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레타리아(proletariat)라는 어원은 고대 로마 시대에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즉 생산수단과 분리된) '가난한 자유민'을 뜻했던 라틴어 'proletari'에서 유래한다.
반면 노동자(勞動者 -labor worker)는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고, 이를 댓가로 임금을 받는 직업에 종사하는 자를 의미한다.
프롤레타리아 (이하 pt) = 노동자라는 등식은, 노동자=프롤레타리아 라는 등식과 구분해서 살펴볼 수 있다. (자본론의 상대적 가치형태에서 이러한 등식의 차이를 강조하는 이유가 있다!)

pt는 노동자이다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pt의 재생산은 노동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생산수단과 유리된 계급. 그들은 살아가기 위해서는 임금노동 이외에는 선택할 수 없다.
그러나 노동자는 pt이다 라는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고, 이를 댓가로 임금을 받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 자가 아니라,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는 댓가로 임금을 받는 직업에 종사하는 자이다. (자본주의의 양극화 테제도 있지만, 결국에 끝끝내 살아남은 소부르들.)
사실 그렇게 따지만, 이건희도 삼성에서 '페이'를 받고 있기 때문에 노동자라 할 수 있지 않는가. (이건희의 '노동'이 과연 어떠한가는 차치하고, 출퇴근과 뭐 비슷한 것을 할 것이다.)
이건희 같은 오너-자본가가 '임금'을 받는 것은 조금 다른 문제라고 하더라도, 예를 들어 삼성전자 사장은 분명 노동자이다.
그러나 이들이 pt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들은 수십억, 수백억대 자산가로 그들의 자산(자본)을 바탕으로 이윤을 얻고 있기 때문에 분명 자본가이다.
즉 노동자이면서 자본가일 수 있다. 노동자이면서 bg일 수 있다.
그럼에도 노동자=pt, pt=노동자 임을 강조하는 것. 용어를 전유하려는 시도는 분명 계급적, 정치적 목적(효과) 때문일 것이다. 이런 식으로 용어를 정의한 후에 따지는 것은 순전 스콜라적 관심일 수 있다.

결국 정치가, '우리편'의 이익을 달성하는 것이라 할 때, 일정한 경계를 짓고 '우리편'을 '우리'에게 설득시켜서 이를 기반으로 정치적 세를 결집하는 것이라면.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라고 할 때. 삼성전자 사장진이 와서 우리도 노동자여~ 라고 하는 것.
맑스와 엥겔스가 '모든 인류는 형제다'라는 테제를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로 바꾼 것은 분명 정치적 의미가 있기 때문일 터이다.
그래서 노동자=pt, pt=노동자로 개념을 전유하고자 하는 목적과 의도가 있다. 용어의 재정의.
노동자는 바로 pt고 pt는 노동자라고 하는 것.
생각해 보자. 우리가 만국의 '무산자/pt'여 단결하라 라고 했을 때의 효과와,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의 의미효과는 분명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