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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올 그날의 이야기 ㅣ 영국인이 사랑한 단편선 1
허버트 조지 웰즈 지음, 최윤영 옮김 / 초록달(오브) / 2014년 9월
평점 :
절판
허버트 조지 웰스의 중단편 모음집이다. 3편의 단편 <기적을 일으켰던 한사람>, <마술 가게>, <별>과 1편의 중편 <다가올 그날의 이야기>를 수록하고 있다. 특히 후자는 국내 유일한 번역본이다.
<별>
우주 현상을 다룬 작품이다. 난데없이 미지의 별이 태양계에 난입하여 해왕성과 합체하고 태양을 향해 맹렬하게 질주하면서 지구를 스쳐 지나간다. 그동안 온 지구는 일대 자연 재앙에 휩싸이고 인류는 멸망의 시나리오를 검토하는 형국이다. 별이 지구에 근접함에 따라 전세계에서 발발하는 온갖 기상이변의 기술은 짤막하지만 매우 설득력이 있어 긴장감을 배가시킨다. 영화 <문폴>의 장면이 연상된다.
아이러니함은 마지막 단락에 비로소 등장한다. 화성인은 이 현상을 관찰하면서 지구에 약간의 피해가 발생했을 뿐 별다른 특이사항은 없다고 기록한다. 이 대목에서 제아무리 난리법석일지라도 거시적 시각에서 봤을 때 별로 인한 인류의 재앙은 사소할 뿐이라고 판단하는 그네들과 지구인의 상반되는 인식이 절묘한 대비를 이룬다.
<마술 가게>
현실에 있을법하지 않은 마술 가게를 체험하는 부자의 이야기다. 여기서 마술은 정확히 하자면 마법이다. 가게주인도 자신의 가게가 진짜로 강변하지 않던가. 여기서 아들과 아버지의 마술을 받아들이는 인식의 차이가 발생한다. 아들은 마술을 자체로 인정하고 허용하는 반면, 아버지는 기이하며 생소함에 당황하면서도 이건 분명 속임수일 거라고 잔뜩 의심의 눈초리로 가게주인을 대한다.
꿈에서 깨어난 듯 그들은 가게 밖 거리로 나왔지만 이후 가게 입구는 흔적도 없이 찾을 길 없고 아들은 가게주인이 준 장난감 병정에 기뻐한다. 이렇게 일단락된 듯싶지만, 장난감 병정이 살아 움직인다는 아들의 말은 여전히 마술이 끝나지 않았고 마술 세계와 현실 세계가 범접할 수 없이 명확히 구별된 것이 아님을 독자에게 재인식시킨다.
<기적을 일으켰던 한사람>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속담처럼, 누군가가 정말로 절실하게 무언가를 갈구하면 기적 같은 현실로 이루어지는 일이 있을까? 혹시라도 그런 일이 내게 생긴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많은 사람이 꿈속에서 갈구하는 바람이다.
주인공 포더링게이는 선술집에서 논쟁을 벌이던 중 자신에게 그런 능력이 생겼음을 깨달았다. 즉 자연의 섭리를 역행하는 기적을 불러일으키는 능력 말이다. 등불을 뒤집어 거꾸로 타게 한다든지, 귀찮게 하는 순경을 지옥으로 보내버리든가 등 일련의 기적을 행하는데 사소한 것에서 규모가 큰 것에 이르기까지 개인적인 것에서 공익적인 것까지 여러 가지다.
문득 시간을 멈추기 위해 지구의 회전을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순간, 지구는 정지하였지만 지구상의 모든 생물과 무생물은 파국을 맞이하였다. 그것들은 관성의 법칙에 따라 우주공간으로 날아가거나 다른 사물과 부딪쳐 산산조각이 났던 것이다.
포더링게이의 마지막 주문은 세 가지 소원 이야기를 떠올린다. 세 가지 만능 소원권을 얻었지만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제자리로 돌아왔다는. 포더링게이 역시 기적을 불러일으키는 능력을 포기하고 만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돌아온 선술집에서 그는 똑같은 논쟁을 이어나간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작가의 블랙 코미디를 찾을 수 있다.
<다가올 그날의 이야기>
미래사회를 디스토피아로 다룬 공상과학 영화, 예컨대 <토털 리콜>, <매트릭스>, <레디 플레이어 원> 등을 보면 세계는 상류층과 하류층으로 이원화되어 있다. 그들은 사는 곳도 서로 다르다. 도시 저 위 높은 곳에서 쾌적하고 안락하게 세계를 지배하는 부르주아와, 도시 밑바닥에서 열악한 환경에서 힘겨운 육체노동에 종사하며 암울한 나날을 마지못해 보내는 프롤레타리아로. 웰스의 제법 긴 중편 소설도 디스토피아를 다룬다. 거대 기업이 지배하는 주류가 지배하는 도시.
여기서 계급을 초월한 남녀의 만남과 사랑이 생겨난다. 그들의 콩깍지 덮인 눈에 세상은 부조리하다. 부모의 억압을 벗어난 엘리자베스는 노동자 덴톤과 시골로 희망의 탈주를 감행한다. 사랑만 있으면 만사를 헤쳐나갈 수 있다는 신념으로. 하지만 당대 사람들에게 세상은 오직 도시만 존재하며, 시골은 인간이 살 만한 공간 개념이 더는 아니다. 문명 이전의 야만과 악령과 괴수가 지배하는 자연 인식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두 사람은 견디지 못하고 황급히 시골을 탈출하여 도시로 복귀한다. 매우 아이러니하면서 희극적인 장면이다.
“잠깐은 행복했어... 그런데 우리가 생각보다 문명화된 세상에서 살았었나봐. 우리는 그런 도시에서 살던 사람들이니까. 여기 더 있다가는 우리가 죽겠어.” (P.74)
이제 노동자로의 삶을 시작한 그들, 엘리자베스는 여유롭고 풍족한 생활만 해왔기에 근검과 절약의 개념을 알지 못하고 생활은 점점 곤경에 처하면서 그들은 서서히 가난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한다. 사랑과 결혼은 항상 되풀이되듯이 이상과 현실의 격차를 무시할 수 없는 법. 여기서 작가는 미래의 런던 사회의 실체와 현상을 비로소 독자에게 드러낸다.
파란 작업복을 입은 사람들과 상위계층 사람들 간에 깊은 골을 만들어 갔다. 두 계층 간에 벌어진 차이는 단순히 사는 환경이나 생활 방식의 차이가 아니었다. 생각하는 방식의 차이였고, 심지어 쓰는 언어의 차이였다. (P.117)
지하 세계에선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법이 없었다. 법과 국가라는 거대한 체계는 노동자들을 억압하는 틀에 지나지 않았고, 노동자들이 재산을 모으고 쾌락을 취하지 못하도록 막는 역할을 할 뿐이었다. 그뿐이었다. (P.127)
부부가 하나하나 발견하는 사회의 모순은 작가가 약간의 상상을 첨가하였을 뿐 결국 작가가 목격한 당대 런던의 사회를 묘사한 것임에 불과하다. 20세기 전후로 제국주의와 자본주의가 브레이크 없이 혹심한 종착을 향해 질주하던 결과를 우리는 역사를 통해 익히 알고 있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은 것처럼 대도시 런던의 계급 간 빈부격차는 이렇든 어마어마하였다.
이 소설의 결말은 기묘하다. 헤어나올 길 없는 수렁에서 그들을 건져낸 인물은 빈돈이다. 엘리자베스의 아버지가 딸과 결혼시키려고 했던 중년의 실력자는 문득 후반부에서 독자적 존재감을 뿜어낸다. 체제에 순응하고 이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지위와 부, 권력을 확고히 하였건만 난잡한 사생활로 불치병에 걸린 그에게 남은 것은 고독과 공허일 뿐.
빈돈이 만난 젊은 의사의 발언에서 독자는 비로소 작품 표제를 추론할 수 있다. 죽음을 앞둔 빈돈의 고독과 관대함이 결합한 덕분에 사회 밑바닥에서 겨우 올라올 수 있었던 덴톤 부부의 대화도 마찬가지다. 비록 현실은 더할 수 없이 암울하더라도 미래는 끝내 나아질 것이라는 놓칠 수 없는 희망.
“지식은 점점 쌓여 가니까, 과학은 계속 발전하겠죠. 그러니 서두를 필요가 조금도 없습니다. 언젠가, 언젠가는 인간이 다르게 살 수 있는 날이 올 겁니다.” (P.171)
“우리는 세대의 일부분이야. 그 흐름 속에서 살고 있다고. 온 힘과 의지를 다해서 살고 있어. 죽는 것도 그 일부분이야. 우리가 죽든 살든, 그 조차도 세대가 만들어지는 과정인 거지... 세대가 거듭될수록 인간은 더 현명해질 거야... 더 현명하게... 저들은 이해라도 할까?” (P.1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