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리새우 : 비밀글입니다 - 제9회 문학동네청소년문학상 대상 수상작 문학동네 청소년 42
황영미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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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다 왕따 되면 어쩌려고?”

왕따? 왕따 되면 되는 거지. 난 왕따는 겁 안 나.” (P.114)

 

은따든 왕따든, 따를 겁내지 않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대개는 다수에서 따돌림당할까 소외당할까 두려워 어떻게든 발버둥 치며 무리에 끼려고 애쓴다. 내키지 않아도 웃고 떠들고 하고 싶지 않은 행동도 함께하면서 말이다. 하물며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 시절에는 어떻겠는가. 그런 면에서 은유는 성숙하고 대범하다. 아니 체념과 달관의 경지인가.

 

표제만 보고서는 왕따를 제재로 삼는 작품인 줄 짐작 못 했다. 다현의 생각과 행동은 친구들과 잘 지내기 위한 양보와 배려로 해석하였다. 다른 애들보다는 좀 정도가 더하지만. 친구들이 싫어할까 봐 특별한 감정이 없는 노은유와 말을 섞거나 어울리지 않으려고 무지 노력하는 다현. 친구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심부름도, 선물 공세도 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주변을 뱅뱅 돌며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그러면서도 스스로를 다독이며 위안하는 다현을 보면서 점점 이상하게 여기게 되었다.

 

온갖 이모티콘과 함께 문자를 보냈다. 답문은 없었다. 당연한 일인데 조금 서운했다. , 괜찮다. 어차피 마지막 문자는 늘 내 몫이니까. (P.19)

 

내가 하는 말은 아람이한테 잘 스며들지 않는다. 내 말은 탁구공처럼 튕겨져 나오고, 공중에서 부서진다. 그게 내 탓인지 아람이 탓인지 잘 모르겠다. (P.104)

 

일찍이 왕따를 겪은 다현으로서는 어떻게 어울리게 된 이 무리, 다섯 손가락을 결코 떠나고 싶지 않다. 그에게 소중한 친구들과 함께 있기 위해 영혼을 집에 두고 올 정도로 최선을 다하는, 때로는 비굴할 정도로 다현의 안간힘에 안쓰럽고 딱한 마음이다. 오죽했으면 그렇게 했을까.

 

한편 다현을 대하는 아람을 포함한 나머지 네 명에 대해서는 반감이 일어난다. 그들의 눈에 다현이는 어떤 존재로 비칠까. 어리숙하게 부려 먹고 심부름시키기 좋은 멤버. 필요할 땐 함께 하다가 결정적 순간에는 은근슬쩍 떼어놓아도 부담 없는 멤버. 우리는 다현에 대한 그들의 태도를 결정적으로 설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은유와 모둠이 되어 어쩔 수 없이 어울리게 된 것에 불만스러운 친구들은 다현을 은따시키고, 유독 다현에게 살가웠던 설아의 속내. 은따로 빌빌거리던 다현을 구제했다는 발언. 그런 다현이 자신들의 요구, 차라리 명령을 따르지 않은 괘씸함.

 

다현은 다섯 손가락으로 있을 때 갖지 못했던 마음의 평화와 자유로움을 동네신문 모둠 애들을 통해 느낀다. 은유, 시후, 해강. 그들은 상대에게 가식 없이 솔직하였고 이기적으로 계산하지 않는 순수함을 여전히 갖고 있다. 자신의 처지와 향후 진로에 대한 불안을 품으면서도.

 

세상을 향한 다현의 태도는 블로그를 통해 드러난다. 왕따가 되어 주변과 단절된 그가 유일하게 세상과 소통하는 공간, 체리새우. 그 속에서 다현은 이해타산적 태도를 버리고 온전히 자신에게 솔직하다. 다시금 다섯 손가락에서 따가 된 다현은 재차 블로그를 다잡는데, 과거와 다른 점은 한 뼘만큼 자란 마음의 키뿐만 아니라 그가 완전한 혼자가 아니라는 것. 그것이 체리새우 블로그를 비공개에서 공개로 전환한 용기를 주었으니, 구멍에 움츠려 숨지 않고 세상에 당당하게 고개를 들겠다는 전환이다.

 

친구는 동등한 관계여야 한다. 그런데 나는 자주 무시당했다. 지금 생각하니 내가 자초한 듯. 나는 친구를 잃을까 봐 늘 전전긍긍이었다. 선물 주는 버릇, 눈치 보기, 거절 못 하는 것. 스스로를 업신여기면 다른 사람들이 나를 존중하기 어렸다. 당당해지자! (P.170)

 

은유와 다현 엄마의 말처럼 사는 게 바람직하지만 현실은 쉽지 않다. 남들의 시선과 편견에 휘둘리지 않기, 이렇게 되려면 내 속이 꽉 차 있고 꼿꼿하게 서 있을 수 있어야 한다. 대다수는 그렇지 못하기에 쭈뼛거리면 사방을 둘러보고 무리가 있는 쪽으로 뛰어가 안도의 숨을 돌리는 게 아니겠는가. 비로소 외톨이를 모면했으며, 무리에 어울리게 되었다면서 말이다.

 

다현의 새로운 날이 뜻깊게 시작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모두가 똑같겠지만, 나아간다면 은유에게 더욱 관심을 보일 수 있으면 좋겠다. 제 나이에 비해서 너무 커버린 그가 다현이와 상생의 관계를 통해 다시 되돌릴 길 없는 학창 시절을 보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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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열린책들 세계문학 46
존 르 카레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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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소설의 고전에 해당한다.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01>에 소개된 내용을 보고 비로소 작가와 작품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 스파이하면, 우리는 대체로 007 영화 시리즈를 통해 접하게 된 제임스 본드의 이미지를 통해 반사적으로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쉽다. 르카레는 스파이의 실체, 냉전 시대 양 진영 간의 첩보전이 전개되는 적나라한 비열함 등을 보여주면서 현실 속 스파이가 어떠한 모습인지를 독자에게 폭로한다.

 

스파이는 허영심 많은 바보들의 한심한 행렬이야. 물론 반역자들이기도 하지. 동성애자, 사디스트, 술고래, 타락한 생활에 활기를 주려고 카우보이와 인디언 놀이를 하는 자들이야.” (P.246)

 

한때 영국의 베를린 방첩 조직을 지휘하던 주인공 리머스는 동독 첩보대의 대장인 문트에 의해 조직이 와해되고 영국으로 소환당한다. 소설의 첫 장면에서 핵심 정보원이었던 거물 카를의 죽음은 결정적 계기가 된다. 이제 첩보원으로서 그는 이빨 뽑힌 퇴물 취급을 받는다.

 

그의 마음속에 문트에 대한 분노심이 어떠하였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첩보 당국은 그에게 마지막 기회를 준다. 문트를 제거하기 위한 반간계(反間計)를 시도하는 중요한 역할을 그는 기꺼이 수락한다. 문트를 제거하려는 피들러에게 매수된 척 문트에게 불리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책임자와 사전에 논의했던 그대로 일은 흘러가고 거의 성공을 목전에 두게 된다. 이때 리머스의 심정을 작품에서는 이렇게 기술한다.

 

리머스는 피들러가 자기편이고 이제 곧 문트를 사형대로 보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깊은 만족감을 느끼며 잠이 들었다. 오랫동안 손꼽아 기다리던 것이 눈앞에 다가온 것이다. (P.185)

 

주인공 리머스는 스파이로서 신분과 역할에 자존감을 지닌 인물이다.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이 계책을 실행하는 까닭은 단순한 복수심 외에 충성심과 아울러 진부하지만 투철한 직업의식이다. 그는 진짜 스파이다. 자신의 정보와 진술을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혹시 자신이 속임수를 쓰고 있지 않나 의구심을 갖는 사람들에게 그는 한 치의 거짓 없이 정당하게 자기 발언의 진실성을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는 그렇게 자신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전반부와 후반부가 이렇게 극적으로 반전되는 소설도 찾아보기 어렵다. 문트를 타도하려던 피들러는 오히려 문트에게 제거되고, 리머스는 문트에 의해 풀려난다. 리머스는 비로소 깨닫는다. 이 모든 게 영국 첩보당국과 문트가 기획한 시나리오대로 흘러갔고, 자신은 피들러를 제거하기 위한 장기판의 말 역할에 불과하였음을. 문트 제거를 꿈꿨던 리머스의 심정은 어떠하였을까? 문트 제거가 실패한 개인적 실망이 더 컸을지, 조직이 설계했던 대단한 작전에 꼭두각시 노릇을 하였더라도 어쨌든 기여하고 성공한 데 대한 기쁨이 더 컸을지를.

 

지금 우리는 문트를 구하기 위한 더럽고 비열한 공작이 비열하게 끝나는 것을 목격하고 있어. [......] 런던은 우리를 이용해서 그 유대인을 죽이게 한 거야. 이젠 알겠지? 우리는 둘 다 가엾은 존재야.” (P.241)

 

결과가 모든 것을 정당화한다는 스파이 활동의 도덕률에 따르면 리머스는 실망해서는 안 된다. 리머스에게 세부 계획을 알려주었다면 그가 무심코 노출시켰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므로. 그래서 리머스는 기분이 더럽지만 묵인하려고 한다. 그가 견딜 수 없었던 건 리즈가 자신의 일에 휘말려 들었고 고초를 겪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문트는 자신을 바보요, 리즈를 쓰레기라고 불렀다. 리즈를 쓰레기로 볼 독자는 아무도 없다. 그녀는 평범한 소시민이고, 단지 리머스를 사랑한 잘못 밖에 없다. 그녀가 스파이들의 종횡무진한 기만과 음모를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베를린 장벽을 넘어 자유의 땅으로 돌아오려는 찰나, 리머스는 발길을 되돌린다. 리즈의 죽음은 그를 지탱하던 마지막 줄기를 끊어버렸다. “보통 사람들이 밤에 침대에서 안전하게 잘 수 있도록”(P.23) 때로는 불쾌하고 못된 짓도 서슴지 않았던 자신과 리즈가 일개 소모품처럼 취급되어 제거될 수 있다면, 스파이 활동의 정당성은 어디서 구할 수 있을 것인가?

 

악에 대항하고 제거하기 위해서 더 큰 악을 행한다면, 그 행위를 용납하고 인정하는 게 마땅한 일인가? 여기에 이 작품을 포함한 스파이 활동의 근원적 질문이 자리한다. 필요악이라는 간단한 단어로 모든 걸 해명하는 게 가능한가. 필요악에 의해 무고하게 희생당하는 보통 사람이 입은 피해는 무엇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지를.

 

리머스가 체제와 이념이라는 대형 트럭 사이에 짓눌린 작은 자동차 환영을 최후의 순간에 떠올린 건 자신과 리즈가 바로 그에 해당함을 깨달음과 동시에 작가가 독자에게 보여주고자 함이다. 이 작품을 읽는 당신들도 까딱하면 리머스와 똑같이 처지에 놓일 수 있음을 말이다. 결국 리머스는 추운 바깥에서 실내로 들어오게”(P.61) 되는 데 실패하였다.

 

이런 장르의 작품을 처음 읽어서인지 초반에는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다. 게다가 조판이 빽빽하여 다른 출판사의 책이라면 거의 1.5배는 분량이 더 늘어났을 정도다. 중반부터 이어지는 첩보 조직 간 팽팽한 두뇌 싸움과, 약점과 허위를 찾기 위한 치밀한 논리와 장치 설계는 어지러울 정도다. 급작스러운 대단원과 어이없는 결말은 한껏 당긴 고무줄을 일순간 탁 놓듯이 독자에게 씁쓸함과 허무함을 동시에 안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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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구.계몽편
전통문화연구회 편집부 지음 / 전통문화연구회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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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소학> 이후 꺼내든 책이 <추구·계몽편>이다. 이 역시 옛적부터 한자 초심자들을 위한 학습 입문서에 해당한다.

 

<추구(推句)>는 오언으로 된 좋은 대구를 시에서 뽑아 수록한 것이다. 시의 문장 형식에 친숙하게 하고자 하는 목적과, 아름다운 시구를 익히도록 함으로써 정서교육도 함께 하려는 의도를 지녔다고 하겠다. 본문 분량은 길지 않다. 이 책에서는 15면에 걸쳐 담고 있는데, 본문 위에 음과 훈을 달고, 아래에 뜻풀이를 하였다. 이런 방식으로 쭉 기계적으로 시구를 나열하고 있다.

 

솔직히 아주 어려운 한자도 별로 없고 문장 구조도 비교적 쉬운 편이기에 읽고 해석하는데 무난하다. 물론 이 대구를 줄줄 외워야 한다면 완전히 다른 차원의 얘기지만. 아쉬운 점은 분명 어떤 시에 발췌했을 텐데, 원전이 어느 것이며 이 시구를 원전에서 어디 부분에 해당하여 전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좀 더 상세한 해설이 있었다면 단순한 한자 학습서의 한계를 넘어서 본격 한문 고전 입문서의 역할도 겸했을 텐데 하는 점이다.

 

추구독본이라고 해서 책 맨 뒤편부터 거꾸로 해서 추구 원문에 토를 달아놓은 걸 부록으로 싣고 있는데, 솔직히 실용성은 약하다.

 

<계몽편(啓蒙篇)> 역시 한자 학습서이지만, 한자와 함께 문장, 특히 산문 문장의 구조와 해석을 학습시키기에 유용한 책이다. 구성은 서문 격의 수편(首篇)에 이어 하늘, , 사물, 사람에 대한 편을 나누어 기술한다.

 

천편(天篇)에서는 천문과 시간, 간지, 열두 달과, 계절 및 기후를 소개하며, 지편(地篇)은 산과 강, 바다, 기상현상, 오행의 이치를 안내한다. 이를 통해 선인들이 우주관과 세계관, 자연관을 이해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상식이거나 불합리한 개념조차 그들은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필사적인 열쇠에 해당하였다. 물편(物篇)은 동물과 식물을 하나하나 일러주는데, 신령한 동물, 곡식과 과일의 분별, 고인들이 사랑하였던 꽃의 종류, 장단과 경중을 재는 척도, 구구단 등의 개념을 알려주고 있어 당시에 한자와 함께 세상사의 기본 상식을 깨우치는 성과도 기대하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 인편(人篇)은 이른바 오륜의 개념과 타당한 이치의 상세 설명에 이어 수신과 자기계발을 위한 당부로 끝맺고 있다.

 

이처럼 <계몽편>의 내용은 대단히 실용적이다. 문장도 쉽고 한자도 평이하여 문장의 뜻을 헤아리는데 전혀 어렵다고 할 수 없다. 여러 경전에서 발췌하였음을 대강 유추할 수 있고 문장해석은 원문 아래에, 한자 풀이는 주석으로 처리하고 있어 자체만으로도 충분하다.

 

한자 급수시험을 위한 단순 한자 학습서만 범람하는 시국에, 그나마 체계적인 한자, 한문 수업을 위한 교재라는 점에서 아쉬운 점은 있지만 이 책의 의의를 낮출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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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올 그날의 이야기 영국인이 사랑한 단편선 1
허버트 조지 웰즈 지음, 최윤영 옮김 / 초록달(오브)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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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허버트 조지 웰스의 중단편 모음집이다. 3편의 단편 <기적을 일으켰던 한사람>, <마술 가게>, <>1편의 중편 <다가올 그날의 이야기>를 수록하고 있다. 특히 후자는 국내 유일한 번역본이다.

 

<>

 

우주 현상을 다룬 작품이다. 난데없이 미지의 별이 태양계에 난입하여 해왕성과 합체하고 태양을 향해 맹렬하게 질주하면서 지구를 스쳐 지나간다. 그동안 온 지구는 일대 자연 재앙에 휩싸이고 인류는 멸망의 시나리오를 검토하는 형국이다. 별이 지구에 근접함에 따라 전세계에서 발발하는 온갖 기상이변의 기술은 짤막하지만 매우 설득력이 있어 긴장감을 배가시킨다. 영화 <문폴>의 장면이 연상된다.

 

아이러니함은 마지막 단락에 비로소 등장한다. 화성인은 이 현상을 관찰하면서 지구에 약간의 피해가 발생했을 뿐 별다른 특이사항은 없다고 기록한다. 이 대목에서 제아무리 난리법석일지라도 거시적 시각에서 봤을 때 별로 인한 인류의 재앙은 사소할 뿐이라고 판단하는 그네들과 지구인의 상반되는 인식이 절묘한 대비를 이룬다.

 

<마술 가게>

 

현실에 있을법하지 않은 마술 가게를 체험하는 부자의 이야기다. 여기서 마술은 정확히 하자면 마법이다. 가게주인도 자신의 가게가 진짜로 강변하지 않던가. 여기서 아들과 아버지의 마술을 받아들이는 인식의 차이가 발생한다. 아들은 마술을 자체로 인정하고 허용하는 반면, 아버지는 기이하며 생소함에 당황하면서도 이건 분명 속임수일 거라고 잔뜩 의심의 눈초리로 가게주인을 대한다.

 

꿈에서 깨어난 듯 그들은 가게 밖 거리로 나왔지만 이후 가게 입구는 흔적도 없이 찾을 길 없고 아들은 가게주인이 준 장난감 병정에 기뻐한다. 이렇게 일단락된 듯싶지만, 장난감 병정이 살아 움직인다는 아들의 말은 여전히 마술이 끝나지 않았고 마술 세계와 현실 세계가 범접할 수 없이 명확히 구별된 것이 아님을 독자에게 재인식시킨다.

 

<기적을 일으켰던 한사람>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속담처럼, 누군가가 정말로 절실하게 무언가를 갈구하면 기적 같은 현실로 이루어지는 일이 있을까? 혹시라도 그런 일이 내게 생긴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많은 사람이 꿈속에서 갈구하는 바람이다.

 

주인공 포더링게이는 선술집에서 논쟁을 벌이던 중 자신에게 그런 능력이 생겼음을 깨달았다. 즉 자연의 섭리를 역행하는 기적을 불러일으키는 능력 말이다. 등불을 뒤집어 거꾸로 타게 한다든지, 귀찮게 하는 순경을 지옥으로 보내버리든가 등 일련의 기적을 행하는데 사소한 것에서 규모가 큰 것에 이르기까지 개인적인 것에서 공익적인 것까지 여러 가지다.

 

문득 시간을 멈추기 위해 지구의 회전을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순간, 지구는 정지하였지만 지구상의 모든 생물과 무생물은 파국을 맞이하였다. 그것들은 관성의 법칙에 따라 우주공간으로 날아가거나 다른 사물과 부딪쳐 산산조각이 났던 것이다.

 

포더링게이의 마지막 주문은 세 가지 소원 이야기를 떠올린다. 세 가지 만능 소원권을 얻었지만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제자리로 돌아왔다는. 포더링게이 역시 기적을 불러일으키는 능력을 포기하고 만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돌아온 선술집에서 그는 똑같은 논쟁을 이어나간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작가의 블랙 코미디를 찾을 수 있다.

 

<다가올 그날의 이야기>

 

미래사회를 디스토피아로 다룬 공상과학 영화, 예컨대 <토털 리콜>, <매트릭스>, <레디 플레이어 원> 등을 보면 세계는 상류층과 하류층으로 이원화되어 있다. 그들은 사는 곳도 서로 다르다. 도시 저 위 높은 곳에서 쾌적하고 안락하게 세계를 지배하는 부르주아와, 도시 밑바닥에서 열악한 환경에서 힘겨운 육체노동에 종사하며 암울한 나날을 마지못해 보내는 프롤레타리아로. 웰스의 제법 긴 중편 소설도 디스토피아를 다룬다. 거대 기업이 지배하는 주류가 지배하는 도시.

 

여기서 계급을 초월한 남녀의 만남과 사랑이 생겨난다. 그들의 콩깍지 덮인 눈에 세상은 부조리하다. 부모의 억압을 벗어난 엘리자베스는 노동자 덴톤과 시골로 희망의 탈주를 감행한다. 사랑만 있으면 만사를 헤쳐나갈 수 있다는 신념으로. 하지만 당대 사람들에게 세상은 오직 도시만 존재하며, 시골은 인간이 살 만한 공간 개념이 더는 아니다. 문명 이전의 야만과 악령과 괴수가 지배하는 자연 인식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두 사람은 견디지 못하고 황급히 시골을 탈출하여 도시로 복귀한다. 매우 아이러니하면서 희극적인 장면이다.

 

잠깐은 행복했어... 그런데 우리가 생각보다 문명화된 세상에서 살았었나봐. 우리는 그런 도시에서 살던 사람들이니까. 여기 더 있다가는 우리가 죽겠어.” (P.74)

 

이제 노동자로의 삶을 시작한 그들, 엘리자베스는 여유롭고 풍족한 생활만 해왔기에 근검과 절약의 개념을 알지 못하고 생활은 점점 곤경에 처하면서 그들은 서서히 가난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한다. 사랑과 결혼은 항상 되풀이되듯이 이상과 현실의 격차를 무시할 수 없는 법. 여기서 작가는 미래의 런던 사회의 실체와 현상을 비로소 독자에게 드러낸다.

 

파란 작업복을 입은 사람들과 상위계층 사람들 간에 깊은 골을 만들어 갔다. 두 계층 간에 벌어진 차이는 단순히 사는 환경이나 생활 방식의 차이가 아니었다. 생각하는 방식의 차이였고, 심지어 쓰는 언어의 차이였다. (P.117)

 

지하 세계에선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법이 없었다. 법과 국가라는 거대한 체계는 노동자들을 억압하는 틀에 지나지 않았고, 노동자들이 재산을 모으고 쾌락을 취하지 못하도록 막는 역할을 할 뿐이었다. 그뿐이었다. (P.127)

 

부부가 하나하나 발견하는 사회의 모순은 작가가 약간의 상상을 첨가하였을 뿐 결국 작가가 목격한 당대 런던의 사회를 묘사한 것임에 불과하다. 20세기 전후로 제국주의와 자본주의가 브레이크 없이 혹심한 종착을 향해 질주하던 결과를 우리는 역사를 통해 익히 알고 있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은 것처럼 대도시 런던의 계급 간 빈부격차는 이렇든 어마어마하였다.

 

이 소설의 결말은 기묘하다. 헤어나올 길 없는 수렁에서 그들을 건져낸 인물은 빈돈이다. 엘리자베스의 아버지가 딸과 결혼시키려고 했던 중년의 실력자는 문득 후반부에서 독자적 존재감을 뿜어낸다. 체제에 순응하고 이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지위와 부, 권력을 확고히 하였건만 난잡한 사생활로 불치병에 걸린 그에게 남은 것은 고독과 공허일 뿐.

 

빈돈이 만난 젊은 의사의 발언에서 독자는 비로소 작품 표제를 추론할 수 있다. 죽음을 앞둔 빈돈의 고독과 관대함이 결합한 덕분에 사회 밑바닥에서 겨우 올라올 수 있었던 덴톤 부부의 대화도 마찬가지다. 비록 현실은 더할 수 없이 암울하더라도 미래는 끝내 나아질 것이라는 놓칠 수 없는 희망.

 

지식은 점점 쌓여 가니까, 과학은 계속 발전하겠죠. 그러니 서두를 필요가 조금도 없습니다. 언젠가, 언젠가는 인간이 다르게 살 수 있는 날이 올 겁니다.” (P.171)

 

우리는 세대의 일부분이야. 그 흐름 속에서 살고 있다고. 온 힘과 의지를 다해서 살고 있어. 죽는 것도 그 일부분이야. 우리가 죽든 살든, 그 조차도 세대가 만들어지는 과정인 거지... 세대가 거듭될수록 인간은 더 현명해질 거야... 더 현명하게... 저들은 이해라도 할까?” (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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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 1665년 런던을 휩쓸다
다니엘 디포 지음, 정명진 옮김 / 부글북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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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 몇 권의 번역본이 나와 있다. 표제는 각각 <전염병 일지>, <전염병 연대기>인데, 원제를 염두에 둔다면, 오히려 그쪽이 직역에 가깝지만 건조함은 피할 수 없다. 이 책은 책 내용을 쉽게 유추할 수 있도록 의역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이 번역본이 출간된 해는 한창 코로나19가 극성을 부리기 시작하던 시기다. 우연의 일치인지 당초 기획 의도인지 모르겠지만, 책 내용을 보면 자연스레 코로나19 시절을 떠올리게 됨은 우리에게 페스트만큼 온 사회에 유사한 충격을 안겨준 경험이 그것 뿐이기에 그러할 것이다.

 

이 작품을 소설로 보고 싶지 않다. 그러기에는 작가의 창작과 허구는 별로 드러나지 않는다. 차라리 수기(手記)에 가깝다고 봐야 한다. 작품의 맨 끝에 작중 화자는 스스로를 H. F.로 밝히는데, 연대 상으로 봐도 디포 자신보다는 그의 삼촌이 남긴 기록을 바탕으로 디포가 정리했다고 보는 게 맞으리라.

 

왜 하필 디포는 발표 시점에서 60년 가까이 오래된 옛 사건을 기억에서 끄집어냈을까. 작중 화자는 자신의 기록이 훗날 유사한 상황에서 교훈과 참고 역할을 하기를 기대하고 있지만, 1665년 이후 영국에서 페스트의 창궐은 더는 없기에 당대 유사한 상황은 재연될 수 없었기에 그것만 가지고는 불충분하다.

 

코로나19도 팬데믹을 유발했지만, 치명적인 정도에서 보자면 페스트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이 책에서 기록된 내용을 글자 그대로 신뢰한다면 그야말로 속수무책이고, 생과 사는 오로지 운명에 따를 뿐이다. 게다가 증세 발현 후 곧바로 쓰러져 사망하는 예도 비일비재하다니 원인도 모르고, 백신도 치료약도 없는 상황에서 끔찍한 재난일 수밖에 없다.

 

그 어떤 것도 먹히지 않았다. 전염병은 더욱 기승을 부렸고, 사람들은 이제 경악하며 공포에 떨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을 포기했으며,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절망 속으로 깊이 빠져들었다. (P.265)

 

평화로운 시기에 대다수 사람은 선량하고, 도덕과 체면을 중시한다. 사회는 선량한 개인들이 모여서 윤리와 법질서에 순응하며 개인 못지않게 사회 전체도 고려하는 이상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이 튼튼한 기초에 기반한 것인지 여부는 극한상황에 맞닥뜨리면 확인할 수 있다. 바로 페스트의 압도적 창궐 같은 재난 상황 말이다.

 

그토록 이성적이던 사람들은 삽시간에 비이성과 광기에 휩쓸려 어찌할 바를 모르고 갈팡질팡하며, 나의 생존을 위해 타인의 생명과 재산을 서슴없이 노린다. 대의를 보자면 자신과 가족이 페스트에 걸렸다면 곧바로 당국에 신고하고 조치에 따라야 하겠지만, 인간이란 어떻게든 현실을 부정하게 마련이고, 당장의 수치와 봉쇄를 피하려고 온갖 애를 쓴다. 그것이 장차 어떤 파장을 불러올지라도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않게 마련이다.

 

혹심한 시기에는 하룻밤에도 수백 명씩 시체가 되어버리는 상황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기대하긴 어렵다. 평시라면 가족과 친지들의 애도 속에 정중하게 치러졌을 고인의 시신은 이제 수레에 어지러이 쌓여 커다란 구덩이에 아무렇게나 쏟아져 매장되는 실정이다. 코로나19 극성기에 외신을 통해 이런 사례를 우리도 목도하지 않았던가.

 

그런 면에서 작가는 극한상황에 처한 개인과 사회가 어떻게든 사태를 모면하고 관리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주고 있다. 방황과 좌절과 일탈을 하는 군상과 대비하여, 생사의 위기 속에서도 자신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노력하는 치안 판사를 비롯한 관리와 경찰, 의사들의 모습을 작가는 과장 없이, 비록 그들의 최대한도의 헌신에도 불구하고 페스트의 파도를 잠재울 수는 없었다 하더라도 그들의 고군분투가 없었다면 런던은 페스트의 직접 피해가 아닌 다른 요인에 의해 진작 무너졌을 것임을 보여준다. 어쩌면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 드러내고 알려주고 싶었던 게 이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페스트의 감쇠와 함께 사람들은 기쁨에 겨워 그네들의 역할과 노력을 쉽게 망각한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사그라들자 일선에서 침식을 잊고 과로에 허덕이면서도 확산과 치료에 헌신했던 보건당국을 우리네들이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화자는 모두가 좀 더 신중하고 분별 있으며 적절한 조치와 대비를 하였더라면 페스트의 대발발을 줄일 수 있었을 것이라고 아쉬워한다. 별도 성과 없는 가택 봉쇄 조치로 오히려 사람들의 두려움을 촉발하고 질병의 전파를 유도하였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잠시 페스트가 수그러들자 섣불리 축배를 들다가 고난의 시기를 잘 견디었던 수많은 시민이 목숨을 잃게 된 성급함에 탄식한다. 이 모든 것들은 차라리 만시지탄이다. 어떤 사회라도 팬데믹에 원활하게 대응할 수 있는 체계를 사전에 완비하는 건 불가능하다. 1665년의 가택 봉쇄는 화자의 질타를 받았지만 2020년의 자가 격리는 불가피한 조치로 인정받았다.

 

사람들이 절망에 빠져 낙담하고 있을 때, 그러니까 런던이 너무나 비참한 상황에 처해 있던 바로 그때, 신이 은총을 베풀었다. 말하자면, 신이 손을 뻗어 그 무시무시한 적을 무장해제 시켰다는 뜻이다. (P.369)

 

페스트의 쇠잔은 인간의 노력에 의한 게 아니다. 절정의 시기에 화자를 포함한 누구도 자신은 역병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하지 못하였다. 당시의 절망감과 공포감은 이루 형언할 수 없을 것이다. 화자는 여기서 신의 은총을 언급한다. 신의 징벌로 간주되었던 전염병에서 다시금 은총을 찾다니 모순되지만 그만큼 이성의 경계를 뛰어넘는 현상으로 생각되었을 것이다. 화자의 견해처럼 페스트가 북서쪽에서 동남쪽으로 단계별로 점진적으로 진행하지 않고, 일시에 런던 전역에서 발발했다면 과연 사람들이 숨 쉴 여지가 있었을까.

 

읽기 전에 일지 또는 연대기라고 해서 단순한 사실의 나열로 지루할 것이라고 예견하여 망설였는데, 과거와 현재의 대비로 그리고 화자의 관찰과 전언 내용으로 독서 자체는 무척 흥미로웠다. 특히 세 남자 이야기’(P.194-232)는 전염병을 피해 런던 근교를 방랑하는 사람들의 자취를 따라 당시의 사회 풍속과 사람들의 대응 양식을 사실적으로 들여다보게 해준다.

 

코로나19 시기에 만약 이 책을 읽었다면 대단한 동질감과 연대감을 느끼게 해주었을 테지만, 지금 읽더라도 페스트가 불러일으킨 어마어마한 파장은 역시 잊기 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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