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만간 필로소픽 출판사에서 자크 데리다의 [환대에 대하여] 새 번역본이 출간됩니다. 


이보경 선생님이 번역을 맡아서 공들여 새로 번역을 해주셨는데, 


제게 해제를 하나 써달라는 요청이 들어와서 간단히 글을 한 편 써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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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대라는 이름의 철학적인 것: [환대에 대하여] 한국어판 해제

 

 

데리다의 [환대에 대하여]를 읽는 일은, 몇 번의 놀람 또는 반전을 경험하는 일이다.

 

첫 번째 놀람 또는 반전.

[환대에 대하여]를 손에 든 독자들은 아마도 무조건적 환대또는 절대적 환대를 머릿속에 떠올릴 것이다. 그것을 긍정하든 부정하든 간에, 데리다는 무조건적인 환대를 주장한 철학자 내지 윤리학자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자들이 실제로 이 책을 읽어가다 보면, 데리다의 환대론을 그처럼 단순하게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금방 깨닫게 된다. 예컨대 데리다는 이렇게 질문한다. “무엇이 더 정당하고 더 애정 어린 것일까? 묻는 것일까, 아니면 묻지 않는 것일까?”(47) 묻는 것이 더 정의롭고 사랑이 담긴 대응일까, 아니면 묻지 않는 것이 더 정의롭고 사랑을 베푸는 일일까? 요컨대 묻는 게 환대하는 것일까, 아니면 묻지 않는 게 환대하는 것일까?


여기서 묻는다는 것은 이름을 묻고 신원을 파악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여행이나 사업차 또는 공부 등을 위해 찾아간 외국의 공항에서 우리는 이름과 국적, 방문 목적 등을 묻는 해당 국가 관리의 질문에 익숙해져 있다. 이런 질문들을 통해 우리가 그들에게 위험하지 않은 존재자임이 확인되고 난 이후 우리는 비로소 해당 국가에 입국할 수 있다. 이것이 대개 우리가 경험하는 환대의 절차다. 그렇다면 묻지 않는다는 것은, 말 그대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는 것, 이름이 무엇이고 국적이 무엇인지, 무엇 때문에 우리나라에 왔는지 물어보지 않고 입국시켜주는 것, 요컨대 무조건적으로 환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데리다가 만약 무조건적인 환대를 주장하는 철학자라면, 데리다는 당연히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받아들이는 것이 더 정의롭고 애정 어린 환대의 태도라고 주장해야 옳을 것이다. 그런데 데리다는 묻는 것과 묻지 않는 것 사이에서 단호하게 결정을 내리기보다는 과연 어떤 게 더 정의로운 것인지 묻고 있다.


왜 그럴까? 그것은 무엇보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 곧 무조건적인 환대를 실행한다는 것은 사실상 국경을 모두 개방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도래하는 이들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가 누구인지, 무슨 목적으로 입국하려는 것인지 묻지 않고 그냥 모두 받아들인다면, 그 경우 국경이라는 것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을 것이다. 국경이야말로 검열과 분류, 선별의 장소, 곧 묻고 따지는 장소가 아닌가? 그런데 이처럼 국경을 모두 개방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모든 나라가 국경을 없애고 모든 사람들이 모든 나라들을 자유롭게 왕래하게 된다면, 세계는 지금보다 훨씬 더 평화로운 곳이 될까?


그럴지도 모르지만, 아마 세계가 대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라는 점이 더 개연성이 있는 일일 터이다. 왜냐하면 (개연성이 전혀 없는 것이기는 해도) 국경이 모두 개방되면, 현재와 같이 부유한 나라들과 가난한 나라들로 분할된 세계에서, 더욱이 소수의 부유한 나라들과 대다수의 가난한 나라들로 분할된 세계에서, 가난한 나라의 수많은 사람들이 소수의 부유한 나라들로 몰려들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처럼 국경이 절대적으로 개방된다면, 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타자들에 대한 커다란 불안과 공포(panic), 아마 실제 일어난 혼란보다 훨씬 더 큰 공포를 가져올 것이다. 이러한 공포는 집단적인 불안과 안전에 대한 강렬한 욕망을 자극할 것이며, 이는 다시 공적일 뿐만 아니라 사적인 형태의 무장과 폭력들을 대규모로, 그리고 다양한 수준에서 유발하게 될 것이다.


무조건적인 국경의 개방과는 전혀 거리가 멀지만, 시리아 내전 이후 시리아 주변국들만이 아니라 유럽으로 수많은 난민이 몰려들면서 유럽 대륙은 큰 혼란에 빠져들었다. 유럽의 많은 나라들이 자의반타의반으로 많은 수의 시리아 난민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여전히 유럽 대륙으로 몰려드는 많은 난민들이 존재하며, 유럽의 각 나라들은 난민 문제로 애를 먹고 있다. 이처럼 많은 수의 난민을 받아들이면서 인종주의와 국민주의적 반동이 격렬해지고 반()이민, ()이슬람 감정이 고조되고, 그에 편승하여 극우파 정당들이 득세하게 되었으며 치안과 검열 활동이 강화되었다. 따라서 만약 무조건적 환대의 방식으로서 국경의 완전한 개방이 이루어진다면, 그 경우 오히려 환대는 더욱 더 제한될 수 있다. 절대적인 환대를 실행하려는 것이 환대를 제한하게 되며, 환대를 실행할 수 있는 주체의 조건을 잠식할 수 있는 것이다.


최근 출간된 환대에 관한 세미나에서 데리다 역시 이점을 강조하고 있다. “정확히 정치적인 것이 파괴될 때, 곧 갑자기 명확한 국경이, 지정된 시민권이, 조국에 대한, 종교에 대한, 따라서 가능한 정체화(identification)에 대한 준거가 존재하지 않게 될 때, 바로 이 순간 증오가 적대를 대체하게 되고, 증오가 한없이 절대적으로 분출하게 됩니다.”(Jacques Derrida, Hospitalité, vol. 1, Seuil, 2021, p. 190.)


따라서 데리다가 무조건적인 환대를 주장했다는 소문은, 사실 책을 읽어보지 않은 이들의 순진한 상상의 결과일 것이다. 이것이 첫 번째 놀람 또는 반전이다.

 

두 번째 놀람 또는 발전.

여기에서 두 번째 놀람 또는 반전이 시작된다. 그렇다면 조건적 환대가 무조건적 환대보다 더 낫다는 뜻인가? 우리는 더 많은 공포와 불안, 혐오와 폭력을 초래할 수도 있는 무조건적 환대보다는 현실적인조건적 환대를 수행할 수밖에 없고, 또 수행해야 한다는 뜻인가? 만약 데리다가 󰡔환대에 대하여󰡕에서 내리는 결론이 이런 것이라면, 과연 철학이란 무엇인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굳이 철학 없이도 우리가 일상적으로 행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일상에서 사람들을 만날 때 그 사람이 나 또는 우리에게 도움이 될지 손해가 될지, 그 사람이 나 또는 우리를 좋아하는지 아닌지를 고려하면서 누군가를 사귀거나 가까이 하지 않는가? 우리가 외국인을 들일 때도 우리는 그 사람이 우리나라에 도움이 될지 아닐지를 일차적으로 고려하면서 (관광을 와서 돈을 잘 쓰고 가는지, 이주노동자로 와서 성실히 우리나라 경제를 위해 기여할지, 100만원 가사도우미로 와서 저출산 문제 해결에 기여할지 등) 들이거나 거부하거나 하지 않는가? 그런 상황에서 굳이 조건적 환대를 정당화하는 철학이 필요할까?


아니 데리다는 확실히 조건적 환대보다는 무조건적 환대에 관심을 갖고 그것을 지지한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데리다가 이 책에서 관심을 기울이는 이가 외국인또는 이방인이며, 그 중에서도 절대적 이방인이기 때문이다. 데리다는 오이디푸스, 단 [오이디푸스 왕]의 오이디푸스가 아니라 [콜로누스의 오이디푸스]의 오이디푸스에게서 바로 이러한 절대적 이방인의 모습을 발견한다. 오이디푸스는 -바깥의-사람(anomon)”이며, “절대적 도착자”(57)이다. 그는 “‘그가 어디에 있는지, 그가 어디로 가는지'에 관한 앎이 없는 채, 그 장소와 그 장소의 이름에 관한 앎이 없는 채. 세속적인 것과 성스러운 것,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 사이에”(57) 놓여 있는 존재자다. 오이디푸스는 우리가 알다시피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여 자식이자 동생인 이들을 낳은 사람, 따라서 가장 원초적인 인륜 질서를 어기고 신들에게 버림받았으며, 조국에서 쫓겨나서 눈 먼 채로 이국땅을 떠돌아다는 이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데리다에 따르면 절대적 도착자 오이디푸스는 단지 비극 속의 허구적 주인공이 아니다. 그는 오늘날 생생하게 살아 있는 존재자이며 근대 세계를 상징하는 존재자이다.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한나 아렌트가 말하듯,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당시에 전쟁을 피해, 나치의 박해를 피해 피난을 간 수많은 사람들은, “고향을 떠나자마자 노숙자(homeless)가 되었고 국가를 떠나자마자 무국적자(stateless)가 되었다. 인권을 박탈당하자마자 그들은 무권리자들(rightless)이 되었으며 지구의 쓰레기”(Hannah Arendt,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Harcourt, 1973, p. 267; 󰡔전체주의의 기원󰡕, 이진우박미애 옮김, 한길사, 2006, 489~90.)가 되었다. 바로 이들이야말로 아노모스 오이디푸스, 근대적인 법-바깥에-존재하는 이”(J. Derrida, Hospitalité, vol. 1, p. 187.)가 아닌가? -바깥의-사람들, 그들은 오늘날에도 우리 도처에 존재하고 있는 것 아닌가? 일회용 인간이라고 불리는 이들, 남아메리카의 광산에서 저임금 중노동에 시달리는 현대판 노예들만이 아니라, 이른바 위험의 외주화속에서 위험한 일을 혼자서 감당하다가 건강을 해치거나 목숨을 잃는 수많은 비정규노동자들, 이주자들, 난민들, 성적 소수자들 같은 이들이 다름 아닌 법-바깥의-사람들 아닌가?


그렇다면 데리다가 이러한 이방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그들에 대한 무조건적 환대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은, 철학적, 윤리적, 정치적으로 정당한 태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데리다는 확실히 무조건적 환대의 편에 있는 철학자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세 번째 놀람 또는 반전.

하지만 데리다에 따르면 그럼에도 우리는 무조건적 환대와 조건적 환대에서 한 쪽 편을 확실하게, 결정 가능하게 결정을 내릴 수는 없다. 그 이유는 양자의 관계가 정확히 이율배반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무조건적 환대와 조건적 환대 (또는 [법의 힘]의 표현을 빌린다면) 정의와 법 사이에는 이율배반적 관계가 존재한다는 것, 어쩌면 이것이 이 책의 가장 중요한 철학적 핵심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양자의 관계가 이율배반적이라는 것은, 단지 양자가 서로 충돌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만약 그런 것이라면, 무조건적인 환대라는 것은 칸트가 말하는 규제적 이념으로 이해될 수도 있고 아니면 추상적이고 유토피아적인”(117) 것에 머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이해한다면 무조건적 환대는 결코 실현될 수 없는 이념이지만, 그것은 어쨌든 현실적으로 실천되는 조건적 환대를 규제하고 그것을 개선하는 준거로 작용하는 것으로 이해될 것이다.


하지만 데리다는 이런 해석을 미리 비판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무조건적 환대와 조건적 환대, 또는 "자체와 법이라는 이 두 개의 법 체제는 모순적이고 이율배반적이면서도 분리 불가능하다. 그것들은 서로를 함축하는 동시에 하나와 다른 하나 간에 서로를 배제한다. 그것들은 서로를 배제하는 순간 서로 합체되며, 하나와 다른 하나 간에 서로를 에워싸는 순간 서로 분리된다."”(117~18) 왜냐하면 무조건적 환대 편에서 보면 조건적 환대는 진정한 환대가 아니라 사실은 치안에 불과한 것이며, 역으로 조건적 환대의 편에서 보면, 공공의 불안을 야기하면서 무조건적으로 이방인을 맞아들이자고 주장하는 무조건적 환대야말로 공익을 훼손하고 정의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일 수 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보면 조건적 환대들 없이 무조건적 환대는 존재할 수 없으며, 무조건적 환대에 기초를 두지 않는다면 조건적 환대는 그저 행정적이고 치안적인 규제에 불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방인들에 대하여, 외국인에 대하여, 더 나아가 일회용 인간들에 대하여 무조건적 환대를 해야겠지만, 그 무조건적인 환대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누군가에는 무조건적인 환대일 수 있는 행위가 누군가에게는 불안하고 위험한 행위처럼 보일 수 있으며, 심지어 우리가 어떤 타자를 무조건적으로 환대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또 다른 타자들은 배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유한한 우리가 모든 타자들에 대해 절대적으로 무조건적 환대를 베풀고, 모두에게 정의를 시행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면 우리는 누구에게 무조건적 환대를 해야 하고 누구는 (적어도 당분간) 환대에서 배제해야 하는가? 어떤 기준에 따라 그렇게 할 수 있는가? 그 기준은 무조건적 환대의 원리에 부합하는 기준인가 아니면 조건적 환대의 원리에 일치하는 기준인가?


그렇다면 얼핏 보기에 매우 추상적이고 난해한 철학 논의처럼 보이는 데리다의 논변이 지극히 현실적인 함의를 지닌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데리다야말로 어떤 의미에서는 지극히 현실주의적인 철학자라고 말할 수도 있을 텐데, 깊이 생각하는 독자라면 현실주의철학이라는 두 단어 사이의 관계가 또한 지극히 이율배반적이라는 점을 눈치 챘을 것이다.

 

네 번째 놀람 또는 반전.

하지만 아마 반전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앞서 법-바깥에-존재하는 이라고 말했던 오이디푸스에게도 또한 그 바깥이, 또 다른 절대적 타자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타자의 이름은 바로 안티고네다. 그는 눈 먼 아버지를 모시고 이국땅을 이리저리 배회하는 존재이지만, 결국 이국땅에서 자신의 묘지를 선택한 아버지를 애도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 아버지에게서. 그리고 나중에는 고국에서 크레온에게서. 애도야말로 환대의 또 다른 본질적인 방식이라면, 애도의 기회를 박탈당한 안티고네, 따라서 환대의 가능성 자체에서 배제당한 안티고네는, 우리에게 환대의 문제에 관해 무엇을 말해주는가? 더욱이 이 책의 말미에 나오는 성경 창세기의 롯 이야기, 곧 이방인을 환대하기 위해 자신의 딸들을 내어주는 그 이야기는 환대에 관하여, 환대와 젠더의 문제에 관하여 무엇을 말해주는가?

 

아마도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방금 언급했던 것들보다 더 많은 놀람과 반전을 경험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환대에 대하여]라는 이 책을 올바르게 환대하는 한 방식일 것이고, 환대에 관한 데리다의 사유를 단지 하나의 철학이 아니라 철학적인 것의 이름으로 만드는 한 방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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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9일 금요일 부산대 인문학연구소에서 간행하는 학술지 코기토 100호 기념 학술대회가 열립니다. 


저도 발표를 하나 맡게 됐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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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세, 신유물론, 스피노자 



이 논문은 인류세와 관련하여 신유물론과 스피노자 철학을 비판적으로 비교ㆍ검토해보려고 한다. 최근 기후위기가 심각해지면서 인류세와 그것이 제기하는 여러 문제들을 적절하게 개념화하는 것이 자연과학만이 아니라 인문사회과학의 주요 쟁점으로 부각되고 있다. 인류세가 지구 시스템에 미친 인간의 행위성으로 인해 기후위기와 종다양성 파괴, 해양 생태계의 훼손 같은 현상들로 표출되는 지구 시스템의 변동이 일어나고 인류의 생존이 위협받는 상황을 지칭하는 명칭이라면, 그것은 과학적 명칭임과 동시에 규범적 명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인류세는 "본질적으로 논란을 일으키는 개념"(W. B. 갈리)일 수밖에 없으며, 상이한 이론적, 윤리적 입장을 산출하게 된다. 신유물론은 인류세의 위기에 적절하게 대처하기 위해서는 물질의 행위성을 긍정함으로써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인간과 지구 시스템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해야 하는 입장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신유물론은 그 이론적 기여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난점과 한계를 지닌 것으로 보이는데, 나는 역설적 유물론으로 이해된 스피노자 철학이 이러한 난점과 한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적절한 이론적 자원을 제공해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논문에서는 스피노자의 역설적 유물론을 여섯 가지 테제로 제시하면서 제인 베넷의 신유물론과 스피노자 철학을 비교함으로써 이 점을 보여주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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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금요일 연세대에서 [푸코와 철학자들] 북콘서트가 있었습니다. 


금요일 저녁 행사였는데도 아주 많은 분들이 찾아주셔서 성황을 이뤘습니다. 


모두 감사드립니다.

 

그 행사 머리말로 작성한 간단한 글을 하나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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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와 철학의 관계에 대한 몇 가지 단상

 

 

오늘 이 자리에 서니 몇 가지 감정이 듭니다. 우선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이 책을 기획하고 완성시키기 위해 몇 년 동안 많은 애를 써준 김은주 선생님과 민음사 신새벽 차장님 덕분에 오늘 북토크 모임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사석에서도 말했지만, 이 자리에서도 다시 한 번 두 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아울러 엮은이의 한 사람으로서 좋은 원고를 보내주신 공동 필자 선생님들께 깊은 감사의 뜻을 표시하고 싶습니다. 제 생각에 이 책은 한국의 푸코 수용사에서 하나의 이정표가 될 만한 책이라고 보이고, 특히 철학자 푸코에 관한 연구로는 앞으로 빠른 시간 내에 이 책을 뛰어넘을 만한 책을 내기가 쉽지 않을 듯합니다. 이것은 모두 외국에서 출판된 푸코 연구에 견줘 전혀 손색이 없는 수준 높은 글을 만들어준 필자 선생님들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금요일 저녁의 귀한 시간에 열리는 모임인데도 이 자리에 참석해주신 많은 독자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책은 독자들의 독서와 비평, 새로운 연구로만 완성될 수 있을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기 오신 독자 분들은 이 책의 공동 저자로서의 자격과 책무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감사드립니다.


그 다음으로 당혹스러운 감정이 듭니다. 원래 이런 자리에서 이런 말은 대개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 돌아가기 마련인데, 제가 그 역할을 맡게 되니 새삼 나이를 몇 살은 더 먹은 기분입니다. 저 아직 젊습니다. ㅠㅠ


마지막으로 푸코 전공자인 허경 선생님과 도승연 선생님, 그리고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한 심세광 선생님께 미안하고 감사하다는 말씀을 특별히 전하고 싶습니다. 어찌 하다 보니 푸코 전공자도 아닌 김은주 선생과 제가 이 책의 엮은이가 돼서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되었는데, 사실 연구의 능력으로 보나 전문성으로 보나 인품으로 보나 허경 선생님과 도승연 선생님 또는 심세광 선생님께 이 책의 공로가 돌아가는 것이 온당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럼에도 흔쾌히 좋은 원고를 써주시고 이 자리에까지 함께 해주신 두 분 선생님께, 그리고 미처 참석하지 못한 심세광 선생님께 특별히 엮은이로서 사의를 전하고 싶습니다.

 

이제 제 이야기의 본론으로 들어가서 푸코와 철학의 관계에 관해 엮은이로서의 몇 가지 생각을 말씀드리면서 오늘 소개의 말로 대신할까 합니다.


제가 방금 푸코와 철학의 관계라고 무심하게 말했지만, 사실 푸코와 철학의 관계는 마냥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관계는 아닙니다. 오히려 긴장과 갈등, 역설과 아포리아를 품고 있는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몇 가지 측면에서 볼 때 그렇습니다.

 

1) 프랑스 철학


먼저 우리가 푸코와 관련하여 자주 사용하는 프랑스 철학또는 현대 프랑스 철학이라는 말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물론 푸코는 데리다, 들뢰즈 등과 더불어 현대 프랑스를 대표하는 철학자라고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20세기를 통틀어 보더라도 몇 손가락에 꼽을 만한 철학자로서의 위상을 지녔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요컨대 하이데거나 비트겐슈타인 등과 같은 반열에 놓이는 것이죠.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하나 있습니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출판사 중 하나인 갈리마르(Gallimard)에서는 플레이야드”(Pléiade) 총서가 출간되는데, 저명한 사상가나 작가의 전집을, 사전 종이 같은 얇은 종이를 사용하여 한 권 내지 몇 권 안에 집약해서 펴내는 총서죠. 그런데 20세기 후반 철학자들 가운데는 푸코 전집(푸코가 생전에 출판한 저작들 전집)이 유일하게 이 총서로 간행되었습니다. 이는 철학자로서 푸코의 위상을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그런데 방금 제가 이미 사용했듯이, 우리가 흔히 프랑스철학 또는 독일철학 아니면 영미철학 등에 관해 말하지만, 여기에는 얼마간 역설이나 모순이 함축돼 있습니다. 왜냐하면 철학은 보편성을 추구하기 마련인데, 프랑스철학이나 독일철학, 영미철학 같은 표현들은 철학이 프랑스나 독일, 영국이나 미국 같은 네이션 스테이트, 곧 국민국가의 문화적 틀에 제약받을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프랑스철학 또는 현대 프랑스철학의 대표자 푸코와 같은 표현을 우리가 사용할 때, 우리는 프랑스철학자로서의 푸코를 지칭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프랑스 철학자로서의 푸코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일까요? 요컨대 푸코는 프랑스적인 것 때문에 위대한 철학자가 된 것일까요, 아니면 프랑스적인 한계를 넘어섰다는 점에서 그의 위대함이 존재하는 것일까요?


얼마간 작위적일 수도 있는 이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이 책에 수록된 글들에서 잘 드러나듯 푸코는 프랑스 철학자들(데카르트, 캉길렘, 알튀세르, 데리다 등)에게 영향을 받고 그들과 대결하면서 동시에 그 바깥의 철학자들, 요컨대 칸트, 니체, 하이데거 같은 철학자들에게도 깊은 영향을 받고 또한 그들과 대결했다는 사실, 그리고 말년에는 고대 그리스철학으로 거슬러 올라갔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푸코의 철학을 프랑스철학으로, ‘현대 프랑스철학을 대표하는 것으로 한정할 수 없다는 점을 말해주는 것으로 보입니다. 또는 우리가 프랑스철학이나 독일철학 등으로 부르는 것은 결코 순수하게 프랑스적인 것이나 독일적인 것(프랑스의 정신, 독일의 정신 같은)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것은 이미 타자들과의 교류, 그것들의 수용 및 변용, 재창조의 산물입니다.


그렇다면 푸코의 철학이 위대한 것이라면, 그것은 무엇보다 푸코가 국민적인 것의 경계를 사소한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근현대 철학의 제도적인프라적상징적 조건이라는 문제, 철학이 지금까지 스스로 문제화하지 않았던 그 문제를 수행적으로 다루는 한 방식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2) 정전이 된 철학자 푸코


그 다음, 요즘 인문학 분야에서는 철학이나 사상 또는 문학의 고전적인 작품 그리고 그 저자를 가리켜 정전”(canon)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 같은 것,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칸트나 헤겔의 철학 등이 그 대표적인 사례겠죠. 그리고 푸코는 앞서 말했듯이 이제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서양철학의 정전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푸코 철학은 이점에서 다시 역설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은 이 책의 서론에서 김은주 선생이 잘 지적하듯이 푸코는 이전의 서양철학에서 철학의 주제로 간주되지 않았던 대상들을 다룸으로써 정전의 지위에 올랐기 때문입니다. 광기나 감옥, (호모) 섹슈얼리티 같은 것이 대표적이겠죠. 이것들은 푸코 이전에는 누구도 철학적인 주제가 될 만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인데, 푸코는 이 대상들에 대한 탐구를 통해 근현대 사회의 심층을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종래의 철학 및 그 합리성의 한계도 드러냈죠. 더욱이 푸코는 그러한 한계를 드러낼 때 기존의 철학적 방법과 다른 방법, 예컨대 고고학이나 계보학 같은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이런 대상이나 주제, 그리고 방법은 푸코 당시에는 아주 낯설고 충격적인 것이었지만, 푸코가 정전의 자리에 오르면서 이제는 웬만한 사람들에게는 아주 친숙한 주제이자 방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푸코는 이 책에서 알 수 있듯이 고전의 반열에 이미 올라 있는 다른 철학자들과의 비교 대상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푸코를 정전의 자리에 위치시킴으로써 우리는 사실 푸코적인 것을 얼마간 상실할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요? 더 첨예하게 말하자면, “고전 철학자 푸코, 정상화되고 길들여진 푸코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알튀세르가 유고로 출간된 󰡔비철학자들을 위한 철학 입문󰡕에서 말한 바 있듯이, 서양 철학의 근본 특성은 바깥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었습니다. 플라톤에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철학은 모든 것, 단지 존재하는 것만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것, 무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설명하고 그것에 근거를 부여하려고 노력해왔다는 것이죠. 적어도 그것이 지배적인 철학의 특징이었습니다. 반면 역시 알튀세르에 따르면, 기성의 지배적인 철학에 맞서는 진정한 유물론 철학은 모든 것을 포함하는 철학의 충만한 공간 안에 공백을 만드는 것, 철학의 총체성의 바깥을 찾아내는 것을 추구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푸코는 아마도 탁월한 유물론 철학자 중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푸코를 정전으로 만듦으로써, 그를 다시 한 번 철학의 지배권 안으로 포섭하는 것이 아닐까요? 푸코와 같은 도발적인 철학자, 철학의 바깥에 대한 탐구를 통해 바깥의 철학을 추구했던 철학자에게 이것은 불가피한 역설일까요?

 

3) 푸코에 관한 연구에서 푸코적인 연구로


이것은 마지막 세 번째 질문과 연결됩니다. 10여 년 전에 제 한국의 푸코 연구에 관한 주제서평을 쓰면서 글의 제목으로 삼았던 문구가 바로 이것입니다. 아마도 당시 저는 푸코를 연구하는 이들이 푸코에 관한 연구에 머물지 않고 스스로 푸코적인 연구를 수행한 것이 위와 같은 역설에서 벗어나는 가장 생산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그 생각은 마찬가지이지만, 꼭 그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지는 않습니다. 또는 푸코적인 연구를 수행하는 다양한 방식들이 존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푸코적인 연구를 수행하는 방법 중 하나는 아마도 오늘날 푸코가 살아 있다면 추구했을 법한 주제들을 탐구하는 방법일 겁니다. 예컨대 오늘날 푸코라면 인공지능의 문제라든가 인류세의 문제, 또는 신냉전과 신권위주의의 문제에 대해, 그리고 플랫폼 자본주의에 대해 무어라고 생각했을까요? 만약 그라면, 이 문제들을 어떤 관점에서,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 접근했을까요?


또는 푸코가 관심을 갖고 있었지만 제대로 수행하지는 못했던 대상이나 주제를 탐구하는 방법도 있겠죠. 당장 떠오르는 주제는 생명권력같은 것이 있네요. 푸코는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같은 강의록이나 󰡔성의 역사 1󰡕 마지막 장에서 이 주제를 잠깐 다뤘지만, 그 자체로 주제화하지는 않았죠. 또는 대항품행 같은 주제들은 어떨까요? 그것도 역시 다양한 영역에서 광범위하게 탐구해볼 만한 문제가 될 겁니다.


아니면 푸코의 모순이나 비일관성 또는 한계를 밝히는 작업, 더 나아가 푸코를 다르게 사유하는 작업도 위의 방식 못지않게 훌륭한 푸코적인 연구가 될 것입니다. 푸코는 아시다시피 평생 다르게 존재하는 것, 다르게 사유하는 것을 추구해왔던 사람이었던 만큼, 푸코를 다르게 읽고 사유하는 것은 아주 탁월한 푸코적인 연구로 불릴 만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푸코와 철학자들󰡕은 푸코적인 연구의 의미 있는 사례라고 생각해도 좋지 않을까 자평해봅니다. 푸코의 철학에 대해, 푸코가 다른 철학자들과 맺는 관계에 대해, 국내의 연구든 해외의 연구든 간에, 지금까지의 연구들과 다른 식으로 생각해보려는 노력의 결실이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아마도 앞으로 이 책의 공동 필자들만이 아니라 독자들은 각자 나름대로 또 다른 푸코적인 연구의 길에 나서야 할 겁니다. 그 길에서 이 책이 믿을 만한 디딤돌이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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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 코뮤날레 2023 일정표가 나와서 올려둡니다. 


전체 일정이 상세하게 나와 있어서 참조하기 좋네요.^^ 



<2023년 제11회 맑스코뮤날레: 위기와 비판> 전체 일정 안내 - Google Docs





그리고 참가신청서도 확인해보세요~



맑스코뮤날레 2023 참가 신청 (googl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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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맑스 코뮤날레 포스터입니다. 


5월 25일 ~ 28일까지 마포, 신촌 지역 학술단체 세미나실에서 분산 개최됩니다. 


디자인이 독특하긴 한데, 가독성은 거의 무시한 듯. 


일부러 찾아오기 어렵게 하려고 이런 건 아닐 텐데, 


이렇게 꼭 디자인을 했어야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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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을 찾아서 2023-05-19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죄송합니다. 가독성에 좀 더 신경을 썼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대신에, 대회 전체 일정에 관해 보다 쉽게 확인할 수 있도록 구글문서를 별도로 만들어서 공유하고 있습니다.
프로그램 편성, 시간표, 장소 안내 등에 관해선 아래의 링크를 참조해주세요.

https://docs.google.com/document/d/1U2jndiyKmGpr04e3cmzQYErZlM6YLVKNGZs1siJfU5w/edit?usp=shar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