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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어  그날 아침의 사건을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토모야시   저는 제 딸아이 마사코와 함께 집을 나섰습니다. 딸애는 일하러 나가는 길이었죠. 전 친구를 만날 예정이었고요. 그때 공습경보가 울렸습니다. 전 마사코에게 집으로 가겟다고 했어요. 그애가 말했죠. "전 사무실에 가봐야겠어요." 전 자질구레한 집안일을 하면서 경보가 해제되기를 기다렸죠.
침구를 갰습니다. 벽장도 정리하고요. 물걸레도 창문도 닦았지요. 그 때 번쩍하는 섬광이 일었어요. 처음에는 카메라 플래시이겠거니 생각했죠.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 소리지요. 섬광이 눈을 찔렀어요. 머릿속이 하얘졌습니다. 주변 창문들의 유리가 죄다 산산이 부서지고 있었어요. 어머니가 저한테 조용히 하라고 쉿 하실때와 같은 소리가 났습니다.
다시 정신을 차려보니, 전 서있지 않았어요. 다른 방으로 날아가 있었답니다. 제 손에는 아직 걸레가 쥐어져 있었지만, 이젠 바싹 말라 있었어요. 그때 머릿속에는 온통 딸을 찾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창밖을 내다보니 이웃 사람 한 명이 거의 벌거벗다시피 한 꼴로 서 있더군요. 피부가 몸 전체에서 벗겨져 내리고 있었지 뭡니까. 피부가 손가락 끝에 매달려 있었다니까요. 저는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고 물었지요. 그는 너무나 기진맥진한 나머지 대답도 못했습니다. 그는 이리저리 사방을 두리번거렸어요. 가족을 찾는구나 싶었어요. 저는 생각했지요. 가야 해. 가서 마사코를 찾아야 해.
저는 신발을 꿰어 신고 공습 대비용 두건을 챙겼습니다. 기차역으로 향했지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나와 저와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서 구궁 오징어 비슷한 냄새가 났어요. 저도 혼비백산해서 제정신이 아니었던가봅니다. 사람들이 바닷가로 쓸려 올라온 오징어처럼 보였으니 말입니다.
한 어린 소녀가 저를 향해 오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애의 피부가 녹아 흘러내리고 있었어요. 마치 밀랍같았습니다. 그 애는 나지막이 중엉거리고 있었어요. "엄마, 물, 엄마, 물" 전 그 대가 마사코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니었어요. 저는 그 애에게 물을 주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그 때 일이 마음에 걸립니다. 하지만 마사코를 찾아야 했어요.
저는 히로시마 역까지 내내 달려갔습니다.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지요. 어떤 이들은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땅바닥에 누워 있었어요. 그들은 어머니를 찾으며 물을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저는 토키와 다리로 갔습니다. 딸의 사무실로 가려면 다리를 건너야 했거든요.

인터뷰어   버섯 구름은 보셨습니까?

토마야시  아뇨 구름은 보지 못했습니다.

인터뷰어  버섯구름을 못보셨다고요?

토마야시  버섯구름은 보지 못했습니다. 마사코를 찾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인터뷰어   하지만 구름이 도시 전체를 뒤덮었는데요?

토마야시  딸애를 찾느라 정신이 없었다니까요. 사람들이 저에게 다리를 넘어갈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전 딸이 집으로 돌아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발길을 돌렸습니다. 니기쓰 신사까지 왔을때 하늘에서 검은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이게 뭔가 싶었죠.

인터뷰어  검은 비를 좀 설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토모야시   전 집에서 딸을 기다렸습니다. 유리는 다 깨지고 없었지만 창문을 열어두었죠. 밤새 뜬눈으로 딸애를 기다렸어요. 하지만 그 애는 돌아오지 않았지요. 다음 날 새벽 6시 30분쯤 이시도씨가 찾아왔습니다. 그이의 딸도 우리 애와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었거든요. 그는 마사코의 집이 어디냐고 큰 소리로 왜치고 있었습니다. 전 밖으로 달려나갔지요. "여깁니다. 여기예요!" 이시도 씨는 내게 다가와 이렇게 말했지요. "발리요! 옷가지를 좀 챙겨서 따님한테 갑시다. 지금 오타 강 강둑에 있어요."
숨이 턱에 닿도록 뛰었지요. 젖 먹던 힘까지 다 내서 뛰었습니다. 토키와 다리에 닿자, 땅바닥에 군인들이 누워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히로시마 역 주변에서는 더 많은 시체를 보았습니다. 7일 아침에는 6일보다 더 많았지요. 강기슭에 갔더니, 누가 누군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였어요. 나는 계속 마사코를 찾아다녔습니다. 누군가의 외마디 소리가 들렸습니다. "어머니!" 귀에 익은 목소리였어요. 나는 차마 눈 뜨고는 못 볼 몰골을 한 딸애를 찾아냈습니다. 그 애는 요즘도 그런 모습으로 내 꿈속에 나타난답니다. 그 대가 말했어요.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요."
나는 딸애에게 미안하다고 했지요. "최대한 빨리 온거란다." 거기에는 우리 둘뿐이었어요. 어떡하면 좋을지 몰랐습니다. 전 간호사가 아니었으니까요. 딸애의 상처에는 구더기가 들끓고 끈적끈적한 누런 액체가 고여 있었습니다. 저는 딸애를 닦아주려고 했지만 피부가 벗겨지고 있었어요. 구더기들 천지였는데도 그것들을 닦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손으로 일일이 구더기를 집어내는 수밖에 없었지요. 딸애가 무얼 하고 있느냐고 묻더군요. 저는 이렇게 대답했지요. "오, 마사코, 아무것도 아니다." 그 애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아홉시간 후, 딸애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인터뷰어   그동안 내내 따님을 팔에 안고 계셨습니까?

토마야시   네. 제 품에 안고 있었습니다. 딸애가 말했어요. "죽고싶지 않아요."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넌 죽지 않을 거다." 그랬더니 딸애가, "집에 가기 전에는 죽지 않겠다고 약속할게요." 그렇지만 그 애는 고통스러워하며 계속 울부짖었습니다. "어머니."

인터뷰어   이런 얘기를 하신다는 것이 참으로 힘드실 겁니다.

토모야시    여러분의 단체가 증언을 기록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꼭 가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딸애는 제 품안에서 눈을 감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죽고 싶지 않아요" 죽음이란 그런 것입니다. 군인들이 어떤 제복을 입었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좋은 무기를 가졌는가도 상관없습니다. 제가 봤던 것을 모두가 볼 수만 있다면, 다시는 전쟁 따위는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중 258쪽- 2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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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전쟁의 고통이 또는 핵의 고통이 항상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아이들에게....
우리에게 해방이었던 히로시마 원폭투하가 인류에게는 얼마나 큰 재앙이었는지를 아이들에게 설명하는 건 참 힘들다.
워낙에 잔인한 장면에 길들여져서였을까? 폐허가 된 도시의 모습에서는 아이들은 별다른 감흥을 얻지 못한다.   때로는 핵폭탄 떨어뜨리면 돼요라는 말을 농담으로 삼기도 하고....
내년 수업 자료에 포함시킬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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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7-01-08 0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책에 이런 내용도 나와 있군요. 아........ㅠ.ㅠ

바람돌이 2007-01-08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심글은 아니고 주인공 오스카의 학교 발표문이에요.

rosa 2007-01-11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업자료..란 말에 눈이 번쩍 뜨여 혹시 참고가 될까 해서 몇 줄 적습니다.
일본에 떨어진 원자폭탄으로 사망한 사람들 가운데 열 명 가운데 한명이 조선사람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합천에 원폭피해자 복지회관이 있다는 것, 원폭피해 후유증으로 고통받는 2세,3세가 여전히 한국땅에서 힘겹게 삶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을 학생들에게 함께 얘기해주면 어떨까요? 역사비평사에서 나온 <한국의 히로시마>란 책을 보시면 도움이 되실 듯 합니다.

바람돌이 2007-01-12 0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rosa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한국의 히로시마>란 책은 꼭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헤바 2009-04-14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인간은 왜 그래 다른 인간을 고문하고 괴롭히는 지 모라겠어요
도대체 줌졌던 그 모든 사람은 어떤 죄를 지절렀어요?
참 인간은 그 비인간적인 행동을 어떻게 하는 지 이해가 통 안 가요

바람돌이 2009-04-14 22:32   좋아요 0 | URL
평범한 상황에서의 보통 인간들은 대부분이 저런 짓을 자신이 저지를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힘들죠. 그런데도 세상에 저런 일은 널려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비극이겠죠.
 

 

 

 

 

'고고학자들의 노력과 일반 관광객의 기대는 사뭇 상충된다. 관광객들은 좋은 그림만을 원한다. 20세기에 살고 있는 그들은 온갖 문명의 이기를 동원하여 편리하고 한가하게 앙코르까지 여행을 와서 1860년 앙코르를 발견한 앙리 무오가 느꼈을 감탄과 경이로움을 체험하고자 한다. 이들은 시대착오적인 개인주의에 사로잡혀 있다. 그들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은 장쾌한 효과가 있는 낭만적인 풍경, 거대한 나무뿌리가 유적을 반쯤 삼키고 있는 폐허다.'(151쪽)

이 책의 저자의 말은 아니고 앙코르 왓트의 완전한 해체 복원을 주장했던 고고학자 모리스 글레즈의 연설문 중 일부란다.
결과는 일부는 해체복원하고 일부는 즉, 영화 <툼 레이더>를 찍었던 따 쁘롬 사원 같은 것은 정글의 나무들이 뒤엉킨 그대로 유지하고 하는 식의 절충으로 갔단다.

근데 읽으면서 뜨끔하다.
온갖 문명의 이기를 동원해 지 몸 하나는 편리함을 하나도 포기하지 않으면서 얼토당토않은걸 요구하는 관광객이라니......
지금 앙코르 와트에 필 꽂혀있는 나를 딱 정확하게 지칭하는 말이 아닌가?

이렇게 나를 객관화 시켜 보는 눈은 불편하다.
나의 치부를 들킨 듯 부끄럽고 괜히 화끈거린다.

좀더 몸과 마음을 낮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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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12-11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앙코르에 필 꽂혀있는 거랑 부끄러움을 느끼는 거랑,, 저도 꼭 같으네요..

sooninara 2006-12-11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군들 안그러겠어요? 관광하러가면 편하게 놀다 오길 바라게 돼죠.
백제의 수도다 아니다 하면서 싸우는 몽촌토성쪽 보면...사유재산과 공공의 이익에서 저도 재산권이 침해 당한다면 싫을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ㅠ.ㅠ

바람돌이 2006-12-12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혜경님/님도 그러세요? ^^;;
수니나라님/몽촌토성과 같은 경우 개인의 재산권은 국가가 보장해줘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전과 유물보존을 생각해야지요. 개인의 재산권을 침해하면서 국가가 보전해주지도 않으면서 무조건 대의를 위해 너 희생하라 할 수는 없지 않겠어요. 그리고 가끔은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무조건적으로 어깃장을 놓는 경우도 있죠. 그런 경우도 설득을 해야죠. ^^;;

2006-12-12 13: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람돌이 2006-12-12 2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인님/넵! 알겠습니다. ^^
 

9. 무정부주의와 아나키즘
* 아나키즘- 정당한 국가란 있을 수 없다고 보기 때문에 사회 내의 제도들에 대한 모든 정치적 사회적 강제의 폐지를 요구하며, 더 나아가 인간의 인간에 대한 모든 강제적 권위행사를 부정했다. 따라서 아나키즘이 지향한 사회는 자유로운 개인이 적정규모의 공동체를 중심으로 연대하여 점차 큰 공동체를 이루고자 하는데 있었다.
흔히 생각되어지듯이 아나키즘이 '무정부주의'로 번역되는것은 오해의 소지가 많다. 무정부주의라는 용어는 1880년대 일본에서 만들어진 번역어로서 '무정부혼란상태'라는 혼란이 강조된 의미의 번역어이다.
하지만 권력에 대항한 아나키즘의 목표는 '무정부' 상황에 놓이는것이 아니라 권력의 분산에 그 주안점이 있었다.오늘날 아나키스트는 '자유사회주의', '자유공산주의'등의 용어로 스스로를 표현한다.
우리나라 식민지 시기 조선의 아나키스트는 테러리즘과 결합했다.(김원봉, 윤세주 등의 '조선 의열단') 이들의 테러는 테러 그 자체가 아니라 선전수단으로서의 테러의 역할을 강조. 봉기나 총파업같은 민중의 직접행도이 계속해서 일어나서 모든 민중이 참가하게 되면 결국 일제의 식민지 권력과 자본주의 사회는 타도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식민지 아나키스트들이 이후 개인 단위의 테러리즘 대신에 군사훈련을 바탕으로 한 무장투쟁으로 바꾸고 점차 사회주의적 성향을 지닌 정당형태로 변화해간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오늘날 개인의 자율성과 창조성을 강조하는 아나키즘은 국가사회주의 붕괴이후 전일적 체제로 자리잡은 세계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는 자치, 민주, 환경드으이 과제를 해결하는데 실마리를 제공해 줄것이다.

10. 반탁은 있었지만, 찬탁은 없었다
흔지 1945년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과인 신탁통치안에 대해 우익과 좌익이 반탁과 찬탁의 논리로 대응했다는 것은 하나의 상식처럼 통한다. 그것을 상식으로 전파하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은 역시 국정 국사 교과서다.하지만 정확하게 따지고 들어가면 찬탁이라는 용어는 성립하지 않는다. 좌익이 주장한 것은 모스크바 3상 협정에 대한 지지였지 찬탁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문제가 되는 것은 모스크바 3상협정의 내용인데 그 내용은,
첫째 임시 조선민주주의 정부를 조선인들로 조직한다.
둘째, 미소공동위원회를 조직하고 조선의 민주적인 정당 및 사회단체와 협의하도록 한다.
셋째, 최고 5년을 기한으로 하는 한반도에 대한 4개국 신탁통치 협약을 조선임시정부와 협의한 후 미영소중 4개국에 제출한다는 것이다.
결국 당시의 열강의 이해관계가 얽혀있던 한반도의 상황에서 통일정부로 나아갈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무엇이었는가 하는 것인데 주목해야 할것은 셋째항이 절대적인 결정사항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익은 3항을 절대적인 결정사항으로 왜곡하고 좌익의 의견을 찬탁으로 몰아부쳐 나라를 팔아먹는 것으로 흑색선전을 남발했던 것이다. 또한 그것은 남북의 분단이라는 상황을 낳고야 말았다. 따라서 찬반탁운동은 찬탁이라는 말이 내포하는 부정적 이미지를 걷어내고 역사적 상황을 정확히 표현하기 위해 이제 '3상협정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으로 표현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11. 한국전쟁/6.25를 기억하는 방식
세상에 전쟁의 시작을 기념하는 나라는 없다. 그것도 내전의 시작을.... 6.25 한국전쟁에 대한 필자의 다른 의견들도 경청할 만했지만 남한의 6.25기념일을 폐지하고 북한의 7.27 전승기념일을 역시 폐지하고 전쟁이 끝난 7월 27일을 남북공동으로 '한반도 평화의 날'로 설정, 전혀 다른 의미로 기념하자는 말이 와닿는다. 아 이런 발상의 전환도 있구나싶은 생각.

12. 외국 국가명 표기를 바꾸자
현재는 우리나라의 공식적 외국어 표기는 인명이나 지명에 대해 소리나는대로 표기한다는 원칙을 공포한 바 있다. 하지만 관습적으로 써오고 있는 국가의 명칭에서 한자어로 표기된 것을 음역하거나 의역하여 표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미국, 영구, 중국과 같은 것들이다. 이런 명칭들은 19세기 말에 대부분 정착된 것들인데 지금까지 관습적으로 쓰여지고 있다. 필자는 바로 이 관습에 의문을 제기한다. 뭐 여러번 얘기된 것이기도 하지만 미국이라는 이름에 어쩔수 없이 풍겨지는 아름다운 나라라는 이미지. 중국이라는 말에서 또한 감지되는 세상의 중심이라는 중화주의의 이미지.... 관습이라 하더라도 새로운 관습은 또한 만들어 나가는 것. 원래 그들의 발음대로 유에스에이나 쭝궈 같은 용어로 바꿔야 하지 않을까? 동의한다.

13. 간도, 간도출병
문헌에서 '간도'용어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1880년대이다. 이 시기 간도는 두만강 맞은 편의 개간지를 가리키던 것인데 이후 일본이 간도문제에 개입하면서 그 범위가 남만주 일대로 확대된다.그런데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간도 되찾기를 주장하는 이들의 인식은 일본의 간도 인식에 기반해있다.간도협약의 무효를 주장하며 '간도되찾기'를 주장하는 이들의 국수적인 고토 회복 의식은 간도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중국측의 입장에 반대하면 할수록 만주 침략을 위한 전진기지로서 간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강조하는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논리와 공명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상 간도문제는 좀더 공부가 필요하다. 지금 현재의 교과서는 아주 애매하게 처리해놓은 상태. 백두산 정계비를 근거로 간도가 우리땅이다라고 하고 일본의 간도협약의 불법성을 강조하지만 교과서 서술 자체가 헛점이 너무 많아 어디서 치고 나와도 무너지기 딱 알맞다.아니 애초에 남만주 일대를 우리땅으로 설정하는 논리 자체가 결국 문제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이 글을 읽으면서 생각하게 된다. 간도는 독도와 다르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 된다. 그건 그렇고 공부는 해야겠구만....

14. 중국 애국주의의 실체
현재의 중국애국주의를 보는 우리나라의 관점은 '신중화주의론'내지는 '중화패권주의론'으로 보는 관점이 하나다. 주로 동북공정에 피튀기며 분노하는 주류 언론과 한국의 중국 연구자들이 보고 있는 시각이다. 다른 관점 하나는 중국의 애국주의는 아직은 민족주의라고 보는 시각이 있다.
중국의 애국주의를 신중화주의나 중화패권주의론으로 보기 위해서는 중화주의의 핵심인 화이사상과 중국중심의 위계적 세계체제의 구성노력이 핵심이라고 볼 수 있는데 현재 중국의 행보에는 어디에도 그런 관점은 보이지 않는다.
중국의 애국주의는 중국민의 우월성을 증명하는 데는 관심이 있지만 서구 중심주의와 같은 계서적 차별의식으로 나아가고 있지는 않다. 또한 중국은 미국과 달리 일방적으로 타국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거나 자신들이 규정한 민주주의적 가치 실현을 표방하며 군사력까지 동원해 특정한 국가를 자국의 이해관계의 희생물로 삼는 역사는 만들고 있지 않다. 그외 중국의 애국주의 교육이나 동북공정도 보다 차분히 들여다보면 아직은 팽창주의적이라기 보다는 발전주의적 제3세계 민족주의에 보다 가까운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중국의 애국주의는 민족주의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신중화주의로 보는 것은 어쩌면 중국이 중화상상을 가지고 있던 중국의 연속이 아니라 사회주의 국가라고 하는 단절의 역사를 가져왔다는 것을 지나치게 무시하는 태도일 수 있다. 또한 그 연속선상에서 지나치게 미래에 그러하리라는 추측으로 중화주의라는 딱지를 세우는 것은 성급한 오류 내지는 중국을 미리 견제하고자 하는 진짜 패권주의 국가 미국의 논리를 그냥 따라가는 것에 다름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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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09-28 0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정리해주시고 계시네요. 감사해요^^ 전 보관함에 두고 아직 사보지 못했거든요. 리뷰도 기대합니다.

바람돌이 2006-09-28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 이 카테고리는 정말로 저의 주관적인 책 정리라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될지는 잘 모르겠어요. 뭐 책에서 중요하게 다뤄도 제가 잘 아는 얘기나 아이면 저에게 정리의 필요성이 없는 부분은 다 빼버리니까요. 그래도 뭔가 한가지라도 다른이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다행이고요. ^^ 글구 리뷰도 하는김에 어젯밤에 그냥 써버렸답니다. 덕분에 오늘 늦잠자서 아침에 무지하게 허둘거렸지만요. ^^
 

 

 

 

 

1. 삼국시대냐 사국시대냐?
 가야사에 대한 축소는 일제강점기를 전후하여 우리에게 강요된 식민사학의 결과. 19세기말부터 일제의 역사가들은 [일본서기]에 나오는 신공황후 삼한정토설화(서기 200년 신공왕후가 80척의 배를 이끌고 와서 신라를 치고, 삼국으로부터 조공의 서약을 받았다는 설화)를 비롯한 여러가지 왜곡된 사료들을 토대로 하여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했다.
일제 시기에 일본이 우리에게 가르친 역사 교과서는 바로 이런 신공왕후와 왜 왕권의 위대성을 선전. 해방 이후 교과서는 바뀌었으나 가야사 부분은 거의 삭제 되거나 극도로 축소되었다.
결국 가야사에 대한 무지와 연구의 부족 자신감의 결여 등이 삼국시대론을 낳았다는 건데 아직도 안 바뀌고 있는 이유는?

2. 신사유람단???
1881년 일본에 파견된 시찰단.
첫째, 공식사절단은 아니었다. 중견관리로 구성된 비공식 시찰단.
둘째, 일본의 권고에 따라 시찰단을 파견했고 일본의 편의 제공을 받았으나 자의의 성격도 있었다.
셋째, 이들의 보고서는 통리기무아문의 개편에 주요한 참고 자료가 되었다.
이 시대 신사라는 명칭은 관리를 지칭하는데 관리가 아닌 민간인도 시찰단에 많이 포함 되었다는 문제.
거기다 일없는 관광객의 분위기를 풍기는 유람단이라는 호칭은 재고되어야 한다.
'1881년 일본 시찰단'으로 명명함이 합리적이지 않을까?

3. 개화파 용어와 개화파의 성격
교과서에서 흔희 온건개화파 급진개화파라는 구분을 사용하는데 이는 개념의 범주가 다른 두 개념을 사용하는 것으로 부적절하다. (그런데 온건과 급진을 대립시켜 설명하는건 개화파 뿐만 아니라 한두군데가 아닌데.... 고려말 신진사대부도 온건/급진으로 구분하는데.... )
개화사상을 엄밀한 의미에서는 '문명개화론"으로 한정짓자.
* 문명개화론 - 기존의 조선 지식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사고 패턴, 즉 조선은 이미 개화된 나라이고 구미열강이 야만'이란 사고방식을 완전히 바꾼 논리(갑신정변의 주역들 - 김옥균, 박영효 등등), 일본의 메이지 유신이 근대화의 지표
*동도서기론 - 조선이 개화된 나라이며 소중화라는 생각을 포기하지 않은 상태에서 시무의 수준에서 사회체제의 변화를 수용. 중국의 중체서용론과 양무운동을 조선 근대화의 지표로 삼음. 엄밀한 의미에서 개화파라 지칭하기 힘듬.

4. 조규와 조약
청의 입장 - 장정, 조규는 조정이 특별히 윤허하는 조규로 상하관계의 나라들이 맺는 것이며, 대등한 관계의 나라들이 맺는 조약과는 그 명칭이 다르기 때문에 그 성질 또한 다르다. 청은 일본 조선과 조규를 맺고, 일본 조선은 서구열강과 조약을 맺게 함으로써 형식적으로 일본, 조선, 서구열강을 모두 조공체제에 편입시키고자 하는 의도. 결국 조공체제를 전제로, 조약체제를 수요한 조규체제는 이른바 중국판 근대성의 모색이라 일컬을 수 있는 양무운동 실천의 일환이기도 했다.
그런데 여기서 1876년 강화도 조약의 정식명칭이 조약이 아니라 조규이다. 그렇다면 이것의 의미는?
  ----- 솔직히 내 생각엔 아무 의미 없음. 조선이 당시 조약과 조규의 의미를 파악하고 있었다는 흔적은 어디에도 없으며 또한 그 내용의 문제가 워낙에 심각한 마당에 조약과 조규를 따져서 뭐하겠는가 싶음.

5. 을사조약의 제대로 된 명칭
조약이란 1. 주권자의 조약체결 권한 위임 
                 2. 체결 권한을 위임받은 전권대표의 조인
                 3. 주권자의 비준
협약이란 양국 주무대신의 합의와 서명만으로도 효력을 가질 수 있음.
을사조약에서 외교권의 위임은 분명히 조약의 수준에서 거론될 문제. 그런데 일본은 이를 협약 수주에서 처리하고 조인문서에는 정식 명칭이 빠짐.
결국 을사조약은 체결되지 않은 조약이 되며 따라서 명칭은 '외교권 위탁에 관한 한일조약안'정도가 될 것.

6. 일제시대의 적당한 명칭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성을 드러내면서 국망의 강제성을 표현할 수 있는 용어 - 일제 강점기
문제는 이 용어는 한국민족국가사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정당한 표현이지만, 탈민족주의자들은 쉽게 수용하기 어려운 용어이다. 사실 일제감정기라는 표현은 '왜정'이라는 국민정서를 학문적으로 포장한 것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탈민족적 성향을 가진 역사학자나 사회과학자들은 경향적으로 '일제시대'라는 표현을 즐겨쓴다. 동아시아적 시각을 강조하는 입장에서도 한반도의 경계를 넘어 동아시아 전반으로 시야를 확대할 때, 근대 동아시아사는 곧 일본 젝구주의사라고 볼수 있으므로, 일제시대라는 용어를 선호.

7. 군대 성노예, 정신대, 위안부????
학문적으로 가장 적당한 명칭은 군대 성노예라고 하지만 나조차도 섬뜩한 이 단어가 이 책의 말대로 생존 피해자들에게는 어떻게 다가가갈까? 이런 경우 학문적접근은 시기상조인것 같다.

8. 친일과 협력
오늘날 친일의 문제는 책임과 과거청산의 문제이다. 또한 그 친일파의 책임을 묻는 주체는 '민족'이 된다. 그러나 이 경우 기간의 근대사 체계가 '민족'의 가치를 절대화하면서 식민지에 존재했던 다양한 삶의 양식을 지배와 저항의 흑백논리로 재단해왔다는 비판이 제기되엇다. 식민지 사회를 '제국주의의 지배 -피억압 민족의 저항'이라는 단순 도식으로 파악하다보니 사회정치적 행위를 저항이 아니며 '친일=반민족행위'로 평가하게 되었다는 비판이다.
  이런 입장에서 친일 대신 협ㄺ의 개념을 도입하게 된다. 식민지나 반식민지 주변부 내부에서 현지 엘리트로 구성되는 협력의 체제를 중심으로 설명하는 이론이다. 이런 경우 행위자 개인의 책임보다는 제국주의가 식민지를 지배하는 과정에서 형성되는 협력의 구조나 체제가 중요시될 수 밖에 없게 된다.
============= 어려운 문제. 개인의 책임을 어디까지 면제시켜 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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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을넘어 2006-09-04 1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난 책 읽고 계시네요. 역사비평에 연재되면서 재미있게 읽은 꼭지였는데 ^^*

클리오 2006-09-04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을만하나요..라고 물을랬더니 폐인촌님이 좋은 평을... 이벤트 하던데 서평쓰세요.. 전 도무지 읽을 시간이 없을 듯해서 포기합니다. 흑..

바람돌이 2006-09-05 0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폐인촌님/워낙에 오랫동안 공부를 안한지라 요즘 전공서적들을 이것저것 뒤적이니 재밌네요. 올해 3학년 국사를 7년만에 맡았더니 정말 제 바닥이 보이더라구요. ㅠ.ㅠ 이것 저것 열심히 책은 뒤지고 있는데 하도 오랫만이라 그런지 나날이 힘듭니다. ㅠ.ㅠ
클리오님/저야 워낙 오랫동안 공부에 손떼고 이것 저것 잡스럽게만 보다가 보니 새오워요. 아 그동안 진짜 무식하게 공부안했구나 뭐 그런 생각..... 늘 공부하시던 분들은 보면 뭐 그리 새로울 것 같지는 않아요. 저같이 오랫만에 공부하는 사람을 위한 정리서 같은 뭐 그런 책???? 어쨌든 재밌어요. 이것 저것 생각도 많이 하게 되고... 이 책 서평 이벤트도 봤죠. 상품이 무지 맘에 들던데.... ㅎㅎㅎ
 

 

 

 

 

1997년에서 1999년 - 그리고 덧붙여 2000년대 이야기 약간.

1997년의 시대의 화두는 IMF였다.
처음엔 그게 뭔지 조차도 몰랐던 그 단어가 우리의 삶을 그토록 절망적으로 만들줄 알았을까?
처음엔 늘 조금씩 있는 경기불황이겠지 하던건 정말 뭘 모르는 소리였었지...
날이면 날마다 이게 도대체 대한민국이 맞냐고 소리치고 싶던 날들.
날마다 도산하는 기업에 길거리로 내몰리는 사람들.
생계형 범죄는 자식의 손가락까지 잘라내고, 절망에 자살하는 사람들.
월급이 깎여도 그저 직장 안짤리고 있는것만으로도 고마워 죽을 것 같던 시절.

그런데 그 고통을 온몸으로 맞으며 절망했던 사람이 국민 모두가 아니라는게 문제겠지....
있는 사람은 오히려 이를 기회삼아 돈의 덩치를 더 키워나가고...
빈부격차는 대다수의 사람을 더욱 더 절망으로 절망으로 내몰았다.
그런 시대적 분위기는 엉뚱한 방향에서 엉뚱한 대응을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나타났다.

IMF사태는 '믿을 수 없는 정부와 공공영역'이라는 한국인의 기존 신앙을 강화시켰고 기존 가족주의를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IMF 난국을 돌파하기 위한 과정에서 기존 빈부격차는 더욱 심해졌으며, 또 그래서 내 자식을 잘 교육시켜야 할 필요성은 더욱 커졌다.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최준식은 이렇게 개탄했다. "현금의 우리나라 교육 환경에서 가장 문제 되는것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내 새끼 위주의 무한경쟁 체제이다."(92쪽)

이른바 생존의 논리라는건가?
우리나라에서 교육열이 아이들을 죽여나가지 않은적이 없지만
실제로 IMF사태 이후 더 심각해진 건 맞는것 같다.

그런데 이 얘기가 시사하는 바 IMF가 우리에게 정말로 남긴것은 무엇일까?
정부는 벌써 IMF종료를 선언했고 경제는 여전히 어렵다고 죽는 소리를 하지만
그래도 급한 불은 껏다는 느낌이다.
하지만 정말로 중요한 문제들은 여전히 남아있는거 아닌가?
왜 그 때부터 갈수록 빈부격차는 줄어들줄을 모르는지....
왜 지금도 내 주변에는 너무 너무 어려운 아이들이 그 때나 지금이나 숫자상으로도 어려운 정도로도 어느쪽으로 따져도 줄어들지를 않는지....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던가?
IMF로 놀란 한국인들에게 그것이 남겨준것은 생존본능의 강화가 아닐까?
가난에 대한 사회적 연대는 사라지고, 모두가 뿔뿔이 흩어져 나와 내 가족으로 모든 것이 환원되고...
'우리'는 사라지고 일단 중요한건 내가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
생존의 지상명령!!!
한국인들의 신체에 각인처럼 남겨진 IMF의 흉터가 아닌지.....

2000년대 중반의 한국인에게 분열은 우리의 운명이 되었다. 분열은 우리의 운명이라는 걸 인식하는건, 이제 우리의 목표가 '통합'이 아니라 '연대가 되어야 한다는 깨달음을 줄 수 있다. 자꾸 되지도 않을 통합을 목표로 삼기 때문에 필요 이상의 갈등과 증오도 일어나는 것이다. '분열'은 우리의 운명이지만, '연대'는 나의 운명이다. 그게 90년대의 한국사회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일지도 모른다.(3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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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 썼다가 등록하려니 오류떠서 몽땅 다 날렸다.
오기로 다시 쓴다.
기억을 더듬어 썼으나 쓰고 보니 또 좀 다르군....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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