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문학동네] 봄호에 실릴 원고 한 편 올립니다. 


이 글에 대해 토론하거나 논평하고 싶은 분들은 [문학동네]에 실린 판본을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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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세와 민주주의

 

 

논란을 본질로 하는 개념으로서의 인류세

 

스코틀랜드 철학자인 월터 브라이스 갈리는 약 칠십 년 전에 논란을 본질로 하는 개념Essentially Contested Concepts이라는 유명한 강연을 한 적이 있다.[W. B. Gallie, “Essentially Contested Concepts”(1956), Philosophy and the Historical Understanding, Schocken, 1964.] 그가 말하는 논란을 본질로 하는 개념, 그 개념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누구나 인정하지만 그 구체적인 의미나 용법에 관해서는 의견의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고 오히려 논쟁과 갈등이 존재하기 마련인 개념을 가리킨다. 갈리는 주로 미학이나 역사철학, 정치철학이나 종교철학 등에서 이런 유의 개념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오늘날 생각해보면 인류세라는 개념이야말로 논란을 본질로 하는 개념의 뚜렷한 사례가 아닌가 한다. 인류세 개념이 중요하다는 점, 그리고 그것이 지구시스템과학 같은 자연과학(또는 융합과학)만이 아니라 특히 인문사회과학에 미증유의 도전을 제기한다는 점에 관해서는 누구나 동의하겠지만, 어떤 측면에서 그것이 중요하고 왜 그것이 전례없는 도전인가에 대해서는 불일치와 갈등, 논쟁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국제지질과학연맹IUGS 산하 국제층서위원회International Commission on Stratigraphy, ICS에서 제시한 지질연대표에 따르면 우리가 사는 시대는 현생누대의 신생대 제4기 중 약 1만 년 전(정확히 말하면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는 시점인 11,650±699)에 시작된 홀로세가 막 끝나고 이제 인류세가 시작되는 시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국제지질연대층서표의 최신 판본(2023. 9)은 국제층서위원회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https://stratigraphy.org/chart). 대한지질학회에서 제시한 한글 버전도 있다.] 우리가 인류세에 접어들었는가에 대해서는 그동안 뜨거운 논쟁이 전개된 바 있다. 인류세의 시작이 공식적으로 인증받기 위해서는 다른 지질시대와 구별되는 의 고유한 지질학적 증거가 존재해야 하는데, 알루미늄이나 플루토늄 또는 플라스틱 등과 같은 물질을 증거로 간주하기에는 지난 칠십 년간 축적된 해양 퇴적층의 두께가 겨우 1밀리미터에 불과할뿐더러, 언제 인류세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뚜렷한 합의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농경과 산림 벌채의 시작을 그 시점으로 잡는 경우도 있고, 아메리카 신대륙의 발견이나 산업혁명을 기점으로 제안하기도 하며, 미국 뉴멕시코주에서 최초의 원자폭탄 실험이 있었던 1945716일이 그 시작점으로 제시되기도 한다.[Jan Zalasiewicz, Paul Crutzen, Will Steffen, “The Anthropocene”, The Geologic Time Scale, ed. F. M. Gradstein et al., Elsevier, 2012; Simon L. Lewis, Mark A. Maslin, “Defining the Anthropocene”, Nature, vol. 519, 2015; 김지성·남욱현·임현수, 인류세(Anthropocene)의 시점과 의미, 지질학회지522, 2016.] 게다가 1945년을 인류세의 시점으로 잡는다면 팔십 년 남짓한 시간은 다른 지질시대의 연대 측정 오차 범위보다도 짧은 시간에 불과한데, 여기에 과연 cene라는 명칭을 부여하는 것이 적절한가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다.


이런 논란은 20237월 국제층서위원회 산하 인류세실무그룹AWG이 캐나다 토론토시 부근의 크로퍼드 호수를 인류세의 시작을 가장 잘 나타내는 국제표준층서구역GSSP으로 선정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이른바 대가속기가 시작된 1950년대 이후 핵실험과 원자력발전에서 발생하는 플루토늄이나 발전소에서 석탄 같은 화석연료를 태울 때 배출되는 구형 탄소 입자SPC같이 인류세를 대표하는 주요 지표가 지구상에서 급속히 증가한 지질학적 흔적이 이 호수의 퇴적층에 뚜렷이 나타나 있고, 이는 우리가 새로운 지질시대로 접어들었다는 강력한 증거가 된다는 것이 선정 이유다. 이제 제4기 층서위원회SQS와 국제층서위원회에서 차례로 투표를 거쳐 이 선정안이 통과되면, 올해 국제지질학총회IGS에서의 최종 비준을 통해 인류가 신생대 제4기 인류세 크로퍼드절에 들어섰다는 사실이 적어도 지질학적인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승인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류세를 둘러싼 논란이 종결된 것은 아니다. 인류세라는 것이 인간의 행위성agency으로 인해 기후변화와 종 다양성 파괴, 해양생태계의 훼손 같은 현상들로 표출되는 지구 시스템의 변동이 일어나 인류의 생존이 위협받는 상황을 지칭하는 명칭이라면, 우리가 뒤에서 살펴볼 것처럼 그것은 과학적 분석 및 서술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서로 양립하기 어려운 상이한 윤리적·정치적 입장을 산출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인류세에 관한 다양한 이론적·규범적 입장들이 제출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류라는 추상적 보편성을 지구온난화의 핵심 원인으로 지칭하는 것은 부적절하며 오히려 자본세나 플랜테이션세, 또는 툴루세 같은 명칭이 더 적절하다고 주장하는 도나 해러웨이나 안드레아스 말름, 제이슨 W. 무어의 저작이 보여주듯이 인류세라는 명칭 자체가 본질적인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기도 하다.[도나 해러웨이, 트러블과 함께하기자식이 아니라 친척을 만들자, 최유미 옮김, 마농지, 2021; 제이슨 W. 무어, 생명의 그물 속 자본주의자본의 축적과 세계생태론, 김혜진 옮김, 갈무리, 2020; 안드레아스 말름, 화석 자본증기력의 발흥과 지구온난화의 기원, 위대현 옮김, 두번째테제, 2023.]


인류세라는 개념이 지질학이나 지구시스템과학의 경계를 넘어 학계 및 사회 일반에까지 널리 확산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개념은 지금까지 생태학자들이나 환경운동가들이 우려하고 고발해왔던 환경오염이나 생태계 훼손의 차원을 넘어 지구 시스템의 생명권 자체의 급격한 변동, 곧 인간을 비롯한 다수 생명들이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의 와해를 상징하는 개념이 된 것이다. 그것은 특히 인류에게는 근대 문명을 넘어서 인간 문명 자체의 붕괴 가능성을 지칭하는 명칭으로 자리잡고 있다.


 

인류세에 관한 상이한 입장들

 

인류세는 인류에게, 그리고 철학 및 비평에게 역설적인 사태로 나타난다. 한편으로 인류세는 불변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온 지구 시스템 자체를 변동시킬 수 있는 위력적인 인간 행위성의 표현인 한에서[인류세에 관한 과학적 연구를 주도해온 과학자들 자신이 인류세의 핵심적인 의미를 지구환경에 기입된 인간의 흔적이 매우 크고 인간의 활동이 대단히 왕성해져 지구 시스템 기능에 미치는 인간의 영향력이 자연의 거대한 힘과 겨룰 정도가 되었다는 사실에서 찾는다. Will Steffen, Jacques Grinevald, Paul Crutzen, John McNeill, “The Anthropocene: Conceptual and Historical Perspectives”, Philosophical Transactions of the Royal Society A, no. 369, 2011, p. 843.] 주체와 객체의 이원론 및 자연의 주인으로서의 인간이라는 관점에 입각한 근대 철학과 문명의 극한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서양 근대 철학의 두 전통의 기원인 데카르트와 베이컨은 공히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인간이 자연의 주인임을 천명한 바 있다. 이것은 갈릴레이와 뉴턴 이래 우리의 감각기관에 나타나는 자연이 아니라 우리의 이성적 능력을 통해 재구성된 자연이야말로 진정한 자연이라고 파악해온 근대 수리과학과 여기에 기반을 둔 기술문명의 발전의 표현이면서 그것을 정당화한 철학적 원리였다. 그 결과 하이데거가 지적한 바 있듯이, “지구 전체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배를 위해 인류의 모든 능력을 최고도로 그리고 무조건적으로 전개하는 것이야말로 근대인으로 하여금 더 새롭고 가장 새롭게 발진하도록 촉발하고 그의 안전한 전진과 목표의 확실성을 보장하는 지침을 정립하도록 촉구하는 은밀한 목표”[마르틴 하이데거, 니체 2, 박찬국 옮김, , 2012, 132.]가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인류세를 이러한 변동으로 인해 초래되는 지구 시스템의 폭력적인 힘과 그로 인한 인류의 가능한 종말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이해한다면, 이는 인류의 왜소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간주할 수도 있다. 클라이브 해밀턴이 간명하게 지적하듯이 자유와 기술력을 방종하게 사용함으로써 우리는 파멸 직전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인간의 능력을 배양한 바로 그 행위로 인해 우리는 길들여지기를 거부하고 갈수록 더 인간의 이익에 냉담해지는 자연과 맞닥뜨리게”[클라이브 해밀턴, 인류세거대한 전환 앞에 선 인간과 지구 시스템, 정서진 옮김, 이상북스, 2018, 70. 강조는 인용자.] 된 것이다. 근대 문명에서 인간은 자연과 분리되는 것을 넘어 자연의 지배자가 되기를 추구해왔는데, 이때 인간의 자연 지배가 성립하기 위한 조건은 자연이 인간의 지배에 순응하는 존재자라는 점, 물론 이런저런 저항과 부작용이 존재하겠지만, 그럼에도 결국 인간이 점차적으로 탐사하고 통제하고 길들일 수 있는 수동적 대상이라는 가정이었다. 하지만 21세기에 접어들어 지배자로서 인간의 힘이 더욱 강해지는 만큼 여기에 대한 자연 또는 지구 시스템의 반작용도 더욱 강해져서 더 많은 폭염과 산불, 가뭄, 태풍과 침수, 영구 동토층의 해빙, 전염병의 빈번한 확산과 같은 파괴적인 결과를 산출하고 있으며, 많은 과학자들은 지구 평균기온을 산업화 이전(1850~1900년 평균) 대비 1.5이하로 낮추는 데 성공하지 못한다면 앞으로 더욱 예측 불가능한 파괴적 결과들이 초래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이런 역설적 사태에 직면하여 세 가지 대안이 제시될 수 있다. 첫째는 인류세를 인류에 대한 새로운 도전으로, 그것을 극복함으로써 자연의 지배자로서 인류의 역량을 입증해야 할 미증유의 과제로 이해하는 일이다. 에코모더니즘ecomodernism이라 불리는 이러한 대안은 지구공학geoengineering이나 기후공학climate engineering의 방식으로 인류세의 도전에 응전하고자 한다.[에코모더니즘에 관해서는 무엇보다도 The Breakthrough Institute, An Ecomodernist Manifesto (2015, www.ecomodernism.org)을 참조. 에코모더니즘을 전 지구적 사회민주주의 기획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로는 Jonathan Symons, Ecomodernism: Technology, Politics and the Climate Crisis, Polity, 2019. 에코모더니즘의 이론적 입장의 변이 과정에 대한 흥미로운 고찰로는 Kristin Hällmark, “Politicization after the ‘end of nature’: The prospect of ecomodernism”, European Journal of Social Theory, vol. 26, no. 1, 2023. 에코모더니즘에 대한 비평으로는 클라이브 해밀턴, 같은 책; Anne Fremaux, John Barry, “The “Good Anthropocene” and Green Political Theory: Rethinking Environmentalism, Resisting Eco-Modernism”, Anthropocene Encounters: New Directions in Green Political Thinking, ed. Eva Lövbrand, Frank Biermann,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9; Mads Ejsing, “The Arrival of the Anthropocene in Social Theory: From Modernism and Marxism towards a New Materialism”, The Sociological Review, vol. 71, no. 1, 2023.] 국내에 소개된 저작 가운데서는 얼 C. 엘리스의 인류세가 이런 면모를 보이고 있다.[C. 엘리스, 인류세, 김용진·박범순 옮김, 교유서가, 2020.] 인류세와 관련된 과학적 연구의 동향과 인문사회과학적 논의에 대한 유익한 개론서인 이 책에서 그는 인류세라는 이 역사의 새로운 장에서 당신곧 독자들을 비롯한 인간들인용자은 주인공 역할을 맡았다고 지적하고 자신의 저작을 통해 독자들이 나와 마찬가지로 영감을 받고 좀더 의식적이고 주도적으로 더 나은 인간의 시대를 만들어낼 수 있기를 희망”[같은 책, 6~7.]한다고 말하면서 책을 시작한다. 그리고 결론에 이르러서는 좋은 인류세가 가능하리라는 희망적인 견해를 피력한다. 그가 말하는 좋은 인류세는, 위의 역설에 비춰 생각해본다면, 결국 더욱 혁신적인 기술 공학을 통해 한층 더 강력해진 인간의 지배력이 자연 내지 지구 시스템의 도전을 이겨내어 이전과 마찬가지로 지구를 자신의 통제 아래 둘 수 있게 되는 상황을 가리킨다. 따라서 에코모더니즘의 관점에서 보면 인류세가 인류에게 새로운 도전을 제기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러한 도전은 인간이 자신의 문명을 구축하면서 자연과 분리되고 더 나아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자연을 통제하고 지배해온 과정의 연속선상에서 파악될 수 있다.


둘째는 근대 문명을 생태 문명으로 전환하려는 생태학적 대안의 길이다. 전자와 달리 이러한 길은 인류세를 인간 및 근대 문명의 오만함에 대한 징벌로 이해하고자 하며, 인간의 배타적 주체성과 행위성에 입각한 근대 문명(또는 자본주의 문명)과 다른 비근대적이고 비서양적인 존재론을 모색함으로써 인류세가 산출하는 재앙적인 결과를 완화하거나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추구한다. 이런 관점을 취하는 이들에게 지구는 인간의 탐욕으로부터 구원하고 보호해야 할 대상인 자연으로 나타나며, 때로는 지구와 평화롭게 지내기위해서는 근대 문명 이전으로 돌아가 농경과 전원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결론이 제기되기도 한다.[에너지사학자 바츨라프 스밀의 분석에 따르면, 이는 80억 세계 인구 절반 이상의 사망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바츨라프 스밀, 세계는 실제로 어떻게 돌아가는가우리의 문명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한 과학적 접근, 강주헌 옮김, 김영사, 2023 2장 참조.]


생태철학자 티머시 모턴은 이러한 관점을 취하는 생태주의자들이 정보 투기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고 비평한다. 그에 따르면 정보 투기는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이 온난화를 부정하는 자들은 대체 왜 깨닫지 못하는가?’라거나 내 이웃은 왜 나만큼 여기에 신경쓰지 않는가?’”라는 정서적 반응으로 표출되곤 하는 방식으로, 궁극적으로는 지구온난화 발생 이전의 허구적 시점에 우리 자신을 위치시키려는 방법”[티머시 모턴, 생태적 삶티머시 모튼의 생태철학 특강, 김태한 옮김, 앨피, 2023, 21, 25. 강조는 원문.]이다. 이러한 관점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을 돌이킬 수 있는 것으로 사고한다는 측면에서도 문제적이지만, 제시되는 해법 자체가 문제의 요소를 구성한다는 점에 대해 맹목적이라는 측면에서도 문제적이다.


세번째 길은 인류세를 단절의 계기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두번째 대안과 공명하지만, 한편으로 인간의 행위성을 약화하기보다는 그 행위성을 새로운 철학적 바탕 위에서 이해하고, 다른 한편으로 지구 자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인간의 행위성에 따른 윤리적 책임을 찾으려고 한다는 점에서 두번째 대안과 길을 달리한다. 그에 따르면 두번째 대안에서 불만족스러운 점은, 근대 문명과 단절하고 그에 대한 대안을 이루는 것으로 제시되는 생태문명론에서 끊임없이 호소하는 자연이 낡고 보수적인, 심지어 자가당착적인 관념이라는 점이다. 티머시 모턴이 적절하게 환기하는 바와 같이 이러한 자연은 전근대적 농경 문명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농경 문명 또는 모턴의 표현을 빌리자면 농업 로지스틱스가 인간 중심적 관념에 기반을 둔 매끄럽게 작용하는 시스템의 논리에 입각해 있다는 점에서 보면 자연이라고 불리는 것(봉건시대의 상징 시스템에서 아주 쾌적하게 표현되던 저 매끄러운 순환)은 바로 덜 노골적인 방식의 인류세와 다르지 않다[같은 책, 88.]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곧 그것은 일신교, , 분업을 갖춘사회구조로 표현되는 외파적 전체론explosive holism, 즉 전체가 항상 부분들의 합보다 크다고 가정하는 전체론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이러한 존재론에서는 인간 문명이 “‘잡초해충같은 사물과의 전쟁을 바탕으로 사유되며, 따라서 인간과 비인간의 근본적 차이[티머시 모턴, 인류비인간적 존재들과의 연대, 김용규 옮김, 부산대학교출판문화원, 2021, 45.]라는 관념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전통적인 생태학적 모델들은 지배계급의 만다라 구조에 의존한다”[티머시 모턴, 인류비인간적 존재들과의 연대, 김용규 옮김, 부산대학교출판문화원, 2021, 45.]는 결론이 도출된다.[이는 농경 이래 인류의 역사를 이중 기생의 역사로 규정한 윌리엄 맥닐의 분석과 통하는 바가 있는 주장이다. 윌리엄 맥닐, 전염병의 세계사, 김우영 옮김, 이산, 2005.]


그렇다면 인류세 문제에 대한 대응에서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인간 중심주의 내지 인간 예외주의에서 벗어나 인간과 비인간, 생명과 비생명의 관계, 그리고 이론과 실천 내지 인식과 행위의 관계를 새롭게 사유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일이다. 인도 출신의 포스트식민주의 역사학자 디페시 차크라바르티나 프랑스의 인류학자 브뤼노 라투르 또는 미국의 생태정치학자 제인 베넷이나 페미니즘 철학자 도나 해러웨이 등이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추구하는 길이 이것이다.[Dipesh Chakrabarty, The Climate of History in a Planetary Ag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21; 디페시 차크라바르티, 행성 시대 역사의 기후, 이신철 옮김, 에코리브르, 2023; Bruno Latour, Où atterrir?: Comment s’orienter en politique, La Découverte, 2017; 브뤼노 라투르,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법신기후체제의 정치, 박범순 옮김, 이음, 2021; Bruno Latour, Nikolaj Schultz, Mémo sur la nouvelle classe écologique: Comment faire émerger une classe écologique consciente et fière d'elle-même, La Découverte, 2022; 브뤼노 라투르, 니콜라이 슐츠, 녹색 계급의 출현, 이규현 옮김, 이음, 2022; Jane Bennett, Vibrant Matter: a Political Ecology of Things, Duke University Press, 2010; 제인 베넷, 생동하는 물질, 문규현 옮김, 현실문화, 2020; 도나 해러웨이, 같은 책.

] 또한 티머시 모턴은 외파적 전체론이 아닌 내파적 전체론implosive holism’, 곧 부분들의 합이 항상 전체보다 크다고 간주하는 관점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며, 비인간적 존재자들과의 연대를 위해서는 초월transcendence이 아닌 저월subscendence’, 곧 수많은 생명체 및 비생명체들과의 상호 의존성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티머시 모턴, 인류.] 비록 모턴은 현상학에서 유래한 철학적 입장을 취하고 있지만, 이는 (기본적으로 스피노자주의에 입각한) 나의 관계론적 관점과도 적지 않게 공명하는 생각이다.

 


인류세와 민주주의: 어떤 관계?

 

하지만 세번째 입장이야말로 어떤 의미에서는 논란을 본질로 하는 인류세의 특성이 잘 드러나는 장소이며, 이 글의 핵심 주제와도 직결되는 곳이다. 사실 인류세와 민주주의라는 이 글의 제목에서 두 항이 라는 접속조사로 연결되어 있지만, ‘인류세민주주의가 이처럼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을 자명한 일로 여길 수는 없다.


첫째, 어떤 이들은 양자 사이에서 아무런 논리적 연관성을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인류세는 지질학적 시대구분을 위해 제안된 명칭인데, 그것이 통치의 한 유형 내지 원리로서의 민주주의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시각에서 볼 때 양자 사이에 어떤 관계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논리적 관계(따라서 내재적 관계)라기보다는 후자에 대하여 전자가 외부에서 모종의 영향을 미치는 외재적 관계로 보는 게 합리적일 것이다. 요컨대 인류세가 기후변화가 초래하는 자연환경의 교란을 지칭하는 명칭이라면, 인류세와 민주주의의 관계는 기후변화가 인간 내지 인간 종에게 제기하는 위협에 어떻게 효과적으로 대응할 것인가의 문제이지 정치 내지 민주주의의 구조 자체를 변형하는 문제로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경우 실천적 과제는 기후 위기에 대응하는 지구적인 거버넌스를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로 집약되며, 이는 현재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UN기후변화협약UNFCCC을 중심으로 실행되고 있다. 여기에서 민주주의와 관련된 핵심 쟁점은 넓은 의미에서 기후 불평등의 문제를 어떻게 시정할 수 있는가와 관련되어 있다. 국제적으로 보면 선진국개발도상국또는 글로벌 노스Global North와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 사이에서의 책임 분배의 문제이고, 한 국가 내부에서 보면 기후 약자들의 불평등 문제, 그리고 현재 존재하지 않는 세대와 관련된 정의의 문제, 이른바 세대 간 정의라는 문제도 포함할 것이다.[기후윤리학자인 스티븐 가디너는 기후 재난을 완벽한 도덕적 폭풍이라고 부르며, 그 핵심 쟁점을 세대 간 정의의 문제로 간주한다. Stephen M. Gardiner, A Perfect Moral Storm: The Ethical Tragedy of Climate Change, Oxford University Press, 2011.]


둘째, 이것들은 물론 시급하고 중요한 함의를 지닌 문제이지만 인류세는 이런 차원을 훌쩍 뛰어넘는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는 입장이 있을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인류세는 지금까지 우리 인간이 수행해온 정치적 행위의 물질적이고 상징적인 토대를 이루는 인간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근본적으로 문제삼는 범주이며, 따라서 정치적 행위의 본성에 관한 새로운 고찰을 촉구하는 범주이기도 하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인류세라는 개념이 현재 우리가 직면해 있(다고 믿)는 기후 위기의 궁극적인 원인을 인간 내지 인간의 행위성에서 찾기 때문이다.


정치적 행위, 특히 민주주의적 행위는 오직 인간만이 맡을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왔다. 고대와 중세는 물론이거니와 근대 이후에도, 정치와 민주주의에 관한 사고 및 제도가 어떤 변형을 겪었든 간에, 정치가 정치적 동물로서 인간의 고유한 활동이라는 이해는 거의 변화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하지만 인류세의 문제 설정에서 본다면 정치를 이처럼 인간에게 고유한 활동으로 한정하는 것은 근본적인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전통적인 정치관은 인간에게만 행위성 내지 행위능력을 배타적으로 부여하는 인간 중심주의 내지 인간 예외주의를 전제하기 때문에, 더욱이 근대 이후로는 인간에 의한 자연 정복을 철학적으로 정당화하면서 산업혁명으로 본격화된 자본주의에서 화석연료에 기반을 둔 에너지 집약적인 경제와 사회를 구조화해왔기 때문에 인류가 직면한 기후 위기 및 생태계 위기 문제를 해결은 고사하고 제대로 인식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차크라바르티나 라투르, 베넷, 해러웨이 등이 이런 입장을 대표하는 사람들로 볼 수 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인류세가 표현하는 생태적 위기는 능동적인 주체로서의 인간과 수동적인 객체로서의 자연 사이의 근원적 이분법에 기반을 두기 때문에 이 이분법을 넘어서는 새로운 존재론과 윤리학 및 정치학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셋째, 하지만 이러한 두 번째 입장과 더불어, 인류세 또는 자본세 내지 플랜테이션세 등과 민주주의의 사이에 내재적인 연관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긍정하고 더 나아가 기후 위기가 정치 및 민주주의의 내적 전환을 요구한다는 점에 동의하지만, 이러한 내재적 연관성에 대해 상이한 관점을 갖고 있으며 정치 및 민주주의의 내적 전환에 관해서도 독자적인 입장을 가진 이들이 있을 수 있다. 이들은 대개 좌파적인 관점을 지닌 이들로서, 생태사회주의라는 명칭으로 지칭할 수 있는 여러 연구자들, 곧 가장 정통적인 마르크스주의적 생태론을 전개하는 존 벨라미 포스터나 안드레아스 말름, 사이토 고헤이 같은 이들, 또는 마르크스주의와 세계체제론 및 포스트휴머니즘을 포괄적으로 종합하여 세계생태론을 구성하려 하는 제이슨 W. 무어, 그리고 넓은 의미의 비판이론의 관점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새로운 비판이론을 시도하는 낸시 프레이저 등이 그들이다.[존 벨라미 포스터, 마르크스의 생태학유물론과 자연, 김민정·황정규 옮김, 인간사랑, 2016; 안드레아스 말름, 같은 책; 사이토 고헤이,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기후 위기 시대의 자본론, 김영현 옮김, 다다서재, 2021; 제이슨 W. 무어, 같은 책; 낸시 프레이저, 좌파의 길식인 자본주의에 반대한다, 장석준 옮김, 서해문집, 2023. 생태마르크스주의 내부에서 물질대사 균열이라는 개념을 둘러싸고 전개된 논쟁에 관해서는 이광근, 세계생태와 역사적 자본주의의 구체적 총체성세계체계 분석의 지속 혹은 변신?, 아시아리뷰102, 2020; 이광근, 21세기 초 생태마르크스주의 논쟁의 쟁점들물질대사 균열 비판과 반비판, 경제와사회2022년 봄호; 최병두, 인류세인가, 자본세인가생태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균열, 공간과사회321, 2022의 흥미로운 소개 및 논평을 참조.] 나 역시도 이런 입장에 가깝다.


이들은 라투르나 차크라바르티 또는 베넷이나 해러웨이의 관점이 현재의 기후 위기를 초래한 자본주의 및 신자유주의라는 원인에 대해 (어떤 이들은 노골적으로, 어떤 이들은 유보적으로) 맹목적이며, 기후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정치적 관점에서도 자연/사회, 인간/비인간, 생명체/비생명체 또는 글로벌/지구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것을 강조하면서 오히려 생태 위기의 문제가 계급적 적대 및 젠더 적대, 인종적 적대와 같은 주요 사회적 적대의 문제와 구조적으로 결합되어 있다는 점을 간과하는 잘못을 범한다고 비판한다. 곧 정치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집합적 활동인데, 인간/비인간의 이분법을 넘어선다는 구실 아래 오히려 인간의 집합적인 정치적 행위성을 약화시키고, 더 나아가 정치 및 인간의 행위성을 규정하는 계급적/젠더적/인종적 지배 구조의 문제를 도외시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인류세의 정치학 내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이들의 주장은 오히려 또다른 의미의 생태 중심주의, 다시 말하면 생태 위기를 일종의 최종 심급으로 격상시키려는 시도로 이해될 수 있다.


 

자연과 인간, 생명과 비생명의 이분법을 뛰어넘는 인류세의 정치?

 

이런 면모가 가장 잘 드러나는 사람은 라투르다. 그는 1991년 출판된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에서부터 이미 생태 위기의 문제가 근대성 및 근대 정치의 최대 문제라고 간주한 바 있으며, 2000년 유진 스토머와 파울 크뤼천이 인류세라는 개념을 제안하면서 본격화된 인류세에 관한 인문사회과학적 논의에 적극 참여하면서 가이아 마주하기(2015),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법(2017), 녹색 계급의 출현(2022) 같은 저작들을 통해 가이아의 정치생태학을 전개한 바 있다. 가이아의 정치학이 구체적으로 전개되는 두 권의 책 중 하나인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에서 라투르는 이주, 불평등의 폭발적인 증가, 신기후체제”[브뤼노 라투르, 같은 책, 29.]가 기후 위기의 정치학의 현실적인 배경을 이루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자신의 가이아 정치학을 명료화하기 위해 근대화 정치와 대지적 조건condition terrestre의 정치를 대비시킨다.


로컬에서 글로벌로 나아가는 운동을 진보라고 이해하는 근대화의 정치는 기후변화의 현실 앞에서 근대화 이전의 로컬과 근대화된 글로벌이라는 두 유인자 사이의 운동을 근본적으로 변형하는 유인자, 곧 반계몽주의obscurantiste 엘리트(라투르는 도널드 트럼프를 언급하지만, 아마존의 제프 베이조스나 테슬라/스페이스엑스의 일론 머스크 같은 자본가들도 여기에 당연히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가 지향하는 세상 바깥Hors-Sol, Out-of-This-World이라는 정치적 유인자를 산출한다. 이것은 경제적 탈규제, 불평등의 증대, 기후변화 부정을 연결하는 유인자다. 말하자면 반계몽주의 엘리트는 기후변화의 현실에 직면하여 지구상의 모든 이들과 소비와 생산의 근대적 시스템을 공유할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서, 더는 지속할 수 없는 근대적 삶의 방식을 자신들만이 향유하기 위해 경제적 탈규제를 추진하고 이로 인해 악화되는 불평등을 기후변화의 현실을 지속적으로 부정함으로써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라투르는 세상 바깥이라는 유인자를 거부할 경우 생태화를 위한 새로운 정치적 유인자로서 대지Terrestre, Terrestrial가 제시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대지란 실체가 아닌 행위자로서의 인간과 비인간의 어셈블리지를 가리키는 것으로, 라투르에 따르면 인류세라는 새로운 시대에는 인간만이 아니라 가이아로서의 지구 및 그 속에서의 비인간 거주자들 모두 행위성을 지닌 정치적 행위자로 간주되어야 한다.


자신이 제안하는 생태정치를 구체화하기 위해 라투르는 일차적으로 지난 세기 사회주의 운동과 환경 운동의 결합 실패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핵심은 생산 시스템에 대한 마르크스의 분석을 이론적 기초로 삼아서는 안 되며, 그것을 생성 시스템systèmes d’engendrement, systems of engendering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것이다.[브뤼노 라투르, 같은 책, 119쪽 이하; 브뤼노 라투르, 니콜라이 슐츠, 같은 책, 여러 곳.] 이러한 제안은 생산 시스템에 대한 분석에서는 자연을 오직 인간 활동을 위한 맥락 및 자원으로서만 간주하기 때문에 기후 위기의 문제가 제대로 인식되기도 어렵고 해결책을 모색하기는 더욱 어렵다는 그의 시각에서 유래한다. 반면 우리가 생성 시스템에 입각하게 되면 자연을 생산을 위한 자원이자 대상으로 간주하는 생각에서 벗어나 생명과 비생명이 공생하여 형성하는 생명의 그물로서 지구 시스템을 이해할 수 있으며, 각각의 행위자들의 존재 및 생성이 상호 의존 관계에 기반을 두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라투르의 생태정치는 인간들의 이익을 위해 무상의 것으로서 자연을 마음대로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인류세 시대에는 이것이 더이상 불가능해졌다), “대지족terrestres, terrestrials의 생성을 추구한다. 라투르는 생산 시스템과 생성 시스템 사이의 모순은 문명 그 자체의 문제[브뤼노 라투르, 같은 책, 126.]라고 역설한다.


녹색 계급의 출현에서 라투르는 녹색 계급classe écologique이라는 새로운 정치적 주체를 바탕으로 생태주의가 그저 운동에 그치지 않고 정치를 조직하는 구심점이 될 수 있는 조건”[브뤼노 라투르, 니콜라이 슐츠, 같은 책, 10.]을 추구하고자 시도한다. 녹색 계급은 이중의 투쟁 대상을 겨냥한다. 녹색 계급이 벌이는 계급투쟁은 허망한 글로벌화와 동시에 국경 안으로의 회귀[같은 책, 42.]에 맞선 투쟁이며, 그 투쟁의 쟁점은 생산에 대한 이 배타적 관심에서 등을 돌려 거주 가능 조건의 탐색이라는 더 큰 틀로 나아가는”[같은 책, 26. 강조는 원문.] 것이다.


그런데 이런 문제 설정은 꽤 의심스럽다. 라투르가 투쟁의 대상으로 설정하는 것은, 프레이저의 표현을 빌리면 진보적 신자유주의와 우파 포퓰리즘, 미국식으로 말하면 민주당과 공화당, 바이든과 트럼프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는 투쟁의 관건을 생산 대 거주 가능성(또는 생성)으로 제시한다. 처음에 생산이라는 용어로 겨냥했던 것은 마르크스주의였는데, 어느새 그것은 신자유주의 정치의 두 세력이 되어 있다. 더욱이 생산을 비판하고 생성및 전 지구적 거주 가능성을 녹색 계급의 목표로 제시하는 것은, 사회적 갈등 내지 적대의 여러 물질적 형태들 가운데 오직 경제 또는 생산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닐까?


실제로 라투르의 신기후체제 및 녹색 계급 논의에서는 가부장제의 문제라든가 인종주의적-국민주의적 구조에 대한 분석 등을 찾아볼 수 없다.[같은 책, 67쪽에서 페미니즘과 탈식민주의 운동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의례적인 언사에 불과하다.] 왜 그럴까? 그것은 이것들이 생산에 비해 부차적인 문제이거나 그것에 (논리적으로) 종속된 문제라고 보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다시 그것은 생산, 더 정확하게는 자본주의 또는 신자유주의가 기후 위기의 핵심 원인이라고 파악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라투르가 막연하게 생산이라는 용어에 대해서만 말하고 마치 이 용어 하나로 마르크스주의적인 자본주의 분석 전체가 요약될 수 있다는 듯 간주하기 때문에, 기후 위기의 원인으로서의 자본주의는 손쉽게 인류, 또는 인간만의 생산과 재생산[같은 책, 25.]으로 대체된다. 아울러 계급투쟁 및 상이한 사회적 적대들 사이의 절합articulation이라는 복잡한 문제는 당위적인 요구로 대체되는 경향이 있다.[절합 개념에 관해서는 당연히 에르네스토 라클라우, 샹탈 무페,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급진 민주주의 정치를 향하여, 이승원 옮김, 후마니타스, 2012 참조.] 이런 식이다. “사회운동의 역사 전체가 보여주듯이 태도, 가치, 문화를 이익의 논리와 동조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아주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다음으로 친구와 적을 분명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이어서 많이 언급된 계급의식을 키워야 한다. 끝으로 정치적 제안을 창출하여 계급들이 제도화된 형태로 갈등을 표현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브뤼노 라투르, 니콜라이 슐츠, 같은 책, 90.]


그런데 이렇게 되면 첫째, 라투르가 제안하는 인류세의 정치 내지 인류세의 민주주의가 여타의 진보적인 민주주의 정치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 둘째, 더 나아가 라투르가 제안하는 인류세의 정치가 사실 좌파 포퓰리즘의 생태주의적 판본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실제로 라투르는 두 저서에서 정치가 인간의 행위성 및 이익을 근간으로 한다는 점을 긍정한다. 그가 변화시키려고 하는 것은 인간의 이익 내지 이해관계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인간들 및 그들의 이익profit을 위한 정치 이외에 다른 정치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은 명백하다! 이 점이 문제가 된 적은 결코 없다. 문제는 항상 이 인간의 형태와 구성에 관한 것이었다. 신기후체제가 문제삼는 것은 인간의 중심적 위치가 아니라 그 구성, 존재, 형상화figuration, 한마디로 운명이다. 그런데 여러분이 이런 것들을 변경한다면, 여러분은 또한 인간의 이해관계intérêts에 대한 정의를 변화시키는 것이다.”[브뤼노 라투르, 같은 책, 122~123. 번역은 일부 수정.] 하지만 인류세 또는 자본세를 맞아 인간의 이해관계에 대한 정의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요구는 라투르와 같이 인류세의 정치를 추구하는 이들에게만 고유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앞에서 제시한, 넓은 의미의 생태사회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이론가들도 (그들 사이의 첨예한 입장 차이에도 불구하고) 공통적으로 제기하는 쟁점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지구 시스템의 변동에 따른 다양한 형태의 생태적 재난이 시간이 갈수록 빈발하는 상황에서 이전처럼 경제성장이나 생산력의 증대를 진보의 척도로 삼거나 자연을 무상의 자원으로만 간주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사실 1972년 로마클럽이 성장의 한계를 펴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이미 오십 년 전에 제시된 통찰이다.] 더 나아가 그것은 차크라바르티나 해러웨이가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역설하듯이 행성적인 차원의, 또는 -산적인sympoietic지구에 관한 존재론 및 인간학, 더 나아가 윤리학적 성찰을 요구할 것이다.[이 점에 관해서는 생태사회주의 내부에 큰 이견이 존재하는데, 나 자신은 다소간 교조주의적 입장을 고수하는 포스터나 말름, 또는 사이토보다는 제이슨 W. 무어의 입장에 동조하는 편이다.]


그럼에도 라투르가 두 권의 저서에서 생태사회주의를 포함한 기존의 좌파 정치와 자신의 정치 사이의 뚜렷한 차이를 부각시키려고 애쓰는 것은, 그가 보기에 자신이 제안하는 인류세의 정치가 지금까지의 좌파 정치와는 다른 매우 새롭고 근본적인 정치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문명 전체의 향방을 좌우하는 것일뿐더러, 다른 모든 투쟁의 전제 내지 관건이 되는 것이다. “주변부에 자리하는 것처럼 보였던 투쟁들 전체가 모든 이의 생존을 위해 핵심적인 것이 되었다. 이는 이전의 각 주변인을 머지않아 많은 이와 더불어 대규모로 수행할 필요가 있을 전투의 벡터로 만드는 놀라운 반전이다.”[브뤼노 라투르, 니콜라이 슐츠, 같은 책, 91. 번역은 수정, 강조는 원문.] 여기서 녹색 계급의 생태정치학에 관한 라투르의 이론적 수사법이 아주 뚜렷하게 드러나는데, 문제는 라투르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간에) 그가 비판하는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적인 정치학의 논리를 그대로 답습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최종 심급의 정치학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전통 마르크스주의의 한계를 지적할 때 흔히 거론되는 것이 최종 심급에서의 경제의 결정이라는 문구다. 이것은 보통 전통 마르크스주의의 경제주의를 지칭하기 위해 언급되는데, 라투르의 논리를 고려하면 그의 정치학을 최종 심급에서의 생태적 위기의 결정을 옹호하는 입장, 생태주의내지 인류세주의라고 부른다고 해서 이상할 것이 없다.


문제는 여기에서 라투르의 인류세 정치학의 비일관성 내지 미성숙함이 드러난다는 점이다. 방금 제시한 인용문만이 아니라 녹색 계급의 출현전체를 보더라도 라투르와 슐츠가 녹색 계급을 중심으로 일종의 좌파 포퓰리즘 내지 헤게모니의 정치학을 시도하고 있음을 잘 알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헤게모니 정치학이 성공적으로 수행되기 위해서는 적절한 절합이 필수적이며, 이러한 절합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최종 심급이라는 전제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라클라우와 무페가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이래로 늘 강조하듯이, 헤게모니의 정치 또는 급진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존재론적 우연성에 입각한 정치이기 때문이다. 반면 라투르(와 슐츠)는 한편으로 최종 심급으로서 생태주의를 고수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헤게모니 정치를 수행하려고 하는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이런 모순에서 벗어나 녹색 계급을 중심으로 한 헤게모니 정치를 수행하기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절합을 설명하고 구성하는 일이다. 이는 자본주의적 착취 관계를 둘러싼 적대, 가부장제 및 이성애주의와 관련된 적대, 인종적 배제와 차별이라는 적대의 물질성을 기후 위기 내지 지구 시스템의 변동이라는 문제에 대하여 논리적으로 종속적인 것으로 간주하거나 심지어 지나간 문제로 치부하지 않고 구조적 연관성 내에서 각자 상대적 자율성을 지닌 계기 내지 요소들로 설명하는 문제와 다르지 않다.[알튀세르라면 이것을 이미 주어진 구조화된 복잡한 전체의 존재론으로서 구조 인과성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Louis Althusser, “Sur la dialectique matérialiste(De l’inégalité des origines)”, Pour Marx, la Découverte, 1996(초판 1965); 루이 알튀세르, 유물론적 변증법에 대하여(기원들의 불균등성에 관하여), 마르크스를 위하여, 서관모 옮김, 후마니타스, 2017.] 프레이저가 좌파의 길또는 원제에 더 가깝게 번역하자면 식인 자본주의에서 설득력 있게 시도하고 있는 작업이 바로 이것이다.[Nancy Fraser, Cannibal Capitalism: How our System is Devouring Democracy, Care, and the Planetand What We Can Do About It, Verso, 2022; 낸시 프레이저, 같은 책.]


하지만 라투르의 인류세의 정치학이 구체적으로 표현되는 두 저작에서 이와 같은 절합에 대한 관심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그 대신 라투르는 마치 녹색 계급이 예컨대 노동자계급보다 더 포괄적이면서 (현재의 정세를 더 적합하게 반영한다는 점에서) 그것을 대체하는, 미래의 다수자 계급인 것처럼 강변한다.[이는 이십여 년 전에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가 다중이라는 개념으로 했던 작업을 연상시키지만, 정치학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그 난점들에도 불구하고 다중의 정치학이 훨씬 더 구체적이고 정교하다. 다중의 정치학에 관한 스피노자주의적 비판으로는 진태원, 을의 민주주의새로운 혁명을 위하여, 그린비, 2017 6장과 11장을 참조.] 이 경우 녹색 계급의 정치는 고사하고 그 정치학은 한편으로는 종파적인 하나의 생태주의 정치학에 머물든가, 아니면 계급 정치를 내세우고 있음에도 모두(심지어 인간만이 아니고 생명체만도 아닌, 모든 대지족’)에게 호소한다는 점에서 사실은 좌파적(이거나 우파적)인 정치학도 아닌 중도 정치학에 그치고 말 위험이 있다.[이 경우 녹색 계급의 생태정치는 사실 좌파 포퓰리즘에 미치지도 못할 것이다. 좌파 포퓰리즘의 관점에서 녹색 민주주의 혁명을 추구하는 샹탈 무페의 관점과 비교해보라. 샹탈 무페, 녹색 민주주의 혁명을 향하여좌파 포퓰리즘과 정동의 힘, 이승원 옮김, 문학세계사, 2022.] 요컨대 라투르(및 그를 따르는 이들)의 인류세의 정치는, 스스로 표방하는 야심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아직 갈 길이 너무 멀다.


라투르의 인류세의 정치가 드러내는 모순 내지 난점들은 제인 베넷의 신유물론적인 생태정치학에서 또다른 방식으로 드러난다. 베넷은 지금까지의 정치학이 인간에게만 배타적으로 행위성을 부여해왔으며, 이 때문에 급진적인 민주주의 이론가조차 민주주의의 범위를 인간으로만 한정해왔다고 비판한다. 베넷은 특히 감각적인 것을 다시 나누고 지각 가능한 것의 체제를 전복”[제인 베넷, 같은 책, 262.]시키는 파열의 작용(마치 지진과 같은 비인간 사물의 행위성을 연상시키는 은유)에서 민주주의의 핵심을 발견하려고 하면서도 합리적인 담론 활동을 수행할 수 있는 인간에게만 데모스의 자격을 부여하는 자크 랑시에르의 정치 이론에서 이러한 한계 내지 모순의 뚜렷한 사례를 발견한다. 이런 인간 중심적인 민주주의론으로는 인간의 정치적 행위에 대해 구성적 조건을 이루는 비인간적 사물의 영향을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질문들을 제기한다. “미국인의 전형적인 식습관이 이라크 침공을 유발하는 프로파간다에 대한 광범위한 감수성을 불러일으키는 데 어떠한 역할을 수행하는가?”[같은 책, 264.]가족농이 기업식 농업으로 전환될 때, 직접 음식을 준비하는 문화가 패스트푸드 소비문화로 변할 때, 공중에서 피비린내나는 전쟁이 펼쳐질 때, 석유 채굴과 유통이 가진 폭력을 인식하지 않은 채 연료를 소비할 때”[같은 책, 280.] 생태계가 어떤 변화를 겪고, 인간의 생활양식이 어떻게 굴절되며, 개인들 및 집단들의 정체성 형성이 어떻게 변환되고 이것이 정치에 어떤 효과를 초래하는가?


이런 질문들은 충분히 의미가 있고 중요한 질문이며, 이를 민주주의 정치의 이론적 요소로 포함하는 것은 인류세 시대 진보 민주주의 이론의 공통적인 과제 중 하나가 될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또한 간과할 수 없는 규범적 난점이 존재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이하의 논의는 진태원, 인류세, 신유물론, 스피노자, 코기토100, 2023에서 일부를 가져왔다.] 베넷은 2003년 미국과 캐나다를 연결하는 송전망의 이상 작동으로 인해 발생한 대규모 정전 사태를 인간과 비인간(전기, 발전장치, 송전선, 전력 회사, 소비자, 연방 에너지규제위원회 등) 사이의 교호-작용trans-action및 이를 통한 공중 형성의 좋은 사례로 제시한다. 문제는 베넷이 이렇게 하면서 이런 대규모 재난에 대한 구조적 책임의 문제를 회피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다양한 인간들과 비인간들이 함께 작용하는 배치의 행위성에 주목할 경우, 그로 인해 발생한 결과(오천만 명에게 영향을 미친 대규모 정전 사태)에 대한 책임을 어떤 특정한 개체나 집단 또는 특정한 배치에 귀속시킬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전력 관리를 민영화한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단행한 의회 및 행정부와 이러한 개혁의 수혜를 받고 최대한의 수익을 올리기 위해 전력 관리의 안전성을 소홀히 한 전력 회사들은 배치의 행위성의 여러 행위소actant들 중 하나에 불과하며, 따라서 그들에게 이 결과의 책임 대부분을 묻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는 특정한 집단이나 개체에 책임을 묻는 것은 행위적 능력들의 망을 정교하게 식별하지 못하고 소모적인 책임 공방을 일삼을 뿐인 도덕주의 정치”[제인 베넷, 같은 책, 111.]에 불과하다고 일축한다.


단일한 인간 행위자들에 관한 가정에 입각하여 사건을 설명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베넷의 주장은 일리가 있지만, 이것을 근거로 정치적 책임을 분산시켜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다소 단순한 주장인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생각하면, 아이리스 매리언 영이 제안한 바 있는 구조적 부정의와 그것에 대한 정치적 책임(‘집단적 책임’)을 묻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해진다.[아이리스 매리언 영, 정의를 위한 정치적 책임, 허라금 외 옮김,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2018.] 흥미롭게도 영은 개별 행위자의 잘못된 행위나 국가의 억압적 정책과 구별되는 도덕적 잘못”[같은 책, 115.]으로 구조적 부정의를 정의하면서, 이러한 부정의는 보통 정상적이라고 간주되는 범위, 곧 허용된 규칙과 규범의 범위 안에서 수많은 개인들과 집단 및 제도가 각자 자신들의 목적과 이익을 추구하면서 비의도적으로 상호작용한 결과 발생하게 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베넷이 우발적인 배치의 행위성을 말하면서 분산된 책임을 말하는 반면, 영은 우발적인 상호작용들의 결과로 산출되는 구조적 부정의의 집단적 책임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비생명적 사물의 행위성을 긍정하는 것이 구조적 책임을 불가능하게 한다면, 그것은 민주주의의 진전을 뜻하는 것인가 아니면 퇴보를 의미하는 것인가? 여기에 대해 인류세의 민주주의론은 어떤 답변을 제시할 수 있고 또 제시해야 하는가?


 

하지만 그럼에도

 

이제 마지막으로 한 가지 논점만 언급하면서 이 글을 마무리하겠다. 인류세 문제에 관해 가장 흥미롭고 영향력 있는 인문사회과학적 논평을 제시한 사람 중 한 명은 앞에서 언급한 디페시 차크라바르티라고 할 수 있다.[디페시 차크라바르티, 같은 책.] 차크라바르티의 작업의 의의는 무엇보다 지구온난화 내지 기후 위기의 문제를 역사학과 연결시키되, 그것을 지구온난화의 역사같은 특수한 역사학의 차원이나 서발턴의 관점에서 본 지구온난화같이 서발턴 역사학의 단순한 연장으로 연결시키지 않고, 역사학이라는 것(따라서 인문학적인 것) 자체의 본질에 관한 근원적인 문제제기의 방식으로 고양시켰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그의 핵심 주장 중 하나는 인류세의 문제가 단지 자본주의나 지구화의 문제로 한정될 수는 없으며, 인간 문명의 지질학적·생물학적 토대에 대한 (자연과학적 분석 및) 인문학적 성찰과 대응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생태사회주의자들의 이런저런 분석, 예컨대 포스터의 물질대사 균열에 관한 논의나 말름의 화석 자본에 관한 분석, 또는 탄소 민주주의에 관한 티머시 미첼의 연구[티머시 미첼, 탄소 민주주의화석연료 시대의 정치권력,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옮김, 생각비행, 2017.] 등은 의미가 있지만 인류세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시야가 필요한데, 인류세 문제를 기껏해야 오백 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 자본주의적 지구화의 수준에서만 사고하는 생태사회주의자들의 문제의식 기저에는 인간 중심주의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논의는 요컨대 생태사회주의자들의 문제제기는 타당하지만 그럼에도 한계가 있고 맹목적이라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러나 앞에서의 논의가 얼마간 일리가 있다면, ‘하지만 그럼에도의 논리는 차크라바르티 자신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게 아닌가 한다. 이 점과 관련된 교훈적인 사례는 차크라바르티에 대한 슬라보예 지젝의 비판이다. 지젝은 차크라바르티의 문제제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적으로 답변한다. “우리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특수한 교착상태를 먼저 해결함으로써만 (인간 종의 생존이라는) 보편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 생태학적 위기의 열쇠는 생태학 그 자체에 존재하지 않는다.”[Slavoj Žižek, Living in the End Times, Verso, 2010, p. 334; 디페시 차크라바르티, 같은 책, 110쪽에서 재인용.] 지젝 특유의 논법을 보여주는 이러한 답변은, 한편에서 보면 이매뉴얼 월러스틴이 말한 혁명의 2단계 전략의 논리를 전형적으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문제적이지만,[혁명의 ‘2단계 전략에 관해서는 진태원, 5·18과 불화하기, 민주주의와 인권232, 2023, 83~84쪽 참조.] 다른 한편에서 보면 인류세와 민주주의라는 우리의 주제와 관련된 한 가지 규범적 핵심을 담고 있다. 그것은 생태학적 위기의 열쇠는 생태학 그 자체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차크라바르티 자신도 지적하다시피 현재의 기후 위기 내지 생태학적 위기는 오직 인간(및 일정한 고등 생명체들)에게만 위기일 뿐이며, 더 나아가 그 위기가 표현하는 지구 시스템상의 변동은 인간의 현상학적 경험의 시간 지평을 훌쩍 뛰어넘는 시간(수십만 년 내지 수백만 년)이 경과되면 다시 정상화될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어떤 인식론적 지평(예컨대 지구시스템과학이나 천체물리학 같은)에서는 아무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이렇게 보면 차크라바르티가 행성의 역사에는 도덕적 명령의 지위를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디페시 차크라바르티, 같은 책, 145.]고 말하는 것은 일리가 있다. 행성의 역사에서 오억 년 전에 발생한 캄브리아기 대폭발, 인간의 존재를 가능하게 한 생명 형식의 폭발이 일어난 시기가 의미 있고 중요한 시기로 규정되는 것은 오직 인간의 관점에서만 그럴 뿐이다. 그 시기 이전의 수십억 년 동안 지구 행성의 표면에 존재하던 혐기성 박테리아의 관점에서 보면 캄브리아기 대폭발은 사실 거대한 재앙의 사건으로 기록되어야 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차크라바르티가 인류세가 인문학에 의미 있는 범주, 따라서 어떤 규범적이고 정치적인 함의를 갖는 범주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가 보기에 인류세의 문제, 따라서 행성적인 문제는 인간의 삶을 확보한다는 인간 정치의 매우 근본적인 바로 그 전제가 훼손되는 팽창과 발전의 지점에 도달했으며, “세계의 재야만화再野蠻化”, 전 세계의 인간적-정치적 프로젝트를 파괴”[같은 책, 152.]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지속 가능성이 아닌 거주 적합성이라는 규범적 요구, 곧 인간이 아닌 생명복잡하고 다세포적인 생명 일반과 인간만이 아닌 그것의 지속”[같은 책, 139. 강조는 원문.]이라는 요구를 함축하는 변화다. 이 때문에 그는 행성 위기에 적합한 정치 이론은 인간의 삶을 지킨다는 동일한 오랜 전제에서 시작해야겠지만, 이제는 새로운 철학적 인간학, 즉 생명의 망에서와 지구와 행성의 서로 연결되지만 상이한 역사에서의 변화하는 위치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근거해야 할 것”[같은 책, 153.]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라투르보다 더 신중한 그의 논의는 인식론적이고 윤리적인 측면에서 여러 가지 통찰을 제시해주지만, 인류세와 민주주의라는 우리의 주제, 또는 인류세 시대의 민주주의 정치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에 관해서는 사실 말해주는 바가 그리 많지 않다. 사실 라투르, 차크라바르티, 해러웨이 등의 관점은 공통적인 규범적 요구를 담고 있다. 그것은 라투르식으로 말하자면 가이아의 관점에서 또는 해러웨이식으로 말하면 툴루세Chthulucene라는 개념에 입각하여 세계화와 행성적인 것, 인간과 비인간, 생명과 비생명의 관계를 사유하는 길이다. 피모아 크툴루Pimoa cthulhu라는 거미의 학명에 함축된 땅속의chthonic라는 어근과 더듬이를 의미하는 라틴어 텐타쿨룸tentaculum에서 시사를 받아 -산적sympoietic지구를 사유하기 위해 고안된 툴루세라는 개념은 그 명칭 자체에서 이미 인간과 비인간, 생명과 비생명의 구별 및 분리를 넘어서며, 유기체와 환경이라는 기본적인 구별을 해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을 더이상 다른 생명체들과 분리하지 않고, 더욱이 다른 생명체들 및 지구 전체에 대한 주인으로 사고하지도 않고, 공생적 집합체로서 다른 홀로바이온트holobiont들과 더불어 지구에서 번성하는 복수종의 함께-되기, 공생을 실행하는 것으로 사유하기.


그런데 이 대목과 관련하여 두 가지 질문을 제기해볼 필요가 있다. 첫째, 인간이라는 존재자, 독특한 실재를 이처럼 사유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책임 있는 태도일까? 다시 말해 존재론적 차원에서 인간이 다른 생명적이고 비생명적인 실재들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독특한 실재이기 때문에 인간이 다른 존재자 또는 홀로바이온트들과 공생하기를 실행해야 한다고 하면, 그것은 윤리적으로 인간에게 다른 독특한 실재들과 같은 정도의 윤리적 책임을 부여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인간이라는 독특한 실재가 단순히 여느 독특한 실재들 중 하나의 지위로 한정하기 어렵다면, 그것은 바로 인간이 다른 독특한 실재들과 달리 막강한 행위능력을 가지고 인류세라는 이름(또는 자본세 및 툴루세, 플랜테이션세 등과 같은 다른 이름들)을 고안하게 만든 지구 시스템의 변동을 초래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클라이브 해밀턴이 정당하게 주장하듯이 인류를 지구 전체에 대한 책임감을 지닌 존재자로 사고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20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비로소 최초로 단일한 개체안트로포스가 되었고, 엄밀히 말해 새로운 유형의 지구에서 핵심 행위자가 되었다”[클라이브 해밀턴, 같은 책, 87. 강조는 원문.]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게 아닐까?


둘째, 해러웨이가 제안하는 방식의 함께-되기를 실천할 수 있는 인간은 평범한 인간이 아닐 것이다. 오직 스피노자가 정의하는 의미에서 능동적인 인간만이 그런 작업을 수행할 수 있다. 문제는, 스피노자가 윤리학에서 때로는 현자와 무지자로, 때로는 자유인과 예속자로 구별하듯이, 인류 대다수는 아마도 이러한 의미의 능동성보다는 수동성을 나타내는 이들일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수동성은 다양한 형태의 적대들로 표현된다. 만약 그렇다면, 능동적인 삶의 방식에 대한 호소는, 역시 스피노자가 말하듯 인간들을 존재하는 그대로 인식하지 않고 그들이 그렇게 존재했으면 하고 원하는 대로 인식하는 것이고, “어떤 실천적인 용도를 지닐 수 있는 정치학이 아니라 단지 환상으로 생각될 수 있고 오직 유토피아 내지 시인들의 황금시대에서나 가능한 정치학”(정치론11)을 산출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이율배반에 빠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로 우리 인간을 여느 독특한 실재들 중 하나로 위치시켜야 하고 그런 위치에 걸맞은 윤리와 정치를 실행해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책임 있는 윤리와 정치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인간은 여느 독특한 실재에 머물러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다른 독특한 실재들(우리가 자연내지 지구라고 부르는 것을 형성하고 있는)과의 관계가 항상 우호적이거나 조화로운 관계가 아니라 갈등과 적대, 심지어 상호 파괴의 가능성을 함축하는 것이라면(해러웨이는 정당하게도 공생상호 이득이 되는이라는 말과 동의어가 아니다”[도나 해러웨이, 같은 책, 109.]라고 지적하고 있다), 우리는 어쩌면 공생을 위해 자신의 파괴를, 적어도 (심각한) 손해를 허용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더욱이 자신의 파괴 내지 손해를 감수하는 공생은 복수의 사회적·생명적 적대들을 가로질러 실현될 수밖에 없다. 요컨대 단일한 집합으로서의 인류라는 것이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 남성과 여성, 성적 다수자와 성적 소수자, 백인종과 유색인종 같은 적대적 대립자들을 통해서만 실존하고 생성될 수 있다면, 단일한 집합으로서의 생명체라는 것은 더욱 다양한 적대와 갈등을 통해서만 공생하고 생성될 수 있을 것이다. 인류세의 민주주의가 사고해야 할 주요 과제 중 하나가 아마도 이것일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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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1일 이번 주 수요일 성공회대학교에서 <폭력과 애도 II> 학술대회가 개최됩니다. 


관심 있는 분들은 많이 참여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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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대학교 민주자료관에서 <5.18과 용서>라는 주제로 16차 콜로키움을 개최합니다. 


시간은 이번 주 금요일 오후 1시 30분 ~ 4시 30분입니다.


아래는 발표문 요지입니다. 


관심 있는 분들의 많은 참여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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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과 용서발표 요지

 

박경섭(5·18기념재단 5·18국제연구원)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2021년부터 적극적으로 사과와 용서의 자리를 마련하고, 피해자와 가해자들이 점차 사망에 이르면서 용서와 화해는 5·18의 중요한 쟁점이 되고 있다. 20232월 오월단체와 특전사동지회의 용서와 화해를 위한 대국민 공동선언은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용서의 문제가 복잡한 이유는 진실규명과 책임의 문제가 완결되지 않았을 뿐만아니라 용서의 주체와 대상의 문제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용서와 화해의 문제가 내포하고 있는 또 다른 문제는 5·18에 대해 이전과 상이한 관점이 대두되고 있다는 데 있다. 용서의 주체인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점은 5·18을 항쟁이나 운동이 아니라 가해와 피해의 사건으로 축소할 수 있는 여지를 담고 있다. 항쟁의 진실을 직접적인 가해와 피해 당사자의 관점에서 보면 용서의 자격 또한 직접 피해자에 한정될 수밖에 없다.


5·18과 관련된 용서의 문제는 5·18 당시 저질러진 죄의 총체적 실체를 밝혀야 하는 진실의 문제, 죄와 관련된 책임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진정한 용서를 무조건적 용서라고 간주한다면 진실규명과 책임의 이행이라는 선결 조건을 없이 용서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5.18 당시 계엄군이 저지른 폭력은 국가기구가 동원된 반 인도적’(against humanity) 범죄이다. 반인도적 범죄에 대해 용서가 가능한가에 대한 문제와 더불어 가해자의 죄와 관련하여 가장 첨예한 문제 중 하나는 부당한 명령을 수행한 사병들의 죄와 책임이다. 죄의 경중에 따라 용서할 수 있는 죄가 있고 그렇지 않은 죄가 있을까? 더불어 개인의 죄뿐만 아니라 상명하달의 체제를 통한 국가폭력과 관련된 책임의 범위는 당대의 국민에게도 확장될 수 있는지도 검토될 필요가 있다. 용서를 정치적 화해의 무대에 올리기 이전에 용서와 관련된 죄의 분별이 선행되어야 하며, 이 진실과 관련된 우리의 책임의 문제와 마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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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8일 오는 금요일 성공회대학교 민주자료관에서 "폭력과 애도 I"이라는 제목 아래 


학술대회를 개최합니다. 


이 학술대회는 <폭력과 애도>라는 주제로 기획된 연속 학술대회의 첫번째 모임입니다. 


관심 있는 분들의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아래는 이 학술대회의 취지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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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한강 선생은 [소년이 온다]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한강 작가의 이 말은 국가폭력과 사회적 폭력의 역사로서 한국 현대사의 핵심적인 측면을 집약적으로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4.3에서 5.18에 이르기까지, 선감학원에서 형제복지원, 그리고 수많은 부랑인장애인 수용시설에 이르기까지, 삼풍백화점 참사에서 세월호 참사를 거쳐 10.29 이태원 참사에 이르기까지, 한국 현대사는 애도하지 못한 죽음들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비단 한국 현대사에만 해당하는 일이 아닐 것입니다. 일본에서, 중국에서, 베트남에서, 라틴아메리카에서 그리고 세계 도처에서 국가폭력과 사회적 폭력은 애도하지 못한 죽음들, 애도하지 않아도 되는 죽음들을 낳았고, 그 죽음들은 상실되거나 망각된 채 유령으로서 우리 사회의, 지구의 안팎을 떠돌고 있습니다.


주지하다시피 1987년 민주화 이후, 그리고 19955.18광주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 2000년 제주4.3 특별법 등이 제정되고 2005년 진실과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출범하면서 국가폭력과 사회적 폭력에 의한 민간인 학살의 진상이 밝혀지고 희생자들에 대한 위령과 신원회복, 보상 작업이 전개되어 왔습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한편으로 여전히 지하에 묻혀 있는 역사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한 작업을 지속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국가폭력과 사회적 폭력에 대한 망각과 왜곡의 시도에 맞서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습니다. 폭력에 무참하게 희생된 이들을 애도하는 작업, 특히 오늘날에도 여전히 애도할 수 없거나 애도해서는 안 되는 이들로 배제된 이들을 애도하는 작업이야말로 우리가 감당해야 할 핵심 과제일 것입니다.


이런 취지에 따라 성공회대학교 민주자료관 한국현대사와 회복의 인문학사업단에서는 폭력과 애도라는 주제로 20232학기~20241학기에 세 차례에 걸쳐 연속 학술대회를 진행하고자 합니다. 이중 1차 주제 학술대회 취지와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1차 주제: 국가폭력과 사회적 폭력의 희생자들에 대한 애도 작업의 역사

 

한국 사회에서 국가폭력과 사회적 폭력은 숱한 희생자들을 낳았지만, 오랫동안 그들을 애도하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민주화 이후에도 여전히 애도작업은 쉽지 않은 일이고, 폭력의 진상은 여전히 상당 부분 어둠에 묻혀 있습니다. “폭력과 애도라는 우리의 전체 주제를 구체화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애도 작업의 역사에 대한 재구성이 필요합니다. 제주 4.3은 누구를 애도하고 애도하지 않았을까요? 한국전쟁의 희생자들은 어떻게 애도되었고, 누가 왜 애도를 금지 당했을까요? 5.18에서 여전히 애도되지 못한 이들은 누구일까요? 이런 질문을 통해 우리는 애도작업이 단지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의 과제이고 미래의 가능성을 조형하는 일이라는 점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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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문화] 121호가 출간되었습니다. 


이번 121호에는 <후쿠시마 오염수의 과학, 누구를 위한 어떤 과학인가>라는 주제 아래


4분의 관련 전문가 필자 선생님들의 주목할 만한 원고가 실렸습니다.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바랍니다. 


121호 "권두언"을 여기 올려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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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호 권두언

 

전문가 중심주의를 넘어 시민참여의 과학으로


 

지난 824일 일본 도쿄전력이 후쿠시마 제1원전 내 오염수를 바다에 방류하기 시작함으로써 오염수 방류를 둘러싼 국내외의 뜨거운 논란은 일단락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겉보기에만 그럴 뿐, 오염수 방류를 둘러싼 쟁점은 결코 사라진 것도 아니고 사라질 수도 없는 것이다.


일본이 다핵종저감설비APLS로 방사성 동위원소를 처리한 후 희석하여 후쿠시마 오염수를 방류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한 20214월 이후 오염수 방류를 둘러싼 논란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지만, 방류를 허용할 것이냐 아니면 반대할 것이냐 하는 쟁점을 중심으로 전개되어왔다. 이 과정에서 방류를 허용해야 한다는 쪽은 대체적으로 도쿄전력의 오염수 방류가 과학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처리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이 과정을 거친 이후에 방류된 처리수는 인간의 신체를 비롯한 생태계에 거의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준의 안전성을 확보한 것이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보여 왔다. 일본 정부는 물론이거니와 국제원자력기구IAEA도 이런 이유로 오염수 방류에 정당성을 부여했으며, 윤석열 정부도 오염수 방류에 반대하는 이들을 비과학적인 괴담을 퍼뜨리는 무지몽매한 이들로 비난하면서 오염수 방류는 과학에 따라 합리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이기 때문에 당연히 허용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요컨대 오염수 방류 결정은 과학이라는 이름 아래 이루어졌고, 그 결정을 찬성하는 이들(일본정부, IAEA, 한국정부 등)도 바로 과학의 이름으로 자신의 견해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그런데 우리가 또 하나의 비과학적인세력으로 낙인찍힐 위험을 무릅쓰고 이번 호에서 특집으로 다루고자 하는 것은 과연 여기서 말하는 과학이 과연 어떤 과학이며,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과학인가 하는 문제다.


서양에서 과학은 고대 그리스 이래 참된 인식의 대명사처럼 간주되어 왔으며, 특히 17세기 과학혁명 이래 과학은 진리에 대한 배타적인 독점의 권리를 부여받아왔다. 칸트 철학이 잘 보여주듯 근대 철학은 과학(칸트에게는 뉴턴)의 진리 인식의 근거를 정당화하는 것을 자신의 소명으로 삼았고, 갈릴레이, 뉴턴, 라부아지에, 다윈, 아인슈타인 같은 근대 과학의 거장들은 진리의 순수한 사도로서 존경을 한 몸에 받아왔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갈릴레이의 말만큼 진리 탐구의 결정체로서 과학을 상징하기에 적절한 문구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20세기 후반부터 새로운 학제 연구로 발전해온 과학기술학(STS)이 잘 보여주었고, 국내에서도 김동광 선생이나 김명진 선생을 비롯한 훌륭한 연구자들의 노작()으로 잘 알려지게 되었듯이, (그 이전 시기에도 어느 정도 적용되는 것이지만) 20세기에, 특히 2차 세계대전 이후 본격화된 냉전의 시대에 이러한 과학 및 과학자 상은 신화에 가깝다. 왜냐하면 테크노사이언스(technoscience)로서의 현대 과학 연구의 주요 행위자는 더 이상 개별 과학자가 아니라 정부, 기업, 대학이며, 오늘날의 과학 연구는 주로 거대 기업의 주도로 진행되는 대규모 프로젝트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이것은 물론 헌신적이고 진실한 과학 연구자들의 존재와 중요성을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대규모 프로젝트로서의 과학연구를 대표하는 것이 원자폭탄 제조계획이었던 맨해튼 프로젝트나 소련과의 우주개발 경쟁 과정에서 탄생한 아폴로 계획 같은 것이었으며, 오늘날의 생명공학이나 인공지능 연구 역시 테크노사이언스로서 현대 과학 연구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대규모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다.


테크노사이언스로 전개되는 과학 연구의 본질적인 특징 중 하나는 불확실성이나 위험이 존재한다고 해도 지속적으로 수행된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서로 연결된 이유들이 존재하는데, 맨해튼 프로젝트나 아폴로 계획이 잘 보여주듯 전쟁에서 승리하거나 막강한 적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국가 안보적인 동기가 작용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신자유주의 세계화 이후 더 노골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과학기술의 상업화에 따른 경제적 이익 추구(특허나 지적 재산권의 확보 등)도 본질적인 이유로 작용하고 있다.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에 대해 우리나라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찬성하고 있는 쪽이 한국원자력학회 및 그 구성원들이라는 사실은 원자력 연구가 대표적인 테크노사이언스 중 하나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으며, 현 정부가 이전 정부의 기조와 달리 오염수 방류에 관한 일본 측 입장을 적극 두둔하고 심지어 홍보하고 있는 상황은, 소형모듈원전(SMR) 개발이라는 경제적 동기를 넘어 한일 동맹의 추구라는 군사 안보적인 동기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오늘날 이러한 경제정치군사안보적인 동기들에서 자유로운 테크노사이언스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을 감안한다고 해도, 이번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결정 및 그에 대한 우리나라 정부의 대응 방식은 자못 놀라운 것인데, 오염수 방류 결정이 초래할 보건적환경적 위험성에 대한 다양한 방식의 문제제기를 무시할 뿐만 아니라, 대통령과 총리를 비롯한 정부의 최고위 당국자가 그것을 비과학적인 괴담으로 몰아붙이면서 과학이라는 이름 아래 일체의 반대와 비판을 막무가내로 억압하고 있기 때문이다.


1992년 환경과 개발을 위한 유엔각료회의에서 제출된 리우선언이나 1998년 환경운동가들 및 과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진 윙스프레드(Wingspread) 선언에서는 어떠한 행위가 인간의 건강이나 환경에 위해를 일으킬 수 있다면, 인과관계가 과학적으로 충분히 확립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사전주의적 조치를 취해야 한다. 이 맥락에서 대중이 아닌 그 활동의 지지자들이 증명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취지의 사전주의 원칙(precautionary principle)이 정식화된 바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역사상 유례가 없는 사고 원전 오염수 방류 문제는 일본 내 피해 예상 지역 주민들을 비롯한 국내 당사자들만이 아니라 한국과 중국 및 태평양 연안 도서국들을 비롯한 주변국들과 그 시민들과의 충분한 사전 협의와 최대한 신중한 검증 과정을 거쳐서 결정되었어야 한다. 또한 우리나라 정부는, 단순한 민족주의 감정을 넘어, 무엇보다도 이 방류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피해자들의 관점에서 최대한 비판적이고 신중한 검증 및 대응 방식을 채택했어야 하지만, 속전속결로 일본 정부의 결정을 받아들였으며 그 결정의 정당성을 스스로 홍보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것은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문제가 인식론적 측면에서 이해된 과학적 합리성과 객관성을 넘어서는 문제라는 점을 극명하게 드러내준다. 실로 오염수 방류 결정을 둘러싼 그동안의 전개과정은 현재의 사태가 과학이라는 미명 아래 냉전반공주의를 정당화하고 그 이념 아래 결속한 카르텔의 최대 이익을 추구하려는 계산의 결과가 아닌지 의심해보게 만든다. 흥미롭게도 우리나라 정부는 물론이거니와 일본 정부도 자신의 비판 세력을 괴담을 유포하는 불순분자로 치부하고 있는데, 환경사학자 케이트 브라운의 󰡔플루토피아󰡕나 제이콥 햄블린의 󰡔저주받은 원자󰡕 같은 냉전 시대 핵개발 역사에 관한 비판적 저작들은 이러한 공통적인 태도가 사실 맨해튼 프로젝트 이후 전개된 핵개발의 역사에서 좌우 양 진영을 막론하고 각 국의 정부와 그에 협력하는 과학자들이 일관되게 견지한 태도였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과학이라는 이름을 한껏 내세우면서 오염수 방류를 결정하고 그것을 정당화한 도쿄 전력이나 IAEA의 보고서를 비판적으로 평가해보는 일이며, 더 나아가 왜 역사 속에서 이러한 일들이 반복되고 있는지 그 연원을 따져보는 일이다. 그것은 이번 사태가 일회적이거나 역사상 미증유의 사건인 게 아니라, 핵개발이 시작되면서부터 지속적으로 되풀이되어온 보건적생태적 재앙의 한 단면임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더 나아가 경제정치군사안보 카르텔에 묶인 전문가 중심주의과학을 넘어 시민참여적 과학을 모색하는 길은 어떻게 가능한지 사고해볼 필요가 있다. 특히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 집회나 가습기 참사 이래로 오만한 과학의 이름으로 피해자들의 정당한 요구를 괴담으로 묵살하는 것이 관행이 되어왔다면 더 그럴 것이다. 이번 특집은 이런 의도 아래 기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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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특집에는 네 편의 글이 수록되었다. 먼저 국내에서는 보기 드문 냉전기 과학사 연구자인 우동현 선생은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핵개발의 역사를 핵폐기물 재난의 역사로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19457월 맨해튼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미국 뉴멕시코주에서 최초의 핵실험이 수행된 이래 지구 각지에서는 2천회 이상의 핵실험이 진행되었는데, 그것은 지구를 상대로 한 핵전쟁이라고 할 만큼 인간의 건강 및 환경에 심각한 피해를 산출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고도의 과학을 필요로 하는 핵개발이 처음부터 국가안보와 결부되었으며, 정책결정자들과 과학 전문가들이 핵 관련 지식의 생산과 유통을 독점한 가운데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더욱이 케이트 브라운의 󰡔플루토피아󰡕가 빼어나게 보여준 것처럼, 냉전 시대 서로 치열한 경쟁을 벌였음에도 미국과 소련은 핵개발만이 아니라 핵폐기물 처리과정에서도 동일한 원칙을 공유하면서 서로를 모방했다. ‘자연의 싱크대라는 논리 아래 그들은 핵폐기물을 자연에 무단 투기함으로써 처리 비용을 절감하려고 했고, 그대로 놔두면 자연이 방사능을 희석해줄 것이라고 믿었다.


선생은 더 나아가 핵개발과 핵폐기물 처리는 식민주의를 전제한다는 점을 드러내고 있다. 우라늄 채굴부터 사용후핵연료 처분에 이르기까지 핵 활동이 수행되는 구조를 존속하기 위해 필수적인 다양한 착취 체계를 일컫는 핵 식민주의는 중심부의 이익 및 상호 경쟁을 위해 이루어지는 핵개발과 핵폐기물 처리의 비용과 피해를 뒤집어쓰는 누군가가 항상 존재한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선생이 전해주는 북한 풍계리 핵실험장이 위치한 함경북도 길주군 주민들 사이에 떠돈다는 귀신병이야기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유럽과 달리 고리핵발전소 반경 30km 이내 340만 명이 거주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이야기다. 심지어 후쿠시마 원전 수소폭발 당시 반경 30km 이내 거주하던 주민은 17만 명밖에 되지 않았다.


두 번째 글은 원자력 안전 시민감시를 위한 NGO 전문가로 활동해온 이정윤 선생이 집필해주었다. 선생은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결정에 과학적 정당성을 부여해준 국제원자력기구의 보고서가 과연 IAEA와 일본 정부, 그리고 한국 정부 및 일부 과학자들이 강변하는 것처럼 과학적근거에 따라 작성되었는지 세심하게 따져보고 있다. 선생은 IAEA의 보고서가 사실 일본 자료를 아무런 독자적인 검증 과정 없이 그대로 받아들였을 뿐이며, 따라서 단지 과학이라는 형식에 맞춘 정치적 행위에 불과하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것은 크게 세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도쿄원전의 오염수 방류가 방사선 방호 및 안전성을 충분히 유지하고 있는지 검토해보면, 여러 가지 측면에서 문제점이 드러난다. 곧 폐로 원전에서의 오염수 배출에 관한 국제적인 안전 기준을 마련하지 않은 가운데 일본 국내 기준에 입각하여 방류가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주변 당사국 및 시민들의 의견을 청취하는 과정과 절차가 제대로 마련되지도 않고 있다.


또한 안전을 위한 리더십과 관리 측면에서도 오염수 배출 조건을 비롯한 주요 사항에 대해 독립적인 검증 체계를 마련해야 함에도 그것이 누락되어 있다. 아울러 방사선 방호가 최고 수준의 안전을 제공하도록 최적화되어야 하지만, 이것에 관한 독립 검증 과정이나 통제되지 않은 방사능 배출에 대한 평가도 빠져 있고, 방사선 확산 해석에서도 자의적인 기준 설정의 여지가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과연 도쿄 전력의 방사선 방호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는지 신뢰성이 결여될 수밖에 없다. 또한 현재 및 미래 세대의 건강과 환경 보호 문제에서도 도쿄 전력의 주장을 검증 없이 그대로 수용하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으며, ALPS 시설 이외에서 발생할 수 있는 사고 예방 대책도 제대로 검토하지 않고 있다. IAEA 보고서에는 장기적인 생태환경에 대한 검토가 빠져 있는 것이다. 선생은 이런 점들을 감안하면 IAEA 보고서는 도쿄 전력의 배출을 지원하는 보고서일 뿐 과학적이며 독립적임 검토 보고서로 볼 수 없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보고서를 과학적이라고 신뢰할 수 있을까?


세 번째 글에서 인류학자인 오은정 선생은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발생한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 이후 10여 년 동안 전개된 재난의 연대기를 몇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살펴보고 있다. 상정외(), 전원완전상실이라는 키워드는 후쿠시마 원자력 폭발 사고가 원전 설계 당시의 가정을 초과하고 스리마일이나 체르노빌 원전 사고를 넘어서는 핵재난의 성격을 띠고 있음을 간결하게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일본 법원은 이것을 오히려 도쿄전력의 경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구실로 만들어주었다. 피난과 살처분이라는 키워드는 원전 폭발 사고로 인해 주민들 및 가축들이 무방비 상태에서 희생의 대상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놀라운 것은 마음의 부흥, 후쿠시마 혁신 해안 같은 키워드들이다. 이런 끔찍한 핵재난을 겪었음에도 일본 정부는, 비판적인 학자들이 지적하듯 이것을 일본의 풍요로운 전후를 종결짓는 사건으로 받아들이기보다 오히려 경제부흥의 계기로 삼으려고 했으며, 방사능 오염을 걱정하는 주민들에게 마음의 부흥을 강권하면서 과도한 공포는 괴담일 뿐이라고 치부한 것이다. 선생은 이 기반 위에서 일본 정부가 동일본대지진으로 황폐화된 지역을 신산업단지로 조성하려는 후쿠시마 혁신 해안 프로젝트를 전개하면서, 참혹한 재난을 재난 극복의 서사의 일환으로 편입하려는 구상을 전개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반면 원전 사고로 인해 피해를 겪은 주민들은 각종 질병에 시달리거나 고향을 등져야 하는 고통을 겪게 됐다. 원전 사고가 초래한 느린 폭력은 후쿠시마 원전 주변의 주민들에게 비가시적으로 확산되고 있지만, 테크노사이언스 카르텔은 새로운 경제 부흥의 프로젝트에 몰두하고 있는 것이다. 선생이 지적하듯 우리가 이것과 똑같은 연대기를 쓰게 될 날이 도래하지 않을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 네 번째 글에서 과학기술사회학자인 이영희 선생은 후쿠시마 오염수 해앙 방류를 둘러싼 논란의 와중에 우리 정부가 오염수 방류 결정을 비판하는 이들의 반대를 괴담으로 치부하면서 과학의 이름으로 억압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하고 정당한 태도인가를 따져보고 있다. 선생은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를 둘러싼 논란을 과연 과학괴담의 대립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한가에 관해 문제제기를 하면서 논의를 시작하고 있다. 그것은 오염수 방류를 우려하는 것에는 상당한 근거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정윤 선생이 상세하게 해명한 바와 같이 도쿄 전력의 오염수 처리 과정을 신뢰하기 어려울뿐더러, ALPS로 거르지 못하는 삼중수소가 인간의 건강에 어떤 부정적 영향을 미칠지 아직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고, 일본 정부와 도쿄 전력이 제시한 자료에만 근거를 둔 IAEA의 안전성 검증을 믿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 정부는 과학의 이름으로 이런 문제제기를 괴담이라는 이름으로 싸잡아 비난하고 있는데, 선생은 이러한 과학과 괴담의 대립이 이미 광우병 사태나 가습기 살균제 참사에서도 동일하게 제시된 바 있으며, 이는 과학기술 전문가들에게 위험평가와 관련된 판단의 권리를 독점적으로 귀속시키는 전문가주의로 인해 생겨난 결과임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전문가주의에 맞서 선생은 핵폐기물 처리와 같이 사회적환경적 위험을 초래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사전주의 원칙을 견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이러한 원칙을 견지하는 것은 자연히 인식론적 불확실성과 관련된 문제에 폭넓은 이해 당사자들을 비롯한 시민의 참여가 필요할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다는 관점과 연결된다. 선생은 그것만이, 테크노사이언스 카르텔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기 쉬운 오만의 과학에서 벗어나 민주주의적 가치와 생태적 가치에 부응하는 겸허의 과학을 실천하는 길이라고 결론 내리고 있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거니와 우리가 이번 특집에서 제기하고 싶은 것은 오염수 방류에 대해 찬성해야 하는지 반대해야 하는지 양단간에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점이 아니다. 올바른 결정을 내리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은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그 역사와 기저의 논리를 이해하는 일이며, 가능한 한도 내에서 다시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교훈을 얻고 대비하는 일이다. 특집에 수록된 네 편의 빼어난 글들은 앞으로 이 문제에 관한 중요한 판단의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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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꼭지에는 국내외 정세를 분석하는 세 편의 글을 수록했는데,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문제가 최근 전개되고 있는 동아시아 정세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글들을 특집에 대한 보론으로 읽어도 좋을 것이다.


먼저 본지의 편집위원인 강성현 선생은 홍범도 장군 흉상 퇴출 논란의 배후에는 2004~2005년 노무현 정부의 과거사 청산 작업에 대한 반발로 등장한 뉴라이트의 역사전쟁이 존재하고 있음을 세심하게 밝히고 있다. 2005년 뉴라이트는 올드라이트와 대비되는 자유민주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에 대한 강조, 엘리트주의와 법치주의 중시, 반일민족주의에 대한 비판, 북한 인권과 민주화론을 내세우며 등장한 이후 지금까지 3차례에 걸쳐 역사전쟁을 개시한 바 있다. 그 핵심은 한국의 반일민족주의를 약화시키고 그 대신 식민지 근대화론에 입각하여 자유민주주의(사실은 냉전 반공주의) 중심의 중등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작업이었다.


선생은 박근혜 정부 시절 역사교과서 국정화 시도가 좌절되면서 와해된 것처럼 보였던 뉴라이트가 현 정부의 이념적 실세로 복귀하는 데 성공하면서 도처에서 4차 역사전쟁을 시도하고 있으며, 홍범도 장군 흉상 퇴출 논란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학문적으로 탄탄한 논리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주로 인터넷 언론의 기사나 칼럼, 유튜브 강의, 전문가들을 배제한 자기들만의 유사-학술회의를 통해 세를 확장하고 있는 뉴라이트 운동은 일본과 미국(램지어)의 극우 역사 부정주의자들과 초국가주의적 네트워크를 결성한 데다가 권력을 등에 업은 채 본격적인 역사 날조와 왜곡을 일삼으면서 거침없는 역사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선생은 이러한 역사전쟁이 교육 영역을 넘어 정치와 문화 전반의 사상전과 문화전쟁으로 확산될 것으로 전망하면서 각별한 대응이 필요함을 환기시키고 있다.


두 번째 글에서 외교안보 분야 전문가인 김종대 선생은 818일 미국 캠프 데이비드에서 열린 한일 삼국 정상회담이 동북아 질서의 어떤 변화를 함축하는지 분석하고 있다. 선생에 따르면 캠프 데이비드 회담은 동북아 질서와 관련하여 세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먼저 그것은 중국과의 전략적 경쟁에 직면한 미국이 한일 삼국의 경제안보 협력을 상시화제도화함으로써 기존의 양자 동맹의 한계를 넘어서는 소다자주의 집단 방위체제 구축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이것은 지정학의 범위를 넘어서 반도체와 배터리 같은 첨단기술 분야에서 기존의 공급망을 재편하려는 시도로 확장되고 있는데, 인플레감축법(IRA)이나 칩과 과학법 등은 이를 위한 법적 토대로 기능하고 있다.


더 나아가 이것은 미국 바깥에 존재하는 세력(중국, 러시아)을 타자화하는 동아시아 질서를 지향하면서 중국을 주요 위협세력으로 설정하는 집단방위체제 구축의 시도와 연결된다. 여기에서 핵심적인 의제는 대만해협 분쟁에 대비한 한미일 삼국의 공동 비상계획을 수립하는 것이며, 한반도 위기시에 다국적군의 참여를 보장하는 유엔사 강화를 모색하고 더 나아가 주한미군과 주일미군을 통합하는 극동군사령부창설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는 곧 한일 간의 군사정보 공유에서 출발하는 한미일 삼국의 군사협력 체제를 구축하려는 시도와 연결되는데, 이것은 불가피하게 북--러로 이어지는 반대 동맹의 구축을 촉발할 위험을 안고 있다. 선생은 이렇게 되면 지난 30년 간 북한을 관리해온 한국 외교의 기본틀이 붕괴되고 안보 비용이 급격히 증대할 위험이 있음을 우려하고 있다.


마지막 세 번째 글에서 대만 문제 전문가인 장영희 선생은 2024년 초에 치러질 대만총통선거를 앞둔 대만의 여론 흐름과 중국-대만의 양안관계의 미래를 살펴보고 있다. 작년 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해 발발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동아시아 정세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대만은 향후 발생할 또 다른 전쟁의 유력한 지역 중 하나로 꼽히면서 동아시아 정세의 긴장의 진원지가 되어 왔다. 선생은 대만 내부에서는, 한편으로 현재와 같은 준독립상태를 유지하면서 민주적 일상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여론의 흐름이 나타나면서도 동시에 대만해협에서 혹시나 발생할지도 모르는 전쟁에서 미국이 군사적으로 대만을 보호하지 못할 것을 우려하는 움직임이 공존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는 미국과의 우호 관계 지속을 가장 중요한 정치외교적 의제로 삼으면서 동시에 중국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양가적인 태도로 표현된다.


선생에 따르면 이러한 쟁점은 총통 선거에 나올 것으로 예상되는 4명의 주요 후보의 정치적인 입장 차이를 식별하는 기준을 제시해준다. 집권 민진당의 후보가 중국이 제일 경원하는 친미적인 입장을 표방한다면, 야당인 국민당 후보는 대만의 통일파와 베이징이 제일 선호하는 후보이며, 나머지 두 명의 후보는 독자적인 당선보다는 후보 단일화를 통해 일정한 정치적 지분을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네 후보 모두 미국의 지지를 얻는 것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고 있는데, 바로 이러한 양가적 태도야말로 내년 총통 선거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는 것이 선생의 주장이다. 곧 미국과 중국으로부터 동시에 비토되지 않을 수 있는 입장을 표방해야 최대의 득표를 꾀할 수 있으며, 따라서 중국과 대화할 수 있어야 하지만 중국과 친한 후보여서는 안 되는 모순적 상황을 잘 헤쳐나가는 것이 네 명의 후보에게 가장 중요한 전략적 과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선생은 중국이 조급하게 통일전선전술의 분할 지배에 입각하여 대만 문제에 대한 해법을 시도할 경우 대만의 민심은 더욱 중국에서 멀어지게 될 것이며, 이는 중국이 원하는 평화통일을 더욱 더 달성하기 어렵게 만들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중국은 오히려 일국양제와 같은 중앙집권적 연방제 방식이 아니라 국가연합과 같은 유연한 통일 방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는 조언이다.


세 필자의 글은 급변하고 있는 동아시아 정세를 자주적이고 균형 있는 시각에서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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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호에는 올해 등단 40주년을 맞이한 중국의 위화 작가와 그의 작품을 처음으로 한국에 소개한 백원담 󰡔황해문화󰡕 편집자문위원의 대담을 수록했다. 위화 작가의 작품세계에 대해 주목할 만한 평론을 해온 백원담 선생은 솜씨 좋게 위화 작품의 주요 주제를 소개하면서 대담을 이끌어나가고, 위화 선생은 특유의 인간미와 유머감각을 곁들이면서 자신의 작품에 관해 흥미 있는 설명을 제시하고 있다. 대담 원청에서 살아가기 또는 글쓰기󰡔황해문화󰡕 독자들에게는 좋은 선물이 될 것이다.


창작 지면에도 풍성한 시와 소설 작품이 수록되었다. 진은영 시인이 한국과 호주 여성 시인 간 교류를 통한 소중한 작업의 결과물로서 시를 보내왔으며, 손유미, 이필, 정우신, 김원호 시인도 값진 작품을 전해주었다. 소설로는 조용호 작가의 등불이 수록되었다.


󰡔황해문화󰡕가 자랑하는 문화비평은 이번 호에도 다양한 분야에 걸쳐 진지하고 유익한 논의들이 제시되고 있다. 특히 이번 문화비평은 전체 특집 주제와 관련하여 생태와 평화, 그리고 음악을 특집 주제로 삼고 있으며, 서정민갑, 최경숙, 나도원 선생이 통찰력 있는 글을 싣고 있다. 보호출산제라고 불리는 익명출산제도와 관련된 나영 선생의 비판적 문제제기와 현 정부의 언론장악에 관한 김서중 선생의 매서운 비평, 인천상륙작전을 전승기념행사로 상품화하려는 인천시의 시도에 대한 이희환 선생의 시의적인 비평을 비롯한 다른 문화비평들도 꼭 놓치지 마시기 바란다.


서평지면에도 주목할 만한 저작들에 대한 값진 서평들이 수록되었다. 우선 테마서평에서 청암대학교 재일코리안연구소 소장 김인덕 선생은 올해 100주년이 되는 1923년 관동대지진에 관한 두 편의 저작을 살펴보고 있다. 김응교 선생의 백 년 동안의 증언: 간토대지진, 혐오와 국가폭력과 와타나베 노부유키 선생의 관동대지진, 학살 부정의 진상: 램지어 교수의 논거를 검증한다을 읽으면서 선생은 관동대지진의 현재성을 확인하고 있다. 서평에는 세 권의 책을 다루고 있다. 국문학자 정종현 선생은 김남일 작가의 노작인 󰡔한국근대문학기행󰡕 4부작에서 문학에 대한 작가의 각별한 사랑을 흥미롭게 고찰하고 있으며, 역사학자 이세영 선생은 재미 역사학자인 김수지 선생의 󰡔혁명과 일상󰡕을 김재웅 선생의 󰡔고백하는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값진 통찰을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옥창준 선생은 제3세계에 관한 한국의 연구사를 배경으로 국제정치학자인 김태균 선생의 반둥 이후: 글로벌 사우스의 국제정치사회학를 세심하게 살펴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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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2월에 발발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지난 10월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의 이스라엘 기습공격으로 시작된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은 날이 갈수록 극단적 폭력으로 얼룩진 전쟁의 참상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하마스가 잔인한 기습공격으로 무고한 민간인을 포함한 수백 명의 사람을 살해하고 수백 명의 사람들을 인질로 끌고간 행위는 마땅히 테러리즘으로 비판받아야겠지만, 그 이후 전개된 이스라엘의 무자비한 복수전은 참혹함의 극치라고 할 만큼 반인도적이고 반문명적인 학살로 거침없이 나아가고 있다. 유엔과 미국, 유럽을 비롯한 세계의 책임 있는 국가들(우리나라도 여기에서 제외될 수 없다)은 한시라도 빨리 휴전이 이루어지도록 힘써야 할 것이며, 국내의 여러 단체와 개인들도 정파적 입장과 상관없이 잔인한 학살행위가 중단되도록 공동으로 노력해야 마땅할 것이다.


다른 한편 이처럼 극단적 폭력과 거기에 맞선 또 다른 극단적 대항폭력이 서로 꼬리를 물고 전개되는 전쟁의 연쇄 속에서 피투성이가 된 채 폭격으로 무너진 건물의 잔해 아래 깔려 있는 사람들의 비극적인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위험의 외주화 속에서 기계에 끼어 숨져간 비정규 노동자들의 참혹한 죽음을 알리는 기사가 겹쳐 보인다. 여기에 더하여 이번 호 특집과 연결된 김흥구 작가의 주목할 만한 포토 에세이에 실린 후쿠시마 원전 폭발 당시의 참상을 보여주는 사진들(폐허가 된 마을과 공장, 대피소에 고단한 몸을 누인 주민들, 기름으로 뒤덮인 새의 모습, 주인 잃은 책가방 ...)을 보노라면, 강대국들의 치열한 핵개발 경쟁 속에서 지금까지 지구와 인간, 생명체들이 겪어온 참상이 전쟁의 폭력 및 위험노동의 비극과 무관한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또한 후쿠시마의 사진들이, 국내 원전 및 그 주변 마을과 주민들의 사진들과 불길하게도 과거와 미래의 모습으로 오버랩되는 것은 나만의 환각일 뿐인가? 이것은 또 하나의 괴담일 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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