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이초등학교 선생님 49재에 참석하는 교사들을 해임하겠다는 정부, 교육부 징계 예고에 대한 


일반시민 의견수렴 설문조사를 진행하고 있는데, 내일까지 5만을 넘겨야 하는 데도 


아직 1만명도 달성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적극적으로 설문조사에 응해주시기 바랍니다.



https://docs.google.com/forms/d/e/1FAIpQLSdqzX_wRn_-uXhhBrwFhpVzQu8SG_6cCe9pDNEQcBAodyuz_g/viewfor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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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 70주년을 맞아 다양한 행사들이 열리고 있는데요, 


저도 두 개의 학술대회에 각각 발표자와 토론자로 참여하게 됐습니다.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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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여름 프랑스철학회 정기 학술대회 


전쟁과 철학







"평화도시 인천" 전쟁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재성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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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23-09-11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토요일 학회에서 나중에 아감벤에 관해 비판적인 의견을 개진했던 분이군요.^^
 















[황해문화]가 120호를 출간하면서 창간 30주년을 맞이하게 됐습니다. 


지난 번에 공지한 바와 같이 30주년을 기념하는 심포지엄이 7월 8일에 개최된 바 있고, 


(https://blog.aladin.co.kr/balmas/category/1980?CommunityType=MyPaper&page=2&cnt=544)


이번 호는 심포지엄 발표문과 토론을 중심으로 특집호를 내게 되었습니다. 


이번 120호 권두언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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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중재난의 시대에 정의로운 전환을 모색하며

 

1

 

[황해문화] 120호를 세상에 내놓는다한편으로는 담담하게다른 한편으로는 비상한 마음가짐으로.


담담한 마음인 것은, 50, 100, 120호가 되었든, 49, 101, 119호가 되었든 [황해문화]를 내는 우리의 마음과 자세가 특별히 다를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전 지구적 시각지역적 실천이라는 창간 이래의 초심에 입각하여 우리 사회와 아시아더 나아가 지구 전체에 걸친 핵심적인 이론적정치적문화적 쟁점들을 제기하고그에 관한 해법을 모색하는 것이 매호마다 [황해문화]가 일관되게 견지해온 태도라고 할 만한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120호를 내면서 [황해문화]비상한 각오를 다지지 않고서는 장래를 기약할 수 없는 새로운 출발점에 서게 되었다그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내재적으로 본다면 [황해문화]는 지난 20여 년 동안 편집위원회를 이끌어 왔던 김명인 편집주간을 비롯하여 김진방백원담 편집위원이 물러나고 새로운 편집위원회를 꾸려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 1993년 인천을 중심으로 한 지역 계간지로 출발했던 [황해문화]는 세 사람이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던 기간 동안 명실상부 한국의 비판적 공론장을 대표하는 잡지 중 하나로 자리 잡았고평범한 시민들과 약소자들곧 우리 사회 을()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돌이켜본다면 [황해문화]가 첫 발을 내디뎠던 1993년은 전 지구적으로그리고 국내적으로 격변의 시기였다당시는 100년 넘게 세계를 분할해온 주요 세력 중 하나였던 사회주의 체제가 몰락하고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던 시기였다또한 당시는 민주화 이행의 기쁨이 민주화 운동 내부의 분열과 패퇴수구 보수 세력의 연이은 집권에 따른 좌절감으로 퇴색하던 시기였다이런 가운데 탈냉전으로 표현되는 새로운 세계 문명의 창도는 인천을 비롯한 각 지역 시민들의 자발적이고 구체적인 실천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통찰은 지난 30여 년 동안 [황해문화]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꿋꿋하게 전진해올 수 있었던 길잡이였다.


그런가 하면 2006년 50호를 발간하면서 [황해문화]는 이제 성장도 정리도 끝난 포스트 모던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세간의 시대인식에 거슬러우리에게는 여전히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근원적 난제들을 인식하고 해결해야 할 과제가 남아 있음을 명시한 바 있다그것은 시대적인 혼돈의 와중에 섣부른 판단과 명령을 내리기보다 그 혼돈의 상황을 직시하고 그 속에 담겨 있는 불행과 고통과 갈등과 비명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 우리가 감당해야 할 책무라는 [황해문화]의 자세였다.


몇 년 전 100호 출간을 기념하여 열린 심포지엄에서 [황해문화]는 통일과 평화 사이에서 황해의 위상에 대해 질문한 바 있다이 질문은 지난 70여 년 동안 한국 사회를 질곡에 빠뜨려온 분단과 전쟁의 엄중함을 기억하면서도 섣부른 통일과 평화에 대한 기대를 경계하기 위함이었으며진정한 한반도 평화체제의 구축을 위해서는 그 주체와 장소방법에 관해 좀 더 깊이 숙고해야 함을 일깨우기 위함이었다그것은 황해라고 하는 주체’, 곧 열강들의 틈바구니에서 지난 근현대를 살아온 주변부의 작은 지역의 시민들이황해라고 하는 장소’, 곧 분단과 냉전의 경계이면서 동시에 섬과 섬항구와 항구지역과 지역을 잇는그리하여 하나의 세계와 다른 세계가 교류하고 어울리는 곳에서황해라고 하는 방법’, 곧 중앙집권적이지 않은 자율적인 변방성폐쇄적이지 않은 개방성선형적이지 않은 횡단성을 바탕으로 대안적인 통일-평화의 기획을 모색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선언이었다.

 

2

 

이제 [황해문화]는 이전의 편집위원회가 일궈놓은 성과의 무게를 실감하면서비상한 마음가짐으로 새로운 편집위원회와 함께 새로운 길을 나서게 되었다새로 합류한 장정아하남석 두 편집위원 및 앞으로 참여하게 될 다른 편집위원들과 함께 [황해문화]는 지도가 없는 미지의 정글을 탐사하는 심정으로 길을 나선다실로 전 지구적으로 사고하고 지역적으로 실천하자는 창간사의 다짐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을 확인하면서도 우리는 오늘날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볼 때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함을 새삼 절실히 깨닫게 된다그것은 이제는 너무 익숙해진 위기라는 말로는 제대로 형용하기 어려운절박하고 다중적인 재난의 먹구름이 현재와 미래의 세계를 뒤덮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이것이 우리가 120호를 내면서 비상한 각오를 다지게 된 두 번째 이유다). 지난 7월 8일 개최된 [황해문화]120호 기념 심포지엄은 이런 측면에서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기 위한 발판을 놓는 작업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이번 120호 특집의 근간을 이루는 심포지엄은 다중재난과 정의로운 전환이라는 두 개의 핵심어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작년부터 언론과 정치권에서는 복합위기라는 말이 자주 거론된 바 있다. 2022년 초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시작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여파로 에너지와 농산물 가격이 폭등하면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게 되었고이를 잡기 위해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급격하게 금리 인상을 함에 따라 각국 중앙은행도 연쇄적인 금리인상 대열에 합류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 결과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전 세계적인 경기 침체의 가능성이 높아졌으며여기에 더해 환율 인상금융 불안정부동산 가격 하락가계부채 문제 등과 같은 다면적인 위험 요인들이 누적되고 있다는 것이 이른바 복합위기론의 실체라고 할 수 있다.

복합위기로 표현되는 이 문제들이 한국 경제와 사회에 적지 않은 부담과 어려움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하지만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의 표현을 빌리면 이것은 치안’(police)의 관점에서 이해된 위기일 뿐이다치안에게는 기존 지배 질서의 안정적인 재생산과 지배 계급의 이익 보장이 최고의 목표이기 때문에이를 위협하는 요인들은 모두 무차별적으로 위기라는 이름으로 불린다치안에게는 인플레이션이나 금융 불안정도 위기이지만 민주화 시위도 위기이고 세월호 참사나 이태원 참사도 위기다지배 계급과 정권은 기존의 질서를 정상적인’ 것으로 규범화하고이 질서를 훼손하거나 동요시키는 것은 어떻게 해서든 탄압하거나 배제함으로써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하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치안이 위기라고 부르는 것들이 많은 경우 진정한 위기들을 은폐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실제로 언론과 정치권에서 복합위기라고 부르는 것에는 인류세(anthropocene) 내지 자본세(capitalocene)라는 명칭으로 표현되는 생태적 재난이나 3년여의 시간 동안 진행되어 온 코로나 팬데믹과 같은 보건 재난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서로 맞물려 있는 이러한 생태적보건적 재난은 인류 문명의 토대 자체를 잠식하는 문명적 위기이며 민중의 삶에 심각한 피해를 낳을 수밖에 없지만복합위기론에서 이 문제는 방치되거나 배제되고 있다코로나 팬데믹은 이미 지나간 사건으로 치부되고 있으며기후위기는 기만적인 탄소중립 녹색성장이라는 이름 아래 새로운 자본 축적의 구실로 전락하고 있다또한 신자유주의 세계화 이래 전 지구적으로 심화되고 있는 사회적 불평등이나 세월호 참사 및 이태원 참사로 대표되는 사회적 재난들과 더불어비정규직 노동자들여성과 성적 소수자들장애인들이주자탈북민난민 등과 같은 사회적 약소자들이 직장에서일상에서 직면해 있는 불안전 재난도 고려 대상이 되지 못한다오히려 여성가족부 해체나 노동조합 회계 감사’ 또는 관제 애도’ 같은 에피소드에서 보듯 현 정권은 약소자들을 탄압하거나 배제하는 데 골몰하고 있을 뿐이다그 사이에 하루가 멀다 하고 일터에서 학교에서 길거리에서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급격하게 재편되고 있는 전 세계적인 지정학적 변동과 그것이 특히 동아시아의 정세에 미칠 파장 역시 제대로 고려되지 못하고 있다대개 신냉전으로 명명되고 있는 이러한 재편은 군사적정치적경제적 질서의 전환 흐름 속에서 동아시아에서는 한미일 대 북중러 사이의 대결구도로 가시화되고 있는데현 정권이 시대착오적인 냉전 반공주의에 불과한 가치 동맹의 기치 아래 전개하고 있는 외교안보 정책은 이러한 대결을 조장강화하고 있어서 군사적 긴장만이 아니라 정치적경제적 불안정을 심화시킬 것으로 예상된다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의 전망은 점차 멀어지고 적대적인 대결 구도가 권위주의적 통치를 정당화하고 이는 다시 민중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악순환의 경로가 고착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이러한 재난들의 중심에는낸시 프레이저가 말하듯 식인 자본주의가 놓여 있는 것이 아닌지 질문을 제기해볼 수 있다오늘날의 식인 자본주의는 착취에 기반을 둔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할 뿐만 아니라 제국적 생활양식이라는 개념으로 표현될 수 있는글로벌 남반구와 북반구 사이의 인종적 수탈 및 구조적 불평등의 간극을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다이는 자연 생태계의 파괴를 산출함으로써 문명의 기초를 잠식하고인공지능 기술의 획기적인 발전에 입각하여 대중들의 자발적이고 창의적인 활동을 이용함으로써 오히려 대중들의 사고와 감정행동에 대한 정밀한 통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비판적 인문사회과학에서 주목해야 하는 진정한 위기는 치안이 명명하는 복합위기가 아니라 그것이 은폐하고 배제하는 다중적 재난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문제는 이러한 재난들이 누구에게나 명백하게 드러나는 경험적이고 실증적인 사실들이 아니라는 점이다그것들을 서로 연결된 다중적 재난들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그것들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겪어야 하는 민중들곧 을()들의 관점에서 문제를 이해하고 사고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그것은 지배 세력이 복합위기나 탄소중립 녹색성장과 같은 기만적인 프레임을 통해 다중재난의 현실을 직시하는 대신 그것을 오히려 새로운 이윤 획득의 기회로 삼고자 하기 때문에필연적으로 대안적 프레임의 개발을 비롯한 인식론적 투쟁이 수반되어야 하는 과제다.


우리가 다중재난과 더불어 정의로운 전환이라는 또 다른 핵심어에 주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정의로운 전환은다중재난을 몸으로 겪으면서 그것에 맞서고 있는 민중의 관점에서 이러한 재난들을 인식하고 그것들을 진보적으로 전환하기 위한 다중적이고 다면적인 노력의 방향을 지칭하는 포괄적인 명칭이다.


정의로운 전환을 위해 우리는 먼저 돌봄에 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돌봄은 흔히 생각하듯이 어린아이나 노인 또는 환자나 장애인에게만 필요한 서비스 활동이 아니라우리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핵심 활동이며 더 나아가 자연 생태계의 약탈적인 파괴를 저지하기 위해서도 필수적인 활동이다우리들이 각자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개인으로서 사회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누군가의 돌봄이 필요하며또한 다른 누군가의 삶을 지속적으로 돌봐야 한다그것이 생태적사회적 연관망 속에 존재하는 관계적 존재로서 인간의 본성이다따라서 자기 자신과 다른 누군가의 삶을 돌보고 돌봄을 받는 것은 모든 시민의 의무이자 각자가 누려야 할 권리이며 필수적인 삶의 조건이다.


자연과 인간주체와 객체생명과 비생명공공성과 사유성국민 대 비국민남성과 여성정상인 대 비정상인 등과 같이 대립적이고 경쟁적인 범주들에 의거하여 자연 생태계를 파괴하고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있는 자본주의 문명을 전환하기 위해 돌봄 개념은 우리에게 어떤 길을 제시해줄 수 있을까생태적보건적 재난과 불안전 재난, ‘신냉전의 전개디지털 자본주의의 심화는 사회의 공동 이익 및 인류의 공동 생존을 추구해야 할 집합적인 정치적 주체를 해체하여 그들을 서로 상이한 이익 추구를 위해 끝없이 경쟁하는 신자유주의적인 행위자들로 변모시키고 있다더욱이 트럼프 시기의 미국에서러시아와 동유럽중남미에서 그리고 동아시아에서 부상하고 있는 신권위주의 통치는 강자들의 이익을 옹호하기 위해 을들 간의 적대적 갈등을 조장하는 포퓰리즘 정치를 활용하여 약소자 시민들의 권리를 짓밟고 외면함으로써 민주주의 공동체의 기초를 파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따라서 우리는오늘날 을들 간의민중 간의 새로운 연대가 어떻게 가능할까라는 질문을 던져보지 않을 수 없다.


비록 우리가 모든 문제는 결국 자본주의로 귀착된다는 본질주의적이고 환원주의적인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해도이러한 질문들을 자본주의에 관한 질문과 연결하지 않을 수 없다현실 사회주의 체제가 해체된 이후 자본주의는 유일하게 가능한 현실적 사회경제 체제로 존립해 왔고 정당화되어 왔다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다중 재난이 직간접적으로 자본주의의 비이성적인 광기와 연결되어 있다면정의로운 전환의 시도는 자본주의 이후라는 문제자본주의를 넘어서라는 문제와 분리될 수 없다이전의 사회주의의 시도가 실패로 귀결된 이후오늘날 우리는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들을 어떻게 사고하고 실천해볼 수 있을까어떻게 지금까지 제시되었던 자본주의의 대안들에 대한 새로운 대안들을 모색할 수 있을까자본주의보다 더 나은더 평등하고 정의로운 세계 문명을 구성할 수 있는 길을 우리는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3

 

120호 심포지엄에서는 퇴임하는 편집위원들을 대신하여 백원담 선생이 기조강연을 한 뒤, 6명의 발표자와 4명의 토론자가 참여하여 이 질문들에 관한 흥미롭고 유익한 논의를 전개한 바 있다. 1부에서는 홍덕화 선생이 기후위기에 관해백승욱 선생이 전쟁과 폭력에 관해김관욱 선생은 디지털 자본주의와 노동에 관해 발표했고김현우 선생과 한상원 선생이 세 발표에 대한 토론을 맡았다. 2부에서는 김정희원 선생이 돌봄정치에 대해장석준 선생이 자본주의 너머에 대해김선철 선생이 기후정의운동에 대해 발표했고이승윤 선생과 이승원 선생이 이 발표들에 대해 토론해주었다아울러 심포지엄 마지막 순서로 발표자와 토론자가 한 자리에서 모여 1부와 2부에서 발표되고 논의되었던 주제들에 관해 다시 한 번 난상토론의 시간을 가진 바 있다백원담 선생의 기조강연과 6개의 발표가 이 특집호의 중심 내용을 이루고 있으며, 12부의 토론 및 종합토론 내용을 정리하여 별도의 꼭지로 구성했기 때문에독자들은 심포지엄 당시의 생생한 토론을 충분히 음미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백원담 선생의 기조강연 및 6개 발표의 구체적 내용과 그에 관한 토론은 박자영 선생이 심포지엄 지상중계에서 면밀하고 간명하게 제시해주고 있기 때문에여기에서는 그 내용을 굳이 다시 한 번 요약하지 않겠다다만 각각의 발표 및 토론을 들으면서 내가 느꼈던 몇 가지 생각을 정리하면서 앞으로 [황해문화]의 방향을 모색하기 위한 화두를 제시해보고자 한다.


첫째오늘날 [황해문화]를 비롯한 한국의 비판적 인문사회과학 매체들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모순들에 관한 논의는 물론이거니와 그것보다 좀 더 토대적인 수준에서 제기되는 질문들을 정면으로 다루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기후위기와 코로나 팬데믹GPT로 대표되는 생성형 인공지능(AI)의 등장과 같은 사건은 분명 계급적인종적젠더적인 쟁점들과 결부되어 있되그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독자적인 기초와 특성을 지닌 사건들이다그것은 한편으로 행성으로서 지구 시스템의 물리화학적 특성 및 그 효과에 대한 고찰을 요청하며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생물학적이면서 기술적인 본성에 대한 좀 더 면밀하고 심층적인 토론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것을 자연과학의 고유한 탐구대상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인류세라는 개념이 보여주듯지구의 물리화학적 시스템에 미친 인류의 행위성(agency)의 충격이 다시 인류 문명의 토대 자체에 파국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 오늘날의 시점에서 이 사건들에 대한 고찰을 자연과학자들에게만 미뤄두는 것은인문사회과학자들로서만이 아니라 시민으로서도 직무유기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더욱이 빅테크 기업들과 거대 제약(big Pharma) 기업들을 비롯한 초국적 자본과 지배 세력이 미증유의 다중재난을 새로운 자본 축적과 세력 강화의 계기로 삼고 있으며이는 역으로 재난을 한층 더 악화시키는 악순환을 유발한다는 점을 고려하면이 문제에 대한 비판적 숙고의 필요성은 더욱 증대하고 있다하지만 이런 문제들에 대한 토론은 소수의 전문 분야 연구자들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아직 한국의 비판적 공론장의 중심 의제로 제기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돌이켜보면 [황해문화]를 비롯한 한국의 비판적 매체들은 지난 30여 년 동안 근대 완성과 근대 극복이라는이른바 이중 과제론에 긴박되어온 감이 없지 않다탈냉전과 민주화의 동시적인 전개라는 비상한 역사적 정세에서 이중 과제론이 나름대로 의미 있는 역할을 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우리는 오늘날 그것이 지닌 인식론적역사적 한계를 절감하게 된다이중 과제론은 한편으로는 근대라고 하는 보편적이고 단일한 본질이 존재한다는 가정에 입각해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각각 민족 통일과 자본주의 극복이라는 또 다른 이원적 본질로 환원하고 있다여기에는 근대를 이해하는 본질주의적 관점에 더하여 민족주의적인 가정이 뿌리 깊게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따라서 그것은 이미 탈냉전과 신자유주의 세계화 정세를 사고하고 그것에 대처하기 위한 인식론적 틀로서도 역부족이었을 뿐더러 오늘날의 시점에서는 더 이상 준거하기 어려운 낡은 담론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 직면하고 있는 다중재난의 엄혹한 현실에 관해 우리가 무언가 확고한 개념적 기반을 갖추고 있는 것은 아니다아니 오히려 오늘날의 상황은 일차적으로 우리가 모종의 확고한 토대나 기반에 집착하는 태도를 버리고좀 더 급진적으로 탈구축적인 자세를 취할 것을 요구한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사회경제적이거나 문화적인 인프라만이 아니라우리가 항상 이미 거기에 불변적으로 존재한다고 믿었으며따라서 우리의 삶과 사고의 근본적 조건이면서도 우리에게는 비사고(非思考)의 영역에 머물러 있던 지구 시스템이라는 물리화학적지질학적 인프라의 변동 내지 와해가 목전에 다가온 상황에서아울러 오랫동안 인간의 배타적 특성을 나타낸다고 믿었던 인지 능력을 넘어서는 범용 인공지능의 (자본주의적이고 파시즘적인실현과 활용이 가능해진 상황에서실체와 사물주체와 객체자연과 문명인간과 비인간생명과 무생명 같은 전통적인 사유 범주들에 무비판적으로 의탁하는 것은 갈수록 어려워질 것이며더욱 더 무책임한 일이 될 것이다.


사실 [황해문화]는 몇 년 전부터 ‘21세기 인간의 조건이라는 연속 기획을 통해 불안전한 세계안전에 대한 욕망”(110), “디지털 자본주의 시대의 노동”(112), “기후위기 시대정의로운 전환은 가능한가”(114), “전쟁폭력평화”(117같은 주제들을 다룬 적이 있지만우리가 당면한 다중재난이라는 문제에 충실히 대응하기 위해서는 더욱 적극적인 분석과 고찰이 수행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둘째더 나아가 앞으로 [황해문화]에서는 다중재난으로 고통 받으면서도 거기에 창발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을들의 생동적인 현실을 분석하는 작업이 좀 더 구체적이고 다면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예컨대 97호와 101호 등에서 페미니즘과 젠더에 관한 특집을 구성한 바 있지만미투운동 이후 활발히 전개된 대중적 페미니즘을 억압하고 되돌리려는 거대한 반()페미니즘의 흐름 속에서 고통 받는 여성들과 성소수자들의 상황을 고려하면앞으로 [황해문화]의 페미니즘적인 지향을 더 뚜렷하게 드러내야 하리라고 본다.


아울러 부끄러운 사실이지만지금까지 [황해문화]에서는 장애인 차별의 현실에 맞서 분투하는 장애인운동의 중요성에 관해 제대로 고려하지 못했다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선도적인 투쟁 아래 장애인운동과 비판 장애학 연구는 지난 20여 년 동안 한국 사회운동 및 비판적 인문사회과학의 주요 부문으로 성장하면서 장애인들의 인권과 복지 향상에 기여하고 장애 개념에 대한 새로운 고찰을 통해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인식론적사회적 구별의 허구성을 드러내는 데 크게 공헌해왔다이러한 작업은 단지 장애인들에 대해서만 의미가 있고 중요한 것이 아니라인간의 관계론적 본성과 사회의 토대를 형성하는 돌봄 연관망의 존재를 일깨움으로써 민주주의 공동체의 존재론적인간학적 기초가 무엇인지 성찰하게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한 작업이다앞으로 장애인운동에 관한 인식과 토론은 다중재난을 정의롭게 전환하기 위한 기획에서도 중심적인 위상을 부여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지방지역이라는 문제를 다시 한 번 제기해볼 필요가 있다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본래 [황해문화]는 인천 지역을 중심으로 한 지역 문화 계간지로 출발했으며오늘의 시점에서도 인천은 [황해문화]의 뿌리이자 원천 같은 위상을 지니고 있다그만큼 지역과 지방의 문제는 [황해문화]에게는 늘 중심적인 의제로 존재해왔다그런데 인천도 사정이 다르지 않겠지만오늘날 한국에서 서울 내지 수도권과 지방의 관계는 더 이상 격차라는 말로 표현하기 어렵고 오히려 서울에 의한 전 지방의 식민화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다중적인 모순이 착종된 관계로 변모하고 있다우리나라의 정치경제문화적 인프라와 권력이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으로 집중된 상황에서 지방은 자율적인 생존의 능력을 상실한 채수도권의 끊임없는 확장과 축적 운동의 착취와 수탈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다실로 오늘날 지방은 고령화와 소멸의 위협 속에서 각종 군사 시설과 핵 폐기물을 비롯한 수도권의 폐기물 투기 지역이 되고 있으며이주노동자 및 여성과 성적 소수자들과 같은 사회적 약소자들의 인권과 생존권이 서울 및 수도권에 비해 훨씬 더 취약한 상태로 방치되고 있는 장소라고 할 수 있다더욱이 생존을 위한 지역 주민들의 요청은 지역 토호 세력과 권력자본의 결탁 아래 무분별한 난개발의 범람으로 왜곡변질되고 있는 상황이다얼마 전 국제적인 망신의 대상이 된 새만금 잼버리 대회의 기원에 이런 모순이 자리 잡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그렇다면 당연히 지방이야말로 오늘날 다중재난이 더욱 가혹하고 집약적으로 누적되는 장소이며앞으로도 더욱 더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다중재난의 이 구체적인 장소들에 대한 면밀한 고찰을 외면한 채 우리가 정의로운 전환을 실제로 모색할 수 있을까?


또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라는 문제더 분명히 말하자면 동물 타자의 문제에 앞으로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는 것도 [황해문화]가 역점을 두어야 할 과제 중 하나다페미니즘과 젠더의 문제가 됐든 장애인 문제가 됐든 아니면 지방의 문제가 됐든 간에이 문제들은 모두 인간을 중심으로 한 문제다이러한 인간에 대한 지배와 착취의 문제는 예리하게 발휘되는 비판적인 지식인전문가들의 지성이 비인간 타자에 관한 문제에는 둔감한 경우가 적지 않다하지만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다중재난의 현실 및 그 원인에는 비인간 타자들에 대한 착취와 수탈지배라는 문제가 놓여 있으며엄청난 생물종들이 파괴되고 육식 산업은 번창하는 와중에 반려동물 산업 역시 성장하는 모순적인 현실이야말로 비인간 타자와의 관계라는 문제의 중요성을 단적으로 입증해준다.


셋째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토론이 소수의 전문가 지식인들만의 논의로 국한되지 않고 대중적인 힘으로 전환되기 위해서는앞으로 [황해문화]가 더욱 더 대중의 시선에서그것도 을들의 시선에서 문제를 전달하고 논의하는 장이 되어야 하리라는 또 다른 요구를 간과할 수 없다이러한 두 가지 과제가 얼마간 길항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는 점을 무시할 수 없지만그것은 [황해문화]와 같은 잡지라면 마땅히 감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막강한 권력과 조직력매체력과 자금력을 갖춘 지배 세력에 비해 여러 모로 자원이 부족하다는 핑계로 이러한 과제를 외면할 수는 없다앞으로 다양한 방식과 접근법을 통해 대중들과 더 자주 대면하면서 대중들의 창의적인 비평과 발상의 목소리를 더 많이 실으려는 노력이 절실히 요구된다.


이러한 과제는 동시에 [황해문화]가 앞으로 견지하고 발전시켜야 할 매체성의 방향은 어떤 것인가 하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지금까지 [황해문화]가 매체로서 이룩한 성과는 분명 주목할 만하고 보람을 느낄 만한 것이기는 하지만우리가 직면한 시대적인 과제는 매체의 내용과 더불어 매체의 물질적 성격 자체에 대해서도 재점검해볼 것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종이 잡지로서의 위상을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디지털 매체로서의 성격을 확장하고 강화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고민해봐야 할 시점이다.

 

4

 

[황해문화] 30주년을 축하하고 격려하기 위해또한 자만과 나태를 경계하기 위해 여러 분이 귀중한 메시지를 전달해주었다중국 칭화대의 왕후이 교수와 타이완 쟈오룽대학의 천광싱 교수는 [황해문화]가 지속적으로 한국과 동아시아의 비판적 공론장에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해나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는 희망을 보내주었다. [창작과 비평]의 이남주 주간과 [문화과학]의 이동연 전 주간은 한국의 비판적 공론장을 형성하는 동지적인 관점에서 뜻깊은 격려와 따끔한 조언을 전해주고 있다이남주 선생은 30년이라는 시간적 단위의 결절적인 성격을 확인하면서 [황해문화]가 지난 30년의 성취에 대해 자부심을 갖되앞으로의 30년을 기약하면서 이제는 좀 더 적극적으로동아시아의 협력과 상생공영을 위협하는 최근의 시대적 변화 속에서 새로운 사유를 촉발할 수 있는 담론을 개발하고 이를 바탕으로 지역이 세계를 변화시키는 주체적 사유 단위이자 실천 단위가 될 수 있도록” 매진해줄 것을 주문하고 있다또한 이동연 선생은 계간지로서 [황해문화]를 [창작과 비평]과 [문화과학]의 중간에 위치시키면서 장소사람사건이라는 세 가지 지표에 따라 그 특성을 해명하고 있다선생은 그러면서 [황해문화]가 이러한 독특성을 계속 견지하면서도 지금까지의 거시적 분석 중심에서 벗어나 소수자적 정체성과 라이프스타일 분석사회적 사건에 대한 미시적인 분석을 보완하고 아울러 인천 또는 서해안한반도가 앞으로 정치기술생태문화의 교합으로 발생할 수 있는 생태-기술-문화의 미래 토픽들을 적극적으로 개발해줄 것을 주문하고 있다. [황해문화]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에서 우러나는 두 분의 진심 어린 조언들을 유념하고 구체화할 것을 약속드린다.


[황해문화]의 독자인 이희영 선생의 메시지도 특별히 언급해두고 싶다선생은 [황해문화]가 그동안 이룬 성과를 상찬하면서 특히 독자들에게 세상을 읽는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는 점에 대해 고마움을 표시하고 있다그러면서도 [황해문화]가 앞으로 이론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좁히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한다고 충고하고 있다그것은 한편으로 젊은 세대를 비롯한 평범한 시민들이 좀 더 접근하기 쉬운 매체가 되어 달라는 요구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진심은 있으나 당사자성이 부재한 민중선언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충고이기도 하다그것은 [황해문화]가 어떻게 담론적으로만이 아니라 매체적으로물질적으로 민중의 당사자성을 체현할 수 있을지 고민하게 만드는 아주 서늘한 요청이다.

 

5

 

이번 호는 특집호인 관계로 비평과 문화비평” 꼭지는 쉬어간다애독자들의 양해를 부탁드린다다만 문학과 서평에서는 여전히 좋은 글들이 독자들의 높은 안목을 만족시켜 줄 것이다구로와 청계천을 배경으로 80년대 노동운동의 기억을 오늘의 시점과 교차하여 풀어나가는 김남일 작가의 소설과 문명과 역사정치철학문학을 넘나드는 김정환 시인의 시와 더불어 이세기 시인과 연여름 시인의 시는 문학을 사랑하는 [황해문화] 독자들에게 청량한 읽을거리를 제공해줄 것이다아울러 이번 호 황해문화 창작공모제에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작품이 응모하였을 뿐만 아니라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작품 수준이 뛰어났다고 한다.


다른 한편으로 주제서평과 서평에서는 여느 호와 마찬가지로 주목할 만한 저작들에 대한 유익한 논의다우동현 선생은 얼마 전 국내외에서 큰 논쟁의 대상이 되었던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의 방사능 오염수 방류 문제를 배경으로 핵 폐기물 투기의 역사를 조망한 세 권의 책을 소개하고 있다선생은 1944년 처음 시작된 핵 폐기물 투기는 일관되게 핵 재난 속에서 이익만을 추출하고 그 비용은 사회와 자연에 전가해온 권력과 자본과학의 결탁의 역사였음을 지적하고 있다다중재난을 주제로 한 이번 특집호의 기획의도와 잘 부합하는 서평이 아닐 수 없다또한 박영균 선생은 신유물론에 관한 박준영 선생의 저작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사회적 관계의 유물론에 더 관심을 기울일 것을 조언하고 있으며구정은 선생은 구기은 선생을 비롯한 11명의 신진 중동학 연구자들이 공동으로 지은 노작의 중요성을 꼼꼼하게 설명하면서 이슬람과 민주주의라는 문제에 대해서도 이만한 저작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을 피력하고 있다주윤정 선생은 나날이 확정되어가는 한국 인권운동의 역사를 새로운 관점에서 정리한 정정훈 선생의 저서 [인권의 전선들] 서평에서 한국 인권운동에 대한 풍부한 시각을 보여주는 동시에 보다 다양한 인권의 전선들을 형성하기 위해 우리 역사 안에 내재되어 있는 인간의 권리운동의 역사도 함께 살펴봐줄 것을 당부한다그런가 하면 김도민 선생은 백지운 선생의 항미원조에 관한 저작을 공공역사의 관점에서 세심하고 균형 있게 평가하고 있다좋은 서평은 그 자체가 독자적인 텍스트라는 점을 실감하게 해주는 서평들이 아닐 수 없다.


얼마 전 작고한 한국 민족사학의 거장인 강만길 선생에 관한 추모글을 제자인 정병욱 선생이 보내왔다선생은 강만길 사학의 업적을 분단시대라는 개념을 창안한 것과 민중의 생활사 연구를 개척한 것으로 꼽으면서스승을 추종하는 것이 아니라 넘어서는 것에 강만길 사학의 핵심이 놓여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번 호에서 독자들이 놓쳐서는 안 될 김명인 선생의 글에 관해 몇 마디 언급해두고자 한다전향한 남조선노동당원 김수영을 위하여라는 얼마간 도발적인 제목을 달고 있는 이 글은 최근에 발굴된 김수영 시인의 1949년 일간신문 게재 탈당성명서에서 출발하여 김수영의 생애와 문학 전반을 재고찰하려는 주목할 만한 비평의 시도다김수영의 탈당성명서는 제대로 발견하기도판독하기도 어려운 신문 광고란의 불과 몇 줄짜리 조각글에 불과하지만선생은 이것을 기반으로 김수영 문학 저변에 깔려 있는 사회주의의 이상에 대한 열망을 재구성하면서 더 나아가 김수영의 문학을 비롯한 한국 근현대문학은 검열과 강제전향의 굴레 아래에서 문학의 본령을 지키기 위한 힘겨운 싸움의 장이었음을 밝혀내고 있다앞으로 선생의 이 글에 대해서는 김수영 문학의 재평가라는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한국 근현대문학의 성격에 관한 재고찰이라는 측면에서도 많은 토론이 뒤따라야 마땅하리라 생각한다투병의 와중에 이런 문제작을 발표한 선생의 지성과 용기에 경의를 표하며부디 빠른 시일 내에 완치될 수 있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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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과학] 가을호에 실릴 글 한 편 올립니다. 


이 글은 지난 4월 4월 15일 이 글은 2023415일 장애인 권리예산 투쟁에 연대하는 마포-신촌 학술단체 모임 학술 토론회에서 발표한 강연문을 다소 수정보완한 것입니다. 이 글은 강연의 생생한 현장성을 살리기 위해 경어체 표현을 그대로 살렸는데요, 사실 이런 글쓰기는 [문화과학]의 편집 원칙과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기꺼이 원고를 받아준 [문화과학] 편집위원회의 후의에 깊이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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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량으로서의 장애, 관계로서의 돌봄

 

 

머리말

 

우선 발표에 앞서서 오늘 이 자리를 가능하게 해준 두 분께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지난 20여 년 동안 장애인 차별 철폐를 위해 앞장서 온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으로 약칭)의 헌신적 투쟁 덕분에 저는 조금이나마 우리나라 장애인 차별의 문제에 대해, 그들의 고통에 대해, 그들의 열망과 투쟁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장애인 차별과 억압에서 드러나는 국가권력의 폭압성에 대해, 사회적 차별과 배제의 뿌리 깊음이 오늘날 민주주의의 위기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따라서 그것을 철폐하기 위한 투쟁이 우리 시대 민주주의적 실천의 본질을 이룬다는 데 대해 얼마간이나마 깨닫게 된 것 역시 전장연의 투쟁 덕분입니다. 따라서 전장연의 투쟁을 이끌어온 박경석 공동대표님께 이러한 각성의 기회를 주신 데 대해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또한 김도현 선생님께도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도현 선생님은 저와 같이 장애인 운동 바깥에 있고 또한 장애학 운동 바깥에 있는 이들에게는 장애인 운동과 장애학이 무엇인지 가르쳐주는 귀중한 길잡이가 되어 왔습니다. 오늘날 한국에서 비판적 장애학이 단지 당사자들로서의 장애인들만이 아니라 비장애인들의 광범위한 관심사가 되고, 장애인들과 비장애인들 사이의 연대와 횡단의 정치를 모색하는 데 준거 역할을 하게 된 것은, 많은 부분 김도현 선생의 부단한 노력 덕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선생이 제도권 학계 바깥에서, 장애인 운동의 유기적 지식인으로서 이런 성과를 일궈왔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것은 단지 제도권 내의 장애학만이 아니라 오늘날 한국의 제도권 인문사회과학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주는 증상으로서 기능하고 있습니다.


제가 오늘 이 자리에서 몇 마디 해보려는 것이 두 분을 비롯한 전장연 활동가들 및 비판적 장애학 연구자들의 가르침에 얼마나 부응하는 것일지 알 수 없습니다. 사실 제가 과연 오늘 학술대회의 기조강연자로서 적절한지, 그럴 만한 자격과 역량을 지니고 있는지에 관해 아마 많은 분들이 의아해하실 듯합니다. 저 역시도 과연 제가 저에게 부과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지 저 자신이 별로 미덥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오늘 여러분에게 몇 마디 전해보고자 이 자리에 서게 된 것은, 제가 이 자리에 함께 하고 있는 마포-신촌 학술단체 모임의 동료들에게 전장연의 지하철 탑승 투쟁에 관해 무언가 지지와 연대를 표시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던 첫 번째 발언자였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그 제안을 여러 동료들이 흔쾌히 받아주었고, 뜻을 함께 하는 연구자들이 속속 참여하게 되어 '장애인 권리예산투쟁에 함께 하는 마포-신촌 지역 학술단체 모임'이 결성되었습니다. 저희는 먼저 일간지에 전장연의 지하철탑승투쟁 및 권리예산투쟁에 대한 저희의 지지와 연대의 뜻이 담긴 공동 선언문을 게재하기로 하고 모금 및 지지 서명 활동을 전개했고, 그 연장선상에서 오늘 학술대회를 기획하고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오늘 제가 첫 번째로 발표를 하게 된 것은, 그것이 이 모임의 최초 제안자로서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 마땅히 감당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책무를 제가 어느 정도나 수행한 것이 될지는 여러분의 판단에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보편을 정의하는 역량으로서의 해방

 

보시는 바와 같이 오늘 학술대회의 전체 주제는 역량(capability)으로서의 장애입니다. 그리고 오늘 제 발표의 핵심 주제 중 하나 역시 역량입니다. 제가 발표문의 제목을 생각하면서, 아니 그 전에 마포-신촌 지역 학술단체 모임의 공동 성명서 초안을 만들면서 역량이라는 말을 떠올렸을 때 염두에 두었던 것은 일차적으로 존 맥나이트의 다음과 같은 말이었습니다. “문제로 정의된 사람들이 그 문제를 다시 정의할 수 있는 힘을 가질 때 혁명은 시작된다.” 김도현 선생의 {장애학의 도전}을 읽은 이들이라면, 본문 맨 앞에 제사(題詞)로 인용되어 있는 이 문구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을 것입니다.[김도현, 󰡔장애학의 도전󰡕, 오월의봄, 2009.] 2017420장애인차별철폐투쟁의 캐치프레이즈였던 이 문구는 어떤 의미에서 장애가 역량인지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역량이란, “문제로 정의된 사람들이 그 문제를 다시 정의할 수 있는 힘을 뜻합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가 {불화: 정치와 철학}에서 민주주의의 본질을 몫 없는 이들의 몫으로 정의하면서, “몫 없는 이들의 몫의 설립에 의해 지배의 자연적 질서가 중단될 때 정치가 존재한다”[자크 랑시에르, {불화: 정치와 철학}, 진태원 옮김, 도서출판 길, 2015, 39.]고 말하면서 염두에 둔 것도 이러한 통찰과 다르지 않습니다.


맥나이트의 정의는 우리에게 몇 가지 점에 관해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볼 기회를 제시해줍니다. 우선 철학적으로 본다면 그것은 보편성이라는 것이 자연적으로 주어져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더욱이 보편성의 사회적 구성은 조화롭게, 아무런 갈등이나 다툼도 없이 누구나 모두 인정할 수 있는 중립적인 기준이나 절차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갈등적이고 심지어 폭력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보편성은 그것의 성립 조건으로서 적대와 폭력을 함축합니다. 새롭고 진정한 보편성이란, 아무런 문제가 존재하지 않았던 곳에서 문제가 드러날 때, 지금까지 문제로 여겨지지 않았던 것이 문제로 출현할 때 시작됩니다. 곧 지금까지 누군가에 의해 문젯거리로 여겨졌던 이들, 다른 이들과 평등한 이들로 간주되지 않고 무언가 부족하거나 비정상적인 이들로 여겨지고, 차별과 종속의 대상이거나 배제의 대상으로 간주되었던 이들이, 이런 취급은 부당하다고, 나 또는 우리는 비정상적인 것도 열등한 것도 아니며 차별과 종속의 대상이 되어 마땅한 것도 아니라고 주장하고 나설 때 진정한 보편성이 등장하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편성은 본질상 적대를 함축합니다. 기성의 보편성의 허구성과 지배적 본성을 드러내면서 상징적인 질서를 깨뜨리는 적대적 행위가 보편성의 한 가지 척도를 이룹니다.


랑시에르는 {불화}에서 이점에 관해 몇 가지 사례를 제시한 바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나 로마에서 진정한 인간, 진정한 시민이란 오직 귀족들뿐이었습니다. 그들만이 일을 하지 않아도 될 만한 재산(여기에는 노예들이 포함됩니다)을 지니고 있었고, 일을 하는 대신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자원과 기회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평민들은 형식적인 자유를 지니고 있긴 했지만, 먹고살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노동을 수행해야 했고, 정치적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자원과 여유를 지니지 못했기 때문에 진정한 시민으로도, 진정한 인간으로도 대우받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고대 그리스나 로마에서 자유는 불평등했으며, 귀족들만이 실질적인 자유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자유는 불평등의 조건 속에서 향유되었습니다. 그리스나 로마의 평민들이 여기에 맞서 자유는 불평등의 표현이 아니라 오히려 평등의 징표를 나타낸다고 주장하고 나섰을 때, 자유로운 이들은 평등을 누릴 자격이 있으며, 역으로 평등을 유지할 수 있는 조건이 충족될 경우에만 자유는 현실적으로 향유될 수 있다고 주장했을 때, 비로소 자유는 평등의 다른 표현이 될 수 있었으며, 만인의 평등한 자유를 위한 정치로서 민주주의가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인간과 시민에 대한 보편적 정의를 새롭게 수립한 해방의 사건이었습니다.


19세기 유럽에서는 프롤레타리아, 곧 자기 자신과 자식들 이외에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한 무산자 계급이 부르주아 계급에 맞서 자신들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평등한 인간이고 평등한 시민이라고 주장하고 나섬으로써 다시 한 번 민주주의가 새롭게 구현되고 확장되었습니다. 랑시에르는 이것을 평등의 3단논법이라고 표현한 바 있습니다.

 

삼단논법의 대전제는 간단하다. 1830년에 막 공포된 헌장 전문에는 모든 프랑스인이 법 앞에 평등하다고 적혀 있다. 이 평등이 삼단논법의 대전제가 된다. 삼단논법의 소전제는 즉각적인 경험에서 이끌어 온 것이다. 예를 들어 1833년에 파리의 재단사들은 양복점 주인들이 급료, 노동 시간, 일부 노동 조건들에 대한 자신들의 요구에 응답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파업을 시작했다. 따라서 삼단논법의 소전제는 대략 다음과 같이 전개될 것이다. 그렇지만 양복점 주인 슈바르츠 씨는 우리의 근거들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실 그에게 급료를 재검토해야 할 근거들을 제시하고 있다. 이 근거들을 그는 검증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그것들을 검증하기를 거부한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를 평등한 자들로 대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그는 헌장에 기입된 평등에 위배된다. [자크 랑시에르,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양창렬 옮김, 도서출판 길, 2014, 89.]

 

해방의 삼단논법이 구성되려면 먼저 대전제가 성립해야 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삼단논법에서는 모든 프랑스인이 법 앞에 평등하다는 전제, 곧 보편적인 평등 전제가 헌법에 기입되어 있다는 사실이 본질적인 중요성을 얻게 됩니다(그리고 이러한 기입 자체가 투쟁의 성과입니다). 마르크스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그 헌법에서 내세우는 평등의 원리란 부르주아 계급과 프롤레타리아 계급 사이에 실제로 존재하는 계급적 불평등을 은폐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고 고발한 바 있지만, 랑시에르가 볼 때 이는 19세기의 노동자들이 실제로 생각하고 실천했던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위의 인용문이 보여주듯이 당시의 노동자들은 부르주아 국가가 스스로 내세운 보편적 평등의 원리를 대전제로 삼아 그것을 위반하는 부르주아 주인의 행태(소전제)를 비판하면서, 결론적으로 자신들을 보편적 평등의 원리에 따라 실제로 평등하게 대우하라고, 사장과 동일한 인간이자 동일한 시민으로서 존엄하게 대우하라고 요구하면서 투쟁한 것입니다. 이것도 다시 한 번 인간과 시민에 대한 보편적 정의를 새롭게 제시하는 해방의 사건이었습니다.


또한 1849년에는 잔 드루앙(Jeanne Deroin) 같은 여성이 남성들에 대해,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시민으로서의 자격이 존재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인간과 시민에 대한 보편적 정의를 쇄신한 바 있습니다.[잔 드루앙에 대해서는 또한 조앤 스콧, {페미니즘 위대한 역사}, 공임순이화진, 최영석 옮김, 앨피, 2017 3장 참조.] 이것은 식민지 해방투쟁을 전개했던 이들에게도, 흑인 및 유색인종의 인권과 시민권을 위해 투쟁했던 이들에게도, 그리고 오늘날 미등록 이주자 및 난민의 권리, 성적 소수자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이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종속적이고 열등한, 심지어 비정상적인 존재자라는 낙인이 찍힌 가운데 차별과 억압, 배제를 감내하기보다는 그러한 낙인찍기와 차별에 맞서 투쟁하고, 이러한 투쟁을 통해 자신들에게 부과된 비정상적이고 열등한 인간과 시민의 지위를 철폐할 수 있을 때, 해방의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의 해방의 사건만이 보편성을 새로 정의할 수 있는 역량을 지닙니다.

 

인간과 시민을 새롭게 정의하는 역량으로서의 장애

 

전장연을 중심으로 지난 20여 년 동안 한국의 장애인들이 전개해온 투쟁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의 해방의 사건이었고, 그들 덕분에 한국 사회와 많은 비장애인들은 인간과 시민에 대한 진정으로 보편적이고 진보적인 정의를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전장연의 투쟁은 인간의 본질에 대해 우리에게 새로운 통찰을 제공해줍니다. 그들은 우선 비장애인들에게 장애라는 범주를 다시 사고해보도록 촉구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오랫동안 장애인은 몇 가지 특징을 지닌 존재자로 여겨져 왔습니다. 그들은 우선 신체적이거나 정신적인 손상을 지닌 존재자이며, 이로 인해 다른 정상인들과 구별되는 비정상적인상태에 있는 존재자, ‘정상인들이 보통 할 수 있는 이런저런 일들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존재자, 따라서 역량이 결여되어 있는 존재자이고(disability), 결국 다른 정상인들에 비하면 사회적으로 불리한 처지, 핸디캡을 지니게 되는 존재자라는 것입니다. 이런 인식은 우리 사회에서만 오랫동안 통용된 것이 아닙니다. 주지하다시피 그것은 세계보건기구가 1980년에 제시한 바 있는 장애에 관한 국제적인 정의(ICIDH)의 핵심 내용이기도 합니다.


이른바 의료적 장애모델에 입각해 있는 이러한 장애인 범주에 맞서, 전장연은 문제를 다르게 사고하자고, 장애인은 장애인이기 때문에 차별받는 것이 아니라, 차별받기 때문에 장애인이 된다고 주장해왔습니다. 요컨대 장애인들의 능력 부족의 원인으로 제시되고, 따라서 차별적인 대우와 배제의 논거로 기능하는 정신적신체적 손상이라는 것이 차별과 배제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손상은 오직 일정한 사회적 관계 속에서만 차별과 배제를 산출하고, 이로써 장애인을 무언가 열등하고 비정상적인 존재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장애를 장애로 만드는 것은 바로 사회적 관계입니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이동할 능력이 없다는 것은 이런저런 이들이 겪고 있는 신체적 장애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신체적 장애를 지닌 이들이 그 장애의 조건과 관계없이 충분히 편리하고 만족스럽게 이동할 수 있는 교통 인프라(엘리베이터, 저상버스 및 도보 편의 시설 등)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기 때문에 생겨나는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이런저런 정신적, 신체적 손상으로 인해 의사소통에서 장애를 겪는 이들이 제대로 소통을 할 수 없다면, 그것 역시 그들의 손상 자체가 원인이라기보다는, 그런 손상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충분히 만족스럽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소통 인프라가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적어도 이것이 만인의 평등한 자유라는 보편적 원리에 입각해 있는 민주주의의 원리에 부합하는 사고방식이고 실천일 것입니다. 이런저런 정신적, 신체적 손상을 지닌 이들은, 그런 손상을 지니지 않은 이들과 마찬가지로, 곧 그들과 동등하게 인간과 시민으로서 대우받을 수 있는 권리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평등이 실질적으로 향유될 수 있도록 관련된 조건을 마련하는 것이 민주주의 국가 및 지자체, 공무원들의 행정적인 돌봄의 의무일 것이며, 더 나아가 모든 시민들이 공유해야 할 정치적 의무일 것입니다. 다른 동료 인간과 시민(더욱이 매우 많은 수의)이 심각한 부자유와 불평등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나 또는 우리가 자유와 평등을 온전히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며 기만일 뿐입니다. 만약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는 민주주의적인 시민으로서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특권적인 존재자로서, 지배자 내지 권력자로서 사고하는 것이며, 그것 자체가 갑질의 한 방식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보면, 과연 장애인과 비장애인이라는 구별 자체가 타당한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게 됩니다. 만약 이런저런 정신적신체적 손상을 지닌 이들을 장애인이라고 부른다면, 과연 우리들 가운데 장애인이라는 범주에서 자유로운 이들이 누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는 것입니다. 예컨대 저는 지금 제가 쓰고 있는 안경이 없다면 제대로 책을 읽을 수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정상적인 도보가 어려울 만큼 시력이 심각하게 좋지 않습니다. 지난 두 달 동안은 목 디스크에 걸리는 바람에 제대로 책을 읽거나 글을 쓰기가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의자에 앉아 있는 일 자체가 힘들었습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반론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약한 정도의 신체적 손상일뿐더러 영구적이거나 장기적인 손상이 아니라 일시적인 손상일 뿐이기 때문에, 장애와는 구별되는 것이라고.


좋습니다. 그렇다면 조금 더 시각을 넓혀서 사람의 일생을 생각해봅시다. 생각해보면, 우리 모두는 어린 시절 상당한 기간 동안 신체적이고 정신적인 장애를 지닌 채 살아가게 됩니다. 엄마나 아빠, 또는 주위 다른 사람들의 도움이 없이는 제대로 눕지도 앉아 있지도 못하고, 영양분을 공급받거나 대소변을 해결하기도 어렵습니다. 그 시기를 지난다고 해도 우리가 마냥 자립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가 먹고 입고 자는 것을 도와주어야 하고, 공부하는 것을 돌봐주어야 합니다. 심지어 성인이 되어서도 우리가 스스로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무인도에 고립되어 살아가는 로빈슨 크루소나 아니면 인기 티브이 프로그램인 <나는 자연인이다>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혼자서 산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고서는(하지만 그들의 삶은 고달플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삶이란 끊임없이 누군가의 돌봄이 필요한 삶이며, 많은 이들의 돌봄 속에서만 인간은 인간답게, 그리고 자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세 끼 밥을 차려주는 이들, 청소와 빨래 같은 가사일을 해주는 이들, 교통 서비스를 제공하는 이들,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이들, 환경 미화 서비스를 제공하는 이들 덕분에 우리는 오늘도 한 사람의 독립된 개인으로서의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더욱이 최근에는 식생활이 개선되고 의료 서비스의 질이 향상됨에 따라 평균 수명이 크게 향상되었습니다. 장수를 누린다는 것은 축복일 수도 있지만, 어떤 의미에서 보면 그것은 재앙일 수도 있고, 아니면 적어도 새로운 문젯거리의 출현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신체와 정신이 쇠약해지면서 여러 가지 질병을 겪게 되며, 따라서 자연스럽게 더욱 많은 의료 서비스의 도움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살아오면서 특별한 정신적, 신체적 손상을 겪지 않았던 이들도 노년이 되면 불가피하게 다양한 형태의 손상을 겪게 됩니다. 말하자면 노년기에 접어들게 되면 누구나 이른바 장애인들이 되는 셈입니다. 평균수명이 80세를 훌쩍 넘기고 주변에서 90세가 넘은 어르신들을 쉽게 볼 수 있는 우리 시대는 어쩌면 (대표적으로 치매나 암, 각종 뇌질환 및 신경 질환 같은) 장애 문제의 보편화 시대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앞으로 거의 모든 사람들은 일생의 더 많은 부분을 정신적, 신체적 손상 및 장애와 더불어 살아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른바 노년학”(gerontology)이라고 하는, 새로운 학제 연구는 장애학과 많은 부분에서 중첩되는 쟁점들을 갖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비장애인이라고 부르는 범주는 사실은 우리 일생의 특정한 시기, 곧 청년기와 장년기 같은 시기를 추상해서 만들어낸 추상적 범주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더욱이 우리가 청년기와 장년기에도 이런저런 정신적, 신체적 손상과 장애를 자주 경험한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과연 나는 온전한 비장애인이다 하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만약 그렇다면 특정한 정신적, 신체적 손상으로 고통을 겪는 이들만을 장애인들로 분류하고, 그것을 근거로 하여 이들을 차별하거나 억압하는, 심지어 배제하는 것은 더욱 더 정당성이 없을 것입니다. 또한 이들을 비정상적인 존재자로 분류하고 차별함으로써 무의식적으로 자신들의 정상성을 특권화하는 비장애인이라는 범주 역시 정당하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장애의 문제는 특정한 집단이나 개인들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공통적인 문제가 되었으며, 인간을 규정하는 보편적인 특성이 되었습니다. 전장연의 투쟁은 우리에게 이점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양태로서의 인간: 스피노자의 교훈

 

이런 측면에서 우리는 인간의 본질에 관해 다시 한 번 성찰해보게 됩니다. 이처럼 장애라는 것이 특정한 부류의 개인들 및 집단에게만 고유한 특성이나 현상이 아니라, 우리 인간(및 동물, 더 나아가 생명체 일반)이 보편적으로 지닐 수밖에 없는 특성임에도, 우리는 왜 장애라는 것을 특수한 개인들 및 집단들에게 고유한 문제로 여기게 되었고, 왜 장애학이라는 학문을 장애인들이라고 불리는 특수한 이들에 관한 특수한 학문이라고 간주하게 되었을까요?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철학도로서 생각해본다면, 서양 철학에서 전통적으로 전승되어온 인간의 본질에 대한 특정한 개념화가 주요한 이유로 작용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특히 주체’(subject)라고 하는 것을 토대로 삼고 있는 서양 근현대철학, 그리고 이 철학들에서 제시되는 표준적인 인간에 대한 관점이 장애를 특수한 문제로 간주하게 만든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꽤 오래 전부터 페미니즘 학자들은 서양 근현대철학에서 제시되어온 표준적인 인간, 곧 자율적인 존재자로서의 주체의 모델이 사실은 여성을 근원적으로 배제하는 남성 중심적인 모델이라고 고발해왔습니다. ‘인간을 가리키는 영어의 맨(man)이라는 단어가 동시에 남자를 의미한다는 사실에서 잘 알 수 있듯이, 서양 근현대철학, 더 나아가 서양 근현대문명에서는 인간 = 남자로 간주되어 왔고, 여자는 남자에 비해 열등한 존재자로 치부되어 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여성은 공적인 활동에서 배제된 채 가사일을 전담하면서 아버지, 남편, 자식을 위해 봉사하는 종속적인 존재자의 지위를 할당받아오게 되었고요.


그런데 서양 근현대철학은 여성만을 차별하거나 배제해온 것은 아닙니다. 동시에 이 철학들에서 제시되는 표준적인 인간으로서의 주체는 당연히 비장애인주체이고, 비장애인으로서의 주체는 자기 스스로 다른 사람의 도움 내지 돌봄 없이 사고하고 활동할 수 있는 존재자입니다. 주체라는 개념의 핵심적인 속성이 자율성으로 정의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주체는 스스로 사고하고 활동하고,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존재자입니다.


이러한 근대적 주체 개념에 대하여 미국의 철학자이나 퀴어 이론가인 주디스 버틀러는 정당하게도 그것이 판타지’(phantasy)라고 비판한 바 있습니다.[주디스 버틀러, {비폭력의 힘}, 김정아 옮김, 문학동네, 2020] 이것이 판타지 또는 망상인 이유는,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사람의 삶이라는 것은, 어린 시절부터 노년 시절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의 돌봄 속에서만 성립할 수 있고 존속될 수 있는 삶인데 반해, 근대적 주체 개념은 돌봄 연관망이 자립적 개인 내지 자율적주체의 가능 조건이라는 사실을 배제하기 때문입니다. 돌봄 활동이라는 것은 특정한 존재자에게만 필요한 특수한 활동이 아닙니다. 자율적인 존재자로서의 주체는, 오직 타자들의 돌봄 속에서만 자율적이고 자립적인 존재자로서 살아가고 사고하고 활동할 수 있습니다. 돌봄은 자율성 및 자립성의 필수적인 조건입니다. 그것은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제가 경험한 흥미로운 일화가 있습니다. 제가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는 어느 계간지의 편집회의에서 특집 주제로 돌봄의 문제를 다뤄보자고 제안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제안에 대해 어떤 편집위원은 아니, 노인이나 장애인 같은 사람들을 돌보는 활동이 어떻게 특집 주제가 될 수 있느냐고 반문을 했습니다. 그것은 아주 지엽적인 문제라는 것이죠. 버틀러의 시각에서 보면, 이것은 전형적인 서양 근대 철학의 판타지의 표현일 것입니다. 더욱이 매우 남성 중심적인 시각일뿐더러, 신자유주의로 표현되는 주류경제학적인 시각입니다(반드시 신자유주의 경제학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겠지만요). 이런 시각에서 보면 돌봄은 특수한 부류의 사람들에게만 필요한 지엽적인 활동일뿐더러, 돌봄이 문제가 된다면, 그것은 적절한 서비스 비용을 치러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정상적인 주체로서의 대다수 비장애인들 시민에게 돌봄은 반드시 필요한 활동이 아닐뿐더러, 만약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각자 필요한 만큼, 그리고 능력만큼(요컨대 돈이 있는 대로) 돌봄 서비스를 이용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앞에서 말했던 것이 얼마간 타당성이 있다면, 이런 시각은 의료적 장애 모델에 입각해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과 주체에 관한 전통주의적 시각, 곧 남성 중심적이고 주체 중심적인 판타지를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는 시각일 뿐입니다.


서양근현대철학이 이처럼 자율적인 존재자로서 주체 내지 개인에 관한 판타지를 포함하고 있다면, 스피노자는 이러한 철학사의 흐름에서 상당히 예외적인 철학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스피노자는 인간을 포함한 유한한 존재자를 실체로 간주하지 않고 양태로 정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스피노자 철학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바와 달리 실체(substance)의 철학이 아니라 양태(mode)의 철학, 양태의 존재론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데카르트까지, 그리고 데카르트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서양 철학 전통에서 존재하는 것들은 기본적으로 실체로 간주되었습니다. 이때 실체라는 범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에 따르면, 주어의 지위를 갖는 존재자들, 곧 자립적인 존재자들을 가리킵니다.[아리스토텔레스는 󰡔범주론󰡕에서 존재자들을 바탕이 되는 것또는 기체”(基體, hypokeimenon; substratum)바탕이 되는 것 안에 있는 것들”, 곧 속성을 구별한다. 이것은 문법적으로 보면 주어와 술어의 구별로 이해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범주들], {범주들명제에 관하여}, 김진성 옮김, 그린비, 2023, 2.] 또는 {형이상학} 7권의 설명에 따르면 실체는 첫 번째로 있는 것”(proton on)을 의미합니다. 실체는 있음의 측면에서도 첫 번째이고 논리적 측면에서도 일차적이며 앎의 측면에서도 우선한다는 것이죠.[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조대호 옮김, 도서출판 길, 2007, 1028a 14 이하.] 또한 데카르트에 따르면, 실체는 실존하기 위해서 다른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르네 데카르트, {철학의 원리}, 원석영 옮김, 아카넷, 2002, 151.]을 의미합니다. 신이 당연히 실체의 범주에 속하겠지만, 정신과 물체 역시 신을 제외하면 실존하기 위해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으니 실체로 간주될 수 있다고 말하죠. 무한 실체인 신만이 엄밀한 의미의 실체라고 할 수 있으나, 유한한 존재자인 정신과 물체 역시 일종의 실체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칸트 이후의 서양 근현대 철학에서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인식과 실천의 중심을 주체라는 명칭으로 불러왔습니다. 이때의 주체는 기본적으로 자립적이고 자율적인 존재자로서의 개인 주체(따라서 실체로서의 사물들과도 구별되는 것)이며, 집합적인 의미의 주체는 이것을 모델로 하는 것입니다.


반면 스피노자는 인간을 포함한 존재하는 이런저런 사물들을 실체가 아니라 양태라고 정의합니다. 사실 이것은 매우 충격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양태의 라틴어 원어는 모두스(modus)인데, 이것은 원래 척도라는 뜻 이외에도 방식이나 태도등의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원래 모두스라는 용어는 어떤 실재나 사물을 가리키는 용어가 아니라 그 사물의 모양이나 존재방식, 행위방식 등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그럼에도 스피노자는 인간을 포함하여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양태들이라고 말합니다. 여기 있는 책상이나 의자, 건물, 나무, 그리고 지구 전체도 양태이며, 더 나아가 관념과 정신 역시 하나의 양태입니다. 그러면서 스피노자는 {윤리학} 1부 정의 3에서 실체를 자신 안에 있고 자신에 의해 인식되는 것”[이하에서 󰡔윤리학󰡕의 인용은 모두 필자 자신의 번역이다.]이라고 정의하고, 정의 5에서는 양태를 다른 것 안에 있고 다른 것을 통해 인식되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실체와 양태에 대한 두 개의 정의의 내용이 서로 대조를 이루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실체가 자율적이고 자립적인 존재자를 가리킨다면, 양태는 기본적으로 타율적이고 의존적인 존재자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스피노자에게는 오직 신 또는 우주 전체만이 실체이고, 우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양태이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은 타율적이고 의존적인 존재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스피노자에게 깊은 영향을 받았던 헤겔이 스피노자 철학에서 용납하기 어려웠던 점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스피노자처럼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을 양태라고 규정하면, 인간은 주체일 수가 없으며, 따라서 인간에게는 윤리적 실천의 여지도 자유의 여지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스피노자의 철학을, 아직 주체가 되지 못한 실체의 철학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요컨대 스피노자의 철학은 진정한 의미의 근대 철학에 미달하는 철학이라는 셈입니다.


하지만 다른 각도에서 본다면, 스피노자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을 양태라고 규정했을 때 염두에 두었던 것은,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은 근본적으로 상호의존적인 존재자라는 것, 따라서 타자와의 관계 없이는 성립할 수도 없고 존속할 수도 없는 존재자라는 것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요컨대 스피노자의 양태의 존재론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들을 오직 관계 속에서만 성립하고 실존할 수 있는 것으로 파악하는 관계론적인 시각을 나타냅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독특한 실재”(res singularis, singular thing)에 관한 스피노자의 정의입니다. 스피노자는 {윤리학} 2부 정의 7에서 독특한 실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나는 독특한 실재를, 유한하고 규정된 실존을 갖는 것으로 이해한다. 다수의 개체들이 하나의 작용에 협력하여 그 개체 모두가 함께 하나의 결과에 대한 원인이 된다면, 나는 이것들 모두를 바로 그런 한에서 하나의 독특한 실재로 간주한다.

 

이 정의는 우선 단수와 복수의 역설적인 결합을 표현해줍니다. 라틴어 싱귤라리스(singularis)는 일상적인 어법에서는 단수의, 단 하나의, 개개의 같은 뜻을 지니며, 명사로는 과부라는 의미도 지닙니다. 반면 스피노자의 정의에서 독특한 실재 내지 단수의 실재 또는 더 일반적으로 개체는, 일상적인 어법과 모순되게도 복수성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독특한 실재, 레스 싱귤라리스가 단일하고 개별적인 것인 것, 단 하나의 것으로 성립하기 위한 조건은 다수의 개체들이 공동의 원인으로 작용하여 하나의 결과를 생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프랑스 철학자 장-뤽 낭시(Jean-Luc Nancy)가 싱귤리에 플뤼리엘(singulier pluriel)이라는 프랑스어 표현을 통해 복수적 단수독특한 복수라는 뜻을 동시에 전하려고 했던 것과 유사합니다(Jean-Luc Nancy, Être singulier pluriel, Galilée, 1996; [공산주의, 단어], 슬라보예 지젝코스타스 두지나스 엮음, {공산주의라는 이념}, 김상운 외 옮김, 그린비, 2021.). 따라서 개체의 개체성, 독특한 실재의 독특성은 그것을 구성하는 복수의 개체들 사이의 인과관계의 결과입니다. 다수의 개체들이 하나의 독특한 실재를 구성하는 것은, 이 개체들이 공동의 결과를 산출하는 공동의 원인으로 작용할 때입니다. 그것들은 공동의 원인으로 작용하는 한에서 하나의 독특한 실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독특한 실재가 바로 스피노자가 양태, 특히 유한 양태라고 부른 것의 다른 표현입니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양태 또는 독특한 실재는 타자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실존하고 존속할 수 있는데, 스피노자는 이를 변용”(affection)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합니다. 인간의 삶은 끊임없는 변용되기와 변용하기의 연속입니다. 생명체로서의 내가 존속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공기에 의해 변용되어야 하고 마실 수 있는 물에 의해 변용되어야 하며, 일정한 영양분에 의해 변용되어야 합니다. 역으로 나는 다른 사물들이나 사람들을 변용함으로써 존속하고 실존합니다. 나 또는 우리의 가족이나 친구, 동료들의 변용되기와 변용하기 속에서, 나 또는 우리의 적들과의 변용되기와 변용하기 속에서 우리는 실존하고 존속하고 때로는 손상을 입거나 소멸하게 됩니다.


이러한 변용의 관계가 우리의 실존과 삶의 보편적인 조건을 이룹니다.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면서 좋은 변용의 관계만을 경험한다면 다행이겠지만, 그런 일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좋은 변용들만이 아니라 나쁜 변용들을 경험할 수밖에 없으며, 그 과정에서 상처를 입고 때로는 신체나 정신의 일부가 파괴되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매우 심각한 손상을 입을 수도 있고 죽음을 겪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변용의 관계는 양가적인 관계입니다. 그것은 한편으로 우리가 우리의 역량을 획득하고 증대할 수 있는 물질적 조건을 이룹니다. 우리는 타자들과의 변용되기와 변용하기의 관계를 통해서만 우리의 역량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하고 생각하고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이 변용 관계 덕분입니다. 반면 변용 관계는 우리가 손상을 입고 때로는 파괴될 수 있는 원천을 이루기도 합니다. 변용 관계는 기본적으로 상처 받을 수 있는 가능성(vulnerability)을 잠재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관계입니다. 그리고 상처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동시에 우리가 역량을 획득할 수 있는 조건인 한에서, 장애의 문제는 인간의 보편적 조건과 연결되어 있는 문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장애와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하며, 그것은 지금까지 장애인이라고 불린 이들만이 아니라, 아마도 비장애인이라고 잘못 선험적으로 분류된 이들까지도 모두 배워야 하는 공통의 과제, 인간의 또는 생명체 일반의 공통의 과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과제를 우리 공통의 과제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장애의 문제를 장애인비장애인모두의 보편적 문제로 사고한다는 뜻입니다. 누구도 장애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으며, 실제로 우리 모두가 이런저런 방식으로 항상 이미 장애를 겪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장연 투쟁의 규범적 의미: 보편적 삶의 조건으로서 돌봄

 

여기에서 보편적인 삶의 조건으로서 돌봄이라는 문제가 제기됩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돌봄에 관해 간단히 한 마디만 더 언급하고 제 논의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앞에서 제가 말했던 것이 일리가 있다면, 장애인들에게만 돌봄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또한 부모의 끊임없는 손길이 필요한 어린 시절이나 보호자의 지속적인 돌봄이 필요한 노년의 시기에만 돌봄이 요구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이 각자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개인으로서 사회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누군가의 돌봄이 필요하며, 또한 스스로 다른 누군가의 삶을 지속적으로 돌봐야 합니다. 관계론적인 존재론은 돌봄의 윤리를 요구합니다. 따라서 자기 자신과 다른 누군가의 삶을 돌보는 것은 모든 시민의 의무이자 각자가 누려야 할 권리이며 필수적인 삶의 조건이기도 합니다.


이규식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대표는 최근에 출간한 자서전에서 활동보조인이 생긴 뒤로는 내 삶이 180도 바뀌었다”[이규식, {이규식의 세상 속으로: 나의 이동권 이야기}, 후마니타스, 2023]고 말한 바 있습니다. 활동 보조인의 돌봄을 받기 전까지는 언제나 내가 하고 싶은 일보다는 지금 누가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상황인지가 우선이었던 데 반해, 활동보조인의 지속적인 돌봄을 받게 된 이후로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다양하게 시도해 보거나, 한 사람의 시민으로 지역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장애인만의 이야기일까요? 스스로 비장애인이라고 생각하는 우리들 각자 역시 어떤 활동 보조인의 돌봄 없이는 시민으로서, 자립적인 인간으로서의 삶을 누릴 수 없는 것 아닐까요? 다만 스스로 비장애인이라고 여기는 이들은, 자신의 인간으로서, 시민으로서의 역량을 가능하게 해주는 이러한 돌봄을 당연한 것으로, 자연히 주어진 것으로 여기고, 그 중요성을 망각하고 있는 것 아닐까요?


그렇다면 전장연의 투쟁은 우리에게 돌봄 활동이라는 것이 우리의 보편적인 삶의 조건이라는 것, 우리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시민으로서의 독립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한 필수 조건이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투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전장연의 투쟁은 우리 사회가, 특히 정부와 서울시가 이러한 보편적 돌봄의 중요성을 외면하고 그것에 대한 공적인 책무를 망각하고 있다는 점 역시 드러내고 있습니다. 오히려 정부와 서울시는, 그리고 보수 언론은 전장연의 시위를 선량한 시민들을 볼모로 삼는 이기적인 소수 집단의 불법적인 시위로 몰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이처럼 피해자를 가해자로 둔갑시키고, 사회적 소수자들의 정당한 요구를 묵살하거나 외면하면서 억압하고 배제하는 것은 신자유주의적 권위주의의 전형적인 특성입니다. 그 이유는 신자유주의에서는 타인과의 관계를 경쟁과 자기 향상의 틀 안에서만 추구하는 기업가적 개인을 인간의 전형으로 파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인식에 기반을 둔 사회 조직과 공적 행위는 협력보다는 경쟁을 우선시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효율성과 수익성이라는 이름 아래 그렇게 하죠). 또한 사회적 소수자들의 요구, 곧 을들의 요구는 패배자들이나 무임승차자들의 부당한 불평불만으로 치부되고, 때로는 보편적인 사회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불법적인 치안 교란 행위로 간주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신자유주의적 사회에서 사람들, 특히 우리가 을이라고 부르는 사회적 약소자들, 소수자들은 이중구속적인 규범적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그것은 과소 주체화된 이들이 과잉 주체로 실존하고 행위하기를 요구받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우리 시대의 근본 특징 중 하나는, 서양 근대에 철학적 개인 및 정치적 개인을 개인으로서 형성하는 데 본질적이었던 사회적 관계, 그리고 그것과 결부된 제도들의 쇠퇴 및 변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사회에서 개인들은 더 이상 전성기의 복지국가 체제에서처럼 국가가 사람들의 삶을 요람에서 무덤까지보장해줄 것으로 기대할 수 없습니다. 노동자들은 더 이상 노동조합과 노동자 정당의 강력한 지지 아래 자신들의 권리 증대와 이익 증진이 이루어질 것으로 희망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반면 우리 시대에 개인들은 자신들의 개인성을 물질적으로 뒷받침해주었던 이러한 제도들의 부재 속에서 더욱 더 자립적인 개인들로 실존하기를, 자율적으로 판단하고 스스로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지기를 요구받고 있습니다. 요컨대 신자유주의 시대의 근본 특징 중 하나는 (자율적) 주체화의 조건이 부재하거나 약화된 상황에서 더욱 더 (자율적) 주체들로 존재하기를 요구받고 있는, 공포에 질린 개인들의 각자도생의 시대라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전장연의 투쟁은, 더더욱 우리 사회 일부 개인들이나 특정 집단의 권익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통치에 맞선 보편적인 투쟁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보편적인 잠재적 장애의 조건 속에서 살아가는 모든 인간과 시민의 보편적인 돌봄의 권리에 입각하여 우리 사회를 민주주의적으로 개조할 것이냐 아니면 신자유주의적인 권위주의 통치에 밀려 세습적인 불평등의 질서를 강화하는, 따라서 서로가 서로에 대해 무관심한 가운데, 각자의 이익을 위해 경쟁하는 질서를 용인할 것이냐를 쟁점으로 갖는 투쟁입니다. 광범위한 생태계 파괴와 보건 재난, 사회적 안전 재난 같은 다중적 재난으로 특징지어지는 우리 시대에 이 투쟁은 우리 평범한 시민들에게 서로를 돌보고 서로의 싸움에 연대함으로써 우리의 권리를 스스로 지키고 확장하는 길 이외에 다른 권력, 다른 역량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이 투쟁이 다중 재난에 직면하여 또 다른 해방의 사건으로 기억될 수 있는가 여부는 우리가 이러한 공통의 역량을 구성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 점을 가르쳐준 데 대해서도 전장연에 대해 깊이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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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8월 24일~25일 양일간 부산대학교에서 열리는 한국교육사상학회 2023년 하계학술대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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