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물론 생존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나아지기 위해서다. 수난을 당해도 무방하나 그것은 장래의 모든 고통을 없애기 위해서다. 마땅히 싸워야한다. 그것은 개혁을 위해서이다. 

다른 사람의 자살을 책망하는 사람은, 사람을 책망하는 한편, 반드시 그 사람을 자살의 길로 내몬 주변 환경에 대해서도 도전해야 하며 공격해야 한다. 

 만일 어둠을 만드는 주범의 힘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못하면서, 그쪽을 향해서는 화살 한 개도 쏘지 않으면서, 단지 '약자'에 대해서만 시끄럽게 떠벌릴 뿐이라면, 그가 제아무리 의로움을 보인다 할지라도, 나는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정말 참을 수 없게 된다. 사실 그는 살인자의 공범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고." 

  루쉰,<꽃테 문학> ...친리자이 부인일을 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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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을 생각하며 얻은 생활규범 한가지는;

'애들은 애들끼리, 쓰레기는 쓰레기 통에'  

얼마나 명징한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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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한 권 보고 싶어졌다. 온힘을 다해 지난 계절의 수분을 빼어내는 겨울나무를 보다가... 언젠가 사두었던 코맥 맥카시의 <피빛 자오선>을 열었다.   

영어로 하면 Blood... Fascinating! 이다. 그러고 보니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로드>,<피빛 자오선>을 본 셈인데, 그는 아직 단 한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다. 이 중 으뜸은 <피빛 자오선>이다. 논란이 될 말한 결말 부분 역시 개인적으로는 흡족하다. 

이러다 국경 3부작을 다 따라가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읽어야 할 책들도 많은데...이런.... 특정한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닌 '전작 읽기'는 내게 스노비즘의 의혹을 들게 한다.)     

초식의 환상으로 폭력의 삶을 건너려는 세계에 죽은 동물의 내장을 통과하고 날아오는 비릿한 모래 바람은 어떤 종류의 난처함을 던져줄까?  

어제 밤 회식에서 돌아온 후 취기에 모 시인의 시집을 읽었다. 계란을 벽에 던지듯 시집을 던져버렸다. 고깃살에 뚝뚝 떨어지는 지난 생존의 상징이 주는 역겨움이 차라리 낫다. 반백의 시간, 고행의 숨결을 통해 겨우 닿은 곳이 그곳이었다면 말이다.   

  

 

 

 

 

 

 

 

  1.<피빛 자오선>이 영화로도 만들어진다기에 혹시하고 유투브를 뒤져봤다. 영화 티저가 하나 있는데 실제 영화 홍보물은 아니었다. 호주 시드니에 사는 한 대학생이 과제로 만든 작품이다.  

 

 

2.유투브를 뒤지다가 예일대학 공개강의에서 <1945년 이후 미국문학>에서 <Blood meridian>을 다루는 강의를 잠시 들었다. 실존 인물 홀든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90분 강연물이어서 살짝 보고 나왔는데 좀 한가해지면 다시 찾아봐야겠다.  

 

 

3. 홀든 판사가 전쟁에 대해 설하는 장면이 있다. 나름 역사를 가진 흔한 이야기지만 인상적인 장면으로 포함 될 만하다. 홀든식으로 생각하든 홀든에 대결하든 말이다. 지금 이 곳에는 너무 많은 늙은 홀든과 홀든이 좋아하는 젊은이들이 살고 있나? 

어쨋거나 어제 그 시집을 던져버린 것은 후회하지 않는다.

   

The good book says that he that lives by the sword shall perish by the sword, said the black.

The judge smiled, his face shining with grease. What right man would have it any other way? he said.

The good book does indeed count war an evil, said Irving. Yet there's many a bloody tale of war inside it.

It makes no difference what men think of war, said the judge. War endures. As well ask men what they think of stone. War was always here. Before man was, war waited for him. The ultimate trade awaiting its ultimate practitioner. That is the way it was and will be. That way and not some other way.

He turned to Brown, from whom he'd heard some whispered slur or demurrer. Ah, Davy, he said. It's your own trade we honor here. Why not rather take a small bow. Let each acknowledge each.

My trade?

Certainly.

What is my trade?

War. War is your trade. Is it not?

And it ain't yours?

Mine too. Very much so.

What about all them notebooks and bones and stuff?

All other trades are contained in that of war.

Is that why war endures?

No. It endures because young men love it and old men love it in them. Those that fought, those that did not.

That's your notion.

The judge smiled. Men are born for games. Nothing else. Every child knows that play is nobler than work. He knows too that the worth or merit of a game is not inherent in the game itself but rather in the value of that which is put at hazard. Games of chance require a wager to have meaning at all. Games of sport involve the skill and strength of the opponents and the humiliation of defeat and the pride of victory are in themselevs sufficient stake because they inhere in the worth of the principals and define them. But trial of chance or trial of worth all games aspire to the condition of war for here that which is wagered swallows up game, player, all.

Suppose two men at cards with nothing to wager save their lives. Who has not heard such a tale? A turn of the card. The whole universe for such a player has labored clanking to this moment which will tell if he is to die at that man's hand or that man at his. What more certain validation of a man's worth could there be? This enhancement of the game to its ultimate state admits no argument concerning the notion of fate. The selection of one man over another is a preference absolute and irrevocable and it is a dull man indeed who could reckon so profound a decision without agency or significance either one. In such games as have for their stake the annihilation of the defeated the decisions are quite clear. This man holdgin this particular arrangement of cards in his hand is thereby removed from existence. This is the nature of war, whose stake is at once the game andthe authority and the justification. Seen so, war is the truest form of divination. It is the testing of one's will and the will of another within that larger will which because it binds them is therefore forced to select. War is the ultimate game because war is at least a forcing of the unity of existence. War is go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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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기림- 


나의 소년 시절은 은(銀)빛 바다가 엿보이는 그 긴 언덕길을 어머니의 상여(喪輿)와 함께 꼬부라져 돌아갔다.

내 첫사랑도 그 길 위에서 조약돌처럼 집었다가 조약돌처럼 잃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푸른 하늘 빛에 혼자 때없이 그 길을 넘어 강(江)가로 내려갔다가도 노을에 함뿍 자줏빛으로 젖어서 돌아오곤 했다.

그 강가에는 봄이, 여름이, 가을이, 겨울이 나의 나이와 함께 여러 번 다녀갔다. 가마귀도 날아가고 두루미고 떠나간 다음에는 누런 모래둔과 그리고 어두운 내 마음이 남아서 몸서리쳤다. 그런 날은 항용 감기를 만나서 돌아와 앓았다.

할아버지도 언제 낳은지를 모른다는 동구 밖 그 늙은 버드나무 밑에서 나는 지금도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 돌아오지 않는 계집애, 돌아오지 않는 이야기가 돌아올 것만 같아 멍하니 기다려 본다. 그러면 어느새 어둠이 기어와서 내 뺨의 얼룩을 씻어 준다. 
 

----------------------------------------------------------------------------------- 

시인 최영미는 이 시를 읽고 나서 그간 알았던 모든 시인을 버렸다고 한다. 또 교과서에- 최영미 시대의 교과서겠지, 이 시는 요즘 교과서는 아니어도 참고서에는 나오는 듯 하다- 실린 시들과도 작별이었다고 말한다. 문학소녀 최영미의 발견이 아니었나 싶다. 

네이버 검색에서 시를 퍼나르기 위해 검색했더니 지식in 이라는 곳에서 '이 시의 구조는' '이 시의 주제는' 뭐 이런 식의 해설이 나온다. 나는 오래전에 학교를 졸업하고 이런 것들과 이별한 사람이어서 '피식' 웃고 말았다.  

시의 구조, 시의 주제, 시어의 함축된 의미 등을 아는 것은 물론 중요하다. 그 속맛을 느끼기에 그런 도구들도 필요조건이다. 

 그런데 제일 먼저는 무엇인가? 내 생각에는  '시'를 느끼는 거 아닌가 싶다. FEEL IT...? 

내가 최소한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배운 것은 절대로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국화 옆에서>를 보고 고등어 속살 같은 그 맛을 감상한 여력은 거짓말 단 한마디 안 보태고 전무했다. 물론 그건 배운다고 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때로는 시간이 그런 힘을 키워주기도 한다. 그렇다고 그 말이 어런 놈들은 시의 형식이나 상징의 의미나 알고 넘어가면 된다뜻은 아니지 않은가. 결국 내게 시가 제대로 찾아온건 시간이 많았던 대학와서다. 그냥 '시' 나 한번 읽어볼까 하고 읽던 그런 시선집 속에서 말이다. 그때 시어들은 오징어 배를 가르듯 쑤욱하고 몸 속으로 들어왔다.

 결국 이런 기회를 막는 것은 바로 시의 구조와 형식,의미,표현의 특징,상징된 것의 의미를 서너가지 옵션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말하는것 교육 때문이다. 도대체 이건 뭘 느끼게 할 틈을 주지 않는다. 완전 '싸구려 커피'다. 시험용 텍스트로 시를 만나게 되면 그런 방식 밖에 없다. 밑줄 긋고 무언가 받아 적고.  내가 보기에 교과서에 실린 역대의 명시들은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지는 호사를 누리게 되지만, 반면에 '진정성'으로서의 시의 역할을 반쯤 접게하는 메피스토펠레스의 각서와 교환된 것이다. 이 시를 다시 만나려면 아주 멀리 돌아와서야 가능하다. 마치 국화꽃 앞의 그 누이처럼. 

  

2. 

아말피의 밤노래   

           -새라 티즈데일 

별이 빛나는 하늘에게 나는 물었네/내 사랑에게 무엇을 주어야 할지 /하늘은 내게 조용히 대답했네/ 오로지 침묵으로.  

어두워지는 바다에게 나는 물었네/저 밑에 어부들이 지나가는 바다에/바다는 내게 조용히 대답했네/ 아래로부터의 침묵으로. 

오, 나는 그대에게 울음을 주고/ 아니면 그대에게 노래를 줄 수 있으련만/ 하지만 어떻게 침묵을 주리오/ 나의 전 생애가 담긴 침묵을.   

-----------------------------------------------------------------------------------

 평범한 시어.의인화된 질문. 환유적 전환. 질문-대답의 대칭구조...참 심심한 시다.

그런데 나는 왜 마지막 시어를 보고 밤 11시 잠자러 들어가는 아내를 붙잡아 새웠을까?  이거 좀 봐... 

 아.."하지만 어떻게 침묵을 주리오, 나의 전 생애가 담긴 침묵을" ....하...이걸 어떻게. 

사랑,영원,죽음,삶의 태도...서로 앞만 보고 있는 묘석들, 별빛을 바라보고 누운 이름 모를 와불,  논 바닥 한 가운데 있는 부서진 석탑, 퇴근길 산 위에 걸린 푸른 달, 며칠 전 DVD로 본 영화<오션스>에 나오는 거대한 고래. 바람이 불어오는 곳. 무지개 너머. 기러기들을 끌어당기는 자기장의 중심, 영화<해피투게더>에 양조위가 찾아가는 세상의 끝. 그리고 그 절벽. 영화<화양연화>에서 앙코르와트 탑사이로 넣어버린 양조위의 편지. (라캉의 '수신인이 없는 편지'에 대한 비유가 생각난다.) 지워져 버린 전화번호 목록, 왼쪽이 조금 무거워 보이는 식탁 다리. 꺼지는 찰나의 가로등. 그리고 그 외에 기타 등등 

나는 이 모든 걸 생각했다. 구조니 형식이니 하는 것은 단 하나도 생각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교육의 분류표에 따르면 나는 시에 대해 모르는 거다.이게 서정시인지 서사시인지, 모더니즘인지 상징주의인지... 

그렇다면 매일 좋아라하는 말로 "철학,인문학,철학,인문학..."하는데 철학적인 질문 좀 해보자.  

무엇이 시를 읽는 것인가? 무엇이 시를 아는 것인가? 내가 아는 한 어느 교사도 그걸 답해줄 수 없으며, 어느 참고서도 설명해 줄 수 없다.    

동시를 즐겨 읽고, 또 노래로 부르던 아이들이 점점 시와 멀어지게 되는 건, 1년에 단 한 권의 시집도 사보지 않게 되는 건, TV와 게임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런 교과서식 해석의 강요,해석에 대한 과도함 때문이다. 여기에 대한 내 대증요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 

 "그냥 시를 내버려 둬!" 

 (추가된 사족) 

 지금부터 한 10년전 쯤 지금 아내가 된 여자와 함께 안치환 콘서트에 갔다. 그 때 막간가수로 이지상이라는 가수가 나왔다. 만주 독립군과 관련된 내용의 노래였다. 그 노래를 딱 한번만 들었는데 아주 인상적이었다. 개인적으로는 '만주 벌판을 누비던 그 노인네'와 '이 좁은 바닥에서 헤메는 나' 사이의 심각한 격차때문이었다.  

노래 제목도 모르고, 처음 듣던 노래라 가사도 충분히 듣질 못했지만..'그 노인'과 나의 스케일 차이쯤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한다. 안도현 시인을 패러디 하자면 '노인들 함부로 대하지 말아라'라고 할만큼. 북방의 만주 벌판을 뛰던 사람과 어찌 나를 비교할 수 있을까? 나는 당시 이 처음 듣는 노래에 눈물이 핑 돌았다.

우연히 유투브에서 노래를 찾았다. 이지상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는 곡이다. 브레히트의 시 제목을 곡 제목으로 사용했다.  이건 민병일의 시에 곡을 붙인 것이다. 이건 시인데 그 이유가 사회성과 역사성을 갖고 있어서가 아니다. 이걸 목 놓아 이야기하는 건 나도 좋아하는 주제지만, 아무때나 아무 장소에서나 아무 순간에나 이걸로 결론 짓고 싶어하는 건, 아니 그리로 가고 싶어하는건 한마디로 '과함'이다.  이 시가 좋은 건, 시의 구조와 형식을 갖추고 있어서도 아니다. 아름다운 시어와 운율이 있어서도 아니다. 그런 의미로는 별로 좋은 시가 아닐 것이다. 대신 이것은 날것인 채로 그대의 가슴을 그대로 노린다. 그러므로 시가 된다. (그리고 한마디 음악적으로 덧붙이자면 "아..위대한 포크의 전통이여." )  

다시, 나도 잘모르지만, 시에 대해 질문을 하자. 무엇이 시인가? 어떻게 시를 읽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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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이 가지런히 줄 처진 종이를 주거든 

줄에 맞추지 말고 다른 방식으로 써라. 

                    -후안 라몬 히메네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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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이 비래드버리의 <화씨 451>에 첫 장에 인용된 히메네즈의 글이다.    

부랴 부랴 히메네즈를 검색....(음 ...) 

아저씨들도 없고 해서, 컴퓨터 앞에 <화씨 451>을 꺼내 놓고 이어폰으로는 한국방송의 <동창이 밝았느냐>를 듣고 있다. 

최근 거의 논문글(?)들을 읽느라 머리가 자꾸 큐브처럼 구획지는 듯 했다. 어젯밤 흥미로운 판소리 논문책 하나를 다 읽고 나서-시인 정양의 <판소리 더늠의 아름다움>,예술사회학책이다.민중 정치적이다. - 지난 여름 사 둔 브래드버리의 <화씨 451>을 출근길에 안아 왔다. 

책을 터억 하고 펼쳤는데.... 히메네즈의 문장이 눈에 화악하고 들어온다. 

줄 쳐진대로 쓰지 말라는 시인의 말. 

정치적 의미로 읽는 것도 가능하고,실존적 의미로 읽는 것도 가능하다. 또한 아방가르드적 미학의 측면에서 읽는 것도 모두 모두 자유다. 하여간 하나의 개념어는 하나의 의미만 가지지 않는다.  

언젠가 속으로 웃었던 경험..  

내가 (정치적) 자유주의를 비판한다는 것을 아는 분이었는데 내가 '자유' 를 이야기하니까... '지난번에는 자유주의를 비판하셨잖아요.' 라고 했었다.어이할꼬? ^^ 아마 나는 니체나 데리다식의 해체적 자유까지도 말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거기에 기대지 않아도 '날라리딴따라근성'으로도 이야기할 수 있었을 것이다.

더 길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구만리 장천 같은 이야기를 어찌 다 할 것이냐... 

히메네즈의 시선집이 국내 번역된게 하나 있다.  ...  

다시듣기로 듣는 라디오에서 가수 조관우의 아버지가 <수궁가>중에서 토끼 용왕 속이는 소리를 하고 있다. 판소리 다섯마당의 사설은 예술사회학적으로 보면 모두 정치,사회소설이다. 어린 시절 금성출판사 버전으로 본 전래동화,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배운 전통소설....모두 다 안다고 생각했지만... 거의 알고 있는게 별로 없었다는 것을 요즘 다시 느낀다. 멋진 소리와 함께 즐거운 재발견의 나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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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아들아 

               -최상호  


너 처음 세상 향해
눈 열려
분홍 커튼 사이로 하얀 바다 보았을 때

그때처럼 늘 뛰는 가슴 가져야 한다

까막눈보다 한 권의 책만 읽은 사람이
더 무서운 법

한 눈으로 보지 말고 두 눈 겨누어 살아야 한다

깊은 산 속 키 큰 나무 곁에
혼자 서 있어도 화안한 자작나무같이

내 아들아

그늘에서 더욱 빛나는 얼굴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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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 이 시의 출처는 시인의 <김춘수의 '꽃'을 가르치며>(시와 시학사)이다. 하지만 내가 이 시를 읽었던 것은 도종환 선생이 엮어 놓은 <부모와 자녀가 꼭 함께 읽어야 할 시>에서이다. 

도종환 시인은 부모의 마음에서 바라본 자식에 대한 이야기와 자식의 마음에서 바라본 부모에 대한 마음.그리고 두 세대가 함께 읽는 시로 이 편집본을 엮어 놓았다. 

아들의 위치에만 있다가 요 몇 년 사이에 부모와 자식 사이에 낀 존재가 되다보니 마음이 삼대를 건너 다닌다. 아이가 생기고 내가 얻은 가장 큰 변화이자 또 세계의 확장이다.
  

월요일은 둘째 재원이의 100일이어서 '100파티'를 했다. 미리 자리에 앉아서 잔뜩 기대하고 있는 예찬이에게 귓속말로 비밀을 하나 알려주었다.  "촛불은 예찬이가 끄는 거다." 라고 말이다. 금새 얼굴이 환해진다. 

가끔 예찬이가 혼자 노는 걸 보고 있으면 마음이 안쓰럽다. 엄마는 집안일 하고 있고 아빠는 둘째를 안고 다니고 있고...  

어제 밤에는 함께 자는데 예찬이가 "아빠가 안놀아 주었잖아"라고 말해서 더 짠했다. 책도 읽어주고 많이 놀아준다고 생각하지만 예찬이가 꼭 함께 놀고 싶을 때는 둘째 재원이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거기에 오늘 아침에는 예찬이에게 화를 내고 나왔다. 식사를 빨리 끝내고 아이 이닦이고 어린이집 갈 준비까지 마쳐주고 나오는게 아침에 내가 해야될 일이다. 그런데 오늘은 식사준비도 좀 늦고 어슬렁 거려서인지 좀 늦었다. 거기에다 밥 잘먹는 예찬이도 요즘 종종 식탁 앞에서 '안먹어' '그럼 내려가서 놀아' '싫어'를 반복한다. 밥을 먹으래도 싫다고 하고 먹지 말래도 싫다고 한다. 결국 오늘 내게 혼났다. 엉엉 울고 불고...  

대개는 설명하고 달래고 화해하는 수순을 밟는데...오늘은 출근시간도 가까왔고 티격거리기도 싫어서 그냥 출근해버렸다. 엘리베이터에 들어가는데 아내의 목소리가 들린다. "예찬이가 아빠한테 인사한데요".....그냥 엘리베이터 속으로 들어가면서 "됐어" 하고 나와버렸다. 

금새 미안했다.  

그래서 아이어린이집 가기 전에 전화를 한다. 아내가 핸드폰을 두고 나갔나 보다.     

아이가 '화안한 자작나무'가 되길 바라기 전에 내가 그 숲 언저리라도 좀 가있어야 될텐데..쯥  

반성으로 시작하는 하루다. 

아...도종환 시인의 저 시집은 아이 키우는 사람들이라면 뭉클해질만한 시가 많다. 아이 동화책 읽는 틈틈이 아이와 부모를 생각하며 읽어도 좋을 시선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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