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사람 이중섭
전인권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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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인권...들국화의 리드싱어...접시안테나까지 단 사람. 그의 이름을 처음 들었을때 난 부시시한 한국락의 아이콘을 생각했다. 물론 동명이인이다. 전인권의<아름다운 사람 이중섭>을 읽었던 건 벌써 몇년전이다.하지만 그 글은 아직도 인상적으로 남아았다. 내가 처음 접한 전인권의 책은 <편견없는 김대중이야기>라는 정치 평론집이었다. 그랬던 그가 다음으로 들고 나왔던 책이 뜬금없이 <이중섭>이었다. (최근에는 <남자의 탄생>을 냈다. 책이 좀 팔렸다고 한다.)TV 책 프로그램에서 그의 신간이 선정되기도 하고 미디어홍보도 그런대로 효과적으로 이루어졌나 보다.

신간서적의 후광이었는지 어느 대형 서점에 가보니 이미 철 지나 서점 귀퉁이에 가 있어야할 <이중섭>이 그의 <남자의 탄생>과 함께 인문코너 앞에 떡하니 자리잡고 있었다. 반가왔다. 좋은 책이었는데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가 다시 돌아온 셈이다. 이중섭은 아마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우리 화가 중에 하나 일 것이다.교과서에도 그의 황소작품 몇 편이 실려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코로 거친 숨을 푹푹 몰아쉬며 앞으로 달려나가려는 거친 황소... 그 외에 우리가 이중섭에 대해 기억하는 것은 대부분 그의 기행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정치학자이자 미술애호가인 전인권은 이중섭의 작품과 그 작품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시대 순으로 정리한다.그리고 그의 작품에 얽혀 있는 작가의 심리를 한국인의 집단심리와 연관하여 추리하고 있다. 우리의 전통적인 가치인 원형적인 세계관과 이중섭의 군동화를 연결한다. 그리고 그의 소 작품에서 힘과 용기,우직함 외에도 마더콤플렉스의 요소를 읽어낸다. 이미 평단에는 알려져있는 내용이었을지 모르지만 막연히 이중섭의 기행과 작품 몇점에 대해 알고 있던 나에겐 신선한 접근이었다.

지금도 내 책상위에 이중섭의 군동화 복사본이 한 장 놓여있다.그의 군동화는 자신의 어린 아이가 죽고 난 후 그려지기 시작했다고 한다.중섭의 어린 자식이 죽고 난 며칠 후 그는 친구 구상과 함께 술을 마셨다.그리고 갑자기 펜을 꺼내 아이들을 그렸다.의아해 하던 친구가 왜 아이들을 그리냐 물었을때 그는 '먼길 떠나는 우리 아기 외롭지 않게 동무들을 그려서 가는 길에 함께 보내줘야겠다' 고 울먹였다고 한다.

그의 군동화에 얽힌 에피소드이다. 그가 죽은 아이를 위해 그린 군동화에는 한국인이 이상향으로 그리던 대동사회의 모습이 담겨있다.아이와 바람과 게와 물고기가 서로 둥그렇게 어우러져 있다.평화롭고 동심이 가득한 세계이다. 이렇듯 너무나 한국적인 화가이자 너무나 한국적인 아버지.그 뿌리 한 올까지 우리 사람이었던 이중섭. 그의 작품을 보면 왜 마음이 따뜻해 지고 평화로와 지는지 전인권은 이중섭에 대한 한없는 애정을 담고 우리에게 보여준다.

서양의 화풍으로 서양의 그림을 그린지가 100여년이 넘었다.미술계 뿐만 아니라 요즘 문화판은 이것 저것 외국 사조라는 것을 선진적으로 받아들이는것 만으로도 한 평생 누리며 살 수 있다.학계도 마찬가지도.이름난 프랑스 사회학자나 철학자들의 물건을 조금 조금 나누어 팔아먹어도 교수니 지식인이니 하며 행세할 수 있다. 하지만 그중 누가 다음세대까지 사람들의 기억속에 남아 있을 수 있을까? 우리가 기억하는 사람,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중섭과 같은 우리의 혼이 살아있는 따뜻한 우리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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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뫼비우스 그림 / 열린책들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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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 베르베르 책이면 모두 사보는 사람이 있다.그에 대한 칭찬에 입이 마를 줄 모른다.몇년전 베르베르의 <상대적이며..>를 읽은 이후 별 관심을 두지 않았던 나로써는 낯선 느낌이었다.물론 그의 노작들을 읽지 않은 상황이었으니 그이의 칭찬에 왈가왈부할 수 없었다.그래서 베르베르의 <나무>가 나왔을 때 고민하지 않고 책을 골랐다.

반짝 반짝 윤이 나는 표지와 가벼운 책의 무게가 맘에 들었다.간간히 프랑스풍의 만화도 호기심을 사기에 충분했다.그의 글을 읽기 시작했다.아주 쉽게 쉽게 책장이 넘어갔다. 책을 읽는 동안 10여년전에 보았던 TV 시리즈 '환상특급'을 떠올렸다. 당시 유명한 감독들이 여흥삼아 한두편씩 특이하고 짧은 드라마를 만들었다.스필버그 감독도 아마 그중에 있었던 것 같다.<나무>는 베르베르가 자판위에 써내려간 '환상특급'같은 소설이다.

우선 베르베르의 엉뚱한 상상은 즐거움을 주긴한다.그러나 왠지 어디선가 본 듯한 그런 느낌을 주었다.신선한 상상의 익숙함같은 것일까... 그 역시 이번 소설을 짬짬이썻다고 밝힌다.쓰는 과정이 그랬듯이 보는 사람도 짬짬이 읽기엔 충분했다.하지만 거기엔 반짝이는 아이디어 왜엔 없었다. 무릇 소재만을 가지고 멋진 소설이라고 하기엔 왠지 어색하다.그리고 그의 글에선 문체를 느낄 수 가 없다. 멋진 문장만이 문장이라는 것이 아니다.무릇 글을 쓰는 사람은 문장에 자신의 세계가 반영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점토로 인간을 만든 신과 같이 작가는 펜으로 또는 자판을 눌러서 기호에 지나지 않는 문자를 살아 숨쉬게 하는 것이다.

베르베르에게도 나름대로의 스타일이 있으리라 생각된다.만약 그러한 것이 있다면 과학기자 출신답게 포름알데히드에 갖힌 문장이 아닐까? 나름대로의 개성과 매력이라고 칭할 수 도 있겠다.하지만 개인적 관점에서는 그다지 매혹적이지 못했다. 우리가 글을 읽는 것은 소설가의 상상력만을 보기 위해선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비판은 베르베르를 늘 따라 다니던 것일지 모른다. 그래서 였는지 그는 소설 중에서 자신의 작품에 대한 평단의 비판을 은유적으로 조롱하고 있다. 수백년이 지나 지금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소설이 문학적으로 인정받는 세상을... 한 백년쯤 기다려 볼 일이다.

어디 긴 여행가며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읽는 책을 위해서라면 이 책은 아마 훌륭하게 목적을 달성시켜 줄 것이다. 짧은 시간 쉽고 재미있게 읽으며 한 권의 책을 읽었다는 자족감을 얻기 위해서라면... 물론 나의 베르베르에 대한 평가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나 역시 베르베르의 필생의 역작이 될 <개미>를 읽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정래를 평가하는 데 <태백산맥>을 보지 않고 몇몇 단편에 근거를 두는 것과 같을 것이다.) 언젠가 그의 출세작이자 대표작인 <개미>를 읽게 될 날까지 그에 대한 평가는 아직 유보상태이다. 하지만 이번의 <나무>는 그에 대한 애정을 키워주기엔 너무 갸날픈 어린 나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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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조용히 살고 있다 - 제8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이해경 지음 / 문학동네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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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유성이라는 개그맨을 알고 있다.개인적으론 일면식도 없다.그는 주업인 개그프로그램엔 거의 나오지 않는다.이유는 한가지 별로 웃기지 않기 때문이다.그가 쓴 책중에 뭐 <조금만 비겁하면 인생이 즐겁다> 라는 책이 있다고 한다.난 단지 책 제목만 알뿐이다. 그 책 제목을 보며 소설의 주인공을 생각했다.

소설의 주인공은 회사를 그만 두고 엉겁결에 소설가가 되기로 작정한다.그는 회사를 멋지게 때려치우는 자신의 모습을 기대한다.하지만 그 간절한 기대는 반대 방향으로 가고야 만다. 이 소설의 전반적인 정조는 초반에 그려지고야 만다. 우리가 갖는 현실의 영화같은 기대가 그 반대로 향하며 보여지는 페이소스다. 그리고 그 가벼움이다.

소심한 주인공은 도서관에서 만난 옛 여인에게 관심을 갖는다.그리고 한번이라도 더 만나기 위해 또 약속한 기일이 되면 헤어질것을 두려워 하며 수많은 공상을 펼친다.그녀가 써주는 소설을 보며 자신과의 관계에 대한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그런 주인공의 심리는 딱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 '전전긍긍'

그렇다. 소심한 주인공은 늘 전전긍긍한다. 부인을 만날때 부터 소설을 썻던 양 전전긍긍, 우연히 만난 옛 여인때문에 전전긍긍,그녀가 쓴 소설이 남편이 쓴 글인양 알고 있는 부인 앞에서 또 전전긍긍.. 소설 첫 문장을 쓰기 위해 전전긍긍....소설을 인터넷에 띄운 아내때문에 또 전전긍긍.

우리내 비겁한 삶이란 그런 전전긍긍의 부침이 아닐까 한다.그러면서 그안에 행복한 삶을 영위하려고 또 하나의 전전긍긍을 덧칠한다. 주인공의 삶이 회사라는 시스템에서 탈주하면서 그는 마치 주체적인 삶의 향유가 가능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삶은 수동적일 수 밖에 없었다. 사랑하는 여인의 집을 뛰쳐나가 알수 없는 빗길을 헤메일 때 조차 그는 그의 삶에 마침표를 찍을 주체성을 확보하지 못했다. 비겁함을 담보로 삶을 즐겁게 살아 볼고 하는 우리에게 그런 주체적인 삶은 영화속에 나오는 주인공들의 몫이요 몇몇 영웅적 소설의 주인공들 몫이다.

작가는 소설가의 이름을 빌어 아주 작은 비겁함과 삶의 속내들을 보여준다. 미워할 수 없는 그 비겁함이 들통나며 어쩌나 하는 마음은 독자가 주인공에게 감정이입하게 만든다.그래서 이 소설은 아주 빠르게 읽힌다.어떻게 그가 이 작은 위기들을 벗어날까 조마조마해 한다. 엄마몰래 지갑에서 천원짜리 한장 훔치고 걸릴까 끙끙앓던때 모습처럼.

사실 일부에서는 그의 패러디가 경박함이라고 말하지만 그 가벼움이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물론 요즘 문학판에 그런 패러디가 자주 쓰임으로 진부하거나 조류에 편승하려 한다는 오해를 받을 수 도 있는 덕목이다. 하지만 우리들의 대화나 우리들의 일상을 보면 속칭 하는 영화,광고등의 영향을 얼마나 많이 받는가.누구나 하나쯤은 패러디를 하고 누구나 하나쯤은 잘알지도 못하는 고다르나 타르코프스키를 들먹인다. 그런게 우리가 사는 21세기의 가벼움이 아닌가.그 반대를 옹호할 수도 있으나 그걸 그냥 즐길 수 도 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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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선옥, 마흔에 길을 나서다
공선옥 지음, 노익상·박여선 사진 / 월간말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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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선옥은 조금 특별한 작가이다.왜냐하면 동시대의 여성작가중 유난히 지지리궁상을 떨기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의 궁상맞음이 하이힐에 뽀얀 화장빨보다 아름다운 건 왜일까? 아마도 그녀의 삶과 그녀의 소설이 일관된 지향점을 가지고 있기때문일 것이다.물론 소설가의 삶과 소설이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소설가에게 꼭 칭찬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90년대 도회적 감성의 소설가들에게선 느낄 수 없는 짱돌(?)같은 힘을 그녀에게선 느낄 수 있다. 그녀의 글에선 '나의 30대를 이끌어 준 가장 소중한 것은 자동차였다.마음이 산란할땐 몇분간의 드라이브로 나를 어디든지 데려주니까.. '라는 투의 잡스럼을 만나지 않아서 좋다.

그녀답게 걸었다.나이 마흔에.물론 먼길이야 멀미냄새나는 시외버스를 탔겠지. <말>지에서 변변치 못한 노자돈을 주었다고 한다.아마 정말 변변치 못했을게다. 하지만 뚜벅뚜벅 걷는 노상에서 낯선 버스정류장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연들을 만나게 되는지...혼자 여행하길 즐기는 나로서는 그녀만큼은 아닐지라도 그 즐거움에 대해 공감한다.글을 읽으며 자꾸 영상이 그려지는건 아마도 개인적 기억들을 이리저리 조합하며 또 하나의 유사기억들을 만들고 있어서였을것이다. 즐거운 가짜 기억만들기 놀이..^^

그녀가 만난 사람들 흔히 말하는 진짜 토종민초들이다.물론 시골을 다니다 보니 나이많은 풀들이 많았을건 짐작이 간다.황혼녘의 깊은 골이 박힌 풀들...나는 옛날 사람들을 인터뷰하는 기사를 보면 맘이 짠해진다. 우리의 현대사가 오죽 각박했는가. 알고도 죽고 모르고도 죽고 때리면 맞고 풀어주면 기어나오고 ...그 험난한 세월을 살아온 사람들의 투박한 손주름과 이마에 박힌 세월의 골짜기가 맘을 짠하게 한다.

공선옥은 그들을 만나며 그들로 부터 또 무언가를 얻어오고 있는 듯 하다. 걷다보면 길이 나오고 길이 나오면 언젠가 도착할 곳이 생긴다고 했던가. 무언가 나서길 두려워하던 우리에게 시골에 난 지방국도를 걷고 있을 키작은 노인은 그렇게 말한다. 머리에 하얀 수건을 묶고 그 위로 흔히 말하는 다라이-일본말인거 안다.하지만 다라이가 더 어울릴때도 있다.-를 이고 가는 할머니 사진.세월의 풍상을 견뎌낸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처연함. 그 모진 시간과 고난들을 어찌 내가 짐작할 수 있겠나.

공선옥은 도시 한 켠 그녀가 몸담았던 그 후미진 곳들도 애정을 갖고 찾는다.대표적 공단 지역인 가리봉동.과거 그녀가 상경하여 머물렀던 곳이라고 한다.이제는 외국인 노동자가 그녀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공선옥의 지지리궁상이 또 빛을 발하는 것은 이 지점이다.그녀는 피부색이 다른 그 외국인노동자들이 지금은 그곳을 떠난 중산층 사람들보다 더 동일시 된다는 것이다.( 만국의 노동자는 단결해야하기 때문일까? ^^) 사

실 우리는 그들보다 매일 술자리에서 노가리 씹듯 씹어대는 직장상사나 경영주들을 은근히 닮고 싶어하진 않는가? 언제나 그 자리 올라가나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사실 그 외국인 노동자들이 우리와 더 가깝지 않은가? 그들도 본국의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밤샘야근을 하고 먹을것 안먹고 피땀흘리며 일한다.우리같은 월급쟁이들도 술한잔 쏘려다가도 이거면 우리아이 기저귀가 몇개인데 하며 슬그머니 지갑을 돌려넣는다. 그런데 좀 산다는 자들은 어떠한가? 몇천만원짜리 밍크코트는 기본이고 값비싼 외제차에 초호화 아파트에... 도대체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지 생각해보게 한다.

그외에도 공선옥은 전방에서 군인도 만나고 미선이 효순이 가족도 만난다.자신이 살았던 여수근처의 숨은 곳도 찾아본다. 이 모든 여행이 실제로 많이 걷는 여행이었으리라 짐작된다.<걷기예찬>이란 책에 보면 걷는 다는 것은 자기 존재가 세상과 직접적으로 대면하는 것이라고 한다.공선옥은 이 여행을 통해 분명히 우리곁에 있지만 잊고 지내는 사람들과 대면하고 있다.그리고 그들의 생명력을 통해 우리에게 또 하나의 선물을 선사하고 있는 것이다. 삶이란 이렇게 살아있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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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힘
성석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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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승을 부리던 무더위가 매미소리와 함께 사라지고 있다.계절의 순환은 인간의 간사함과 다른 것이라 기다려도 기다리지 않아도 그 도를 다함에 정직하다. 몇주전 바닷가가 마치 개미들의 천국인양 번잡할때 성석제의 소설을 만났다.유니크한 단편소설의 작가 '성석제'. 그는 80년대 후일담의 감성만을 퍼붓는 386세대(이 단어가 맘에 안들고 어폐 가 있지만 인구에 회자되는 관계로 사용한다.)여성작가들의 틈바구니에서 특히 빛나는 소설가였다.그는 소설읽는 재미가 무언지 알게 해주는 이 시대의 몇안되는 작가중에 하나이다. 그가 장편소설 한 권 독자에게 선사했다.

<인간의 힘> ..왠지 그가 그동안 다룬 단편소설의 제목과 비교해서 섬뜩한 무게감이 느껴졌다.그의 단편은 주로 반푼이 인생들을 다루었다.무언가 모자라고 무언가 기벽적인 사람들.그러면서도 그들의 삶을 통해 삶의 모순과 진실을 따뜻하게 보여주었다. 그의 해학적인 표현을 즐겁게 따라가다 보면 종장에 와서는 무언가 허해지는 느낌,고개를 끄덕이는 경험을 공유한 독자가 나 만은 아닐것이다. 그는 해학과 풍자,비꼼을 통해 독자가 삶을 관통하는 무언가에 대해 함께 웃기를 권했다.

그의 장편 <인간의 힘>은 조선 인조시대를 배경으로 한다.시골의 힘떨어진 양반 '채동구'가 우리의 주인공이다. 소설 전반부는 몰락한 양반으로 그럴싸한 대접 한 번 제대로 받아보지 못한 채동구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채동구의 세번의 상경.애써 분기탱천했으나 돌아오는 것은 하나도 없는 칠삭동이 짓. 그게 바로 채동구의 행색이며 또 의롭게 무언가를 했으나 개인적으론 아무것도 얻은게 없는 다수의 민중들의 모습이다.

지금 세상과 빗대어 보면 너무 지나친 과장일까? 2003년 몇몇 운동엘리트들은 국회에서 마치 진보세력의 적자인양 행세하며 함께 일했던 동지들은 비서관이니 참모니하며 하나둘 국회 언저리에 머물고 있다.그들과 뜻을 함께 했던 수많은 무명의 채동구들은 지금 어디서 무었을 하고 있을까? 그들의 뜻이나 의지,지혜가 운동엘리트들만 못했을까? ....(어쨋거나 운동엘리트 몇몇 국회 보낸다고 사회변혁이 이루어지진 않는 것이고 세상엔 아직도 무명의 채동구를 필요로 하는 곳이 많으니 청년이여 슬퍼하지말고 분기탱천하자.)

채동구의 어리버리 행각이 지루할때 쯤 이 소설은 드디어 힘을 내기 시작한다.성석제의 힘이 시작되는 것이다. 채동구의 마지막 상경... 그리고 자진한 청국행. 작가는 소설 후반에서 채동구의 힘이 무었이었는지 '인간의 힘'이 무었인지 넌지시 건네고 있다. 내 작은 생각엔 인간의 힘은 결국 '삶의 진정성'이 아닐까한다.사욕에 흔들리지 않는 우익을 진정한 보수라고 한다면 채동구는 현 시대에 사라졌다는 진정한 보수세력이다.당시 시대적 상황에 채동구의 척화가 역사적으로 옳다고 볼 수 는 없다.하지만 채동구의 '진정성'은 그의 삶의 힘이었고 또 평생을 걸만한 인간의 힘이었다.

도종환님의 시중에 어느 노교사에 관한 시가 있다.시인이 전교조활동하면서 쓴 것 같다.너무 오래되어 기억나진 않지만..대충 내용이 이랬던 것 같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난 힘도 약하고 겁도 많고...남앞에서서 멋진 말로 독려할 웅변술도 없고... 하지만 가장 나중에 까지 남아있을 순 있다.남들 다 됐다고 돌아가야 겠다고 할 때라도 끝까지 남아있을 수는 있다.' 뭐 그런 내용이었다. 가장 나중까지 남아있을 수 있는 힘.그게 인간의 힘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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