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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잎은 노래한다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7
도리스 레싱 지음, 이태동 옮김 / 민음사 / 2008년 1월
평점 :
오래전 <런던 스케치>를 읽은 후 도리스 레싱을 다시 만난다. 큰아이가 요즘 이 작가의 작품을 좋아해서 순차적으로 도서관 대출을 해주고 있는데 겸사겸사 나도 읽어본다. 꽤 유명한 작품이므로. 이것은 그의 데뷔작으로 작가로서의 명성을 쌓아 올린 출발점에 해당한다.
작가 자신이 어려서부터 자란 로디지아, 즉 오늘날의 짐바브웨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소수 백인이 집권하는 인종차별주의 국가로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유명하다. 이 책에서 리처드와 슬래터가 경영하는 농장과 그곳에서 일하는 흑인 원주민, 영국 영향을 받은 도시문화 등 작중 지역적 및 사회적 배경은 모두 작가가 경험한 당대 로디지아의 현실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우리는 흔히 흑인 인종차별주의라고 하며 미국을 떠올리고 노예해방으로 공식적으로 종식된 것으로 알고 있다. 반면 영국은 인종차별에 반대한 선량한 국가로. 영국 식민지로 눈을 돌려보면 실제는 전혀 다르다. 소수 백인이 광대한 식민지 경영을 하고 경제적 지배권을 확보하려면 흑인 원주민 사용은 불가피하고 효율적 운영과 통치를 위해서는 강제력이 동원된다. 그들이 반항하지 못하게 하려면 엄격한 차별 정책이 생겨날 수밖에 없음은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이는 식민지 경영의 운영 논리다.
백인 문명. 백인이, 특히 백인 여자가, 경우가 어찌 되었든 간에 흑인과 인간적인 관계를 맺는 걸 결단코 용납하지 않을 백인 문명은 생존을 위한 투쟁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일단 그러한 관계를 인정해 주면, 백인 문명은 붕괴되어 그 무엇으로도 구제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P.41)
이 소설의 기본 축은 메리를 주인공으로 그녀가 리처드와 결혼함으로써 겪는 과정에서 보여 주는 남녀간, 부부간 관계이지만, 다른 축은 리처드 부부라는 백인들과 농장의 하인과 일꾼인 흑인 원주민 간의 관계로 이루어진다.
전자에서 우리는 개인적 흠결과 불행한 결혼생활의 전형을 발견하고 안타까움과 함께 비극적 결말에 이르게 되는 과정에서 분개와 더불어 일말의 동정심을 갖게 된다. 나아가자면 주류 백인사회에서 소외된 그들 부부가 고군분투하는 모습과 더불어 근대적 인식을 갖지 못하고 봉건적 사고에 얽매인 딱한 개인도 확인할 수 있다. 메리 개인에 한정한다면, 그녀는 불행한 어린 시절의 덫에서 정신적으로 갇혀 있다. 그녀는 삶에 대해 주체적인 인식을 하지 못하고 그냥 주어진 대로 살아왔다. 그녀의 결혼 역시 주변의 눈치 하에 충동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외부와의 고립은 그녀가 자초한 선택 아니었던가. 그토록 시골을 증오하고 흑인 원주민을 싫어하던 그녀가. 리처드와의 결혼생활에서도 그녀의 책임은 결코 외면할 수 없다.
그녀가 사악한 그 무엇에 대해 한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끌려 다니기만 했을 뿐, 자발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 본 적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 결국, 갈수록 의지를 상실하다가 마침내는 이 지경이 되어 냄새나는 낡은 소파에 앉아 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P.333)
메리와 리처드의 점진적 몰락을 두고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다. 유사한 처지에 놓인 세상의 모든 부부가 다 이처럼 비극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비록 최초에 사랑으로 결합하지 않은 부부라도 일생을 깊은 동지애로 끈끈하게 버텨내고 원만한 노년을 맞이하는 예도 있다. 실패한 농장 경영만 하더라도 무능한 리처드 못지않게 나 몰라라 방치한 메리는 어떠한가. 그들의 사례는 개인적 원인과 사회적 요소가 절묘하게 맞물린 극단적인 경우라고 할 수밖에 없다. 리처드와 비슷한 처지에 놓였지만 성격적으로 전혀 다른 남자와 만났더라면 메리의 행위와 선택은 완전히 달랐을 것이다.
가출한 메리는 도시로 돌아가 결혼 이전의 삶을 복구하려고 노력하지만 실패로 귀결된다. 그전까지 그녀는 리처드를 경시하는 한편 자신을 높게 평가하였다. 완벽한 착각이다. 그녀의 독신생활 후기에 주변과 특히 직장에서 어떻게 평가받았는지 메리 자신을 제외한 우리들은 익히 알고 있지 않던가. 이로써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을 지탱할 동력을 상실하였다.
후자의 관점에서 본다면 인종차별주의와 탈식민주의 담론의 예증으로 삼기에 충분하다. 슬래터는 물론 리처드, 메리도 모두 전형적인 백인우월주의자이자 인종차별주의자다. 아니 로디지아에 거주하는 모든 백인이 마찬가지다. 체제 유지를 위해서는 불가피하므로. 소설 서두는 메리의 피살로 시작하는데, 미쳐버린 리처드에 대한 수습이 중요할 뿐 정작 희생자인 메리는 아무런 관심과 동정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그녀는 단지 불량한 흑인 원주민에게 죽임을 당한 것 뿐으로 간주된다. 여기에 반론을 제기하려는 토니를 슬래터와 데넘 경사의 눈초리는 용납하지 않는다.
메리는 그[원주민 하인]가 식사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아니, 원주민들 또한 잠을 자고 식사를 해야만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조차 해 보지 않았다. 그들은 있거나 없거나 상관없는 존재들이었으며, 메리는 그들이 자기 눈에 띄지 않을 때면 그들에 대한 생각을 일부러 내어 해 본 적이 없었다. (P.129)
메리에 비하면 리처드는 그나마 낫다. 그들을 부리기 위해 어쨌든 타협이 필요하다는 점을 알고 인정하므로. 메리는 극단적이다. 흑인 원주민 하인을 혹독하게 다그치고 부려 먹는 비인간적 대우는 그녀가 그들은 자신과 같은 인간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 준다. 남편이 와병 중 농장 관리를 할 때 1분 이상 휴식 시간을 허용하지 않는 방침은 기계적 능률주의 신봉자에 가깝다. 메리의 처사 덕분에 리처드는 일꾼들을 구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이니 부부의 행위 공히 악순환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밖에.
작중에서 사회적 금기를 위배한 것으로 지탄을 받는 메리와 모세의 관계를 무엇이라고 받아들여야 하나. 두 사람이 성적인 접촉으로 이어진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개인적 친밀함을 표출한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속옷 차림인 걸 꺼리지 않고 사적인 봉사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점은 흑백 인종을 떠나 일반적 남녀 사이에서도 예사로운 행위는 분명히 아니다. 지금도 그럴 만할진대 수십 년 전 과거, 그것도 인종차별이 지배적인 식민지 사회라면 충격의 파장은 심대하였으리라. 식민 지배 사회의 근간을 무너뜨리는 위험한 개미구멍이기에.
그들 사이에는 이제 새로운 관계가 성립된 셈이었다. 메리는 그의 힘 앞에서는 무력함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가 그래야만 될 이유는 없었다. 집 안, 혹은 햇볕이 내리쬐는 주방의 바깥벽에 등을 기대고 조용히 서 있는 그의 존재를 매 순간순간 인식하는 메리의 감정은 원인 모를 강한 두려움, 심한 불안감, 심지어는 어떠한 건전치 못한 매력(그녀 자신은 이것을 알지 못했다. 안다 하더라도 죽어도 인정하지 않으려 했겠지만)이었다. (P.265)
작가는 자전적 요소를 많이 반영하고 있다. 로디지아 사회의 풍속은 그곳 출신자 아니면 알 수 없으며, 산속 농장과 기후의 손에 잡힐 듯 세밀한 묘사 역시 현지인 외에는 불가능하다. 작가는 초연한 태도를 보인다. 그는 메리와 리처드를 특별히 옹호하지 않는다. 그들의 장점과 미덕은 인정하면서도 단점과 잘못한 점은 가감 없이 기술한다. 찰리 슬래터 부부에 대해서도 비판과 함께 정당성도 부여하지 않던가. 그저 여러 요인으로 붕괴하고 마는 리처드 부부를 동정 어린 시선으로 담담하게 따라가고 있을 뿐이다.
작가의 이런 초연함은 정치체제와 이데올로기 측면에서도 계속된다. 그는 대놓고 인종차별주의와 식민지 체제를 비판하지 않는다. 소수 백인에 의한 지배체제와 차별 현상을 객관적으로 드러내고 기술할 뿐이다.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할지는 오롯이 독자의 몫이다. 이런 점에서 좀 더 개인적 목소리를 내길 바라고 과감한 참여를 요구하는 시각에서 보자면 마뜩잖을 수도 있겠다.
어쩌면 이 점이 식민지 사회의 지배계층인 백인이라는 태생적 한계일 수 있다. 같은 사건과 행동을 흑인 원주민의 관점에서 바라보자면 전혀 다른 방향과 사고로 해석될 수 있을 테니. 제아무리 평등사상과 열린 생각을 지향하더라도 극복하기 어려운 천부적 낙인. 작품에서 풍기는 은근한 낭만성과 온화함의 성격이 어떤지는 다른 작가의 작품을 통해 좀 더 비교하여 살펴봐야 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