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책을 못 읽었다. 아침-빨래-설거지-점심-빨래-청소-저녁-설거지-다림질. 점심 시켜 먹었는데도 그랬다. 나처럼 살림에 손 안 대는 사람도 이럴진대, 야무진 살림꾼들은 다들 어떻게 사시는건지. 아니다. 그 분들은 나랑 다르지. 그 분들은 손이 빠르지. 빠르다, 그 분들은. 나는 느리고. 나는 손이 느린 사람이다.

소설을 읽을 때의 감동을 기쁨이나 즐거움만으로 한정짓는 건 불가능하다. 슬픔도 걱정도, 염려도 미움도 모두 소설이 주는 감정일테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내가 느끼게 될 기쁨이나 먹먹함이 10이라 했을 때, 나는 18페이지에서 그런 감정 총량의 4.3을 느껴버렸다. 먹먹하고 암담했다. 나만 그런 건 아니다. 올리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루시는 감정의 격동이 일어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소설을 읽을 때, 소설 속 인물에게 자신을 대입하는 건, 소설을 재미있게 읽는 방법 중 하나다. 주인공에 자신을 대입시키기도 하고, 주인공이 아닌 사람에게 스스로를 대입시킬 수도 있다. 스트라우트의 문장을 따라가면서 나는 올리브가 될 수도, 루시가 될 수도 있다. 어제 읽었던 올리브의 이야기에서, 나는 R이 되었다. 쿵, 가슴이 내려 앉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나는 왜 R이 되었을까. 나는 왜, 상처 주는 사람이 아닌 상처 받는 사람이 되었을까. 나는 왜,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가 되었을까. 나는 왜 유령이 아닌, 유령과 같이 사는 사람이 되었을까. 나는 왜 S가 아닌 R이 되었을까.

올리브의 다음 이야기가 궁금한만큼 내 마음의 향방이 궁금해지는 순간. 나는 왜, 왜 R이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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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 2024-10-27 13: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단발머리님은 평소에도 사람들에게 상처 주는 선택을 할 성향이 아니라서 그런거 아닐까요? 😄

단발머리 2024-10-28 06:11   좋아요 1 | URL
아~~ 그러면 좋겠어요.
근데 저를 포함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이 상처받은 거는 잘 기억하잖아요. 자기가 상처 준 거는 잘 기억 못하고요.
저 책의 그 부분에서... 어쩜 저는 상처받은 지점이 있었던 거 같아요. 모든 사람이 각자의 비밀을 가지고 살아가지요. 그게 삶을 부인하는 거는 안 됐으면 하는데 말이지요.

최대한 내용을 말하지 않으면서 제 감상을 적고 싶었거든요. 설렁설렁 적어놓은 저의 감상을 제대로 이해하는 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망고님이실거라 생각했어요. 댓글 감사합니다!
 


권력과 공간에 대해 생각하게 된 건 지난주부터였다. 권력과 공간의 관계. 권력이 공간에 미치는 영향등에 대해 혼자 생각하게 됐다.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일단 크기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내가 차지한 공간, 내가 점유한 공간은 교장쌤보다 30% 더 넓고, 교감쌤의 6배, 교무부장쌤의 8배 정도가 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 정도의 권력을 소유한 건 아니니 말이다. 권력이 공간의 넓이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면, 다음으로 중요한 요소는 뭘까.

난데없이 파친코의 배우 김민하의 인터뷰가 떠올랐다. 주인공 선자를 설명하던 중이었는데, 세련된 발음으로, 자연스러운 어조로 김민하가 말했다. "...she is fragile and also resilient" 귀에 꽂힌 건 fragile. 부서지기 쉬운, 손상되기 쉬운, 취약한.

내내 공간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는데, fragile이라는 단어가 꽂히니 이 단어를 내가 처한 상황에 집어 넣게 되었고, 이걸 공간의 문제로 치환시키자 하니 '방해받지 않는, 독립된'에 닿게 되었고, 그래서 결국 도착한 곳은 '공유하지 않음'이었다.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아무리 중요한 일이 있어도 교장쌤의 공간을 잠시 공유하겠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공실이 있어도 마찬가지다. 공유한다는 건 이전 거주자(?) 입장에서는 침범이기에 결국 '공유'는 '사적인 공간'의 침해를 뜻한다. 권력이 없는 자는, 권리가 없는 자는 자신의 공간을 '공유'해야만 한다.

지속적으로 공유를 권고받았던 나는, 드디어 공유의 최극단을 지시받는다. 이동, 이주, 이사. 그렇게 나는, 우리는, 나와 우리의 그 무엇들은 퇴출을 명받아 이사를 감행한다. 그 와중에 임시조처의 임시변통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지고, 그렇게 힘없는 한 명의 개인인 나는 이사와 이사, 이사 다음 이사, 연속이사를 마주하게 된 것이다. 이제 생각은 공간에 머무르지 않는다. 내 생각은 이사에 고정된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나는 얼마만큼의 책이 필요한가. 나는 얼마만큼의 연필이 필요한가. 나는 얼마만큼의 노트가 필요한가. 꼭 필요한 건 무엇인가. 지금 바로 필요하지 않아서 놓고 갈 수 있는 건 무엇인가. 언제 필요할지 알 수 없는 물건을 꼭 가지고 가야하는가. 두고 가는 물건은 앞으로도 필요하지 않다는 뜻인가. 노마드의 삶에서 너무나도 중요한 '생필품'의 문제. 어디까지가 생필품인가. 나는 무엇이 필요한가. 내게 정말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요는 이번주 내내 이사와 청소와 정리와 정돈으로 내내 피곤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쉬는 시간 종은 빠짐없이 울리고, 나는 버섯책을, 섹스책을, 스트라우트책을 차분히 읽어나갔다.











10월의 어떤 날들이 그렇게 지나갔다. 시간이 나면 도전하고 싶은 책은 이 책이다. 푸코의 『권력과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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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4-10-26 12: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권력은 역시 공간이죠! (푸코 나와서 좋아하는 중)

단발머리 2024-10-27 19:37   좋아요 1 | URL
그럴줄 알았어요ㅋㅋㅋㅋ 저 책이 얇은가봐요. 상세정보는 안 봤는데 가격이 착하네요 ㅎㅎ

공쟝쟝 2024-10-26 12: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27)푸코: 하지만 저는 ‘공간‘이 어떻게 역사‘의 일부를 이 루고 있었는가를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즉 어떻게 하나의 사회가 자신의 공간을 정리하고 거기에 힘의 관계를 써넣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34)와타나베 : 결국 식민지 지배라고 하는 것은 유일한 시간이라는 고정 관념(obsession)을 동질적이어야 할 공간에 써넣는 것이나 다름없었던 것 이죠 푸코 : 그렇습니다. 따라서 제 역사분석의 대상은 말하자면 유럽의 공간 내부에서의 제국주의=식민지주의입니다. 어떻게 해서 어떤 개인 혹은 개인의 범주가 그들의 지배를 확립하고, 어떻게 해서 근대 서양사회를 기능하게끔 하는 데까지 이르렀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철학의 무대

단발머리 2024-10-27 19:41   좋아요 1 | URL
와타나베씨는 또 누구에요? ㅋㅋㅋㅋㅋㅋㅋ 푸코랑 대담할 정도면 저 분의 공력도 장난 아니겠죠?
유럽 공간 내부에서의 제국주의=식민주의 ......... 이 부분이 관심이 생기네요. <친밀한 적>에서도 저 부분 나오죠. 한 두세쪽 정도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는 얼마나 이분법적인 사람이던지. 그러니까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그렇게 생각했던란다. <자본주의의 폐허에서 가져보는 삶의 가능성>. 아~~ 농촌의 삶, 자연의 삶. 버리는 삶, 더 자유로워지는 삶. 그랬다. 나는 그렇게 버섯을 따라갔다. 따라가며 읽었다. 송이버섯 모르고 새송이버섯만 아는 사람의 버섯책 읽기란 그런 것이다.

송이버섯은 심하게 교란된 숲에서만 자란다. 송이버섯과 소나무는 일본 중부에서 짝을 이루며 서식하는데, 둘 다 심각한 산림 벌채가 행해진 곳에서만 자란다. 정말이지 전 세계적으로 봐도 송이버섯은 가장 많이 교란된 유형의 숲과 관련이 있다. 빙하, 화산, 모래언덕-또는 인간의 행위 -때문에 다른 나무와 심지어는 유기질 토양까지 없어져버린 장소 말이다. (102쪽)

인간에 의해 자행되는 잔혹한 자연 파괴의 현장에서, 바로 거기에서 송이버섯이 자란다. 소나무와 짝을 이뤄 자란다. 가장 많이 교란된 유형의 숲에서 자란다. 아무것도 없이 황폐화된 그 곳에서 자란다. 인간의 예상을 뒤엎는 버섯의 등장, 그리고 버섯의 성장. 인간은 모른다. 알 수가 없다. 이 버섯이 어디서 오는지를, 어떻게 자라는지를...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체르노빌의 목소리』를 읽고 나는 이 지구가 멸망한다면 그건 핵폭발 때문일거라 생각했고, 핵 오염물, 핵 폐기물과 함께 살아간 후손들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사나흘을 불편하게 보내기도 하였으나. 아뿔싸! 그 불쌍한 인류는 후손이 아닌 바로 우리였으니 일본의 전격적인 방사능 오염수 방류. 해류는 한반도 쪽으로 3-4년 이내에 도착 예정.

플라스틱이 배에 가득차서 죽게 된 흰긴수염고래의 사진을 보면 알게 된다. 고래만이 아니라 우리도 곧 죽게 되리라는 걸. 멈추지 않는 진보의 꿈. 멈추지 않는 공장. 멈추지 않는 돈벌이. 멈추지 않는 노동. 인간이 더 이상 이 지구에 살 수 없으리란 걸 진작부터 알고 있던 돈 많고 머리 좋은 사람들은 우주로의 이사를 서두르고 있다. 내가 죽기 전에는 실용화되지 않을테지. 뇌를 다운로드하는 비용은 엄청날 것야. 로봇팔, 로봇다리도 마찬가지고. 인공피부는 또 얼마나 비쌀텐가.

나는야...

청산에 살어리랏다

나의 청산은 지구

지구 끝, 세계 끝에는 버섯

내 머리는 버섯모양

나는야 버섯돌이

버섯돌이, 청산에 살어리랏다








배치assemblage는 유용한 개념이다. 생태학자는 때로 고정되고 제한된 함의를 갖는 생태적 ‘공동체‘를 벗어나 배치로 관심을 돌렸다. 하나의 배치 안에 존재하는 여러 생물종이 어떤 방식으로 서로 서로 영향을 끼치는지는 결코 정해져 있지 않다. 어떤 것은 서로를 방해하고 (혹은 먹고) 어떤 것은 생존을 위해 협력한다. 또 이것은 자신들이 같은 장소에 있음을 이제 막 우연히 알게 됐다. 배치는 열린 모임 gathering이다. - P56

어떻게 모임은 때때로 부분들의 합보다 더 큰 ‘사건happenings‘이 되는가? 만약 진보를 뺀 역사가 불확정적이고 다각적이라면, 배치가 그것이 지닌 가능성을 보여줄수 있는가? - P57

나로서는 다른 존재-인간이든 비인간이든-에게 도움을 구하지 않고서 직면할 수 있는 도전이라는 것은 생각조차 하기 어렵다. 우리가 각자 홀로 생존한다는 식의, 사실과 정반대되는 환상을 품을 수 있는 건, 다른 존재를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특권이 있기 때문이다. - P66

오가와 박사는 많은 아이러니와 웃음으로 노스탤지어를 음미한다. 우리가 송이버섯이 없는 사찰의 숲 옆에서 비를 맞으며 있는 동안 그는 일본의 송이버섯 사랑이 한국에서 기원했다고 설명했다. 이 이야기를 듣기 전에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는데, 일본의 민족주의자들과 한국인들은 사이가 나쁘다는 것이다. 한국의 귀족이 일본의 문명을 시작했다는 오가와 박사의 설명은 일본인들의 신경을 거스르는 발언이다. 그의 이야기 속에서는 문명이 모두 좋은 것만은 아니다. - P101

오가와 박사의 이야기는 노스탤지어를 고려하고 있기에 흥미로웠지만, 또 다른 면도 생각하게 했다. 송이버섯은 심하게 교란된 숲에서만 자란다. 송이버섯과 소나무는 일본 중부에서 짝을 이루며 서식하는데, 둘 다 심각한 산림 벌채가 행해진 곳에서만 자란다. 정말이지 전 세계적으로 봐도 송이버섯은 가장 많이 교란된 유형의 숲과 관련이 있다. 빙하, 화산, 모래언덕-또는 인간의 행위 때문에 다른 나무와 심지어는 유기질 토양까지 없어져버린 장소 말이다. - P102

자본주의적 농장은 부를 모으기 위해 생태적 과정을 통해 형성된 살아 있는 존재들을 끌어들인다. 나는 이를 ‘구제salvage‘라고 부르는데, 자본주의적 통제를 받지 않고 생산된 가치를 써먹는 것을 의미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에 사용되는 많은 원료는 자본주의가 시작되기 훨씬 전부터 존재했다(석탄과 석유를 생각해보라). 또한 자본가들은 ‘노동‘의 전제 조건인 인간 생명을 생산할 수 없다. ‘구제 축적‘은 선두 기업이 상품 생산 조건을 통제하지 않고 자본을 축적하는 과정이다. - P120

송이버섯 채집은 도시라는 유령에 사로잡혀 있지만, 도시는 아니다. 채집 또한 노동이 아니다. ‘일‘조차도 아니다. 라오계 채집인 사이는 ‘일‘이란 자신의 상사가 시키는 작업을 하면서 그에게 복종하는 것을 뜻한다고 설명했다. 반면에 송이버섯 채집은 ‘찾는 행위‘다. - P146

백인 채집인은 자신들을 폭력적인 참전용사일 뿐 아니라 혼자있기를 좋아하고, 강인하고, 지략이 뛰어난 자급자족적인 산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전쟁에서 싸워보지 않은 사람들과 연결되는 지점 중 하나는 사냥이다. - P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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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10-22 21:0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다 읽고 버섯 시작하려고 했는데 이 페이퍼 읽으니 당장 시작하고 싶어지네요. 당장 시작하겠습니다!!

단발머리 2024-10-22 21:19   좋아요 1 | URL
천천히 시작하셔도 되는데… 🤭

건수하 2024-10-22 22:2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그러고보니 올해 무더위로 송이버섯이 생기지 않았다고 하더라고요.. 그 정도는 교란이 아니었을까요 아니면 너무 과한 교란이었을까요?
(아직 시작 못해서 적절한 댓글인지 아닌지는 모릅니다)

단발머리 2024-10-23 11:52   좋아요 0 | URL
아...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도 송이버섯을 재배하는군요. 하긴 우리나라에서 넘어갔다고 하니 우리나라 사람들도 좋아할 거 같기는 해요. 과한 교란에 대해서는 저도 좀 생각을 해보고 싶어요.
아주아주 적절한 댓글입니다. 생각거리를 던져주시는 ㅎㅎ

독서괭 2024-10-23 12: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진지하게 읽고 있다가 나는야 버섯돌이에서 빵 터졌네요 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4-10-23 12:49   좋아요 0 | URL
잠시라도 방심하지 말아주세요 ㅋㅋㅋㅋㅋㅋㅋㅋ🤪

바람돌이 2024-10-23 14:0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글 읽는데 버섯 전골 먹고싶은 저는 무엇??? ㅎㅎ
송이버섯이 심하게 교란된 숲에서만 자란다는건 엄청 충격이네요. 그럼 송이버섯이 못자라기를 바래야잖아요. 아 송이 버섯들어간 전골 먹고싶은데....ㅠㅠ

단발머리 2024-10-23 19:09   좋아요 3 | URL
ㅋㅋㅋ 바람돌이님! 저도 버섯전골 엄청 좋아한답니다.
송이버섯이 심하게 교란된 숲에서만 자란다는 거 정말 놀랄 일이죠. 전 이 부분 읽으면서 그랬거든요. 이것 봐. 인간이 지나간 곳은 다 파괴돼. 망했다고! 이렇게요 ㅋㅋㅋㅋㅋ 근데 송이버섯이 거기에서 자란다고 그래요. 완전 망한 거 같은 땅에서 소나무가 자라고 그 옆에서 송이버섯이 ㅋㅋㅋㅋㅋㅋ 이상 송이맛을 모르는 버섯돌이였습니다^^
 













먼댓글 없어져서 먼댓글 형식으로 씁니다. 제 페이퍼는 [가면으로서의 여성성]입니다. 쟝쟝님의 댓글을 옮겨 놓습니다.

하.................... 오늘 나도 라캉 알튀세르 정신분석 유물론자들 칸 정리하다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지? 한 숨 쉬면서 루티 언니 (맨 윗칸에 바나나 위용 당당하게 위치해있음) 째려보고 왔기에. 이 페이퍼에서 찌지뽕을 왕창 누릅니다. 두번 세 번 두 번 ㅅ ㅔ 번 누르다가 눌렀나요? 눌러졌지요?

˝라캉은 이를 ‘주체성 그 자체의 특권‘이라고 부른다.(112쪽) 그건 또 대체, 무슨 말인가.˝

저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주체성 그 자체의 특권. (아직 단발님이 읽으신 거기까지 못 읽었어요.) 다 걷어차버린 존재 자체에 대한 존재 스스로의 불안이요. 단발님은 예외입니다. (깊게 숙고된 종교는 거기를 메꾼다는 것이 제가 가진 일종의(?) 이론입니다) 계속 베끼고 베끼고 베끼면서도 대타자를 계속 걷어차야하거든요. 실존주의 냄시 나게 말하자면 계속 기투해야하는 건데. 그 불안... 그 밑바닥에서 고고한 불안... 그게 일종의 특권이라는 말로 저는 이해됩니다. 합니다. 그 뒤에 그 속에 그 안에 본질. 혹은 어떤 무언가가 작용할 거라는 것은 타자들의 환상일 뿐 주체 스스로는 인식하고 있죠. 내 얼굴에 찰싹 달라 붙어 있는 내가 연기하고 있는 가면을. 젠더 관점 쫌 더 섞어보면, 자기가 떨고 있는 그 허세를 똑바로 볼 줄 아는 여성의 도전에 대한 일종의 신경증적 반응일까요? 철학에 도전하는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반응은? 거기에 대한 안심까지 시켜주시는 넓디 넓은 루티의 헤아림이 하이힐?

좀 멀리 갔는 데... 카사노바 호텔에서 아니 에르노가 본인의 섹스를 그렇게 묘사하는 장면이 있어요. 기억이 잘 안나는 데 일종의 수행성. 시뮬라시옹? 섹스-쾌락 저도 잘 모르지만. .. 거기에 무엇이 있다고 혹은 없다고 그것이 억압되어 있다고 말하고 말하고 또 말하지 않고 또 말하지 않는.성기 결합외의 그 입과 눈과 귀들이 행하는 일련의 모든 것.을 섹슈얼리티라고 한다면. 왓이즈섹스. 는. 너무도. ‘지성적‘인 질문이다. 저급하지도 더럽지도 역겹지도 혹은 수치스럽지 않은.

그러나 왓 이즈 섹스 를 존재론적으로 질문하는 여자는 얼마나 부담스러우며 그것의 실재에 닿고자 하는 여자는 또 얼마나 부담스러운지...

이 댓글을 읽자마자 『만화로 읽는 3분 철학 3』의 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이 사진을 가져오려고 이 글을 쓰는 겁니다. 투비처럼 댓글에 사진 첨부 가능하면 댓글로 썼을 듯 합니다만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라캉이 말한 '주체성 그 자체의 특권'을 쟝님은 '다 걷어차버린 존재 자체에 대한 존재 스스로의 불안'이라고 쓰셨는데, 그 말은 이 그림과 딱 맞아 떨어지는 것 같아요. 주체성 그 자체의 특권을 누릴 수 있게 됐지만, 항시, 항상, 1년 365일 24시간, 인간은 스스로의 존재 자체에 대한 불안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죠.

존재 스스로에 대한 불안을 숙고된 종교가 메꾼다는 쟝님의 문장에 동의합니다. 인간이 삶의 주인으로, 더 구체적으로는 '신 없는' 삶 속에서 살아가고자 할 때 여러 분투가 있습니다. 물론 지금은 신 '없는' 시대, 신이 없다고 믿는 시대이긴 하죠. 이성애 가부장주의가 오랫동안 그 자리, 신의 자리를 차지했다면, 이 시대의 주인공은 '돈'이라는 생각이 들기는 하구요.

저는 신심이 깊은 사람도, 종교에 깊이 침잠된 사람도 아니어서 잘은 모르지만요. 삶의 주체로 살아가는 것, 그리고 신을 자신의 삶 속에 받아들인다는 그 '상태'에 대해 생각하다보면, 강신주의 이 말이 떠오릅니다. 이전에 제가 애정했던, 하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는 강신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의 인문학적 잣대, 철학의 잣대로 ‘네가 주인이니 예수가 주인이니?’ 이걸로 몰아가야 하는 거예요." (『강신주의 맨얼굴의 철학, 당당한 인문학』, 113쪽)


저는 강신주의 저 문장을 읽고, 인본주의 사상이 무엇인지 깨달은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정의로서의 인본주의, '인간의 존재를 중요시하고 인간의 현재적 소망과 행복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인본주의의 핵심이 아니라는 거요. 핵심은 누가 네 삶에 주인이냐,고 묻는 거죠. 예수가 주인이라고? 예수가 네 삶의 주인이야? 그럼 너는 노예야. (강신주가 이렇게 말했다고 저는 추측합니다) 네가 주인이어야 해. 네가, 네 삶의 주인이 되어서 이 불안과 고뇌에 맞서야해. 감당해야해. 하지만, 그렇게 할 때, 너는 주인이야. 너의 삶의 주인. 너는 어른이야. 네 삶의 최종 결정권자가 너야. 의지하지 않는, 기대지 않는. 혼자의 힘으로 서 있는.

그럴 때. 그렇게 살아가겠다고 할 때. 혼자만의 고뇌, 혼자만의 고독, 분투, 버둥거림은 모두 '특권'으로 이해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자유롭고 괴로운 주인의 삶, 순종이 요구되지만 불안은 덜할 것이 분명한 노예의 삶. 그 사이의 결투 혹은 혈투가 '주체성'을 획득하려는 인간 모두에게 숙제로 주어진다고 보고요.

노예의 삶을 선호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누구나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살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아주 가끔 그런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구멍이 있다는 걸 발견하고, 그 구멍을 채울 다른 '인간적인' 방법이 존재하지 않음을 발견한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항복'을 선언합니다. 그냥 선언만 하는 것이 아니라, 노래를 부릅니다. 두 손, 두 발을 다 들고 부릅니다. 크게도 부릅니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 들고 옵니다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가리까

내 죄를 씻기 위하여 피 흘려 주시니

곧 회개하는 맘으로 주 앞에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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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10-22 08: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맨 마지막 찬송 따라불렀습니다.

단발머리 2024-10-22 20:11   좋아요 0 | URL
담에 만나서 손 들고 같이 불러요. 화음 가능합니다 ㅋㅋㅋㅋㅋㅋㅋ

청아 2024-10-22 08: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노예 주인 저 말을 최근 어디선가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판단이 흐려질때 한번씩 떠올리면 정신차리는데 도움이 되곤했던^^

단발머리 2024-10-22 20:12   좋아요 1 | URL
판단이 흐려질 때 있죠. 뭐가 뭔지 모르는 때 있고요.
저 말을 강신주만 하지는 않았을텐데, 저는 강신주의 워딩이 딱 꽂히더라구요. 오래오래 기억하고 있습니다^^

2024-10-22 09: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10-22 20: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공쟝쟝 2024-10-22 12: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ㅋㅋ 예전에 쓴 글 가져올게요.
“ 책을 아직 다 읽지 않았으나, 나는 이렇게 잠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메시아는 사라지지 않는다. 정치 지도자로 연예인으로 비트코인으로 로또로 주식으로. 꿈 기대 환멸 꿈 기대 환멸. 우리는 믿는 것을 멈출 수 없다. 준거 그대로의 준거자체. 믿기로 약속한 것이 언어이며 언어가 바로 인간의 조건이니까. 무엇을 믿을래. 꿈 기대 환멸 꿈 기대 환멸. 그걸 부단히 바꿔가면서 우린 늙어갈 것이고 아프고 병들어갈 것이며 죽을 것이다. 죽음 이후는 내가 논하고 싶은 영역이 아니다. (불가지론) 나는 그래서 늙고 아프고 병드는 것이 내가 나를 미워하는 이유가 되지 않기를 바라며 그 해결을 돈(각자도생)이 아닌 돌봄의 윤리…로 찾아야 한다는 쪽에 배팅을 걸어볼 생각이다. 그것은 능력주의와는 별개이며 젠더에 대한 진지한 공부 없이는 하나 마나 한 헛소리라는 것도.”

기독교 잘 몰라요 아예 몰라요.
그런데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하잖아요.
존재와 믿음의 영역은 괄호를 묶고. 그것은 말씀으로 오는 것이라면… 어떤 말로 지금을 살며 사회를 지어갈건지는… 또 다른 의미로 중요하다고 합니다! 누가요? 내가요. ㅋㅋㅋ

단발머리 2024-10-22 20:51   좋아요 1 | URL
태초에 말씀이 있었지요. 원전에는 이렇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한복음 1장 1-5절)

어떤 말로 살아야할지... 그 문장들에서는 어디선지 모르게 빨간 흔적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24-10-22 13: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참 신을 받아들이는 상태라는 말은 기억할게요🩷 그건 … 사랑에 가깝네요!

단발머리 2024-10-22 20:53   좋아요 1 | URL
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비유가 성경에는 많거든요.
왕과 백성. 아버지와 아들. 목자와 양. 그 중에 ㅋㅋㅋㅋㅋㅋㅋ남친과 여친이라는 설정도 있습니다.
지혜의 임금 솔로몬이 지은 <아가서>에 자세히 묘사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사랑에 가깝지요. 제정신 아닙니다요.
 














어려운 책도 읽을 수 있는 이유는, 다 이해하겠다는 결심을 뒤로 하고 읽기 때문인데, 어찌되었든 글자는 읽을 수 있고. 게다가 이 글자란 한글. 자랑스러운 우리의 글자. 2024년도 노벨문학상 수상작은 한글로 읽어야 제맛.

이 책이 어려운 이유를 곰곰히 생각해 보자면, 내가 섹스를 섹슈얼리티로만 이해해서 그러한가, 이런 생각을 제일 먼저 하게 되고, 아니면 섹스가 무엇인지에 대해 잘 몰라서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기는 하는데. 섹슈얼리티란 무엇인가,에 대한 저자의 답은 이렇다.

섹슈얼리티는 인간성을 동물적이거나 자연적인 유산에 연결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탈구시키고 탈정향시키며 인간 사회의 특징들(정치, 예술, 과학, 사랑, 종교 등)에 탐닉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이는, 문제적인 존재의 영역이다. (72쪽)

아... 탈구와 탈정향의 정의를 먼저 알아봐야 할 듯.


오늘 읽은 부분에서는 여기가 눈에 띈다. 『가면으로서의 여성성』을 쓴 리비에르의 주장인데, 그는 여성성이 본질적으로 가면이고, 여성성을 '걸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 여성의 충동적인 추파와 교태는] 그녀가 지적 성과를 낸 이후 아버지와 같은 인물들로부터 받을 보복 때문에 뒤따르는 불안을 떨쳐내려는, 무의식적 시도였다. 그 자체로 성공적인 성과로서 공적으로 자신의 지적 능력을 보여주는 것은, 아버지를 거세하고 아버지의 페니스를 소유하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을 의미했다. 그녀는 아버지가 행할 응징에 대한 끔찍한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리비에르, 1929, 305>, 109쪽)

지적 성과를 낸 이후 불안을 떨쳐내려는 무의식적 시도로서의 추파와 교태에 대한 표현을 나는 마리 루티의 책에서 읽었다. 읽은 기억이 난다. 잠깐, 책 좀 꺼내 올게요.











<여성성의 가장Masquerade>. 아, 리비에르의 이름이 이 책에 나온다는 걸, 지금 알았다. 마리 루티는 프로이트의 제자인 리비에르의 이론을 이렇게 설명한다. 성공적인 여성들의 방어 기제. 여성스러운 인상과 섹시한 외모, 애교 부리는 태도 등등. 이는 성공한 여성을 목격한 후 실망하게 될 남성들을 위로하기 위한 보상 작용이라는 것이다. 마리 루티 역시 그 전략을 사용하고 있음을 말한다.

철학 같은 남성 중심의 영역에 대해 강의할 때, 특히 이 구역에서 숭배받는 관념에 도전할 때 내가 미니스커트와 하이힐을 선택하는 이유도 이것이다. 웃긴 일이지만, 남성 동료들이 내가 그들의 진열장에서 황금 팔루스를 몰래 치마 밑으로 빼내 간다고 느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공격보다는 낫다. 봐라! 그런 위허한 절도 행각을 벌이기에는 나의 치마가 너무 짧고 구두는 위태로워 보이지 않는가. (『남근선망과 내 안의 나쁜 감정들』, 169쪽)

'훔친 것'에 대한 두려움은 벌 받을까 하는 두려움을 넘어 존재에 대한 불안으로 이어진다. 이런 것(훔친 물건, 훔친 지위) 안에 '내'가 없으면 어떡할까 하는 두려움. 내가 가진 것은 가식, 가면일 뿐인가 하는 의문. 존재에 대한 불안. 라캉은 이를 '주체성 그 자체의 특권'이라고 부른다.(112쪽) 그건 또 대체, 무슨 말인가.






왜냐하면 정신분석은 - 모든 외부 장애물을 제거한 완전한 성적 만족의 불가능성을 무의식적 섹슈얼리티 그 자체의 구성적이고 통합적인 부분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 P21

무의식은 외부로부터 우리에게 온다. 이것은 또한 프로이트의 (가)설인 모든 억압 자체의 근원이자 조건으로서의 원억압Urverdrängung에 대한 강한 (라캉적) 읽기를 구성한다. 프로이트는 무의식과 억압을 개념화하면서 그 가설을 도입한다. 이 가설에 의하면 보통 억압이라고 불리는 것은 사실상 이미 "후억압Nachdrängen"인 것이다. 사실상의 억압, 혹은 엄밀한 의미에서의 억압이란 이미 억압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억압은 구성적으로 재이중화되어있기 때문이다. - P28

즉 인간의 섹슈얼리티는 성적 관계에 있는 불가능성(존재론적 부정성)이 그 자체로, 그것의 부분으로서 현실에 등록되어 있는 것들"로 나타나는 지점이다. 인간의 섹슈얼리티는 프로이트가 무의식의 독특한 형식으로서 발견한 바 있는, 그런 형식으로 등록되어 있는 것이다. - P36

지식과 성 사이의 이러한 중요한 연결은 성경에서 원죄의 장면에 국한되지 않고 더 발전되며 반복적으로 고집스럽게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성경적 의미의 지식"이라는 표현도 있는 것이다. 성경이 "타자를 앎"으로서의) 성교를 언급하는 이 특수한 방법은 분명, 우리가 아는 성교에 대한 대부분의 일반적인 완곡어구, 가령 "들어가다", "누구와 동침하다", "안으로 들어가다"와 동류가 아니다. 이것들은 단순히 기술적인 완곡어구들일 뿐이다. - P40

다른 한편, 지식이 성교를 가리키는 방식으로, 오직 특이한 (부정적인 인식론적 잔상으로서 등록된, 존재론적 공백으로 타락하는 성적 관계에 대한 의미화 흔적을 우리가 식별할 수는 없는가? 다시 말해 "성경적 의미에서 타자를 앎은 지식이 결여되어 있는 타자의 그 지점과 엮여야 한다. 그리고 종교적 관점에서, 성적 관계에 대한 기표를 결여한 타자 안의 지식의 결여는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수치 말이다. 벗은 몸을 보는 것은 이 몸들 그 자체 때문에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라, 이 벗은 몸들이 전달하는 데에 실패한 것, 말하자면 성적 관계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 P40

전 지구적 인간 해방의 결정적인 장애물은 인간성("인간본성") 그 자체라는 것이다. 인간 해방은 사실상 인간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인간의 본성은 사회적 해방 기획에 있어 약한 고리이다. 이런 사유의 선상에서 우리에게는 보통 이 딜레마를 해결할 더 강한 방법 혹은 좀더 약한 방법이 있다. 즉 신인류/신남성을 만들거나, 인간성의 파괴적인 요소를 "다른 길로 터주어서 canalize" 그 요소를 사회관계를 건설하고 유지하는 데에 방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만족시키는 것?" -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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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4-10-20 16:3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하.................... 오늘 나도 라캉 알튀세르 정신분석 유물론자들 칸 정리하다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지? 한 숨 쉬면서 루티 언니 (맨 윗칸에 바나나 위용 당당하게 위치해있음) 째려보고 왔기에. 이 페이퍼에서 찌지뽕을 왕창 누릅니다. 두번 세 번 두 번 ㅅ ㅔ 번 누르다가 눌렀나요? 눌러졌지요?

˝라캉은 이를 ‘주체성 그 자체의 특권‘이라고 부른다.(112쪽) 그건 또 대체, 무슨 말인가.˝
저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주체성 그 자체의 특권. (아직 단발님이 읽으신 거기까지 못 읽었어요.)
다 걷어차버린 존재 자체에 대한 존재 스스로의 불안이요. 단발님은 예외입니다. (깊게 숙고된 종교는 거기를 메꾼다는 것이 제가 가진 일종의(?) 이론입니다) 계속 베끼고 베끼고 베끼면서도 대타자를 계속 걷어차야하거든요. 실존주의 냄시 나게 말하자면 계속 기투해야하는 건데. 그 불안... 그 밑바닥에서 고고한 불안... 그게 일종의 특권이라는 말로 저는 이해됩니다. 합니다. 그 뒤에 그 속에 그 안에 본질. 혹은 어떤 무언가가 작용할 거라는 것은 타자들의 환상일 뿐 주체 스스로는 인식하고 있죠. 내 얼굴에 찰싹 달라 붙어 있는 내가 연기하고 있는 가면을. 젠더 관점 쫌 더 섞어보면, 자기가 떨고 있는 그 허세를 똑바로 볼 줄 아는 여성의 도전에 대한 일종의 신경증적 반응일까요? 철학에 도전하는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반응은? 거기에 대한 안심까지 시켜주시는 넓디 넓은 루티의 헤아림이 하이힐?

좀 멀리 갔는 데... 카사노바 호텔에서 아니 에르노가 본인의 섹스를 그렇게 묘사하는 장면이 있어요. 기억이 잘 안나는 데 일종의 수행성. 시뮬라시옹? 섹스-쾌락 저도 잘 모르지만. .. 거기에 무엇이 있다고 혹은 없다고 그것이 억압되어 있다고 말하고 말하고 또 말하지 않고 또 말하지 않는.성기 결합외의 그 입과 눈과 귀들이 행하는 일련의 모든 것.을 섹슈얼리티라고 한다면. 왓이즈섹스. 는. 너무도. ‘지성적‘인 질문이다. 저급하지도 더럽지도 역겹지도 혹은 수치스럽지 않은.

그러나 왓 이즈 섹스 를 존재론적으로 질문하는 여자는 얼마나 부담스러우며 그것의 실재에 닿고자 하는 여자는 또 얼마나 부담스러운지...

단발머리 2024-10-21 13:55   좋아요 1 | URL
댓글 준비 중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 먼댓글 서비스 없지만 먼댓글 형태로 돌아옵니다. 기다리세요! 메롱!

단발머리 2024-10-22 09:04   좋아요 1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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