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소 小素笑 - 진짜 나로 사는 기쁨
윤재윤 지음, 최원석 그림 / 나무생각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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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함에 담긴 에스프레소 한잔의 향기

소소소(小素笑): 진짜 나로 사는 기쁨를 읽고

 

윤재윤(2019). 소소소(小素笑): 진짜 나로 사는 기쁨. 서울: 나무생각.

 

독서는 새로운 탄생입니다

 

서삼독(書三讀)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책은 반드시 세 번 읽어야 합니다. 먼저 텍스트를 읽고 다음으로 그 필자를 읽고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그것을 읽고 있는 독자 자신을 읽어야 합니다. 모든 필자는 당대의 사회역사적 토대에 발 딛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필자를 읽어야 합니다. 독자 자신을 읽어야 하는 까닭도 마찬가지입니다. 독서는 새로운 탄생입니다. 필자의 죽음과 독자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끊임없는 탈주(脫走)입니다. 진정한 독서는 삼독입니다“(266). 신영복 교수님의 처음처럼에 나오는 말입니다. 나는 언제 부터인가 책을 읽기 전에 저자를 먼저 읽어보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저자의 문제의식이나 사연과 배경, 그리고 저자가 걸어온 길을 먼저 읽고 제목을 보고 목차를 훑어본 다음 본문을 읽기 시작합니다. 그럼 책의 본문이 마치 저자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들리고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책이 눈으로 들어오고 머리로 생각하며 가슴으로 느끼는 와중에 몸을 통과합니다. 그리고 나를 반성해봅니다. 책을 거울삼아 내 삶을 반추하고 반성하며 성찰해봅니다. 저자의 텍스트가 끝나는 곳에서 독자의 탈주는 시작됩니다. 지금 여기서 안주하는 삶을 탈출하고 새로운 각성의 장으로 옮겨갑니다. 책 읽기 전의 나와 읽은 후의 내가 다르게 다가옵니다. 나는 이제 읽기 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인간의 변화는 진저리를 동반한다. 독서에는 반드시 몸의 반응이 따른다. 가벼운 바람도 있고 통곡할 때도 있다. 어쨌거나 읽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한겨레 신문에 연재했던 정희진의 어떤 메모’, 정찬의 베니스에서 죽다리뷰 편에 나오는 말입니다. 읽기 전의 돌아갈 수 없는 비가역적 변화가 일어나는 과정이 바로 독서입니다. 한 사람은 이미 한 권의 책입니다. 그 사람이 살아가는 삶 자체가 책이 되는 셈입니다. 책이 주는 힘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독서는 한 사람을 이전과 다른 인간으로 거듭나게 만드는 위대한 창조입니다. 나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과 접속해서 내 생각도 틀릴 수 있음을 배우는 겸손함도 책이 가르쳐주는 소중한 교훈입니다. 똑 같은 시대를 살아가지만, 반복되는 익숙한 일상을 보고 살아가지만 누군가는 같음에서 다름을 보고, 익숙함에서 낯선 의미를 캐냅니다. 책에는 그런 다름과 차이, 낯선 상상과 창조가 곳곳에 숨어 있습니다. 항상 나를 넘어서는 지혜가 있다는 믿음, 이를 배우면 현재의 내 삶이 바뀔 수 있다는 믿음이 인생을 변화시킬 수 있지 않을까”(199). 사소한 일상에서 만나는 익숙한 사물이나 현상, 사람과의 대화, 지나가다 우연히 만나는 거리의 간판과 문구에서도 비상하는 상상력을 발휘하며 큰 깨달음을 얻는 윤재윤 변호사님의 소소한 이야기가 심장을 파고듭니다.

 

소소함을 몸소 체험하며 나답게 사는 길, 소소소(小素笑)

 

세상에 사소한 일은 없다. 겉으로 작아 보이는 일이 더 본질적인 것일 수도 있다. 일상의 사소한 일을 보다 정성스럽게 대하면 좋겠다”(207). 사소하면서도 평범한 일상을 비상하는 상상력의 텃밭으로 바꿔주는 깨달음의 향연이 곳곳에서 펼쳐집니다. “우리가 판단하고 행동한 것 중에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 얼마나 많을까? 오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다른 사람에게 섭섭해 하고 비난하는 것이 불행과 다툼의 원인 중 하나가 아닐까. 겨울 숲길에서 들었던 작은 소리가 나의 굳은 사고방식을 새롭게 점검해보라고 속삭이는 듯하다”(111). 늘 생각을 반추해보고 한 발 물러서서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관조하는 자세가 습관적으로 살아가면서 자기 삶의 노예가 아니라 주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끄는 원동력인 셈입니다. 사소함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그곳에서 희소가치를 발견하고 창조하는 저자의 삶에서 사색하며 관조하는 삶이 어떤 삶인지를 몸소 보여줍니다. “읽기는 뙤약볕이 내리쬐는 여름날 오후 강행군을 마치고 그늘에서 마시는 차가운 샘물과 같은 것이다. 책이 그렇게 읽히는 것이라면 반복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215). 사사키 아타루의 이 나날의 돌림노래에 나오는 말입니다. 바쁜 일상을 어제처럼 기계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사색의 샘물이자 죽비 같은 성찰의 계기를 마련해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작은 울림이 앞산에 반동되어 돌아오는 조용한 메아리처럼 귓전을 때립니다. 책을 읽으며 손을 놓을 수 없는 이유는 그런 저자의 목소리가 담긴 글에 밑줄을 치며 생각을 거듭하게 만드는 메모를 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책을 읽다보면 내가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그가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118). 책은 이제 내 몸을 통과하면서 새로운 나로 재탄생시키는 창조의 과정으로 변신합니다.

 

책 제목이 소소소(小素笑)여서 호기심을 갖고 목차를 보고 본문을 보니 이런 풀이가 나옵니다. ‘소소소’, “바람이 아주 부드럽게 부는 모양을 뜻하는 순 우리말이라고 합니다. 머리말에는 이 말의 연원과 배경, 그리고 의미를 다음과 같이 풀이하는 글이 나옵니다.

 

(작을 소), 이는 격을, ()의 뜻도 갖고 있다. ‘조심하다라는 뜻도 있단다. 작게, 적게, 조심스레 마음먹고 행하라는 의미이겠다.

 

(본디 소). ‘꾸미거나 덧붙이지 아니하다’, '바탕', ‘질박의 뜻이다. 아무런 빛깔도 없다는 의미에서 흰빛깔을 뜻하기도 한다. 생긴 대로, 본바탕대로, 꾸미지 않는 마음가짐과 태도를 나타낸다.

 

(웃음 소). 이 글자를 파자하면 '대나무()에서 나는 소리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중의 하나가 웃음이다. 웃음은 단순히 웃기는 일이 생겨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을 수 있는 마음이 갖추어졌을 때에야 가능하고, 깊은 데서 터져 나오며, 이때 마음이 아래에서 위로 열린다. 아무리 짧은 웃음도 그 순간 하늘의 느낌을 갖게 한다(나무 짧아서 기억하지 못할지라도)“(6).

 

작게, 본디 바탕대로, 웃으며 사는 모이 바람이 부드럽게 부는 모양과 같지 않을까”(7). 책의 제목대로 이 책은 조심하지 않고 큰 것을 탐내는 욕심과 바탕대로 자기다운 색깔을 찾아 살아가야 됨에도 불구하고 과장하고 치장하며 사는 태도, 그래서 마음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웃을 잃고 살아가는 현대인들과 오늘의 사회에 대한 깊은 성찰적 메시지를 전합니다. 욕심 부리지 않고 본 바탕대로 살아가면서 삶의 근원을 깊숙이 보는 지혜”(32)를 만나는 순간 깊은 깨달음의 미소가 나도 모르게 나옵니다. “위대한 인물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되라는 것이다. ‘잘남이 아니라 나다움이 중요하다...나답게 사는 것이야말로 온전한 삶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75). 오늘의 우리들은 바탕색, 내가 갖고 태어난 나만의 독특한 색깔대로 살아갈 때 색다름이 드러나고 그 색다름이 바로 나다움인데 남다르게. 남들처럼 살아가면서 나만의 바탕색을 잃어버렸습니다. 바탕대로 살아가면 발견하는 진정한 나다움의 매력이 드러날 때 가장 아름다운 순간입니다. 보여주기 위해 앞만 달려가서 성취한 결과가 아니라 나답게 살아가며 가장 나다운 성취를 이루었을 때 나오는 미소(微笑)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행복한 순간이 아닐까요. “외적 경험을 많이 하더라도 자신에 대한 떳떳함이 없으면 자신의 성장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또한 자기에게 정직한 사람만이 참된 힘을 가지고 강해질 수 있다. 자기가 가짜로 산다는 느낌을 갖고 있으면 결코 강건해지지 않는다. 무기력에 빠지는 가장 큰 원인은 자기가 가짜라고 느끼기 때문이다”(83-84). 춘풍추상(春風秋霜), 남을 대하기는 춘풍처럼 관대하고 자기를 지키기는 추상같이 엄격해야 한다라는 말처럼 추상같이 엄격한 자기를 지켜낼 때 비로소 진짜 나로 살아가는 길이 열립니다.

 

판단(判斷)은 칼)로 반()을 나누는 결단입니다

 

사람은 고통 받을 때 변화가 오고 성장하는 것 같다. 힘든 일을 겪을 때 진짜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구별할 줄 알게 되고 내면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것 아닐까”(41)와 같은 메시지를 만나면 숙연해집니다. 고통은 스승이다. 큰 기회를 주기 전에 고통이라는 관문으로 사람을 통과시키는 이유다. “가장 큰 배움은 가장 큰 고통 속에 숨어 있는 듯하다”(115). 이 책은 역사적 사건이나 실제로 저자가 고소된 사건에 대해 원고와 피고를 대상으로 판결하는 장면, 승소와 패소, 기소와 출소 등 법조인으로 살아가는 과정에서 보고 느낀 점을 진솔하게 들려줍니다. “평소에 염두에도 두지 않았던 이런 모순에 갑자기 의문이 생기는 순간을 나는 문학적 시간이라고 부른다. 문학적 시간은 대부분 개인의 삶과 연결되어 있기 마련이지만, 사회적 주제와 연결될 때 그것은 역사적 시간이 된다. 그것은 또한 미학적 시간이고 은혜의 시간이고 깨우침의 시간이다”(8).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에 나오는 말입니다. 한 개인에게 일어난 사건이지만 그걸 사회제도나 구조와 연결시켜 성찰하는 역사적 시간을 통해 인간의 존엄함을 깨닫는 미학적 시간이자 은혜의 시간이며 깨우침의 시간을 마련하는 장면이 이 책의 여러 곳에서 발견됩니다. 이 책을 읽다보면 30여 년 동안 법조인의 길을 걸어왔지만 여전히 부족한 인간의 불완전성과 이로 인한 판결의 위험성을 고백하는 장면을 자주 만납니다. “재판경험이 쌓일수록 재판이 정말 어렵다는 것을 절감한다. 다투는 당사자 사이에서 진실을 찾고, 가치가 충돌하는 사안에 관하여 정의를 선언하는 일은 본질적으로 한계를 넘어서는 것 같다. 인간이 참으로 나약하고 부족하며 편향성을 가진 존재이며, 인간이 만든 재판제도 역시 불완전한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26-27).

 

인간이 인간의 죄에 대해 평가하고 판단해서 판결을 내리는 과정은 헌 인간의 생사를 가늠하는 막중한 작업이 아닐 수 없습니다. 법리적 해석만으로는 시비를 가릴 수 없는 진퇴양난의 난국에서도 판사는 판결을 통해 유죄여부와 형량을 결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심각한 고뇌의 그늘이 늘 무거운 책임감으로 짓누르는 힘든 나날의 연속이었을 것입니다. “판사의 ()’이란 글자도 ()로 반()을 나눈다는 것이어서 저울과 같은 뜻이라고 하겠다”(183). 이 책은 칼로 정확하게 또는 공정하게 반으로 자르듯 판단하기 어려운 딜레마 상황에서 고뇌하는 한 법조인의 진솔한 인간적 고백과 직면하는 책입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사람과 세상에 대한 따뜻한 사랑도 같이 읽었습니다. 심증은 가는데 물증이 없을 때 증명과 진실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감을 좁히는 마땅한 대안이 없을 때 판사는 다시 깊은 인간적 고뇌에 빠집니다. “사람들은 향기로 기억되고, 그런 향기는 저울로 결코 잴 수 없다. 내가 해온 법의 저울질은 사회적으로 꼭 필요한 것이었지만, 결코 최종 해답도 아니었고, 온전한 판단과는 사뭇 거리가 멀었다”(186). 언제나 자기 안으로 파고들어가 깊은 자아를 만나 반성합니다. 동시에 다시 밖으로 나와 나의 생각과 행동을 사회 전체 구조나 틀과의 관계 속에서 성찰합니다. “일상 속게 파묻혀 있으면 그 의미를 알 수 없고, 일상을 깨고 나올 때에만 일상의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사람이 여행을 떠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128-129). 이런 삶을 습관화시켜온 윤변호사님의 생활은 그 자체가 서릿발 같은 엄정함을 추구함과 동시에 인간에 대한 깊은 배려와 존중으로 촘촘히 씨줄과 날줄로 엮여 있음을 실감합니다.

 

인공지능을 능가하는 인간지성, 실천적 지혜가 답입니다

 

범죄자는 개인차원의 문제라기보다 그런 개인으로 하여금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도록 부추기는 사회적 관계나 구조의 문제입니다. 이러한 인식은 질환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고혈압에 걸리는 원인은 개인차원의 혈관질환이 아니라 그 사람이 고혈압에 걸릴 수밖에 없도록 내몰아부치는 스트레스와 억압적 구조에 있다는 것이 사회역학의 진단입니다. 사회역학은 한 개인의 질환은 개인의 육체적이고 생리적인 문제라기보다 그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과 제도, 시스템과 문화의 문제라고 봅니다. “사회역학은 사회적 관계가 인간의 몸에 질병으로 남긴 상처를 해독하는 학문입니다”(14). 아픔이 길이 되려면을 쓴 김승섭 교수의 주장입니다. 그는 이어서 이런 말을 남깁니다. “물고기 비늘에 바다가 스미는 것처럼 인간의 몸에는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의 시간이 새겨집니다”(22). 물고기가 어떤 바다에 사느냐에 따라 비늘에 생기는 얼룩과 무늬가 달라지듯, 사람이 어떤 사회적 관계와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지에 따라 그 사람의 몸에 새겨지는 스트레스와 질병을 일으키는 흔적이 달라집니다. 저자 역시 사회역학과 비슷한 입장에서 범죄도 결국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한 인간이 노숙자나 범죄자로 전락하는 가장 큰 원인은 개인의 도덕성 결함이라기보다 이러한 모욕이 이루어지는 사회적 구조에 있다. 상습 범죄자는 가해자이기 이전에 속으로 피를 흘리고 있는 피해자인 셈이다”(248). 범죄자로 취급하고 법리를 들이대고 판결을 내리기 전에 피 흘리는 피해자의 입장에서 피고가 될 수밖에 없었던 사회적 관계와 구조를 들여다봐야 합니다. 법률가는 판례와 판단에 따라 판결을 내리는 기술적 숙련공이 아닙니다. 법률가는 무엇보다도 복잡한 인간관계 속에서 부딪치는 가치관의 갈등과 사회적 구조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범죄행위의 인간적 측면을 들여다볼 줄 아는 따뜻한 인간미의 소유자가 먼저 되어야 합니다.

 

기술이 발전하고 인공지능이 인간지능을 대체해도 딜레마 상황에서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이슈를 판단하는 능력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고유한 영역입니다.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경우에 인공지능이 어떤 판단을 하도록 할지가 어려운 문제이다. 사람이 운전을 한다면 스스로 판단할 것이므로 이런 윤리적 문제는 없다. 아무리 고도의 지능을 쌓아도 가치와 의미를 선택하는 도덕적 판단은 인공지능이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이다”(105). 법률가가 도덕적 판단을 생략한 채 판례에 따라 기계적으로 판결을 내린다면 인공지능이 법률적 판단을 내리는 것과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무엇이 옳은지, 선한지, 의미가 있는지에 관하여는 인간만이 직관을 갖고 있다”(107)면 판례에 축적된 수많은 빅데이터를 근간으로 판결하는 인공지능이 여전히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인공지능을 능가하는 인간지성 시대에 올바른 법률가가 갖춰야 할 진정한 경쟁력은 풍부한 법률지식과 더불어 다양한 딜레마 상황을 탈출할 수 있는 혜안과 안목, 그리고 도덕적 판단능력과 지혜입니다. “고통받는 인간을 이해하려는 열린 마음이 법률 지식보다 앞서 법률가에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냉철하게 판단하는 업무를 하는 법률가에게도 이런 마음이 필수적이라면 다른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더욱 필요할 것이다”(152). 저자가 언급하는 법조인의 자세와 태도, 갖추어야 할 자질과 역량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강조하는 실천적 지혜(phronesis, practical wisdom’)에 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딜레마 상황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은 일인지를 파악해서 주어진 상황에서 가장 올바른 선택지를 숙고하고 결정해서 행동으로 옮기는 능력입니다. 저자 역시 인공지능이 할 수 없는 인간의 고유한 능력으로 도덕적 판단력을 꼽고 있습니다.

 

배리 슈워츠와 케니스 샤프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적 지혜를 의사나 변호사 등 전문 직업별로 어떤 점에서 중요한지를 주장하는 어떻게 일에서 만족을 얻는가에 보면 실천적 지혜를 특정한 상황에서 능력 단순한 흑백영역이 아닌 특정한 상황이 낳는 미묘한 차이, 즉 회색지대를 간파하는 능력”(36), 또는 내면으로 공감하고 이해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냉정함객관성을 유지하는 일”(59), 즉 공감하면서도 거리감을 유지해 상황을 편견 없이 공정하게 판단하는 능력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들에 따르면 실천적 지혜를 지니고 있는 진정한 전문가는 의뢰인의 문제를 풀어주는 거리감이 느껴지는 전문가가 아니라, 의뢰인과 함께 협력해 문제를 푸는 해결사”(304)가 돼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실천적 지혜를 갖게 되면 비로소 특정한 환경에서 특정한 대상에게 특정한 시점에 맞추어 올바른 일을 올바로 하는 법을 깨우치는 일”(15)을 수행할 수 있게 됩니다. 저자가 언급하는 판사나 변호사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원고나 또는 의뢰인과 피고가 처한 인간적 딜레마,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사연과 배경에 공감하고 이해하면서도 거리감을 두고 주어진 상황을 객관적으로 이해해서 올바른 판단과 변호를 하기 위해서 실천적 지혜를 갖춰야 합니다. 문제는 이런 실천적 지혜는 지식이나 기술을 가르치고 배울 수 없다는데 있다. 오직 다양한 딜레마 상황에서 시행착오를 경험하면서 판단착오를 줄여나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과거는 다른 사람의 미래입니다

 

그는 도중에 물웅덩이를 피하느라 살짝 옆으로 비켜갔다. 이상한 일이지만, 바로 그 순간까지 나는 건강하고 의식 있는 사람의 목숨을 끊어버린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죄수가 웅덩이를 피하느라 몸을 비키는 것을 보는 순간, 한창 물이 오른 생명의 숨줄을 뚝 끊어버리는 일의 불가사의함을, 말할 수 없는 부당함을 알아본 것이었다. 그는 죽어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우리가 살아 있듯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이었다”(26). 조지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에 나오는 말입니다. 부당한 권력의 힘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무너뜨리는 어떤 행위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 조지 오웰의 주장입니다. 그는 버마 정부의 경찰을 그만두고 진정한 작가로 거듭나기 위해 "억압받는 사람들에게로 내려가 그들 중 하나가 되어 그들의 편에서 폭군들에게 대항하고 싶어"라는 생각으로 스스로 밑바닥 생활을 시작합니다. 그 결과 탄생한 작품이 바로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입니다. 이 책의 끝 부분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언젠가는 그 세계를 더 철저하게 탐구하고 싶다. 우연한 만남이 아닌 허물없는 사이로서 마리오, 패디, 동양아치 빌 같은 사람들을 알고 싶다. 접시닦이, 부랑인, 강변 둑길 노숙자의 영혼 속에는 정말로 무슨 일들이 벌어지는 지를 이해하고 싶다. 현재로서는 가난의 언저리까지 밖에는 보지 못한 것 같다”(284). 가난했던 시절의 아픔을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가난한 사람에게 위로가 될 수 있는 그 어떤 조언도 불가능함을 작가는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저자의 책 역시 힘들고 아픈 사람, 생사기로에서 마지막 희망을 기다리며 불안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과 만나면서 건져 올린 잔잔한 감동적 단상입니다. 그들과 공감하려는 측은지심의 한 극단에는 오늘의 우리를 만들어가는 거대한 시대적 흐름과 역사적 사건과의 연계성을 잃지 않으려는 안간힘이 무게중심으로 버티고 있습니다.

 

아름다움의 향유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은 시야의 확대와 상처의 존재다. 시야의 확대가 따르지 않는 성장은 진정한 성장이 아니다. 확대된 시야 없이는 상처를 심미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거리를 확보할 수 없다. 동시에 아무리 심리적 거리를 유지해도 상처가 없으면, 향유할 대상 자체가 없다. 상처가 없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캔버스, 용기가 없어 망설이다가 끝난 인생에 불과하다”(37). 김영민 교수의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에 나오는 말입니다. 우리는 저마다의 위치에서 고통을 몸으로 견뎌내며 상처받고 살아갑니다. 한 번 일어선 자리와 높이에서 확보한 시야는 내가 겪고 있는 아픔으로 해석하는 관점을 제공해줍니다. 시야를 확대하기 위해서는 내 생각도 틀릴 수 있음을 전제하고 나와 다른 생각과 세계와 자주 만나야 합니다. 지금 여기를 떠나 다른 곳으로 가봐야 하고, 나와 다른 인생을 살아가는 저자들의 책을 읽어야 하며, 다른 전공과 관심을 갖고 있는 낯선 사람과 자주 만나야 합니다. 그런 만남이 아픈 상처를 줄 수 있지만 시야를 확장시키고 인식의 깊이를 심화시킬 수 있는 소중한 디딤돌이 됩니다. “내 과거는 다른 사람의 미래에 도움이 될 거예요”(153). 미국의 여자 유도 선수, 케일러 해리슨의 말입니다. 내가 겪은 사소한 이야기라고 할지라도 그 속에는 에스프레소 같은 진한 삶의 향기가 들어 있는 감동의 서사가 되기도 합니다. 몸소 겪은 체험은 사소한 깨달음일지라도 다른 사람의 미래에 소중한 성장의 씨앗이 됩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은 서로의 씨앗을 깨워 꽃을 피워줄 기회로 가득 차 있는 꽃밭인 셈이다”(143). 사소()한 일상이지만 진지한 성찰의 반복으로 가꾸어나가는 나의 바탕()이 활짝 웃는, 진짜 나로 사는 기쁨()을 낳습니다

"한 인간이 노숙자나 범죄자로 전락하는 가장 큰 원인은 개인의 도덕성 결함이라기보다 이러한 모욕이 이루어지는 사회적 구조에 있다. 상습 범죄자는 가해자이기 이전에 속으로 피를 흘리고 있는 피해자인 셈이다"(248).

"일상 속게 파묻혀 있으면 그 의미를 알 수 없고, 일상을 깨고 나올 때에만 일상의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사람이 여행을 떠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128-129쪽).

"사람들은 향기로 기억되고, 그런 향기는 저울로 결코 잴 수 없다. 내가 해온 ‘법의 저울질’은 사회적으로 꼭 필요한 것이었지만, 결코 최종 해답도 아니었고, 온전한 판단과는 사뭇 거리가 멀었다"(1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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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옳다 - 정혜신의 적정심리학
정혜신 지음 / 해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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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한 세상이다

당신이 옳다를 읽고

 

정혜신(2018). 당신이 옳다. 서울: 해냄.

 

냉정한 의학 기능공에서 치유자로 변신하기까지

 

세상의 책은 두 종류가 있다. 현장에 가지 않고 책상에 앉아서 머리로 쓴 책과 현장에서 부딪치며 몸으로 쓴 책이다. 머리로 쓴 책은 관념적이고 추상적이어서 와닿지 않지만 몸으로 쓴 책은 저자의 치열한 문제의식이 독자의 몸을 헤집고 들어와 감동을 넘어 전율하게 만든다. 노명우 교수가 최근에 김원영의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에 쓴 추천사에도 이와 비슷한 말이 나온다. 이론과 지식으로 쓴 텍스트에는 논리적 엄밀성이 있지만, 머리가 아니라 살갗으로 파고드는 떨림이 없다. 삶을 회피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대면한 후에 쓴 텍스트에는 논리가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무게와 깊이를 담은 진심이 있다. 논리적 글은 두뇌로 쓸 수 있지만 진심이 담긴 글은 삶으로만 쓸 수 있다.” 말 그대로 당신이 옳다는 살갗을 파고든다. 그래서 한 번 읽기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다. 이 책은 읽는 것이 아니라 읽어버린책이며. ‘읽어내는노력이 필요한 게 아니라 그냥 읽고 말았다는 표현이 적절한 책이다. 아니 단숨에 읽어버릴 수밖에 없도록 독자의 심리를 끌어당기는 묘한 블랙홀이 곳곳에 숨어 있다. “공감은 생각과 감정들이 실타래처럼 엉켜서 나도 어쩌지 못하고 있는 그 부위에 미사일처럼 정확하게 꽂히는 치유 나노로봇이다”(138). 저자가 정의한 공감처럼 이 책은 이제껏 잘 못 알고 있었던 공감의 본질과 핵심을 파고들어 진짜 치유가 되기 위해서 기울여야 할 노력이 무엇인지를 명쾌하게 지적해준 치유 나노로봇이다.

 

심리적 참전이 벌어지는 현장에서 몸으로 건져 올린 언어와 저자의 문제의식으로 새롭게 정의한 개념에는 저자의 뜨거운 신념이 담겨 있다. “스타는 화려하게 시든 꽃”(38)이라고 하거나 우울은 질병이 아닌 삶의 보편적인 바탕색”(86)이라고 거침없이 선언하는 저자의 신념은 나뒹구는 현장에서 몸으로 건져 올린 신념의 표현이다. “공감은 상처를 드러낼 수 있게 만들고 제대로 드러난 상처 위에서 녹아드는 연고다. 상처 위에 바로 스민다. 상처 부위를 덮고 있는 겉옷 위에 뿌리는 분무제가 아니라 옷을 젖히고 상처 난 바로 그 부위 맨살에 바르는 약이다”(158). 공감을 관념적 언어로 정의하지 않고 저자 자신이 현장에서 직접 공감해본 체험적 깨달음을 갖고 공감은 연고이자 치료제라는 메타포를 동원해서 정의한다. 공감에 대한 정의에 이렇게 공감해본 적이 없다. 개념에 신념을 추가한 정의(定義)는 세상을 정의(正義)롭게 만든다. 정혜신 치유자가 공감가는 공감에 대해 자기만의 방식으로 정의를 내릴 수 있었던 원동력은 공감 없는 정신과 의사,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냉정한 의학기능공에서 숱한 시행착오 끝에 몸으로 깨달은 느낌을 담아냈기 때문이다. 저자 역시 한 동안 진료실에서 사람을 환자로 대하면서 약물치료를 주로 했던 자격증 있는 의사였음을 고백한다. 자격증은 있지만 과연 내가 사람을 치유할 자격이 있는지에 대한 궁극적인 의문이 들면서 진료실이 아닌 현장에서 환자가 아닌 사람을 만나면서 각성체험을 하게 된 것이다. 각성은 이제까지와는 다른 치유의 길을 걸어가게 만들었다. 그 깨달음의 결과가 바로 집밥같이 따뜻한 온기를 담았으면서도 고통으로 잠 못 이루는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을 위한 실전 무술같은 치유법, 적정 심리학을 개발하게 된 것이다.

 

일상의 회복이나 일상적 교감에 집중하지 않고 전문가적 치유에만 기대는 행위, 그게 일상의 외주화다”(81). ‘일상의 외주화공감의 외주화로 이어지면서 문제는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상에서 내가 없어지기 시작했다. 생각은 학원에 맡겨져 있고 몸은 체육관에 가 있고 병은 의사에게 맡겨져 있다 보니 내 감정을 고스란히 내가 느끼고 다른 사람과 교감할 수 있는 기회도 없어졌다. 문제가 생기면 스스로 극복하려는 노력보다 전문가에게 맡긴다. 하지만 대부분의 전문가는 내 존재에 주목하지 않고 내 아픔에 마음을 포개지 않는 사람”(73)이라서 그 들이 제공하는 어떤 도움도 와 닿지 않는다. 도움이 되는 도움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책상머리에 앉아서 관념적으로 생각하거나 진료실에 앉아서 알량한 지식으로 환자를 치유한다고 착각하는 오판에서 벗어나야 했다. “책상머리나 병원 진료실에서 도출된 이론이 아니다. 숨이 멎고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것 같은 고통의 현장들, 끝없이 이어지는 크고 작은 일상의 상처들 속에서 사람의 속마음을 만나며 그 한복판에서 얻어낸 나의 결론, 나의 경험담, 사례연구집이다. 무술로 치면 품새가 돋보이는 화려한 무술이 아니라 위력이 핵심인 실전무술이다. 이것으로 사람 목숨도 구하고 늪에 빠진 사람을 건져 올리기도 했다”(314). 숨이 멎고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것 같은 고통의 현장들에서 몸으로 체화시킨 실전무술이 바로 저자가 정립한 적정심리학이며 그것의 핵심적인 치유법이 심리적 CPR이다.

 

공감은 봄을 불러오는 일이다

 

심리적 CPR(Cardiopulmonary Resuscitation), 즉 심리적 심폐 소생술은 CPR을 사람의 심리적 고통을 치유하기 위해 저자가 새롭게 조어한 개념이다. “심장 압박을 할 때는 두꺼운 옷을 젖히고 옷에 붙은 액세서리도 다 떼고 정확하게 가슴의 중앙 바로 그 위 맨살에 두 손을 올려놓는다. 심리적 CPR처럼 보이지만 가 아닌 많은 것들을 젖히고 라는 존재 바로 그 위를 강하게 자극하는 것이다”(103). 전두엽을 뒤흔들고 심장에 의미가 꽂히는 이유가 저자가 던지는 한 마디 한 마디가 격전의 현장에서 몸을 통과하며 농축된 감정과 느낌을 언어적으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단어마다 저자의 숨결이 느껴지고 문장마다 아픈 사람의 절규와 아비규환이 생생하게 전해진다. 머리로 정리한 관념적 파편이 산산이 흩어지는 문장을 만나면 참을 수 없는 인식의 가벼움을 느낀다. 오랜 시간 아픈 사람과 뒤엉켜 지내면서 신체적 감각으로 깨달은 저자의 언어에는 삶과 사람에 대한 깊은 고뇌가 담겨 있다. 어느 하나의 문장도 그냥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 밑줄을 치고 호흡을 멈춘 다음 저자가 겪었을 당시의 현장 모습을 추체험해본다. 피와 땀과 눈물의 언어는 그 자체로 감동이다. 진심이 담긴 문장이 심장을 뛰게 만든다. 진심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몸밖에 없다. 몸이 겪은 진심을 머리로 설명할 수 없다. 몸으로 증거하는 수밖에 없다. 이 책은 정신과 의사가 창백한 실험실에서 과학적인 검증을 거쳐 재단해낸 논리적 산물이 아니다. 오히려 이 책은 피눈물로 씻어내기 어려운 아픔의 현장에서 고통 받는 사람과 같이 생활하면서 땀과 눈물의 합작품이다. 체중이 실린 언어에 저항할 수 없는 힘이 실려 독자에게 전달되는 이유다.

 

공감 받으면 마음에 봄이 온다. 강물이 꽁꽁 얼었을 때 얼음을 깨겠다고 망치와 못을 들고 나선다면 어리석다. 망치와 못을 들고 나서는 것은 판단, 평가, 설득 같은 계몽을 하는 일이다. 힘만 들지 온 강의 얼음을 다 깰 수는 없다. 봄이 오면 강물은 저절로 풀린다. 공감은 봄을 불러오는 일이다”(169). 자식을 잃은 부모의 슬픔, 말기 암 선고를 받은 환자의 불안과 공포, 은퇴로 맞닥뜨린 무력감과 짜증, 학교에서 왕따를 당한 아이의 아픔을 공감하기 전에 의학적으로 진단을 내린다. 공감하면 새로운 치유의 길, 얼었던 강물도 녹여 봄이 오게 만들 수 있지만, 봄이 오기 전에 첨단 의학적 진료와 치료가 이루어진다. “우울과 불안을 뇌신경 전달 물질의 불균형이 초래한 우울증 탓으로 돌리는 전문가들을 비정하고 무책임하다고 일갈한다. 대신 이런 증세들은 흔하게 마주하는 삶의 일상적 숙제들이고 서로 도우면서 넘어서야 하는 우리 삶의 고비들”(91)이라고 말한다. 똑 같은 우울증이자만 저마다 느끼는 아픔과 슬픔의 깊이와 넓이는 판이하다.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횡포이자 위협이 아닐 수 없다. 객관성이라는 이름으로 휘두르는 칼날의 몸과 마음에 상처를 만들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는 서구의학의 치명적인 한계와 약점에도 불구하고 내 몸을 의사와 전문가에게 맡겨놓고 치료대상으로 병원에 던져놓는다. 몸에 생긴 질환(disease)이지만 마음으로 느끼는 질병(illness)에 대한 심리적 충격과 아픔은 제각기 다르다. 그럼에도 몸과 맘에 생긴 모든 아픔을 의학계가 과학적으로 분류한 질환으로 일반화시켜 모든 환자를 질환 유형별로 일반화시켜놓고 치료하려고 한다.

 

우울증 진단을 내릴 때 원인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겉으로 드러나는 증상만을 중심으로 하면서, 진단이 확정되면 갑자기 우울증은 생물학적 원인으로 생기는 거라며 약물치료가 전부인 것처럼 말한다(98). 같은 우울증 환자라고 해도 주관적으로 느끼는 심리적 고통의 강도는 다를 텐데 말이다. 아픈 몸을 살다의 저자 아서 프랭크에 따르면 질환(disease)과 질병(illness)의 개념적 차이점을 분명히 구분해야 된다고 한다. 질환은 체온, 혈압, 혈당 수치나 피부상태를 생리학적으로 환원하여 제시하는 의학적인 용어라서 주로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수치로 환산된다. 반면에 질병은 질환을 앓아가면서 환자가 느끼는 공포와 절망, 희망과 낙담, 기쁨과 슬픔처럼 느끼는 주관적 감정이다. 똑같은 질환을 앓고 있어도 그것에 대해 환자가 느끼는 주관적 감정은 천차만별이다. 예를 들어 의학적으로 위암이라는 질환은 한 가지 용어로 지칭할 수 있지만 위암을 앓고 있는 환자의 상태나 병력, 그리고 그것에 반응하는 환자의 자세와 태도에 따라 천차만별의 주관적인 질병을 앓고 있다. 문제는 의사가 환자를 진료할 때 질환으로 구분되는 몇 가지 범주로 나눈 다음 다른 환자도 그 범주에 집어넣어 일반화시켜 효율적으로 관리하려는 데 있다. 의사는 환자를 그 동안 쌓은 전문 지식으로 진단하고 약으로 치료한다. 의사는 환자의 몸이나 표정 등 감정상태의 변화보다 병력을 나타내는 데이터에 근거해서 신체적이고 물리적인 변화를 보고 약을 처방해준다. 심지어 어떤 의사는 환자의 얼굴을 보지 않고 컴퓨터 스크린에 나와 있는 데이터만 처방해준다. 의사는 환자 으로 다가가지 않고 에서 약으로 통제하고 조정하며 관리한다.

 

하지만 똑 같은 병명으로 판정되어 비록 같은 질환의 범주에 포함되었다고 할지라도 그 환자가 느끼는 주관적 질병은 같지 않다. 때문에 질환을 범주로 나누고 일반화시켜 치료하는 과정에는 유용하지만 환자 곁에서 그들이 겪고 있는 주관적 아픔을 돌보는 치유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환자가 동일한 질환에 대해서 느끼는 공포나 두려움, 걱정과 불안감은 다른 환자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다. 나는 나의 병을 객관화하지 못하고 대상화하지 못한다. 그러나 젊은 의사는 기어코 나의 병을 객관화하고 대상화하려고 덤빈다. 아마도 나의 병을 대상화시키지 않으면 의사는 나의 병을 손댈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옷을 치켜 올리고 의사에게 내 맨몸을 맡길 때, 나는 내 병을 남에게 맡겨야 하는 나의 이 속수무책을 슬퍼한다. 나의 병은 나의 개별적 생명현상인 것이다. 나는 젊은 의사에게 이 운명의 개별성을 설명할 길이 없다“(39). 김훈의 바다의 기별에 나오는 말이다. 개별적 생명현상을 이해하는 방법은 그 사람을 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로 취급하지 말고 질병을 겪고 있는 사람으로 대하는 방법이다. 사람을 그 사람의 존재이유로 다가갈 때 그 사람은 존재감을 느끼며 자신의 곁에 있어도 좋다고 허락한다. 많은 전문가가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 으로 다가서지 못하고 에서 서성이다 쫓겨난 이유도 한 사람이 겪고 있는 아픔을 마음으로 공감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공감하려면 가까이 다가가서 몸으로 반응해주어야 한다.

 

에 다가가지 못하고 에서 서성거리는 이유

 

김소연의 한글자 사전에 따르면 “‘보다는 조금 더 가까운. ‘’, 그 사이의 영역. 그러므로 나 자신은 결코 차지할 수 없는 장소이자, 나 이외의 사람만이 차지할 수 있는 장소가 곁”(31)이라고 한다. 그 사람이 나에게 도움이 되는 전문가인지 아닌지를 가늠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에 관한 거리감이라고 한다. ‘에서 으로 다가가려면 머릿속의 지식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더 넓혀놓는다. 심지어 벽을 만들어 접근 자체가 차단되기도 한다. ‘에서 으로 다가가려면 상대방의 고통에 눈길을 포개는 섬세한 뜨거움(12)”이 몸으로 전해져야 한다. 소위 전문가라는 사람이 습득하고 있는 자격증에는 머리로 축적한 지식을 증명할 수 있지만 현장에서 가슴으로 공감한 내력은 증명할 길이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통 받는 사람 옆에서 지켜보거나 위에서 관망한다. 전문가도 고통 받는 사람 으로 오지 못하고 도움이 되지 않는 도움을 에서 주다가 쫓겨난다. “왜 심리치유 전문가일수록 현장에서 실패하는가”(15). 전문가 자격증은 있지만 위기의 현장에 뛰어들어 정작 문제 자체가 무엇인지, 지금 당장 불타는 집에 뛰어들어 불을 끌 수 없는 똑똑한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한결같이 고통 받는 사람 으로 가지 못하고 에서 서성이며 도움이 되지 않는 도움을 주다가 현장에서 도움이 되는 도움을 더 이상 제공하지 못하고 쫓겨난다. 상처로 드러난 결과를 치료하기에 급급하다 오히려 상처를 더 아프게 만드는 전문가는 전문적으로 문외한일 수밖에 없다.

 

내 상처의 내용보다 내 상처에 대한 내 태도와 느낌이 내 존재의 이야기다. 내 상처가 가 아니라 내 상처에 대한 나의 느낌과 태도가 더 라는 말이다”(105). 그런데 전문가는 겉으로 드러난 외상(질환)을 치료하기에 급급한 나머지 그 상처와 함께 어떤 아픔과 슬픔(질병)을 온몸으로 느끼며 살아 왔는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말 못할 사연이 사건과 사고 속에 꽈리를 틀고 잠복하고 있다. 사연에 담긴 아픔은 의학적인 치료대상이 아니라 심리적 돌봄의 대상이다. 그래서 이렇게 묻고 싶다. 자격증이 있는 사람은 과연 자격이 있는가? 자격이 있을지 몰라도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의 아픔을 어루만져주는 인격은 있는가. 자격과 인격에는 쉽게 건널 수 없는 다리가 존재한다. 자격은 있지만 인격이 없는 이유는 공부를 책상에서 머리로 하면서 지식을 쌓았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아픔을 몸으로 체험해보지 않고 책상에서 지식을 축적해서 자격증은 땄지만 격전의 현장에서 뛰어들어 고통을 품어본 적이 없다. 지금까지 자격으로 폼은 잡아보았지만 타자의 아픔을 품어본 적은 없다. 자격증으로 폼 잡는 전문가와 따뜻한 가슴으로 아픔을 품어주는 전문가 사이는 똑 같은 전문가지만 격이 다르다. 고통을 마주하면서 겪은 저자의 언어는 묵직한 체중이 실려 있다. 머리로 조제한 단어가 아니라 몸으로 직조한 개념의 향연이 생생한 체험현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문장 위에서 펼쳐지고 있다.

 

고통을 마주할 때 우리의 언어는 거기서 벼랑처럼 끊어진다. 길을 잃는다. 그 이상의 언어를 알지 못한다...사건이 풀리지 않을 때 현장을 다시 찾는 수사관처럼 내 언어가 끊어진 벼랑으로 돌아가 보자. 현장에 가는 이유는 그곳에 해결의 실마리가 있기 때문이다. 벼랑 끝에 선 사람에게 나는 어떤 말을 해줘야 하는가. 결론적으로 해줄 말이 필요치 않다”(107). 충조평판(충고, 조언, 평가, 판단)하려 들지 말고 그로 하여금 말할 수 있도록 물어봐주는 것이다. 대답이 없어도 온몸으로 같이 공감해주어야 한다. “고통에 진심으로 주목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 그것이 치유의 결정적인 요인이다. 말이 아니라 내 고통을 공감하는 존재가 치유의 핵심이다”(108). 눈길, 숨길로 상대를 이불처럼 감싸주며 상대의 고통에 진심으로 눈을 포개고 들어주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고통은 고통 그 자체도 괴롭지만 그것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이 사람을 미치고 팔짝 뛰게 만든다. 자기가 겪고 있는 것을 제대로 말 할 수 없으니 미칠 수밖에 없고 상대가 제대로 알아주지 않으니 팔짝 뛸 수밖에 없다. 미치고 팔짝 뛰면서 더 말을 쏟아내지만 그때마다 그가 느끼는 것은 더 큰 답답함이다. 도저히 말로 드러낼 수 없기 때문이다(226). 엄기호의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에 나오는 말이다. 내가 직접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처럼 고통을 직접 체험할 수 없지만 고통을 겪으며 겪었던 외로움과 서러움, 말못했던 울분과 분노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그 사람과 함께 감정의 강물을 건널 수는 있다. 그 동안 겪었던 고통(苦痛)은 얼마나 견디기 어려웠던 고통(孤通)이었는지를 진심을 담아 들어주고 눈길을 맞추며 가슴으로 느끼는 공감의 연대를 이룰 때 상처받은 사람은 고통의 나락에서 서서히 현실로 나와 우리 속으로 편입되어 들어온다.

 

공감자가 아니면 전문가도 아니다

 

저자가 말하는 핵심은 “‘가 흐려지면 사람은 반드시 병든다”(39)는 것이다. 내 삶이 나와 멀어질수록 위험한 이유다. 존재감이 가벼워지거나 무력해질 때 사람은 병들기 시작한다. 이 병을 치유해주는 방법은 자기 존재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것이다. “자기 존재가 집중받고 주목받은 사람은 설명할 수 없는 안정감을 확보한다. 그 안정감 속에서야 비로소 사람은 합리적인 사고가 가능해진다”(45). 상대의 존재를 인정해주는 방법은 공감이다. “그런 마음이셨군요. 그러셨군요.” 온 체중을 실어 깊은 마음으로 전해주는 당신이 옳다는 공감이다. “사람은 자기에게 공감해주는 사람에게 반드시 반응한다”(47). 반응(response)하는 사람이 책임(responsibility)지는 사람이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결국 상대방의 미묘한 감정변화에도 반응해주며 나는 네 편에서 생각해주는 것이다. 진정한 생각은 혼자 진공관에서 하는 게 아니라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한나 아렌트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평범한 인간이 악을 저지를 수 있는 근원도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타자가 얼마나 고통을 겪을 것인지를 입장을 바꿔서 생각하지 않는 무사유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그래서 진짜 생각은 뇌세포의 화학적 움직임과 조합으로 발생하는 과학적 추론이라기보다 뜨거운 가슴으로 타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측은지심이다. “생각은 잊지 못하는 마음이자 가슴 두근거리는 용기다“(20). 신영복의 담론에 나오는 말이다. 생각이 마음이고 용기가 되려면 생각은 머리보다 가슴에서 시작해서 가슴으로 끝나야 한다. 그래야 계산을 시작하지 않고 수지타산을 따져 행동의 여부를 판단하지 않는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공감자가 되려면 머리로 작성된 처방전을 제공하거나 자신이 만든 정답을 주기보다 진심으로 물어봐야 한다. “누군가의 고통을 덜어주는 공감자가 되기 위해선 그 마음에 대해 에게 물어야 한다. 돕는 자로서의 견해를 말하거나 주장하기보다 에게 주목하고 그의 마음에 대해 그에게 물어야 한다. 그의 세세한 속마음은 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전문가가 알 것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비로소 그에게 질문을 시작할 수 있다. 그만이 아는 그의 마음에서 혼돈을 끝낼 그만의 길이 나온다. 당사자가 그것을 속속들이 느끼고 만질 수 있을 때까지 그의 손을 놓지 않는 것이 공감자의 일이고 그것이 치유다”(153). 공감자가 되려면 강건너에서 크게 소리쳐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주거나 아니면 위급한 상황에서 탈출할 수 있는 해결책을 제시해서는 안 된다. “상처와 혼돈 속에 있는 사람에게 길 건너에서 전문적이고 일방적인 답을 전해주는 사람은 공감자가 아니다. 공감자가 아니면 전문가도 될 수 없다. 그런 방식으로는 상처 있는 사람을 도울 수 없기 때문이다”(151). 마음을 열지 않고 머리에 설명을 쏟아 부으면 무거운 머리로 고개를 끄덕일 수는 있다. 하지만 오래 가지 못하고 자기방식으로 해결책을 찾아 나서지 않는다. “사람 마음은 외부에서 이식된 답으로는 절대 정돈되지 않는다. 답은 밖에서 오지 않고 언제나 내 안에서 발견돼야 내게 스미고 적용된다. 자기가 처한 상황의 실체, 자기 마음의 실체를 하나하나 또렷이 보고 느끼면서 자기 상황에 대한 심리적 조망권을 확보해야 마음이 정돈되기 시작한다. 온몸, 온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 진짜 아는 일이며 그렇게 알아야만 혼돈에서 벗어날 길이 보인다”(151-152).

 

사람은 옳은 말로 변화되지 않는다

 

삶을 살아내는 자들은 삶을 설명하거나 추상화하지 않는다. 그는 끝없이 짓밟히고 빼앗기는 일상의 현실을 견딜 수 없는 자이고, 그 야만의 현실에 대해 야만의 방법으로 대항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자이다. 그는 건설하는 자라기보다 거부하는 자이고, 거부함으로써 자신의 삶의 정당한 자리를 확보하려는 자이다. 이념이나 추상이 얼씬거리지 못하는 자리에서, 삶의 구체성은 뒤엉켜 들끓고, 힘찬 무질서들로 생동한다”(46). 김훈의 바다의 기별에 나오는 말이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나의 기준으로 계몽하고 훈계하지 말고 진심을 담아 반응해주며 공감해주는 길이 소통의 지름길이다. “공감이란 나와 너 사이에 일어나는 교류지만, 계몽은 너는 없고 나만 있는 상태에서 나오는 일방적인 언어다. 나는 모든 걸 알고 있고 너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들이다. 그래서 계몽과 훈계의 본질은 폭력이다. 마음의 영역에선 그렇다”(294). 우리는 너무나 쉽게 다른 사람의 생각을 내 생각으로 충고, 조언, 평가, 판단한다. 충조평판이 시작되는 순간 소통은 불통으로 바뀌고 상대는 마음의 문을 닫고 문고리가 열리기 않도록 굳게 문을 걸어 잠근다. “누군가의 속마음을 들을 땐 충조평판을 하지 말아야 한다. 충조평판의 다른 말은 바른말이다. 바른 말은 의외로 폭력적이다. 나는 욕설에 찔려 넘어진 사람보다 바른말에 찔려 쓰러진 사람을 과장해서 한 만 배쯤은 더 많이 봤다. 사실이다”(295). 바른 말은 요즘 말로 하면 꼰대가 아랫사람에게 자기 경험과 지식으로 충고하고 조언하는 말이다. “사람은 옳은 말로 인해 도움을 받지 않는다. 자기모순을 안고 씨름하며 그것을 깨닫는 과정에서 이해와 공감을 받는 경험을 한 사람이 갖게 되는 여유와 너그러움, 공감력 그 자체가 스스로를 돕고 결국 자기를 구한다”(239).

 

공감이란 제대로 된 관계와 소통의 다른 이름이다. 공감이란 한 존재의 개별성에 깊이 눈을 포개는 일, 상대방의 마음, 느낌의 차원까지 들어가 그를 만나고 내 마음으로 포개는 일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나도 내 마음, 내 느낌을 꺼내서 그와 함께 나누고 소통하는 일이다”(247). 소통하고 무수한 인간관계를 맺어왔지만 결정적인 한 가지가 빠진 인간관계 위에서 소통을 해왔다, 소통이 된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소통이 되지 못한 이유는 공감 없는 소통이었기 때문이다. 공감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상대방을 깊이 이해할 수 있어야 그 이해를 기반으로 가슴 깊이 공감할 수 있다. 진정한 공감에 이르는 길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그래서 궁금한 점을 진심을 담아 물어봐야 한다. “고름이 가득한 상처를 소독한 바늘로 터뜨리듯이 그때 네 맘은 어땠는데?“라는 엄마의 질문은 슬픔과 분노로 가득 찬 아들의 마음에서 고름을 터뜨리는 질문일 수 있다. 누르고 눌러놓았던 속마음을 쏟아놓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엄마의 마음은 애쓰지 않아도 아들 마음에 스미게 된다”(267). ‘고름을 터뜨리는 질문’, 폐부 깊숙이 와닿은 인두 같은 메시지였다. 질문을 던지고 기다리면 고름이 터지듯 쌓였던 고통의 응어리가 밖으로 튀어나온다.

 

고름을 터뜨리는 질문으로 상대의 비무장지대를 건드리고 온몸으로 들어주며 공감해주면 닫혔던 마음의 길도 열리기 시작한다. 그렇게 되면 공감은 닿을 수 없는 신기루가 아니라 길목마다 흐르는 현실의 옹달샘이 된다”(249). 그 옹달샘에 이르기 위해서 우리는 너무 먼 길을 돌아왔다. 공감은 누구나 노력하면 만날 수 있는 현실의 옹달샘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공감은 온몸을 갈아가며 자기 성찰을 하는 과정”(236)이기도 하다. 언제나 내 마음을 열어놓고 내 생각도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 위에 상대를 한 세상의 우주로 맞이해야 한다. “한 사람의 힘이 그렇게 강력한 것은 한 사람이 한 우주라서 그럴 것이다. 근사한 수식이나 관념적인 언어가 아니라 마음에 관한 신비한 팩트다. 사람은 그 한 사람이라는 존재의 개별성 끝에서 보편성을 획득한다. 그러므로 한 사람은 세상의 전부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한 사람이고 한 세상이다. 그래서 누구든 결정적인 치유자가 될 수 있다”(110). 저자는 치유자는 다정한 전사가 되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공감이 필요한 순간에는 온 체중을 다 싣는 다정한 공감자여야 하지만 공감을 방해하는 사람이나 상황을 마주했을 때는 전사처럼 싸워야 한다”(210). 이런 사람이 바로 다정한 전사. ‘다정한 전사다정따뜻한 가슴(warm heart)’으로 상대를 존중해주는 배려이고 전사차가운 머리(cool head)로 과감하게 행동으로 옮기는 실천이라는 생각이 든다.

 

읽어버렸으니 읽은 대로 쓰고 쓴 대로 혁명을 일으키다

 

 

그들은 읽었습니다. 읽어버린 이상 고쳐 읽지 않으면 안 됩니다. 고쳐 읽은 이상 고쳐 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읽은 것은 굽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쓰기 시작해야 합니다. 반복합니다. 그것이, 그것만이 혁명의 본체입니다”(196). 사사키 아타루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에 나오는 말이다. 이 책은 읽어버린 이상 다시 읽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내 삶의 무대 위에서 교본으로 다시 읽고 읽은 대로 쓰고 있다. 쓴 대로 내 삶으로 옮겨 나부터 공감혁명을 일궈나갈 것이다. 독서는 그냥 책읽기가 아니라 몸으로 읽고 실천하며 나를 바꾸고 주변을 변화시키는 혁명으로 갈 수 밖에 없는 위험한 행위다. 책은 사람으로 하여금 위험한 생각을 잉태하게 만든다. 위험한 생각을 품은 책을 읽은 이상 위험한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위험한 행동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지금부터는 다른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심리치료자나 정신과 의사에게 필요한 공감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모든 관계와 소통 사이에서 반드시 공감에 관한 책이다. 그래서 이 책은 사람이면 누구나 다 읽어야 될 필독서가 아닐 수 없다.

 

냉정히 말해서 지식인이란 고통의 곁에 있는 사람이 아니다. 고통의 곁에 잠시 머무르는 사람이다. 지식인들은 고통의 곁에서 연구하며 그 연구가 끝나면 언어를 회수해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다. 그 언어가 고통의 자리에,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아무리 도움이 된다고 하더라도 지식인의 자리는 고통의 곁이 아니라 자신의 연구실이며 서재이다. 아무리 현장을 누비는 지식인이라고 하더라도 마찬가지다”(290). 엄기호의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에 나오는 말이다. 나는 당신이 옳다를 읽으면서 저자가 온몸으로 길어 올린 고통체험의 교훈이 진료실이나 연구실이 아니라 심리적 참전이 벌어지는 현장에서 나왔음을 여러 번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다시 창백한 진료실로 돌아가지 않고 여전히 심리적 참전이 벌어지는 격전의 현장을 맴돌며 아픔을 치유하는 심리적 CPR을 시행하고 있다. 나는 그 동안 너무 안이하게 연구라는 명목으로 현장에 다가갔지만 도움이 되지 않는 도움을 갖고 일방적인 계몽과 훈계를 해오지 않았는지를 반성하고 성찰해보았다. 고통의 곁으로 다가서지 못하고 고통의 옆에서 관찰한다는 명목으로 관망하고 관전해오지 않았는지 연구자로서의 나 자신의 정체성에 자문해보고 있다. 치열한 싸움으로 익힌 저자의 현장무술에 비하면 여전히 갈 길이 먼 이상적 담론에 불과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장에 다가가야 현실을 만날 수 있고 현실 속에서 진실을 캐낼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몸에 아로 새긴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서로가 서로에게 연인이자 스승이며 도반이자 반려자인 두 사람이 공감하면서 고통의 현장에서 건져 올린 합작품이기에 더욱 아름다운 감동으로 다가온다.

 

비가 바람에게 말했습니다.

너는 밀어붙여 나는 퍼부을 테니.

 

로버스트 프로스트의 쓰러져 있다시의 일부로 에필로그를 대신한다. 한 사람이 비가 되면 또 한 사람은 바람이 되고, 한 사람이 바람이 되면 또 한 사람은 비가 되어 밀어붙이고 퍼부으면서 고난의 동행을 자처하며 만들어낸 아름다운 작품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한 사람을 믿고 밀어붙이고 또 다른 사람은 그 사람을 믿고 퍼붓는 아름다운 관계, 그 속에 공감이라는 강이 흘러 우리 모두 바다로 가는 희망과 용기의 연대, 바다에 이르러 손잡고 하늘로 기상하는 수증기처럼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곳을 꿈꾸는 눈물겨운 공동체가 되기를 꿈꾸어 본다.

"공감은 상처를 드러낼 수 있게 만들고 제대로 드러난 상처 위에서 녹아드는 연고다. 상처 위에 바로 스민다. 상처 부위를 덮고 있는 겉옷 위에 뿌리는 분무제가 아니라 옷을 젖히고 상처 난 바로 그 부위 맨살에 바르는 약이다"(1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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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점을 디자인하라 - 없는 것인가, 못 본 것인가?, 개념 확장판
박용후 지음 / 쌤앤파커스 / 2018년 10월
평점 :
품절


지식생태학자 유영만이 관점 디자이너 박용후를 찾아간 까닭은?

관점을 디자인하라 개념 확장판 리뷰

 

전대미문의 관점 디자이너, 자기만의 브랜딩(branding)으로 세상에 랜딩(landing)하다

 

나는 니체는 나체다에서 이름 석 자로 버틸 수 있는 힘을 나력(裸力, Naked Strength)이라고 했다. 세상을 움직이는 명품 브랜드, 이름만 들어봐도 그 브랜드의 의미와 가치가 선명한 이미지로 부각된다. 애플과 구글, 샤넬과 루이뷔통은 브랜드 이름만으로 세상을 움직이는 명품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유영만 한양대학교 교수한양대학교 교수를 빼면 유영만이름 세 글자만 남는다. 세상 사람들은 한양대학교 교수를 빼고도 유영만이라는 이름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내가 생각하기에는 미지수다. 한 사람에 대한 이미지는 그 사람이 지니고 있는 독특한 색깔이 결정한다. 오랫동안 고민 끝에 대학교수보다는 지식생태학자라는 퍼스널 브랜딩으로 나만의 색깔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브랜딩(branding)은 자기만의 색깔을 찾아 나만의 색다름을 드러내기 위해 네이밍(naming)하는 과정이다. “네이밍을 전문용어로 콜링(calling)”(20)이라고 한다. 콜링은 우리말로 번역하면 소명이다. 자신의 존재이유를 깨닫고 신성한 목적이 이끄는 대로 나를 다시 포지셔닝 할 때 소명은 다시 사명으로 불타오르기 시작한다. “당신은 뭐 하는 사람입니까?”라는 질문에 세계적인 향수 개발자 크리스토프 로다미엘은 나는 공간에 부유하는 공기 입자에 감정을 입혀 재조각하는 일을 넘어서 향기 음계로 향기를 작곡하는 향기 작곡가”(203)로 업의 본질을 재정의한다. ‘향기 개발자라는 네이밍과 향가 작곡가라는 네이밍에는 헤아릴 수 없는 소명의 차이가 존재하며, 소명이 달라지면 이를 구현하기 위한 사명감도 남다르게 불타오르기 시작한다. 향기 작곡가라는 브랜드는 이미 자기만의 색다름으로 자신의 아이덴터티(identity)를 성공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관점 디자이너를 검색해보면 박용후라는 이름이 나온다. ‘관점 디자이너는 박용후이고 박용후는 관점 디자이너로 브랜딩되어 있다. 전세계에 관점 디자이너는 박용후 혼자 뿐이듯 지식생태학자도 전세계에 유영만 한 사람 뿐이다. 이것이 바로 관점 디자이너 박용후 대표가 제안하는 ‘one of them’이 아니라 ‘only one’이다. 홍보 전문가나 마케팅 전문가는 많지만 관점 디자이너는 오직 한 사람뿐이고 대학교수나 작가는 많지만, ‘지식생태학자역시 오직 한 사람뿐이다. ‘관점 디자이너지식생태학자는 세상이 정한 기준과 틀을 따라가기보다 자기만의 생각과 관점으로 세상을 이끌어가겠다는 자기 정체성 선언이자 나만의 색다름으로 남다름을 능가하겠다는 자기다운 브랜딩 출발이다. “인상적인 방법으로 자기 자신의 차별성을 부각시키는 것만이 현대를 살아갈 수 있는 열쇠가 된다”(129). 그렇게 나는 오래전부터 관점 디자이너 박용후 대표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배워왔다. 틀에 박힌 생각이 고정관념에 갇힌 타성에서 벗어나 당연함을 부정하고 일상에서 비상하는 상상력의 날개를 만들어내는 관점 디자이너 박용후 대표는 언제나 뒤통수를 내리치는 색다른 발상의 은하수 같았다. 그는 이미 자기만의 아이덴터티를 갖고 부르는 게 값인 상황을 만들며 범접할 수 없는 자신만의 광채”(131)를 만들어가고 있다. 내가 그를 찾아간 까닭이다.

 

나만의 관점, 나만의 정의에서 비롯된다!

 

관점을 디자인하라가 세상에 나온 것은 2013년이었다. 나는 그 때 이 책을 읽고 한 잡지에 이런 내용으로 리뷰를 쓴 적이 있다. “관점을 디자인하라는 수많은 경쟁자 중에서 Best One이 되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 아니라 수많은 경쟁자 중에서 Only One이 되는 비결, 그래서 경쟁하지 않고도 유일함과 독특함으로 세상의 변화를 주도하는 관점 디자이너(Perspective Designer)가 되는 저자만의 숨은 노하우를 고스란히 배울 수 있는 Only One Book이다”(참고 2013년판 북리뷰 https://kecologist.blog.me/70173471025). 5년 동안 바뀐 세상이 모습도 중요하지만 바뀐 세상의 모습을 이전과 다르게 보는 관점이 더 중요하다. 저자는 5년 전의 책을 전면 개정하면서 개념 확장판으로 다시 출간했다. 특히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나만의 정의를 가지라는 부분을 강조하면서 없는 것이 아니라 못 본 것은 당연함을 부정하고 질문을 던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만의 정의를 내릴 때 다른 사람이 지니고 있지 못한 나만의 관점으로 세상이 보인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마케팅을 고객의 관점을 바꾸어 서비스나 제품을 달리 보이게 하는 것”(18), 창의성을 당연함에 던지는 왜?”(31), 신제품을 고객이 새롭다고 느끼는 제품”(231), 한 방향으로 일방적 진행성만을 갖는 진보와 끊임없이 변화하는 진화를 구분한다. 배려가 배어 있는 진심이 없는 막해팅과 배려와 배어 있으면서 진심으로 제품과 서비스의 가치를 알리는 마케팅을 구분한다. 그리고 소셜은 인간이다”(146)로 정의하면서 나만의 관점으로 세상 사람들이 사용하는 단어를 재정의한다. 이런 모든 노력은 관점 디자이너가 같은 것을 다르게보는 능력을 기르기 위한 과정이다.

 

관점은 관심을 갖고 관찰해서 생기는 관능(官能)이다. 관능은 생물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기관의 기능이다. 그런데 언제부터 그 기능은 틀에 박힌 방식대로 기능적으로만 돌아간다. 관능이 그저 그런 기능으로 전락하지 않고 세상 사람을 유혹하는 매혹적인 재능으로 재탄생하기 위해서는 관심을 유발하는 질문으로 사람들을 새로운 관문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그때 관점은 자기만의 색깔로 세상의 경계하는 마음을 무너뜨리는 관능으로 승화, 발전된다. 관점 디자이너의 관능은 기능을 넘어서며 재능을 능가하고 예능을 초월한다. 세상을 다르게 보는 방법 중의 하나는 본질에 다가서는 질문을 던져 핵심을 파고들고 남이 내린 수많은 개념을 나의 관점으로 다시 정의를 내려 보는 것이다. 정의를 내리지 않으면 누군가 내린 정의 속에 갇혀 살 수밖에 없다. “인생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단어들을 적어보라. 그리고 그 단어들에 대해 자신만의 정의를 나름대로 만들어보라. 그러다 보면 지금까지 나 자신의 삶을 나의 관점, 나의 생각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내린 정의에 따라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107-108).

 

관점 디자이너는 흐름을 따라가는 사람이 아니라 흐름을 바꾸는 사람

 

세상에는 두 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다. “세상의 흐름이 만들어낸 관성대로 살아가는 사람과 성공을 위한 자신만의 관성을 만드는 사람으로 나뉜다”(88). 세상의 관성대로 흘러가는 사람과 나만의 관성을 만들어 새로운 흐름을 만드는 사람이다. 이는 다시 말해서 세상이 바뀌고 난 다음에 변화를 아는 사람과 바뀌는 과정에서 그것을 감각적으로 느끼는 사람”(86)이다. 전자는 세상의 흐름대로 살아가는 사람이고 후자는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사람이다. 물고기도 죽은 물고기는 물의 흐름대로 떠내려가지만 살아 있는 물고기는 급류를 거슬러 올라간다. 강풍에 맞서 자신의 목적지로 날아가는 새는 살아 있는 새고 강풍에 휩쓸려 날리는 새는 죽은 새다. 흐름을 따라가는 사람은 관성과 습관대로 살아가는 사람이고 흐름을 읽어내고 변화를 감지하는 사람은 습관의 코드를 읽어내서 세상의 습관을 새롭게 만들어가는 사람이다.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 위대한 성취를 이룬 모든 사람은 습관대로 살지 않고 습관을 창조한 사람들이다.

 

관점 디자이너는 습관의 물길이 향하는 곳에 존재하는 답을 찾아내는 사람이다. “이기는 비즈니스를 하기 위해 필요한 것 중의 하나는 나와 관련된 상품이나 서비스가 사람들의 습관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185). 세상은 다시 두 가지 사람으로 재분류된다. 습관적으로 살아가는 사람과 습관을 바꾸거나 재창조하는 사람이다. 관점 디자이너가 이 책에서 말하고 싶은 점은 다음 질문 중에서 후자의 질문에 대답하는 사람이다. “흐름을 느끼지 못한 채 그 흐름에 그냥 휩쓸려갈 것인가, 멈추어 서서 흐름을 만들어내 성공할 것인가?”(89) 흐름에 휩쓸려가는 사람은 습관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고 흐름을 만들어내는 사람은 습관을 바꾸거나 재창조하는 사람이다. “습관의 관성에 따라가는 사람, 습관의 관성이 어느 방향으로 흐르는지 아는 사람, 습관이 가진 관성의 방향을 바꾸어 새로운 흐름으로 만드는 사람 가운데 당신은 어디에 속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189).

 

기상천외한 관점도 인지상정을 보는 다른 관점일 뿐이다

 

기상천외(奇想天外)한 관점도 모두 평범한 사람들의 생각, 인지상정(人之常情)에서 비롯된다. 인지상정 없는 기상천외는 허무맹랑(虛無孟浪)한 생각일 뿐이다. “기상천외한 창조성은 당연한 것에서 비롯된다. 기발하다는 것은 인지상정을 바닥에 깔고 가는 당연함을 소스로 한다”(167). 그래서 기상천외는 인지상정을 보는 다른 관점이자 확장판”(169)이다. 결국 관점 디자이너는 인지상정에서 기상천외함을 끄집어 내 발상전환을 유도해내는 전대미문의 디자이너다. 인지상정에서 기상천외한 생각을 끄집어내는 관점 디자이너는 언제나 고객과의 밀접한 연관성(relevance)을 강조하고 쓸모가 있으며(useful) 재미있는(fun) 제품과 서비스를 개발하려는 노력을 강조한다. 이것을 약자로 RUF라고 한다. RUF가 있는 상품과 서비스는 또 다른 특징, SED를 갖고 있다. SEDsimple, easy, different의 약자다. 즉 고객은 단순하면서 사용하기 쉽지만 뭔가 차별적인 가치가 있는 제품과 서비스를 선호한다는 것이다. 이런 통찰은 결국 고객이 무엇을 원하는 그들이 원하는 본질과 핵심과 가치를 바라보는 색다른 관점에서 비롯된다.

 

관점 디자이너는 경쟁자를 바라보는 관점도 특이하다. 경쟁자를 인지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집중의 대상으로 바라보지 말라는 것이다. “경쟁자에 집중할 때 고객은 경쟁자에게 떠난다”(219). 집중의 대상은 경쟁자가 아니라 고객이 원하는 본질과 가치다. “경쟁사를 이기는 힘은 고객을 만족시킴으로써 나오는 것이지 경쟁사를 압도하는 것에서 나오지 않는다”(220). 경쟁사와 경쟁하다 경쟁력을 잃고 고객도 잃어버리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자는 것이 관점 디자이너의 색다른 관점이다. 이 책은 시종일관 관점이 바뀌면 내가 바뀌고 내가 꿈꾸는 세상이 바뀐다고 강조한다. “독자들이여, 남들은 당연히 이렇다고 생각할 일을 저렇게도 생각해봐라. 바라보는 관점을 바꿔라. 그러면 여러분은 놀라운 미래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251). 회사의 주인은 한 사람이지만 회사에서 일을 하는 주인공은 누구나 될 수 있다. 회사를 물질적으로 소유한 주인(owner)는 누구나 될 수 없지만 내 일을 하는 주인공은 누구나 될 수 있다. 관점을 바꾸면 주인공으로 내 인생의 주인이 될 수 있다. “그러니 젊은이들이여,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겠는가? 지금은 별것 아니지만 미래에 너무 당연해질 것을 찾아 헤매라. 관점을 바꾸면 그 작업은 가능하다. 관점을 바꾸기 위해서는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질문하고 많이 관찰해야 한다”(252).

 

나는 이 채을 읽고 관점 디자이너가 다른 디자이너와 다른 차이를 다섯 가지로 정리해보았다. 관점 디자이너를 차별화시키는 다섯 가지는 오리무중했던 세상, 오색찬란하게 빛나게 만드는 5가지 비밀 병기라고 볼 수 있다.

 

오감(五感)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디자이너의 5()

 

관점 디자이너는 세상을 앉아서 관망(觀望)’하지 않고 애정으로 관찰(觀察)’한다.

 

관점 디자이너는 세상이 흘러가는 모습을 앉아서 관망하거나 관람하지 않는다. 오히려 관점 디자이너는 평범한 세상, 익숙한 세상에도 질문을 던져 낯설게 생각하면서 깊이 관찰한다. 관점 디자이너의 색다른 통찰은 모두 이런 관찰에서 비롯된 체험적 깨달음이다. 그들은 사소한 일상도 색다른 관점으로 관찰해서 비상하는 상상력을 얻는다. 세상은 관망하며 전망하는 사람보다 관찰해서 통찰력을 얻은 사람이 주도해나간다.

 

관점 디자이너는 관성(慣性)’에 따르지 않고 자신의 주관으로 관철(貫徹)’시킨다.

 

관점 디자이너가 가장 경계하는 점은 남들이 만든 관성대로 습관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관점 디자이너에게 관행이나 관습은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반복되어야 하는 관성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관성이 습관적으로 만들어온 고정관념이나 타성을 깨부수고(break) 새로 만들(make) 때 새로운 관점이 생긴다고 믿는다. 관점 디자이너는 관성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습관코드를 읽어내서 자신의 주관을 관철시키는 사람이다.

 

관점 디자이너는 관례(慣例)’대로 살지 않고 관통(貫通)’하는 원리를 찾아낸다.

 

관점 디자이너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 관례에 없다는 말이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면 관례에 없다는 이유로 무조건 반대나 저항을 표시하는 사람들이다. 관례대로 행동하는 사람, 판례대로 판결을 내리는 판사치고 창의적인 사람은 없다. 세상에 이로운 가치를 추가하는 사람은 원래대로 실행되어온 관례에 없던 새로운 사례를 추가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이 세상을 관통하는 원리에 비추어 전례없는 새로운 가치를 제안한다. 관점 디자이너는 관례를 파기하고 세상을 다르게 움직일 관통하는 원리나 패턴을 찾아내는 사람이다.

 

관점 디자이너는 타인의 관념(觀念)’에 머무르지 않고 자기만의 관심(關心)’으로 살아간다.

 

세상에는 남의 관념대로 살아가는 사람과 자신의 신념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전자는 남들의 좋은 생각에 빠져 살면서 자기 생각을 키우려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이다. 이에 반해 후자는 세상의 아무리 좋은 생각도 나의 신념으로 재무장해서 자기만의 독창적인 관심으로 세상을 재해석해내는 사람이다. 똑같은 현상도 누가 어떤 관심을 갖고 해석하는 방향과 방식에 따라 전혀 다르게 보인다. 관점 디자이너에게 관심은 언제나 심금을 울리는 관점을 출발점이다.

 

관점 디자이너는 관리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자기만의 관록(貫祿)’으로 차별화시킨다.

 

관점 디자이너는 매뉴얼을 싫어한다. 매너있게 새로운 일을 시작했던 사람도 시간이 지나면서 매뉴얼을 참고하기 시작한다. 매뉴얼의 친구는 매너리즘이다. 매너가 매너리즘으로 바뀌는 순간 세상은 틀에 박힌 마침표로 얼룩진다. 관점 디자이너는 틀에 갇힌 사고방식대로 관리하는 스타일을 거부하고 자신의 주관으로 쌓아온 관록으로 밀고 나간다. 경지에 이른 사람만이 지니는 관록의 흔적을 세상 사람들은 기록하기 시작한다.

 

월요일 아침에 출근할 때 심장이 떨리지 않고 다리가 떨리는 사람, 내 이야기를 하는 시간보다 남의 이야기를 하는 시간이 많아지는 사람, 미지의 세계로 도전을 하기보다 현실에 안주해서 안락함을 즐기는 사람, 호기심의 물음표가 없어지고 마침표가 많아지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내 삶을 다르게 살고 싶게 만드는 묘한 마력을 지니고 있다. 관점을 디자인하라는 평범한 일상에서도 비상하는 상상력의 날개를 달아줄 것이다. 나 역시 이 책을 쓴 박용후 대표에게 아직도 세상을 바라보는 색다른 관점으로 금시초문의 생각을 잉태하고 있다. 남들과 다른 수준을 넘어서 자기만의 색다름으로 전대미문의 길을 걸어가고 싶은 사람들에게 이 책은 인생 교과서를 넘어 중독되어야 할 필독서가 아닐 수 없다.

"독자들이여, 남들은 당연히 이렇다고 생각할 일을 저렇게도 생각해봐라. 바라보는 관점을 바꿔라. 그러면 여러분은 놀라운 미래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251쪽)

"그러니 젊은이들이여,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겠는가? 지금은 별것 아니지만 미래에 너무 당연해질 것을 찾아 헤매라. 관점을 바꾸면 그 작업은 가능하다. 관점을 바꾸기 위해서는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질문하고 많이 관찰해야 한다"(2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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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리더라는 브랜드 - 리더를 최고 브랜드로 만들 비밀 전략
허은아 지음 / 21세기북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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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라는 브랜드》: 리더를 최고 브랜드로 만들 비밀 전략

《좋은 기업을 넘어 훌륭한 기업으로》 책을 쓴 짐 콜린스에 따르면 대부분의 기업은 그저 그런 '훌륭한(good)' 기업이지만 어떤 기업은 '위대한(great)' 기업이라는 것이다. 훌륭한 기업을 이끌어가는 리더는 지금 당장 수익창출을 위해 현안처리에 급급한 리더다. 반면에 위대한 기업을 이끌어가는 리더는 겉으로 보기에는 수줍어하지만 자신이 추구하는 일에 대해서는 엄청난 집중과 몰입을 통해 세상을 위해 보람과 가치를 창출하는 리더다. 

허은아 박사가 이미지 전략가로서 그 동안의 생생한 경험과 체험적 통찰력으로 녹여낸 《리더라는 브랜드》에서도 비슷한 맥락에서 두 가지 리더를 구분하고 있다. 즉 세상에는 두 가지 리더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냥 리더’와 ‘브랜드가 된 리더’다. ‘그냥 리더’는 고생 끝에 승진해서 리더 자리에 올랐지만 수많은 리더 중의 한 사람일 뿐이다. 때가 되면 언제 자리를 내주어야 될지 모르는 불안하지만 훌륭한 리더다. 반대로 ‘브랜드가 된 리더’는 자기만의 아이덴티티로 브랜드 의미를 구축해서 자기다움을 드러내며 세상의 브랜드가 된 위대한 리더다.  

내가 보기에 짐 콜린스가 이야기하는 ‘훌륭한 리더’는 ‘그냥 리더’에 속하고, ‘위대한 리더’는 ‘브랜드가 된 리더’에 해당된다. 그냥 리더는 주어진 일을 잘하는 효율적인 방법에 매몰된 나머지 자기만이 해낼 수 있는 독창적인 색다름을 모르고 자리에 목숨을 거는 리더다. 당연히 자신만의 브랜드는 안중에도 없다. 하지만 브랜드가 된 리더는 자기만의 정체성, 독창적인 색다름으로 일을 하는 의미를 추구하면서 누구도 흉내 내기 어려운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한 리더다. 그냥 리더가 많은 조직은 지금 당장 밥 먹고 살기 위한 사업에 목숨을 걸지만 브랜드가 된 리더는 회사가 추구하는 CI(Corporate Identity)와 자신이 지향하는 BI(Brand Identity)를 매칭시켜 우리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와 사회를 위해 보람과 가치를 창출하기 위해 가슴뛰는 삶을 살아간다.

문제는 리더를 키우는 방법과 교육은 많지만 브랜드가 된 리더를 양성하는 방법과 교육에는 아직 별다른 관심이 없다는 점이다. 구글의 리더와 삼성의 리더, 애플의 리더와 LG의 리더는 똑같은 리더지만 리더가 어떤 조직과 회사에서 리더십을 발휘하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리더라는 브랜드가 탄생된다. 그런데 우리 기업은 회사가 만드는 제품과 서비스 브랜드에는 관심을 갖지만 해당 회사의 미래를 책임지는 리더라는 브랜드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진정한 리더, 허은아 박사가 책에서 말하는 리더는 리더라는 브랜드를 갖고 회사가 추구하는 브랜드 철학을 온몸으로 구현하면서 자기다운 정체성을 확고부동하게 구축해나가는 리더다. 따라서 브랜드가 된 리더는 평범한 리더십 교육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냥 리더를 브랜드가 있는 리더로 변신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바로 그 비밀의 문으로 들어가는 열쇠가 허은아 박사의 《리더라는 브랜드》에 고스란히 숨어 있다.

리더의 성패여부는 리더라는 브랜드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다. 미국 대선과정에 직접 참가해서 현장성을 살리면서 분석한 힐러리와 클린턴의 대결도 결국 힐러리 대선 후보가 추구하는 리더라는 브랜드 이미지와 트럼프 대선 후보가 추구하는 브랜드 이미지의 대결이었다. 두 사람의 이미지는 두 사람이 소속된 정당의 이미지와 무관하지 않다. 민주당 대선 후보였던 힐러리 클린턴과 공화당 대선 후보였던 도널드 트럼프의 브랜드 이미지 대결은 트럼프의 트라이엄프(triumph)로 끝났다.

리더는 자기다움으로 승부수를 던져야 브랜드로 탄생한다. 리더가 자기다움으로 승부하지 않고 누군가를 벤치마킹해서 따라잡기 전략이나 모방을 통해서는 자기만의 독특한 칼라를 드러낼 수 없다. 〈색계(色戒)〉라는 영화의 핵심은 ‘색(色)’으로 ‘계(戒)’를 무너뜨리는 전략이다. 세상의 모든 경계(警戒)하는 마음은 자기 특유의 색으로 유혹하면 무너진다. 리더라는 브랜드 역시 자기다운 색다름으로 남다름을 창조한 리더의 유혹전략이다. 《유혹의 기술》이라는 책을 쓴 로버트 그린에 따르면 세상은 유혹천국이다. 세상을 움직이는 사람은 논리적으로 의미를 설명해서 골때리게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심장을 공략해서 의미를 심장에 꽂아 의미심장하게 만드는 사람이다. 세상을 이끌어가는 사람은 결국 마음을 움직여 감동시키는 리더다. 리더의 업의 본질은 마음을 움직여 감동시킨 다음 행동하게 만드는 사람이다.

이런 점에서 힐러리 클린턴은 논리적으로 설명해서 의미를 이해시키려는 이성적 리더였다면 트럼프는 감성적으로 설득해서 의미를 심장에 꽂아 감동시켰던 감성적 리더였다. 결국 미국 대선의 승리는 국민의 입장에서 듣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고급 지식을 활용해서 논리적으로 설명했던 힐러리보다 누구나 알아듣기 쉽게 청중의 입장에서 설득될 수 있는 의미로 감동시킨 트럼프의 트라이엄프로 끝났다. 리더는 결국 구성원들의 마음을 훔치는 마음 사냥꾼이다. 세상을 지배하는 사람은 머리를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 심장을 뛰게 만드는 마음 도둑이다. 리더라는 브랜드를 추구하는 사람은 논리적으로 치밀하기도 하지만 감성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뛰어난 설득의 달인들이다. 설명하면 이해하지만 설득하면 감동받는다. 이해한 사람은 행동하지 않는 경우가 많지만 감동받은 사람은 행동할 확률이 더 높다. 브랜드를 가진 리더는 설명해서 이해시키는 사람이라기보다 설득해서 감동시키는 사람이다.

아리스토텔레스도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강조했듯이 인간적 신뢰감을 의미하는 에토스가 60%의 설득력을 지니고 감성적 설득력을 말하는 파토스가 30%, 나머지 10%는 논리적 설명력을 의미하는 로고스가 담당한다. 미국을 바꿀 수 있다는 에토스가 있을 것이라는 강한 믿음, 그리고 저돌적인 추진력을 보여주었던 트럼프는 일반인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어려운 말로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보다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파토스, 즉 감성적 설득력으로 미국 국민들의 지지를 얻기 시작했다는 분석이 바로 허은아 박사가 현지 참관 후 내린 결론이다. 반면에 힐러리는 자라온 배경과 학력에 비추어 볼 때 논리적 설명력은 뛰어났을지 모르지만 밑바닥 인생을 살아보지 않았을 것 같다는 외모와 생각과 행동, 그리고 언어 구사력에서 힘든 인생을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공감대를 형성하는데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공감이나 긍휼감은 내가 타자처럼 직접 체험해보지 않고서는 가질 수 없는 능력이다. 리더라는 브랜드를 추구하는 리더일수록 불특정 다수, 특히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자기 맡은 분야를 묵묵히 해내는 사람들을 향한 따뜻한 가슴과 공감 능력이 필요하다.

《리더라는 브랜드》에는 왜 트럼프가 초기 열세에도 불구하고 힐러리가 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보도한 대부분의 미국과 전 세계 언론의 예측을 뒤집고 전세를 역전시켰는지를 리더라는 브랜드에 비추어 치밀하게 분석하고 그 비결을 제시하고 있다. 이어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리더십 스타일을 ABC, 즉 외모(appearance), 행동(behavior), 소통(communication) 측면에서 분석함으로써 남북한 최고 통치자가 어떤 브랜드 이미지를 추구하는지를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한 사람의 리더는 자신이 하는 말과 행동은 물론 보이지 않는 가운데 보여주는 일거수일투족을 통해 자기다움을 드러내려고 한다. 허은아 박사에 따르면 브랜드를 갖고 있는 리더일수록 이런 모든 측면을 사전에 기획, 연습, 습관화시켜 대중들에게 일관된 메시지와 이미지를 심어줌으로써 리더 특유의 브랜드를 만들어나간다는 것이다. 결국 리더라는 브랜드는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진정한 이미지 메이킹은 이미지를 만들지 않는 것”(85쪽)이라는 저자의 주장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말이라고 생각한다.

진짜 브랜드를 가진 리더는 꼰대라기보다 멘토이며 왼손과 오른 손 외에 언제나 겸손으로 무장한 사람이다. 사르트르가 쓴 《구토》에 보면 “40대가 되면 그들은 작은 집착이나 몇몇 개의 속담을 경험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그들은 자동판매기가 되기 시작한다. 왼쪽 주입기에 2수를 넣으면 은종이에 싸인 일화가 나온다. 오른쪽 주입기에 2수를 넣으면 물렁물렁한 캐러멜처럼 이에 달라붙는 듯한 귀중한 충고가 나온다”(131쪽)는 문장이 나온다. 자신의 과거 경험으로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의견을 일방적으로 평가하려는 자세나 남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자기 이야기만 일방적으로 하는 사람은 절대로 리더가 될 수 없다. 언제나 자세를 낮추고 모든 사람과 소통하면서 배우려는 겸손한 자세를 잃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에게 사람들은 조언을 구하기 위해 몰려든다. 그런 사람이 바로 허은아 박사가 이야기하는 멘토이자 리더라는 브랭드를 만들기 위해 분투노력하는 사람이다.

허은아 박사에 따르면 자기다움으로 무장한 리더는 자기만의 색깔을 지니고 있지만 언제나 자신 이외의 모든 사람을 스승으로 생각하고 열린 마음으로 배우려고 노력한다고 한다. 그들은 언제나 상호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공감하려고 노력하며 인간적 믿음으로 신뢰의 네트워크를 만들어나간다. “브랜드는 내가 만들지만, 그 브랜드에 대한 이미지는 타인이 결정한다”(139쪽). 리더라는 브랜드를 가진 사람은 리더다운 사람이다. 자기다움으로 자기답게 살아가는 리더다. 반면에 그저 그런 리더는 자기보다 뛰어난 리더를 벤치마킹하면서 언제나 남다른 리더십을 발휘하려고 노력하다 자기만의 색깔을 잃어버린 리더다. 그들은 언제나 리더다운 생각과 행동을 보여주기보다 리더‘스러운’ 생각과 행동을 보여준다. ‘~답다’는 자기다움을 지칭하지만 ‘~스럽다’는 이류들이 일류를 따라하다 자기만의 색깔을 잃어버리고 남들처럼 살려고 노력하는 모습이다. 리더라는 브랜드는 ‘~스럽다’가 아니라 ‘~답다’를 추구하는 리더다.

리더가 만들어가는 이미지는 리더를 따르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면서 미지의 세계로 이끌어가는 상상력을 자극한다. 팀원이 리더를 따르는 이유는 저 사람을 따라가면 왠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들기 때문이다. 이때 리더는 불확실한 세계, 불안한 세상, 그리고 불편한 삶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함께 꿈을 꾸면서 미지의 세계로 묵묵히 걸어가는 이유는 리더가 꿈꾸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강한 믿음과 동경 때문이다. 브랜드가 된 리더는 그래서 세상을 리드하는 코드를 만들어 많은 사람들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힘이 되는 인간관계를 지속적으로 만들어 나가는 데 전력투구한다. 허은아 박사의 체험적 깨달음에 따르면 브랜드를 추구하는 리더는 지위보다 선약을 소중하게 생각하면서 신뢰를 만들어 간다고 한다. 하지만 그냥 리더는 선약보다 지위를 선택해서 자리에 욕심을 낸다. 진짜 리더는 자리에 목숨을 걸지 않고 의미에 목숨을 건다.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는 의미와 가치가 우리들의 심장을 뛰게 만들지 않는가.

각계각층의 리더를 만나 PI(Personal Identity) 컨설팅을 해오고 있는 이미지 전략가 허은아 박사는 이 책을 통해서 최고의 브랜드가 되고 싶은 리더로서의 핵심 이미지와 자기다움으로 자신이 몸담고 있는 조직의 브랜드 가치를 격상시킬 수 있을지를 전략적으로 제시한다. CEO라는 리더는 한 사람을 지칭하는 개인차원의 리더를 넘어선다. CEO라는 리더의 브랜드는 한 회사의 브랜드를 대변할 뿐만 아니라 그 회사가 제공하는 제품과 서비스의 브랜드를 이끌어가는 상징적 자본이다. 결국 《리더라는 브랜드》라는 책을 통해서 허은아 박사가 주장하는 리더라는 브랜드는 교육팀이 주도하는 리더십 교육을 통해서 길러지지 않는다. 오히려 리더라는 브랜드는 우선 내가 누구인지, 어떤 가치관과 철학을 지향하며 나만의 색다름이 무엇인지, 내가 정말 좋아하고 신나게 생각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성찰하는 가운데 시작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리더라는 브랜드는 리더 개인의 외로운 노력으로 탄생되지 않는다. 리더라는 브랜드는 리더가 몸담고 있는 조직이 지향하는 철학과 가치관과의 일관성과 연계성 속에서 자란다. 리더라는 브랜드는 한 개인이 지향하는 미래의 이미지와 리더가 몸담고 있는 조직의 바람직한 발전방향과 전략, 그리고 그 시대가 요구하는 바람직한 리더상의 합작품이라고 생각한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1》에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p.11)는 문장이 나온다. 톨스토이의 위 문장을 《총균쇠》를 쓴 제레드 다이아몬드는 다음과 같이 번안해서 적용하고 있다. “가축화할 수 있는 동물은 모두 엇비슷하고 가축화할 수 없는 동물은 가축화할 수 없는 이유가 제각각 다르다”(p.234). 마찬가지 맥락에서 “브랜드를 갖춘 리더는 모두 엇비슷하지만 브랜드가 되지 못한 그저 그런 리더는 그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 리더라는 브랜드는 TOP(Time, Occasion, Place)에 맞는 드레스 코드, 언행, 그리고 자세와 태도, 그 속에서 지속적으로 키워온 자기다움의 합작품이다. 그럴 때 리더는 TOP Leader라는 브랜드를 얻을 수 있다. 리더 중의 리더라는 브랜드를 얻은 리더는 그 이유가 엇비슷하지만 리더라는 브랜드를 얻지 못한 그저 그런 리더는 그 이유가 핑계가 너무나 많다. 그저 그런 리더가 아니라 리더라는 브랜드를 만들어가는 리더는 진공관 속에서 탄생되지 않는다. 모든 리더십(leadership)은 리더에게 영향을 미치는 직간접적인 인간관계 즉, 릴레이션십(relationship)이 만든다. 리더는 혼자만의 고독한 시간 속에서 결단을 내려야 하는 외로운 사람이다. 하지만 리더의 모든 행동은 리더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과 제도 및 시스템, 그리고 시대적 환경에 따라 영향을 주고받는다. 리더라는 브랜드를 만들어나가기 위해서는 리더 개인은 물론 리더가 몸담고 있는 조직이 추구하는 미지의 이미지와 전략적으로 연계될 필요가 있다.

《리더라는 브랜드》는 바로 아직 일반인들에게는 낯설지만 이미 리더라는 브랜드를 추구하는 각계각층의 리더들에게는 절체절명의 과제가 아닐 수 없는 숙제이자 삶의 축제를 풀어가는 데필요한 비밀의 열쇠를 품고 있다. 자기만의 색다른 브랜드 이미지를 꿈꾸는 사람은 물론 세상의 브랜드가 되고 싶은 모든 조직의 리더들에게 이 책은 시금석이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알려주는 등대이자 나침반같은 역할을 하는 책이 아닐 수 없다. 리더라는 브랜드도 앉아서 말로만 한다고 이루어는 꿈이 아니다. 불언실행 지행합일(不言實行 知行合一)을 주창했던 공자처럼 말로만 하지 않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행동으로 옮길 때 비로소 눈앞에 꿈꾸는 이미지가 현실로 나타날 수 있다. 그런 전문가 중의 이미지 전략가 허은아 박사는 황무지를 외롭게 걸어온 개척자이자 선구자가 아닐 수 없다. 내가 이 책을 읽고 감동받은 이유이자 이 책의 추천사를 쓴 유일한 이유다.

세상의 모든 브랜드는 《리더라는 브랜드》가 만든다. 그런데 우리는 브랜드에는 관심이 있어도 브랜드를 만드는 《리더라는 브랜드》에는 관심이 없다. 《리더라는 브랜드》는 리더 고유의 독창적인 색다름으로 나다움을 창조함으로써 미지의 세계로 리드하는 리더의 이미지를 브랜드로 어떻게 만들 것인지를 전략적으로 접근한 국내 최초의 저술이다. ‘이미지 전략가’답게 리더의 칼라와 스타일과 브랜드는 결국 하나의 이미지로 통합할 수 있음을 저자 특유의 체험적 통찰력으로 실감나게 보여준다. 기존 리더십과 색다른 브랜드를 만들어가는 품격 있는 리더의 비밀을 알고 싶다면 이 책은 그 열쇠가 되어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 역시 일독(一讀)하다 중독되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 지식생태학자 유영만, 한양대학교 교수, 《독서의 발견》 저자의 추천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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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놓고 살았다 사랑을 놓고 살았다
고두현 지음 / 쌤앤파커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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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낳았다가 사람을 잃었던 시인들의 사랑열전

시를 놓고 살았다. 사람을 놓고 살았다를 읽고

 

앞만 보고 달리는 사람에게 보이는 것은

목표나 목적지다.

목표를 달성하면 성취감을 느낄 것이라는 생각,

목적지에 도달하면 행복할 것이라는 가정(假定)

행복한 가정(家庭)마저 파괴하는 능률복음과

속도지상주의가 낳은 병폐의 장본인이다.

 

나도 그렇게 앞만 보고 달리다

피곤함의 누적이 졸음운전을 불러오면서

순간적으로 죽음의 일보직전까지 갔던 교통사고를 경험하고

병원에서 고두현 시인의 시집을 읽었다.

 

늦게 온 소포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를 읽으면서

남해출신 고두현 시인의 시적 감수성과 상상력으로 녹여낸

시의 세계에 빠진 적이 있었다.

그리고 교통사고 후에 깨달은 교훈으로

고두현 시인은 곡선에 관한 시를 쓰고

나는 산문을 써서 운문과 산문을 융합,

곡선으로 승부하라는 에세이집도 같이 출간한 적이 있다.

 

고두현 시인과 나의 삶은

여러 가지 점에서 곡선이다.

공고를 졸업하고 저마다의 파란만장함을 겪으며

우여곡절(迂餘曲折)’이라는 절에도 자주 들렸다.

고 시인은 삶과 시가 모두 시적이고 곡선적이다.

 

고시인은 무진기행 카페에 들려

통키타를 치는 모습을 보고

기타의 몸체에서 잘록한 여인의 허리를 연상하고,

풍만하게 이어지는 엉덩이의 곡선을 상상하며,

달빛에 엎드린 그대를 끌어들인다.

구름 같은 음악을 들으며 달무리 진 젖빛을

달큰하게 시적으로 표현하는 상상력은

고 시인만이 지닌 특권이 아닐 수 없다.

 

고두현 시인은 서해대교를 건너

만리포를 가다가도

부드러운 노을이 산등성이를 어루만지며

천천히 익어가는 풍경을 보면서

바알갛게 젖물리고

옷벗는 것(, 만리포 사랑)“을 보는 시인이다.

그에게 세상은

모두 관능으로 물들은 예능의 천국이다.

 

많은 시간이 흐른 다음

몇 년 전에 사하라 사막 마라톤과

제주도 100Km 마라톤에 도전하면서

느낀 점 한 가지,

1등하는 사람에게는 사막의 적막한 사유와

제주도의 아름다운 풍광을 볼 수 있는 여유가 없다는 사실,

그들에 오로지 목표는 일등으로 결승선을 통과하는 것,

그것이 그들이 달성하고 싶은 목표추구 욕망이었다.

 

1등한 덕분에 성취감을 맛보았지만

1등 했기 때문에 모래사막이 사유의 사막임을 잊었고

제주도의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할 시간을 갖지 못했다.

나처럼 뒤에서 달리는 사람에게는

달리기로 일등하기보다

달리면서 사막과 제주도의 풍광을 감상하는 데 주안점이 있다.

 

멈출 때 마다 나는 듣네라는

미국 시인 랄프 왈도 애머슨의

명구를 필사하다가 느낀 깨달음으로 시작하는

고두현 시인의 시를 놓고 살았다. 사랑을 놓고 살았다

사랑할 시간을 따로 뗴어놓지 않고

앞만 보고 달리다 시를 놓고 살아가는 사람,

그리고 사랑을 놓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울리는 한 편의 경종이자 각성제다.

 

시인은 시적이다.

삶도 시적이고 시를 통해 표현하는 문장도 시적이다.

평범한 사람은 사막에 가서 모래를 보지만

시인은 사막에 가서 모래와 모래 사이를 본다.

이문재 시인의 사막이라는 시에 보면

사막에는/모래보다/모래와 모래 사이가 더 많다는 표현이 나온다.

 

시인은 익숙한 장면을 낯설게 보고

당연함에 물음표를 던져 시비를 걸고

물론 그런 현상에 색다른 논리로 다시 보게 만든다.

 

시인들은 바로 그 순간을 섬세하게 포착하고

명징한 언어의 불꽃으로 바꾸는 사람이다.

그 속에 우리가 하고자 했던 말이 응축돼 있다.

흥겨운 감성의 물굽이나

가슴 아린 비애의 뿌리까지 그 속에 들어 있다.

우리가 시를 읽고 감동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6).

 

마음먹은 대로 풀리지 않는 괴로움,

계획대로 돌아가지 않는 속 터짐,

내 맘처럼 생각해주지 않는 답답함,

당장 내일이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

한없이 추락할 수 있다는 두려움,

금방이라도 땅이 꺼지고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절망감,

지금 이대로 사랑이 끝나갈 거 같은 안타까움,

이 사람이 아니고서는 그 어떤 사람도 사랑할 수 없는 간절함,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으면서도

사랑에 대한 애정과 열정과 격정으로

격동기를 보내는 시인들의 사랑사건은

세상에서 가장 앓음다운사건이다.

 

시 한편은 시를 쓴 시인의 격정적인 삶의 단면이자

사랑을 갈구하다 애절함을 몸으로 기록하며

좌절한 비애의 한 페이지며,

이미 끝난 사랑의 뒤안길에서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해낸

애잔함의 흔적이자 얼룩이다.

 

시 한편에는 책 한권으로 말할 수 없는

애틋한 사연과 절박한 심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시 한 편은 그래서 시인의 삶이다.

 

고두현 시인의 시를 놓고 살았다. 사랑을 놓고 살았다

이룰 수 없지만 사랑으로 가능성에 도전하는 사람들에게,

사랑으로 좌절하고 절망적인 경험을 한 사람들에게

사랑의 다양한 진면목을 시인의 삶을 통해서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시인들의 사랑 고백서다.

 

아일랜드의 국민시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가

어느 날 갑자기 마음을 송두리째 흔들면서 나타난

모드 곤과 이룰 수 없는 사랑을 꿈꾸다 삶의 비의를 느낀 사연,

 

573통의 지극한 사랑이 담긴 편지를 주고받다

여섯 살 연하의 무명시인 로버트 브라우닝과 결혼하기까지

사랑이 보여줄 수 있는 위대함을 몸소 보여준 엘리자베스 브라우닝

불편한 몸으로 시를 쓰고 있는 한 여인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면서

로버트 브라우닝이 쓴 연애편지는 끝내 내 것이 될 수 없는

대상을 향한 달콤한 밀어를 빙자한 절규이자

온전히 이해받을 수 없는 헛소리이며,

펄펄 끓는 내 욕망으로 진동하는 메아리이다“(170).

이화경(2017)사랑하고 쓰고 파괴하다에 나오는 말이다.

 

내 심장을 막아주소서,

그러면 나의 뇌가 고통칠 것입니다.

내 뇌에 불을 지르면, 나는 당신을

피에 실어 나르겠습니다로 끝나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내 눈의 빛을 꺼주소서

릴케가 스물 두 살 때 열 네 살 연상의 여인,

루 살로메를 열렬히 살랑하면서 바친 연시다.

격정적인 사랑으로 나눈 것도 잠시

결국 각자 다른 사랑의 길로 접어든 사연을 읽노라면

차라리 사랑은 운명의 장난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인은 자신이 원하는 사랑이 마음대로 되지 않을수록

시심은 더 깊어지고 삶에 대한 관조는 깊은 성찰로 이어지고

삶은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파격적인 절정으로 가다가

어느 순간 돌연 세상과 이별하면서

깊은 여운과 애잔한 비의(悲意)를 남긴다.

 

비극은 남의 것을 대신 체험할 수 없고

단지 자기 것밖에 체험할 수 없는

고독한 1인칭의 서술이라는 특질을 가지며

바로 이러한 특질이 그 극적 성격을 강화하는 한편

종내에는 새로운 '' '아름다움' 을 마련해주는 것입니다(283).”

신영복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나오는 말이다.

 

저마다의 시인들이 겪은 비극적 사랑은

고독한 1인칭 서술이기에

더욱이 시적 표현의 함축성으로

시인이 겪은 상황적 맥락을 읽어내지 못하면

더욱더 이해하기 어려운 그 시인만의 1인칭 서술이다.

 

고두현 시인의 시를 놓고 살았다. 사랑을 놓고 살았다

시인들이 겪은 저마다의 애절한 사랑의 뒤안길에서

건져 올린 사랑열전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유일한 사랑이지만

영원히 지속될 수 없는 안타까운 사랑을 맛보았고

금방이라고 세상을 뜨겁게 달굴 것처럼 격정적인 사랑이었지만

오래 가지 못하고 끝나는 비운의 사랑을 목격했다.

 

때로는 금지된 사랑이기에 불륜을 무릅쓰고

위험한 사랑을 나눴던

시인들의 절박한 사연을 들을 수 있었으며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을

온몸을 다해 할 수밖에 없었던

시인들의 긴장과 비애를 다 이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고두현 시인의 이 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꽃피던 시절을

상상으로 이끈 시인들의 사랑열전을 시적으로 소개하면서

세계는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들 때문에 전진한다

괴테의 말처럼 사랑을 반대하는 사람들 때문에

더 격렬하게 불붙었던 뜨거운 사랑의 뒤안길을 열어주었다.

 

시인들의 처절한 드라마 같은 사랑을

읽으면서 전두엽에는 천둥과 번개가 치고

심장에 갑자기 북을 두드리듯

요동과 파동 치는 순간을 비켜갈 수 없었다.

 

갑자기 숨이 막히고 호흡이 가빠지다가

멈출 줄 모르고 오로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몸을 던지며 자신의 전부를 걸었던

그들의 전투적인 사랑을 추체험하고 반추하기에는

내 경험이 부실했고 언어가 부족했다.

 

하지만 고두현 시인은 사랑의 당사자 입장에서

마지막까지 시적 상상력으로 뜨거운 사랑의 격정을

온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며 때로는 냉정하게

때로는 열정적으로 시인들의 사랑시에 담긴

저마다의 사연을 시적으로 담아냈다.

 

책을 읽다가 온몸이 싸늘해져

어떤 불덩이로도 녹일 수 없을 때,

그것이 바로 시다.

머리끝이 곤두서면 그것이 바로 시다.

나는 오직 그런 방법으로 시를 본다(182).”

고두현 시인이 인용한 에밀리 디킨슨의 시에 대한 정의다.

 

이 책을 읽다가 중간 중간에

어떤 불덩이로도 녹일 수 없는 사랑을 목격했고

머리끝이 곤두서면서 극도의 긴장과 비애를

느낄 수밖에 없었던 시인들의 절망적인 사랑을

시에 담긴 시인의 격정과 애정과 온정으로 읽어낼 수 있었다.

 

비극은 우리들이 무심히 흘려버리고 있는

일상생활이 얼마나 치열한 갈등과 복잡한 얼개를

그 내부에 감추고 있는가를 깨닫게 할 뿐 아니라

때로는 우리를 객석으로부터 무대의 뒤편 분장실로

인도함으로써 전혀 새로운 인식평면(認識平面)을 열어줍니다(283).”

신영복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나오는 말이다.

 

결국 사랑에 실패하면서 겪은 시인들의 비극은

시인들이 일상생활에서 쉽게 보여줄 수 없는

복잡한 삶의 얼개를 이해할 수 있는 인식의 지평을 여는

매개체이자 촉진제가 아닐 수 없다.

 

사랑의 백미는 고두현 시인이 쓴

참 예쁜 발에 고스란이 드러나 있다.

 

정신 맑던 시절

한 번도 제대로 뻗어보지 못한 두 다리

가지런하게 펴고 무슨 꿈꾸시는지

담요 위에 얌전하게 놓인 두 발

옛집 마당 분꽃보다 더

희고 곱네, 병실이 환해지네.“

 

이 시를 쓰고 스스로 해설하는 대목에서는

우리는 모두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정신 맑은 시절에는 한 번도 제대로 뻗어보지 못한 두 다리,

평생 가난 속에서 혹 사람 도리 못할까

가슴 졸이며 헤쳐 온 구비길,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어머니는

행여 애비 없는 자식 소리 듣지 말라고

각별히 당부하셨다.

그리고는 발바닥이 쩍쩍 갈라지는 길을

묵묵히 걸어오셨다“(249).

 

어머니에 대한 시인의 사랑을

그 어떤 표현보다도 눈물겹게 시적으로 표현한 시인다움에

우리는 시를 통해 이렇게 가슴 저미는

앓음다운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시를 놓고 살다가 고두현 시인의

시를 놓고 살았다. 사랑을 놓고 살았다를 읽으며

시를 놓고 살았던 삶은 결국

사람에 대한 사랑을 놓고 살아온

헛된 삶을 살아온 것이 아닌지를 깊이 반성하게 되었다.

 

삶이란

문명의 깃털로 된 침대를 빠져나와

날카로운 부싯돌로 섞인 화강암을

발밑에 혼자 느껴보는

고요하고도 꿈같은

야생의 여행“(185)이다.

 

나는 오늘부터 그 야생의 여행을 떠나기 위해

놓았던 시를 읽고 식었던 사랑을 뜨겁게 달구는

격정적인 삶을 살아야겠다는 다짐과 각오를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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