이미지가 손상될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그는 굶주리는 우크라이나농민이 조국인 공화국에서 이반하고 있으며 "징징거림으로서 다른소련 시민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 P79

스탈린은 현실을 완전히뒤집어서, 굶주림을 무기로 쓰는 쪽은 자신이 아닌 농민들이라고 상상했다. 카가노비치는 스탈린에게 우크라이나인들을 "무고한 희생자"
라고 말하는 것은 우크라이나 공산당의 "추악한 은폐 공작에 불과하다고 다시금 확인해주었다. 스탈린은 "우크라이나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자신의 염려를 표현했다. 우크라이나는 "요새"가 되어야 했다.
두 사람은 징발 정책을 고수하고, 곡물을 최대한 빨리 수출하는 것만이 합리적인 대책이라며 뜻을 모았다. 이제 스탈린은 굶주림과 우크라이나 공산주의자들이 보이는 불성실함 사이의 관계도를 완성했고,
이에 최소한 자기 자신은 만족하는 듯했다. 굶주림은 파괴 행위의 결과였고, 지역 당원들은 파괴 공작원이었으며, 기만적인 당 고위 간부들은 폴란드의 간첩질을 하느라 부하 직원을 보호한다는 것이다.  - P82

스탈린의 주장에 따르면, 소련령 우크라이나에서의 스탈린 정책에대한 저항이란 예민한 사람이 아니면 보이지도 않는 별스러운 행위였다. 저항은 더 이상 사회주의의 적들에게 열려 있지 않았는데, 이제그것은 ‘조용하며 거의 신성한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오늘날의 부농은 "온화하고 친절하며, 거의 성인 같은 친구들"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아무 죄가 없어 보이는 사람도 죄인으로 봐야 했다. 배고픔으로 서서히 죽어가던 농민은 겉모습과는 달리, 자본주의 열강을 위해 소련 평판 저하 작전을 수행하는 파괴 공작원이어야 했다. 굶주림은 곧 저항이었고, 저항은 사회주의의 승리가 임박했음을 알리는 징조였다. 이것은 스탈린이 모스크바에서 한 공상에 그치지 않았다. 몰로토프와 카가노비치가 1932년 후반 사망자가 대거 발생한 지역을여행하던 중 실행토록 한 이념적 노선이었다.
- P88

하지만 스탈린은 소련에 대한 외부 세계의 관심을 끌지 않고도 수백만 명을 살릴 수 있었다. 식량 수출을 몇 달만 중단하고, 300만 톤에 달하는) 곡물 비축분을 풀거나, 하다못해 농민이 지역곡물 저장고를 이용할 수 있게만 하면 됐다. 1932년 11월이 되어서야실시한, 이런 단순한 조치만으로도 사망자 수를 몇백만 명에서 수십만 명 수준으로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스탈린은 팔땅만 끼고 있었다.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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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근대도시는 전근대적인 공간과 근대적인 공간, 그리고 한국인과 일본인의 거주 지역이 구분된 식민지 이중도시 (colonial dual city)‘였다. 도시 곳곳에는 산업화된 한국 음식, 일본 음식, 중국 음식, 서양 음식을 판매하는 공간이 자리 잡았다.
- P59

메뉴 중에서 인기가 많았던 음식은 설렁탕이었다. 하지만 일부 양반 출신들과 근대적 취향을 가진 모던보이 (modern boy)와 모던걸(modern girl)은 설렁탕을 먹고 싶어도 직접 음식점에 가서 먹는 것을 꺼렸다.
양반 출신들은 여전히 계층과 남녀 구분을 따졌고, 모던보이와 모던걸은 자신들도 식민지 국민이면서 하층민을 경멸의 대상으로 여겨 설렁탕집 출입을 삼갔다. 서울의 설렁탕집 주인 중에는 이런 ‘별난‘ 고객을 위해 배달 서비스를 하기도 했다.  - P60

일본에도 중국 음식점이 많이 있지만 그곳에서 우동을 팔지는 않는다. 중국 대륙과 타이완의 중국 음식점에도 우동이란 메뉴는 없다. 그런데 왜 한국의 중국 음식점에만 우동이란 음식이 있을까? 그 이유는 식민지 시기 중국 음식점에서 국수류의 음식을 일본식 표현으로 우동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 P71

1970년대까지만 해도 음식의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 대부분은 제국의 음식이 일방적으로 식민지에 전파되었다는 주장을 많이 펼쳤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음식의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 중에는 제국과 식민지의 지배관계가 해체된 후에 오히려 식민지의 음식이 제국으로 이71동하는 사례가 있음을 증명하기 시작했다. 영국의 커리가 그러하고,
일본의 야키니쿠와 가라시멘타이코가 그러하다.
- P99

식민지 시기 조선인들이 멸치를 식재료로 여기지 않은 반면, 일본인은 말린 멸치를 국물 요리의 육수를 만드는 데 주로 사용했다. 김복인은 일본인의 멸치 사용법을 가지고 와서 조선인도 소고기 대신에 찌개나 국에 넣자는 제안을 한 것이다. 지금이야 말린 멸치를 고추장에 찍어 먹거나 기름에 볶거나 육수를 내어 먹지만, 이런 멸치 식용 방식은해방 이후에 생겨난 것이다. 해방 이후 멸치 어획량은 날로 증가했지만 일본 수출 길이 원활하지 않았다. 1960년대부터 언론에서 멸치의 영양과 맛과 요리법을 소개하면서 멸치 소비를 장려했다. 멸치는 1970년대 이후 한국 음식의 중요한 식재료가 되었다.
- P115

한반도의 식생활 역사에서 1937년부터 1953년은 중일전쟁 - 태평양전쟁 · 한국전쟁으로 인해 식량 부족 문제가 가장 심각했던 때였다. 이시기에 정권을 장악했던 조선총독부, 미국과 소련의 군정, 그리고 남북한의 정부는 식량 부족 문제를 온전히 해결할 수 없었다. 오히려 통치자들은 식량 공급을 안정시키기 위해 앞선 정권들이 행했던 조치들을그대로 따르는 선택을 자주 했다. 조선총독부가 시행했던 절미운동,
혼식과 분식 장려운동, 대용식운동 같은 정책은 미군정기, 대한민국의이승만과 박정희 통치 시기에도 계속되었다.
- P141

미국의 잉여농산물 원조는 공짜가 아니었다. 미국 정부는 한국 정부와 협정을 체결할 때, 도입 농산물의 판매액을 한국 통화로 적립하고, 그중 일부는 한국에 있는 미국 원조기관의 비용으로 충당하며, 나머지는한미 간의 합의에 따라 한국의 경제개발과 군사력 지원에 사용하기로약속했다. 미국의 밀 생산 농민들은 페기할 뻔한 남아도는 밀을 한국같은 저개발 국가에 판매하여 수익을 올렸고, 미국 정부는 원조 명분을내세워 한국 정부와 군사적 관계를 더욱 긴밀하게 구축했다.
- P146

그러나 1960년대 공장제 식품과 1970년대 히트상품 중 대부분은일본의 공장제 식품을 모방한 것이었다. 1965년 한국과 일본의 외교관계가 회복되기 이전에는 한국의 많은 식품회사가 비합법적인 방법으로일본 식품을 모방했다. 한일수교 이후에는 합법적으로 일본의 제조 기술을 사들여와 한국 시장에 제품을 내놓았다. 1960~1970년대 한국의식품회사는 일본이 미국에서 가져온 공장제 식품을 다시 도입하여 또다른 한국식 식품으로 변형해 식품 시장의 규모를 키웠다. 냉전으로 인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국가 사이의 정치·경제·군사적 경계가 나뉜상태에서 한국의 공장제 식품은 미국→일본 → 한국‘으로 연결된 구도안에서 변신했다.
- P149

전쟁터에서 군인들이 간편하게 먹는 식품의 개발은 제1차 세계대전때부터 이루어졌지만, 한국의 K-레이션은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으로시작되었다. 같은 시기에 한국 음식의 인스턴트화가 진행되어 1967년8월 삼양식품은 베트남에 라면 10만 개를 수출했다. 베트남에는 군인40들 외에도 한진 · 대한통운·현대건설 같은 한국 기업이 진출해 있었다.
삼양라면을 비롯한 한국의 인스턴트식품은 이 회사의 직원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음식이었다. 이처럼 베트남전쟁이라는 참혹한 사건 이면에한국 정부의 외화 수입 증대, 한국 기업들의 성장, 그리고 공장제 한국식품의 확대라는 아이러니한 장면이 담겨 있다.
- P167

미국식 패스트푸드 기업의 국내 진출은 한국 소비자들의 넉넉해진 주머니를 노린 외국 업체들의 노림수도 있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을 유치한 전두환 군사정권의 필요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기도 했다. 한국 정부가 세계인이 모이는체육행사에서 낙후된 한국 음식점이 공개되는 것을 꺼려해 미국식 패스트푸드점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소비자들은 이 패스트푸드점에서 음식을 먹으면서 미국식 문화를 소비했다.
- P196

 오늘날 세계 곡물시장은 금융자본이 주도하며 곡물과 식품을 선구매하여 유통을 장악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세게 가 시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유기농운동, 슬로푸드운동, 지역 농산물 소비운동 같은 사회운동은 초국가적 곡물 - 식품 유통 대기업을 막아내는 데는 역부족이다.
- P245

식민지 타이완의 열대 과일 바나나가 제국 일본과 식민지 조선에 유입되는 이 흐름은 식민지가 제국에 포섭되어 ‘제국화 되는 한과정이었다. 한편으로 이러한 제국과 식민지 사이의 열대 과일 유통은 세계화의 전조였다.
- P250

세계 식품체제에 편입된 농산물 씨앗의 치열한 경쟁에서 누가 이길지 알 수 없다. 세계화의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 농산물 씨앗의 재산권 확보는 식량 주권과 식랑 안보 그 자체이다. 중저가 한정식 음식점의 필수 메뉴인 샐러드에 들어가는 양상추, 잡채 재료로 사용되는 피망.
숙회로 나오는 브로콜리, 이 채소들의 씨앗이 누구 것인지 알아야 하는이유다.
- P263

세계화는 냉전의 장벽을 넘어 사람들의 자유로운 이동을 가능하게해주었다. 외국에서 처음 먹어본 이국적인 향신료는 입맛에 맞지 않게 마련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귀국 후에도 그 향신료의 맛을 잊지 못해 그런 음식을 파는 곳을 찾아다니거나 만들어보려고 애쓴다. 심지어 외국 여행의 경험이 없는 사람도 인터넷을 통해 새로운 맛에 대한 간접 경험을 하고 먹고 싶다는 욕구를 느낀다. 식품회사나 외식업체는 이런 소비자들의 새로운 욕구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상품화한다. 청양고추, 미국식 핫소스, 마라는 20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인적 세계화가만들어낸 ‘지구화된 맛‘ 이다.
- P281

"인간은 함께 식사하는 동물이다. 20 여러 사람과 함께 음식점에 가는이유는 서로 인간적 유대관계를 맺거나 지속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함께 식사‘를 포기한다면 우리는 인류이기를 포기해야 할지 모른다. 가정에서는 더욱 자주 함께 식사를 해야 한다.  - P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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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초창기 짜지앙미엔은 공화춘과 같은 식당이 아니라 손수레를끌거나 지게를 짊어진 장사꾼들이 노동자들을 상대로 판매하는 음식이었다. 조선으로 건너온 화교들 대부분이 님성이라는 점도 이런 음식들을판매하게 만들었다. 가족이 해주는 음식을 먹을 수 없있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밖에서 시켜 먹어야 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때 조신 사람들이 짜장면만을 접했던 것은 아니었다. 산둥 지역의 요리인 노채魯菜가 모두 바다를 건너와서 이 땅에 선보였다. 오늘날우리에게 짜장면만큼이나 익숙한 라조기와 깐풍기, 팔보채 같은 것들이바로 산둥의 요리들이다.  - P72

그럼에도 조선으로 넘어오는 화교들의 숫자는 계속 늘어났다. 청일전쟁의 패배로 잠시 주춤했던 화교들의 조선 진출은 다음해부터 재개되었다. 청일전쟁 패전 이후 일어난 의화단의 난으로 인해 산둥 지방이 큰 피해를 입었고, 여기에 흉년까지 거듭되면서 많은 중국인들이 살길을 찾아조선으로 넘어온 것이다. 그러면서 경성과 인천의 화교들이 급증했다.
- P73

일본은 조선에 사는 화교들을 탄압했을 뿐만 아니라 교묘하게 조선인들을 선동해서 갈등을 일으켰다. 1931년 7월에 벌어진 만보산 사건이 대표적이다. 중국 지린성 만보산에서 조선인 농민과 중국인 농민 사이에충돌이 벌어졌다는 사실이 언론을 통해 보도된 이후 흥분한 조선인들이경성과 평양, 원산의 화교들을 공격하는 폭동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수많은 요릿집과 상점들이 불타고 백여 명이 넘는 화교들이 숨졌다. 총독부는 폭동을 수수방관하면서 양측의 갈등에 더욱 불을 지폈다. 중일전쟁이 시작되면서부터는 화교들의 고난은 더욱 심해져서 재산을 몰수당하고 추방당하는 일도 벌어졌다. 따라서 1945년 8월 15일의 광복은 조선인뿐만 아니라 화교들에게도 큰 기쁨이었다.
- P76

1962년 현금을 많이 보유하고 있는 화교들을 겨냥한화폐개혁을 실시했다. 아울러 외국인의 토지 소유를 금지시켰다. 당시대한민국에 외국 국적사의 대부분이 화교라는 섬을 감인하면 명백하게그들을 노린 조치였다. 덕분에 화교들에게는 큰 요릿집을 운영하면서 연회와 혼례 등을 치를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해줄 수 있는 기회가 사라졌다.
작은 규모로 쪼그라들면서 한 때 외식의 꽃이었던 청요릿집들은 이제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중국집‘이 되었다.
- P78

짜장면이 우리 음식이 되기까지는 앞서 소개한 대로 슬프고 잔혹한근대사를 거쳐야만 했다. 임오군란이 없었다면 산등의 전통요리인 짜지앙미엔이 들어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울러 조선총독부가 화교들을 집요하게 탄압해 요릿집만 할 수밖에 없게 만들면서 결과적으로 산둥요리의 대중화에 부채질을 했다.
- P81

돈까스는 서구문명을 받아들여서 그들과 같아지겠다는 근대 일본의야망이 밑바탕에 깔린 음식이다. 천 년 넘게 고기를 입에 대지 않았던 일본인들은 국가를 서양처럼 발전시키겠다는 대의명분 아래 육식을 시작했다. 그렇게 돈까스는 우리의 짱장면처럼 일본에서 일상이 되었다. - P104

일본에서 카레라이스가 뿌리를 내리는 데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것은 바로 군대와 학교의 급식이었다. 사실 일본이 외친 서구화와 문명화는 강력한 군대의 육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리고 강한 군대를 만들기 위해서는 잘 먹이는 것이 필수였다.
- P155

엄청난 피해를 입은 다음 일본 육군도 뒤늦게 식단을 바꾸고 라이스카레를 도입했다. 이렇게 영국과 일본이 커리를 받아들인 것은 맛있어서가 아니라 병을 치료해야 한다는 필요성 때문이었다. 영국 해군의 경우사망 원인 1위가 전투가 아니라 각기병이었고, 그 비율도 압도적이었다.
일본 해군 역시 각기병으로 인해 병사들을 제대로 훈련시킬 수 없게 되면서 전력 운용에 차질을 빚었다. 커리와 카레는 제국에서 병력 손실에대한 해결책으로 나왔으며, 필요에 의해서 섭취했던 음식이었다.
- P158

이처럼 빵의 역사는 전쟁과 사무라이, 서구화와 문명화의 그늘에서벗어나기 어렵다. 그리고 일본인들은 단팥빵을 먹으면서 제국주의를 실현시켰고, 조선은 뜻하지 않은 근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 P189

하지만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은 영원할 것 같았던 이즈모야전성기의 막을 내리게 만들었다. 어린 시절 군산으로 건너온 히로세 켄이치와 그의 자식들에게 조선은 삶의 터전이자 고향이었다. 당시 한반도에 살던 수십만 명의 일본인들 또한 비슷한 처지였기 때문에 미군정이추방 명령을 내리기 전까지 어떻게든 한국에 남기 위해 한국어를 배우기도 했다. 하지만 추방 명령이 떨어지자 히로세 켄이치와 그 가족들은 일본으로 떠나야만 했다.
- P193

여전히 얼음과 과일 시럽으로 만드는 일본의 카키코오리와는 달리 한국의 빙수는 단팥이 잔뜩 올라간 팥빙수로변신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문화사나 생활사전문가들은 씹는 맛을 중요하게 여기는 우리 민족 특유의 입맛을 그 원인으로 꼽는다. 단팥은 달콤하기도 하고 씹는 감촉을 충족시켜줄 수 있기 때문에 차츰 많이 들어가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과일 시럽을 대체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 P250

식민지로 상징되는 우리의 근대에는 수탈과 침략이라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하지만 일방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흡수해우리의 것으로 만들기도 했다. 근대의 맛이 쓴맛이 아니라 다채로운 맛을 낼 수 있는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 P253

주영하 교수(한국학중앙연구원)는 이 시기에 가정에서 가마솥이 사라지는 현상과 맞물리면서 커피의 소비량이 늘었다고 얘기한다. 우리나라 전통 가옥의 아궁이에 걸어놓은 가마솥은 그고 무거워서 따로 빼서 씻을수 없었기 때문에 물을 붓고 끓이는 방법으로 세척했고, 그 과정에서 생긴 숭능을 식사 후에 차처럼 마셨다. 한국의 전통 밥상은 코스별로 요리가 나오지 않고 반찬부터 입가심까지 한꺼번에 한 밥상에 모두 놓고 먹기 때문에 디저트라는 개념이 따로 없었다. 구수한 숭늉은 식후에 마시기에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사랑을 받아왔다.
그런데 1970년대 들어 경제가 발전하고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가마솥대신 압력밥솥이나 전기밥솥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가정에서는 더 이상숭늉을 만들 수 없었기 때문에 대체해야 할 만한 식사 후 마실 것을 찾아야 했다. 여러 가지 음료들 중에서 낙점된 것이 가장 대중적인 음료인 커피다. 때마침 국내에서 생산이 되면서 쉽게 구할 수 있었고, 물에 타서 바로 먹을 수 있었고, 다방이나 회사에서 자주 마서왔기 때문에 익숙하기도 했다. 식사 후 커피를 한 잔 마시는 것은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완전히 정착되었다.  - P280

진한 원두커피는 물론 인스턴트 믹스커피에서조차 느낄 수 있는 그정체불명의 쓴 맛에는 서구 열강을 좇고자 했던 ‘모던 뽀이‘ 들의 욕망과,
잦은 야근에도 정신을 붙들어야 했던 노동자들의 고단함과, 다방에서 얼굴을 붉히며 토론했던 장발 대학생들의 열기와, 여전히 남아 있는 서구에 대한 희미한 동경을 담은 낭만이 모두 녹아 있다.
- P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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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케다 가쿠나에 박사와 스즈키 사부로스케 사장이 손을 잡고 만들어낸 아지노모도는 단순히 감칠맛을 내는 조미료가 아니라 서구화를 이루고자 하는 꿈의 상징이었다. 서구의 과학을 이용해서 만들어낸 것이기도 했으며, 위생적이고 영양이 풍부했다는 섬에서도 서구화로 가는 길이라고 믿겼다. 메이지유신 이후 산업화에 박차를 가하던 일본에서 서구와 마찬가지로 노동자들의 영양과 체력 문제, 그리고 병사들에게 줄영양가 있는 식품문제를 해결해야 했다는 점도 아지노모도의 탄생에 한몫했다. - P36

사람이 가지는 까다로운 입맛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이를 뒤집어 얘기하자면 일단 한 번 입맛으로 자리 잡게 되면 깊숙하게 뿌리를 내려 새로운 전통이 된다는 의미도 된다. 덕분에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하고 철수한 이후에도 일제가 손을 뻗은 지역에서는 여전히 아지노모도가 활발하게 소비되고 있다. 정치가 음식의 전파와 이용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를 꼽아보라면 바로 아지노모도를 들 수 있을 것이다.
- P50

아지노모도는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고 밀수품으로, 미원과 미풍 그리고 다시다라는 이름을 가지고 대한민국에 계속 남았고, 이윽고 우리의 입맛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일본은 사라졌지만 그들이 남긴 맛의 제국은 이제 우리의것이 되어 여전히 우리 곁에 있다.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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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신뢰‘라 함은 스탈린 공포정치하의 억압을 반영하는 말이다. 스탈린 시대는 누구도 믿어서는 안 되는 불신의 시대였다. 불신을극복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님에게 들려주는 데에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때는 스탈린 체제가 모든 소련 국민에게 침투되어 있었다. 스탈린 체제는 남몰래 당국에 고자질하거나 귓속말하는 사람들에 의해 유지되었다. 고자질과 귓속밀이 대숙청의 단초가 되었기에 사람들은 쉽사리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남에게 털어놓을 수 없었다.
- P452

한인사회당에서 적위군에 조선 부대를 편성한다는 사실이 우리《자유종》과 선포문(삐라)에 발표되자 조선인 토호 에세르들로 조직되었던 악명 높은 전로한족총회 (3·1운동 후에는 대한 국민의회)는 발악하기 시작하였다. 그들 기관지 《청구신보》(주필 윤해, 부주필 오창환)에는 조선 인민들은 "러시아 정변에 참가할 것이 아니라 중립하여야 한다"고 지적하고 "대한 독립은 다만 파리에서 열리는 평화회의에서 미국 윌슨 대통령이 지적한 민족자결주의에 있다"고 하였다.
이를 반대하여 한인사회당에서는 일본 제국주의자를 포함한 제1차 세계대전에 참가하였던 미국 영국 기타 승전 국가들이 모두 세계 식민지를 다시 분할하는 ‘양의 고기를 판다고 현관에 써 붙이고 개고기 파는 회의‘에 가서 빌 것이 아니라 소비에트 영역에 몰염치하게 침입한 미국,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 기타 무장 간섭자들에개 반항하고 소비에트 주권을 옹호하는 적위군에 참가하는 것으로 우리는 조선 해방전쟁을 무력 합동민족 군사력으로 개시한다고 선언하였다 - P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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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1-03-16 11: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이렇게 많은 분들
이 헌신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그래픽 노블로 어디선가 살짝 본 것
같은데, 책으로 나왔는지 모르겠네요.

바람돌이 2021-03-16 15:16   좋아요 2 | URL
이분에 대해서는 사실상 국내 연구자가 지금 저 책의 작가인 분밖에 없기 때문에 아마도 모든 책들이 정철훈 작가의 책을 기본으로 하지 싶습니다. 그래픽 노블로는 <시베리아의 딸, 김알렉산드라>라는 제목으로 나와 있는데 역시 정철훈작가의 책을 원본으로 하고 있구요.

이런 책을 보면 물론 독립을 위해 싸운 분들의 헌신이 감사하고 너무 대단하다 싶기도 하지만 요즘은 알면 알수록 독립운동 세력 내의 분열, 비방, 대립 같은 것들이 너무 안타까워서 마음이 많이 답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