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끝의 온실
김초엽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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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토피아를 다룬 과학소설이다. 온 세계를 뒤덮은 더스트로 인류가 절멸의 위기에 처한 소위 더스트 시대. 몇몇 살아남은 인간은 더스트를 막는 거대한 돔 시티에 모여 살고, 돔에 들어가지 못하거나 쫓겨난 사람들, 그리고 더스트 내성종들은 밖에서 나름대로 옹색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분투한다.

 

수십 년의 시간이 흘러 겨우 더스트를 퇴치하고 문명을 회복하는 데 성공한 사람들. 더스트 박멸은 과학기술의 덕택인 줄 알았으나 우연한 계기로 더스트 시대에 이에 저항하고 퇴치를 위해 노력한 사람들의 존재가 밝혀진다. 모든 게 모스바나라는 더스트 시대 후기에 풍미했던 독성 덩굴식물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모스바나는 더스트 시대 후기, 그리고 재건 직후의 빈곤한 시대에 가장 번성했던 우점종이었다. 당시에는 세계 어디에나 모스바나의 덩굴이 가득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과거의 불행한 기억, 혹은 겪어본 적도 없는 시대의 절망과 이 식물을 연관 짓는 것인지도 몰랐다. (P.41)

 

이 작품의 화자는 두 사람이다. 전체적으로 이끄는 이는 식물학자 아영이지만, 사건의 핵심은 프림 빌리지의 생존자인 나오미의 증언에 따른다. 그리고 작품의 주인공은 이희수=지수 씨와 레이첼이다. 전체 3부 구성인데, 1부는 어린 나오미와 언니, 2부는 프림 빌리지 시절, 3부는 아영과 나오미의 만남, 아영과 레이첼의 대면이다.

 

더스트는 기상이변이나 자연재해가 아니다. 인간의 탐욕과 과학기술이 결합하여 만들어낸 비극이다. 디스토피아 작품의 전형적 설계다. 돔 시티는 인류의 구제 수단인 동시에 제한된 공간과 자원으로 불가피하게 대다수 사람을 돔 밖으로 배제하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영구적 돔은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돔 안의 사람은 악착같이 자신들을 지키려 극단적 선택과 행동을 한다. 더스트에 저항성을 지닌 내성종 사람과 보통의 사람, 전자는 돔 시티 안의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배척당한다. 심지어는 인간 사냥의 대상이다. 동일한 인류로 간주하지 않는 것이다. 내성종끼리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생존이 최우선이기에 인간성을 도외시하곤 한다.

 

돔 안의 사람들은 결코 인류를 위해 일하지 않을 거야. 타인의 죽음을 아무렇지 않게 지켜보는 게 가능했던 사람들만이 돔에 들어갈 수 있었으니까. 인류에게는 불행하게도, 오직 그런 이들이 최후의 인간으로 남았지.” (P.226)

 

앞선 과학기술의 실체를 확인할 수 없다고? 사람들이 타고 다니는 호버카, 드론 외에 무엇보다도 레이첼이라는 인간형 로봇이 있다. 프림 빌리지를 실질적으로 유지하는 원동력이자 온실의 주인, 식물 연구 외에는 일체의 관심이 없지만 지수 씨와 교류를 통해 독성을 낮추는 약과 저항성을 지닌 농작물을 개발한다. 그가 개발한 식물 중 하나가 모스바나다. 훗날 단지 유해식물로만 인식되던 모스바나가 더스트로부터 프림 빌리지를 지키기 위한 수단이었던 동시에 맹렬한 생장과 전파로 다른 농작물을 살 수 없게 만들어 결국 프림 빌리지를 해체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은 역설적이다.

 

더스트 폭풍에 살아남으려면 덩굴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 덩굴은 사람들을 굶주리게 만들었다. 처음에는 아름다워 보였던 푸른 먼지는 이제 고통의 근원처럼 느껴졌다. (P.230)

 

프림 빌리지. 인류 멸망의 시대에 돔 시티와는 다른 의미에서 인류 생존의 희망이자 외로운 모델이다. 돔 시티 못지않게 프림 빌리지 역시 이중성을 지닌다. 빌리지의 안전과 생존을 위해 외부 침입자는 가차 없이 제거하는 비정함. 나오미 자매가 받아들여진 것은 예외적인 사례다. 차마 죽이기에는 나이가 너무 어렸다는 판단이리라.

 

프림 빌리지는 외부적 방해요인이 없었다면 영속할 수 있을까.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된다. 레이첼의 자비에 의존하여 생명줄을 버티고 있을 뿐. 그러기에 내부적 갈등과 작별이 끊임없이 생길 수 밖에 없는는 취약한 구조가 프림 빌리지다.

 

레이첼이 마을의 해체를 원치 않았던 건 이 마음을 자신의 실험실로 생각해서가 아니었다. 그럼으로써 지수를, 자신의 옆에 붙잡아두고 싶었던 거였다. 정비사가 아닌, 지수를 옆에 두고 싶어했던 것이다. (P.339)

 

지수 씨와 레이첼의 관계를 무엇이라고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레이첼을 수리할 때 감정 기능을 활성화함으로써 지수 씨에 대한 끌림을 느끼는 레이첼, 지수 씨가 떠나는 걸 막기 위하여 프림 빌리지가 간신히 버틸 정도로만 작물 개발을 하는 레이첼을 과연 비난할 수 있을까. 인류에 대한 환멸로 스스로 아웃사이더로 자처하던 지수 씨가 더스트 종식 시대를 살아남아 찾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가 레이첼을 발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무슨 의미를 지니게 되는 걸까.

 

이 책이 중고등학교 추천도서로 지정된 까닭은 무엇일까. 무분별한 과학기술의 폐해, 인류 최후의 순간에도 바래지 않는 인류애, 인간과 로봇의 공감과 공존, 멸절의 위기에도 굴하지 않고 분투하고 노력하는 사람들의 존재. 정도의 차이는 있더라도 모두가 해당한다. 한편 소설은 다소 산만하고 혼란스러운 인상을 준다. 작품 속에 너무나 많은 사건과 요소를 담으려고 하다 보니 원래라면 벽돌책 또는 몇 권으로 나왔어야 할 내용을 한 권에 압축하는 작가의 의욕 과다의 결과라고 하겠다.

 

식물의 기계와도 같은 정밀함과 동시에 난관을 헤쳐나가는 유연함에 대한 찬사가 되풀이되는 점도 놓쳐서는 안 된다. 세계 도처에 적응하고 살아남은 모스바나처럼.

 

저는 모스바나가 더스트와 같이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질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모스바나는 공존과 유전적 다양성을 습득하고 더스트 시대의 흔적을 자신에게서 지우는 것으로 살아남았지요. (P.366-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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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나선 - 생명에 대한 호기심으로 DNA를 발견한 이야기 궁리하는 과학 1
제임스 D. 왓슨 지음, 최돈찬 옮김 / 궁리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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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NA의 이중나선 구조는 매우 유명하며 유전학 연구에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이 책은 이중나선 구조를 최초로 밝혀냄으로써 노벨상을 수상한 저자가 훗날 직접 쓴 이중나선 발견 과정의 수기다. 교양 과학서로서의 진지한 과학적 접근과 지식을 기대한다면 실망하기 딱 좋다. 저자가 당시의 메모와 기억 등에 의존하여 작성한 자신의 주관적 기록이다. 따라서 편향적으로 평가받을 일부 대목도 분명히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순전히 나의 입장에서 기술되었기에 일방적이고, 한쪽으로 치우치고, 공평하지 않은 부분도 많다. (P.18, 머리말)

 

이 책의 묘미는 무엇보다 20대 초반의 젊은 미국 과학도가 어떤 계기로 DNA와 유전학에 관심을 두게 되었고, 미국을 떠나 영국에서 연구 활동을 하게 되었으며, 그와 공동 연구자인 프랜시스 크릭과의 학문적, 인간적 관계 형성이 어떠하였는지를 살펴보는 데 있다. 재기발랄한 젊은 과학도는 24시간 학문 연구에 매진하지 않으며 이런저런 사교모임, 취미활동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 다른 과학자들도 마찬가지인 것이 그들 역시 과학자이기에 앞서 하나의 인간이기에 인간적 욕구를 배제할 수 없음은 어쩌면 당연할 것이다.

 

왓슨, 크릭과 더불어 이 책에서 비중 있게 등장하는 인물이 그들의 경쟁자이자 협력자인 모리스 윌킨스와 로잘린드 프랭클린이다. X선 촬영의 전문가들인 그들이 제공한 사진 자료가 없었다면 왓슨과 크릭은 DNA 구조를 파헤치는 것이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왓슨과 크릭이 아니었다면 윌킨스와 프랭클린이 언젠가 이중나선 구조를 발견하였을 가능성도 컸다. 미국의 라이너스 폴링과 더불어 DNA 구조 발견은 결국 시간과의 다툼이었고, 왓슨과 크릭은 뛰어난 직관력과 독창적인 상상력으로 이중나선을 먼저 찾아냈다.

 

프랜시스 크릭과 내가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발견한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기술하기 위해, 나는 소설의 형식을 빌렸다. (P.5, 한국어판 서문)

 

사실 과학자로서의 활동과 업적은 왓슨보다 크릭이 훨씬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대중이 DNA에 대해 접근하기 쉬운 이 책을 썼기에 일반적 명성은 그가 월등히 높다. 과학자로서 전문 연구에 매진도 중요하지만, 학문적 성과를 대중 과학서로 변환할 수 있는 능력도 탁월한 과학자에게 요구되는 덕목이라고 하겠다. 동료 과학자들만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설 수 있도록.

 

화학 지식도 부족하고, X선 촬영기술도 약한 저자가 DNA 구조를 발견하는 과정을 이 책은 비교적 간략하게 기술하였기에 사람에 따라서는 순전히 소가 뒷걸음치다 쥐 잡은 격으로 행운과 우연의 소산으로 판단하기 쉽다. 대충 알려진 내용을 상상하는 구조에 모형으로 끼워 맞춰 성공할 수 있다면 참으로 과학은 쉬우리라.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나는 저자 자신의 뛰어난 지적 능력이고, 나머지는 이 책에서 밝히지 않거나 간단하게 서술하였지만 저자가 내내 관련 사안에 쏟아부은 노력과 열정의 정도이다. 그렇게 쉬웠다면 다른 뛰어난 과학자들이 그렇게 어려움을 겪었겠는가.

 

이제 문제의 핵심은 염기들을 맺어주는 수소결합을 유지하는 법칙을 찾아내는 일이었다. (P.193)

 

수차례에 걸쳐 반복되어 기술하였던 윌킨스와 로지의 갈등, 왓슨 본인과 크릭이 로지와 상대하기 곤란하였던 난감한 상황 등을 통해 로지 프랭클린은 계속 부정적인 존재로 간주된다. 말미에 왓슨이 썼듯이 남성 중심의 과학자 사회에서 그녀는 탁월한 능력에도 불구하고 대등한 지위와 역할을 인정받지 못하였다. -인산 뼈대가 DNA 분자의 바깥조직에 위치한다는 주장에 저자를 포함한 다른 이들은 동의하지 않았지만, 나중에 구조를 밝혀내고 X선 사진과 비교해 보니 로지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녀가 정말로 일찍 사망하지 않았다면 노벨상 공동 수상자 명단에 이름이 실렸을 것이다.

 

과학계라는 곳은 연구가 벽에 부딪혔을 때 흔히 여성을 단순히 기분 전환이나 시켜주는 존재로 생각하기 쉬운 곳이다. 이런 불합리한 상황에서 고도의 지성을 갖춘 그녀로서는 용감하게 맞서 싸울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우리는 너무 늦게 깨달았던 셈이다. (P.237)

 

평이한 과학 교양서이지만, 특히 후반부에 DNA 구조와 관련한 내용을 전개할 때는 유전학과 생물학에 관한 기초지식을 갖고 있어야 훨씬 이해가 용이할뿐더러 이중나선이 갖는 깊은 함의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가능하다. 나는 DNA 구조를 설명하는 그림을 보더라도 그런가 보다 할 정도로 문외한이기에 애석할 따름이다. 다만 이중나선이 유전자 복제를 매끄럽게 설명하는 구조라는 점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과학자 사회는 학문적 열정에만 전념하는 집단이라고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그들도 일반 사회와 마찬가지임을 이 글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조직 내 갈등, 장학금을 받기 위한 노력, 이성과의 교제, 사교, 연구성과를 선점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 구도,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한 중요한 연구 결과의 미공개 등 옮긴이의 말마따나 적나라하게 서술하고 있어 현실적인 동시에 차라리 인간적이다.

 

저자 왓슨은 과학행정가로서 명성을 쌓아오다가 노년에 지능을 인종 차이와 결부시키는 발언을 함으로써 과학계에서 몰락한다. 노벨상 메달을 팔았다고 할 정도로 어려운 생활을 겪었다고 하는데, 수년 후 다시 한번 자신의 의견을 옹호함으로써 완전히 퇴출당하고 말았다. 유전학의 대가가 이런 황당한 논란을 일으키는 걸 보면 학문적 능력과 이성은 반드시 일치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듯하여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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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 이야기
조나단 스위프트 지음, 류경희 옮김 / 삼우반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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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학사상 꽤나 악명높은 작품이다. 주된 이유는 작가가 말하는 속내를 파헤치기가 어렵다는 데 있다. 주저주저하면서 이 책을 읽었을 때 의외로 그다지 이해 부득은 아니어서 놀랐다. 내 지적 수준의 뛰어남인지 아니면 완전한 무지의 발현인지 판단이 어렵다. 어쨌든 내가 이해한 범위 내에서 몇 자 끄적거려 본다. 오독이라면 어쩔 수 없다.

 

종교적인 타락에 대해서는 의복 알레고리를 사용하여 소개하기로 했으며, 이것이 이야기의 본체를 구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학문의 타락은 여담이라는 형식을 통하여 소개하기로 결정했다. (P.230)

 

작가 당대에도 작품 이해에 어려움이 많았고 오해가 난무하였기에 오죽하면 작가가 직접 길라잡이 성격의 글을 추가하였다. <작품을 위한 변론>이다. 이 글을 읽으면 무질서하고 난삽하기 그지없던 이 책이 일순간 체계적이고 질서정연하게 다가온다. 다만 자유분방한 문장의 재미가 사라지는 단점이 있다. 도대체 작가가 이 작품을 어떤 의도로, 무슨 구성을 꾸미고, 여하한 표현을 하였는가 하는 긴장과 추리의 흥미진진함이 소멸하게 된다. 따라서 독자는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이해와 재미 중 무엇을 우선할 것인가.

 

작품 구성은 통 이야기여담이 엇갈려 짜여있는 구조를 택하고 있다. 구성이 이해에 헷갈리는 독자라면 굳이 순서대로 읽지 말고 통 이야기만 한꺼번에 읽어도 좋다. 그러면 조금 더 이해가 용이하다. 이것은 종교적인 타락을 의복 우화로 비꼬아놓은 내용이다. 스토리가 흥미롭고 어려운 전개가 아니라 작가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알아차리기 쉽다. 의복으로 상징되는 신의 뜻을 삼 형제는 점차 달리 받아들이는데, 큰형 피터는 가톨릭, 잭은 개신교, 마틴은 국교회를 가리킨다. 물론 셋 중에서 국교회가 종교의 순수한 본질을 가장 잘 지키고 있다는 주장인데, 당연하다, 작가 자신이 국교회 사제였으므로.

 

여담은 보다 이해가 어렵다. 특정 서사로 구성된 게 아니라 현대의 학문 타락을 자유분방하게 비판하는 논설 형식에 가깝다. 요지는 학문의 형식과 외형에 신경 쓰고 집중하다 보니 정작 중요한 학문의 내용 자체는 부실하고 타락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화자에 따르면 자신은 서문에 당대의 관례에 따라 타인을 비난하는 내용을 쓰지도 않는다. 그는 그네들의 매춘부 같고, 텅 빈 자질에 대해 진정한 비평가들에 경의를 표한다. 본문에 앞서 장문의 서문과 헌정사들을 도배하는 현대 작가의 행태에 비판적이다. 작가의 소재도, 주제도 공허하고 소진되다 보니 본문의 얄팍함을 메꾸기 위해 색인과 요약, 인용으로 풍부하게 보충하는 현상도 여지없이 까발린다. ‘결론은 파격적으로 제시한다.

 

나는 현재 우리 현대 작가들 사이에서 아주 빈번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실험 하나를 시도해 보고 있는 중이다. 즉 무() 주제에 관해 글을 쓰는 것이다. 주제가 완전히 고갈되어 버리더라도 그냥 계속해서 펜을 움직여 나가는 것이다. (P.223-224)

 

현대인으로서 이성과 지성을 갖춘 화자는 당대의 무분별한 학문과 작가의 글쓰기 행태를 이렇게 신나고 사정없이 그렇지만 예의범절에 맞게 비판한다. 이런 화자의 논지를 따라가다 보면 도대체 타락하지 않고 온전한 학문이란 도대체 어떤 게 남아 있을까 의구심이 들 정도다. 한편 이렇게 냉철한 비판적 글쓰기를 할 수 있는 화자라면 당대의 참된 지식인이자 학자라는 존경심마저 들 정도다.

 

이렇게 화자에 깊은 공감과 지지를 표하는 와중에 뭔가 찜찜함을 느낀다면, 이 작품의 맥을 제대로 짚은 독자다. 작품의 구성을 살펴보자. 본문 외에 장문의 서문이 있다. ‘진심으로 존경하는 존 소머스 경께 바치는 헌정사’, ‘출판업자가 독자에게 드리는 글’, ‘존경하는 후손 전하께 바치는 서한도 달라붙어 있다. 화자는 분명히 작가와 출판의 이러한 행태에 비판적이었는데 이 작품도 비판의 대상과 동일한 구성을 따르고 있다.

 

화자는 언행 불일치를 보인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란다는 식으로. 존경할만한 화자는 졸지에 사라진다. 오히려 화자야말로 허위의 가면을 뒤집어쓴 위선자라고 하겠다. 여기서 우리는 화자에 대해 중대한 착각을 했음을 인정해야 한다. 화자와 작가를 동일시한 점. 작가는 화자를 비판한다. 당대 학문의 타락을 비판하는 화자의 타락한 실체를 은연중에 드러냄으로써 독야청청을 외치는 학문적 위선 행태를 말이다. 이 작품을 처음 읽었을 때 느끼는 혼란은 아마도 여기서 비롯하였으리라.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의 핵심은 통 이야기가 아니라 여담이다. 전자는 후자를 은폐하기 위한 바람잡이다. 작품해설에 이 점을 잘 밝혀놓았다.

 

작품의 화자가 반드시 작가 자신의 입장을 대표하는 대변인이 아니며 오히려 작가가 공격하려는 대상의 속성을 지닌 퍼소나 혹은 마스크로서, 사실은 작가에 의해 아이러니컬한 공격을 당하고 있으며, 그를 통해 그의 동류 집단까지도 공격을 할 수 있다는 퍼소나 수법이야말로 스위프트 풍자의 핵심이라는 사실 (P.274)

 

의복 패러디가 일차원적인 반면 여담 패러디는 다차원적이고 복합적이다. 그럼에도 두 패러디의 지향점은 일치한다. 그 대상이 종교든 학문이든 상관없이 본질을 도외시하고, 표면과 가식을 중시하고 이성을 배척하고 광기와 광신에 추종하는 당대의 작태를 작가는 무자비하게 까발린다. 다름 아닌 <걸리버 여행기>의 작가가 아니던가?

 

이처럼 흥미롭고 통쾌한 책이 절판된 게 아쉽다. 나처럼 중고로 구하거나 아니면 동서문화사 판본을 택해야 하는데, 후자의 번역 상태는 어떤지 모르겠으며, ‘작품을 위한 변론이 누락되어 있는 점도 마음에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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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잎은 노래한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7
도리스 레싱 지음, 이태동 옮김 / 민음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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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런던 스케치>를 읽은 후 도리스 레싱을 다시 만난다. 큰아이가 요즘 이 작가의 작품을 좋아해서 순차적으로 도서관 대출을 해주고 있는데 겸사겸사 나도 읽어본다. 꽤 유명한 작품이므로. 이것은 그의 데뷔작으로 작가로서의 명성을 쌓아 올린 출발점에 해당한다.

 

작가 자신이 어려서부터 자란 로디지아, 즉 오늘날의 짐바브웨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소수 백인이 집권하는 인종차별주의 국가로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유명하다. 이 책에서 리처드와 슬래터가 경영하는 농장과 그곳에서 일하는 흑인 원주민, 영국 영향을 받은 도시문화 등 작중 지역적 및 사회적 배경은 모두 작가가 경험한 당대 로디지아의 현실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우리는 흔히 흑인 인종차별주의라고 하며 미국을 떠올리고 노예해방으로 공식적으로 종식된 것으로 알고 있다. 반면 영국은 인종차별에 반대한 선량한 국가로. 영국 식민지로 눈을 돌려보면 실제는 전혀 다르다. 소수 백인이 광대한 식민지 경영을 하고 경제적 지배권을 확보하려면 흑인 원주민 사용은 불가피하고 효율적 운영과 통치를 위해서는 강제력이 동원된다. 그들이 반항하지 못하게 하려면 엄격한 차별 정책이 생겨날 수밖에 없음은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이는 식민지 경영의 운영 논리다.

 

백인 문명. 백인이, 특히 백인 여자가, 경우가 어찌 되었든 간에 흑인과 인간적인 관계를 맺는 걸 결단코 용납하지 않을 백인 문명은 생존을 위한 투쟁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일단 그러한 관계를 인정해 주면, 백인 문명은 붕괴되어 그 무엇으로도 구제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P.41)

 

이 소설의 기본 축은 메리를 주인공으로 그녀가 리처드와 결혼함으로써 겪는 과정에서 보여 주는 남녀간, 부부간 관계이지만, 다른 축은 리처드 부부라는 백인들과 농장의 하인과 일꾼인 흑인 원주민 간의 관계로 이루어진다.

 

전자에서 우리는 개인적 흠결과 불행한 결혼생활의 전형을 발견하고 안타까움과 함께 비극적 결말에 이르게 되는 과정에서 분개와 더불어 일말의 동정심을 갖게 된다. 나아가자면 주류 백인사회에서 소외된 그들 부부가 고군분투하는 모습과 더불어 근대적 인식을 갖지 못하고 봉건적 사고에 얽매인 딱한 개인도 확인할 수 있다. 메리 개인에 한정한다면, 그녀는 불행한 어린 시절의 덫에서 정신적으로 갇혀 있다. 그녀는 삶에 대해 주체적인 인식을 하지 못하고 그냥 주어진 대로 살아왔다. 그녀의 결혼 역시 주변의 눈치 하에 충동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외부와의 고립은 그녀가 자초한 선택 아니었던가. 그토록 시골을 증오하고 흑인 원주민을 싫어하던 그녀가. 리처드와의 결혼생활에서도 그녀의 책임은 결코 외면할 수 없다.

 

그녀가 사악한 그 무엇에 대해 한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끌려 다니기만 했을 뿐, 자발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 본 적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 결국, 갈수록 의지를 상실하다가 마침내는 이 지경이 되어 냄새나는 낡은 소파에 앉아 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P.333)

 

메리와 리처드의 점진적 몰락을 두고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다. 유사한 처지에 놓인 세상의 모든 부부가 다 이처럼 비극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비록 최초에 사랑으로 결합하지 않은 부부라도 일생을 깊은 동지애로 끈끈하게 버텨내고 원만한 노년을 맞이하는 예도 있다. 실패한 농장 경영만 하더라도 무능한 리처드 못지않게 나 몰라라 방치한 메리는 어떠한가. 그들의 사례는 개인적 원인과 사회적 요소가 절묘하게 맞물린 극단적인 경우라고 할 수밖에 없다. 리처드와 비슷한 처지에 놓였지만 성격적으로 전혀 다른 남자와 만났더라면 메리의 행위와 선택은 완전히 달랐을 것이다.

 

가출한 메리는 도시로 돌아가 결혼 이전의 삶을 복구하려고 노력하지만 실패로 귀결된다. 그전까지 그녀는 리처드를 경시하는 한편 자신을 높게 평가하였다. 완벽한 착각이다. 그녀의 독신생활 후기에 주변과 특히 직장에서 어떻게 평가받았는지 메리 자신을 제외한 우리들은 익히 알고 있지 않던가. 이로써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을 지탱할 동력을 상실하였다.

 

후자의 관점에서 본다면 인종차별주의와 탈식민주의 담론의 예증으로 삼기에 충분하다. 슬래터는 물론 리처드, 메리도 모두 전형적인 백인우월주의자이자 인종차별주의자다. 아니 로디지아에 거주하는 모든 백인이 마찬가지다. 체제 유지를 위해서는 불가피하므로. 소설 서두는 메리의 피살로 시작하는데, 미쳐버린 리처드에 대한 수습이 중요할 뿐 정작 희생자인 메리는 아무런 관심과 동정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그녀는 단지 불량한 흑인 원주민에게 죽임을 당한 것 뿐으로 간주된다. 여기에 반론을 제기하려는 토니를 슬래터와 데넘 경사의 눈초리는 용납하지 않는다.

 

메리는 그[원주민 하인]가 식사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아니, 원주민들 또한 잠을 자고 식사를 해야만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조차 해 보지 않았다. 그들은 있거나 없거나 상관없는 존재들이었으며, 메리는 그들이 자기 눈에 띄지 않을 때면 그들에 대한 생각을 일부러 내어 해 본 적이 없었다. (P.129)

 

메리에 비하면 리처드는 그나마 낫다. 그들을 부리기 위해 어쨌든 타협이 필요하다는 점을 알고 인정하므로. 메리는 극단적이다. 흑인 원주민 하인을 혹독하게 다그치고 부려 먹는 비인간적 대우는 그녀가 그들은 자신과 같은 인간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 준다. 남편이 와병 중 농장 관리를 할 때 1분 이상 휴식 시간을 허용하지 않는 방침은 기계적 능률주의 신봉자에 가깝다. 메리의 처사 덕분에 리처드는 일꾼들을 구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이니 부부의 행위 공히 악순환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밖에.

 

작중에서 사회적 금기를 위배한 것으로 지탄을 받는 메리와 모세의 관계를 무엇이라고 받아들여야 하나. 두 사람이 성적인 접촉으로 이어진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개인적 친밀함을 표출한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속옷 차림인 걸 꺼리지 않고 사적인 봉사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점은 흑백 인종을 떠나 일반적 남녀 사이에서도 예사로운 행위는 분명히 아니다. 지금도 그럴 만할진대 수십 년 전 과거, 그것도 인종차별이 지배적인 식민지 사회라면 충격의 파장은 심대하였으리라. 식민 지배 사회의 근간을 무너뜨리는 위험한 개미구멍이기에.

 

그들 사이에는 이제 새로운 관계가 성립된 셈이었다. 메리는 그의 힘 앞에서는 무력함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가 그래야만 될 이유는 없었다. 집 안, 혹은 햇볕이 내리쬐는 주방의 바깥벽에 등을 기대고 조용히 서 있는 그의 존재를 매 순간순간 인식하는 메리의 감정은 원인 모를 강한 두려움, 심한 불안감, 심지어는 어떠한 건전치 못한 매력(그녀 자신은 이것을 알지 못했다. 안다 하더라도 죽어도 인정하지 않으려 했겠지만)이었다. (P.265)

 

작가는 자전적 요소를 많이 반영하고 있다. 로디지아 사회의 풍속은 그곳 출신자 아니면 알 수 없으며, 산속 농장과 기후의 손에 잡힐 듯 세밀한 묘사 역시 현지인 외에는 불가능하다. 작가는 초연한 태도를 보인다. 그는 메리와 리처드를 특별히 옹호하지 않는다. 그들의 장점과 미덕은 인정하면서도 단점과 잘못한 점은 가감 없이 기술한다. 찰리 슬래터 부부에 대해서도 비판과 함께 정당성도 부여하지 않던가. 그저 여러 요인으로 붕괴하고 마는 리처드 부부를 동정 어린 시선으로 담담하게 따라가고 있을 뿐이다.

 

작가의 이런 초연함은 정치체제와 이데올로기 측면에서도 계속된다. 그는 대놓고 인종차별주의와 식민지 체제를 비판하지 않는다. 소수 백인에 의한 지배체제와 차별 현상을 객관적으로 드러내고 기술할 뿐이다.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할지는 오롯이 독자의 몫이다. 이런 점에서 좀 더 개인적 목소리를 내길 바라고 과감한 참여를 요구하는 시각에서 보자면 마뜩잖을 수도 있겠다.

 

어쩌면 이 점이 식민지 사회의 지배계층인 백인이라는 태생적 한계일 수 있다. 같은 사건과 행동을 흑인 원주민의 관점에서 바라보자면 전혀 다른 방향과 사고로 해석될 수 있을 테니. 제아무리 평등사상과 열린 생각을 지향하더라도 극복하기 어려운 천부적 낙인. 작품에서 풍기는 은근한 낭만성과 온화함의 성격이 어떤지는 다른 작가의 작품을 통해 좀 더 비교하여 살펴봐야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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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의 양식은 어떻게 세상에 왔나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30
허버트 조지 웰스 지음, 박아람 옮김 / 휴머니스트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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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상과학소설은 결말의 방향에 있어 대체로 두 가지 입장을 취한다. 유토피아 vs 디스토피아. 아무래도 과학발전의 초창기 무렵에는 긍정적 전망을 보여주는 경우가 우세하다가 20세기 중후반을 넘어서면서부터는 부정적 인식이 주류를 이룬다. 웰스는 대체로 부정적 결말이 우세하다. <우주전쟁>은 제외하더라도 <타임머신>, <투명인간>, <모로 박사의 섬> 같은 경우는 확실히 과학기술의 발전이 인류에 가져올 영향에 대해 비극적 인상을 주고 있다.

 

이 작품 <신들의 양식>에서 웰스의 입장은 모호하다. 순수한 과학적 호기심에 따라 섭취하면 거인이 될 수 있는 영양제를 개발하고, 그것의 누출과 부작용에 대해서는 별다른 고민을 하지 않는 과학자들에 대해서는 분명히 부정적이다. 여기서 작가는 시종 그들에 대해서 희화적인 태도를 보인다. 한편 신들의 양식을 먹고 자란 거인들에 대해서는 동정적이다. 보통 인간들에게 구박받고 탄압받으며 제거의 대상이 되는 과정에 이르기까지 그네들을 바라보는 웰스의 시선은 따스하다. 거대화된 식물, 곤충, 동물에 이어 인간까지 맞닥뜨리게 된 보통 인간들을 향한 태도 역시 희화적이지만 그렇다고 부정적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거인들 못지않게 수많은 보통 인간들 역시 생존권이 달린 사안이다.

 

결말 장면에서 레드우드와 거인 아들 간의 대화는 심오하다. 수적으로, 기술 면에서 우세한 보통 인간, 즉 소인과 거대한 체격으로 쉽사리 제압당하지 않는 거인 간의 대치는 금방 결론 나지 않는다. 상당 기간 불편한 동거 또는 공존을 할 수밖에 없다. 언제까지? 그건 어느 한쪽이 소멸할 때까지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싸우는 게 아니라 성장을 위해서, 앞으로 영원히 계속될 성장을 위해서 싸우는 거야. 내일 우리가 살든 죽든 이 거대한 성장은 우리를 통해 세상을 정복할 거야. 그것이 불변하는 그 정신의 법칙이야. 신의 뜻에 따라 성장하는 것!” (P.360-361)

 

코사의 아들은 이렇게 선언한다. 그들의 존재는 신의 뜻이고, 계속적 성장은 절대선이라는 견해. 묘하게도 마지막 단락의 기술은 밝게 다가오지 않는다. 정말 그게 신의 뜻일까 하는 반문이 솟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생장이 늦은 아기를 위해 개발한 신들의 양식이 어마어마한 파장을 불러일으킬 거라는 생각을 벤싱턴과 레드우드는 미처 갖지 못하였다. 그들 말마따나 그들은 무해한 과학적 발견이 유해한 결과로 이어질 수 있음을, 그들이 자신들의 연구물을 과연 적절하게 통제할 수 있을지를 결코 알지 못한다. 그들은 순수한 과학적 정신에 근거하였을 뿐. 자기들이 하고 있는 게 진정으로 무엇인지를 모르는 과학자들, 어디서 많이 보던 서사구조 아니던가. 전형적인 디스토피아 공상과학 소설이 도입부는 항상 이렇게 시작한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을 포함하여 <고질라> 시리즈, 거대 악어가 주인공인 <앨리게이터>, 공룡 영화 <쥬라기 공원> 시리즈 등의 공통된 특징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방사능 오염, 인간의 욕심이 깃든 유전자 복제 기술이 갖는 파멸적 결과이다.

 

완벽하게 절대선인 과학적 발견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항상 장단, 선악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 원자력의 막대한 힘은 전기생산에 유익하게 활용할 수 있는 동시에 무시무시한 폭탄으로 둔갑하여 졸지에 인류의 생존에 종지부를 찍을 수도 있음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원자폭탄의 개발자들이 훗날 반핵운동에 많이 참여한 걸 뒤늦게 깨달아서다. “적절히 다루고 확실하게 통제”(P.124)하는 건 이상론에 가깝다.

 

걱정과 두려움이 합쳐져 곳곳에 흩어져 있는 거대 인간 종족, 즉 신들의 양식을 먹고 자란 아이들을 향한 막강한 증오로 변했다. 이 증오는 정론의 구심점이 되었다. (P.253)

 

1904년에 발표한 이 소설은 인간이 공포에 휩싸였을 때 이성이 어떻게 반이성으로 변질하고 타락하는지를 한눈에 보여준다. 거인의 수가 늘어날수록 보통 인간들은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고 이런 심리를 잘 선동하여 일거에 대중의 지지를 정당하게 획득한 이가 바로 케이터햄이다. 그다지 특별해 보이지 않는 그가 인류의 구세주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과정은 선동정치 또는 중우정치의 위험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인간의 이성이 얼마나 취약한 속성인지를 새삼 깨닫게 한다. 수십 년 후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발생한 국가 전체주의를 예견하는 듯. 그들에게 유대인은 인간이 아니듯 케이터햄 지지자들의 눈에 거인 역시 인간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저 제거되어야 할 인간의 적일 뿐. 천진한 캐들스를 향한 무차별 발포가 이를 나타낸다.

 

신들의 양식의 영향력은 억제될 수 있을까. 단지 사람뿐만 아니라 온갖 동식물도 그것에 영향을 받는 걸 통제할 수 없다면, 그들이 점차 전 세계로 확대되는 현상은 필연일 수밖에 없다. 단지 시간의 늦고 빠름만 차이가 있을 뿐. 우리네 보통 사람들은 결국 거대한 존재들에 의해 도태될 운명에 놓인 자연선택의 연약한 개체군에 불과한가. 코사의 아들을 포함한 거인 청년들은 결국 그렇게 될 거라고 확신한다.

 

독자들은 작가의 설정에 따라 아무래도 거인 청년들의 운명에 공감하고 무언의 지지와 동정을 베풀게 되지만, 만약 우리들 자신이 작중의 보통 인간들에 해당한다면 우리 자신은 케이터햄과 다른 행동을 택할 자신이 있을까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우리네 가슴속에 품은 거대 생물을 향한 호기심과 더불어 원초적 두려움은 결코 떨칠 수 없는 본능이다. 그런 면에서 케이터햄은 위기에 처한 약자의 생존본능에 가득한 절규를 우리를 대신하여 들려준다.

 

우리는 그 성장제가 계속 만들어지도록, 우리 세상이 점점 늘어가는 괴물과 기괴한 거대 생물들에게 짓밟히도록 둘 수는 없습니다. 절대 그럴 수는 없지요! 제가 묻겠습니다. 전쟁 말고 뭐가 있습니까?” (P.337)

 

그것이 우리가 케이터햄을 절대적으로 부정할 수 없는 까닭이다. 당신은 그렇지 않다고? 글쎄 이상과 현실은 절대로 일치하지 않음을 수많은 인간 역사의 사례가 예시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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