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락 음악에서 조금씩 발을 뺄때 쯤 듣게 된 그룹이었다.

기존의 하드락이나 헤비메틀과는 또 다른 하드한 사운드가 스피커를 가득채웠다.특히 앨범 자켓이 충격적이었는데 '분신'...

톰 모렐로의 기타는 테크닉이란 측면에서는 물론 당대의 솔로기타리스트들과 비할 바는 아니다.우선 비교의 범주가 다르다.톰 모렐로의 긁는 기타 소리는 그들의 저항적 가사 내용과 가장 잘 어울린다.톰 모렐로는 부모들로 부터 (어머니는 검열반대모임 창시자 아버지는 게릴라였다나) 좌파적인 피를 물려받았다. 사회적 억압자와 소수인종에 대한 옹호,반제국,반자본주의가 그들의 가사 내용의 주를 이루고 있었다.90년대 이들만큼 이념과 음악의 완결성을 지닌 팀은 찾기 힘들다. 너무 아쉬운건 그들이 2년전인가 팀을 해체했다는 것이다.

톰 모렐로는 지난해 <오디오 슬레이브>라는 그룹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꽤 반응은 좋았지만 RATM을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지나치게 얌전한(?) 사운드를 들려주었다.흔히들 말하는 복고풍의 사운드로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았다는 기억이 난다. 내가 좋아하는 사운드가든의 보컬리스트 크리스 코넬이 있어서 개인적으론 맘에 들긴했다.하지만  RATM 시절이 훨 나았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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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세계3대 기타리스트 하면서 열광했던 사람들이 있다.에릭 클립튼,지미 페이지 그리고 바로 이 사람  제프벡이다.이제 다른  노인들이지만 그 카리스마와 음악에대한 열정은 젊은 누구보다 못지 않다. 제프 벡이 음악계에 이름을 올리게 된건 야드버즈의 기타리스트로 영입되면서 부터이다.원래 에릭클립튼이 있던 자리를 그의 탈퇴로 제프가 차지하게 된 것이다.

물론 야드버즈에 오래 몸담지는 않았다. 약 1년 6개월을 있었다.하지만 그의 독창적인 기타플레이는 이미 평론가들과 동료음악인들 사이에 화제가 되기 시작했다.

제프는 자신의 그룹을 만들어서 음악을 하기 시작하는데 그 때 등장하는 인물이 보컬리스트 로드 스튜어트이다.소위 제프벡 그룹의 멤버로서 두세장의 음반을 내고 그 역시 탈퇴한다.그뒤에 제프는 벡 보거트,카마인 어피스와 함께 프로젝트 그룹을 만들어 활약한다.당시로써는 슈퍼그룹의 출현이었다고 할 수 있다.제프는 그뒤 얀하머와의 협연과 재즈락 쪽으로 발길을 움직인다.재즈락에 교과서로 불리는 blow by blow나 wired음반이 그 결과물이다.

고등학교때 라디오에서 틀어주는 wired음반을 듣고 밤잠을 설쳤다.저 음반을 사야되는데.....당시는 라이선스나 백판 외엔 길이 없었다.이미 나온지 꽤 되었고 상업성도 없는 wired음반을 음반사에서 찍어낼리 만무했다.그나마 다행인건 blow음반은 라이센스가 있어서 진짜 판이 하얗게 될때까지 들었다.cause we've ended as lovers라는 명곡이 들어있는 음반이다.일렉기타로 연주된 곡중 최고의 음악 베스트 뽑으면 아마 꼭 들어갈 것 이다.

흔히들 에릭 클립튼을 기타의 신이라고 표현한다.반면 제프벡은 기타의 마법사라고 한다.신보다 마법사라 아래이다,라고 하는 것은 메타포를 직해하는 몰상식한 짓이다.제프의 기타는 오묘하다.음색 자체가 오묘하고 그의 플레잉이 오묘하다. 제프 벡은  기복이 심한 기타리스트란 평가를 듣는다.언젠가 지미 페이지가 그의 연주를 그렇게 평가했다.

 ' 같이 연주를 하다보면 어떤날은 마치 초보자처럼  허술한 사운드를 들려준다.그러다가 혼자 신경질을 내며 연습실 밖으로 나가버린다.그러다 또 어느날 보면 과연 이게 사람의 연주인가 싶을 만큼 혼을 쏙 빼놓는 마법적인 연주를 들려준다.'

언젠가 본 기사에서 그랬다.음반으로 남은 그의 연주는 당연히 후자의 것이다.

요즘 정말 쟁쟁한 기타리스트들이 많다.하지만 그 누구도 제프벡 만큼 독창적이고 멋지지 않다.가장 기타리스트 다운 기타리스트. 일반인들보다 연주가들에게 사랑받는 기타리스트. 제프 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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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 2004-06-14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타의 마법사라... 멋지네요. 개인적으론 라됴헤드의 기타리스트 죠니를 좋아합니다.
뭐랄까... 광기를 뿜어내는 듯한 소리를 들려주죠. 라이브에서 보여주는 톰요크를
압도하는 카리스마도 단연 압권. 흐느적 흐느적 콰광 콰광!!

드팀전 2004-06-15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디오 헤드는 정말 대단하죠.나름대로 일가를 이룬 그룹이라고 생각합니다.그 뒤에 나오는 그룹들이 너도 나도 라디오헤드의 '전기적으로(찌리릿) 우울한 ' 음악을 염두에 두고 노래를 만드니까요. 전 비오는 날 가끔 씩 "EXIT MUSIC"을 차 안에서 크게 듣는데....차랑 같이 어디론가 휙--- 실종되고 싶어져요.

Arch 2007-08-08 1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디오 헤드가 creep을 녹음할 때 기타 연주를 건성으로 했다고 하네요. 그게 곡분위기와 묘한 상승 작용을 해서 히트를 한거구요. 연주에 대해선 낫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수준이지만 그 속에 들어있는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드팀전님은 실종되면 안 돼요.^^*
 


파리에서 태어난 푸르니에는 처음에는 피아노를 하려 했다. 하지만 소아마비로 오른쪽 다리 전체가 부자연스럽게 되었다. 그 때문에 항상 앉아서 연주할 수 있는 첼로를 택했으나 불편한 다리로는 보통사람보다 몇 백배나 더 힘들었다. 다만 그의 성품과 악기의 성격은 잘 맞았다. 12세에 어렵게 파리 음악원에 입학한 그는 26세이던 1932년, 늦은 나이에 음악원을 수석 졸업했다. 이후 그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불구하고 국외 연주여행길에 자주 올랐다. 프랑스 정부는 그 공로로 그에게 레종도뇌르 훈장을 수여했다.

1937년, 코르토, 티보, 카잘스가 창립한 에콜 노르말 음악원에서 첼로와 실내악 교편을 잡았고, 41년에는 파리 음악원 교수가 되었다. 전쟁통임에도 그의 연주를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 그가 음악으로 전파하는 사랑을 느끼고 싶은 사람들은 너무도 많았다. 그는 교육활동을 잠시 멈추고 연주에 전념했다.

전쟁이 끝나고 슈나벨, 켐프, 박하우스, 루빈슈타인, 굴다 등과 함께 연주하며 ‘평화와 사랑’을 전파했다. 56년 제네바에 정착한 후 피아니스트인 아들 장 피에르 푸르니에의 도움으로 마스터 클래스도 열었다. 아들은 훌륭한 실내악 파트너이기도 했다. 그의 동생인 장 푸르니에도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이름을 날렸다.

푸르니에는 ‘첼로의 왕자’로 불릴 정도로 귀족적이고 우아한 연주를 들려주었다. 거기에 소탈함과 단정한 양식감, 균형감 등의 고전적 정신이 보태져 정갈한 음악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음색도 아름답고 따뜻함이 넘쳐났다. 이런 모든 바탕 위에 인간애가 더해져 격조 높은 기품이 느껴지는 음악을 만들어냈다. 그는 프랑스 근대 작품들에도 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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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 글>

아르투르 베네데티 미켈란젤리(1920∼1995)

기인적인 생활을 하다 지난 95년, 마침내 우리 곁을 떠난 또 한 사람의 괴팍한 피아니스트 미켈란젤리. 그는 20세기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피아니스트 중 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1939년 제네바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할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코르토로부터 ‘리스트의 재래’라 불릴 정도로 젊은 시절부터 테크닉과 카리스마를 자랑했던 그는 다재다능하긴 했으나 좀처럼 굽힐 줄 모르는 곧은 성격으로 좌충우돌하기 일쑤였다. 그리고 나서는 생각보다 여리고 섬세한 성격으로 결국 자신이 상처를 받는 결과를 낳았다.
마음에 드는 제자라면 돈 한 푼 안 받고 오히려 생활을 돌봐줘가며 데리고 있던 진정한 예술가적 기질의 소유자. 그도 역시 자신의 피아노를 연주에 끌고 다녔고, 별별 기행으로 가는 곳마다 화제를 뿌리고 다녔다. 그의 행적을 보면 ‘저게 과연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희한하기 그지없다. 카레이서이자, 의사이기도 했던, 마치 폭발하기 일보 직전의 시한폭탄 같았던 그다.
제2차 세계대전에 공군 조종사로 참전했다가 독일군에 생포된 그는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하기도 했다. 음악가로서는 상상하기조차 힘든 ‘경력 아닌 경력’이다. 전쟁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세계무대에서 각광받기 시작한 그는 조금만 기분이 좋지 않아도 연주회를 취소시키기 일쑤였다. 그리고 자신이 계약했던 음반사의 파산으로 경제적 책임을 지게 되자 조국 이탈리아를 가차없이 떠났고, 이후 이탈리아 사람들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제대로 된 소리를 재생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레코딩은 극도로 기피했던 그에게 내릴 수 있는 판결은 ‘완벽주의자이자 천재’밖에는 없을 것이다. 미켈란젤리는 가정용도 아닌 콘서트용 피아노를 분해했다가 다시 조립할 정도로 피아노의 물리적인 특성을 속속들이 잘알고 있었다. 또 피아노를 자신의 몸처럼 다루며 연주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믿기지 않는 제어능력으로 초절적인 기교를 자아냈고, 페달링에도 통달해 있어 자신이 원하는 음향을 마음대로 빚어냈던 마술사이기도 했다. 역시 그런 특성에 딱 들어맞는 레퍼토리가 그가 남긴 가장 훌륭한 음반이다. 도이치 그라모폰 레이블로 발매된 드뷔시의 전주곡 1집과 2집, 영상 1, 2집과 ‘어린이 차지’가 그것. 이 음반을 들으면 드뷔시를 한 번도 듣지 못했던 사람도 드뷔시가 미켈란젤리의 몸을 빌려 그리는 ‘인상주의적인 음화(音畵)’의 마력에 빨려들고 만다. TV 방송용으로 녹음된 줄리니 지휘의 빈 심포니와의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음반(DG) 중에 3번과, 5번 등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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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호로비츠(1904∼1989)

<퍼온 글....>

20세기의 대지휘자들은 ‘카리스마’라는 단어로 특징지어질 수 있었다. 20세기의 위대한 피아니스트들은 어떨까. 섬세, 예민, 선병질적, 신경질적, 신경과민, 까다로움, 변덕, 자존심, 만, 고집불통 등의 단어들이 유난히 쉽게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이는 19세기 낭만주의 예술가들이 보여준 특성들과 거의 고스란히 일치한다. 쇼팽과 리스트를 떠올리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호로비츠를 보라! 마치 느긋하고 따뜻한 성품의 소유자인 듯 보이는 말년의 사진에 익숙해진 이들에게는 이런 말들이 이해되기 힘들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분명히 까다로웠다!
호로비츠는 ‘피아니스트는 자신의 악기를 가지고 다니지 않는 유일한 연주가’라는 명제를 뒤집었다. ‘지휘자들마저 자신의 악기인 오케스트라를 대동하고 다니는데, 피아니스트는 왜 안되지?’라는 그의 순간적인 의문은 ‘점보 747을 타고 하늘을 나는 피아노’를 만들어냈다. 전속 요리사와 정수기도 연주회에 꼭 따라다녔다.
그렇지만 그의 연주를 듣는 사람들은 그 ‘까다로움’에 항상 감사해야 했다. 완벽한 테크닉과 무궁무진한 표현력을 바탕으로 철저히 주관에 입각해 빚어낸 호로비츠의 개성적인 피아니즘 역시 보통의 예민함과 보통의 감수성으로는 빚어지지 않는 위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공화국의 수도 키에프에서 탄생할 당시 그의 이름은 블라디미르 고로비츠였다.
아버지는 기술자였고, 어머니와 누이는 피아니스트였으며 동생은 바이올린을 했다. 피아노도 처음에는 어머니에게서 배우기 시작했다. 안톤 루빈슈타인의 제자였던 또 하나의 위대한 피아니스트인 펠릭스 블루멘펠트에게서 배운 것이야말로 호로비츠를 러시아 피아니즘 전통의 적자이자 20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만든 시작이었다.
18세의 나이에 가진 데뷔 연주회의 성공으로 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했고, 1925년, 21세의 나이에 서유럽으로 건너가, 이듬해 함부르크에서 가진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의 대성공으로 명성을 확고히 했다. 28년, 뉴욕 필과 역시 차이코프스키 1번을 협연하며 이루어낸 카네기홀 데뷔 또한 그에게 성공을 안겼다.
이렇게 가는 곳마다 성공만 한 피아니스트가 또 있을까. 33년, 토스카니니의 뉴욕 필과의 베토벤 시리즈는 성공과 함께 토스카니니의 딸 완다를 그의 품에 안겼다. ‘토스카니니의 사위’는 또 하나의 막강한 권력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36년, 불과 32세의 나이로 그는 은퇴를 선언했다. 1939년 무대에 복귀한 그는 20년이 채 흐르기 전인 53년, 다시 은퇴한다. 왜 이렇게 자주 은퇴와 복귀를 거듭한 것일까. 역시 그의 까다로운 성품 탓으로 돌릴 수밖에 없다.
1965년, 지금은 ‘역사적 귀환’이라 기억되는 연주회를 카네기 홀에서 열었다. 이후 그가 남긴 역사적 연주회는 78년 백악관에서의 ‘미국 데뷔 50주년’ 연주회, 86년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61년 만의 귀향 연주회’ 87년 베를린에서의 ‘최후의 연주회’ 등이다. 89년 심장발작으로 사망, 밀라노에 있는 토스카니니의 무덤 옆에 묻혔다.
150여 장에 이르는 방대한 음반을 남긴 호로비츠. 그중에서 ‘이것이 그의 명반이다’라고 꼬집어 내기 무척 힘들다. RCA 레이블의 호로비츠 전집은 그의 예술혼을 엿보는 데 가장 큰 도움을 주는 것이다. 이밖에도 ‘역사적 귀환’ 실황녹음(소니), 최만년의 도이치 그라모폰의 소품 위주의 녹음 등도 새겨들을 만한 음반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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