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상대(대상)와의 관계가 아니다. 자기 내부에서 일어나는 ‘나의 사건이다. 흔히 말하는 ‘사랑하는 나를 사랑하는 행위, 자기 자신과의 관계다.  - P125

사랑이 없다면 삶도 없다. 사랑 자체가 소중해서가 아니라 사는의미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 P125

이후 ‘문빠‘ ‘대깨문‘으로 불리는 이들은 박정희 부녀 팬덤(박사모)과 다를 바 없이 누가 더 퇴보적인 집단인지를 두고 경쟁했다. 어떤 이들은 두 집단이 어떻게 같냐고 하겠지만 다르지않다. 문제는 숭배 대상이 아니라 행동 방식이기 때문이다. - P132

내 안의 무엇인가-주로 괴로움ㅡ를 꺼내놓으면, 짐이 덜어지고 상황도 객관화되고 안정이 된다. 고민, 외로움, 스트레스일수록 말을 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쓰기도 마찬가지다. ‘부정적‘ 감정이 나쁜 것이 아니다. 괴로움은 삶의 조건이다. 문제는 그것을 제대로 표출하지 못하는 상황이고, 언제나 고민은 누구에게 말할까이다. - P138

나는 영화나 책을 집중해서보지만, 완전히 믿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며 노력하는 편이다.
본 것이 지식으로 자리잡을 때가 가장 위험하다. 삶은 기존의앎을 비워내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 P148

정의는 없다. 있다면 내세뿐이다. 이번 생에 고생한 이들은 다음에 반드시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 내세가 현재의 고통을 견디게 하는 희망이 아니라 실제로 실현되어야 한다. 내게 돈이 있다면, 기부니 뭐니 그런 거 안 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여행 비용을 제공하겠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기분이 더 나빠졌고 시간이 아까워졌다. 특히 내가 내세에 더 나쁜 환경에서태어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망상이 멈췄다! - P158

내 삶에 불만을 가지기보다 "다른 사람은 얼마나 억울하겠어" 생각하는 것. 이렇게생각하니, 내 주변이 다시 보인다. - P158

혁명은 역사의 기관차가 아니다. 이제 혁명은 질주하는 자본주의를 멈추게 하는 브레이크여야 한다. ‘ - P167

"우리는 당신의 미래가 아니야. 당신의 관점에서 우리를 정의하지마."
- P215

기질과 가치관, 계급, 성별 등의 이유로 나는 궤도 안의 주류로 살기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조금은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 타자임을 선택했다. 누가 어떻게 규정했든 간에 나는 나의 타자성을 사랑한다. 내 인생에서 유일하게 중요한사실이다. 모든 다름은 공동체의 진실을 드러낸다. - P220

이 글 서두에 인용한 이야기는 나의 고통을 대변한다. 내가생각하는 페미니즘은 기존의 정치적 대립 구도가 누구의 경험을 기준으로 한 것인가를 묻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진상 규명이나 진실보다는 누가 협상 자리에 앉아 있지 않은지, 누구의 관심사가 명확히 표현되지 않는지, 누구의 이득이 표명되지 않는지, 누구의 진실이 발언되거나 인정되지 않는지, 우리가 놓치고있는 진실을 찾아내려 한다. - P244

한국 사회가 일본에 진정 요구하는 바는 무엇인가, 군 위안부 운동의 청중은 누구인가. 일본의 우익을 대상으로 하는 군위안부 운동이 무슨 의미일까? 나는 청중이 한국 사회, 우리 자deS신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전시 성폭력과 미투 운동이 연결된다.  - P245

저항은 우리 자신의 변화와 성장을 위한 것이지, 피해자 정체성을 인정받기 위한 투쟁이 아니다. 가해자의 권력과 지위는 피해자 없이 구성되지 않는다. 나의 고통은 상대방 권력의 크기를의미한다. 물론 이는 군 위안부의 역사를 부정하는 일이 아니라이 피해에 대한 관점을 전환하는 의식과 문화의 탈식민을 의미한다. - P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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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글쓰기는 대상(영화)에 대해 쓰는 것이 아니다. 대상에 대해 말하는 사람을 드러내는 행위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여성‘이나 ‘동양‘은 실재하지않는다. 규범일 뿐이다. 여성은 남성이 쓴 것이고, 동양은 서양이 쓴 것이다. 간단히 말해 전자는 가부장제, 후자는 오리엔탈리즘이다. - P10

우리는 언제나 모든 재현이 ‘누군가가 쓴것‘임을 인식하고, 그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나를알기 위해 쓴다‘도 중요하지만 ‘나‘는 매 순간 변화하고 움직이는 존재임을 각성하고 있어야 한다.  - P12

지식은 어디 (인식자의 위치)에서 어디 (현실의 일부)를 보는가에 관한이야기이다. ‘진정한 객관성‘은 우리가 말하고 있는 곳, 그 주소(address, ‘말하다‘는 뜻도 있다)를 분명히 함으로써 확보된다. 현실 밖에서 말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 P23

 자신의 변화를 위해,
자기가 원하는 자기가 되기 위해 인간이 버릴 수 있는 최대치는목숨이 아니라 ‘자기가 도달할 수 없는 다른 삶을 지지하는 것‘이다. - P28

페미니즘이든 마르크스주의든모두 부분적 세계관이다. 개인이 단 하나의 가치관을 갖는 것이바람직한가? 페미니즘은 남녀 모두에게 부분적으로 필요한 중요한 공부일 뿐이다.  - P50

<지구상의 모든 인간은 성별, 계급, 인종 따위가 얽힌 지점에서 저마다 다른 삶을 산다. 인간은 각자 하나의 섬이다. 서로를역지사지(易地思之)할 수 없다. 어렵다. 역지사지는 상대와 다른땅(위치)에서 생각해보는 것이다. 섬에서 땅으로 이동이 쉽겠는가. 같은 여성이라도 강간을 경험한 여성과 그렇지 않은 여성은 젠더에 대해 생각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공부를타인과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인간적인 행위라고 생각한다. - P61

지식은 공부하고 조사해서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발명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식은 어딘가에 있어서 찾아내는 대상이 아니라 특정한 시각이 없다면 드러나지 않는 사실이다. 시각이 지식을 드러나게 하므로 지식은 발명 (making)되는 것이다. 그래서객관적인 지식이란 존재할 수 없다. 시각이 앎을 결정한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차이는 우리가 끼고 있는 렌즈의색깔에 달려 있다. - P67

우리는 착각하고 있다. 민주주의 사회는 모두가 혹은 다수가행복한 사회가 아니다. 배제된 사람이 없는 사회다. - P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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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남성시인들이 경험하는 ‘영향에 대한 불안‘은 여성 시인에게 오히려 ‘작가가 되는 것에 대한 불안‘ (자신은 창조할 수 없다는 불안, 자신은결코 ‘선배‘가 될 수 없기 때문에 글 쓰는 행위는 자신을 소외시키거나 파괴할 것이라는 근본적인 불안)으로 다가온다. - P145

최근의 예를 들면, 남성 작가들은 블룸의 ‘영향에 대한 불안‘ 이론이 정확하게 묘사한 수정 요구로 인해 점차 탈진하고 있는 반면, 여성 작가들은 자신을 창조성의 개척자로 본다. 여성작가들에게 이런 느낌은 너무강렬해서 르네상스 이래, 혹은 적어도 낭만주의 이래 남성 작가들은 결코 경험하지 못했을 정도다. 수많은 아버지의 아들인 오늘날의 남성 작가들은 자신이 뒤떨어졌다는 절망감을 느끼지만, 몇 안 되는 어머니들의 딸인 오늘날의 여성 작가들은 드디어 싹트기 시작한 생명력 있는 전통을 창조하는 데 일조한다고느끼는 것이다.  - P147

 ‘감염된 문장이 새끼를 친다‘는 개념은 여성 문인에게 너무도 잘 들어맞는 진실이다. 오스틴과 셀리부터 디킨슨과 배럿 브라우닝에 이르는 19세기 소설가들과 시인들의 위대한 예술적성취는 사실적으로나 비유적으로나 번번이 질병과 결부되었다. - P158

 이 모든 인물들과 작가들이 잊었을까 봐 정말로 두려워하는 대상은 정확하게 말해 가부장적 시학 때문에 멀어진 자신들 삶의 국면, 즉 자신들의 모계적 문학 유산이다. 그것은 애니고틀립이 말한 것처럼 그들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어머니‘임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그들에게 중요한 ‘여성적 힘‘이다. 따라서 ‘감염된 문장‘이 여성들 사이에 ‘새끼를 쳐나가는‘ 방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여성들이 어떻게 질병을 통해 예술적 건강을 획득해내는가를 배우기 위해서도 ‘영향에 대한 불안‘
이라는 블룸의 중요한 정의를 재정의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19세기 여성들이 자신들을 쇠약하게 만드는 가부장적 인식을 거부하고 자신들의 고유한 여성의 힘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잃어버린 어머니들을 되찾고 기억해내 ‘작가가되는 것에 대한 불안‘을 극복한 일이 얼마나 지난했는지 추적해낼 수 있을 것이다. - P161

모든 여성의 삶과 시, 그리고 선택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바는간단히 말해, 여성 문인이 세계 내에서 자신의 공적 현존을 규정해야 했을 때 어떤 선택을 하든 똑같이 항상 자기 존재를 비하하는 결과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 P168

마찬가지로 오이디푸스는 영웅이지만, 메데이아는 마녀일 뿐이다. 리어의 광기는 거룩하고 보편적이지만, 오필리아의광기는 그저 측은할 따름이다. 비극의 구조가 가부장제의 구조를 반영하는 한(다시 말해 비극이 ‘고귀한 인물의 ‘몰락‘ 이야기여야 하는 한 비극이라는 장르 자체가 그런 이야기를 단순히 사용한다기보다는 필요로 하는 것이다.  - P175

자신을 치유하기 위해 여성 작가는 우선 자신을 감염시켰던문장(판결)을 쫓아내야 한다. 그녀는 공공연하게 또는 암암리에 ‘주름진 창조자‘에게서 들이마신 절망을 벗어내어 자신을 자유롭게 해야 한다. 여성 작가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창조자의 텍스트를 수정하는 것이다. 다른 은유로 표현해보자면, ‘유리 표면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여성 문인은 모든 여성이 지켜야 했던 사회적 규범을 그토록 오랫동안 반영해온 거울을 박살내야 한다.  - P187

그리하여 여성 작가들은 가부장제나 인습을 공공연하게 비판하지 않을 때조차(그리고 우리가 살펴볼 19세기 여성들은 그런 비판을 공공연히 하지도 않았다) 거의 편집증적으로 자신의 감추어진 분노를드러내주는 인물들을 창조했다.  - P188

‘말하지 않는 법을 버리기‘와 같은 매우 결정적인 투쟁을 벌였음에도 예술의 외관 뒤에 숨는다는 것은 여전히 숨기는 것이고 제한받는 것이라는 점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비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감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 P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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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다락방의 미친 여자> 읽기 시작!!!!

역시 생각했던대로 만만치 않다. 서문과 1장을 읽고난 소감은 이 책을 다 읽어도 제대로 이해했다고 할 수 있을까 하는 무섬증이 먼저 들었고, 다음으로는 다 읽고 무언가 제대로 된 리뷰를 쓰는건 불가능하겠구나라는 기분이다. 매일 한 챕터씩 읽으면 딱 16일이면 읽을 수 있겟다 싶어 용기를 내면서 동시에 매일 각 장에서 생각했던 것들을 열심히 정리해보자라는 결심을 한다. 동시에 어쩌면 이 책에 대한 글들은 전부 이건 무슨 말일까라는 의문문으로 도배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도 드는데 그러면서 또 왜 문학이든 영화든 문화쪽의 비평이란 말만 들어가면 이리도 책이 어려워지는것이냐라고 한탄을 하는 것이다.



초판 서문에서 저자들은 "우리는 '은유를 낳는 경험'과 '경험을 낳는 은유' 둘 다를 묘사하고자 했다."라는 문장을 제시하는데왠지 이 책을 읽어감에 뭔가 핵심인 문장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했다. 문학의 가장 중요한 장치로서의 은유와 그 은유를 낳을 수 있게 하는 실질적 경험이 19세기 여성문학과 어떻게 만나는가에 주목하면서 책을 읽어야 하는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는데 읽다보면 이 아리송한 말의 진정한 의미를 파악할 수 있겠지라고 생각한다. 물론 결과는 장담할 수 없지만 말이다.


  펜은 음경의 은유일까?라는 도발적인 말은 결국 역사적으로 문학이 남성의 전유물이었을뿐만 아니라 실제로 전유물로 만들기 위한 부단한 이론적 시도들을 집약하는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실제 인류의 유지에서 아이를 낳지 못함으로 생산자의 입장에 서지 못한 남성은 이 세계를 지탱하는 이데올로기에서 생산자의 입장을 그리도 갈구했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래서 문학작품, 텍스트와 작가의 관계에서 텍스트를 작가의 자식으로 은유하는 것은 남성의 창조적 생산성을 강조함으로써 오로지 신과 여성만이 존재하던 "생산과 창조"의 영역을 넘보는 것이기도 하겠다. 역시 결핍이 창조를 낳는달까? 음경이 부재한 여성의 결핍을 얘기할게 아니라 아이를 못낳는 남성의 결핍을 얘기해야 할 판이다. 


  그런데 논의는 여기서 한발짝 더 나아간다. 남성이 텍스트를 자식으로 낳는 것은 그들의 작품을 낳는 펜이 바로 음경이라는 섹슈얼리티적 해석과 주장으로 말이다. 여기까지 나아가면 결국 문학이든 지성이든 정신적 창조와 작품은 바로 음경을 가진 자, 남성의 영역으로 들어가버리는 것이다. 참으로 결핍의 힘은 세다. 그리고 그런 존재론적 열등감을 가리기 위한 오랜 노력은 가부장제의 확립과 여성의 지적 능력에 대한 소외와 무시로 역사를 이어오니 단순히 얘기할게 아닌건 분명해보인다. 펜이 음경이라는 은유는 어쨌든 오랜 시간 여성의 지적능력을 억압하는 기제로 사용되어왔음은 분명하다.



 남성에 의해 정립된 여성상으로 제시되는 '집안의 천사'에 대한 은유들을 보면서 지금 읽고 있는 샬럿 브론테의 <빌레뜨>속 등장인물을 계속 생각하게 된다. 이 소설속에 등장하는 폴리라는 소녀는 그야말로 어릴 때부터 집안의 천사에 딱 걸맞는 존재로 묘사되는데 그 묘사가 얼마나 절묘한지 이 책과 함께 읽으면서 샬럿 브론테는 당대 인물들의 내면과 성격을 어떻게 이렇게 포착하고 표현할 수 있었을까싶다. 이후 샬럿 브론테의 장에 가서 <빌레뜨>가 어떤 식으로 이야기 될지 아주 궁금해진다. 


백설공주가 유리관을 깨고 나와 왕자와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자 여왕의 유리 거울을 폭파시키는 바로 그 현장에 위치하는 여성문학과의 만남을 기대하며 이제 2장 본격적으로 읽어보자.





여성으로 젠더화된다는 말은 (특히종교가 여전히 보편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던) 19세기의 여성 작가 모두가 타락과 인간의 모든 악은 이브 탓이라는 전통 속에서 작업했음을 의미한다.  - P14

감금과 탈출 이미지, 미친 분신이 온순한 자아의 반사회적 대리인으로 기능했던 환상, 얼어붙은 풍경과 불길에 싸인실내에 나타난 육체적 불편함에 대한 은유-이런 유형들은 대물림되며 거식증, 광장공포증, 폐소공포증 같은 질병의 강박적묘사와 함께 거듭나타났다. - P19

다락방의 미친 여자의 기본적 주장에 대한 그들의 공격은 단순하고 그저 애처로운 두 가지 진술로 요약할 수 있다.
‘남자도 고통받는다‘ 그리고 ‘내 아내는 그런 식으로 느끼지 않는다!‘ - P41

따라서 21세기의 페미니스트들은 엘리자베스 배럿 브라우닝의 가장 뛰어난 책 중 한 쪽을 훔쳐 ‘오로라리‘로 알려진 기표들의 유려한 모음집과 제휴해, 세계를 향해 크고 분명한 소리로 설명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에게도 있다고,
우리의 사명이 해야 할 일이.
........................................

가장 진지하고, 가장 필요한 일이
여느 경제학자들의 일과 마찬가지인 것이
또는 천체물리학자나 미생물학자의 일과 같은 것이 - P65

문학작품의 관례를 볼때 ‘작품의 통일성이나 완전성은 일련의 계보적 연결, 즉 저자-작품, 처음-중간-끝, 텍스트-의미, 독자-해석 등에 의해 유지된다‘고 하면서, ‘이 모든 것의 밑바탕에는계승, 부권, 위계질서의 이미지가 깔려 있다‘ (강조는 인용자)라고말한다. - P76

많은 작가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그리고 다양한 목적에서 문학적 부권 은유를 사용하는데, 모두가 하나같이 문학작품은 문자 그대로 언어의 표현일 뿐 아니라 육체로 신비롭게 구현된 권력이라는 데 동의하는 것 같다. 따라서 가부장적 서구 문화에서 텍스트의 저자는 아버지이자 창시자이며 낳는 자, 펜을 음경처럼 생산의 도구로 쓰는 미학적 가장이다. 더욱이 저자의 펜이지닌 힘은 음경의 힘처럼 생명을 만들어내는 능력이요, 자신의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자손을 만들어내는 힘이다.  - P78

여성은 그토록철저하게 금지당했던 펜을 들어보기도 전에 이미 가부장제와문학작품에 의해 종속되고 감금당했기 때문에, 남성 텍스트들을 피해야 한다. 그 텍스트들은 여성을 ‘영‘으로 규정하고, 여성에게 (여성을 가두고 펜을 들 수 없게 만드는 권위에 맞서 대안을 만들 자주성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 P89

여성 작가는 여성의 육체적 한계를 초월할 수 없다는 바로 그 근거에 기초해 적어도 어느 정도는 자신의 예술적 적절함에 대한 남자 예술가들의 불안을 체화했으므로 18세기 풍자문학에서 실패자로 간주되고 비방받았다. 여성은 재생산 측면 바깥에 있는 자신을 결코 생각할 수 없다. - P119

작가가 되는 것이 자신의 ‘성과 태도‘에  대한 오인을 의미한다면, 작가가 되는 것이 ‘성을 부정하는‘
혹은 성적으로 삐딱한 여성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면, 작가가 된다는 것은 바로 괴물이나 변종, 즉 사악한 ‘에러‘, 기괴한 레이디 맥베스, 혐오스러운 ‘우둔함의 여신‘, (나중에 나올 마녀 중몇몇만 말해보자면) 살인마 라미아, 사악한 제럴딘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주제넘은 노력을 해서는 안 된다. - P122

여성의 순종하는 삶, ‘명상적인 순수한 삶은 침묵의 삶이요, 이야기도 없고 펜도 갖지 못한 삶인 반면, 반항하는 여성의 삶, ‘의미 있는 행위‘의 삶은 침묵을 강요받고 괴물 같은 펜으로 끔찍한 이야기를 말하는 삶이다. 어느 쪽이든 여성 예술가가 자신을 찾기 위해 들여다보는 거울 위의 이미지는 여성 예술가에게 이렇게 경고한다. 여성 예술가는 누명을 쓰고 함정에 빠진, 고발되고 기소된 ‘영‘이라고, 또는 ‘영‘이 되어야 한다고. - P124

그리하여 앤 핀치와 앤 엘리엇부터 에밀리 브론테와 에밀리 디킨슨에 이르는 자부심 강한 여성들이 남성 작가의텍스트라는 유리관에서 나와 여왕의 거울을 폭파했을 때, 오래전 침묵 속에 추었던 죽음의 춤은 승리의 춤, 언어를 향한 춤,
권위의 춤이 되었다. -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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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2-12-05 09:2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가열차게 관련 독서를 하신 후 다락방의 미친 여자를 시작하신 바람돌이 님, 덕분에 제가 막 흥분이 됩니다!!

바람돌이 2022-12-06 15:55   좋아요 1 | URL
관련도서를 읽은게 하나도 없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는데..... 지금도 다 못읽긴 했지만 시작을 안하면 12월에 진짜 못읽지 싶어서 남은 책과 함께 읽으려 합니다. 이제 우리 다락방님 격려까지 받았으니 진짜 힘내서 읽겠습니다. ^^

건수하 2022-12-05 09:5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우리는 ‘은유를 낳는 경험‘과 ‘경험을 낳는 은유‘ 둘 다를 묘사하고자 했다.˝

저 이 문장 벌써 까먹었어요... 의미심장하네요. 바람돌이님 덕분에 다시 기억하며 읽겠어요 :)

바람돌이 2022-12-06 15:56   좋아요 1 | URL
저도 까먹을까봐 여기 써놓은거예요. 아 근데 저말 알것같다가도 잘 모르겠고.... 특히 경험을 낳는 은유는 진짜 아리까리합니다. ㅎㅎ

yamoo 2022-12-05 19:1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런 류의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ㅎㅎ
페미니즘 서적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비유와 상징이 많은 이론서는 좀 기피하는 편이라서욤...^^;;
다른 건 몰루겠고..
갈무리 해 주신 ˝우리는 ‘은유를 낳는 경험‘과 ‘경험을 낳는 은유‘ 둘 다를 묘사하고자 했다.˝는 매우 문학적인데, 굳이 이론서에 이런 수사를 써야하는지 참 그렇습니다. 은유를 낳는 경험은 뭐고 경험을 낳는 은유는 뭔지...엄청난 논증이 필요한 이런 문장이 아무 설명도 없이 마구 나열되는 이런 이론서들이 좀 많더라구요.

특히 마지막 137페이지 인용문을 봐도 이 책의 성격을 알 거 같아요. ‘우리의 이상향은 결국 이카타로의 회귀‘어쩌구 저쩌구 하는 평론적 문장과 대동소이해서 좀 거시기 합니다. 뭐, 이런 류의 책들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분명히 있습니다. 제 취향은 아닌데, 가열차게 읽으신 바람돌이님이 대단하시다는 생각이에요. 저는 한 두 페이지 읽다가 바로 덮었을 겁니다...ㅎㅎ

바람돌이 2022-12-06 16:03   좋아요 1 | URL
저는 요즘 문학에서 은유가 가지는 힘에 대해서 좀 새롭게 그 힘을 깨닫고 있는 중입니다. 직설적인 문체의 글에서 느낄 수 없는 깊이로 몇번이나 곱씹게 하면서 영역을 확장해가며 다른 깨달음을 주는 힘이 은유에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저도 이론서는 명확하고 논리적인 언어로 서술된 것을 훨씬 더 좋아합니다. 알아먹기가 훨씬 좋으니까요. 하지만 19세기 여성문학을 다루고 있는 이 책은 좀 어쩔수 없는 면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19세기의 여성문학 자체가 상당히 은유로 감추면서 말하는 것들이 많고, 그것을 파헤치고 있는 이 책은 또한 이런 은유의 방식으로 말할 수 있는것들이 더 많지 않나 싶어요. 뭐 쉽지는 않지만 어렵게 읽는 만큼 더 많은 또는 더 깊은 사유로 저를 이끌어주리라 생각하고 읽고 있습니다. 근데 읽어내는게 힘들긴 하네요. ^^

햇살과함께 2022-12-10 0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처럼 달려가십니다! 곧 2달 전 시작한 저를 따라잡으시겠습니다 ㅎㅎ
관련 책 최근에 많이 읽으셔서 더 재미있게 읽으실 거에요~
해당 책을 읽은 챕터와 안 읽은 챕터는 확실히 이해의 폭이 다르더라고요.
물론 저에겐 많이 어렵고요^^
 

오늘날 우리 문화가 점점 더 포르노화되면서, 그리고 많은 임금노동자 여성이 고임금 직종에 진입하기 힘들어지면서, 제임슨의 삶은 정말로 매력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주류 미디어는 여자가 포르노에서실제로 겪는 일이나 그가 연기해야 하는 행위의 실체, 상품으로서 짧은 수명과 상존하는 성전파성 질환 발병 위험은 대부분 외면하고, 대신 제임슨을 포르노의 마스코트로 내세워 점점 더 많은 최저임금 노동자 여성을 성 산업에 끌어들인다. - P117

포르노의 이미지가 점점 더 주류 대중문화로 흘러 들어오면서, 포르노 산업의 규모와 영향력은 더욱 커지고 있다. 포르노는 개별 감독,
배우, 제작자의 창조성과 재기발랄함을 가능케 하는 전위적 ‘예술 양식‘으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특수한 자본의 논리에 맞춰 상품을 진화시키는 비즈니스로서 이해해야 한다. 게다가 상당한 정치적영향력 아래에 놓인 비즈니스이기도 하다.  - P126

포르노는 확실히 거대 비즈니스가 되었고, 국내 및 국제 시장에더욱 과감히 진출하며 직접적인 정치적, 입법적 영향력을 휘두르고 있다. 소유집중이 점점 심화되고, 브랜드 파워와 광범위한 운영을 자랑하는 더욱 거대하고 자본화된 기업이 출현하면서 포르노 산업의 영향력은 극대화될 것이다. 더 나아가 주류 금융권, 미디어, 커뮤니케이션산업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더욱 강력한 동맹을 얻을 것이다. 포르노 산업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우리 사회의 포르노화도 더욱 심화될것이다. - P145

어떤 집단을 비인간화함으로써 그 집단에 속한 개인에게 가하는잔혹한 행위를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는 방식은 포르노 제작자들이 처음 생각해 낸 게 아니며, 이미 수많은 압제자가 그 유효성을 증명했다.
나치 선전기구는 유대인을 ‘카이크kike‘라고 부르며 폄하하는 데 성공했고, 인종차별주의자들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인간이 아닌 ‘깜둥이nigger‘로 규정했으며, 동성애 혐오자들은 레즈비언과 게이에게서 인간성을 벗겨내는 용어를 거의 무제한으로 가지고 있다. 사회적으로 폄하되는 집단에 속하는 개인의 인간성을 일괄적으로 비가시화하면 그들에게 폭력적인 행위를 가하기가 훨씬 쉬워진다.
포르노에서 여자가 인간의 속성을 제거당하면 남자는 그 안에서 벌어지는 성행위가 얼마나 폭력적인지 보지 못하게 된다.  - P158

 정말로 그렇다면 이용자들은 자기가 성적으로 학대당하는 여자의 이미지를 보고 성적 흥분을 느끼는 인간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성적으로 잔인하거나 가학적인 성향이 없는 남자라면 자기가 그런인간이라는 점을 심리적으로 견딜 수 없을 테니, 이들은 열띤 노력을기울여 ‘야동녀‘들이 자기가 현실 세계에서 만나는 대다수 여자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판타지를 붙들어야 한다. - P162

우리의 주장은, 포르노 이미지가 총체적으로 작용할 때,
최소 여자에게 적대적이고 최악의 경우 여자의 신체와 정서 건강에 매우 위험한 세계를 구축한다는 논리다.  - P191

해방을 위해 싸워 온 집단이라면 누구나, 미디어 이론가들이 수십 년에 걸쳐 깨달은 사실, 즉 미디어 이미지가 억압당하는 집단을 체계적으로 비인간화하는 데 중요한역할을 한다는 점을 직관적으로 안다. 이 이미지는 결코 개별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어떤 집단에 가해지는 지속적인 억압을 합리화하는 메시지의 더 광범위한 체계 안에 연루되어 있고, 그것이 가진 권력은 대개 태도나 행동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억압을 묵인하는 이데올로기를강화하고 정상화하는 데서 나온다. - P194

남자가 처음 포르노를 접할 때쯤이면 대부분은 우리4문화의 성차별적 이데올로기를 이미 내재화한 상태고, 포르노는 비정상으로 규정되는 대신 그들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생각을 굳히고 공고히 한다. 게다가 이는 그들에게 강렬한 성적 쾌락을 주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성차별적 이데올로기를 섹시하고 화끈한 것으로 프레이밍하는 행위는 포르노에, 다른 형식이라면 절대 받아들일 수 없을 여성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할 자격을 부여한다. - P194

그 정체는 다름 아닌한 집단이 다른 집단에 가하는 가혹행위다. 포르노는 폭력에 성적인 외피를 덧씌우며 그것을 비가시화하며, 결과적으로 그 폭력에 저항하는이들은 반폭력주의자가 아니라 반섹스주의자로 규정된다. - P195

그들은 대개 여자와 자지 못하는 자신의 부족함에 깊은 수치심을표출하며, 이 수치심은 ‘야동녀‘와는 다르게 ‘싫어‘라는 어휘를 가진 여자 학우들을 향한 분노로 바뀐다. - P196

우리는 자기가 속한 바로 그 문화에 의해 폭력을 당하며 자란 여아들의 한 세대를 배출하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그 문화를 피할 길은 없다. 사회화라는 행위 그 자체에 문화의 규범과 태도를 내재화하는 일이 수반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문화를 하나의 거대한 집합적 가해자라고 한다면, 점점 더 많은 여아와 성인 여자들이 자기 자신을 단순한 성적 대상물로만 보도록 사회화되면서 정서적, 인지적, 성적 문제를 겪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 P245

아동 포르노 이용자 중 실제 아동을 대상으로 성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의 비율은 연구마다 다르며 낮게는 40%, 높게는 85%까지 나타났지만, 이러한 증거가 중요하게 시사하는 바는 아동을 성애화한 이미지를 보고 자위하는 행위는 상당 비율의 남자에게있어 실제 아동 성범죄와 연관된다는 점이다.  - P315

포르노 문화에 저항하는 운동은 남자 또한 동참해야 하는데, 이들도 자기가 소비하는 이미지에 의해 비인간화되고 격하되기 때문이다.
포르노 제작자와 공조하지 않겠다는 남자들의 거부 표시는 그 산업이주장하는 정당성을 무력화할 뿐 아니라 이윤에도 타격을 입힐 것이다.
우리는 포르노가 남자에게도 해롭다는 것을 오래도록 주장해 왔지만,
너무 오랫동안 여자만이 이 약탈적인 산업에 맞서 싸워왔다. 포르노에대한 저항이 남자에게 주는 것은 유대감, 친밀감, 공감을 찬양하는 섹슈얼리티, 종속이 아닌 평등으로 가득한 섹슈얼리티다. - P322

평등에 기반한 섹슈얼리티는 결국 평등에 기반한 사회를 필요로한다. 우리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우리 스스로 규정하기 위해 싸우면서도 더 큰 그림을 놓쳐서는 안 된다. 여자들은 여전히 경제적, 정치적, 법적 차별에 직면해 있다. 포르노는 이렇게 더 큰 구조 안에 놓여 있으며,
이만큼 불평등의 관행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영역도 없을 것이다. 포르노에서 우리는 포르노 섹스 이외에는 아무것도 원치 않는 일차원적 대상물이다. 우리가 실제로 원하는 것은 우리 삶의 전 분야에서의 평등이고, 이를 통해 생식권의 말살, 결핍, 상실이나 남자가 가하는 폭력을 더는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 P322

『포르노랜드』가 보여주듯 포르노는 성착취 그 자체이며 이런 행위는 아동에게는 물론 성인여성에게도 선택지로 주어져서는 안 된다. 드워킨의 지적대로 포르노는 한 인간 집단에 대한 극도의 폄하이자 테러리즘이다. 약탈적 산업과남성지배체제가 공모하여 여성을 착취하는 시스템을 우리는 포르노라고 부른다. 포르노는 여성이 선택한 것이 아니며 선택하도록 장려될 수있는 것도 아니다.  - P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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