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하는 건수하님의 댓글을 보고 깜짝 놀랐다. 다음 글의 제목을 '유대인의 코'로 정해 놓았고, 인종적 구분이 불가능한 인종 범주로서의 유대인에 대해 써야겠다고 생각하고, 필립 로스와 바버라 스트라이샌드의 사진을 골라두었기 때문이다. 세상에, 이럴 수가. 이 놀라운 예지력이여! 기립박수, 짝짝짝!
유대인의 외양에 대한 것이라면 '코'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필립 로스의 책에서 '코'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긴 했던 거 같은데 무슨 책이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 (『포트노이의 불평』이라고 예상되기는 하다) 찾아보려 했으나, 찾을 수가 없다. 집에 책이 없ㅠㅠ 원서만 있ㅠㅠ 코 이야기 길게 써야 하는데 넘넘 아쉽다. '코'는 유대인성을 표현하는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다. 물론 '코'만 그런것은 아니다. 우치다는 유대인의 신체적 특징에 대한 유럽인의 집착을 이렇게 표현했다.
중세의 회화에는 '매부리코'나 '물갈퀴가 달린 발'이나 '뿔'이 유대인의 생물학적 특징으로 반복되어 그려졌다. 이는 누구나 알고 있는 악마의 도상학적 징후이다. (35쪽)
필립 로스는 폴란드계 유대인이다. 나는 로스를 좋아하고, 그래서 그런 거지 어쩐지 모르겠지만, 그의 외모도 멋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좋아하는 로스의 사진은 이러하고, 또 이러하다.
유대인의 '코'를 이야기하려면, 바버라 스트라이샌드를 빼놓을 수 없겠는데, 처음 봤을 그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다. 평생 성형 수술을 권유받았던 당대 최고의 스타. 하지만, 그 제안을 거절했던 당대 최고의 스타. 사진은 로버트 레드포드랑 같이 있는 걸로 골라보았다.
『가라앉은 자와 살아남은 자』에서 제일 충격적이었던 것은 '독일에 살던 유대인들이 왜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독일 정부의 지시에 따라 이동하고 집결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독일인이라고 생각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독일인'이라고 생각했다. 독일에서 태어났고, 독일에서 자랐고, 모국어가 독일어지만, 어떻게 스스로를 '독일인'이라고 생각했던 거지? 이에 대해선 우치다가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유대인을 다른 민족 집단과 구분할 수 있는 유의미한 생물학적 특징은 존재하지 않는다(28쪽). 일반적으로 유대인 사이에서는 이베리아 반도, 북아프리카계 유대인을 '세파르딤', 프랑스, 독일, 동유럽게 유대인을 '아슈케나짐'으로 나누는 구별이 12세기 이후 행해지는데 이는 종교 교의와 언어의 차이에 기초한 것이라고 한다.(29쪽) 유대인을 인종 개념으로 의미화하려는 조직적 시도는 20세기 나치 독일의 '뉘른베르크 법'이 최초라고 할 수 있는데, '비아리아인'을 세 종류의 카테고리로 나누었다고 한다.
본인이 믿는 종교와 상관없이 '조부모 대에 3명 이상이 유대교도인 자'는 '유대인', '조부모 두 사람이 유대교도'인 사람은 '제1종 혼혈자', '조부모 중 한 사람이 유대교도'인 사람은 '제2종 혼혈자'. 이러한 분류로 1939년 국세 조사에서 독일에는 신앙 종교에 근거한 '유대교도'인이 22만 명, 법률이 정한 '인종적 유대인'이 2만 명 병존하게 되었다.
법률상의 '유대인'과 종교상의 '유대인'이 다른 카테고리로 취급되면서, 그 결과 자기 자신은 '기독교도 독일인'으로서 강고한 민족적 정체성을 가지면서도 유대인으로 구분되어 차별의 대상이 된 사람들이 당시 만 명 단위로 출현했다. (30쪽)
자기 자신은 '기독교도 독일인'이라고 믿고 있는데, 유대인으로 분류된 사람들. 모범적이고 체체 순응적인 이 사람들은 국가의 안내와 지시에 따라 집합하고, 설명을 듣고, 이사(이동)를 하게 된다. 자신의 조국이 자신에게 그럴 줄 몰랐던 것이다.
흑인들 역시 '혈통'에 근거한 분류와 차별에 오랜 시간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미국의 '한 방울 법칙'이 그토록 강고하게 어쩌면 지금까지도 강력하게 작동하는 이유일 수도 있겠다. 이와 관련해서는 김승섭님의 <우리 몸이 세계라면>에 잘 서술되어 있다. 미국 루이지애나에 살고 있던 수지 길로리 핍스라는 여성이 여권을 만드는 과정에서 자신의 출생증명서에 흑인이라고 적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평생을 백인으로 살아왔던 수지는 큰 충격을 받고, 자신의 인종 구분을 바꿔 달라는 청원을 주정부에 접수한다. 5년간의 재판의 결과는 수지 핍스의 패소.
당시 루이지애나에서는 흑인 피가 32분의 1(1/32) 이상이 섞이면 흑인으로 분류되었는데, 계보학자에 따르면 220년 전 만남으로 인해 그녀의 몸에는 32분의 3(3/32)에 해당하는 흑인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몸이 세계라면』, 152/355)
32분의 29에 해당하는 백인 피와는 상관없이 흑인 피의 비율만을 기준으로 삼아서 수지 핍스는 '흑인'으로 분류되었다. 평생을 백인으로 살아올 만큼 그녀의 피부색이 하얗다 하더라도, 그녀의 조상 중에 '흑인'이 존재했다는 이유만으로 '흑인'으로 분류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판단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이루어진다. 한 가지는 외양. 또 한 가지는 추적 가능한 범위 내에서의 혈통. 외관과 추적 가능한 범위 내에서의 혈통을 근거로 그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정체성' 중의 하나가 결정되는 것이다.
이를 여성의 문제와 관련지으면 이러하다. 『여자다운 게 어딨어』의 저자 에머 오툴는 펜슬로 가볍게 수염을 그리고 모자를 썼다. 품이 큰 옷을 입었다. 이렇게 간단한 변신만으로 그녀는 진짜 ‘남자’가 되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남자로 대해주었고, 그녀는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자유로움을 만끽했다. 다른 책(책 제목이 기억이 안 남)에서는 성별이 모호한 복장으로 레스토랑에 들어갔을 때 사람들의 반응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서빙을 해주는 직원들이 자꾸 그녀/그를 '의식적으로', 그리고 의도적으로 '마담'이라고 부르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성을 짐작할 수 없는 사람을 대할 때의 불편함이 구체화된다. 이 사람이 돈이 많다거나 혹은 적다거나, 이 사람이 직업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그런 것을 가지고 불편해하지 않는다. 하지만 '성'을 짐작할 수 없을 때 사람들은 그걸 받아들이지 못한다. 긴 머리카락, 짧은 치마, 하이힐, 짙은 화장 혹은 연한 화장이 드러내는 것은 한 가지다. 내가 여성이라는 사실. 이는 '편리한' 구별이 가능한 빨리 이루어지도록 만들어준다.
여성의 탈코르셋은 외부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저 꾸미기 노동을 중단하는 것 뿐이다. 이는 누군가를 해하는 일도, 누군가를 불편하게 하는 일도 아니다. 내 머리 길이가 짧은 것이 도대체 누구에게 해가 된단 말인가. 내가 펑퍼짐하고 편안한 바지를 입는 게 누구에게 불편을 준단 말인가. 하지만, 여성의 탈코르셋은 외부에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효과를 지닌다. 나는 더 이상 '여성으로만' 인식되지는 않을 것이다, 라는 메시지. 여성들의 탈코르셋에 남성들이 미치도록 분개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남성이어야만 이득을 볼 수 있는 사회, 여성을 억압함으로써 이득을 볼 수 있는 사회에서 피억압자인 '여성'이 사라져 버리려 하기에. 사라지겠다고 하기에.
다시 여성, 흑인, 유대인으로 돌아오자면. 인간은 영장류학, 오리엔탈리즘, 젠더 등의 방법을 통해 위계와 지배의 질서를 구축하고 그 가장 높은 자리에 스스로를 가져다 놓는다. 그 시선은 누구의 것인가.
해러웨이가 보기에 그 시선은 백인, 서양 과학자의 시선이며, 원숭이와 유인원을 '거의 (남성)인간' 혹은 더 나아가 '기원적인’, '문화 이전의’, 혹은 '자연의’ 인간이라 부를 수 있는 것으로 조명한다. 다시 말하지만, 따라서 이 모든 것이 지식의 대상으로서 기입된다/만들어진다. 각 경우에 후자인 타자는, 자아이자 빛과 시각의 원천인 전자보다 열등하지는 않더라도 그것과 완전히 구별되며 부차적이라고 서술되지만, 두 쌍의 형상은 그와 연관된 이원론의 목록 전체와 마찬가지로 오직 상호의존적 위치로서만 의미를 만들거나 작동시킨다.
섹스/젠더, 자연/문화가 그런 이원론에 포함된다. 한쪽을 특정하거나 이해하는 일은 다른 쪽을 규정하는 매우 세부적인 사항과의 차이에 의존한다. 다른 것과 구별되며 우월하다고 여겨지는 위치 혹은 대상은 독특함과 우월성이라는 의미의 측면에서 부차적인것에 의존한다. 예를 들어 보다 열등한 것, 즉 자원으로 낙인찍힌 쪽 없이는, 보다 위대한 것, 문화의 비범한 특질인 쪽도 자신이 이야기하고 규정하는 것, 자신이 체현하고자 하는 것이 될 수 없다.(『도나 해러웨이』, 61-2쪽)
인간/동물, 문명/자연, 남성/여성, 서양/동양, 정신/육체, 백인/유색인, 비유대인/유대인. 서구 백인 남성들의 자리는 왼쪽이다. 하지만, 그들을 위대하고 비범하게 만드는 쪽은 오른쪽이다. 동물, 자연, 여성, 동양, 유색인, 유대인이 존재함으로써만 서구 백인 남성은 위대해질 수 있다. 박수 쳐주는 관객이 있어야만 무대 위의 배우들이 빛날 수 있는 것처럼. 열등하고, 부차적이며, 자연적인 그 누군가가 존재해야만이 우월하고, 근원적이고, 필수적인 그 누군가의 존재가 가능한 것이다. 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동물성이 여성, 흑인, 유대인에게 강제될 때도 여러 개의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동한다. 여성은 남성보다 더 감정적이라고 여겨진다. 개인차보다 성차가 중시된다. 흑인 남성은 백인 남성보다 성욕이 강하다고 여겨진다. 그걸 도대체 어떤 과정을 통해 유추해 냈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지만. 하지만 멸시하고하 하는 의도 속에 백인 남성의 두려움이 엿보이기는 하다. 유대인은 보통의 남자보다 여성적이라고 여겨진다. 수전 팔루디의 『다크룸』에 나오는 유대인의 편견에 관한 이야기 중 하나는 '유대인 남자들은 생리를 한다'는 소문이었다. 누가 그 이야기를, 그 허황된 소문을 믿을까. 사람들은 믿지 않는다. 믿지 않지만, 그 속에 담긴 경멸의 의미는 모두 다 알아챌 수 있다. 그만큼 유대인들을 경멸한다는, 경멸하겠다는 의도 말이다. 한 가지 더 있다. 남자를 모욕하고 능멸하는 모든 양식의 끝에는 여성이 있다는 것. 남성의 최종적 타락, 그건 바로 여자다. 남자만이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어떤 인간, 일군의 인간들의 생각이 그렇다는 것이다.
결국 이 모든 것은 대상화의 문제이다. 상대가 있지 않고서야 나는, 총체로서의 자아는 구성되지 않는다. 뒷담화를 나누는 우리들은 결국 죄를 나누어 가진 한편이 되고, 전쟁과 폭격을 통해 외부의 적을 구체화하며 내부는 결속된다. 미움 없이 사랑할 수는 없는 걸까. 없단다. 없다고 한다.
남자는 하녀이자 반려자인 여자가 또한 자기의 관중이자 심판자이기를 기대하고, 자기를 자기 존재 속에서 긍정해 주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여자는 무관심과 조소와 비웃음으로 남자에게 이의를 제기한다. 남자는 자기가 욕망하는 것, 두려워하는 것,사랑하는 것과 증오하는 것을 여자 속에 투사한다. 그래서 남자가 여자에 대해서 무언가를 말하기가 어려운 것은 여자에게서 자신의 전부를 추구하며, 여자는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제2의 성』, 1417/5245)Keep 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