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과 루이 16세의 처형

다비드는 1792년 봄 루이 16세로부터 아들이며 후계자 도핀(Dauphin, 프랑스 왕세자 칭호)에게 자신이 헌법을 보여주는 장면을 그릴 것을 주문받았다. 전제정치에 반대하던 다비드로서는 썩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왕이 이런 주제의 작품을 주문한 데서 전통 왕정정치와 혁명의 새로운 기운을 동시에 감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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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드는 루이 16세가 왕세자에게 헌법을 보여주는 장면108과 프랑스 국민이 왕에게 왕관과 왕위를 바치는 장면109을 은유적으로 그렸다. 이는 왕권이라도 헌법을 준수하지 않으면 사라질 수 있다는 뜻이 담겨 있지만 그 보다는 왕권에 대한 옹호처럼 보인다. 이 작품은 다비드 자신의 입장을 반영한 것으로 반은 혁명에 반은 왕정에 기울어진 태도로 보인다. 이것 역시 완성하지 못했는데 정치적 전환기가 왔기 때문이다.
루이 16세는 헌법 제정에 협력하지 않았으며 이는 공화당이 출범하는 발판이 되었다. 훗날 루이 16세를 그리려 했다는 비난을 받자 다비드는 부인하면서 브루투스를 그린 화가가 어떻게 왕을 그리려 했겠느냐고 거짓말을 하며 궁색하게 변명했는데 그의 이중적 성격을 말해주는 부분이다.
그가 본격적으로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된 때는 1792년 9월 국민공회에 의해 파리를 대표하는 의원으로 선출된 후부터였다. 이를 계기로 그는 정치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 장-폴 마라, 그리고 파리에서 변호사로 활약하는 조르주 자크 당통 등과 어울리게 된다. 마라는 49세로 가장 나이가 많았고 로베스피에르는 34살, 당통은 33살이었다.
1792년 9월 21일 국민공회는 전제정치의 종식을 선언했다. 11월부터 루이 16세의 신병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관한 논의에 들어가, 12월 11일 그를 전제군주로 법정에 세웠다.
1793년 1월 16일에 열린 국민공회는 왕에 대해 법적 심판을 내리기로 하고 왕에 대한 모든 대의원들의 의견을 24시간에 걸쳐 청취했다. 왕을 구금하는 선에서, 또는 추방하는 것으로 매듭을 짓자고 주장한 대의원들이 많았지만, 왕을 처형해야 한다는 의견도 많았다. 다비드는 왕의 처형에 찬동했다. 최종적으로 결의한 결과 387 대 334로 왕을 처형하자는 의견이 우세했다. 이틀 뒤 1월 21일 루이 16세의 죄목이 공표되었고 다음날 왕은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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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6세를 처형하기 위한 단두대는 혁명 광장의 처형대 위에 설치되었다. 고해신부로 참석한 아일랜드 태생 아베 헨리 에지워츠는 루이 16세가 처형대 계단을 오를 때 “성 루이의 아들이 하늘로 오른다”는 말로 조소했다. 왕은 마지막으로 군중을 향해 자신을 처형하는 사람들을 용서한다고 했다. 왕의 두터운 목을 칼이 내리치며 잘랐고 한 젊은이가 왕의 머리를 들어 군중에게 보여주었다.112~114 몇몇 사람이 달려가 천과 종이를 들이대고 뚝뚝 떨어지는 왕의 피를 받았다.
루이 16세가 단두대에서 비참하게 처형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유럽의 왕족들이 치를 떨었고, 혁명을 지지하던 사람들 중에서도 왕에 대한 동정심이 생겨 자유와 평등의 이상은 한때 무정부 상태를 맞았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왕위를 신성에 의한 절대적 권리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파리에서 단두대를 보기란 쉬웠다. 너무 신속하게 많은 사람들을 처형했다. 단두대를 설치할 때 인근 주민들과 상점 주인들은 단두대 설치에 반대했는데 냄새가 지독한 데다 개들이 떼를 지어와 바닥에 흘려진 피를 핥아 먹기 때문이었다. 이후 단두대는 지역별로 필요에 의해 정기적으로 설치되었다.
왕의 처형은 다비드 인생에 한 전환이 되었는데 다비드의 아내는 남편이 왕의 처형에 찬성표를 던진 데 대해 화를 내며 이혼을 요구했다. 왕권을 신성시해온 전통이 너무 오래 지속되었으므로 다비드의 아내뿐 아니라 왕의 처형에 찬성했던 사람들 중에도 많은 사람들이 왕이 처형된 데 대해 죄의식을 느꼈다. 혁명은 과연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다비드의 아내도 혁명을 지지했지만 남편이 지나치게 과격한 정치적 행동을 취하자 반감을 갖게 되었고 두 사람의 불화가 걷잡을 수 없게 되어 별거에 들어갔다. 다비드 부부는 1794년 3월 합법적으로 이혼했다. 아내의 돈을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되자 다비드는 한동안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는 두 아들을 맡아 길렀고 아내는 두 딸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