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기억을 걷다 - 유재현의 아시아 역사문화 리포트, 프놈펜에서 도쿄까지 유재현 온더로드 1
유재현 지음 / 그린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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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는 대한민국을 포함하여 모두 한 애비와 에미의 자식들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형제들을 아시아를 모두 남한족의 아래의 하위족으로 두는 인종주의와 국수주의를 강화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언젠가는 우리의 발목을 붙잡을 것이다. (작가 유재현의 서문 중 발췌)

아시아지역의 현대사는 모두 공통적으로 2차대전 종전 이후 미국의 세계질서 재편이라는 흐름속에서 위치지워졌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 각국에서의 비극의 출발점이자 강화제였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런 아시아에 대해 무관심하다.
아니 하위제국주의 국가로 성장한 우리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아시아는 이제 우리에겐 값싼 휴양지이거나 이국적인 문화유적의 답사지이거나 둘 중 하나이다.
둘의 공통점은 어느것도 오늘의 아시아의 실체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지형에서 유재현은 아시아의 현대사를 걷는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라고, 한배에서 나온 같은 자식이라고 끊임없이 읇조린다.

섹스의 천국, 태국 방콕의 길을 걷는 것은 한국전쟁 이후 우리땅에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기지촌을 걷는 길이기도 하다.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미군은 든든한 후방기지를 필요로 했고 그 후방기지의 역할을 해주었던게 또 태국이다. 후방기지로서의 태국은 또한 미군의 대규모 휴식-오락-회복기지로서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이걸 R&R이라고 한다는데 이것은 또한 참전 미군에게 연차로 주어지는 일주일간의 공인된 휴가를 지칭하기도 한단다.)
한국전쟁때는 도쿄가 이런 R&R기지로서의 역할을 했고 인도차이나 전쟁에서는 태국이 그 역할을 떠맡았던 것. 이쯤되면 태국의 섹스산업의 원조가 어디에 있는지는 뻔한 일이다.
우리가 밟았던 아픈 역사를 왜 우리는 같이 아파하지 못하는걸까?
왜 남한의 수많은 남자들은 태극기를 휘날리며 섹스관광을 가는거냐고?

모든 악의 출발점이 추악한 미국의 제국주의정책이었다고 비판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그것을 확대강화시키는데는 언제나 자국 정부의 방관과 적극적인 지원이 항상 같이 넘나듬으로써 가능했다.
흔히 태국의 정치를 얘기할때 빼놓을 수 없는것이 국왕의 존재이다.
아직도 국왕이 신성시되며 국민의 추앙을 받는 나라, 정권의 성립과 변동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나라가 바로 태국이다.
흔히 태국이라는 나라의 이 이상한 왕정의 현존과 영향력을 전근대에서 근대로 넘어오는 시기 태국의 왕이 행했던 역할들 - 동남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식민지를 거치지 않도록 했던 왕의 외교력이나 중요 역사적 변화의 시기에 왕이 국민을 뜻을 대변했다는 등의 이야기로 설명하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서 미국의 했던 역할은  내가 잘 몰랐던 부분이다. 전쟁 후방기지로서의 안정성이 절실하던 미국은 그 안정성을 보장해줄 인물로 왕을 택했고 그것은 왕에 대한 전격적인 지원과 신성화로 나타났던 것. - 그것은 세뇌였다. 이 세뇌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가는 우리의 반공이데올로기 세뇌를 생각하면 충분히 공감이 가는 부분이다.

앙코르와트와 킬링필드의 나라. 이 상반되는 이미지가 캄보디아를 가장 유명하게 만든 코드가 될 것이다.
크메르루즈는 킬링필드 덕분에 악의 화신으로 지금까지 회자되지만 문제는 그런 상황을 만들어낸 원인제공자들이 누구냐는 것이다. 캄보디아 땅 곳곳에서 만날수 있는 킬링필드의 흔적들 - 인골로 이루어진 기념물들은 우리의 의식을 마비시키고 감정만을 자극하기 위해, 그럼으로써 크메르루즈에 대한 분노와 캄보디아 사람들에 대한 연민을 가지라고 끊임없이 속삭인다. 그럼으로써 그런 상황을 만들어냈던 미국과 어이없게도 공산주의 형제국이라 할 수 있는 베트남의 책임을 절묘하게 비껴간다.

베트남전쟁이야 워낙에 많이 알려져있는 부분이고 그만틈 베트남 혁명의 지도자 호치민에 대해서는 비판이란걸 거의 접해본적이 없다. 하지만 이 책에서 작가는 그 호치민에 대해서도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남베트남민족전선의 궤멸에 진정으로 호치민은 책임이 없을까? 오히려 그에 대해 방조함으로써 혁명에서 북베트남의 주도권을 확고하게 하는데 이용하지는 않았나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이건 자연스럽게 우리의 역사로 옮겨갈 수 있겠다. 분단정권 수립이후 부단히 진행된 북한에서의 남로당 죽이기 - 결국 혁명의 이념도 순수성도 권력앞에서는 그저 무력할 뿐... 어쩌면 혁명의 이념이니 순수성이니 하는 말 자체가 그저 환상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작가의 발길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미국이 라오스를 아편공급기지로 만들어가는 과정을 쫒기도 하며 필리핀에서는 막사이사이대통령의 행적을 쫒으며 그의 본질이 막사이사이상이 주는 이미지와는 달리 결코 평화적이지도 민중적이지도 않았음을 얘기한다.
영화 <비정성시>의 어두운 골목을 훑으며 일본을 대체해 들어온 본토외성인들 즉 장개석을 따라온 본토인들이 원래의 대만 주민들에게 정복자로 행세하면서 이루어졌던 무자비한 탄압과 학살을 고발하기도 한다.

유재현의 여행기를 읽는 일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대면하고 싶지 않은 우리의 과거를 날것으로 만나는 과정이다.
또한 우리의 추악한 현재를 실감해야 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유재현의 여행기를 읽어야 하는 이유는 그가 끊임없이 하는 문제제기가 바로 우리자신을 구원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한 애비와 에미에게서 난 자식들이 연대를 통해 공동의 삶의 조건을 창출하기 위해 우리가 알아야 할 것들이 지금은 그에게서 우리들에게 화두로 던져지고 있기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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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주 보는 한일사 1 - 화해와 공존을 위한 첫걸음, 선사 시대~고려 시대 마주 보는 한일사 1
전국역사교사모임.일본역사교육자협의회 엮음 / 사계절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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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문제나 일본의 역사왜곡문제같은게 터질때마다 갑갑함으로 마음이 터질 것 같다.
일본우익의 역사인식의 문제역시 갑갑하기 이를데 없지만 그에 대한 우리측의 대응이라고 해서 나을게 하나도 없기때문이다.
일본과의 역사적 분쟁이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그리고 학문적 연구를 촉진하는 쪽으로 진행되기는 커녕 늘 정치판의 여론몰이용으로 놀아나는 꼴을 보는게 한심하면서도 안타까운 것이다.
일본군 위안부문제에 대해 그 여자들이 창피한줄도 모르고 라는 망언을 일삼는 인간들이 독도문제에 게거품을 물고  일본을 질타하는 그 아이러니한 모습은 희극적이기까지 하다.

그런 인간들이 참 역사를 좋아한다.
아니 좋아하고 싶은 역사만 좋아한다. 그것도 진실이 뭔지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자기가 믿고싶은 것만 믿는 쪽으로....
대표적인게 아마도 옛날에 왜놈들거는 전부 우리가 갖다준거고 아니면 그것들이 베낀거야 하는 말도 안되는 환상이지?  그런데 진짜 문제는 그렇게 믿는 사람들이 소수의 미치광이만이 아니라 지극히 정상적인 보통의 사람들조차 그런생각에 젖어있는 사람들이 무지하게 많다는거다.
아! 문제의 근원을 어디서 찾아야 할까?
어디긴 어디야! 한국 중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지.....
세월이 그렇게 많이 흘러도 한일관계에 대한 대한민국 국사교과서의 인식은 내가 학교를 다니던 시절과 비교해 바뀐게 거의 없다. 국사교육의 목적이 한국인의 자랑스런 전통을 함양하고 자랑스런 한국인을 만들어낸다는  지극히 민족주의적인 기준을 고수하는 이상 아마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여전히 소수이긴 하지만 최근에 와서야 한일의 역사를 공동으로 고민하고 아집과 적대의 역사가 아니라 평화와 공존의 역사를 만들어가고자 하는 움직임이 늘어나고 있다.
이 책은 그런 발걸음의 작지만 소중한 첫 발걸음이 되리라 믿어진다.

1권은 선사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를 다루고 있다. 일본의 경우 무로마치 막부시대까지이다.
이 책의 편집을 보면 아직 양국의 역사를 아우르는 하나의 역사서를 만드는 것이 아직은 요원한 일임을 보여준다.
마주보는 한일사란 제목 그대로 각자가 각각의 역사를 서술하고 각 문화 내에서 문화교류사 부분과 그것이 각국에 끼친 영향, 그리고 중국을 포함한 국제관계속에서의 위치 등을 탐구해들어가는 식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시도는 일방적인 문화전파론이나 편협한 독자성론이 가지는 자국중심의 문화적 오만에서 벗어나고 있다.

예를 들면 고대 한일교류의 대표주자로 꼽을 수 있는 양국의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의 유사성부분을 들 수 있는데 쌍둥이 처럼 닮은 이 불상들을 얘기할때 사람들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오히려 주목하지 않는다.
둘이 닮았다는 사실에서 출발하여 마치 일본의 문화가 한반도에서 완전히 이식된 것인양 온갖 증거들을 찾고 그것을 내세우는것에 급급할 따름이다.
하지만 실제로 이것은 고대사회에서 한일양국간 문화교류가 아주 활발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을 증명할뿐 그것이 어떤 경로를 통해서 어떻게 이루어졌는가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는다. 
이 책에서는 흔히 말해지는 여러가지 가설들을 오히려 배제 함으로써 양국의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의 아름다움에 집중하게 하고 동시에 이 두 개의 불상이 가지는 미묘한 차이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여기에 어느것이 더 훌륭한가를 따지는 것은 그야말로 어리석은 아집일뿐이다.

통사로서는 그렇게 깊을게 없는 평이한 수준의 책이지만 한일의 교류를 바라보는 면에서는 새롭게 알게되고 다시 생각해볼 문제들을 많이 제시해 주는 책이다.
저자들의 말대로 중학생에서 어른들까지 누구나가 볼 수 있는 책이지만 이 책이 전하고자 하는 가치관이나 역사적 문제제기는 결코 가볍지 않다 할 것이다.

덧붙여 책속의 도판들과 그 설명들을 듣는 재미가 쏠쏠하다.
책 두께에 비해 가격이 비싸다는 생각을 처음에 했는데 책속의 도판들의 선명함을 보고 이해해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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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술 1902-1950 -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
안재성 지음 / 사회평론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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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표지속의 이관술이 엷게 웃고 있다.
1933년 그의 나이 32에 반제동맹 사건으로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을때의 사진이란다.
오랜 고문속에 몸과 마음이 모두 황폐해졌을텐데도 그는 너무나 순박하게 웃고있다.
저 순박해보이는 모습 어디에서도 울산의 지주집 아들이자 당시 동경제대보다 어렵다던 동경사범대학을 나온  최고의 인텔리였으며 공산주의 사상가로서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는게 잠시 당황스럽다.
그러나 저 사진이 찍힌 상황을 생각한다면 그런 상황속에서도 여유와 삶에 대한 낙관을 버리지 않는듯한 저 표정은 그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려준다싶기도 하다.
모진 고문과 형무소 수감에도 굴하지 않고 미래에 대한 신념에 대한 낙관을 보여주는 저 눈빛과 엷은 미소가 이관술이란 인물을 가장 적절하게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이관술에 대해서는 같은 작가의 책 <경성트로이카>에서 일부 소개되기도 했다.
동경사범을 졸업하고 동덕여고의 교사로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이관술은 처음부터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
광주학생운동때 그가 재직하던 동덕여고의 여학생들도 시위운동에 참가하는데 그 과정에서 입으로만 민족이니 독립이니 떠들던 민족주의자들의 한계를 절감하고 사회주의 사상으로 기울게 된다.
이후 이재유를 중심으로 하던 경성트로이카에서 활동하기 시작하며 해방까지 계속된 투옥과 수배자의 생활속에서도 끝까지 변절하지 않고 독립과 노동자 농민의 세상을 위한 투쟁의 길을 걷는다.

그런데 이런 이관술의 일생에 대한 이 책의 내용은 사실 평전이라고 보기에는 부족한 점이 너무 많다. 거의 대부분의 내용이 <경성트로이카>에서 얘기됐던 부분이고 이관술이란 인물 자체보다는 당대의 역사적 상황이나 주변의 이야기들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이점이 같은 작가의 <이현상평전>과 비교해도 부족한게 확실하게 표가 난다고 할까?
결국 작가가 도저히 넘어설수없는 자료의 부족이 있었지 않나 싶다.
그런 자료의 부족속에서도 보이는 이관술의 모습은 외유내강의 전형적인 인물이랄까?
겉으로는 한없이 부드럽고 다른 이에 대해서도 언제나 배려을 잊지 않는 모습이지만 자신의 내부에서는 신념에 대한 의지가 너무나도 강고한 그런 인물.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히는 부분은 역시 조선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이다.
이관술이 바로 이 사건 때문에 해방된 조국에서 다시 감옥에 가야 했던 사건이기도 하다.(하지만 이때 감옥에 안갔다고 그의 삶이 별로 달라졌을 것 같지는 않다. 그와 함께 했던 수많은 공산주의자 동지들의 이후 운명을 보면 말이다.)
조선정판사 위폐사건은 조선 공산당이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 일제가 남기고간 화폐인쇄판으로 위조지폐를 대량으로 만들어 유포시켰다는 것으로 아직도 수많은 의문점을 남기고 있는 사건이다.
이관술은 당시 조선공산당의 재정부장으로 정판사 위폐사건을 주도했다는 혐의로 체포 수감되었다.

당시 가장 대중적인 기반이 탄탄하던 조선공산당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안긴 이 사건은 수많은 의문점들을 가지고 있다.
저자는 이 사건에 대해서 당시의 신문기사와 정황, 재판기록들을 면밀히 살피며 의문들을 제기하고 있다.
정판사위폐 사건이 일어날 당시에는 조선공산당이 재정적으로 그리 어렵던 시기도 아니며 또한 경찰과 검찰이 제시한 증거들이란게 확실한게 하나도 없으며 관련 피고들의 고문주장과 정황증거들이 모두 무시되었던 점들이 상세히 제시된다.
이런 상황들만 본다면 이 사건은 분명히 미군정과 우익진영이 조선공산당을 탄압하기 위해 만들어낸 조작사건이다.
만약에 이것이 조작사건이라면 이관술을 비롯한 이 사건의 관련자들은 죽어서도 아직 억울함을 풀지 못한게 된다. 더더군다나 이관술은 가장 비타협적으로 일본과 맞서 싸웠던 독립운동가였는데 해방된 조국이 그 독립운동가에게 훈장은 못줄망정 위조지폐범이란 불명예를 뒤집어씌웠다는 것은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해방된 조국에서 위조지폐범이란 죄목으로 다시 감옥에 갇힌 이관술의 마지막 모습은 어땠을까?
그는 여전히 표지의 사진처럼 삶에 대한 낙관과 신념을 잃지 않았을까?
아니면 절망했을까?
같이 있던 이들이 모두 죽었고 어떤 자료도 남기지 않았으니 안타까움만 더한다.
역사적 진실이 무엇인지 명명백백하게 밝히지 않는다면 우리 모두는 그에게 죄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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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산 김원봉 역사 인물 찾기 18
이원규 지음 / 실천문학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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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산 김원봉이라는 인물에 대한 최초의 나의 놀라움에 대한 기억은?
그가 22살의 나이에 의열단을 창단하고 의백의 자리에 올랐다는 것 때문이었다.
이 때 나의 관심은 의열단도 그 뒤의 조선의용군도 아닌 바로 그의 저 나이였다.
내가 이 사실을 알았을때가 30이 넘어서였으니 22살이라는 나이에 독립운동 단체를 만들고 그 대장의 지위에 오를 수 있는 인간이란게 상상이 안가서였던 것 같다. 사실 22살은 행동대원에 딱 걸맞는 나이가 아닌가 말이다.
그 순간 내 나이 22살은 뭐였지 싶은 그런 기분.....

가끔 평전이나 전기문 같은걸 보면서 불편할때가 자주 있다.
어떤 인물에 대한 영웅적 해석을 만날때인데
가령 그의  존재만으로 좌중을 압도하거나 자기편으로 끌어들인다는 투의 뭐 그런것 말이다.
존재만으로 그런 카리스마를 가지는 사람은 없다.
누구든 어떤 천재든 그런 능력이나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다면 그에 합당한 능력들 - 달변일수도 있고 과감한 행동력일 수도 있고 깊은 사유에서 나온 것일수도 있고 - 을 분명히 가지고 있을 것이고 평전이라면 의당 그것을 추적해내는 것이 임무일 것이다.
그런데 김원봉 평전에서는 자료의 부족때문인지 아니면 저자의 필력부족때문인지 -나는 후자가 크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영웅화 이전의 인간 김원봉에 대한 연구가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 보니 이상화와 영웅화에 치우쳐 오히려 김원봉이라는 거목을 표현해내는데 걸림돌이 된다는 생각이 들게 되는것이다.

그럼에도 약산 김원봉은 내게 영웅이다.
앞에서 말한 22살의 나이에 의열단을 창단했다는 것.
하지만 여기서 그에 대한 평가가 멈추어서는 안된다.
만약에 그가 의열단으로 그의 독립운동사를 끝냈다면 그는 그저 그런 테러리스트에 머물렀을 뿐일 것이다.
그는 젊은 시절의 테러조직 의열단에서 멈추지 않는다.
어쩌면 젊은 시절의 혈기와 사상의 부재에서 나왔을 의열단이라는 조직을 그는 스스로 해체할 줄 알았다.
그리고 조선의용군이라는 군대를 조직하고 그 군대로 하여금 중국과 연합하여 일본과 싸우고 그리고 조선의 독립이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누구보다 명확히 알았던 사람이 그이다. 어쩌면 자신이 키우다시피한 군대가 자신의 영역을 벗어나는 것도 그는 개의치 않았던 것은 그 군대가 해방을 앞둔 조선 국내로 진공작전을 펼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고 어디로 가야할 지를 명확히 알고있었던 것이 아닐까?

내게 김원봉이 영웅이 되었던 처음은 그의 젊은 나이의 업적이었지만
진정으로 그가 나의 영웅인 것은 조선의 독립이란 대의 앞에 자신의 분신과도 같았을 군대를 내어놓았던데 있다.
1940년 조선의용대는 조선으로의 진격작전과 조선민중과의 보다 많은 결합을 위해 조선과 보다 가까운 화북지역으로의 이동을 단행한다. 이 때 김원봉은 우익과 좌익세력이 모두 결합하는 독립운동진영의 조직을 위해 남경에 남는다. 이 기간에도 한동안은 김원봉은 조선의용대의 지휘권을 잃지않는다. 하지만 화북으로 이동해간 조선의용대는 곧 임정에서 이탈을 선언하고 조선의용군으로 개편하며 좌익쪽으로 기운다. 이 순간이 김원봉에게는 자신이 만든 군대에 대한 지휘권을 잃은 순간이다. 그가 만약 조금이라도 권력욕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 때 그는 화북으로 갔어야 했다. 그렇다면 그는 여전히 조선의용군의 대장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거기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리고 평생의 자신의 신념이었던 통일된 독립운동진영의 결성을 위해 그 꼬장꼬장한 임정파들까지도 결합해내기 위해 끝까지 노력을 거듭한다.
이 부분은 김원봉이라는 인물에 대해 양면에서의 평가를 가능하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는 분명히 사상이나 이념에 명확하고 투철한  인물은 아니었던 듯하다.
그의 사상은 어찌보면 두리뭉실하다.
철저한 민족주의자라는 면에서는 우파에 가깝고, 그가 원하던 해방된 조국의 모습에 대해서는 좌파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어떤 사상을 명확하게 가져서라기보다는 그저 그가 생각하던 정의에 대한 막연한 생각들이 신념화된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그런 자신의 신념을 위해 한 번도 곁눈을 팔지않고 자신의 군대에 대한 지휘권을 주장하며 독선을 부리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별로 한 것도 없는 임시정부가 주구낭창 임정의 대표성을 운운한것에 비교하면 고결하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이다.
드물지만 가끔은 이런 인간도 있다.
그래서 이런 인간들은 정치에서는 반드시 실패한다.
그게 정치의 비극이기도 하지만.....

해방공간에서 그의 신념은 어디에서도 받아지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그 힘들고 어려운 독립운동의 삶속에서도 쥐꼬리만한 권력조차도 탐하던 인간들이 해방공간에서야 어떠했으랴?
정치적으로 올바른 이들이 승리하고, 당위가 현실이 되얼질 수 있는 시대가 되어야만이 김원봉이라는 거목이 바르게 대접받고 바르게 자리매김되어질텐데.... 그런 정치가 존재라도 하는지를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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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NY 2008-01-22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2살요???!!!! 아, 정말 그 나이때 뭐했지. 지금은 뭐했지. 하는 생각 뿐입니다.

바람돌이 2008-01-22 23:29   좋아요 0 | URL
시대가 그래서 그런가? 옛날 사람들은 평균적으로도 지금 우리보다 훨씬 빨리 어른이 되었던 것 같아요. 갈수록 인간이 진화하는게 아니라 퇴화하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왜 요즘 애들은 더 정신연령이 어려지는듯한 느낌 안받으세요?

BRINY 2008-01-23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애들 정신연령이 어려지는 듯한 느낌요? 왜 안받겠습니까? 해마다 점점 어려지는 느낌입니다.

바람돌이 2008-01-24 00:16   좋아요 0 | URL
그렇죠?
 
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
강명관 지음 / 푸른역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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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명관씨의 전작인 <조선의 뒷골목 풍경>이 별로였기에 이 책도 생각도 안하고 있었는데 지인이 추천을 하길래 손에 들었다. 결론은 전작보다 훨씬 낫다.

이른바 책벌레들이라 불리울만한 조선의 여러 인물들을 통해 조선의 인쇄문화, 지식인층의 독서경향과 그것이 사회에 끼친 영향들을 개괄적으로 살피고 있는데 그것을 살피는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저자 나름대로의 해석과 평가를 내리고 있는 장면들이 볼만하다.
어떤 경우는 아주 명쾌해서 그래 이런 비판이 필요했어라는 장면이 있는가하면 일면 수긍이 가면서도 일면 좀 과하지 않나라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어쨌든 나는 어줍잖게 이리저리 돌리는 것보다 이렇게 명쾌한 사람이 좋더라....
비판을 받을지언정 자신의 의견을 명확하게 제시할 줄 아는 사람이 말이다.

우리나라 고려조에 금속활자의 발명이 세계최초라며 자랑스럽게 제시하는건 누구나가 아는 국민적 상식에 해당할게다.
하지만 그 금속활자의 발명이 과연 200년 후의 서양의 구텐베르그의 발명보다 위대한 것이었나라는 질문은 잘 던져지지 않다가 최근에 와서야 일부 학자들에 의해 제기 되고 있다.
저자도 나도 최초니 하는 숫자에 별로 관심이 없다.
중요한 것은 그 발명이 사회를 과연 어떻게 바꾸었느냐 하는 것이다.
구텐베르그의 발명은 서양의 종교개혁과 맞물리면서 지식의 대중화를 가져왔고 봉건사회를 뒤집어 엎을 새로운 세력을 만들어냈다. 어쨋든 사회를 변화시키는 추동력으로서의 역할을 해냈던 것.
그렇다면 우리의 그 위대한 금속활자는?
금속활자의 발명은 많은 책을 만들어내어 지식의 대중화를 이루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고려시대에도 조선시대에서 많은 책을 찍어내기 위해서는 여전히 목판이 중심이었고, 금속활자는 소량의 다양한 책을 만들어내기 위한 것이었다. 그 소량의 책이 누구의 소유가 되었을까?
말할 것도 없이 지배층이다.
금속활자의 발명이후 그것이 개량된 것은 세종조까지가  끝이다.
세종조때까지의 개량만으로 사대부들의 수요를 충족하기는 충분한터 더이상의 개량을 고민할 이유가 없었던데 그 원인이 있을 것이다.
지식의 대중화를 만들어내지 못한 인쇄술의 발명은 이제 좀 더 그 평가의 제자리를 찾아야 하는게 아닐까?

16세기 조선은 조광조라는 도덕군자를 맞는다.
건국 이후 100년쯤 흘렀으니 기존의 기득권세력의 안정이 계속되면서 초기의 개혁의욕은 점점 사라져가고 자리보전을 위한 부정부패가 악취를 풍기기 시작할 즈음, 바로 그 부정부패에 도덕의 잣대를 들이대면서 등장한 사림파와 그들이 대표가 바로 조광조이다.
시대극에서든 일반적인 평가에서든 조광조는 개혁가와 도덕군자의 이미지로 대표된다.
그는 자신의 도덕적 삶뿐만 아니라 군주에게도 역시 도덕적 삶을 강요하였다. 여기에서도 만족하지 못한 그는 유교적 도덕을 백성에게 전파, 강요하기 위해 <삼강행실도>니 <이륜행실도> <열녀전>같은 책을 엄청나게 찍어 배포하게 한다.
더불어 그가 가장 신경을 써서 배포한 책이 있으니 바로 <소학>이다.
<소학>은 그야말로 사대부를 만들어내기 위한 책이다.
백성과 구분되는 훌륭한 인간의 표본으로서의 사대부 제작지침이라고나 할까?
밥 먹을때는 뭉치지 말고 밥상앞에서 혀를 차지 말라는 둥, 남녀칠세 부동석이라는 둥, 칠거지악이니 이런 것들이 모두 소학에서 제시된다.
철저하게 가부장적이고 남성중심적이면서 동시에 일반 백성과 사대부를 경계짓는 책이 바로 <소학>이다.
조광조의 이 기획은 지나치게 성공적이어서 선조대가 되면 조광조의 뒤를 이은 사림파가 바로 조선의 주인이 된다.
이런 사림파의 도덕교육에 대해 저자는 철없는 지식분자들의 행각이라고 일갈을 가한다.
개혁은 필요했지만 나날이 악화되어지는 백성의 실질적 삶의 개선은 젖혀둔채 도덕 일색으로 사회를 바꾸려 하는 것 허망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조광조의 뒤를 이은 사림의 세상은 그야말로 백성의 실제 삶의 개선에 대한 학문은 깡그리 무시하고 오로지 명분과 도덕주의를 내세워 세종때 그나마 발달했던 실용학문들을 압살해버린다.그렇다고 그들이 또 그렇게 도덕적이었냐 하면 참......권력앞에 도덕이란 언어의 유희일뿐이다.
사실상 조광조에 대한 저자의 이런 평가는 일면 과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건 아니지만 오히려 신선하다는 느낌도 받는다.
사림이 집권을 하고 난 이후에 대해서는 그들의 관념론과 명분론에 대한 비판이 많았지만 그것이 조광조까지는 올라가지 못했던 터... 그런데 바로 이 사림을 본격적으로 만들어낸 이가 조광조이니 어쩌면 뿌리까지의 비판적 검증은 반드시 필요한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강명관씨의 인물평가는 참 독특하다.
앞의 인물도 그러했지만 퇴계 이황이나 율곡 이이에 대한 비판의 칼도 매섭다.
과연 누가 이들에게 비판의 칼날을 들이되었는가 말이다. (지폐에까지 등장하는 분들인데....)
이들이 척박한 조선의 학문 환경에서 주자학을 공부하고 그것의 이론을 극대화하여 발전시키고 한 공은 인정할 수밖에 없으나 그것의 결과가 이후 조선의 학문을 주자학 일색으로 만들어버린 병폐의 시작이었으니 어찌할까?
딱히 보면 이 둘의 잘못이라고만  들이대기는 억울할 것 같은 면도 없지 않지만 어쨌든 결과가 그러함에야.... 조광조가 주자의 도덕론으로 사림을 만들어냈다면 주자학의 체계를 정리함으로써 사대부의 유일무이한 사상적 무기로 만들어준 것이 바로 퇴계와 율곡이라고나 할까?
학문의 다양성이 사라진 사회에서 주자학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으면서도 약간의 자신의 의견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도 사람들은 희생되어 나간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허균이고 박세당이다.

조선에 학문의 다양함이 숨구멍을 트기 시작하는건 조선 후기 흔히 말하는 실학계열의 학자들이 등장하면서였다. 이들이 등장하게 된 배경은 또 중국 청나라의 무수한 서적들의 수입이 있으면서였으니 외부에서의 새바람이 조선 학계에 숨통을 틔워준것이리라....
이 과정에서 이익같은 이는 수많은 책을 읽고 그것을 소개하는 역할을 해낸다. <성호사설>이란 빛나는 업적이 그것인데 사실 이 책은 수많은 책의 내용을 분류하고 모아서 편집한 책이다. 다만 그 편집의 틈사이에 성호가 자신의 의견을 개진한 것이고..... (단 성호가 사회를 바라보던 깊이는 충분히 인정해야 할만큼 훌륭하단다.)
새로운 학풍의 등장은 새로운 문체와 새로운 의식을 가져오고 그 과정에 우리 귀에 익은 여러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덕무, 박지원, 정약용 등등.....
흔히 세종과 함께 호학의 군주로 개혁의 군주로 일컬어지는 정조는 아이러니하게도 사상탄압의 군주이기도 했다. 정조가 이루려던 조선은 어떤 사회일까? 그것은 결국 주자학의 도덕에 입각한 기존 조선의 강화였으며 따라서 당대에 새롭게 청으로부터 들어오던 학문을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일어난게 문체반정 - 즉 주자학과 고문에 입각한 순정한 문장 외에는 모두 탄압하는 것이었으니 조금 과장한다면 조선의 진시황이 되었을지도 모르겟다. 정조가 좀 더 오래 살았다면 말이다. (그런데 정조의 문체반정이 정조의 이념적 지향성에서만 다루어지는 것은 조금 아쉽다. 정조가 문체반정에 좀 더 적극적이었던 것은 당시 경화사족, 즉 서울에 사는 대갓집 양반들 즉 노론을 경계하기 위한 정치적인 목적도 있었다. 본성이 호학의 군주였던 정조가 자신의 왕권에 대한 노론의 위협이 조금만 덜한 시대였다면 이정도로까지 사상을 탄압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르기때문이다.) 정조의 문체 반정은 정조의 이념적 순수성의 결과였을까? 아니면 정치적 계산의 결과였을까? 이 둘이 모두 한꺼번에 연결되어 있는건 분명하지만 저자의 말처럼 딱 하나로만 원인을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생각이다.

이 책의 마지막 책벌레는 단재 신채호다.
신채호선생이야 혁명가이기도 하지만 한학에도 아주 밝으셨던 분이다. 근데 그분이 영어도 굉장히 잘햇다는 건 처음 듣는 얘기였다.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를 원서로 읽어낼 정도였다니....
그런데 대단한 독해력을 자랑했던 이분의 영어읽기가 참 흥미롭다.
영어책을 읽을때 구절구절 '하여슬람'하면서 한문식으로 토를 달아 읽었단다. "I am a boy"를 " I는 am a boy라"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래서 왜 그렇게 읽느냐 물으니 영어나 한문이나 글은 마찬가지가 아니요라고 했다니... 대쪽같기가 이를데 없었던 단재가 영어책을 읽는 모습 상상이 즐겁다.

조선의 책을 좋아한 사람들과 그들에 대한 신선한 평가는 책을 읽는 것이 내내 즐거운 경험이게 했다. 저자의 평가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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