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하 식민지 시대라는 말이 불러일으키는 이미지는 말 그대로 암흑이다.
민중의 삶은 피폐하기 이를데 없고, 모든 조선의 백성들은 다 독립운동에 나서지는 못하더라도 누구나가 다 일제에 저항적인 맘은 다 가지고 있었을 것이고, 그리고 일본인은 모두 나쁜 놈 왜놈이고......
물론 그 시대가 암흑이 아니었다고 강변할 생각은 전혀 없으나 김학철씨의 책을 읽으면서 이런 고정관념을 거스르는 이면의 장면들이 꽤 인상적이었다. 물론 이 상황들은 절대로 일반화 될 수 없는 예외적인 상황이 대부분이긴 하지만....

수많은 인간들이 살아가는 사회는 수많은 예외적인 상황들을 만들어낸다.
그 상황의 풍부함을 비주류로 한구석에 치워버리거나 아니면 획일화의 칼 속에 던져 넣을때 억압이 시작된다.

 

일본 해군의 연합함대가 원산항에 기항 했을 때의 장관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 선생님 인솔하에 등함한 우리를 깨끗한 수병복을 입은 젊은 수병이 데리고 다니며 일일이 설명을 해주는데 그 설명을 듣고 나니 우리는 절로들 어깨가 으쓱거렸다.
"우리 해군이 세계 제일이다."
"우리 무적 함대 앞에 어느 놈이 감히!"
우리는 긍지감에 가슴들이 부풀 지경이었다.
반일 감정과 친일 감정이 밀물과 썰물처럼 아침저녁으로 갈마들고 섞바뀌는 기이한 시절이었다.(14쪽)

원산대파업때의 풍경 - (조선인 노동자들이 파업을 일으키자 항구에서 깡패들이 동원돼 파업노동자들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있을때) 안벽에 선복을 붙이고 있던 (파업때문에 여러 날째 화물을 부리지도 싣지도 못하고 발이 묶여 있던) '쓰리가마루'라는 화물선의 갑판 위에서 관전을 하고 있던 일본 선원들이 별안간 고함을 지르며 발들을 굴러댔다.
"파업만세!"
"형제들 버텨라!"
이것을 신호로나 한 듯이 안벽에 정박해 있던 다른 일본 기선의 선원들도 모두 다 응원 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일제히 우렁차게 기적들을 울려줌으로써 파업자들의 기세를 와짝 올려주었다.
나는 금세 우쭐우쭐 어깻바람이 났다.
- 잘한다. 우리 편이 이긴다!
그러나 다음 순간
- 하지만 일본 사람들이 어떻게 우리 편을?......
하나의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 왜
놈들은 다 악당이어야 하잖는가......(41-42쪽)

이재유의 탈출사건 -  그런데 어찌 알았으리, 이 이재유가 놀랍게도 온 장안의 예상을 뒤엎고 경성제국대학의 한 일본인 교수 댁에 가 숨어 있었을 줄을. 미야케 시카노스케라는 그 교수의 이름이 신문에 선명하게 찍혀 나왔을때
- 제국대학의 한다하는 일본 교수가 우리 탈옥수를 숨겨주다니!
나는 정말이지 제 눈을 의심할 지경이었다. (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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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NY 2008-01-10 0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게 현실이었겠죠. 어쩌다 할머니들에게 일제시대 얘기 들어도 추억처럼 얘기하시는 분들도 있고, 황국신민서사도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그냥 그거 외우면 식량줘서 달달 외워 지금도 기억한다는 분도 봤어요. 읽어보고 싶네요, 이 책.

바람돌이 2008-01-11 00:17   좋아요 0 | URL
김학철씨의 자서전인데 그 힘들었던 시대의 자신의 삶을 이렇게 낙관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게 경이롭게 느껴지는 책이었어요. 무엇보다 지겨운지 모르고 정말 재밌게 읽을 수 있다는것도 이 책의 장점이고요. 근데요. 이 책 알라딘에서는 품절이라니... ㅠ.ㅠ 다른데는 모르겠어요.
 

 

 

 

 

 

원시기독교는 동서로마제국의 분열 이후 분리가 시작되고 특히 8-9세기에 일어난 성상숭배문제를 둘러싼 논쟁과 동로마제국의 성상파괴운동을 계기로 분리가 심화된다.  여기에 기독교계의 주도권을 둘러싼 로마 교황과 비잔틴 황제와의 대립으로 결국 카톨릭과 동방정교로 분리된 것.


1453년 비잔틴 제국의 멸망은 동방정교에게는 시련의 시작이었다. 이슬람세력의 지배를 받게 된 동방정교는 이후 각 지역별로 특색을 가지는, 중앙집권성보다는 지방성이 강한 종교가 되기 시작하였다. 카톨릭이 위계적인 질서가 엄격한 종교로 발달한 반면 정교에선 각 교구의 주교들은 수평적인 관계를 이루고 성직자와 평신도 역시 개인적인 권위는 갖지 않는 수평적인 관계가 발달한다.

 이슬람의 지배를 받던 시절 오스만제국은 동방정교의 효율적인 관리를 위해 그 관리를 그리스에 위임, 그래서 동방정교를 그리스정교라도 한다.



하지만 이 시기 이슬람의 지배를 받던 발칸지역과는 달리 독립하고 있던 러시아 정교회가 그리스정교회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자신의 정통성을 주장 - 때로는 러시아정교라고도 부른다. 하지만 종교를 주도권의 문제가 아니라 이 지역전체를 아우르는 특성으로 파악하고자 한다면 동방정교라고 부르는게 타당할 듯....


카톨릭의 신학이 이론적이고 추상적이며 논리적으로 파고드는 학문적인 성격인데 비해, 동방정교의 핵심은 신앙, 즉 믿음을 몸소 체험하는 것을 중시하며 기독교 신앙 안에서 몸소 하느님을 배우고 체험하는 것을 중시한다. 그리하여 인간의 세계가 곧 하느님의 세계임으로 성속은 일치한다고 믿는다.


그리스정교는 크리스마스보다는 예수의 부활절을 가장 큰 축일로 여긴다.(기독교의 원죄의식보다는 구원을 더 중시함으로 해서) 그리고 성가라는 것 자체가 마음의 기도이기 때문에 오로지 사람의 목소리로 부르는 성가만이 허용된다. 그리고 가장 특징적인 것 중의 하나고 이콘의 숭배인데 교회 가정 등 어느곳에서나 예배때 사용하고 있다. 이콘은 초기 기독교때는 없었고 2-4세기에 유행하다가 8-9세기 성상파괴때 거의 대부분 파괴되었다. 하지만 9세기 중엽 이후 북쪽의 슬라브족이 대거 비잔틴 제국내로 이동해오면서 이들을 개종시키기 위해 다시 유행, 동방정교의 중요한 예배대상으로 자리 잡았다.


그 외 발칸반도에는 큰 교회가 드문 편인데 그것은 오스만제국이 동방정교도들에게 정교자체는 금지하지 않았지만 이슬람교회보다 크고 화려하게 짓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또한 교회의 문높이를 1M로 제한해서 그 낮은 문으로 기어들어가도록 했다. 따라서 이 지역의 교회는 땅을 파 지면보다 낮은 곳에 교회를 지은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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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7-09-29 15: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스 정교라고 배운 기억이 나네요. 러시아도 이 종교를 믿었더랬죠?
그래서 한국엔 알려지지 않은 듯...

바람돌이 2007-09-29 23:38   좋아요 0 | URL
저도 아무 생각없이 그냥 그리스정교라고 했는데 그게 아니더라구요. 그리스정교라는 말의 유래는 오스만제국이 통치의 효율을 위해 동방정교도들의 본산을 그리스에 두면서 생긴 말이더군요. 이에 대해 러시아가 반항하면서 동방정교의 전통은 오스만의 지배를 받지 않고 독립을 유지하고 있는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하면서 러시아정교라는 말도 있구요. 근데 실은 이 동방정교는 믿어졌던 곳들이 이전 비잔틴 제국 지역이었는데 제국의 쇠약과 더불어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와는 거리가 멀어지고 따라서 지방색을 강력하게 띤답니다.
거기다 동방정교자체가 오스만 제국하에서 오랫동안 탄압을 받다보니 카톨릭과 같은 공격적인 세계포교는 생각할 수 없는 처지였고요.
현대 제국주의 시대에 와서야 러시아는 혁명의 성공으로 종교가 인민의 아편이 되었으니 더더욱 타지역에서의 선교같은건 성립될 수가 없었겠죠. 그러다보니 원래의 지역의 종교로 남게된거고요.
근데 종교의 생활과의 밀착은 굉장히 강해서 오스만제국의 그 오랜 통치기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지역에서는 압도적인 종교로 남아있었답니다.
 

 

 

 

 

5부 - 산수보다 아름다움 필묵의 세계 - 19세기의 산수화

1. 산수를 벗어난 산수화   - 19세기의 산수화는 산수경치를 그린 것이기에 앞서 옛 대가의 글씨체나 화풍의 필묵법에 대한 학습과 운용으로 만들어진 조형세계였고, 18세기를 거쳐서야 등장할 수 있었던 다음단계의 회화세계였다. 즉 산수라는 眞과 산수화라는 假(眞에서 빌린 것)를 동질적으로 보았던 관점에서, 산수라는 眞과 산수화라는 幻의 세계가 따로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과정을 거쳐, 독립된 畵의 존재를 새롭게 인식하는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이었다. 
  19세기의 산수화가들은 산수를 빌리듯 옮겨 그려내거나 혹은 특정 부분을 강조하여 멋지게 그려야 한다는 부담에서 완전히 벗어나 화면 위에 필묵의 멋을 구현하는데 주력하게 되었다. 그들은 옛 회화의 필묵법을 두루 정리하여 가리고 멋진 서예기법을 탐구하여 산수화면으로 구현하고자 하였다.

2. 옛 대가의 뜻이 담긴 필묵법 - 19세기에 오면 중국의 남종 문인화의 회화양식이 대거 유행하게 되는데 이런 남종문인화로 그린다는 것은 그 기법을 따르는 것이며 동시에 존경할만한 옛 문인화가의 정신세계를 존중하고 계승한다는 의미를 내표하고 있었다. 따라서 19세기의 화가(강세황, 신위같은 이들)들은 이런 남종문인화들을 베끼고 비슷하게 그리는 이른바 <방작>들을 양산하게 된다. 방작의 열성적인 생산과 감상은 그림에서 벗어나 옛 화가들의 기법에 대한 이해와 나름의 변화에 대한 고민으로, 그리고 응용된 필묵의 묘미를 감상하고 비교하는데로 빠져들었다.

3. 기운과 정신을 표현하는 필묵법 - 남종문인화풍이 시대양식으로 부상하면서 동시에 요구된 것이 그림속의 문인다운 기운, 이름하여 士氣, 書券氣 등이었다. 이런 풍토속에서 19세기 조선의 산수화들은 더욱 직접적인 문자의 형상미를 보여주려 하였다. 추사가 그린 산수화들은 이런 측면에서 이해가 가능하다. 그의 산수화 대부분은 회화 작품이라고 하기 어려울만큼 서예적 필선들로 구성되어있다. 또한 추사가 이인상 산수화의 산석 표현에 전서와 예서의 획이 사용된 것을 보고 이인상의 산수화에 문자기가 있다고 칭송한 이유의 추론이 가능하다.
  또하나 19세기 산수화의 성격은 선종적 깨달음의 세계를 추구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19세기 문인들에게 이것은 완전한 선승의 경지였다기보다는 지극한 탈속의 정신적 분위기 혹은 무욕과 초탈함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고자 한 강렬한 욕구에 가까웠다.

제 6부 세속의 소망이 담긴 산수 - 민화산수도

  일반회화와 구별되는 민화라는 그림들의 특성은 세속적 바람과 쓰임을 반영하기 위한 기능적 회화이자 장식적 회화라는 점이다. 이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고자 단순한 형태와 선명한 색체로 그려졌다. 원래 민화의 전통은 상류층의 풍습에서 시작된 기복의 풍습이 사회 전체적으로 확대되면서 나타난 문화현상이다.  따라서조선의 회화전통및 일상생활의 정서와 소망에 기반을 두고 변화와 창조가 이루어졌다. 특히 민화산수도는 다른 민화들에 비하여 조선 특유의 내용을 가장 많이 보여주고 있다.(상류층의 산수화에서 애용되었던 주제들, 금강산도, 산수유람도, 소상팔경도등이 여러가지 형태로 변형되어 시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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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을넘어 2007-05-01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내용의 핵심을 요약해 주니 좋습니다. ^^

바람돌이 2007-05-02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갈수록 잊어먹는 속도가 빨라서 이러면 좀 오래 기억할까 싶어 하는거랍니다. ㅎㅎㅎ
 

 

 

 

 

제 3부 - 숭고의 미 현인의 공간 - 조선중기의 산수화

  조선 중기 산수화에는 비자연스러움을 강조하는 듯한 구도와 산수 표현, 붓질마서 몹시 성글고 거친 산수화면들이 적지않다. 기이하고 육중한 산이 번번이 나타나는데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이런 산이야말로 진정 은거자가 거할 만한 깊고 깊은 공간이며 그 속에* 머무는 객은 분명 속세에서 멀리 떠나온 은자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감상자는 이러한 그림속에서 깊은 산수 속 은자의 정신적 경지를 만끽하고, 나아가 자신의 마음을 경건하게 다잡는 수양의 매개물로 삼았다.
  결국 16-17세기 조선중기 문인사회에서 즐겨 감상된 단순화되고 과장된 산수형상과 거친 필치의 산수 이미지는, 물질을 초월한 정신적 소탈함과 꾸밈없는 소박함의 요소로 받아들였졌던 것이다.

1.산수인물도 - 산수는 뜻 높은 이의 은일공간으로 기호화하고, 산수보다는 산수속 인물의 높은 정신세계가 더 중시되었다. 이 때 인물의 대부분은 중국의 옛 현인들이며 이런 그림에는 중국의 성현을 전통으로 삼으려 한 조선 문인들의 이상과 사림의 도학적 이상이 서려 있으며, 한편 이상이 실현되기 어려운 현실에 대한 고뇌도 반영되어 있다. (탁족도, 어부도, 기려도, 관폭도, 수면도 등)

2. 무이구곡, 주자선생 머물던곳 - 도학적 정신수양수단으로서의 산수화. 무이구곡도같은 그림과 감상은 조선중기 사림의 내면에서 주자철학이 종교적 차원에 가깝게 전개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3. 관료문인들의 모임, 계회도 - 조선 중기 사림들에게서 유난히 성행하였던 그림. 이는 16세기 사림의 정계진출 및 그들의 정치 문화가 학문풍토와 관련을 맺으면서 크게 성행한 풍조임을 짐작케 한다.

  조선 중기 산수화는 엄격한 사림학자들에 의해 설정된 산수이미지였다. 현실이 혼란하면 마땅히 돌아가 몸을 깨끗이 보신해야 하는 공간이요, 현시로가 격리된 공간이었다. 그리하여 그곳은 은자가 거할 만한 깊은 산이거나, 은자가 보란 듯이 버티고 앉은 공간 혹은 주자와 제자들이 노니는 무이산이엇다. 정작 실제 계회를 그린 계회 산수도에도 이런 산수 분위기가 표현되었던 것은, 그들이 산수관이 여실히 반영된 것이라 하겠다.

제 4부   체험과 소유, 서정의 산수경 - 17세기 후반-18세기의 산수화

1. 진경산수화의 뜻 - 진경산수화의 내용을 보면 문인들이 노닌(遊)산수와 또한 그들이 머문(居)공간이라는 두가지 측면이 있다. 즉 진경산수화는 대부분 문인들의 산수유람이 기록된 산수화이거나 문인들의 저택이나 사당을 그린 그림, 또한 정자나 누대 등의 별장을 그린 그림들이다. (이는 민족적 자각으로 우리 산천의 실경을 그렸다라는 해석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이러한 변화는 이상과 산상의 산수 관념에 유람과 거주의 체험을 반영하는 것이며, 문인들의 자기표현 욕구였으며, 나아가 우리 산천을 발굴하고 표현하는 열정의 과정이었다.

2. 유람을 기록한 산수화 - 18세기는 산수유람문화의 유행기였다. 동시에 그들의 관심역시 이전 시기처럼 명성이나 종교적 의미에 있지 않고 오로지 빼어난 산수풍광을 즐기고 느끼는데 유람의 목적을 두었다. 그 가장 큰 대상이 바로 금강산이었다.  정선의 <금강전도>를 보면 그것은 화가의 눈에 비친 금강산의 한 장면이 아니라, 금강산 속 유명 명승지들을 한눈에 보이도록 재구성한 화면이다. 이는 유람을 즐긴 문인들이 방안에 앉아 유람의 추억을 되살려보기 위한 것이었다. (그 외 단양, 동해, 한강의 뱃놀이등)

3. 머문곳을 기리는 산수화 - 이런 그림의 경우 외형은 산수와 건물이 어우러진 완연한 산수화이지만, 그림의 제화시를 통해 보면 그림의 주제는 대개 건물의 주인이었다. 조선중기의 이런 그림은 그곳의 실경보다는 학풍과 인덕을 그리는 마음을 표현하는 명분이 더 중시되었다.
이런 산수화의 전통, 즉 산수화의 고상한 정신이라는 인식은 문인 개인이 경험한 공간 혹은 자신의 모습을 그러한 위상속에 담아 그림으로써, 스스로의 풍취를 세상에 보여주고 또한 그 풍취를 스스로 소유하는 만족의 표현이라고 할 수있다.

4. 아취있는 모임을 기념하는 산수화 - 조선 중기의 계회도속 문인들은 아소 경직된 자세로 질서 있게 앉아있는 반면 아회도 속 문인들은 자유로운 자세와 위치를 점하여 느긋하게 예술을 즐기고 있다.이런류의 그림은 모임의 체험과 개최된 실제 공간을 보여주고있지만 그 주제는 이상적 아취를 표현한느데로 치우쳐갔다. 이런 양상은 아회의 주인공이 중인층으로 확산되어가면서 더 두드러지게 된다.

5. 서정을 표현한 산수화 - 실경이 아닌 산수화들 중에 조선 후기에 새롭게 부상한 것으로 시의도(詩意圖)를 들 수있다. 이것은 유명한 시구를 회화로 표현한 그림인데 조선 중기의 산수인물도들이 철리적 이상으로 완전 무장된 은자의 고차우너적 달관의 세계를 지향하였다면, 시의도에서는 시적이고 서정적인 감상 혹은 세속에 얽힌 개인 정감도 표현하려 한것이다.  진경산수, 실경산수화가 개인의 체험을 중시하여 유람의 경험이나 소유의 욕망을 노출하여 보여주었듯이, 시의도 또한 개인 정감의 표출을 중시하였다는 점에서 연관성을 지닌다. 나아가 조선 중기까지의 문화에서 표현되지 않았던 경험적 내면이 표출되었다는점에서도 그러하다.

**정선과 윤두서의 차이(노론과 남인의 산수관의 차이)
  노론계는 개인 체험의 자득을 주장하며 산수 유람의 체험을 마음껏 즐기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정선이 나온다. 하지만 남인계는 절경을 극대화하여 표현한 산수화에 대하여 무익하다 하였고 그보다는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유용한 그림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윤두서가 대표적으로 그는 새로운 문명을 그림으로 표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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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꿀라 2007-04-27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어볼 만 할 겁니다 저도 다 읽었는데 너무 좋았어요.

바람돌이 2007-05-01 0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많이 배우고 좋았어요. 워낙에 무지한 부분이라 정리라도 하자 싶어서 시작했는데 역시 정리도 힘드네요. 역시 공부는어려워요. ^^
 

 

 

 

 

제 1부 산수화에 대한 이해

1. 산수화 발생의 사상적 배경
  동양에서도 생각만큼 산수화의 역사는 길지 않다. 산수라는 거대한 대상을 감상하며 시를 짓고 그림으로 옮겨내는 작업은 자연을 조망할 수 있을만큼 문명이 발달하고 정신적 여유가 생긴후에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동아시아 회화사에서도 인물, 화조, 동물 등의 장르들이 모두 발달하도록 산수화는 나타나지 않았다.

산수화 발생의 토대가 된 산수 인식의 양상은
첫째, 고대의 신화에 근거한 산수관(상상속 산수) 
둘째, 유가와 도가 등 철학적 사유에 근거한 산수관(철리적 세계로서의 산수)  - 산수는 그 자체로 최고의 인격적 덕목을 가지며 그 자체로 도가 구현된 물상이며 나아가 고상한 인격의 발휘에 가장 적합한 공간이라고 확정지어준다.
셋째, 산수문학의 발생과 관련한 산수관(정치적 이데올로기화된 산수) - 위진시대부터 시작. 정치적 혼란기에 산수은둔이 절대적으로 미화되었던 상황과 신선사상의 결합. 이전의 유가, 도가에서 확립된 산수관 등이 결합하면서 등장.

2. 산수화 발생의 회화사적 배경
  본격적 산수화가 발생하기 이전에 산수 표현은 짐승과 인간이 산봉우리보다 크게 배치되었고, 산수는 신비의 공간으로 조형화되거나 다른 주제의 배경으로 처리되었다.
 독립된 산수화는 수나라때 등장한 것으로 보여지며, 우리나라에서는 백제의 <산수문전>을 들수 있다.

3. 채색 산수화와 수묵산수화
산수화의 발달과정은 채색산수화에서 수묵산수화로 옮겨가는데 여기에는 중국에서 발달한 필묵 매체와 문화 권력, 나아가 사상 배경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독특한 문화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구체적으로는 1) 필묵 그 자체가 지식문화의 상징물로서 암묵적으로 의미화 되어있었다는 것
                         2) 주요 사상의 심미적 지향성이 채색보다는 수묵의 세계와 잘 부합하였다는 것(노자 -"오채가 눈을 어둡게 한다" 공자 "사치스러움보다는 검소한 것을 택하겠다")
   산수와 산수화는 그 자체로 사상의 덕목과 문인의 정신을 표징하는 세계로 등장한 것이기에 수묵은 산수를 가장 잘 표현하는 가장 적절한 기법으로 자리를 굳혀간 것.

4. 산수화 내용의 이해
  1)북송대 - 커다란 화폭에 거대한 산을 그리는 '기념비적 산수' '영웅적 산수' - 深遠, 高遠, 平遠의 삼원론 과 군신의 질서가 반영된 산악의 구도가 이론화 된다.
 2) 남송대 - 감상적, 시적 분위기로 옮겨가는 드라마틱한 변화 - 새로운 삼원론 즉 넓게 트여 먼 산수(闊遠), 가물거리듯 먼 산수(迷遠), 그윽하게 먼 산수(幽遠) 등 망망한 공간감을 요구하는 산수화들이 등장. 높이 솟은 북송대의 산수와 대비된다.  또한 인물이 자연속에  묻힌 미미한 존재가 아니라 자연을 관망하는 주체적 존재로 등장한다는 점도 달라진점.
3) 송대 이후 중국에서는 화원화가의 작품에 비해 솜씨가 떨어지는 문인화가의 산수화가 더 인정받는 특이한 역사가 형성된다. 결국 문인의 철학과 시인의 뜻으로 그려낸 이미지라는 관념이 등장하는 것. (원나라때부터 크게 성장)
4)명의 대표적인 화풍
    절파 - 화원출신의 직업화가들. 어부나 은둔자 혹은 전설적 인물이 등장하는 주로 상상의 산수, 조선 초기의 화원과 문인들은 대부분 절파의 화풍을 응용
   오파 - 문인화가들. 화가 자신의 문화공간을 그리는 경험산수가 많음. 문인의 자부심과 자기표현의 수단. 조선후깅는 진경산수화의 경우처럼 근원적으로 오파에서 시도된 경험적 주제가 활용됨.
5) 명대 말기 동기창의 남북종론 - 남종은 문인화의 계통, 북종은 화원화풍으로서 남종은 본받을만하지만 북종은 배워서는 안된다는 극단으로까지 나아감.  이후 남종문인화풍의 모방에 많은 에너지를 쏟게 된고 우리나라 19세기 회화의 배경이 된다. 이후 결국 문인산수화가 하나의 양식으로 정착되게 된다.


 제 2부 영원과 초월의 시간 - 여말 선초의 산수화

1. 푸른 산 흰구름의 영원, 청산백운(靑山白雲)
 <청산백운>이란 일상의 산수경에서 멀리 벗어나 다소 환상적 시공간으로 각인되어온 산수 이미지.
즉 선험적 상상의 관념경이자 다소 과장된 낭만경이다.
극심한 정치적 변혁을 거치는 시기에 이런 지극히 고요하고도 신비한 산수그림이 최고의 인기를 누린것은 '이상사회로 향하는 문사들의 역동적, 긍정적 에너지와 그들이 바라는 이상적 순간을 현현하는 그림으로 청산백운도가 맞아떨어진 것이 아닐까?

2. 계절의 정취, 사시팔경
  사계절을 표현하는 산수화들도 많이 그려졌는데 특히 풍우가 몰아치는 여름, 눈 소복이 쌓인 겨울이 많이 그려졌다. 이는 계절 감각의 극단적 표현이면서 동시에 관념적 계절상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시도 역시 특정한 지역의 구체적 산수경이 아니며, 각 계절의 에센스를 불변의 이미지로 전달해준다는 점에서, 청산백운을 영원의 자연경으로 감상했던 태도와 유사한 면모를 지닌다.
또한 조선 초기의 관각문인들이 사시 팔경의 자연 질서와 농촌 겨오간을 즐겨 읊르며 행복한 위정자의 입지를 보여주었던 것을 고려하면, 순조로운 보편질서의 자연향유로서 '사시도'가 그들에게 적절하였으리란 것도 추정할 수 있다.

3. 이국의 정취, 소상팔경
소상팔경이란? - 중국의 소강과 상강이 흘러들어 호수를 이룬 동정호 일대의 경관
8개의 그림이 짝으로 병풍으로 그려지기도 하나 하나씩 떼어 단품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그런데 단품으로 그려질 경우 역시 비바람치는 여름밤과 눈 쌓인 겨울 저녁이 애호되는점은 사시도와 거의 유사하다.
   ---- 조선 초기에 그려진 우리 산수 - 산수화의 주된 영역이 아님
      1. 행정적, 외교적 차원에서 그려진 금강산도 -제화시문이 없는것으로 보아 감상용은 아니었던 듯
     2. 관료 문인들의 계회, 야유, 혹은 별장등을 그린 한강 유역의 풍경 -산수풍경이 주제가 아님
     3. 조선초기 문인들의 제화시문에 자주 등장하는 것은 박연폭포도

4. 꿈속의 산수경, 몽유도원
1. 일반적인 방향과 반대로 좌에서 우로 진행된다.
2. 안평대군의 글에는 인물이 중요하게 등장하지만 안견의 그림에는 인물이 없다
3. 화면의 구도가 독특하다. 동굴을 통과하여 도원이 드러났던 상황을 표현하기 위하여 도원의 사방을 거대한 동굴 입구로 처리한 점. 도원을 위에서 내려다 볼 수 있도록 그렸으나 왼편에는 지평선이 존재하는등 화면의 시점의 왜곡

몽유도원도에 부쳐진 제화시들은 두종류로 구분. 하나는 화면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 안평대군의 꿈을 유가적, 현실적의미로 해석. 다른 하나는 화면에 없는 장면을 상상으로 읊으면서 안평대군의 꿈을 도가적 사유나 신선세계로 해석하였던 것. 전자는 건국의 분위기 속에서 번영을 도모하던 당시의 건설적 기상이 그대로 그림감상에 반영된 결과라면, 도가적, 상상적 면모는 권력과 부귀를 누리는 관료들이 느껴야 했던 인생과 벼슬길의 낭만적 허망감을 반영하는 이면의 정신세계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조선 초기 문사들은 유가적 현실과 도가적 환상이 공존하는 낙관적 세계를 살았던 점이 산수화 선택이나 감상에 나타났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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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4-17 12: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람돌이 2007-04-17 1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인님/저도 산수화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게 없어서 궁금했거든요. 근데 재밌네요. 밀린책은 저도 장난이 아니옵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