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이 대통령이었던 시절.
우리집은 늘 정치적 견해차이로 티격태격했었다.
그것도 내가 아니고 우리 부모님 둘이서....
김영삼과 같은 고향 출신인것이 무슨 벼슬인양 생각하던 아버지와,
나라에 안좋은 일이 자꾸 생기는건 다 김영삼의 얼굴이 복없게 생겨서 그런거라는 어머니.....

2권을 읽는 내내 마음아픈 장면들의 연속이다.
왜 그리 사고가 많았는지....
구포열차 탈선사건에서는 우리 동네 시장 아줌마도 그 기차를 타고 겨우 살아났다.
성수대교 붕괴, 대구지하철 공사장 폭발사건, 삼풍백화점.....
오로지 돈과 능률위주로만 치닫던 한국자본주의의 밑바닥이 와르르 무너지는 현장이라고는 해도,
그 결과는 너무 처참하다.

정치에 있어 이합집산이나 온갖 부정부패야 뭐 새롭겠냐만,
김영삼의 정치스타일이야 익히 알고있던 것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그속에 얽혀있던 비화들은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경우가 한두가지가 아니다.
계속 산책을 하고 있으나 그 산책이 전혀 유쾌하지가 않다.
이러고도 지금도 살아있으니 다행이라고나 할까?

1994년의 전쟁위기
미군이 북한의 핵시설을 선제 공격할 경우, 북한은 그들의 핵을 사용하지 않고 휴전선 전방에 배치된 재래식 무기만으로도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 수 있다. 서울을 포함해 안양까지 5-6분 사이에 6,000개의 포탄이 떨어진다. 또한 노동 1호와 노포동 미사일은 주요 기간산업과 고리, 영광 등 원자력 발전소를 겨냥하고 있는데, 마하 5-6정도의 속도로 날아오는 노포동 미사일은 충분히 원자력 발전소의 호벽을 깰수 있다. 만일 이러한 상황이 발생할 경우, 남한 전역은 핵 오염지대가 될것이다. 전쟁 발발 후 1개월이 지나면 전선에 배치된 미군 3만 5,000명이 사망하고 8-10만명의 미국인이 죽게 된다. 또한 한국인은 100만명 이상이 사망할 것이다. 2개월이 지나면 북한 정권은 사라지고 전쟁은 끝난다. 그리고 통일은 될 것이다. 그러나 남한 경제는 50년 전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25쪽 유엔군사령관 게리 럭이 미국무성에 보낸 보고서)

아주 현실적인 전쟁상황 예측 아닌가? 북한의 피해는 빠졌지만.....
아마도 북한땅은 아예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으로 바뀌지 않을까?
이러고도 전쟁을 얘기하고 북한과의 평화노력을 거부하는 현실이 갑갑하다.
지금 현재 미국의 하는 양을 보면 한반도에서의 전쟁위기는 오히려 커진것 같다.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사이에 전쟁이 벌어진다???
한반도에서 평화의 문제는 생존의 문제다.

북한은 늘 어떤 식으로건 국내 정치에 개입했다. 남한에서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을때 북한이 도발의 징후를 보이면 그 목소리는 '국가안보'에 압도되곤 했는데, 북한은 96년에도 그런 '정치행위'를 저질렀으니 그게 바로 잠수함 침투 사건이었다. 한총련에 대한 대응을 더욱 강하게 하라는 뜻이었을까?(286쪽)

가끔 북한이 하는걸 보면 정말 남한의 정권과 짜고 고스톱을 치는게 아닐까 할때가 한 두번이 아니다.
물론 남한 정권이 결정적인 시기마다 한 건식 터뜨릴 때가 많지만,
어쩌면 그렇게도 남한 정권에 필요적절한 시기에 북한도 한 건씩 터뜨려주는지....
분단상황에서 존재근거를 찾는 정권의 필요악이란 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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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40년대를 읽고 잠시 손에서 놨었는데 90년대가 벌써 나오다니 너무 신기해서 먼저 읽기 시작했다.
워낙에 최근의 일이다보니 거의 대부분의 내용들이 기억에 새록새록하다.
그렇기 때문에 읽는자의 흥미를 돋굴 수 있다는 장점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심층적인 분석이나 평가는 좀 많이 약하다.
말 그대로 1990년대 산책이라 할만하다.

나도 산책같은 단상 몇가지.

리영희는 서중석과 가진 <사회평론>91년 6월호 대담에서 "나는 지금 거대한 역사적 변혁 앞에서 지적 사상적 그리고 인간적 겸허의 무게에 짓눌러 있는 심경입니다. 그와 동시에 주관적 오류나 지적 한계가 객관적 검증으로 밝혀질 때, 부정된 부분을 '사상적 일관성'이라는 허위의식으로 고수할 생각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109쪽)
동구 사회주의의 몰락과 소련 연방의 해체라는 역사적 사건들 앞에서 7,80년대 젊은이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리영희 선생이 한 말이다. 리영희 선생의 <전환시대의 논리>는 나에게도 정신적 지주와 같은 책이었고, 이 때의 리영희 선생의 말은 나에게도 소련이 해체된 충격과 맞먹는 폭탄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잊고 있었는데.....
지금 다시보니 사람과 학문의 깊이란게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그 연세에 이런 성찰을 해내고 자신의 사상과 이론을 재점검한다는 것.
아직도 리영희 선생이 여전히 존경받고 있는 이유이리라...
그나저나 사상적 일관성이란 허위의식 - 깊이 새겨들을 말이다.

 마광수 사건은 실질적으로 한국의 문인들과 대학교수들이 만들어 준 사건이며 그 점에서 한국은 세계의 '민주국가' 중 권력의 권위주의 이전에 지식인의 권위주의가 더 심각한 유일한 국가가 되게 했다.(191쪽)
얼마전에 어떤 잡지에서 마광수교수 사건이 여전히 진행형이란걸 본 것 같다. 21세기에 들어선 지금도 마교수는 이해되지 못하고 있고 그래서 그의 지금의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아마도 그가 그냥 소설가였다면 이정도는 아니었으리라.... 문제는 그가 대학교수였다는것일게다.
대학이 학문과 사상의 자유의 보루가 되기를 그만둔것은 아주 오래된 일일터이지만,
그래도 이런 사람 하나쯤 받아들일 수 없는 대학이란.....
여전히 나는 그가 안타깝다.

텔레비전 광고는 텔레비전이 지배하는 대중문화의 지평을 바꾸기 시작했다. 이제 광고는 상품을 직접적으로 선전하기 보다는 거시적이고 근본적으로 소비자에게 새로운 라이프스타일과 생활철학을 판매하고 문화적 형태를 재구성하는 차원으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시장논리의 지배를 받는대중문화는 광고에 의해 변형된 라이프 스타일과 생활철학을 반영하여 확대재생산하였다.(232-233쪽)
이제는 너무 상식이 되어버린 얘기!
그래도 여전히 저항하고 싶고,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나도 모르게 어느정도는 물들어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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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06-08-08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이런 저런 책에 치여서(?) 기회가 없지만, 꼭 읽어 보고 싶은 책이네요.,..

바람돌이 2006-08-08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로님/저는 꼭 읽어야 되는데 막바지가 돼서야 읽는 책이예요. ^^
90년대는 좀 가볍긴 하지만 생각보단 재미있네요. ^^

국경을넘어 2006-08-09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잊혀졌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네요. 소중한 기억들을 잡아주는 책. 그 자체로도 의미있네요 ^^

바람돌이 2006-08-09 2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그런것 같아요 폐인촌님. 책에 나오는 사건들이 하나같이 기억에 또렷한 일들이라..... 근데 문제는 별로 즐거운 기억이 없다는거네요. ^^
 

3. 성적 판타지, 그 홈파인 공간

*변강쇠가의 의문 - 변강쇠가가 사설만 전하고 판소리는 전하지 않는데 대해 그 내용이 당시 집권양반층의 취향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 통설. 하지만 역으로 신재효 전집의 판소리 12마당중 6마당이나 소실되고 전하지 않는 가운데 지독한 외설과 하드코어. 그리고 권선징악의 구도도 취하지 않는 변강쇠가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그것도 당시에는 열린마당에서 이것이 '말해졌다'는 것 그것이 진짜 미스터리가 아닐까?

흔희 <변강쇠가>의 외설은 주로 탈중세적인 것으로 해설되곤 했다.
중세는 성담론을 억압했고 성을 자유롭게 떠들어대는건 근대적인 것이라고 설정한것이다.
바로 여기에 근대적 망상과 편견이 작동한다.
근대에 들어 비로소 성이 해방되었다느 것은 중세를 억압과 질고의 암흑기로 설정할 때 가능하다.
하지만 중세 후기와 근대는 불연속적 지대이다.
욕망이 억압되었다가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시대마다 각기 다른 욕망의 배치가 있는것이다.

근대적 성담론은?
성담론에서 인종론 및 인구론적 관점이 새로운 척도로 작동되기 시작.
우수한 인종의 생산. 인구의 번성이 성의 목표로 설정되고 이제 성은 국가의 통제와 관리대상이 된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욕망의 불온성을 경계밖으로 축출하고 그자리에는 '민족'이라는 블랙홀이 등장
자유롭고 평등하게 사랑하라, 단 신과 민족의 이름 아래서만!
기독교와 민족주의가 성욕에 대한 '거룩한 억압'을 유도하는 가운데,
자본은 성을 상품화하면서 성욕의 배설구를 다채롭게 마련하되,
원만한 관리를 위해 경찰과 위생제도를 적극 동원하는 식으로,
이렇게 하여 욕망의 이원적 양극화가 점차 자리를 잡아가게 된다.

3.1운동 이후 조선은 유례없는 이상 열기에 휩싸였다.
바로 연애열.
중세에서 가치들은 다원적이다.
연애감정, 충, 효, 사제간이나 도반들 사이의 우정과의리 같은 가치들이 백가쟁명하는 것.
하지만 근대에 들어 연애만이 삶을 떠받치는 지고한 가치가 되었다는 것은 연애 이외의 다른 관계들은 다 별볼일 없어졌다는 걸 의미한다.
존재를 걸고 욕망을 투여할 만한 다양한 경로들이 막혀버린 것이다.
연애열이 자라난 토양은 신과 민족이다.
연애는 신과 민족에 대한 숭배를 대체한 것이므로 거룩해야 한다.
숭고하기 위해 '욕정'을 배제한다.
육체가 지닌 우발적이고 불온한 힘들을 제어하려 한다는 점에서 애국, 신앙, 연애는 동일한 배치를 이룬다.

4. 연애의 정석, 죽거나 권태롭거나

1920년대의 연애 - 이광수의 <재생>을 통해서
근대적 사랑은 오직 영혼의 순수성으로만 승부한다.
그러기 위해서 가능한 한 육체성의 흔적을 지워버려야 한다.
근대적 '순결'관념의 탄생이다.
결국 이것은 연애의 열정과 성적 욕망을 결혼으로 흡수하기 위한 성정치학의 일환이다.
그런데 이러한 연애가 불멸의 위치로 상승하면 할수록 그것은 삶에서 멀어진다.
이제 연애의 위대함을 증명하는데 죽음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부재와 결여를 통해서만 자신의 존재와 가치를 입증한다는 점에서도 연애는 신과 민족이라는 기호와 '구조적 동형성'을 이룬다.

1930년대의 연애 - <소설가 구보씨의 하루>를 통해서
1930년대 카프가 결성되면서 욕망은 혁명을 중심으로 재조직된다.
이제 연애는 사적이고 은밀한 영역으로 퇴각해버린다.
그럼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외부와 단절된 자기만의 방, 자의식 속에 갇혀 버린다.
자의식이란 인간이 자연과 단절되는 그 순간 태동했다고 할 수 있다.
'자연의 타자화'는 가장 먼저 인간들 사이의 견고한 장벽을 낳는다.
단절은 고독을 낳고, 고독은 자의식을 낳고, 자의식은 다시 권태를 낳고 이 악순환의 고리가 바로 근대 도시인의 정체성이다.

멜로의 순정과 씁쓸한 권태, 근대적 연애는 이 두가지 축을 중심으로 움직인다.
1990년대 이후의 상황은 변한 것 같지만 멜로, 권태, 그리고 현대의 변태적인 섹스, 포르노의 범람 등등은 공통점을 가진다.
성적 욕망이 조금도 삶속으로 진입하지 않고 있다는 것.
즉 성이 삶의 능동적 의지와는 전혀 무관하게 향유되고 있는 것이다.
포르노가 판을 칠수록 멜로 또한 고양된다.
이 죽음 충동으로 가득찬 '홈파인 공간' 자체를 벗어나지 않는 한 출구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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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인간, '만물의 영장'이 되다.

기독교(개신교)  - 원래 개신교 자체가 프로테스탄티즘, 즉 자본주의와의 견고한 결탁속에서 성장했다.
프론티어 정신으로 무장하여 지구의 모든곳을 개발하고,
전 인류를 기독교인으로 삼는 것을 소명으로 삼는 종교.
(이건 정말 태생적 한계라고 해야 하나? 모든 인류와 세계를 자신과 똑같은 색깔로 칠할 수 있으리라라니...)

한국에서의 기독교(개신교) - 당연히 문명과 근대, 제국의 표상으로 이 땅에 들어왔다.
조선에서 기독교는 미국의 우월성으로 바로 연결됨.
근대 문명에 열광하듯 기독교에 열광하라.
기독교의 원래적 배타성과 선악 이분법은 기독교가 한국의 민족주의와 굳게 결합하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예를 든다면,
문명과 구국의 길을 가로막는 반민족적인 것들은 모두 마귀로 설정
마귀는 화해나 치료의 대상이 아니라 '피의 응징'의 대상일 뿐...
(결국 적과 나를 완전히 분리하는 이분법 -한국인의 의식에 가장 큰 흔적을 남긴다.)

적과 나의 이분법은 인간과 세계의 이분법에서 유래.
인간 이외의 존재들은 침묵, 배제시키는 원초적 이항 대립을 제시한다.
인간만이 유일하게 창조주를 향해 나아갈 수 있고 그 교량은 바로 '이성'이다.
창조주가 인간에게만 부여한, 그래서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만든 바로 그 '이성'
(아이들에게 최초의 인간이 왜 원숭이에서 분리되어나왔을까를 물으면 누구도 노동에 주목하지 않는다. 모두 생각을 할 줄 알아서요라는 정해진 대답을 내놓는다. -근대적 의식의 위대함(?)
이러한 사유의 뒷면 - 그럼 이성적이지 않은 인간은?
당연히 배제의 대상이고 교화(포섭)의 대상이다.
자연역시 인간의 세계로 적극적으로 포섭되지만 그것은 그것 자체로서가 아니다.
자연의 '인간화' - 인간을 위한 은유의 재료, 우화의 재료로서 자연.

결국 인간의 삶만이 유일한 가치가 있다는 철저한 인간 중심주의 - 그 인식론적 원천에 기독교가 있다.

 * 문체 반정 -정조대 노론은 명말 청초 소품문을 적극 수용했고, 남인들은 천주학을 주로 받아들인다. 천주교가 전파되면서 유교적 윤리와 충돌하는 일이 잦아지자 정조는 남인 세력을 보호하기 위해 노론층의 문체를 전면적으로 문제삼기에 이른다. 국가의 근간이자 사대부의 전범이 되는 고문의 권위를 뒤흔든다는 명분. 정조의 탕평책을 위해 남인들의 방패막이가 되어준 사건.

**18세기 노론 내부에서의 호락논쟁과 다산 - 인물성동론(낙론)의 입장(박지원, 홍대용) : 모두 인간중심적 사고를 와해시키는 한편 物의 지위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한다.

*** 다산 정약용의 경우 -  훨씬 근대적이다.
인간과 天에 대해 상제관이라는 아주 명료한 입장을 견지함.
상제관을 표방함으로써 다산의 사상은 인간가 자연사이의 연속성은 해체되고 인간 중심주의 귀결된다.
인간중심주의와 근대성은 서로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다.
인간이 만물로부터 독립하여 홀로 우뚝 설 때, 정신이 육체로부터 이탈하여 그 위에 군림하기 시작할 때, 근대문명은 바로 그 순간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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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속도의 경이, 시공간의 재배치

근대는 시간을 재구성했다.
근대의 시간은 철도와 함께 왔으면 기차를 닮았다.
오직 출발점과 목적점만이 존재하며 그것을 가로막는 것은 무엇이든지 파괴해버리는.....
근대의 시간은 속도의 문화를 낳았고 그것은 화폐화된 시간의 단선성을 표상한다.
화폐화된 시간의 단선성은 우주와 자연과 인간사이의 수많은 주름을 단번에 펴버린다.
이제 밤도 잠도 동양사상의 우주적 변이와 사유의 이동도 모두 부질없는것, 그야말로 폐기처분되어져 버린다.

이렇게 탄생한 근대적 시공간은 '사이성'이 사라진, 대상간의 위계관계가 확연한 공간이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서 주인은 이제 인간이다.
우주와의 공명은 없어졋고 다만 그 우주를 소유하고자하는 욕망만 남는다.

단선적 시간개념은 세상을 진보라는 하나의 잣대로 평가하게 하며, 그 진보는 양적으로 계량화될 수 있다.
기차의 세계관 - 진화론은 이제 세계를 생존경쟁의 틀로 파악한다.
우승열패의 신화가 탄생한다.
이제 경쟁이다. 경쟁만이 진보를 승리를 생존을 보장한다.
역사는 그러한 승리의 기록이 되어야 한다.
현재가 과거보다 나았고, 미래는 현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기획되어야 한다.
따라서 역사는 인과관계를 분명히 하도록  재구성되어야 한다.
(옛적에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에 일본 역사논문이나 서적들을 읽으면 그 앞뒤 분명한 논리성과 일관성에 한편으로 놀라면서도 그 도식성에 갑갑한 면이 많았는데 아마도 일본이나 우리나라에서의 근대성 수용이 이렇게 나타나지 않았나 싶다. -사실 수학공식처럼 정리되는 역사라니 웃기지 않는가 말이다.)

시간의 유목주의는 가능한가? - 속도에 대한 신앙체계를 전복할 것. 속도는 빠른 것과 다르며 느림 역시 느리지 않다. 느림 또는 시간의 유목주의란 이 '얼빠진' 근대의 일정표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을 의미한다.

코드화된 방향을 벗어나 새로운 리듬을 만드는 것
삶과 지식의 새로운 배치를 구성하고,
상상력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이질적인 집단들의 네트워크를 만들 때
속도, 균질화, 화폐의 삼중주는 깨어진다.
느림 또는 느리게 산다는 것은 무엇보다 이런 조급증과 결별하여 전혀 예기치 못한 시간들을 구성하는 시간이어야 한다
.
 
(음~~ 뭔가 잡힐 듯하면서도 잡히지 않는 말들. 요 말도 나비일려나?)

 

내적 오리엔탈리즘 - 근대적 시간개념이 낳은 사생아. 현재를 척도로 이전의 시간들을 다 저급한 시간으로 매도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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