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탄생에 즈음하여

-소동파에게

자식들이 태어나면 부모들은

그들이 지적이기를 바란다

나는 지성 때문에

생애를 망쳐버렸다

이제 나는 오직 바랄 뿐이다 자식이

무식하고 사고하기를 싫어하며

자라주기를

그렇게 하면 자식은 편안하게 살게 될 것이다

내각의 각료로서.

 

                        ---베르톨트 브레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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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인간 2008-07-01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윽.. 낚였네요. ㅎㅎㅎ
 

......

사회적 현상으로서 폭력을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점은 폭력이 복수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폭력에는 그 정도가 다른 다양한 행위들이 존재하며,이는 폭력도 저마다 질적인 차이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

자유주의의 지배적인 이념들은 폭력에 대한 이해를 더욱 어렵게 만드는데,이는 '폭력-물리적 힘(악하고 후진적인)과 '비폭력-도덕적인 힘(선하고 진보의 후예인)을 너무나 비현실적인 이분법으로 구분하고 있기 때문이다.

....

제도화된 거대한 힘의 행사에서 폭력이 계속되고 있을 때, 그에 맞서는 사적인 폭력은 그다지 맣은 것을 성취하지 못하며 또한 그럴 수도 없다.

....

모든 폭력은 원칙적으로 나쁘다고 믿는 사람들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다양한 유형의 폭력을 체계적으로 구분하지 않으며, 폭력을 가하는 사람들과 폭력으로 고통받는 사람들 모두에게 미치는 결과도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 이러한 상황은 이에 대한 반동으로, 보수적 관점에세건 혁명적 관점에서건 모든 폭력은 선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양산하게 될 뿐이다. 말하자면 폭력의 효과에 대해서는 아무런 근거도 제시하지 못하면서 폭력으로부터 자기 자신의 심리적 구원을 얻으려는 사람들 말이다.

우리는 원론적인 차원에서 모든 폭력이 비폭력보다 나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가장 나쁜 것은 통제를 벗어난 폭력이다.

                                               .....  에릭 홉스봄 <저항과 반역 그리고 재즈> 중에서

..인용한 것은 다섯 문단이다. "폭력론 옹호하자는 건가? 아님 비폭력을 옹호하자는건가?"  홉스봄은 그렇게 묻는 당신이 문제라고 이야기하는 거다. 

 현재 정세, 촛불의 진행 과정과 정황을 -비참하지만 냉정하게 볼 때 -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전환 방식은 이 시점에서 단기적,전술적으로 적절하다. 모든 폭력이 효과적이기 위해서는 충분한 충전과 단기간에 가장 효과적이고 최대의 효율을 끌어올린 상황에서 분출되어야만 소기의 목적을 이룰 수 있다. 특히 1)상대가 운동의 힘에 대해 상황파악을 제대로 못하고 있거나 적절히 대처할 수 없을 때 2) 최대의 응집력을 보여주어야 한다. 일단 필요충분 조건에 해당하는 시기를 한 차례 흘려 보냈다고 봐도 무방하다.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 보인다.

'비폭력'은 이명박을 곤혹스럽게 하겠지만 적극 대응하게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장기적으로 무관심의 방식 즉, 흘려보내는 방식으로 '시민'과 '기타 '를 분절 시키면 되기 때문이다. '비폭력'  간판을 단 소란스러운 이웃이 내 집 사과 열매를 직접적으로 건드리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믿음만 있다면 남은 기간  동거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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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미힌 2008-07-01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이런 저런 생각을 해보게 되는 글이네용...
 

헐리웃의 잘생긴 배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각본도 쓰고 제작에 참여한 영화 <11번째 시간>이다.

이 영화는 과거 디카프리오가 출연한 기존의 영화와 장르도 주제의식도 다르다. 한마디로 하면 '환경 다큐멘터리'이기 때문이다.

디카프리오는 중간 중간에 <그것이 알고 싶다>의 문성근처럼 등장해서 다큐멘터리를 이끌어간다. 러닝타임은 100분에 조금 못 비친다. 기억에 의하면 너댓번 정도 디카프리오의 얼굴을 본 듯 하다.  

영화는 환경운동가, 과학자,(스티브 호킹도 나온다), 저술가, 정치가(고르바초프와 전 CIA국장 제임스 울시도 나온다)  등 등이 나와  주제와 과련된 인터뷰를 한다. 주로 지구환경과 관련된 생태학적주제들을 구들장에 앉아서 새끼 꼬듯 엮어간다.

이 영화 이전에 나왔던 엘 고어의 <불편한 진실> 보다 <11번째 시간>은 더 근본적인 질문을 한다. 애써 비교하자면 <불편한 진실>은 진보적인 주류 환경론과 현실주의의 접합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면 <11번째 시간>은 생태학적인 인식전환에 더 큰 비중을 둔다. 현재 도래하고 있는 환경 위기(온난화,숲의 파괴, 해양오염등) 는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과 생태계의 모순 사이에서 생긴 '증후' 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두 영화다. "지금 당장 구체적 행동에 들어가자" 라는 액션플랜을 제시한다.  그 액션플랜들은 의지만 있고 그것이 정치적 각성을 통해 습관화된다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것이다. 공정무역 상품 사용하기, 불필요한 소비 줄이기, 자전거 타기, 재활용 철저히 하기..

<11번째 시간>은 인류의 진화에서 부터 이야기를 끌어간다. 인간이라는 열등한 존재가 생물계에서 번창할 수 있었던 것은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지능'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지능에 바탕을 둔 산업혁명,석유의존형 시스템과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문제점 부터 본격적으로 말을 꺼낸다.

이런 말도 나온다. "사람들은 환경이,지구가 멸망할 거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틀린 말입니다. 지구나 환경은 멸망하지 않습니다. 다만 인류가 멸망할 거구요. 그 이후 다시 지구는 더 빨리 살아날 겁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스미스가 "인류와 바이러스"를 비교한 말이 문득 떠오르지 않는가? 


영화 <11번째 시간>은 지구 온난화, 숲의 파괴, 토양의 파괴, 해수의 오염, 다양한 생물종의 감소 등 등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간다. 그것은 생태학의 근본적 질문과도 같다. 영화 <11번째 시간>은 모든 자연을 소재로만 파악하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과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양식" 에 대해 문제를 삼는다.

영화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기억에 의존하는 것이라 정확한 인용은 아니다)

" 생태계는 더 큰 상위 시스템이고 경제는 하부 시스템이다. 인류는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하부 시스템을 급속도로 확장시켜왔다. 그렇게 되면서 생태계라는 더 상위 시스템의 공간을 줄어들었다."

" 아이들은 하루에 4시간 이상씩 TV에 노출되어있다. 사람들은 하루에 수 천개의 광고에 노출되었고 수 천개의 브랜드를 알고 있다. 그렇지만 집 밖의 수 십개의 동식물들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다."

" 현재 경영 대학원을 나온 CEO들은 하나 같이 성장을 외친다. 경제 성장이 최대의 가치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수단을 목적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중요한 목적은 삶의 질이다. 잘못된 성장은 삶의 질을 망쳐놓는다. 그것을 되찾아야한다."

영화<11번째 시간>은 구체적으로 악화일로를 걷는 환경문제와 인간의 삶을 연결한다. 그 바탕에서는 생태주의적 사고 전환을 요구한다. 결론에서 영화는 이런 움직임들이 '전근대'로의 회귀를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확히한다. 일상에서 작은 변화들과 함께 '이성의 힘'으로 새로운 대안적 세계를 실현하자고 주장한다. 그것은 재생 에너지와 순환가능한 자원에 바탕을 둔 새로운 세계 디자인을 말한다. 

이 영화는 생태계와 인간을 대립구도로 만들어서 허무주의에 빠지게 하지 않는다. 근본적인 출발점은 인간의 이성과 선의지에 대한 믿음이다.이미 세상에는 자발적으로 모인 생태그룹들과 모임들이 늘어나고 있다. 

영화는 "인간은 아는 만큼 행동한다"는 마지막 희망을 버리지 않으면서 끝난다.

생태주의적 가치와 환경문제에 대해 알고 싶은데 책 보기가 귀찮다면 이 영화<11번째 시간>이 도움이 될 듯하다.  영화관에서 개봉하지 않았고 DVD로는 나와있다.

( 부산에 계신 학교 선생님들 중에서 학생들과 함께 보려는데  이 DVD를 도저히 못구하겠다고 하신다면 기꺼이 빌려드릴 생각이 있다. 먼저 구해보시구....^^; ) (우체국이나 택배가 빌리는 것보다 더 비싸니까.. )

..근데 왜 갑자기 영화<11번째 시간> 이야기를 꺼냈을까?...^^

알 사람은 알고 모를 사람은 몰라도 되는데...그건 이것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현재 생활 속에서 할 수 있는 한 가지 운동방식이다. ^^

한국의 대표적인 시인들은 거의 참여했다. 고은을 비롯해서 무려 시인 203명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국민이 대운하에 반대하면 안하겠다"라고 어제 기자회견에서 했단다.

단순한게 아주 좋다.^^

그럼 이제 '국민이 반대'하면 된다.

얼마나 쉬운가.^^

 그 XX 탄핵가자..실제로 그렇게 가지도 못하면서 레토닉은 거리에서만으로 충분하다. 광우병 대책회의도 '그건 슬로건'이다라고 슬쩍 꼬리를 내렷다.(처음부터 그런 것 아니었겠나? )

이명박에 반대하는 것도 어디서 출발하냐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진다. 적 앞에서 반대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적이 사라진 이후까지도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처음 부터 적을 무너뜨릴 현실적 정세나 의지도 그닥 높아보이지는 않는다. 어쨋거나 우리는 그 이후의 세상은 어떻게 되어야 하는 가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즉 구체적 투쟁은 모두에게 중요하지만 그 투쟁이 출발하는 출발점과 방향성에 대한 보편적이고 이론적인 성찰이 부족하면 그 결과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난다.

그리고  이론적이고 전망적인 것은 '지식인'들의 전유물이라고 생각치 않는다. 아고라의 논객들이 아니어도 ,대학에 있지 않아도 일반 대중이 모두 그런 '지식인'이 될 수 있는 정보의 시대에 살고 있지 않은가. 이번 촛불집회에도 공과 실이 있을 것이다. 아직 끝은 알 수 없지만...촛불집회가 남긴 공 중에 하나라면 분명히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교육이 아니었을까 싶다. 시위를 하는 것,파업을 하는 것, 이런 것들이 특정한 사람들만 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 촛불을 들며 가졌던 연대감과 의식들은 이제 더 깊은 문제까지 이어지질 수 있는 단초가 될 것이다.(물론 거기에는 희망만 있는 것은 아니다.)

좀 더 근본적 가치에 대한 이해와 인간과 역사에 대한 애정을 무장하고 갔으면 한다. 

한국 시의 절창이라고 할만한 <저문 강에 삽을 씻고>의 정희성 시인의 글을 시집에서 그래도 옮겨온다.



장마가 시작되었다.옥타비오 파스의 <돌과 꽃 사이에서>가 맴돈다..

돌과 꽃 사이에, 인간.
우리를 죽음으로 데려가는 탄생,
우리를 탄생으로 데려가는 죽음.

인간,
돌 위로 줄기차게 내리는 비
화염 사이로 흐르는 강
폭풍우를 이겨내는 꽃
번갯불의 섬광을 닮은 새.
노동과 열매 사이의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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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모론 이런 거 아니구요...

컨테이너 저건 정말 위험하다구요.

시위의 규모가 아마 최근 들어 가장 클 듯 합니다. 제가 속해있는 여러 단체들로부터 모두 문자를 받았습니다.

부산이야 서울에 비하면 그리 대단하지 않겠지만...

서울은 정말 많은 사람들이 모일 듯 합니다.

거대한 대중의 흐름이 어디로 이어질지는 알 수 없으나...그 거대함으로 인해 과격해질 수도 있습니다. 다시는 이 정도 숫자가 모이기 힘들다는 어떤 절박함 같은 것으로 인해서 말이지요,...

예전에 부산에서 에이펙 할 때인가 ILO할 때인가 수영교 다리 앞에 컨테이너 바리케이드를 했습니다. 그 때는 안에 아무것도 안채웠지요. 그거 밀리지요.이번에는 채웠다더군요. 그때도 시위대중 일부가 컨테이너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 와중에 몇 몇은 떨어지고....

부산에서 컨테이너가 나왔을 때 아마 경찰청장이 어청수 아니었나 싶은데...

시위대가 컨테이너 올라갈 가능성이 잇습니다.경찰은 막겠지요. 전경 버스에서 떨어지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높이입니다. 양측다 상당한 부상이 있을 수도 있지요.

컨테이너....이건 불쏘시개입니다. 부상을 야기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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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아프님께 어느분이 다신 댓글을 보다가...마침 ...생각났습니다.하씨에 대한 이야기입니다.그는 '허구의 장'이라는 비판도 받습니다.'구성의 문제'를 건드리면 그렇습니다.이건 그 직접적 이야기는 아니고 추론해 보게하지요..근데 몇 살 된거유 ??

자유주의적 합리주의는 자신의 언명조건들을 지워버리고 그 역사적인 기입공간을 부인하는 식의 전형적인 움직임을 보인다.이는 라인하르트 코젤렉이 보여주었던바,이미 계몽적 '위선'의 구성요소였던 것이다.많은 자유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정치적 태도를 전제하고 있다는 생각을 거부하고 어떤 공평한 위치에서 말하는 것인 듯 가장하면서 선례를 따른다.

자유주의자들은 이런 방식으로 자신들의 견해를 '합리성'의 구현으로 제시하며,이를 통해 자신의 대립자들을 '합리적 대화'에서 배제할 수 있다.하지만 배제된 사람들은 사라지지 않으며,이들의 입장을 '합당하지 않다'고 선언해 버리면,중립성의 문제는 해결 불가능한 채로 남는다.배제된 사람들의 입장에서 합리적 대화의 '중립적'원칙들은 확실히 중립적이 아니다.자유주의자들이 '합리성'으로 선언한 것을 배제된 사람들은 강제로 경험한다.

권력이나 힘을 넘어서는 일련의 규범들을 확립하는 것은 그 자체로 강력하고 힘 있는 개념적 실천인데,그것은 규범적 보편성이라는 수사에 호소함으로써 그것의 고유한 권력 유희를 승화하고 변장하고 확대한다는 의미에서이다.  (주디스 버틀러 재인용) 

나는 배제 형식들을 합리성의 베일로 감추는 대신,국가나 정치적 질서가 존재하는 근거인 이 배제 형식들과 그 배제 형식들이 의미하는 폭력성을 인정하는 것이 매우 중요함을 논증하려는 것이다.하나의 자유민주주의의 질서에 요구되는 배제의 필연적인 '경계들' 및 방식들의 실제적 본성을 '합리성'이라는 가정된 중립적 성격으로 숨기는 것은, 민주주의 정치의 고유한 작업을 방해하는 엄폐 효과를 창출한다.윌리엄 코널리는 "중립성이라는 구실은 공적 담론의 문턱 아래에 있는 기성 타협들을 유지하는 기능을 한다"라고 올바르게 지적했다.

                                                                ....<정치적인 것의 귀환(상탈 무페> 중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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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8-03-31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지금 심하게 취해서 내용은 머리에 안들어오는데 내일 보겠습니다. :) 고맙습니다.

마늘빵 2008-04-01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읽었어요. :) 무페의 책 한 번 봐야겠군요. 드팀전님 회사원 생활하시면서 이런 책을 읽으실 수 있다는게 신기합니다. 선생하다가 회사원하니 도통 정신이 없습니다. 읽는 책도 난이도를 한층 낮추게 되더군요. 올해 서른 됐어요. :) 만으로는 아직 20대. 흐흐 근데 선물 1은 어딨는건가요. 글이 안 보잉는데. -_-a

드팀전 2008-04-02 0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선물 1은 홍세화선생이 보내셨어요 ^^ㅋㅋ
그리고 버거워도 천천히 따라갑니다...'우공이산'이라는 말이 있잖아요.그리고 회사원 1년차와 11년차가 같습니까 ^^
호기심 동력엔진엔 불이 꺼지지 않습니다.ㅋㅋ
전 지난 주말에 다 봤는데...아직 리뷰는 못올리고 있습니다.좋은 책이었어요.
어떤 면에서 이 책의 모든 편을 다 볼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