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도르노 미학의 계승자로서, 당신은 비판이론이 지닌 가장 큰 장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무엇보다 모든 합리주의와 철학적 낙관주의를 회의(懷疑)한다는 점이다. 그 회의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와 니체가 공유하는 것이다. 그와 더불어 서양철학을 규정하는 소크라테스적 동일화, 곧 덕과 앎의 동일화에 대한 비판이 있다. 그것은 주체가 자신의 이성적 능력을 통해 정의된다는 믿음, 주체의 이성이 보증될 수 있다는 믿음, 우리 활동이 성공하고 그것이 좋다는 믿음에 대한 비판이다. 곧 주체의 이성만이 아니라, 주체 내부에 있는 자연과 이성 사이의 해소 불가능한 변증법이 우리를 인간으로 만든다는 사실을 비판이론은 보여준다.”  

[언제부턴가 나는 저 '회의(懷疑)'를, 그런 회의를 품고 더디게 내딪게될 '첫걸음'을 동경하게 되었다.](이건 이글을 퍼온 내외님의 코멘트이며 나 역시 동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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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여름 

            -김광규 

 착륙을 앞두고 고도를 낮추는 여객기의 동체가 햇빛을 받아 반짝인다. 

 모처럼 구름 한 점 없이 활짝 갠 여름날, 자기의 영공을 점검하려는 듯, 솔개 한 마리 하늘 높이 떠돌고 있다. 

 뒷마당 대추나무에서 매미와 여치가 주명곡처럼 동시에 또는 번갈아 울어댄다.(노래한다고 말해야 옳을까.) 참새, 까치, 비둘기, 뻐구기, 그리고 꾀꼬리 소리도 가끔 끼어든다. 

 방학을 맞은 동네 아이들이 골목에서 농구를 하거나, 인라인스케이트를 타느라고 떠들어대는 소리도 시끄럽게 한몫을 거든다. 

 그래도 창문을 닫을 수는 없다, 

 무더위 때문이 아니다. 

 이 모든 세상의 소리를 듣지 않고 창문을 닫아버린다면, 그리고 냉방기를 틀고 TV를 보거나 CD음악을 듣는 다면, 아무래도 한 생애의 늦여름을 놓칠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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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낮 아이가 어린이 집에서 조퇴를 했다. 열이 갑자기 높아져서 부랴 부랴 돌려보낸 것이다.  

불과 서너 주 전에 어린이 집에서 놀다가 잠시 힘들다며 누워있었는데 경련과 함께 흰자위가 휙 돌아가 버린 적이 있다. 아무리 경험이 많은 어린이집 선생님들이라지만 갑자기 그런 일을 당하면 놀라고 조심스러운 법이다. 그날 밤에도 열이 39도를 왔다갔다 하더니 동일한 경련이 왔다. 실제로 옆에서 보고 있으니까 두려운 마음이 들긴 하더라. 의학책에서는 오래지속되지 않으면 큰 문제가 아니니 부모가 먼저 당황하지 말고 침착을 유지하라고 씌여있다. 그 말을 되뇌이며 침착을 유지하긴 했으나 자식의 열경련을 보고 있으면 불안감과 안쓰러움이 양눈가를 어지럽힌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때문인지 최근 이 지역을 강타하고 있는 신종플루에 대한 우려 때문인지 어린이집에서는 열감기 기운이 있으니 바로 집으로 보냈다.  

일찍 아이와 잠들었다.  

자정을 넘기며 아이가 힘들어해서 열을 재어보니 39도다. 수건으로 몸을 닦아주고 다리를 주물러 주고 물도 조금 먹였다.  

아이에게 아빠가 너를 얼마나 자랑스러워하는지를 한참 이야기해주고, 아빠가 지켜줄 거라고 부드럽게 이야기해주고, 열이 왜 생겼는지 이야기해주고...두런 두런  

아이가 힘겹지만 위축되지 않은 목소리로 이런다. " 예찬이가 몸에 있는 바이러스랑 싸우고 있는거지." 나는  "그래 맞아. 예찬이는 씩씩하니까 바이러스한테 이길꺼야. 지난 번에도 이겼지. 더 튼튼해질꺼야" 라고 맞장구친다. 

아이는 다시 잠들고 나는 똘망똘망해졌다. 오른쪽 바닥에서는 작은 열덩이 하나가 모로 누워 잠들어 있고 나는 등화관재때 혼자 불 켜놓은 집처럼 민망하게 모니터 앞에 숨죽이고 있다. 

"이 모든 세상의 소리를 듣지 않고 창문을 닫아버린다면, 그리고 냉방기를 틀고 TV를 보거나 CD음악을 듣는 다면, 아무래도 한 생애의 늦여름을 놓칠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한 생애의 늦여름'이다. 지금 내게 흘러가고 있는 시간의 계절이 그렇다. 또 지금 우리 주변에서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숭고와 추함의 변주곡들'이 모두 '늦여름'의 시간들이다. 

열에 상기된 아이의 끙끙거림을 들으며 나는 내게 묻는다. 

 과연 나는 '늦여름'의 살 속으로 들어가 그 뜨거운 기억의 정점에 촉수를 밀착하고 있는가? 뺨을 부비고 있는가? '늦여름'의 한 복판을 가르는 얼음처럼 차가운 생의 현현을 목격하고 있는가? 열길 낭떠러지 위에서 외줄타는 광대의 터질 것 같은 집중력과 예민함으로  생의 '외줄' 위를 처연하게 걷고 있는가?  

나는 들어가기를 주저하는 압정을 모질게 부여 박는 마음으로 내게 다시 꼭꼭 눌러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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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시대 주기도문 

             -고정희 

권력의 꼭대기에 앉아 계신 우리 자본님 

가진자의 힘을 악랄하게 하옵시매 

지상에서 자본이 힘있는 것같이 

개인의 삶에서도 막강해지이다 

나날에 필요한 먹이사슬을 주옵시매 

나보다 힘없는 자가 내 먹이사슬이 되고 

내가 나보다 힘있는 자의 먹이사슬이 된 것같이 

보다 강한 나라의 축재를 북돋으사 

다만 정의나 평화에서 멀어지게 하소서 

지배와 권력과 행복의 근원이 영원히 자본의 식민통치에 있사옵니다.(상향-) 

---------------------------------------------------------------------------- 

몇 년 전 해남 너른 들녘을 가로지르다 '고정희 생가'라는 팻말을 보고 차를 세운 적이 있다. 예정에 없던 장소였는지라 머뭇거리다 팻말보다 조금 앞에 세웠다. 해는 지고 있었고 초행길이라 가급적 더 늦기 전에 다음 출발을 위한 숙소에 도착하고 싶었다. 잠시 들렀다가 갈까...아니 그냥 갈까...길 옆에 잠시 서서 고민하다가 지는 해의 재촉에 마음을 돌렸다. 

이 오래된 시집을 다시 꺼내드는 것도 모두 MB님의 혜안덕분이다. 이 시를 보고 있으면 91년 지리산에서 실족하여 세상을 떠난 시인이 그리 오래지나지 않은 미래의 한반도에 그분이 오실 걸 알고 있었는 듯 하다. 시인의 시대에도 이미 작은 적 그리스도들이 목청을 높이고 다녔으니 시대의 감성을 앞서 읽는 시인의 눈에는 코리아버전 대빵 적 그리스도가 외울 기도가 귓가에 들렷을 것이다. 지금 평택에서, 여의도에서 저들 모두 무릎을 끓고 '악령의 주기도문'을 외우고 있다. 

시인은 '악령이 시궁창 모습으로, 마귀 얼굴로 다가오지않으며 누추하거나 냄새나는 손으로 악수하지 않는다' 라고 말한다.  '악령은 무식하거나 가난하지 않으며/ 악령은 패배하거나 절망하지 않으며/ 악령은 성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으며 무례를 범하지' 도 않는다. 그는 '너그러운 승리자의 모습으로 우리를 일단 제압한 뒤/ 우리의 밥그릇에 들어앉는다'   

고정희를 다시 펴보고 싶은 시대란... 뭐랄까... 이것은? 

시인은 내게-난 '콕' 찍어 '내'게라고 만 했다. 당신들이 자신을 스스로 높여 평가하든 아님 낯춰 평가하든 자유다. 당신들이 새로운 발견에 흥분하여 듣보잡이 되든지 발견의 실타래들이 엃히기 시작하여 미망에 묶이든지 그것도 당신의 일이다. 모두 당신의 공덕일 뿐이다. - 이런 말로 자꾸 종아리를 친다. (판소리 아니리식으로 읽어야 한다.) 

이제부터 인생이 무어냐고 묻거든/ 허튼 삶 삽질하는 힘이라고 말해둬/ 이제부터 목숨이 무어냐고 묻거든/ 허튼넋 몰아내는 칼이라고 말해둬/ 대쪽 같은 사람들아/금쪽 같은 사람들아/ 각자 목숨에 달린 허튼밥줄을 가려내!/ 각자 연혁에 엃힌 허튼돈줄 잘라내!  <몸바쳐 밥을 사는 사람 내력 한마당> 

물론 세상에는 '함께 할 일과 혼자 할 일'이 각각 따로 있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숫타니파타>의 유명한 '무소의 뿔' 비유가 좋은 예일 듯 하다. 그 장은 '모두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라고 끝난다. 가장 대표적인 구절이 이거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그런데 오로지 단 한 구절만 예외다. 

"만일 그대가 지혜롭고 성실하고 예의 바르고 현명한 동반자를 얻었다면 어떠한 난관도 극복하리니, 기쁜 마음으로 생각을 가다듬고 그와 함께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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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가 역행을 하다보니 이 오래된 시집<아침 저녁으로 읽기 위하여>을 다시 꺼내 읽게 된다. 나는 이 시집에 나온 시들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또 싫어하기도 한다.  

내가 386선배들의 편협함에 못마땅했던 이유는 잘라말하면 이런류의 시들 만이 진정한,최고의 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물론 나역시 혹한적도 있다. 그렇지만 오래가진 못했다. 나는 그들이 아직도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그 때도 지금도 부르주아지 근성으로 인해 여기에 실린 시들이 '시'가 보여 주어야하는 최고의 전형이라고는 생각하지 는않는다. 

하지만 여기에는 분명히 시가 보여주어야하는 어떤 아름다움 중 하나가 있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김남주가 누군지 잘 모를 것이며, 또 시집 제목만으로도 유명했던 이 번역시집의 존재 자체도 모를 것이다.(정말 아침 저녁으로 읽어야 할 것 같은...) 아니 이제 아무도 이런 시집을 읽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 요즘 친구들이 보면 '이게 무슨 시야? 투쟁구호같은거 아니야.' 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침 저녁으로 읽기 위하여>를 펼친다.      

그날이 오면 거칠고 드센 폭풍은/ 수없이 많은 떡갈나무를 찟어발길 것이다. 

궁정은 부들부들 떨게 되고/ 성당의 탑은 무너져 버릴 것이다. (하이네의 시<기다려라 다만>중 발췌) 

어제 61년만에 일식이 있었다.  

 "낮이 사라진 그날, 독재의 개들은 진실을 먹어치웠다"(국회의원 천정배) 

 몇 시간 안에 해는 다시 빛나고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지만 개들이 먹어치운 해는 이 땅에 아주 오래 오래 깊은 상처를 남기게 된다. 

 반세기를 지배해온 일본의 자민당이 그렇게 오래 버틸 수 있었던 것 중에 하나는 미디어의 상황과 관련이 있다.  일본의 신문은 우리처럼 보수우익 신문들이 판을 친다,가끔 진보적인 분들도 인용하는 외신에는 일본판 조선일보,일본판 중앙일보가 꽤 있다. 조선일보의 정치적 의도를 비판하기 위해 국내 또다른 론을 인용할 경우, 가끔 '이항 대립'의 틈바구니로 몰리기 때문에 택하는 것이 외신이다. '물러난'객관성을 얻기 위해 외신을 인용하는데, 가끔 어처구니 없을 때는 선택한 것이 각국의 보수우익 신문일때이다. (몇 년 전에 페이퍼인가 댓글로 이와 유사한 내용을 쓴 적이 있다.) 

현재 한나라당이 모델로 두는 것은 거의 일본 모델과 유사하다. 일본 신문 중 전국지는 대개가 보수 우익지이다. TV는 NHK만 제외하면 상업방송의 천국이다. 사회적 다양성을 담아내는 시민사회의 두께가 미력한 이 사회에서 한나라당이 날치기 미디어법을 통해 끌고 가고자 하는 모델은 '장기집권 자민당-보수.상업 미디어 동거 모델' 이다. 이것은 단 한번의 승부수가 아니다. 장기간의 이데올로기적 작업이며 거대프로젝트이다. 이데올로기가 끝났다고 앞에서 말하면서 실제로 거대한 이데올로기적 기획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데올로기의 종언'은 그 언명 자체로 '거대한 이데올로기'가 되는 것이다. 

한나라당은 절차적으로 '날치기 조차 제대로 날치기'하지 못했다. TV중계를 통해서 전국에 중계된 바를 보더라도 국회부의장이라는 인간은 투표종료를 번복했다. 또한 대리투표 의혹이 불거지자 '증거화면' 가지고 오라고 뻣대고 있다. 그렇게 '증거 대라' 라고 나오면 그 '증거'를 못찾아낼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 하다. 모든 장면이 중계되고 있었고 국회의사당 방청석에 카메라가 몇 대가 있었는지 모르는가?  

'증거' 가 나오면 이 자들은 또 다르게 말을 바꿀게 뻔하다. '몇 몇 그런 예가 있는데'라고 하면서 '희생양'으로 자기 의원 몇 명 징계하고 끝낼 것이다. 이 참에 '증거' 가 나온다면 그렇게 자랑스럽게 지킨다고 헛소리하던 -스스로 매번 모독하면서- 대한민국 헌정 역사를 뒤튼 죄목으로 한나라당 의원이 전원 사퇴하겠다고 약속을 하라. 그리고 기습상정 날치기한 법안은 절차적으로도 민주주의에 어긋나기 때문에 원천무효가 되어야 한다. 

방송법의 절차상 문제는 사실 부차적인 것이다. 미디어 악법의 주요 4대 법안. 이 문제는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분리되지 않는다. 이 점을 끝까지 놓치지 말아야 한다. 즉 나머지 법들은 어떻게 되었든 통과 되었으니 그냥 가고, 절차상 문제가 있었던 방송법은 다시 수정하지는 식으로 접근해서는 곤란하다. 그렇기 때문에 '원천무효'이어야하지 '방송법'만 재논의는 의미가 없는 것이다. TV 보도에서는 편의적으로 절차적 논란이 예상되는 '방송법'을 부각시키고 있지만 이것은 긍정적인 점과 부정적인 점을 동시게 갖고 있다. 미디어 4대 악법을 하나로 읽어야 한다는 점.  흥분할때 흥분하고 욕을 할 때 욕을 하더라도 미디어는 비판적으로 읽어야만 한다.   

주요 언론 악법은 신문법 개정안, 방송법 개정안,IP 사업법 개정안, 정보통신망법 개정안이다.   

"적은  

아직 승리한 것이 아니다"  

(브레히트의 시<평화를 위한 전사의 죽음에 부쳐>중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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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얼음 

                -박남준 

옷을 껴입듯 한 겹 또 한 겹 

추위가 더할수록 얼음의 두께가 깊어지는 것은 

버들치며 송사리 품 안에 숨 쉬는 것들을  

따뜻하게 키우고 싶기 때문이다 

철모르는 돌팔매로부터 

겁 많은 물고기들을 두 눈 동그란 것들을 

놀라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얼음이 맑고 반짝이는 것은 

그 아래 작고 여린 것들이 푸른빛을 잃지 않고 

봄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겨울 모진 것 그래도 견딜 만한 것은 

제 몸의 온기란 온기 세상에 다 전하고 

스스로 차디찬 알몸의 몸이 되어버린 얼음이 있기 때문이다 

쫓기고 내몰린 것들을 껴안고 눈물지어본 이들은 알 것이다 

햇살 아래 녹아내린 얼음의 투명한 눈물자위를 

아 몸을 다 바쳐서 피워내는 사랑이라니 

그 빛나는 것이라니 

.............................................................................. 

 신종플루가 약간 걱정되었다.하지만 아침 9시에 버스에 올랐다. 서울에 있었다.그리고 조금 전 밤 11시. 오랜만에 멀리 도시의 불빛들을 차창 밖으로 내다보며 부산에 도착했다. 긴 하루였지만 한동안 못보던 풍경들을 멀리서나마 볼 수 있어서 위로가 되었다. 

위성TV로 롯데 자이언츠의 가르시아가 만루홈런을 치는 것도 볼 수 있었다. 야구중계에 그다지 큰 미련이 없는 관계로 평소 볼 일이 없었는데 그것도 새로왔다. 롯데는 8연승이란다.   

 박남준 시인은 악양에 산다. 

수 년전에 혼자 여행을 다니다 그저 이름이 멋있어서 들렀던 곳이 악양이다. 중고차가 길을 잘못 들어 헤메이기도 했다. 다시금 악양을 찾을 일이 있다면 박남준 시인을 뵙고 싶다. 

시인의 시를 읽다보면 '아비됨'의 의미를 다시금 새긴다. 결국 녹아내리게 될 얼음이 되는 것이다. '겁 많은 물고기들을 놀라지 않게 하기 위해서' 따뜻한 얼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거창하게 '우리 아이들이 살 세상을 위해' 라는 진부한 표현에 자기감화 받는 일을 삼가하는 편이다. 그 말 자체의 울림과 결과가 아름답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말하고자 하는 바는 왠지 자기의 행위를 무슨 대단한 일인양 치켜세우는 그 소박함 속에 담긴 자기위안이 내 스타일-나는 단지 스타일의 차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라는 것 뿐이다.  

시인의 마음은 그런 '아비됨'의 마음에서 더 보편적인 사랑으로 나아간다. 이 시가 아름다운 것은 거기서 부터이다.  

'쫓기고 내몰린 것들을 껴안고 눈물지어본 이들은 알 것이다'  

이 문장은 내게 '오래되었으나 삭지 않아 눈에 밟히는 것들'이 된다. 시인은 '쓰러진 것들이 쓰러진 것들과'라는 시에서 그렇게 말한다. 

저 구절 중에서 가장 패이는 부분은 '껴안고' 이다. 나는 나름 업무상 이런 저런 부류의 인간들을 많이 만나는편이다. '기름진 것들'도 가끔 있다만 '쫓기고 내몰린 것들'에 늘 마음이 간다. 그리고 그들 때문에 자주 붉어진 눈사위를 동료들에게 숨기려고 딴짓을 하는 체한다. 즉 '쫓기고 내몰린 것들'을 조금은 알고 또 -조작되었을지도 모르지만-타고난 공감능력으로 인해 '눈물'은 그것보다  조금 더 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껴안고' 라는 말은 목에 걸려 나오지 않는 작은 조각뼈같다. 내가 정말 '껴안고' 눈물지어본 적이 있었을까?  너는 정녕 '껴안고' 울었는가? 너는 진실로 '껴안고' 울고 있는가?   

'껴안고 운다'의 그 무거움에 대해서 무릎을 꺽으며 깊이 생각한다. 거기가 내 바닥이다. 

 다들 '껴안고' 잘 우는데 나는 아직 내 바닥에 질척거리고 있다. 내 '뼈아픈 후회'는 그거다. '그 누구도 걸어 들어온 적 없는 나의 폐허'이며 그저 '죽은 귀에 모래알을 넣어준 바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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