찔레꽃 기념관 외 - 2003년 제4회 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윤대녕 외 지음 / 해토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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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중반이었다.TV문학관이라는 프로그램이 다시 제작되어 미디어비평가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우연히 채널을 돌리다 신문에 난 우호적 반응이 기억나 시선을 고정했다.검은 상복을 입은 김상중,심은하가 역인지 버스터미널인지 붐비는 곳에서 스쳐지나 갔다.윤대녕의 <천지간>이었다. 그때까지 난 그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더우기 작품은 본적이 없었다.화면으로 표현된 그의 작품,그의 정서는 날 TV에 딱달라 붙게했다. 다음날, 서점의 첫 손님으로 그의 소설집(동인문학상 수상집)을 사서 한 숨에 읽고 또 긴 한 숨을 쉬었다.

당시 나에게 <천지간>이란 작품이 뿜는 향기가 너무 강렬했던터라 아직도 그 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우연한 인연과 그 인연이 갖는 삶과 죽음의 뫼비우스,범피중류의 처연함,경계가 모호해지는 이승과 저승. 그 이후로 한동안 윤대녕의 팬이 되었다.그는 내가 작가중에 서슴없이 팬이란 이름을 붙일수 있었던 최초의 작가였던 셈이다. 그 이후 몇편의 단편과 장편을 보았다.물론 괜찮은 작품들이었다.하지만 시간의 더께 속에 그에 대한 관심도 점차 멀어졌다. 그러다 최근에 다시 그의 글을 만나게 되었다.이효석 문학상 수상작으로서....

윤대녕의 <찔레꽃 기념관>은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의 현대적 복원같다. 하얀 메밀꽃이 찬연한 봉평장 대신 붉은 네온싸인과 찔레꽃이 살짝핀 대도시로 배경이 바뀐다.<메밀꽃>에서 자연인의 삶을 준 아버지와 아들의 인연이 소재라면 <찔레꽃>에선 문학적 삶의 대부가 된 이발소 아저씨와 주인공의 인연이 전개된다. <메밀꽃>에서 허생원과 동이의 인연이 서로 왼손잡이라는 복선만을 남긴 채 소설이 끝나듯 <찔레꽃>에서도 이발소에 걸려있던 밀레의 <만종>과 푸슈킨의 시로 인연의 얇은 개연성 한 가닥만 남겨 놓고 끝난다. 윤대녕이 몇몇 단편에서 보여준 소설의 구조,즉 한 사람의 과거를 타자의 입을 통해 플레시백하고 그것이 또 어느 사람과의 미묘한 인연의 한 줄기였음을 전하는 방식.이것은 언제나 내게 마음 한 구석의 묘한 아쉬움과 허함을 남긴다.

이 느낌을 뭐라 한마디로 잘라 말 할 수는 없다.굳이 말하자면 우리가 하는 작은 행동 또 어떤 선택들이 절대자의 명령에 의한 운명과는 다른, 이미 예정된 그러나 아쉬운듯 가녀린 관계의 인연속에 생겨나는 부족함같은 것이다.그 인연의 부족함과 그로 인한 떠남,또는 미완의 무엇은 마음 속에 먼 길이의 끝을 바라보는 자의 아쉬움,그래야만 했는데도 그러지 못했던 자들의 -그리고 지금은 어찌할 수 없는-서글픈 시선을 담고 있다. 이번 작품에서도 윤대녕의 그런 정서를 느낄 수 있어서 과거의 팬으로서 반가왔다.단 예전보다는 몽환적 느낌이 많이 줄어 들고 현실의 척박함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는 생각이다.이것이 작가의 발전일지 어떨지는 이 한편으로는 알 수 없을 듯 하다.

수상작외에도 이 작품집에는 김영하,김훈,한강등 활발한 창작활동을 하는 작가들의 근작이 실려있다.전체적으로 좀 아쉬운 점은 대개 작품들의 소재가 시한부,죽음,병원등과 관계가 있다.이와 같은 소재들이 인간의 실존을 또 삶의 이면을 다시 보게 하는 시점을 제시하는 것은 사실이다.그러나 한 작품집에 5할 이상이 이런 소재들과 관련있다는 것은 선정위원들의 취향때문일지 아님 요즘 한국소설의 전반적 경향때문인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개인적으로는 이삿날의 일상적 갈등과 천년의 시간을 버텨온 가야토기를 오버랩하는 김영하의<이사>,잊었던 자신의 슬픈 근원을 더듬어 나가는 기수상자 이순원의 <아비의 잠>,동인문학상 수상작에도 포함되어있던 성석제의 <쾌활한 냇가의 명랑한 곗날>등에 애정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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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집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8
이사벨 아옌데 지음, 권미선 옮김 / 민음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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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는 남미 태평양 연안 남북으로 길게 뻗은 나라.수도는 산티아고.이게 대학 입학전 까지 칠레에 대해 알고 있던 전부다. 대학을 입학하고 우리 역사를 익히며 우리와 비슷한 제3세계의 존재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그 한복판에 칠레가 있었다.

이사벨 아엔데의 첫소설<영혼의 집>에는 칠레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다.이 소설은 델 바에 가문의 4대에 걸친 여인의 역사이자 칠레 사람들의 역사이다.특히 이 소설은 73년 아엔데 대통령의 인민연합이 군부쿠데타로 전복되는 역사적 사건을 중심 모티프로 하고 있다.물론 이 내용은 책의 후반부에 집중되어 있지만 칠레의 지식인치고 이 사건에 빚을 지고 있지 않은 자는 없었을 것이다.마치 80년대 우리작가들이 광주의 부채를 떨칠 수 없었던 것처럼.

칠레는 남미 국가중 노조가 일찍 형성되었던 나라이다.다른 국가들에 비해 구리광산이 발달하여 외국자본의 침탈과 그에 대한 자각이 비교적 일찍 형성되었던 곳이다.하지만 대부분의 남미국가처럼 대농장은 일부 지주와 교회가 90%이상을 점유하고 있었다.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에스테반 가문 역시 그런 대지주중에 하나이다. 에스테반은 보수적 지주의 전형으로 괴팍한 성격과 델 바예가문의 여자-로사와 클라라-에 끊없는 사랑을 갈구하는 다층적인 캐릭터로 그려진다.사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클라라-블랑카-알바로 이어지는 3대의 여성들이다.하지만 그 세 명의 여성과 함께 역사를 헤쳐가는 역할은 에스테반이 맡는다.그는 이 주체적이고 개성적인 여인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다.그리고 역사적으로도 반동적인 인물이었다.하지만 칠레의 질곡의 역사를 헤쳐온 그는 소설적으로 충분히 매력적이다.

남미의 환상적 리얼리즘의 전통은 클라라를 통해 이루어진다.영혼과 소통하고 미래를 예언하는 능력을 가진 클라라는 이 소설에 생기를 부여하고 긍정적 역사의 희망을 가능케한다.알바가 군부의 모진 고문을 극복하고 화해와 관용의 힘을 얻게 된 것도 바로 할머니 클라라의 힘이었다.블랑카는 세명의 여인중 젊은날의 연애행각을 제외하면 그다지 큰 감응을 불러일으키지는 않는다.오히려 그의 애인인 페드로 테르세르가 한 역사적 인물을 연상시킨다.그는 바로 칠레 누에바 깐시온의 대표적 인물.민중가수 빅토르 하라이다.페드로는 소작농의 아들에서 민중가수로 변신하여 민중적 신임을 얻는다.후에 그는 아엔데 정권에서 각료를 하고 쿠데타 이후 블랑카와 망명한다.이에 비해 현실의 페드로 테르세르,빅토르 하라의 죽음은 훨씬 충격적이다.쿠데타 후 잔혹한 고문끝에 대형스타디움에서 살해당한다.인민연합정권이후 전성기를 이루었던 남미의 민중음악-누에바 깐시온도 물론 피노체트 정권하에서 철저히 탄압받는다.

이 소설의 인물들은 마치 살아있는 사람들처럼 역사의 강물속에서 꿈틀거린다.페드로 테르세르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준 신부는 남미해방신학의 전통을 일깨워 준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교회는 언제나 우익이었지만 예수는 좌익이었다'는 ....

평자가 서평뒤에 논했듯이 살아있는 부수인물들은 이 소설이 역사소설임을 느끼게 한다.극좌모험주의자에 가까운 알바의 애인 미겔,미천한 신분에서 포주로 정계까지 움직이는 여인,클라라에게 인간적 애정을 느끼는 페드로의 아버지,미겔의 모험주의에 반대하는 외삼촌등..주인공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수많은 민중들의 모습은 역사가 단지 몇몇만이 모인 강물이 아님을 은유한다.

남미는 지리상의 발견 이후 수탈의 앞마당이었다.유럽의 수탈이 끝나고 어렵게 독립을 쟁취했다.하지만 머리 위엔 미국이란 잡식성 거대괴물이 있었다.그들은 남미 민중의 안위는 관심이 없었다.매판자본과 군부를 지원하며 제국의 보급창고로 이용하였다.시에라 마에스트라는 혁명전설을 남긴 쿠바는 고군분투하며 미국에 맞섰으나 선거를 통한 민주적 절차를 거친 칠레의 사회주의 정권은 73년 처참한 최후를 맞는다.그 후 피노체트의 10여년에 걸친 장기집권과 실권.영국망명으로 부터의 소환.칠레의 역사도 우리의 역사처럼 피와 살육의 역사였다.그래서 우리에게 그들의 심정이 그들의 눈물이 그들의 희망이 형재의 그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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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
리오 휴버먼 지음 / 책벌레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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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이 자못 위압적이다. 80년대였다면 가방에 넣고 다니다 불온서적으로 걸리기 딱 좋은 제목이다. 하긴 어떤 선배는 가방안에 막스 베버의 책을 가지고 다니다 검문에서 ' 이 막스가 그 맑스랑 무슨 연관이 있는 사람이지? '라며 책을 압수당했다는 웃지못할 이야기도 전설처럼 남던 시절이니까...

책 제목의 그럴싸한 혁명성에 비해 책의 내용은 평이하다.평이하다는 말이 곧 수준이 떨어진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평이성은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자본주의의 형성과정을 친절하게 설명했다는 뜻이다. 책 후미에 어느 외국 고등학교에서 사회교과서로 쓰였다는 이야기가 이 책이 얼마나 읽기 편하게 씌여졌는지 그 예가 될 듯 하다. 저자가 좌파적 저널에 지속적으로 글을 썼던 사람이어서 학술적인 용어를 자제하고 훨씬 대중적인 접근을 택했기 때문이리라.

우선 자본주의의 형성을 위해 저자는 중세시대부터 꼼꼼하게 사회의 부가 어떤 방식으로 누구를 위해 축적되는지 살피고 있다.한마디로 자본주의의 역사는 착취와 피착취의 역사이다.물론 작가가 이처럼 이분법적으로 잘라 이야기한 것은 아니다.자본주의는 그것보다 훨씬 복잡한 이해관계와 사회적 맥락을 담고 이루어졌다.하지만 극단순화해 본다면 그러한 결론도 충분히 도출될 수 있다.작가는 사회적 이해관계와 새로운 계급의 탄생,그리고 부를 둘러싼 헤게모니를 역사적 필연성으로 설명한다. 그러면서 무자비한 이윤의 추구만이 목적인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괴물이 이루어져 가는 과정을 소상히 설명한다.

특히 이 책이 눈에 띄는 점은 각 계급간의 대립이 발생했을 때 당시의 소송문이나 판결문등을 통해 당시의 상황을 리얼하게 그릴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남미로부터 유럽으로 유입된 금은으로 인한 유럽의 실제 물가상승을 한탄한 탄원, 국왕의 돈줄이 되었던 거대 카르텔이 국왕에게 보낸 협박성 편지,식민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한 모험가들의 편지, 몰락하는 봉건 영주들이 자신의 사유지를 상인들에게 판매하는 계약서 등등.. 이러한 충분한 자료들은 화면을 과거로 돌려 당시의 상황을 독자가 개연성을 가지고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많은 독자들이 그랬겠지만 이 책의 가장 아쉬운 점은 대공황시기까지 만 자본주의의 역사가 쓰여졌다는 것이다.책이 1930년대에 쓰여졌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하지만 이 책은 지금과 같은 다국적기업 중심의 신자유주의가 형성될 수 있었던 물적토대가 어떠한 착취과정을 통해 어떻게 미화되면서 만들어졌는지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나는 이 책을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틈만 나면 자본주의에서는 어쩔 수 없는 것 아니야라고 외쳐대는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대개 그런 사람들은 어려운걸 싫어하니까 더욱 이 책이 좋다. 그들이 우리 생활에 밀접해 있는 자본주의가 어떤 피의 역사를 가지고 만들어졌는지 안다면 마이더스가 황금을 숭배하듯 자본주의를 자랑스럽게 떠벌이고 다닐 수 만은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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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퇘지 - 양장본
마리 다리외세크 지음, 정장진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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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외갓집은 농사를 짓는다.그곳에는 돼지 우리가 있었다.어느 더운 여름날 외갓깁을 찾았을때 그 안에 누워있던 암퇘지는 내게 실로 충격이었다. 내가 동화책이나 아기동물원에서 본 돼지들과는 규모가 달랐다. 임신을 한 상태여서 더 비대해보였겠지만 우리 한 켠에 누워있는 암퇘지는 안방에 있는 장롱만했다.그리고 냄새는 어찌나 지독하던지 그동안 아기돼지 3형제에 대해 갖고 있던 애정이 썰물빠지듯 사라졌다. 이 소설<암퇘지>를 보며 지금은 세상에 없을 그 암퇘지를 생각했다.

사람이 다른 동물로 변한다는 소재는 그다지 새로운게 아니다.그리스 로마신화에도 신들이 툭하면 동물로 변해서 몹쓸짓을 한다.헐리웃의 영화들중에도 그런 소재에 대한 것은 부지기수다. 이 소설 <암퇘지>는 20대의 매력적인 여자가 부지불식간에 돼지로 변하면서 바라보는 세상을 그리고 있다.그리고 대부분이 그렇듯이 그녀의 눈으로 바라보고 경험하는 지긋지긋한 인간들과 그들이 만든 세상에 대한 풍자가 가득하다. 하지만 그러한 풍자가 독자에게 얼마나 설득력있게 행사되는가의 문제이다.그 점에서 이 작가의 힘이 조금 밀리는 듯 하다.

우선 작가가 그리고 있는 세상의 리얼리티가 초반부에는 살아있다. 직업을 얻기 위해 성을 매매한다거나 향수가게에서의 성공을 위해 나름대로 애를 쓴다거나..등등 . 그러나 소설의 주인공이 돼지로 변해가는 중반이후 뜬금 없이 종말론적인 세상이 그려지고 있다. 선거에 출마할 정치인이 뜬금없는 난교파티를 열고 아프리카 주술사가 등장하여 설득력없는 이야기를 펼친다.독재자가 된 정치인은 종교단체 대표에게 살해당하고..등등

종말론적 세상을 그리는 것이 전혀 문제가 될 것은 없다.하지만 그 종말론적 세상에 대한 묘사라든지 그렇게 밖에 될 수 없었던 상황등에 대한 설명은 전부 빠져있으니 독자로 당혹스럽다.고대소설의 특징인 '어느날 갑자기 하는 식'으로 등장하는 우연성을 현대의 독자에게 강요하려면 더 많은 작가의 노력이 필요하거나 아님 더 많은 독자의 상상력이 필요할 것이다.그러한 점에서 사실적인 환타지위에 서 있으면서도 종말론적인 위기감으로 끝까지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았던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와 비교해 볼 만하다. 아직 사라마구의 내공을 넘기에는 작가의 연륜이 한참 딸리는 듯 하다.

또 한가지 이 소설은 마조히즘적인 불쾌감을 가져온다. 굳이 성적인것만으로 치환할 필요는 없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상황에 절대 주체적으로 나서지 못한다. 물론 돼지로 변하고 있는 자신의 상황을 체크하는데도 정신 차리기 힘들었겠지만... 소설의 주인공은 처음부터 외모와 성이라 자본주의의 상징을 통해 부적절한 방법으로-써 놓고 보니 이상하다.요즘은 다들 그러지 않던가?-직장을 얻는다.그 이후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자각이라든지 하는 것은 없다.

변태적인 행위를 시키든 말든 어디로 끌려가든 말든...어떻게든 그 체제의 끝을 따라가려는 의지와 원래로 돌아가려는 의지만이 가득할 뿐 정신적인 각성이나 주체적인 대응이란 것은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외모가 돼지로 변하기 전부터 그녀는 돼지의 습성을 닮아가고 있었을런지 모른다.지독하게 수동적이던 그녀는 소설말미에 가서 드디어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기 시작한다.그것도 돼지가 됨을 인정한 후 가끔 인간으로 변하기 위한 정신의 집중일 뿐이다.

인간이 주체이기를 포기한 상태 아니 포기를 강요당하는 상태 흔히 말하는 인간소외이다.작가는 끝까지 인간됨의 자발적의지에대해 간과하며 넘어가고 만다.작가의 회의주의가 낭만적 그것의 발로가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선 조금더 깊은 현실에 대한 성찰과 독자에 대한 설득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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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의 카프카 (하)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춘미 옮김 / 문학사상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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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의 세계는 이원론적이다. 대부분의 성장소설이 그러하듯이 <해변의 카프카> 역시 이원론적 세계에서 방황하는 청년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이미 이원론적 세계는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다. 이승/저승, 현실/가상, 일상/꿈 혹은 3차원의 세계/4차원의 세계. 하루키는 가시계와 비가시계의 경계가 있다는 이미 영화나 소설에서 많이 이용한 소재를 응용한다. 다른 세계를 넘어서는 데는 바로 문이 있는 것이다. 세계의 경계선에 있는 이 문은 바로 '입구의 돌'이다. 나카타 노인의 여정은 '입구의 돌'이라는 세계의 문을 열기 위한 장치이다.

이 소설에서 모든 인물들은 몇가지 주요 소재로 수렴된다. 해변의 카프카라는 그림,고무라 도서관,입구의 돌 등이 바로 그것이다. 하라키는 이러한 소재에 인물을 배치한다. 소설 초반부는 상당히 스피디하게 읽힌다.도대체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두 사건이 -카프카의 가출과 숲속에서 일어난 집단실신 사건- 나카타라는 인물의 특이성과 결합되어 읽는 재미를 준다. 그리고 다른 두 사건이 어떻게 하나의 예정된 인연으로 한 곳에 수렴되어 가는지 기대하게 만든다.

하루키는 그 과정에서 모순적으로 완결된 세계에서 불완전성이 가지는 미학에 대한 애정을 과시한다. 하루키가 즐겨사용하는 음악적 장치이다. 이 소설에는 불완전성의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몇가지 음악이 등장한다. 해변의 카프카란 노래의 두가지 불협화음,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라디오 헤드의 노래,베토벤의 피아노 삼중주등이다. 슈베르트나 라디오 헤드의 몽환적이고 불안전한 느낌등은 하루끼가 등장인물의 말을 통해 직접 설명하고 있다. 호시노 청년에 사랑하게 된 베토벤의 '대공' 트리오 역시 이러한 요소중에 하나이다. 클래식에서 피아노 3중주 편성은 현악 사중주의 안정감에 비해 음향적으로 무척이나 불안정한 편성이다.하루키는 식상한 음악 요소를 과다인용하며 불완전성이 세계 인식의 발판이란 어찌보면 니체적 인용을 끄집어 내고 있다.

<해변의 카프카>의 가장 큰 패러디는 바로 신화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일본의 겐지 모노가타리의 생령 신화이다. 하루키가 신화를 뼈대로 삼고 있는 것은 이윤기가 신화에 대해 남긴 말을 생각해보면 이해하기 쉽다. 신화는 살아있는 현재의 반영이라는 것, 하루키의 말을 빌자면 세계는 메타포이기 때문이다. 신화라는 메타포를 통해 세계의 인식을 꽤하는 것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매력적인 소설 소재인 것 만은 사실이지만 공식에 대입하는 듯 직접적인 패러디일 경우 그 매력이 어떤지는 알 수 없다.그리고 사족삼아 숲(비가시적 세계)의 입구를 지키는 병사들의 말 '절대 돌아보지마'는 거의 에우리디체 신화를 옮기고 있다. 굳이 뱀의 다리를 만들어 상투적으로 보이게 하는 이유는 무었일까? 어쩌면 비가시적 세계 역시 상투성을 벗어날 수 없다는 이유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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